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에 대한 내용은 정호용(1955) 문서 참고하십시오.
12.12 군사반란 반란군 가담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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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4일 12·12 군사반란 성공 기념사진 국군보안사령부 청사 앞 | |
준장 남웅종 · 중령 김호영 · 중령 신윤희 · 중령 최석립 · 대령 심재국 · 대령 허삼수 · 대령 김진영 · 대령 허화평 · 대령 이상연 · 대령 이차군 · 준장 백운택 | |
소장 박준병 · 대령 이필섭 · 대령 권정달 · 대령 고명승 · 대령 정도영 · 준장 장기오 · 준장 우국일 · 준장 최예섭 · 대령 조홍 · 대령 송응섭 · 대령 장세동 · 대령 김택수 | |
준장 이상규 · 준장 최세창 · 준장 박희도 · 소장 노태우 · 소장 전두환 · 중장 차규헌 · 중장 유학성 · 중장 황영시 · 소장 김윤호 · 소장 정호용 · 준장 김기택 | |
※ 사진 인물 배치 순서상 표기 ※ 단 우국일 준장은 군사반란 가담자로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A] | |
{{{#!folding [ 각주 보기 ] |
[A] 비 하나회였던 우국일 준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한 일은 연희동 요정에서 접대업무를 맡았을 뿐 접대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그는 결백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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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장관 (1948~현재) | ||||||||||
<nopad> 이승만 정부 | ||||||||||
초대 이범석 | 제2대 신성모 | 제3대 이기붕 | 제4대 신태영 | 제5대 손원일 | ||||||
<nopad> 이승만 정부 | <nopad> 허정 내각 | <nopad> 장면 내각 | ||||||||
제6대 김용우 | 제7대 김정렬 | 제8대 이종찬 | 제9대 현석호 | 제10대 권중돈 | ||||||
<nopad> 장면 내각 | <nopad> 장도영 내각 | <nopad> 송요찬 내각 | <nopad> 김현철 내각 | |||||||
제11대 현석호 | 제12대 장도영 | 제13대 송요찬 | 제14대 박병권 | 제15대 김성은 | ||||||
<nopad> 박정희 정부 | ||||||||||
제16대 최영희 | 제17대 임충식 | 제18대 정래혁 | 제19대 유재흥 | 제20대 서종철 | ||||||
<nopad> 박정희 정부 | <nopad> 최규하 정부 | <nopad> 전두환 정부 | ||||||||
제21대 노재현 | 제22대 주영복 | 제23대 윤성민 | 제24대 이기백 | 제25대 정호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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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오자복 | 제27대 이상훈 | 제28대 이종구 | 제29대 최세창 | 제30대 권영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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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대 이병태 | 제32대 이양호 | 제33대 김동진 | 제34대 천용택 | 제35대 조성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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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대 김동신 | 제37대 이준 | 제38대 조영길 | 제39대 윤광웅 | 제40대 김장수 | ||||||
<nopad> 이명박 정부 | <nopad> 박근혜 정부 | <nopad> 문재인 정부 | ||||||||
제41대 이상희 | 제42대 김태영 | 제43대 김관진 | 제44대 한민구 | 제45대 송영무 | ||||||
<nopad> 문재인 정부 | <nopad> 윤석열 정부 | |||||||||
제46대 정경두 | 제47대 서욱 | 제48대 이종섭 | 제49대 신원식 | 제50대 김용현 | ||||||
대한제국 군부대신 · 임시정부 군무부장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 |
역임한 직위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국회의원 (대구 서구 갑) | ||||
선거구 개편 유성환[1] 이만섭[2] | → | 제13대 정호용[3] | → | 제13대 문희갑[4] | |
제13대 문희갑[5] | → | 제14대 정호용 | → | 제15대 백승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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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이승만 정부 | ||||||
초대 윤치영 | 제2대 신성모 | 제3대 김효석 | 제4대 백성욱 | 제5대 조병옥 | ||
<nopad> 이승만 정부 | ||||||
제6대 이순용 | 제7대 장석윤 | 제8대 이범석 | 제9대 김태선 | 제10대 진헌식 | ||
<nopad> 이승만 정부 | ||||||
제11대 백한성 | 제12대 김형근 | 제13대 이익흥 | 제14대 장경근 | 제15대 이근직 | ||
<nopad> 이승만 정부 | <nopad> 허정 내각 | |||||
제16대 민병기 | 제17대 김일환 | 제18대 최인규 | 제19대 홍진기 | 제20대 이호 | ||
<nopad> 장면 내각 | ||||||
제21대 홍익표 | 제22대 이상철 | 제23대 현석호 | 제24대 신현돈 | 제25대 조재천 | ||
<nopad> 장도영 내각 | <nopad> 김현철 내각 | <nopad> 박정희 정부 | ||||
제26대 한신 | 제27대 박경원 | 제28대 엄민영 | 제29대 양찬우 | 제30대 엄민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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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대 이호 | 제32대 박경원 | 제33대 오치성 | 제34대 김현옥 | 제35대 홍성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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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대 박경원 | 제37대 김치열 | 제38대 구자춘 | 제39대 김종환 | 제40대 서정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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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대 노태우 | 제42대 주영복 | 제43대 정석모 | 제44대 김종호 | 제45대 정호용 | ||
전두환 정부 | <nopad> 노태우 정부 | |||||
