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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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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비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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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맹희
(1993~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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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
CJ그룹 명예회장
이맹희
李孟熙|Lee Maeng-hee
파일:이맹희 뉴스웍스.jpg
<colbgcolor=#000> 출생 1931년 6월 20일
경상남도 의령군
사망 2015년 8월 14일 (향년 84세)[1]
중국 베이징시
본관 경주 이씨 (慶州 李氏)[2]
학력 수창국민학교 (졸업 / 30회[3])
경북중학교 (졸업)[4]
도쿄농업대학 농학부 (농업학 / 학사)
도쿄농업대학 대학원 (농업학 / 석사)
미시간 주립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박사과정 수료)
부모 아버지 이병철, 어머니 박두을
형제자매 누나 이인희
남동생 이창희, 이건희
여동생 이숙희, 이순희, 이명희
이복남동생 이태휘
이복여동생 이덕희, 이혜자
배우자 손복남[5]
자녀 장녀 이미경
장남 이재현
차남 이재환
삼남 이재휘[6]
병역 면제 (국외 장기체류)[7]
경력 삼성물산 부사장 (1968 ~ 1987)
삼성전자 부사장 (1968 ~ 1987)
제일모직 부사장 (1968 ~ 1987)
제일비료 회장 (1993 ~ 2003)[8]
CJ그룹 명예회장 추대[9] (2015)

1. 개요2. 기업인 활동3. 왕자의 난과 후계 관련4. 이건희와의 소송전5. 정치권에 대한 평가6. 여담7.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생전 제일비료의 회장이자 명예회장이었다. 사후 CJ그룹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참고로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이맹희는 CJ그룹 경영을 하거나 회장이었던 적이 없었다. 이병철이 사이가 멀어진 이맹희를 건너뛰고 며느리인 손복남과 장손인 이재현에게 CJ 지분을 바로 넘겨주었기 때문. 다만 이맹희의 아들, 딸을 비롯한 후손들이 현재도 CJ그룹을 소유 및 경영하고 있고 사후에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이맹희 역시 CJ 쪽 사람으로 분류되고는 한다.

삼성의 창업주 호암 이병철의 장남. 이인희 한솔그룹 창업자의 남동생이자 이창희 새한그룹,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의 큰형이며,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오빠이다. CJ그룹 이재현 회장과 이미경 부회장, 이재환, 이재휘의 부친이다. 또한 이재용의 첫째 큰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맹희는 공식적으로 <묻어둔 이야기>[10]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자서전을 남겼다. 얼음처럼 차가운 아버지 이병철과는 달리 아들 이맹희는 그 성격이 불같아서 별명이 '불칼'이었다.

2. 기업인 활동

파일:external/biztribune.co.kr/28d4f763e59c2226ff00845bdf025f90_LBqvPDgUWFHCDtd8MJSP.png

이병철의 장남으로써 혈통 부분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데다가, 1960년대부터 삼성전자, 중앙일보, 삼성물산, 제일제당, 신세계백화점, 동방생명, 안국화재, 제일모직, 성균관대학교, 삼성문화재단 등에서 부사장, 전무, 상무 등 17개 주요 계열사 임원직을 도맡아 사실상 삼성 내에서는 아버지에 이은 2인자라고 볼 수도 있었고 명실상부한 삼성그룹의 후계자였다. 최소한 1960년대까지는...

그러나 그의 후계자 인생에 큰 난관이 생기는데, 바로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었다. 참고로 당시 이병철이 물러나면서 이맹희가 회장직을 대행한 줄 아는 이들이 있는데 뉴스 라이브러리를 검색해 기사들을 보면 알겠지만 1968년에도 삼성물산 회장은 이병철이었다. 다만 이맹희는 정식 직책은 부사장으로 정식 대행은 아니었지만, 당시 매일경제 기사를 보면 그룹내에서도 총수라고 불리며 일종의 대리청정 체제로 실제 경영을 하긴 했다. 그 기간에 대해선 6개월이라는 이병철과 7년(1966~1973)이라는 이맹희의 말이 엇갈리나 이용우도 7년이라고 했고 실제 당시 기사들을 봐도 이 때에는 이맹희가 실권을 휘두르고 있을 때라 7년설에 더 무게가 실린다.

