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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20:48:34

장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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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377a><colcolor=#fff>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경호실장
대한민국 제13대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張世東 | Chang Se-dong
파일:장세동 안기부장.jpg
출생 1936년 9월 27일 ([age(1936-09-27)]세)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 용정리 상유마을[1]
(現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용정리[2])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 퍼스티지
본관 인동 장씨 상장군계[3]
남촌(南村)
재임기간 제5대 대통령경호실장
1981년 7월 11일 ~ 1985년 2월 19일
제13대 국가안전기획부장
1985년 2월 19일 ~ 1987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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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377a><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장정국, 어머니 한대방
형제자매 3남 5녀 중 차남
형 장세태, 남동생 장세용, 누이 5명
배우자 지경자
자녀 슬하 2남
학력 서울창신국민학교 (전학)
서울돈암국민학교 (졸업)
광희중학교 (졸업)
성동공업고등학교 (건축과 / 졸업)
육군공병학교 (졸업)
육군기갑학교 (졸업)
육군포병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경력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
제3공수특전여단
제5대 대통령경호실장 (전두환 정부)
제13대 국가안전기획부장 (전두환 정부)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16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60년 ~ 1984년
최종 계급 중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대통령경호실장[4]
참전 베트남 전쟁 }}}}}}}}}

1. 개요2. 약력3. 생애
3.1. 초년기3.2. 광복 이후3.3. 군인 시절3.4. 대통령경호실장 시절3.5. 국가안전기획부장 시절3.6. 노태우 정부 시절3.7. 수감 및 복권3.8. 말년
4. 여담5. 대중매체에서6. 소속 정당7. 선거 이력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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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대통령경호실장, 제13대 국가안전기획부장.

전두환 정부 중반기 ~ 최후의 실질적인 2인자[5]로 그전 박정희 정부의 인사로 대입하면 그 권세가 이후락 + 차지철이라 할 수 있다.

2. 약력

3. 생애

3.1. 초년기

1936년 9월 27일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現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용정리 상유마을에서 아버지 장정국 (1913 ~ ?)[6]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한대방(韓大方) (1911. 12. 14 ~ ?)[7] 사이의 3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떠도는 말에 장세동의 본적이 경상북도 구미시이며 그의 아버지는 대구광역시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주장에 대한 근거도 없을 뿐더러 장세동의 14대조 장걸(張杰)로부터 그 이하 직계 선조들의 묘소가 모두 그의 고향인 용정리 상유마을과 그 인근에 있기 때문에[8] 떠도는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또한 경상도 인동도호부성주목 등지에 세거하던 윗대 선조들의 생몰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세거지를 떠나 고흥군 용정리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세동의 13대조 장현윤(張顯允)의 6촌 형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생몰년대가 1554년~1637년임을 감안하면, 못해도 임진왜란 후에는 고흥군에 정착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겠다.[9]

장세동이 4살 되던 해, 아버지가 있던 경기도 경성부로 가족 전체가 이사하여 신설정(현 동대문구 신설동)에 정착하였다. 그의 아버지 장정국은 8.15 광복서울성북경찰서 순경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곧 그만두고 대한토건협회에서 근무하였는데, 집안 형편은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한다. 신설동에서 살면서 당시 집 근처에 있던 서울창신국민학교에 입학하여 훗날 육군사관학교 16기 동기생이 되는 이종찬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

3.2. 광복 이후

1945년 광복이 되자 3학년이던 그의 가족들은 동대문구 돈암정(현 돈암동)으로 이사하였고, 학교 또한 돈암국민학교로 전학하여 1949년 졸업하였다. 국민학교 졸업 후에는 엔지니어가 되려는 꿈을 안고 성동공업중학교 기계과에 진학했는데, 중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6.25 전쟁이 터졌다. 당시 전쟁 발발 하루 전인 24일에 부친의 수술로 인해 미처 피난을 하지 못했던 그의 가족들은, 8월 말에 식량을 구하러 집을 나간 아버지가 행방불명되는 비극을 겪었고, 이에 9.28 서울 수복 때까지 조선인민군 치하에서 3개월을 지냈다.