제46대 고건 | 제47대 정관용 | 제48·49대 이상희 | 제50대 이춘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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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대 서정화 | 제62대 강운태 | 제63대 조해녕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행정자치부장관 (1998~20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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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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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응준 | 제2대 채병덕 | 제3대 신태영 | 제4대 채병덕 | 제5대 정일권 | |
제6대 이종찬 | 제7대 백선엽 | 제8대 정일권 | 제9대 이형근 | 제10대 백선엽 | |
제11대 송요찬 | 제12대 최영희 | 제13대 최경록 | 제14대 장도영 | 제15대 김종오 | |
제16대 민기식 | 제17대 김용배 | 제18대 김계원 | 제19대 서종철 | 제20대 노재현 | |
제21대 이세호 | 제22대 정승화 | 제23대 이희성 | 제24대 황영시 | 제25대 정호용 | |
제26대 박희도 | 제27대 이종구 | 제28대 이진삼 | 제29대 김진영 | 제30대 김동진 | |
제31대 윤용남 | 제32대 도일규 | 제33대 김동신 | 제34대 길형보 | 제35대 김판규 | |
제36대 남재준 | 제37대 김장수 | 제38대 박흥렬 | 제39대 임충빈 | 제40대 한민구 | |
제41대 황의돈 | 제42대 김상기 | 제43대 조정환 | 제44대 권오성 | 제45대 김요환 | |
제46대 장준규 | 제47대 김용우 | 제48대 서욱 | 제49대 남영신 | 제50대 박정환 | |
제51대 박안수 | }}}}}} ※ 초대~제8대: 육군총참모장 / 제9대~현재: 육군참모총장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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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응준 | 2대 윤병현 | 3대 장도영 | 4대 유재흥 | 5대 장도영 | |
6대 김종오 | 7대 최경록 | 8대 김형일 | 9대 장창국 | 10대 김용배 | |
11대 김계원 | 12대 임충식 | 13대 문형태 | 14대 김상복 | 15대 한신 | |
16대 심흥선 | 17대 서종철 | 18대 노재현 | 19대 이민우 | 20대 이희성 | |
21대 윤성민 | 22대 황영시 | 23대 차규헌 | 24대 정호용 | 25대 소준열 | |
26대 이기백 | 27대 김홍한 | 28대 박희도 | 29대 오자복 | 30대 최세창 | |
31대 정동호 | 32대 박명철 | 33대 권병식 | 34대 이진삼 | 35대 신말업 | |
36대 이문석 | 37대 김연각 | 38대 김진선 | 39대 김형선 | 40대 이재관 | |
41대 길형보 | 42대 박영익 | 43대 강신육 | 44대 선영제 | 45대 신일순 | |
46대 홍갑식 | 47대 박흥렬 | 48대 방효복 | 49대 한민구 | 50대 임관빈 | |
51대 조정환 | 52대 김요환 | 53대 황인무 | 54대 김유근 | 55대 박찬주 | |
56대 정연봉 | 57대 구홍모 | 58대 최병혁 | 59대 김승겸 | 60대 박주경 | |
61대 황대일 | 62대 안병석 | 63대 여운태 | 64대 고현석 | ||
※ 초대~현재 : 중장 | |||||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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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조문환 | 2대 조천성 | 3대 정병주 | 4대 정호용 | 5대 박희도 | |
6대 최웅 | 7대 육완식 | 8대 민병돈 | 9대 이문석 | 10대 서완수 | |
11대 김형선 | 12대 장창규 | 13대 정영무 | 14대 오남영 | 15대 김희중 | |
16대 류해근 | 17대 김윤석 | 18대 백군기 | 19대 김진훈 | 20대 김상기 | |
21대 최용림 | 22대 신현돈 | 23대 최익봉 | 24대 장준규 | 25대 전인범 | |
26대 장경석 | 27대 조종설 | 28대 남영신 | 29대 김정수 | 30대 소영민 | |
31대 손식 | 32대 곽종근 | ||||
※ 초대~4대 : 소장 / 5대~현재 : 중장 |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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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ff,#9fc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 |||||
초대 이세호 | 2대 김종환 | 3대 박희동 | 4대 이건영 | 5대 유학성 | |
6대 황영시 | 7대 정호용 | 8대 박희도 | 9대 최세창 | 10대 고명승 | |
11대 신말업 | 12대 구창회 | 13대 윤용남 | 14대 도일규 | 15대 유재열 | |
16대 길형보 | 17대 이남신 | 18대 서종표 | 19대 이상희 | 20대 김관진 | |
21대 백군기 | 22대 이상의 | 23대 김상기 | 24대 이홍기 | 25대 권혁순 | |
26대 김현집 | 27대 엄기학 | 28대 김운용 | →지상작전사령부 통합 이전 | ||
※ 초대~28대: 대장 (4대 제외), 명칭 변천: 제3군사령관(초대~25대) ▸ 제3야전군사령관(25대~28대) | |||||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 |
}}} ||
<colbgcolor=#c51426><colcolor=#ffffff> 출생 | 1932년 9월 10일 ([age(1932-09-10)]세) | ||
경상북도 대구부 신정 (現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90-1번지)[7] | |||
거주지 | 경기도 과천시 사기막길 123-1[8] | ||
본관 | 연일 정씨[9] | ||
재임기간 | 제4대 육군특수전사령관 | ||
1979년 12월 13일 ~ 1981년 3월 4일 | |||
제25대 육군참모총장 | |||
1983년 12월 16일 ~ 1985년 12월 15일 | |||
제45대 내무부장관 | |||
1987년 1월 21일 ~ 1987년 5월 26일 | |||
제25대 국방부장관 | |||
1987년 7월 14일 ~ 1988년 2월 25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51426><colcolor=#ffffff> 배우자 | 김숙환 | |
자녀 | 슬하 4녀 | ||
학력 | 대구남산국민학교 (졸업) 경북중학교 (졸업) 경북고등학교 (32회 /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화학공학 / 석사과정 수료)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한양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10] / 석사[11]) 건국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박사[12]) |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의원 선수 | 2 | ||
의원 대수 | 13, 14 | ||
경력 | 일해재단 연구원 제45대 내무부장관 제25대 국방부장관 제13대 국회의원(대구 서구 갑) 제14대 국회의원(대구 서구 갑) 민주자유당 대구직할시지부 위원장 | ||