경영권을 물려받은 이맹희는 이용우의 글에 따르면 일벌레처럼 열심히 일만 했다. 그런데 지나치게 과도한 의욕을 보인 탓에 몇몇 창업 공신격인 임원들과도 충돌하고 직원들로부터도 원성을 샀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성격이 불 같아서 화를 잘 냈다고 한다. 어느 정도 성격이었냐면 아버지의 애인인 구라다상에게에 욕을 할 정도 였다. # 리더가 직원들 보는 앞에서 작업복 차림으로 너무 열심히 일하다 보니, 솔선수범보단 오히려 부담이 된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기업가에서 태어났다면 성격이 잘 맞아서 회장 자리에 올랐을지도 이맹희는 아버지와는 충돌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우려를 자아낼 만한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가 계획한 것과 약간 다른 방향으로 그룹을 이끌려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전자 및 중화학 쪽으로 삼성을 이끌어가고자 한 반면, 그는 전자 및 자동차 쪽에 중점을 두고자 했다는 말도 있다.# 이맹희는 비록 삼성 후계자가 되지 못했지만 삼성에 계속 관심을 두었고 경영 합리화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내가 삼성에 바라는 또 다른 점은 훌륭한 사원들과 더불어 이젠 삼성이 세계를 무대로 경쟁을 해갈 요소 즉, 기업 경영의 합리화와 기술 축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느냐고 할는지 모르지만 아직도 국내의 다른 기업들과 시장 점유율 문제로 아옹다옹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 답답할 때가 많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얼마 전 TV 수상기 조립 라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상대사는 아직 라인마다 60명이 앉아서 일하는데 삼성은 20명만 앉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라인의 길이도 다른 회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굉장히 짧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고 며칠 동안 흐뭇했다. 그 이야기야말로 내가 평생 살아오면서 늘 듣고 싶었던 바로 그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 역시 그 라인의 개발에 참여한 듯한긍지마저 가졌다. 이런 경우라면 생산비도 급격히 줄어들고 남는 인력을 보다 창조적인 일로 전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생기는 기업의 이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나는 삼성이 이런 경쟁을 계속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나는 요즘도 방안에 소니, 도시바, 파나소닉, 빅터, JVC, 금성, 삼성 등 모든 A/V 메이커들의 오디오, 비디오를 마치 잡동사니처럼 넣어두고 늘 이것저것을 듣고 본다. 내가 돈이 많아서 하는 호사 취미가 아니다. 나는 이런 오디오, 비디오 제품들을 통해서 늘 음질과 화질을 비교해 본다. 나름대로는 여러가지를 비교해 보는 이런 작업 태도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삼성이 앞으로도 이런 식의 나름대로의 끊임없는 연구 태도를 지녔으면 한다. 기술 개발을 통해서만 가능한 생산증대와 수출증대는 예전에 우리가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식상한 말이 되어 버렸지만 실제 한국이라는 나라가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경영 실적이 생각보다 좋지 않자 이맹희의 후계구도에서의 독보적 위상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기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9년 동생 이창희가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이병철 회장의 눈 밖에 나면서 17개 계열사 임원직을 맡았던 그가 1973년엔 부사장 자리 3개만 남겨놓게 되며 사실상 후계구도에서 탈락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병철의 본처 박두을 여사와 삼성가의 오래된 심복인 박윤갑 등이 이맹희를 강력하게 지지했기 때문에 후계자 문제를 두고 이병철이 꽤 오랫동안 장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일화를 보면 이병철 회장이 이맹희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임원직을 맡고 있는 여러개 계열사 명단을 쭉 써보라 한 뒤, 맡고 있는 직함이 너무 많다며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 부사장 자리 세 개만 남겨놓고[11] 나머지는 모두 취소선을 그어버리며 그 자리에서 해고 통보를 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어땠냐면...
이병철 "니, 미국에서 무슨 공부를 했노?"
이맹희 "아부지, 저 경영학 박사학위 안 받았습니꺼."
이병철 (맹희가 그간 보여준 몇몇 실수를 거론하면서) "한심한 놈! 미국에 유학 가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카는 그릇이 고작 그거밖에 안 되나? 니, 지금 삼성의 직함을 몇 개나 가지고 있노?"
이맹희 "정확히는 모르지만, 한 열댓 개는 되는 것 같습니더."
이병철 "니, 그거 혼자서 다 할 수 있나?"
이맹희 "일일이 다 잘 할 수는 없습니더"
이병철 "그라믄, 니가 할 수 있는 거만 해라"