9.28 수복 후에는 2대 독자인 아들을 찾으러 상경한 조부 장채상(張彩相, 1891 ~ ?)[10]손에 이끌려 경상남도 부산시로 내려갔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고향 전라남도 고흥군으로 돌아갔다. 그는 고향 마을 인근 신양리(현 도덕면 신양리)에 있던 고흥도양중학교(현 고흥도덕중학교)에 청강생으로 입학, 학업을 계속 하면서 농촌 생활을 경험했다. 이후 어머니와 형 장세태(張世太, 1934 ~ )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본인과 동생 장세용(張世湧, 1941 ~ )만 고향에 있게 되었는데,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동생으로 하여금 할아버지를 모시게 하고 1952년 단신으로 상경했다. 이때 한강 도강증(渡江證)이 없어 차 밑에 숨어 집으로 돌아 왔다고 한다.[11]

상경 후 그는 성동공업고등학교에 복학하였고, 부친의 유업인 토건업을 잇고자 원래의 기계과가 아닌 건축과로 전과했는데, 1951년 9월에 학제가 변경되는 바람에 중학교 3학년 과정을 제대로 이수치 못했던 그는 중학교 졸업장이 없었던 탓에 7년 만에야 중,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의 학업 성적은 뛰어났고 특히 수학에 재능을 보여 당시 담임교사는 공과대학 건축학과로 진학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1956년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하였고, 3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였다.#

3.3. 군인 시절

1960년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고 임관된 그는 하나회에 가입하였다. 하나회는 TK 출신 군인들이 주축인데 호남 출신[12]인 장세동이 가입한 건 장세동이 소위 '난 놈'으로 통했다.

수도사단(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장세동은 꾸이년 북쪽 24km 탄광 지역에서 베트콩의 공격을 받고 어깨에 총격을 당하여 중상을 입었지만 의식을 잃어가면서도 전투를 독려하여 부대원들의 사기를 올렸으며# 결국 이 전투에서 베트콩 43명을 사살하고 1개 중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출처 확인 요망)

귀국해서 육군 수도사단 30경비대대에서 작전 장교로 근무하다가 2번째로 베트남에 파병을 갔는데 이 때 베트남에 와있던 전두환인연을 맺게 된다. 귀국 후 전두환이 제1공수특전여단장을 할 때 장세동은 그 밑에서 장교로 근무하는 등 전두환의 심복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대한민국 육군본부대통령경호실 경호관을 거쳐 1977년 대령 시절에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부임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는데 장세동이 전두환의 힘만으로 군 내에서 출세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미 전두환과 인연을 쌓기 전에 베트남 전쟁에서 주목받을 정도의 무공을 쌓았기 때문에 귀국 후 군 내에서 출세가 보장된 상황이었다. 때문에 장세동의 능력과 자질을 알아본 전두환이 장세동에게 먼저 접근하여 심복으로 만든 것이라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장세동은 제30경비단장 시절에도 자신이 정치인이 되거나 핵심 권력층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으며, 한명의 직업군인으로서 지내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심지어는 군인으로서의 진로가 불투명하니 따로 공부를 해서 건축설계사 자격증을 따려고 준비하였다는 증언도 존재한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서 지휘 계통을 어기고 하나회 인맥에 의해 신군부에 가담하고 직속 상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였다. 이 공로로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육군특수전사령부제3공수특전여단장을 맡게 되었다.

3.4. 대통령경호실장 시절

파일:19_19810026001.jpg

1981년 현역 장군 신분을 유지한채 제3공수특전여단장에서 대통령경호실장으로 임명되었다. 위의 경호실장 임명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임명 선서 당시 특이한 일화가 있는데 전두환은 장세동에게 임명 내용을 낭독하라 한 뒤 선서를 장세동이 아닌 전두환 본인이 하였다.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경호실장을 임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경호실장이 대통령으로부터 선서를 받은 것이 된 셈이었다. 전두환은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는 경호실장이니 경호실장으로부터 임명 낭독 내용을 들으며 자신이 직접 선서를 하고 싶었다고 한다.