군사 경력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11기)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55년 ~ 1985년 | |||
최종 계급 | 대장 (대한민국 육군) | ||
최종 보직 | 육군참모총장 | ||
주요 보직 | 제50보병사단장 육군특수전사령관 제3야전군사령관 | ||
참전 | 베트남 전쟁 | }}}}}}}}}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관료, 정치인.2. 생애
2.1. 군인 시절
1932년 9월 10일 경상북도 대구부 신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90-1번지에서 태어나[13] 대구남산초등학교, 경북중학교[14], 경북고등학교(32회)를 졸업했다.[15] 후일 육군사관학교의 동기가 되는 노태우는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이자 동창이었는데 경북고등학교-육군사관학교 동기로 김복동도 있다.[16]1951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 전쟁 중 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17] 1964년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김복동 등과 사적 모임인 하나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1977년 특전사 참모장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1978년 제50보병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50사단이 비수도권이라[18]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19], 반란이 성공한 직후인 12월 13일 하나회 입김으로 정병주의 뒤를 이어 육군특수전사령관에 취임했다.[20]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와 서울을 세 차례 오가면서 공수부대에게서 보고를 받거나 현장 상황을 확인했다. 1980년 5월 27일 '상무충정 작전' 직전 육군본부로부터 가발과 수류탄 등 군수품을 지원받아 현지의 공수부대에 제공했는데 이때 폭동 진압 명령자라는 논란이 있었다. 특전사령관 보직 수행 중 중장으로 진급했고, 다시 1981년 12월 대장 진급과 함께 제3야전군사령관이 되었으며 1983년 12월 황영시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2.2. 예편 이후
1985년 12월 2년의 참모총장 임기를 끝으로 예편한 다음 일해재단 연구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초기 수습책으로 김종호의 뒤를 이어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가[21] 4개월 만인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축소 의혹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 등에 의해 폭로되면서 민심 수습 차원에서 개각이 일어나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등과 함께 경질되었다.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22]
한편 1999년 10월 10일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6.29의 진실 편의 본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6월 항쟁 당시 현직에 있는 후배들이 찾아와서 부대가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 준비를 하고 있다며 자신에게 군 투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개진해왔고, 자신 역시 이에 동의하여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에게 그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6월 항쟁과 6.29 선언 이후인 1987년 7월 국방부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하여 전두환이 퇴임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짧은 재임 기간 때문에 국방부 장관으로서 눈에 띄는 치적은 없었지만 해병대사령부의 재창설이 실현된 것과 2군 지역에 군단 2개를 만든 것 정도가 그나마 기억될 만한 성과.[23]
2.3. 정치 활동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구직할시 서구 갑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여소야대 국회에서 5공 비리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청문회로 사회 여론이 공직 사퇴 요구를 제기하자 결국 3당 합당을 앞둔 1990년 1월 8일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24][25] 이후 명예 회복을 위해 1990년 4·3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정치적 부담을 느낀 노태우 정부의 압력에 의해 후보직에서 다시 사퇴했고 서구 갑 보궐선거에선 문희갑이 친야 무소속 백승홍 후보와 비교적 적은 표차로 당선되었다.[26] 당시 재보궐 선거는 3당 합당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선거라 매우 치열했고 전국적으로 이목을 끌었던 선거였다. 정호용 본인에 의하면 노태우가 의원직 사퇴 후 열리는 재보궐선거에 공천을 주겠다고 해서 사퇴했으나 공천을 받은 사람은 문희갑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었으며# 안기부에서 자신을 밀착 감시하고 주변 사람들을 샅샅이 뒤지며 못살게 굴었으며#, 국회의원들까지 동원해 결국 견디다 못한 부인이 자살 기도까지 하게 되자 후보직을 사퇴했다고 한다. 정호용의 사퇴로 남은 선거 자금이 후일 문희갑의 대구광역시장 임기 말 발생한 비자금 파동의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27] 1992년 한양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무역경영 전공으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친여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자유당 문희갑 후보를 꺾고 당선되자 후에 민주정의당의 후신 민주자유당에 복당하고 지구당위원장 자리도 되찾았다.[28] 이후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의 제14대 대통령 선거 운동을 도왔으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대구광역시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본인이 완고하게 불출마 의사를 표했고[29], 김영삼 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에 따라 1996년에 다시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혐의로 구속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옥 중에서 대구광역시 서구 갑에 출마하였으나 2위로 친야 무소속 백승홍에게 밀려 낙선했다.
