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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연합|]] (개별 합류) |
국민중심당 | |
한자 명칭 | <colbgcolor=#fff,#1f2023>國民中心黨 |
영문 명칭 | People First Party(PFP) |
창당일 | 2006년 1월 17일 |
해산일 | 2008년 2월 12일 (자유선진당에 흡수 합당) |
해산 전 대표 | 심대평 / 초선(17대) |
해산 전 원내대표 | 김낙성 / 초선(17대) |
중앙당사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67 (여의도동) |
의석 수 | 4석 / 300석 해산 직전 |
당 색 | 분홍색 (#E852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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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6년부터 2년간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정당. 통칭은 '국중당'(국민중심당) 혹은 '중심당'.
충청남도지사 출신 심대평을 중심으로 한 정당으로, 충청도 지역을 기반으로 했던 지역 정당이었다. 이념적 성향은 보수주의라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충청지역주의다. 따라서 충청권 보수정당의 하나였다.
2. 상세
심대평은 원래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1995년 이래로 충남지사 3선을 하였으며, (자민련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당세가 급격히 약화하고 당의 맹주인 김종필마저 정계에서 은퇴를 하게 되자 실질적인 중심인물로 거듭나게 된다. 문제는 그가 충남지사로서의 임기가 2006년에 끝난다는 것이었고[1], 또한 원외 인사였기에 실질적인 당 내 세력은 약하다는 것이었으며, 이는 자민련 중앙당과의 괴리감을 불러오게 되었다. 더군다나 당세의 급격한 약화로 인해 심대평이나 기존 자민련 기반 정치인 상당수는 새로운 간판을 내걸어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이것이 가시화한 것이 2005년 3월 8일, 심대평의 자민련 탈당 선언이었다. 탈당 직후 심대평은 이른바 충청신당, 중부권신당을 모색하며 새로운 정당 결성을 준비했고, 200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는 마침 오시덕 열린우리당 의원의 의석 상실로 인해 재보궐 선거구가 된 충남 공주/연기 지역구에 작년 총선 때 낙선한 자민련 출신 정진석을 사실상 공천시킨다. 물론 심대평의 신당은 아직 창당 전이어서 실제로는 무소속 후보였지만, 심대평의 간접적 화력지원을 등에 업어 정진석은 손쉽게 당선되었다.[2] 당시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내세운 후보들은 쌍으로 10%도 득표하지 못했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감을 얻은 심대평은 같은 해 10월, 공식적으로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정진석에 이어 당시 경북 문경시·예천군 지역구의 무소속 의원인 신국환[3]을 영입하여 의석 2개를 확보한 상태에서 충청 내 자민련 기반을 순식간에 흡수, 11월 4일에는 자민련 당 대표 김학원과 전격적으로 양당합당, 그와 함께 사실상 자민련을 흡수합당하기로 합의한다. 이에 따라 자민련 당 대표 김학원을 제외한 이인제, 류근찬, 김낙성 의원이 선도탈당하여 국민중심당에 합류한다. 하지만 12월에 김학원이 합의를 파기함에 따라 국민중심당은 의석을 겨우 3개만 불리는 데 그친 것은 물론 자민련도 흡수하지 못한다.[4]
2006년 들어서는 열린우리당의 염홍철 대전광역시장 후보 전략공천에 반발하여 탈당한 열린우리당 권선택 의원을 영입하여 의석 수를 6석까지 불렸다. 그러나 원래 권선택을 대전시장 후보로 영입하려 했으나 권선택이 최종적으로 시장 후보를 포기함[5]에 따라 시장 선거는 결국 다른 후보를 내야 했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총 9명의 광역단체장 후보를 냈으나 말 그대로 처참하게 전멸당했다. 다른 지역들이야 뭐 생색내기로 공천했다고 치더라도[6] 심대평의 후임자를 뽑는 충남지사 선거에서도 이명수 전 부지사를 공천했다가[7] 25.54%로 1위 한나라당 이완구 후보에 20% 이상의 격차로 참패했다. 대전시장 후보도 10%선이고, 충청북도지사는 3%, 강원도지사는 2%.(...) 기초단체장도 오직 충청남도에서만 7곳을 당선시키는 데 그쳤다. 그나마 시장은 정진석의 지역구가 있는 곳이기도 한 공주시장 이준원, 역시 이인제의 지역구가 있는 곳이기도 한 논산시장 임성규, 계룡시장 최홍묵 3명 뿐이고, 나머지는 다 군 지역이었다. 충남에서조차 천안시, 아산시 같은 지역거점도시권에선 외면받은 것이다. 그나마 아예 당선자 자체를 내지 못한 군소정당 충청의미래당보단 선전하긴 했다.[8]
2007년 들어서도 상황은 반전되지 않았다. 2007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는 심대평 대표가 대전 서구 을에 출마해서 국회의원으로 당선[9]되면서 이로서 의석은 7석으로 늘었으나, 신국환 공동대표가 느닷없이 탈당하여 중도개혁통합신당으로 향하며 도로 6석. 또한 거의 동시기에 이인제도 대권을 노리고 민주당으로 이적하여 5석으로 또 쪼그라들었다.
사실상 당세가 기운 상황에서 맞이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심대평이 원내정당이 후보를 내지 않을 수 없다는 자존심으로 스스로 후보등록을 했으나, 이회창이 전격적으로 출마를 선언하자 후보직을 사퇴하고 당 차원에서 이회창을 지지한다. 이에 반발하여 정진석 원내대표가 대선을 단 5일 남기고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며 탈당하고 한나라당으로 옮기면서 4석으로 또 수가 줄었다.[10] 이후 한나라당의 친이 vs 친박의 내홍 속에 친박 곽성문 의원과 김병호 前 의원, 민주당의 反이인제 세력 등이 탈당하여 이회창 캠프에 합류하지만, 공식적으로 국민중심당에 입당하지 않고 이후 자유선진당 창당 때에야 뒤늦게 합류한다.[11]
17대 대선 이후 국민중심당은 이회창과 연대하여 해산, 자유선진당으로 이어진다.