여느 육군 장성들처럼 육군참모총장[13]을 꿈꾸었던 장세동 개인으로서는 별로 원치 않던 자리였으나[14] 각하가 하라면 해야지 어쩔 수 없었다.[15] 이는 전두환이 허화평 비서실 보좌관과 허삼수 사정수석비서관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이후 전두환이 청와대 경호실의 위상을 높여 허화평과 허삼수를 압박하는 목적으로 장세동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주었다.[16][17]

장세동은 청와대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재직할 시절 대통령 경호가 단순히 신변을 보호하는 업무를 넘어 대통령의 심기까지 편안케 해야 한다는 이른바 심기 경호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대통령의 마음이 편안해야 국정도 잘 되니 심기까지도 경호해야 한다"는 뜻으로 장세동이 만든 신조어다. 실제로 장세동은 각하께서 산책하다 돌부리에 걸리면 심기가 불편해질 수 있다며 도로 평탄화 작업을 지시하고 그것마저도 성에 안 차 산책로에 쌓인 새똥까지 녹여낼 수 있는 약품을 개발하라는 지시까지 내린 바 있다.[18]

전두환이 찾으면 5분 이내로 갈 수 있게 항상 대기했으며 호출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머리 손질을 하고 전두환이 쓰는 것과 똑같은 향수를 뿌리며 윗옷 양 호주머니에는 지도와 메모용 수첩을 반드시 지참해서 갔다고 한다.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로 전두환의 심기를 편안하게 해서 경호 업무 수행 중 전두환이 물어볼 때 즉시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지나칠 수준의 그의 행동은 다 대통령의 심기를 고려한 행동이었다.# 사회"장세동이 전두환에게 과잉충성..." '조사중'인 채로 25년 간 오리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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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전두환 경호를 위해 악천후임에도 무리한 출격 명령을 내려 국군장병 53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명 봉황새 작전을 강행한 책임자로 알려져 있다.[19]#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대통령경호실장으로서 책임을 져야함에도 불구하고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과 함께 유임되어 직책을 계속 수행했던 것을 본다면 전두환은 단순히 세력 견제용으로 장세동을 불러들인 차원을 넘어서서 권력 다툼이 난무한 청와대 내부에서 장세동을 매우 신임하고 심적으로도 의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신임도 신임이지만 사건 자체도 장세동에게 책임을 묻기에는 조금 곤란한 측면이 있었으며 노신영 역시 비슷한 이유로 유임되었다. 1984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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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국가안전기획부장 시절

민주화 요구가 거세진 1985년 2월 국가안전기획부장에 임명되었다. 장세동이 안기부장으로 보임한 것은 전임 부장인 노신영이 온건한 성격이였던지라 민주화 요구로 반정부 여론이 거세진 당시의 시국에 맞지 않아서라는 판단과 함께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 전망과 분석의 실패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묻고자[20]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노신영의 외교적 역량 등을 고려할 때 아예 내칠 수는 없었기에 노신영을 국무총리로 영전시켰고 경호실장이던 장세동을 안기부장으로 영전시켜[21] 서로를 견제하게 하였다.[22]

그리하여 정권 후반기에 노태우, 노신영 등과 함께 후계자로 주목받았으며 당시 검찰사법 기관까지 벌벌 떨게 만들던 국가안전기획부의 위상을 생각하면 사실상 정권의 가장 신뢰를 받는 인사였다. 그가 안기부를 맡았을 때 일으킨 사건만 여러 건인데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평화의 댐 사건,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 야당 국회의원 빼오기 같은 공작에는 꼭 그의 그림자가 있었다. 같은 시기 1986년 구 민주공화당계의 결집을 우려해 박정희 전 대통령 7주기 추도식을 방해하는 추태를 벌이며 김종필을 불러 "총재님께서 하시려는 행사를 그만두십시오. 안그러면 위험해 집니다."고 협박했지만 김종필이 “당신, 내일이 보이나?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당신한테 이롭다. 내가 이 순간을 기억해 두마. 세상 무슨 짓을 해도 추도식을 중지시킬 순 없다. 나는 더 무서운 짓도 한 사람이다. 당신이나 조심해라.” 는 일갈을 당하고 겁먹어 뒤에서 추모객 수송차를 통행금지 시키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장세동 본인과 국가안전기획부라는 조직 모두에게 리즈 시절로 이 시기 장세동은 정권의 힘을 등에 업고 초법적인 권세를 휘두르며 "남산의 대통령"으로 불렸다. 게다가 겉으로는 반공을 외치면서 정작 진짜 월북이자 용공대상이 나타나자 그 사람과 손잡고 완전히 죄없는 사람을 간첩으로 덮어씌우는 내로남불과 모순으로 점철된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국가안전기획부는 온갖 비난을 받고 장세동은 6월 항쟁의 물결 속에 물러나는 정의구현을 맛보게 된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 화제가 된 이야기는 "죽은 종철이 산 세동을 쫓아냈다"였다.