정호용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수 차례나 광주광역시와 서울특별시를 오갔으며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이었기 때문에 특전사 소속 부대의 잔혹 행위를 둘러싸고 훗날 책임론이 제기됐다. 1989년에 열린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정호용은 당시 특전사 소속의 진압 부대들은 당시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투교육사령부에 배속됐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신군부는 공식적인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사조직 하나회의 인맥에 의한 명령을 내리는 일이 빈발했고 실제 재판에서 이것이 밝혀진다. 1996년 1월 5.18 광주민주화운동 검찰 수사 결과 정호용이 5.17 내란에서의 내란 모의 참여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 관여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에 따라 1997년 4월 대법원은 정호용에게 내란 모의 참여죄와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2.4. 정계 은퇴 이후
1997년 김영삼 정부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사면하면서 석방되었다. 1999년 2월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제무역학과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2002년 정씨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정몽준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돕기도 했다.
2015년 경북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이맹희의 빈소에 방문해서 너무 일찍 갔다고 통곡하기도 했다. 201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 40주년에 전두환, 최세창 등과 같이 어울려 호화만찬을 즐겨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2021년 5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자진해 개인 자격으로 조사를 신청한 것이 밝혀졌다. 본인은 광주 진압 작전에서 배제됐고[30] 총 4차례 광주를 방문한 것은 통신 보안, 인사, 군수 지원 업무를 위해서였지 작전을 지휘하러 간 것이 아니었으며 노태우가 3당 합당을 성사시키기 위해 당시 야당에 각서까지 써주며 자신을 5.18 관련 책임자로 몰아 정계에서 제거했다고[31] 주장했다. 또 자신은 12.12에 직접 가담하지 않아 전두환 집권 시나리오도 몰랐고[32], 5공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전두환 정부 초창기의 실세 3허(허화평, 허삼수, 허문도)와 특전사령관 재임 당시 행보,[33] 민주정의당 창당 자금 모금과 언론통폐합 반대 등으로 불화가 심했다고 주장했다. 그간 5.18 관련해서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간의 입장 차이와 갈등은 꾸준히 존재했지만 전두환계 내에서 입장 차이가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34]
다만 5.18 관련 정호용의 발언은 상당수 거짓일 확률도 있는 게, 당시 회의에 참석한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관련 회의에 참석해 실세처럼 행동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호용의 주장은 나는 특전사령관으로서 광주에 몇 번 내려갔지만 그때도 예하부대 지휘권은 이미 넘긴 바지사장 상태였고 실제 지휘한 인물은 따로 있다 정도였는데, 사진과 영상이 공개되면서 정호용이 자신보다 상급자인 국무총리, 도지사 앞에서도 다리를 꼬고 팔장을 낀 채로 담배도 피는 등 회의를 주도하고 발언을 이어나가는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물론 영상에서 육성이 녹음되지는 않아서 이것만으로 진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했는지까진 밝히지 못했지만 적어도 정호용이 주장한대로 본인은 조언 정도만 해주는 바지사장이었다거나 작전지휘권이 없는 방관자였다는 식의 주장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영상 속 모습임에는 분명하다. 이런 이유와 전두환, 노태우가 2021년 차례로 사망하면서 재차 심경의 변화가 온 것인지 어쨌는지 2021년 11월 돌연 미국으로 출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태우, 전두환의 장례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24년 1월 23일, 2021년 2월 4일 작성된 5.18진상조사위에 제출한 진정서와 2021년 3월 3일 작성된 추가 진정서가 전문 공개되었다.