이 일화를 이병철의 카리스마식으로 미화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인데,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면 아무리 아버지더라도 총수 한 사람의 말 한 마디로 즉각 직위를 날려버리는 비체계적이고 불합리한 행태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일화기도 하다. 이런 케이스가 한국에선 워낙 비일비재하다보니 무감각스럽게 웃고 넘어갈 뿐.

위 경우 이외에도 이맹희가 개발 소식을 미리 듣고 땅을 매입해두었더니 이병철이 그 일을 보고받고 격노해 "너는 아직 기업가가 아니다. 기업가는 이윤이 나도 하지 않아야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이병철의 명령으로 그 땅은 도로 매각했고, 그 돈의 수표를 이병철에게 내밀었으나 이병철은 손도 대지 않고 연필로 그 수표를 밀어버리며 "이건 내 돈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거부했다고 한다. 수표를 연필로 밀어버릴 정도로 그 돈은 더러워서 만지기도 싫다는 뜻.

자신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크게 좌절한 이맹희는 일본으로 잠시 떠나있다가 1975년 귀국한 후, 겨울에는 사냥하러 다니고 여름에는 워커힐에서 을 타는 야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수순에 이른다. 주로 경북 지역 여기저기 산재한 별장에 머무르면서 지냈다고 한다. 이때 이맹희에 따르면 납치 시도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1987년 이병철이 사망하고 후계자로 내정된 셋째 동생인 이건희가 삼성그룹 회장이 되면서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직책에서도 완전히 물러난 뒤, 삼성그룹과는 상관없이 본인이 별도로 설립한 기업인 '제일비료'의 대표가 되기도 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결국 사업을 접었다.

이병철의 유언에 따라 장손이자 이맹희의 맏아들인 이재현의 몫으로 내정되었던 제일제당은 19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 독립한 뒤 오늘날의 CJ그룹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분리 당시 이재현의 나이가 34세에 불과했으나, 이맹희는 경영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퇴출되어 경영 일선에 나서지 않은 채 야인 생활을 계속하였고 이맹희의 처남이자 이재현의 외삼촌인 손경식이 후견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공동회장을 맡았다.

1993년 회고록인 '묻어둔 이야기'를 집필한 것 외에는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방송 인터뷰도 SBS <주병진쇼> 1993년 9월 5일 방영분전부였다.

2015년 8월 14일 폐암으로 중국에서 타계했다. 사후 5시간 뒤에 CJ그룹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3. 왕자의 난과 후계 관련

파일:image_readtop_2016_798357_14792837962683984.jpg
1988년 12월 13일 장충동 자택. 부친 사후 1년이 지나 인터뷰를 하는 모습.