3.6. 노태우 정부 시절

전두환의 심복으로 찍혔기 때문에 전두환이 물러난 이후에는 같은 신군부 출신인 노태우가 집권했음에도 재기는커녕 청문회에 불려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하나회 내부 파벌 중 전두환계인 민병돈, 박희도, 최세창[23] 등이 5공 청산의 명분 하에 줄줄이 숙청되는 상황 속에서 전 정권의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낸 장세동은 정권의 눈엣가시였다.

당시 장세동은 5공 청문회에서 비교적 당당한 모습으로 일관하여[24] '의리의 사나이', '의리의 돌쇠'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노태우의 심복이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바로 미국으로 도망갔던 것과 대비되어 전두환이 인복은 많았다고 비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전두환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건재했던 이유도 전두환의 리더십이 매우 뛰어났고 그에 감화된 측근들이 버텨 주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설이 있는데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사건으로 1993년 장세동이 전두환을 대신해서 뒤집어 쓰고 감옥에 갔고 출소한 뒤 바로 전두환을 찾아가 인사하며 '각하! 휴가 다녀왔습니다!'했다고 한다. 전두환은 장세동을 크게 치하하며 장세동에게 18억 원을 줬다고 한다.[25]

이후로도 여러 번 전두환계를 규합하여 정계에 재진입하려고 했으나 전두환의 앞잡이라는 음험한 이미지가 굳어져서 매번 무산되었다. 그 와중에 전두환이 나들이라도 하면 항상 따라다니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3.7. 수감 및 복권

그러다가 김영삼이 집권하고 문민정부가 야심차게 추신한 "역사 바로 세우기" 때 전두환과 함께 구속되어 12.12 군사반란 가담 혐의로 3년 6월형을 받고 큰집생활을 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이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과의 합의를 통해 관련 인물들을 사면시키며 1998년에 최종 복권되었다. 물론 군인연금은 잘렸다.

3.8. 말년

파일:external/coreapress.com/8.jpg
"지난 79년 오늘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오늘 그 정권의 하수인과 같이 자리한 것이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다."
사회당 김영규 대선후보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출마를 선언하면서 "수많은 정치인들이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당적을 옮기는 등 철새 행각을 벌이며 의리와 소신이 사라지고 배신과 변절이 난무하는 시대에 자신과 같은 의리있는 사나이가 나서야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장세동은 전두환에게 충성했지 국민과 국가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고 그 전두환마저 지원을 안 해주자 투표일 하루 전날 후보에서 사퇴하였다. 전두환은 장세동의 출마를 극구 반대했으나 기어코 출마를 해버렸다며 "세동이도 나이 먹으니 내 말을 안 듣더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군소 후보 토론회에서 사회당 김영규 후보에게 위 발언으로 극딜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사회당이 '과거 청산'을 공약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김영규 후보는 "쿠데타의 주역과 악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토론회 전부터 밝혀 토론회가 끝난 뒤에도 끝내 악수를 나누지 않았다.

대선에서 주군한테마저 외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초구 을 후보로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하였다.