3. 대중매체에서
- 1995년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성우 전국근이 연기했다. 후덕한 인상의 정종준이 연기하여 커다란 갭이 있는 전두환이나 고증오류에 가까운 <제5공화국>과 달리, 실제 인물과 판박이 수준으로 닮았다.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윤승원[35]이 연기했다. '특전사령관', '경상도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반영해서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다소 껄렁껄렁하고 호탕한 사나이 타입의 캐릭터로 나왔다.[36]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장세동과 대립각을 세우고, 박철언과 함께 노태우의 조력자 역할이 부각되었다. 또한 대통령이 된 전두환에게도 둘이서만 있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반말을 사용하는 등, 극 중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둘을 모두 친구로 대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인물로 나온다. 한편으로는 다른 하나회와 5공의 핵심 주역들이 죄다 권력 암투와 음모에 치중하는 와중에 정호용은 노태우와 전두환의 친구로서만 부각될 뿐 권력욕은 딱히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드라마 방영 후 당사자인 정호용은 "자신이 전두환, 이학봉, 황영시, 최세창보다도 내성적인데도 실제로 매우 다른 인물로 묘사되었다"며 유감섞인 평을 했는데 정호용 고유의 목소리도 실제로 크지 않고 카랑카랑한 비음이 섞인 얇은 중저음 목소리 톤이라 배우 윤승원의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정호용이 인터뷰에서 보여준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한 성격을 잘 재현해냈다.
-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배우 박용수가 맡아서 연기했다. 작중에서 이름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37] 계급이 소장인데 당시 특전사령관은 중장이 아니라 소장이었으므로 정호용이 확실하며 배역 역시 '정 소장'이라고 되어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육사 11기 동기이자 하나회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이었고[38] 당시 특전사령관으로서 5.18 민주화운동 진압의 주요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음에도 여단장으로 보이는 준장보다 훨씬 더 진압에 소극적이며 유연해보이기까지 하는 캐릭터로 나와 고증 오류나 마찬가지의 캐릭터로 표현되었다.
4. 여담
- 전두환, 노태우와 동기생이라는 특성상 그들에게 사석에서 말을 놓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였다고 한다. 2019년 12월 12일에 전두환과 호화만찬을 즐겼을 당시에도 전두환에게 "두환이"라고 호칭했다.[39] 다만 전두환의 동기라는 포지션으로 인해 5공화국 당시에도 전두환과 노태우는 물론 장세동, 허화평 등에게 견제를 당했으며 예편 이후 정계에 진출해서도 노태우의 심복 격인 박철언, 최병렬 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 경북고 동기였던 이맹희 전 삼성그룹 부사장에 따르면, "학자같은 면모가 있는 수재"였다고 한다. 이맹희는 정호용이 학자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40] 그에 대해 공부를 잘 하고 머리가 뛰어났다는 주변 인물들의 회고가 늘 따라다녔지만 그게 독으로 작용해 많은 견제를 받기도 했다.[41]
-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에 저항했다가 고초를 겪는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은 이후 하나회는 열심히 디스했지만 정호용에 대해선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 아무래도 정호용이 하나회 멤버긴 하지만 12.12 군사반란 당시엔 후방인 50사단에 있어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다 전사한 김오랑 중령의 장례를 부대장으로 치러줬다고 한다. 김오랑 중령의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반란에 참여했던 특전사 예하 군인들이 그를 부대 뒷산에 암매장했는데 이를 알게 된 정호용 사령관이 '목숨을 바쳐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훌륭한 군인에게 그런 처사가 말이 되느냐'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42] 결국 정호용의 주도 하에 김오랑 중령의 장례는 부대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도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고 한다.
- 전두환의 대통령 재임 시기, 당시 서울 내 대학가에서는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었다. 이때 시위대에서는 전경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도록 여학생들을 맨 앞줄에 내세웠는데,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정호용은 이것을 보고 과감하게 옷을 벗겨라고 경찰한테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옷을 막 벗길려고 덤벼드니 여학생들은 도망가버리고 시위대는 쉽게 진압되었다. 이를 보고 받은 전두환은 정호용을 크게 신뢰하게 되었다고 한다.