흔히 일컫는 1969년 삼성판 왕자의 난은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가 주범인 것으로 알려져있는게 정설이다. 사건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총대를 메고 감옥을 갔다온 이창희가 자기를 푸대접하는 이병철한테 화가 나 당시 청와대에 삼성 관련 비리를 고발하며 아버지를 처벌해달라는 투서를 보냈고, 당시 청와대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패륜이라며 못본 척 하자, 이를 알게 된 이병철이 이창희를 사실상 호적에서 파버린 사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장남 이맹희도 이창희의 탄원서 투서에 협조 혹은 공모를 했다는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해당 탄원서를 이맹희와 가까운 청와대 사람들[12]이 중간에 만지게 된 것이 밝혀지면서 이맹희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실권을 쥐기 위해 고향 친구인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매개체로 공작을 꾸민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맹희 본인은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부정했고, 실제 당시 전두환, 노태우 등은 어린 나이라 별다른 권력은 없었다.[13] 당시 이들의 리더인 윤필용이 개입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맹희는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공모 혹은 방관설을 정면 반박했는데,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동생인 이창희가 아버지를 내치려는 음모 시도를 눈치채어 화가 난 나머지 이창희의 벤츠 자가용을 때려 부수며 크게 혼낸 적이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왕자의 난이 일어나던 무렵 자신은 해외 기업들과의 기술제휴 협상 차 해외 출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보니 경영 일선에서 복귀를 시도하던 아버지를 방해하는 듯한 행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기에 아버지가 그런 의심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사건이 터지던 무렵에도 자신은 필립스와의 합작 문제로 독일에 출장 중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청와대 사람들과의 관계와 왕자의 난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사카린 사건 이후 청와대 측과의 관계가 서서히 개선되는 상황이다보니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으나 실상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결정적으로 회고록을 작성하는 시점에서 관련 주변인들도 생존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거짓말로 회고록을 쓸 수 있겠냐며, 본인은 맹세코 왕자의 난에 대해 완전 결백함을 맹세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진실이 무엇이건간에, 이병철은 왕자의 난 사건으로 인해 장남인 이맹희까지 한통속으로 의심한 듯하며, 충격이 컸던 이병철로서는 이맹희의 적극적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완전히 떨쳐내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병철이 결혼 문제도 있어 완전히 포기한 듯한 차남과 달리 장남인 이맹희에 대해서는 종종 탄식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종합해보자면 자식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병철이 경영권과 관련하여 한층 예민해지기 시작한데다, 결정적으로 자존심이 센 이맹희가 왕자의 난 이후에도 아버지의 권위에 대항하는 듯한 처신이 문제가 되면서 부자지간의 정에 금이 심하게 가는 바람에 이맹희가 그룹의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멀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에 의해 계열사 임원직에서 대거 해고된 후엔 이병철 회장이 본인이 있던 일본을 들린 적이 있음에도 공항에 마중 나가지 않았고, 이병철 회장이 도쿄지점 직원들과 회식을 하며 지시를 하는데 제동을 걸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권위에 반기를 든 것으로 보고 관계가 더 멀어지게 됐다고 이맹희는 회상했는데, 자식으로서 자존심을 죽이고 아버지에게 숙였으면 후계구도 개선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이맹희 역시 당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멀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76년 후계자로 내정된 삼남 이건희의 경영권 승계에 있어서 장남인 이맹희가 방해가 될까 싶어 정신병원에 감금(...)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성의 이런 움직임을 우연히 알게 된 친구 검사가 귀띔을 해준 덕에 지방 별장에 기거하면서 사냥용 총을 가지고 있다가 자신을 잡으러 온 삼성의 인력들에게 총을 겨누어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물론 진짜 그랬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부자지간에 이런 말들이 나온다는 거 자체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맹희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 회장을 비롯한 가족들이 자신을 정신병원에 감금시키려 했다는 게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삼성이 보낸 인사들이 자신을 잡으러 왔을 때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를 켜서 물리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압박이 들어와서 결국 전국을 떠도는 신세가 된다.
어느날, 서울 치안본부에서 일하는 친구 김아무개가 급한 전화를 해왔다. “맹희 너한테 꼭 할 말이 있는데 내가 부산까지 가기는 어렵고 대전쯤으로 올래?" 뭔가 여러가지 낌새가 이상해서 내가 바로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서울에서 이 친구를 만났더니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 “너네 회사, 삼성에서 누가 나한테 와서 네가 성광증(性)이 심해서 서울대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맹희 네가 말을 안 들을 것 같아서 그런지 형사 두 명만 보내달라고 하더라.
그래도 이병철이 죽기 전 이맹희는 이병철과 화해를 했다고 한다.
"아부지, 그동안 못 찾아뵈서 죄송합니다. 용서하이소. 인제 아부지 곁에 있겠심더. 앞으로는 절대 아부지 곁에서 안 떠나겠심더." 여동생 명희가 곁에서 '오빠가 그런 소리를 해도 아부지한테는 안 들린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듣든 못 듣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내 결심이었다. 나는 내가 첫날 인사를 드릴 때, 말씀이 없으셔도 얼굴 가득히 밝은 표정을 짓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 후 일주일 동안 계속 나를 보면 미소짓던 얼굴도 잊지 못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무려 15년만에 처음으로 보는 아버지의 따뜻한 미소였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그때 그 따뜻한 미소가 나를 용서하는 시그널이라고 믿고 있다. 긴 세월을 돌아서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화해를 했다. 내가 용서를 빌고 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면서 그 모든 과정들은 흘러 가버린 것이다.
이맹희는 또한 자신과 갈등이 있었지만 사업가나 인간으로서의 이병철은 존경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식사를 하고, 저녁 8시면 늘 목욕을 하는데 목욕물의 온도도 일정해야 했다. 1도 정도의 수온 차이를 쉽게 알아 차리기 때문에 언제나 목욕물의 온도를 맞추는 것은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당시는 특별한 수온 조절 기계가 없었기 때문에 목욕 시간이 불규칙적이면 목욕물 수온을 맞추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늘 저녁 8시를 기준으로 목욕물의 온도를 맞추면 어김이 없었다. 집안일 돕는 이가 수온을 맞추어 두고 목욕탕 문을 나서다가 목욕 탕으로 들어서는 아버지와 욕실 입구에서 부딪힌 경우가 허다했을 정도로 아버지의 목욕시간은 정확했다. 시계를 보고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었던지 지금도 신기하게만 생각된다.

