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밀수, 일 『삼정』과 공모 1966년 10월 5일자 동아일보 1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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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6년 5월 24일 삼성그룹의 계열사 한국비료공업(現 롯데정밀화학. 2015년 인수)이 일본 미쓰이 그룹과 공모하여 사카린 2,259포대(약 55톤)를 건설 자재로 꾸며서 들여와 판매하려고 했다가 들통난 밀수 사건. 사카린 이외에도 현금화가 쉬운 일제 냉장고, 밥솥, 양변기 등 말 그대로 당대 재벌 삼성그룹이 잡상인마냥 밀수를 자행하다가 걸린 황당한 사건. 한국비료가 관련된 데다 한비 회사 자체를 몰수당한 사건이기도 해서 아예 이 사건 자체를 '한비(한국비료공업)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당시 중앙정보부의 비호 하에 정권에 비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은밀한 사업이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이병철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는 1993년 출판한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당시 정치 비자금이 필요했던 정권이 삼성에 접근했고[1] 이게 잘못되어 여론이 불리해지니 삼성한테 책임을 다 뒤집어씌웠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이 사건으로 삼성은 돈과 명예 양쪽에서 모두 큰 손해를 보게 되었고 후계 구도도 크게 뒤바뀌었다.
2. 경과
신문 기사의 여파로 국회에서도 뒤집어졌다. 야당 민중당 등은 물론이고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까지 정부의 모르쇠와 삼성 비호를 비판했다. 여야는 한목소리로 관련자 전원 구속과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1966년 9월 22일 국회의원 김두한이 이 사건에 관한 대정부 질의 도중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 등의 각료를 향해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2]라는 일갈을 날리면서 인분을 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사건으로 인해 정일권 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했고 김두한 본인도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뒤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기타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문서 참조.
이때 박정희 정권은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몹시 좋지 않은 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국회를 난장판으로 만든 김두한 의원에게 화살을 돌려 여론을 바꾸려고 노력했으나 대다수 여론은 "김두한이 깡패 출신이긴 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정말 잘했다!"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여론이 정부에 대해 분노를 쏟아내고 김두한을 칭찬하는 쪽으로 기울자 신민당은 쾌재를 부르면서 김두한을 옹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김두한을 직접 신민당으로 영입까지 했다.
3. 여파
밀수가 들통나고 국민적 공분이 일어나자 정권은 대통령이 직접 수사를 지시하며 공범이 아니라 심판자로서 삼성을 대했다. 덕분에 이병철 회장은 구속 위기에 처했지만 차남이었던 이창희 한국비료 상무가 총대를 메고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1년이 안 되는 수감 생활을 하고 나왔다. 허나 이와중에도 재벌 봐주기라는 비판이 계속되자 이병철 회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한국비료공업[3]과 대구대학[4]을 정부에 반강제로 헌납하고[5] 대국민사과와 함께 은퇴하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의 기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비료 국가 헌납 1년 뒤인 1967년 9월 11일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로버트 메이어 상무담당관 등과 만난 이맹희는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은 한국 정부의 제안에 따라 진행된 일이며 삼성은 중앙정보부 등의 협박에 못 이겨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해 왔다."고 말했다. 심지어 "이맹희는 그의 아버지가 박정희 대통령한테 굽실거리기를 거부한 대가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에 매달 정기적으로 정치자금을 상납하는 가운데, 한국비료를 정부에 헌납하게 되는 진퇴양난까지 겪게 됐다는 것이다. 이맹희는 이병철에게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고, 한국 정부의 부패 스캔들을 폭로하는 방안까지 건의했다."는 구절도 있다.