- 전두환 정부 때 재산을 불리기 시작해 천억 원대의 자산가가 되었다.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절 당시 군사보호구역이던 양주 은현면 용광리 산 87 일대의 토지를 투기한 후 국방부장관 사임 무렵에 해제하여 막대한 시세차익을 남겼으며, 이를 바탕으로 1992년 서울 강남구 논현동 부지 443㎡와 건물을 쌍방울개발로부터 59억 원에 구매해 도이치모터스 미니 전시장으로 임대를 주다가 2021년 12월 415억 원에 되팔았다. 이외에도 정부과천청사 인근 문원동과 과천동 단독주택과 토지 약 10,000㎡ 등 수십 건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43]
-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호탕한 인물로 그려진 것과는 다르게 실제 성격은 엄청나게 꼬장꼬장하다. 경북고 출신인 기자가 '정호용이 사조직을 만들어 불법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는 제보를 받고[44] 지역구 사무실로 찾아가 취재를 시도하자 경북고 후배라는 사실을 알고 선배에 대한 예의가 없다면서 욕설을 하기도 했다.# 늘그막에 가졌던 인터뷰 자료에서도 조곤조곤하고 비음섞인 말투를 가졌으며 뉴스타파에서 인터뷰를 시도할 당시에도 택도 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신경질적으로 쫓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5공 시절에도 국방장관, 내무장관을 하던 시절에 청와대에서 전두환과 함께 회동하면서 다리를 꼬고 맞담배를 피우는 등 거만하게 행동했다.[45]
- 2023년 기준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고[46] 5.18 학살을 벌인 신군부 핵심 5인(전두환, 노태우, 이희성, 황영시, 정호용) 중 유일하게 생존 중이다.[47] 1932년생으로 현재 [age(1932-09-10)]세의 고령인데 2019년도에 진행한 인터뷰나 그 이후에 공개된 모습을 봐도 과거에 비해 많이 노쇠하긴 했어도 나이에 비해 꽤나 정정한 모습이다.[48]
5.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88 - 1990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0 - 1992 | 탈당 |
[[민주자유당|]] | 1992 - 1995 | 입당 |
[[신한국당|]] | 1995 | 당명 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5 - | 탈당 정계 은퇴 |
6.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8 |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 대구 서 갑 | | 52,847 (54.3%) | 당선 (1위) | 초선[49] |
1990 | 4월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후보사퇴 | [50] |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50,533 (51.5%) | 당선 (1위) | 재선[51]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19,583 (26.8%) | 낙선 (2위) | [52] |
역대 선거 벽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13대 총선 (대구 서구 갑) | 14대 총선 (대구 서구 갑) | |
15대 총선 (대구 서구 갑) |
7. 둘러보기
12.12 군사반란 반란군 가담자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ff | |
1979년 12월 14일 12·12 군사반란 성공 기념사진 국군보안사령부 청사 앞 | |
준장 남웅종 · 중령 김호영 · 중령 신윤희 · 중령 최석립 · 대령 심재국 · 대령 허삼수 · 대령 김진영 · 대령 허화평 · 대령 이상연 · 대령 이차군 · 준장 백운택 | |
소장 박준병 · 대령 이필섭 · 대령 권정달 · 대령 고명승 · 대령 정도영 · 준장 장기오 · 준장 우국일 · 준장 최예섭 · 대령 조홍 · 대령 송응섭 · 대령 장세동 · 대령 김택수 | |
준장 이상규 · 준장 최세창 · 준장 박희도 · 소장 노태우 · 소장 전두환 · 중장 차규헌 · 중장 유학성 · 중장 황영시 · 소장 김윤호 · 소장 정호용 · 준장 김기택 | |
※ 사진 인물 배치 순서상 표기 ※ 단 우국일 준장은 군사반란 가담자로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A] | |
{{{#!folding [ 각주 보기 ] |
[A] 비 하나회였던 우국일 준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한 일은 연희동 요정에서 접대업무를 맡았을 뿐 접대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그는 결백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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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기획원장관 |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004c97> 신병현 → 김준성 → 서석준 → 신병현 → 김만제 → 정인용 | |||
국토통일원장관 | 이범석 → 손재식 → 이세기 → 박동진 → 허문도 | |||
외무부장관 | 노신영 → 이범석 → 이원경 → 최광수 | |||
내무부장관 | 서정화 → 노태우 → 주영복 → 정석모 → 김종호 → 정호용 → 고건 → 정관용 → 이상희 | |||
재무부장관 | 이승윤 → 나웅배 → 강경식 → 김만제 → 정인용 → 사공일 | |||
법무부장관 | 오탁근 → 이종원 → 정치근 → 배명인 → 김석휘 → 김성기 → 정해창 | |||
국방부장관 | 주영복 → 윤성민 → 이기백 → 정호용 | |||
문교부장관 | 이규호 → 권이혁 → 손제석 → 서명원 | |||
체육부장관 | 노태우 → 이원경 → 이영호 → 박세직 → 이세기 → 조상호 | |||
농림수산부장관 | 정종택 → 고건 → 박종문 → 황인성 → 김주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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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신부장관 | 김기철 → 최광수 → 최순달 → 김성진 → 이자헌 → 이대순 → 오명 | |||
문화공보부장관 | 이광표 → 이진희 → 이원홍 → 이웅희 | |||
총무처장관 | 김용휴 → 박찬긍 → 박세직 → 정관용 → 장기오 | |||
과학기술처장관 | 이정오 → 김성진 → 전학제 → 이태섭 → 박긍식 | |||
정무제1장관 | 최광수 → 정종택 → 오세응 → 이태섭 → 정재철 → 조기상 → 이종률 | |||