4. 이건희와의 소송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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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20일 이맹희 영결식. 김창성 전방 회장의 조사 낭독.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이후 동생인 이건희가 삼성그룹을 맡고 이병철의 재산상속 문제 등도 얽히면서 두 사람은 말년까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것은 결국 삼성CJ그룹의 갈등으로 번져갔으며 한때 삼성전자 전무였던 사람의 CJ그룹 이재현 회장 미행설이 나돌면서 갈등의 정점을 찍기도 했다.[14] 이에 제대로 빈정이 상했는지 이건희는 형제들의 집에 CCTV까지 설치해서 서로를 감시하고, 함께 지내던 호암 제사조차도 완전히 따로 지내게 되었다. 2012년 이병철 추모식 때는 삼성이 CJ 관계자들의 방문을 불허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맹희는 이건희가 상속 과정에서 다른 형제들의 재산을 가로챈 혐의가 있다며[15] 2010년대 들어 상속 문제 관련 소송을 걸게 되는데, 이에 대해 한 언론에서는 이건희의 정권 무시적(?) 발언[16]에 분노한 정권이 이건희를 대놓고 어쩌지는 못하고 대신 CJ에 소송을 권유하여 일을 벌였다는 후일담을 보도하기도 했다. 물론 진짜인지는 미지수.

이런 이맹희의 주장에 대해 2012년 소송 당시 이건희는 삼성이 너무 크니 욕심내는 것이라며 출근길 기자들의 질문에 기분 나쁘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30년 전에 자신을 군대고소하고 아버지를 형무소에 넣겠다고 청와대에 고발까지 했다가 우리 집에서 퇴출당한 양반"[17], "자기 입으로는 장손이다, 장남이다 그러지만 이미 아버지께서 맹희는 완전히 내 자식 아니다라고 못 박았으며, 지금도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18] 이후 아무리 그래도 한테 발언이 너무 심한거 아니냐는 반응도 있어서인지 이후 사적인 일로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입장을 냈다.#

이후 소송 싸움은 1, 2심 모두 이건희 측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에 대해 당시 법원은 이맹희와 그 외 형제들의 지분은 인정하면서도 10년의 제척기간(법률적 권리 행사 기간)이 경과되어 효력을 잃었다는 식으로 이건희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하는데, 사실 이맹희 측이 알게 된 시점이 이미 10년이 지난 시점이라 좀 억울한 부분은 있을듯하다. 물론 이병철 유산이라는 것의 형태 자체가 진짜 있는건지 아니면 이건희가 비자금 핑계를 대는 과정에서 나온 거짓말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이런 판결에 대해 당시엔 삼성이 법조계에 깔아둔 삼성장학생 출신 판사가 장난질 친 것이란 음모론이 일기도 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2심 이후 대법원 상고를 포기한 이맹희는 유산보다 형제우애가 더 중요하다며 일단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미 둘 다 노령에 살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일종의 인생무상을 느낀 듯 하다. 애초에 소송도 이건희 말마따나 삼성이 워낙 컸으니 자기 자식들 기업에 좀 더 보태주려고 한 것일지도.. 진실이 무엇이건 결국 소송을 마무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15년 이맹희는 폐암으로 사망하고, 이건희 역시 2014년부터 이미 급성심근경색으로 병실 신세를 지다가 2020년 신부전으로 사망한다. 소송 마무리 직후 양쪽의 분위기가 좀 누그러지고 화해 운운하는 말이 관계자들 입에서 나오기도 했으나 결국 살아생전 직접적인 화해는 하지 못했다.