한편 이 사건의 여파로 이병철이 물러나면서 이맹희가 회장직을 대행한 줄 아는 이들도 있는데 당시의 기사들을 보면 알겠지만 주요 계열사 '부사장직에 앉아 승계권에 엄청 가까워졌다' 정도지 정식 대행을 맡은 적은 없었다. 다만 부사장임에도 1968년 매일경제 신문을 보면 그룹에서 총수라고 불리며 일종의 대리청정 체제로 실권을 행사하긴 했다. 허나 이병철은 복귀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맹희 본인은 이걸 몰랐던게 자신과 아버지의 사이가 멀어진 결정적인 이유라고 봤다.[6]
출소 후 이창희는 감옥 갔다 왔더니 자길 푸대접하는 아버지한테 화가 난 나머지 1969년 아버지 깜빵 보내야 된다고 청와대에 비리 의혹이 담긴 투서를 날렸고(...) 아무리 그래도 자식이 아비를 디스하냐며 청와대가 못 본 척 하자 이 소식을 들은 이병철이 대노해 이창희가 그룹에서 쫓겨나게 된다.[7] 그리고 이맹희 역시 이창희 투서 사건에 엮인 거 아니냐고 의심을 받으면서[8] 이맹희 역시 이병철에게 내쳐져 이후 삼성그룹에 관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죽하면 이병철 사후 CJ그룹의 유산 상속 과정에서도 이맹희를 건너뛰고 이맹희의 장남인 이재현과 이재현의 외삼촌, 즉 이맹희의 처남인 손경식에게 제일제당(현 CJ)이 할당되었다. 지금도 종종 불거지는 삼성그룹과 CJ그룹의 갈등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다만 3세 이후부턴 직접적인 은원은 없다 보니 으르렁까진 아니고 그냥저냥 남남처럼 지내는 모양.
이창희는 이후 새한미디어를 창업해서 경영하다가 1991년에 사망하였다. 새한미디어는 새한그룹으로 발전했으나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2000년에 공중 분해되었다.
덕분에 이때만 해도 이병철 회장의 후계 시나리오에서 삼남 이건희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고 삼성그룹 내 언론사인 동양방송과 중앙일보를 가지고 독립하기로 되어 있었는데[9] 어쩌다 보니 형들이 다 쫓겨나서 훗날 삼성그룹 총수가 되었다.
또한 이 사건과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인해 당시 호남정유가 원래 미쓰이와 제휴하려던 계획을 파기하고 미국 쉐브론 계열사 칼텍스와 제휴하기에 이른다.[10]
한편 이 사건의 원인인 사카린은 이 밀수 사건과 마약을 연상시키는 효과와 모습 때문에 지금도 대한민국에선 사카린을 마약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1] 삼성은 미쓰이물산의 리베이트 제안을 받은 뒤 그 사실을 정부에 알리자 박정희 측이 "그러면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먼저 제의했다고 한다.[2]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문서에 서술되어 있듯 실제로 이 말을 날린 다음 똥물을 투척했다고 한다. 관련 영상에선 7분 47초 쯤에 나온다.[3] 한국비료는 이후 정부 소유의 기업으로 있었지만 1994년 공기업 민영화로 입찰에 올라오자 삼성그룹이 다시 2,300억 원의 거액을 주고 아득바득 인수해 와서 '삼성정밀화학'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2015년 이재용이 롯데그룹에 매각하였다. 현재는 롯데정밀화학.[4] 현 영남대학교. 원래 이 땅은 독립운동을 하던 경주 부자 최씨 가문의 땅이었으나 해방 이후 명문대를 만들겠다는 포부 아래 대구대 운영권을 이병철에게 무상양도한 것이었는데 이걸 이병철 회장이 이 사건에서 벗어나고자 3년만에 정권에 넘겼고(때문에 당시 최준도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이후 영남대학교는 정부에 넘긴 것임에도 박근혜가 재단 이사장을 맡는 등 박씨 가문의 소유와 비슷한 황당한 상태가 되었다.#[5] 이맹희 회고록에 따르면 이후락이 와서 대학을 넘기라고 했고 이에 이병철이 치를 떨었다고 한다.[6] "아버지와의 결별은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가장 큰 원인은 아버지가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제야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지만 당시 아버지는 70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그룹으로 다시 복귀하겠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내가 아둔해서 그걸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이맹희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7] 그나마 쫓겨난 후 3년이나 부친에게 문안을 드리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용서를 받았고 이병철은 차남이 산하의 몇몇 업체를 운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8] 이맹희 본인은 죽을 때까지 부정했다. 이런 의심이 나온 이유는 이 투서를 청와대에 전달한 게 당시 이맹희와 친하던 전두환 중령이었기 때문인데 이맹희 회고록에 따르면 전두환은 자기가 어릴 적부터 대구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사이로(이병철이 삼성상회에서 국수 장사할 때 건너편 빈민촌에 전두환 일가가 살아 전씨 일가가 일종의 품앗이 하러 오기도 했다고 한다) 본인이 부자니 술값 같은 것도 잘 내 줬는데 대통령이 되고 나선 자신을 탄압했다며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다.[9] 이건희의 장인인 홍진기가 중앙일보 초대 사장이었고 이건희도 TBC와 중앙일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10] 현 GS칼텍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