정무제2장관 | 노태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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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호 | 이정무 | 박준규 | 문희갑 | ||
서 을 | 북 | 수성 | 달서 | ||
최운지 | 김용태 | 이치호 | 김한규 | ||
* 서 갑 정호용 사퇴 (1990.1.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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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호 | 김복동 | 서훈 | 정호용 | 강재섭 | |
김해석 | 김용태 | 현경자 | 윤영탁 | 김한규 | |
최재욱 | |||||
* 동 을 박준규 사퇴 (1993.6.30.) * 수성 을 박철언 의원직 상실 (1994.6.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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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선거구제 대구직할시 중구·서구 선거구에서 1위로 당선된 제12대 국회의원이다.[2] 중선거구제 대구직할시 중구·서구 선거구에서 2위로 당선된 제12대 국회의원이다.[3] 5.18 민주화운동 청문회 후 여론악화로 1990년 1월 8일 사퇴.[4] 1990년 4·3 재보궐선거에서 당선.[5] 1990년 4·3 재보궐선거에서 당선.[6] 원래 표기는 鄭[7] 전두환 사형판결문[8] 대구 서구 갑 국회의원 시절엔 서구 내당동 황제맨션에 거주했다.[9] #[10] 무역경영 전공[11] 석사 학위 논문: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한국의 대응방안에 관한 연구(1992.)[12] 박사 학위 논문: 한국과 주요 경쟁국의 대미 수출경쟁력에 관한 실증적 연구(1999.2.)[13]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있다.[14] 중학교 평준화 조치로 폐교 후 경운중학교로 재개교.[15] #[16] 경북고등학교 32회로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외에도 김윤환 전 의원, 유수호 전 의원,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이상경 전 대구은행장이 있으며 동기생은 약 130명이다.[17] 전두환과 노태우가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생이다.[18] 50사단은 그냥 비수도권도 아니고 2작사 관할구역인 대구광역시에 주둔한다.[19] 이 때문에 훗날 본인은 특전사령관에 임명될 때까지만 해도 전두환 세력이 5공 집권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고 주장했다.[20] 이 시절만 해도 특전사령관과 수방사령관, 보안사령관은 소장 보직이었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부를 거치며 중장 보직으로 격상된 것. 그 외에도 여러모로 전두환 집권 이후 계급 인플레이션이 심해졌다.[21] 당시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라는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22]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거짓 해명을 하며 한 말. 5.18 당시 발포 명령자로 의심되며 적어도 5.18에 깊이 연관된 그가 한 말이라는 것이 몹시 역설적이다.[23] 2군 지역은 후방이라는 특성상 동원사단 위주로 구성되어있어서 중요도가 낮다보니 군단이 없고 군단보다 급이 낮은 관구사령부가 군단의 역할을 대신했었는데 2군 지역에 있던 관구사령부를 통폐합하여 9군단, 11군단으로 격상시켰다. 다만 군단으로 격상되긴 했지만 워낙 규모가 작았던데다 예산 낭비라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었고 결국 9군단과 11군단은 참여정부 시절에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해체되어 2군 지역에는 현재 군단 편제 자체가 없고 사령부 - 사단이라는 해괴한 편제를 가지게 되었다.[24] 정호용의 경북고-육사 동기인 노태우는 제1야당 평화민주당 대표인 김대중과의 영수회담에서, 정호용의 경북고 동기동창이자 당시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였던 허주 김윤환은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김원기와의 밀실 합의에서 정호용의 의원직 사퇴만은 막아달라고 간곡히 사정했지만, 호남을 주 지지기반으로 둔 평화민주당 입장에서는 수용할 수 없었다.# 사실 말이 자진 사퇴이지 박철언 당시 정무제1장관이나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문제로 경북고 후배인 서동권 당시 안기부장에게 멱살을 잡히기까지 했다고 한다.[25] 여론이 이렇게 된 데에는 정호용 본인이 자기 무덤을 판 것도 한 몫 했는데 현역 국회의원이었던 정호용이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왔는데 여기서 정호용이 "저는 절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광주사람이 미워서 아녀자를 쏘고 아기들을 쏘고 할 이런 군인은 대한민국에 없다고 봅니다."라며 거만한 태도로 야당 의원에게 호통을 쳤고 야당 의원들이 준비해 온 자료를 보여주며 학동 주남마을 양민학살사건에 대해 책임을 묻자 정호용은 대뜸 글자도 제대로 안보이는데 뭐 어떻게 알아먹으란 말이냐며 해당 의원을 조롱했다.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의 핵심 책임자인 특전사령관이었던 데다 청문회에서 보인 고압적이고 비아냥거리는 태도 때문인지 여당인 민정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막나간다는 이미지가 있었다고 한다. 반면 똑같이 현역 의원이었던 정동호나 1992년 14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하게 되는 허화평 같은 경우 모른다는 태도로 일관하긴 했어도 정호용처럼 동료 의원을 대놓고 조롱하면서 막나가진 않아서 반감이 훨씬 덜했다고.[26] 당시 백승홍 후보가 선전한 요인은 정호용의 후보직 사퇴에 서구 갑 선거구 주민들이 지역구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데 이어 후보직도 마음대로 사퇴했다는 데에 불만을 느낀 것과 백승홍 후보가 이를 잘 캐치해 낸 것이 주 원인이다.[27] 이 같은 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기에 서구 갑은 1990년대 당시 지금의 수성구 갑 못지 않은 정치적 위상을 자랑했다. 