5. 정치권에 대한 평가

이맹희는 저서에서 박정희 정권을 부패한 집단으로 매우 좋지 않게 평가했다.[19]
박정권 하에서는 대부분의 정부 관료들이 쉽게 부패에 빠져들어갔다. 뇌물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출장비를 얻어 쓰는 것은 다반사였다. 어느 공사에나 뇌물이 필요했고 모든 서류에는 과정마다 돈이 필요했다.
박정권 시절 하도 권력의 주변에서 청탁이 많자, 언젠가부터 나는 그런 청탁을 통해서 들어오는 직원은 정식 입사보다 한 계급 낮은 4급의 직위를 부여하고 1년씩 근무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자연히 옥석이 가려졌다. 어차피 좋은 직장인이 되지 못할 사람은 그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아버지가 원했던 것은 호사스러움이 아니라 고풍이 살아 있는 예술품이었다. 그것은 돈보다는 안목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박정권 때의 정계 사람들은 마치 요즘 졸부들처럼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다. 물론 돈이 많이 들 수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고가품이 아니라 고풍스러운 것을 좋아했다.
그나마 이런 부패상 속에서도 남덕우 총리만큼은 청렴했다며 호평했다.
남덕우 총리의 경우는 달랐다. 평소에도 뇌물은커녕 선물마저도 사양했고 늘 청렴결백한 선비 같았다. 나는 지금도 박정권이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그나마 그 정권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관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는다.
전두환과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으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이후 자신을 홀대하여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특히 이맹희가 이병철과의 갈등으로 인해 영덕에서 거주하려 할 때 전두환이 은행 융자를 막았다고 한다.
전 대통령 시절이었는데, 내가 그곳에 정착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 대통령은 아버지에게 연락을 한 것 같았다. 결국 그곳에 집을 지으려고 은행 융자를 내려고 하니 집안의 친척이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고 와서 내가 거래하고자 했던 은행마다 '융자를 해주지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게다가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부터 죽마고우이면서 나를 홀대했던 일도 겪었다.