이후 심대평 대표는 자유선진당 대표를 맡으나[12] 세종특별자치시와 충청권 총리 떡밥이 불거지자 그 과정에서 불화가 생겼고, 2009년 8월 말에 심 대표는 자유선진당에서 나와 국민중심연합을 만들었다.[13]
다만 2011년 하반기에 다시 자유선진당에 복당하였다. 19대 총선에서는 공주시-연기군에서 분할 신설된 세종시에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후보로 나온 이해찬 전 총리에게 압도적으로 패하며 무패신화가 마무리되어 정치 여정을 완료했다.
3. 상징
3.1. 당가
눈부신 햇살이 온 세상 아름답게 물들이면 희망찬 새 시대가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언제나 나라와 겨레 위해 뜨거운 동지애로 굳게 뭉치세 국민이 중심이라 소리 높 외치세 바로 듣고 잘 섬기는 국민중심당 아침 해 힘차게 떠올라 온 누리 밝히면 새 시대 새 역사를 우리가 만든다 우리는 언제나 나라와 겨레 위해 뜨거운 동지애로 굳게 뭉치세 국민이 중심이라 소리 높여 외치세 바로 듣고 잘 섬기는 국민중심당 |
3.2. 당색
당색으로는 주로 분홍색을 사용했다. 유독 심대평이 세운 정당은 분홍색을 주로 사용했는데, 자유선진당의 당색은 파란색이었지만 거기에 분홍색 글씨/스카프 등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후 국민중심연합도 분홍색을 사용했으며, 더 나아가 실질적인 후신정당인 미래통합당도 분홍색을 사용하기도 했다.[14]4. 지도부
4.1. 당 대표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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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원내대표
원내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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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대 선거 결과
5.1. 전국동시지방선거
연도 | 선거명 | 광역단체장 (비율) | 기초단체장 (비율) | 광역의원 (비율) | 기초의원 (비율) |
2006년 | 4회 | 0 / 16 (0%) | 7 / 230 (3.0%) | 15 / 824 (2%) | 67 / 2,888 (2.3%) |
5.2. 재보궐선거
연도 | 국회의원 | 광역단체장 | 기초단체장 | 광역의원 | 기초의원 |
2006년 7월 | 0 / 4 | ||||
2006년 10월 | 0 / 2 | 0 / 4 | 0 / 1 | 0 / 2 | |
2007년 4월 | 1 / 3 | 0 / 6 | 0 / 6 | 2 / 38 | |
2007년 12월 | 1 / 13 | 0 / 12 | 0 / 25 |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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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정부 이후 |
[1] 민선 1기 시절부터 충남지사를 내리 3선을 했기 때문에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는 출마할 수 없었다. 알다시피 기초자치단체장과 광역자치단체장은 3선 연임 제한이라는 규정이 있어서 한 지역에서의 3연속 임기를 끝으로 더 이상은 같은 지역에 출마할 수가 없다.[2] 다만 정진석은 아버지 정석모의 지역구와 조직을 이어받았으며, 대를 이어 공주시에서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지낼 정도로 지역기반도 강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3] 당시엔 무소속이었지만 원 소속은 자민련이었다. 15대 총선, 98년 재보궐, 16대 총선에서는 3연속 낙선했으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17대 총선에서 당선된 것.[4] 이후 자민련에 홀로 남아서 자민련을 꿋꿋하게 지켜오던 김학원 역시 2006년 봄, 자민련을 스스로 해산하고 한나라당에 들어갔고, 그렇게 마지막 희망이었던 김학원마저 잃은 자민련은 김학원의 한나라당행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5] 사실 권선택 입장에선 무모하게 의원직을 내던지고 대전시장에 도전하느니 다음 기회를 노리는 쪽이 더 나았다.[6] 예를 들어 서울특별시장 선거 TV 토론에 나온 임웅균은 성악가 출신이었다.[7] 이 사람은 자민련 지도부(김학원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자민련에서 출당기자회견을 했으나 막상 출당된 상황은 아니었고, 결국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고 아산시 재보궐선거에 나갔지만, 이중당적 의혹에 결국 출마하지 못했다.[8] 물론 이 정당은 이름과 달리 충청권에 기반과 조직, 인물 등이 모두 없었고, 또한 오랜 충청도민들조차도 이런 정당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도 심히 약했다.[9] 전임자 구논회 작고. 해당 지역구 보궐선거는 열린우리당이 후보를 내지 않았다.[10] 정진석은 그 대가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충남 공주/연기 공천 신청에서 배제되었지만, 다행히 한나라당 비례대표 상위순번으로 공천되어 당선되었다. 공주/연기 지역구는 심대평이 자유선진당으로 출마했기에 지역구 공천으로 선거에 나섰으면 영락없이 낙선했을 것이다. 이후 정진석은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으로 2010년에 입각한다.[11] 김병호 의원은 이미 2007년에 의원직을 상실한 상태였다.[12] 총재가 별도로 있었다. 이회창 의원이 총재를 맡았다.[13] 동시에 같이 연합해서 교섭단체를 맡은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대표도 의원직을 잃어서 20석에서 2석이 이탈한 자유선진당은 원내교섭단체의 지위를 잃었다.[14] 다만 이 쪽은 심대평이 정계은퇴를 한 이후에 바꾼 것이었으므로 논외.[15] 탈당 후 민주당 입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