자신의 주군인 전두환이 사망하자 장례식에 참석을 하였고 매일 빈소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였다.[26]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chang.jpg*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홍학표가 연기했다. 외모상 싱크로율이 높아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5공 청문회 영상을 보면 목소리까지도 복붙 수준이다. 드라마 초기에 출연한 김재규 역의 김형일은 외모만 흡사했지 목소리는 정반대인걸 감안[29]하면 장세동은 가히 도플갱어 직전 수준이었던 셈으로 제5공화국이 제작되던 당시에 자신의 역할을 맡은 홍학표에게 연기를 두고 훈수를 두었다고 한다. 제1화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덕화)을 만나 "경호실장이 이렇게 설치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불만을 나타내는데 정작 그도 전두환 집권 후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본다면 묘하다. 다만 이승만곽영주박정희차지철과는 달리 경호실장 시절에는 대놓고 설치는 스타일은 아니기는 했으며 경호실장 시절에는 허화평-허삼수, 노신영 등이 권력을 서로 견제하는 구도였기 때문. 드라마에서도 경호실장 시절의 장세동은 정치적인 사안보다는 군부 자체 문제나 허화평-허삼수 견제 등에 전두환에게 조언하는 모습으로 주로 나온다. 물론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되고부터는 야권 분열 등 정치 공작이나 서울 물폭탄,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등 각종 공안 이슈를 조작하고 실행하는 간교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극 중 전두환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선배인 노태우정호용 등에게는 거의 무시하는 태도로 대한다.
파일:3d82137e680c1acdf95cb4dc773210858ddeabae.jpg* 2017년 개봉한 영화 <1987>에서는 배우 문성근[30]이 연기했다. 홍학표가 분한 장세동과 같이 빼다 박은 수준의 외모는 아니었지만 친근한 아저씨 같은 말투 속에서도 살벌함이 묻어나는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오히려 홍학표의 장세동처럼 싱크로율을 높이기보다 배우 본인의 자연스럽고 능청스런 연기를 통해 상당히 입체적이고 이중적인 인물로 그려내었다.[31][32]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1987 - 1990 정계 입문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2 합당[33]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2 - 현재 탈당
정계 은퇴

7.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6377a><tablebgcolor=#fff,#1c1d1f><tablewidth=100%><rowcolor=#fff><rowbgcolor=#06377a>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02 제16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무소속(정치)|
무소속
]]
후보 사퇴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초 을 3,693 (3.74%) 낙선 (3위)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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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세동 1.jpg
파일:장세동 2.jpg
16대 대선 (대한민국) 17대 총선 (서울 서초 을) }}}}}}}}}
역대 후보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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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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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한나라당 이회창
2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당선
3 하나로국민연합 이한동
4 민주노동당 권영길
5 사회당 김영규
6 국태민안호국당 김길수
7 무소속 장세동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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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 둘러보기

12.12 군사반란 반란군 가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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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군부 단체사진 고화질(컬러).jpg
1979년 12월 14일 12·12 군사반란 성공 기념사진
국군보안사령부 청사 앞
준장 남웅종 · 중령 김호영 · 중령 신윤희 · 중령 최석립 · 대령 심재국 · 대령 허삼수 · 대령 김진영 · 대령 허화평 · 대령 이상연 · 대령 이차군 · 준장 백운택
소장 박준병 · 대령 이필섭 · 대령 권정달 · 대령 고명승 · 대령 정도영 · 준장 장기오 · 준장 우국일 · 준장 최예섭 · 대령 조홍 · 대령 송응섭 · 대령 장세동 · 대령 김택수
준장 이상규 · 준장 최세창 · 준장 박희도 · 소장 노태우 · 소장 전두환 · 중장 차규헌 · 중장 유학성 · 중장 황영시 · 소장 김윤호 · 소장 정호용 · 준장 김기택
※ 사진 인물 배치 순서상 표기
※ 단 우국일 준장은 군사반란 가담자로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A]
{{{#!folding [ 각주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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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비 하나회였던 우국일 준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한 일은 연희동 요정에서 접대업무를 맡았을 뿐 접대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그는 결백한 인물이었다.