6. 여담

7.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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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인은 폐암.[2] 판전공파(判典公派)-사정공파(司正公派) 중시조 40세 ○희(○熙), ○형(○炯) 항렬.[3] 이종식 전 국회의원과 동기동창이다.[4] 32회로 절친동창이 노태우, 정호용, 김윤환, 김복동, 이원조 등이 있는데 묻어둔 이야기에 의하면 김윤환 오줌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그 외에도 윤필용, 전두환, 박종규와도 친분을 과시했다. 이는 아버지의 눈밖에 나는 계기 중 하나였다.[5] CJ그룹 고문. 손경식 CJ그룹 회장의 누나.[6] 영화배우 박 모 씨 사이에서 낳은 혼외자.[7] 6.25 전쟁 당시 만 19세여서 병역판정검사 대상자였지만, 6.25 직전인 1950년 1월부터 전쟁이 끝난 1956년까지 공부하러 일본에 가 있었으므로 징집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는 남동생 이창희도 마찬가지이고 훗날 범한진가 3형제(조남호, 조수호, 조정호)도 미국 장기체류로 군면제다. 물론 지금은 외국 국적으로 귀화했거나, 이중국적이거나, 외국 영주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한국 국적자라면 얄짤없이 만 29세 이전까지 국내로 돌아와 병역판정검사를 받는다.(그나마 외국 영주권을 갖고 있거나 이중국적인 사람도 한국에서 살고 있으면 병역판정검사를 회피할 수 없다. 외국 영주권자가 한국에 계속 있으면서 군대를 가지 않으려면 평소에는 외국에서 일하면서 한국에서 최대 몇 달 정도만 머무르는 것이 한계. 최지만의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8] https://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44977[9] 별세 후 CJ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어 CJ그룹 회장인 줄 아는 이들도 더러 있는데 전혀 아니다. 제일비료는 그가 삼성그룹 탈퇴 후 설립하여 효모 사업을 영위하던 기업이었는데, 돈이 꽤나 깨지는 업종일 뿐더러 지금으로 따지면 대형 그룹을 지휘했던 사람이 스타트업 규모 기업의 디테일한 업무에 어려웠던 건 어쩌면 당연지사. 결국 1999년 12월 15일 휴면회사 전환, 2003년 12월 1일 결국 청산종결됐다.[10] 자기 삶과 경영 철학에 대해 솔직하게 서술했다는 평가가 있다.#[11] 사실 여기도 실질적인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12] 대표적인 인물이 이맹희와 고향 친구이기도 한 전두환이었다.[13] 실제 이맹희가 하나회 출신들과 경영권 확보를 시도했던 것은 1980년대 신군부 출범 이후이다. 당시 이맹희와 친했던 경북고 출신 인물 몇이 이맹희에게 삼성을 찾아줘야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병철이 발 빠르게 신현확을 내세워 후계작업을 정리하면서 신군부는 삼성 후계작업에 전혀 관여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이맹희는 회고록에서 젊은 시절 챙겨줬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고 나선 자신을 탄압했다며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다.[14] 항소심 재판 결심공판에서 이맹희가 재판부에 제출한 A4 용지 5장 분량의 편지를 보면 미행 내용 등이 등장한다.[15] 이건희가 1990년대 이후 삼성 편법 상속을 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이병철의 유산은 확실히 이맹희에게도 그 지분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애시당초 이재용에게 삼성을 물려주면서 상속세를 안내려고 이건희가 머리를 굴렸고, 검찰 조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이건희의 비자금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든 잡아때려고 이병철의 유산으로 조성되었다 거짓말을 했으니 당연히 이맹희도 자기도 모르는 이병철의 유산이 발견되었으니, 그 유산에 대한 지분을 요청할 수 있었다.[16] 2011년 3월 11일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하여 "낙제점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당연히 당시 이명박 정부에서는 반발했다. 참고로 이건희 회장은 1995년에 "한국의 기업은 2류, 관료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다. 정부의 행정규제가 풀린 게 하나도 없으며 그로 인해 경제가 발목 잡혔다."고 직격탄을 날린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YS의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투자 승인보류.(...) 결국 청와대 가서 GG치고 승인 받았다.[17] 다만 상기했듯 이맹희는 죽을 때까지 투서 사건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부정했다.[18] 참고로 여기서 이맹희는 장남은 맞지만 장손은 아니다. 이병철은 차남이고 위에 형 이병각(이건희의 큰아버지) 1명이 있으며 이병각의 장남이자 이건희의 사촌형인 이동희가 장손이다. (거기에 이동희는 1924년생이므로 이건희의 큰 누나이자 이병철의 첫째 맏자녀인 이인희(1929년생) 보다도 오빠이다.) 이동희는 숙모인 박두을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장손 문서를 참고.[19] 여담으로 동생 이건희 회장도 군사정권에 대해선 이 나라 정치, 경제를 50, 100년 후퇴시켰다고 혹평한 바 있다.[20] 참고로 이건희도 키가 콤플렉스였는지 장신이던 홍라희와 결혼했고, 실제 모계 영향과 영양 섭취도 많이 해서인지 이건희의 자녀들은 키가 큰 편이다.[21] 다만 이재현도 원래는 후덕한 체형이였다. 감옥살이와 지병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체중이 많이 빠진 것이다.[22] 동생인 이건희 회장을 모티브로 한 '국철규'(손지창 분)보다도 훨씬 비중이 큰데, 당연한게 2부 작중 주요 시점이 6~70년대라 이건희는 후계자로 낙점되지도 않았을 시절이다. 이 시절 삼성 수장은 상기되어있듯 이병철과 이맹희였다.[23] 사실 전두환은 경남 합천 출신이지만 1935년부터 대구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