지금은 선거구 자체가 단일 선거구로 통폐합되었지만 말이다.[28] 이를 계기로 문희갑은 민주자유당을 탈당 후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친여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장에 출마해 당선된다.[29] 1990년 서 갑 재보궐선거 당시 맞붙었던 문희갑과 다시 경쟁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30] 도청 진압도 조언(?)만 해줬을 뿐 방관자 입장이었다고 주장했다.[31] 노태우 정부 말인 1992년 14대 총선에서 국회 복귀에는 성공했지만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과거사 청산에 따라 구속되며 정계를 완전 떠나게 된다.[32] 다만 5.17 내란 당시엔 정호용도 군 개입을 적극 옹호한 사례가 드러난다.[33]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에 임명되자마자 다신 이런 일이 있어선 안된다며 상관에게 총부리를 돌린 최세창 3여단장의 발포를 문책하고, 당시 가족장으로 조용히 마무리하려던 김오랑 소령의 장례식을 보안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대장으로 치렀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했던 걸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전임 특전사령관의 말로를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이 때문에 3허에 찍혀 이후 특전사령부 내부 권력도 특전사 작전참모로 온 장세동에게 점점 집중되었다고 본인은 주장했다.[34] 노태우계 인사들은 이전부터 꾸준히 광주 문제에 대해 사죄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지만 전두환 측 인사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왔는데 5공 측 인사라고 할 수 있는 정호용이 처음으로 5.18 진상규명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이에 따라 5공 정권 내에서 핵심 실세였던 장세동, 박희도, 허화평과 상대적으로 겉돌았다고 볼 수 있는 정호용 간에도 상당한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도 있다.[35] 2003년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 만적 역,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김유신 역, 2010년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비류왕 역.[36] 노태우가 "쓰리 허 수석들 일명 허 가 허 가들이 우릴 물로 본다"고 말하자 "뭐 물? 크하하하하하하핳 야! 물은 너 아니가? 크하하하하하하핳..."하는게 웃음 포인트다.[37] 이름이 언급되지도 않고 이름표도 점퍼를 입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38] 그 덕분에 12.12 군사 쿠데타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음에도 신군부의 집권 후 군과 정부에서 주요 고위직들을 많이 역임했다.[39] 참고로 노태우랑은 동갑이고 전두환보단 1살 어리다.[40] 훗날 정호용이 정치를 하게 되면서, '실탄'이 필요할 때마다 찾아왔다는 내용도 나온다.[41] 사실 정호용이 육사에 입교하던 50년대 당시에는 고등교육기관이 사관학교를 제외하면 서울대나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정도밖에 없었는데 완전 공짜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없었다. 이 때문에 학비를 벌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 출신 수재들이 사관학교에 몰려들었다. 게다가 50년대는 미국과 UN의 지원이 빵빵할 때라 미국물을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육사였다. 더군다나 육사 11기는 첫 4년제 정규 육사였으니, 하나회의 훗날 행보와는 별개로 당시 육사생도들은 초고등교육을 받는 엘리트 집단이었다.[42] 사실 정호용은 12.12 때 대구의 50사단장이라서 자기 병력도 동원되지 않았고 직접 참여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반란군과 진압군으로 나뉘어 서로 싸워야 했던 부대를 수습하러 내려왔으니 좋든 싫든 김오랑을 매몰차게 대하기 어려웠다.[43] 이에 뉴스타파에서 정호용을 찾아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정호용은 "아 그때 살던데? 많이 올랐지... 근데 그거는 당신도 집 사서 팔아봐... 그러면 올라..."라는 말을 남겼다.[44] 물론 거짓 제보로 드러났고 정호용 입장에서 억울할 만한 상황이라서 욕을 한 게 아주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45] 유일하게 장세동이 너무 막 나가는거 아니냐고 한소리 했다는 풍문이 전해지는데 역으로 정호용이 장세동을 대놓고 면박을 줬다는 이야기가 있다.[46] 다만 정호용은 12.12 당시 대구의 50사단에 있었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47] 애초에 이 5인방 중 최초로 죽은 노태우가 2021년 10월 26일까지 살아있었다. 불과 1년 사이에 정호용을 제외하고 4명이나 사망했다.[48] 전두환의 경우 사망 몇년 전부터 살이 빠지고 인상이 극도로 나빠지는 등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징조가 보얐으나 정호용은 머리만 백발이 된걸 제외하면 체구가 줄거나 하진 않았다. 도리어 동년배의 노인들에 비하면 꽤나 정정한 축에 속한다.[49] 1990.1.8. 의원직 사퇴.[50] 전임자 정호용(본인 맞다) 의원직 사퇴로 발생한 선거. 이 당시는 소위 맹형규법이라 불리는 법이 제정되기 전이어서 본인의 사퇴로 벌어진 재보선에 본인이 재출마할 수 있었다.[51] 1992.11.21. 민주자유당 입당.
1995.12.22. 신한국당 탈당.[52] 옥중출마.
1995.12.22. 신한국당 탈당.[52] 옥중출마.
분류
-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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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민주화운동/관련 인물 및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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