[1] 인동 장씨 집성촌으로, 도양읍·도덕면 일대에 인동 장씨가 많이 산다. 장성민 전 의원은 도덕면 가야리 출신이며, 가수 거미의 어머니 장숙정은 도양읍 봉암리 녹동마을 출신이다.[2] #[3] 남산(南山)파 18대손, 시조 33세 세(世) 재(在) 항렬.[4] 원래 민간인이 임명되는 자리이나 전두환이 현역 장성(준장)신분임에도 경호실장직으로 임명시켰다. 장세동은 경호실장직을 수행하는 중에 소장으로 진급했고 1984년에 중장으로 예편했다. 지금은 청와대 경호실장을 현역 군인이 맡는다는 게 이상하지만, 군사 정부 때에는 충분히 여지가 있었는데 장세동을 현직 군인으로써 경호실장에 임명했던 전두환만 해도 노태우와 함께 군인으로써 당시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 밑에서 대통령 경호실 소속 차장보로 근무했던 적이 있으며 당시 경호실 차장이었던 이재전도 현역 중장이었다. 장성은커녕 대령도 달지 못했던 차지철이 계급에 의한 열등감 때문에 현역 장성들을 자신들의 밑에 두는 일들이 있었는데 장세동 역시 그와 비슷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5] 전두환 정부 초반기의 2인자는 당연히 다들 알다시피 노태우.[6] 족보명은 장지홍(張志鴻), 자는 형국(亨局). 인동 장씨대동보 15권 남산파 1451쪽.[7] 참판공파(參判公派) 28세 한임회(韓壬會) (1882. 4. 4 ~ 1959. 12. 26)의 차녀이다.[8] 직계 선조 묘소 위치; 14대조 걸(杰), 13대조 현윤(顯允), 7대조 수기(壽起, ? ~ 1799. 6. 25) : 도양읍 용정리 남암마을 / 12대조 흥일(興一) : 도양읍 관리 탑동 / 11대조 수(鐩), 10대조 만태(萬泰), 8대조 지청(趾淸), 고조부 석록(錫錄, 1826 ~ ?. 1. 13) : 도양읍 용정리 상유마을 / 9대조 대한(大漢) : 도양읍 용정리 잠두마을 / 6대조 윤흥(胤興), 5대조 순추(順樞, 1802 ~ ?) : 도양읍 봉암리 / 증조부 일원(日遠, 초명 두원(斗遠), 1858 ~ 1942. 4. 22), 조부 채상(彩相, 초명 채선(彩善), 1891 ~ ?), 부친 지홍(志鴻) : 도양읍 용정리 장계산.# / 출처는 1998년 간행된 인동장씨대동보 1권 남산파 21쪽, 277쪽, 3권 805쪽, 15권 1451쪽.[9] 임진왜란 도중과 이후에는 전란 및 그로 인한 파괴 때문에 이렇게 고향을 떠난 유동인구가 급증하였고 이는 조선 후기 사회 제도가 급격하게 흔들리는 배경이 된다.[10] 초명 장채선(張彩善), 자 정민(正敏).[11] 당시 한강 이북에서 전투가 계속 이루어졌으므로 민간인의 서울 진입이 금지되었다. 공무원이나 기자, 미군에 연줄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도강증을 구할 수 없었다.[12] 사실 장세동은 태어난 곳만 전남일 뿐, 4살 이후에는 줄곧 서울에서 자랐으므로 완전한 호남인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실제로 여러 인터뷰나 기자회견에서 드러난 본인의 목소리만 들어봐도 서울 토박이에 가깝다.[13] 게다가 지휘권이나마 합참의장에게 있는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군령권군정권 모두 각 군 참모총장에게 있었기 때문에, 육군참모총장은 사실상 육군 총사령관과 다를 바 없는 자리였다. 군령권이 합참의장에게 넘어간 지금도,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문서로 이동하면 알겠지만 사실 합참의장이라는 보직이 여러모로 미묘한 점이 많다 보니 출세를 꿈꾸는 장교들이 더 선망하는 자리는 합참의장보다는 참모총장이다.[14] 장세동은 단순히 하나회 연줄로만 덕을 보았다기보다는 과거 베트남전 참전 등에서 군인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하던 사람이었기에 그런 마음이 더욱 컸다. 드라마 제5공화국 27부에 전두환이 장세동에게 경호실장 자리를 제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서도 장세동이 경호실장을 맡고 싶어하는 것 같아보이지 않으니까 전두환이 육군참모총장에 미련이 남느냐고 묻는다.[15]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전두환이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는지 내 마음이 외로워서 그랬다며 장세동에게 미안하게 되었다고 달래기도 한다.[16] 허화평과 허삼수는 당시 예편한 민간인이었지만 예편 최종 계급은 장세동과 같은 준장이었다.[17] 사실 정상적으로 보면 원스타(준장)이 장관급이였던 경호처장으로 임명된 것도 영전이었다. 포스타인 대장 출신 전역자 중에 국방장관이 지명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소장(투스타)도 급이 안 맞는다.[18] 다만 심기경호 자체는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고착화되어온 청와대 경호실의 문화였다. 박종규나 차지철 등 전임 경호실장들도 경호 업무에서 가장 중시했던것은 박정희의 심기였다.[19] 정확히는 육군특수전사령부 소속 제707특수임무대대원 47명과 공군 장병 6명이 사망했다. 당시 특임대 간부들이 기상상황이 좋지않아 비행기는 물론이고 배편까지 다 막힌 상황에서 작전시행이 불가능하다고 상부에 여러차례 보고를 올렸는데 모조리 묵살당했다고 증언했는데 그 상부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다만 유족들이 작성한 고소장에는 장세동의 이름은 없고 당시 육군참모총장 황영시와 특전사령관이였던 박희도의 이름만 적혀있다.[20] 당시 안기부는 상당한 수준의 공작정치를 벌였고 12대 총선에도 개입하는 한편 선거 판세 분석을 담당하기도 했다. 당시 안기부는 창당 후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던 신생 야당 신한민주당이 고작 20석 정도만 건질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치의 3배를 뛰어넘는 67석을 석권하며 제1야당이 됐다.[21] 당시 안기부장과 경호실장은 지금과는 달리 각각 부총리급, 장관급이였다.[22] 이 때 노태우의 손아래 사촌처남이자 당시 대통령비서실 법률비서관 겸 정무비서관이던 박철언을 자신의 특별보좌관으로 데리고 갔다.[23] 노태우 정권 중후반기에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어 복귀하긴 했다.[24] "본인의 지시, 책임"이라 말하는 장면도 많았다. 청문회 당시 국회의원들이 '대통령 지시로 했다'는 말 한마디만 좀 하라고 매달릴 정도였다.[25] 이 일화는 썰전에서도 소개되었는데 장세동이 받은 이 18억원이라는 것을 알자 김구라가 한 말이 '할 만하네 돌쇠!'[26] 의외로 30경비단장 시절 수도방위사령관을 지낸 장태완 예비역 소장이 2010년 여름 타계하자 조문하기도 했다.[27] 당연히 댓글은 장세동을 비롯한 반란 주역들에게 엄청나게 부정적이다. "사형당하지 않은 걸 감사히 여기고 조용히 살아라." 서부터 극단적으로는 저들을 찾아내어 죽이겠다는 살벌한 댓글도 있었다.[28] 직업군인들은 보통 하사/소위 때부터 BOQ와 차량 등이 제공되기 때문에 대체로 결혼을 굉장히 빨리 하는 편이다. 이건 공무원, 대기업, 전문직(특히 판사, 의사) 종사자들도 마찬가지이며, 비록 직업군인과는 다르게 아무 것도 제공되는 경우는 없고 자신들이 알아서 마련해야 되지만, 그래도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고 각종 복지혜택들이 엄청나게 좋다 보니 등 직업 자체가 워낙 훌륭해서 그렇다. 당장 자신이 주군으로 모셨던 전두환도 육사 졸업과 거의 동시에 결혼식을 올렸다.[29] 김형일은 둔탁한 목소리지만 실제 김재규는 날카로운 목소리를 가졌다. 또 외모가 흡사했다곤 하지만 얼굴만 비슷했지 김형일은 180cm가 넘는 풍채가 좋은 편인 반면 김재규는 164cm의 박정희 대통령과 비슷한 키를 가진 왜소한 인물이었다.[30] 본인의 정치 성향인 친노-친문과는 정반대 배역이지만 사실 자기 성향과 반대쪽인 역할을 더 선호한다고 하는데 아버지 문익환 때부터 오랫동안 겪어온 탓에 너무나 잘 안다고 한다.[31] 박처원 대공수사처장을 맡았던 김윤석은 싱크로율을 높이면서 공산주의자의 손에 가족을 잃었다는 설정을 더하여 훌륭한 스토리텔링을 보여주었다.[32] 심지어 문성근은 이 영화에서 장세동 역을 맡으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간첩으로 몰아가려는 음모를 꾸미는 장면도 나온다.[33]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