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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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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국민들과 재야 인사들의 반응4. 시위 상황5. 계엄령 선포6. 이후7. 평가8. 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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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4년 대한민국에서 일본과의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항쟁.

2. 배경

당시는 8.15 광복 2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이었고, 35년간의 일제강점기로 인해 그 시대를 직접 겪은 다수 한국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강했기 때문에[1] 어느 때보다 이에 동참하는 이들이 많았던 항쟁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뉴라이트 인사들이 2019년 공동 집필해 출간한 반일 종족주의에선 한국의 반일민족주의가 뜬금없이 1980년 무렵 시작되었다고 서술했지만, 이 6.3 항쟁만 봐도 헛소리라는걸 알 수 있다.[2]

1964년 박정희 정부한일수교를 비밀리에 추진했는데, 정부가 이렇게 한일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게 된 속사정을 보면, 일단 당시 냉전으로 인해 동북아 공산권 국가에 방파제 역할을 하는 한일 양국이 안보적으로 협력하라는 미국의 물밑 접촉, 압박이 있었으며, 당시 정부는 한국의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과 일본의 우수한 기술력을 결합하면 해외시장에 경쟁력 있는 공산품을 수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정부는 일본 도쿄에서 한일 외무 장관 등을 통해서 한일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기로 일본측과 합의하고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도 이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3. 국민들과 재야 인사들의 반응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의 한일 국교 정상화 방침에 대해 당시 대중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으며 '해방된 지 20년이나 되었는데 이제 와서 왜놈들의 칼부림 속에 살으란 말인가', '왜놈과 국교 정상화는 제2의 경술국치이자 을사조약이다', '피 흘려 나라를 지켜낸 호국영령과 애국자들이 크게 통곡한다' 등의 반대 입장을 밝혔다.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해 보면 일제강점기 치하에 살아 온 세대들이 주를 이뤘고 해방 이후 태어난 세대들도 부모의 영향 등으로 인해 반일 감정이 강했던 데다 일제강점기의 모진 시절과 과거사 반성을 외면하는 왜놈들과 무슨 국교 정상화냐며 반대하는 인식이 강했다. 극일 운운하는 경제, 안보도 장기적으로 보면 자주적으로 쟁취하는 것이 훨씬 이득인데다 이미 더 좋은 대안제인 미국이 지원하고 있는데 굳이 일본한테까지 손을 벌리냐고 깠다.[3]

게다가 당시 일본 측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끼친 피해에 대해 어떻게 사과와 보상을 할 것인지 한국 언론에 명확하게 공개하지 않았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자체는 찬성한 사람들도 이 점은 비판했는데 박정희는 국교정상화를 가로막는 난제를 타개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하여 비밀교섭을 벌여 일본 정계 실력자들과 교섭하는 과정에 들어가 국교 정상화 논의를 하면서 양국 간의 협의를 이루겠다고만 밝혔을 뿐이다. 반대 여론을 경청하고 설득하는 민주적 절차가 없어 안 그래도 반일 감정이 폭발하던 마당에 일본이 보인 이러한 태도는 항쟁을 격화시켰다. 이렇게 진행한 이유는 정계 실력자들의 합의에 따라 중요한 의사결정이 내려지는 일본 정계의 의사결정 방식과 관련이 있다.

전 대통령인 윤보선은 대일외교굴욕투쟁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박정희 정권의 이 같은 만행은 한국 역사에 커다란 치욕을 남길 오명의 사건이 될 것이며 역사는 박 정권의 친일 매국에 준하는 이 같은 행위를 호국영령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난하였고 장택상현대판 한일병합에 비유하면서 반대하였다. 여기에 공화당을 제외한 모든 야당과 재야 인사들이 의기투합하여 윤보선을 위원장으로 대일외교굴욕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 및 철회 운동과 투쟁을 벌여나가기로 하였다.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투쟁에 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투쟁위원회 의장의 책임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991) 280p.) 그리고 일반 시민과 대학생들도 이에 동참하여 투쟁에 돌입하였다. 종교단체와 호국보훈단체들도 이에 동참하여 대일 외교굴욕 철회 운동을 하는 등 해방 20년 만에 최대 규모의 반일 시위가 시작되었다.

4. 시위 상황

영상(6분 51초부터)

1964년 3월 24일 서울에서 5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한일수교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한편 이날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8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때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은 교정에서 일장기를 불태우고 박정희와 한일 국교 정상화에 동참한 김종필 인형의 화형 의식, 성토 의식 등을 열었으며 박정희 정권의 친일 매국 행위를 규탄한다는 시위를 벌이면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정부가 이를 빠르게 진압하고 3월 30일 11개 대학의 학생대표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함으로써 일단 진정되었지만 박정희 정부가 한일 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4월 19일을 전후하여 학생 시위는 다시 일어났고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5월 20일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박정희 집권 당시 내세운 명분이 민족적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이 장례식의 조사를 맡은 사람이 바로 김지하다. 후일담에 의하면 당시 김형욱 중정부장은 이 조사를 읽다가 "숨이 막혀서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통렬한 글이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던 김덕룡 전 국회의원은 선언문을 낭독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이에 윤보선은 서울대를 찾아 그를 격려해 주기도 하였다.

전국의 대학에서도 시위에 동참하는 대학생들이[4] 일장기와 일본 수상 허수아비를 불태우고 박정희, 김종필 등 한일 국교 정상화에 동참한 매국노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투쟁에 나섰으며 일부는 박정희, 김종필 등 이른바 친일 매국노 및 민족 반역자 장례식을 거행하는 등 각지에서 시위가 격화되었다. 당시 서울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전국적으로 운동권 학생들의 연락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민비연의 김중태, 박재일, 현승일 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각 학교의 운동권 학생들이 1963년 겨울부터 모여서 치밀하게 준비해 왔기 때문에 전국적인 시위를 일으킬 수 있었다.

시위는 단식농성을 넘어 거리 시위로 확산되었고 대학생과 시민, 그리고 재야 인사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친일 매국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철회하라', '해방 20년 만에 제2의 경술국치의 치욕을 안겨줄 텐가', '국민을 무시하고 일제의 칼부림을 방조하는 사대매국정권은 물러가라' 고 외치면서 반일 및 국교 정상화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일부는 거리에서 박정희, 김종필, 그리고 당시 일본 총리였던 이케다 하야토히로히토 천황 인형을 불태우고 일장기를 불태우거나 찢어 버리고 박정희는 역사의 죄인이자 사대매국을 저지른 민족반역자이자 호국영령들의 충정을 무시한 사악한 인간이라며 비판하였다.

5. 계엄령 선포


대한뉴스 <수도 서울에 계엄령 선포> 보도

반대 시위가 점차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자 6월 3일 오후 8시 비상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경찰들 외에 4개 사단 병력을 서울에 투입하여 진압 조치에 나섰다. 이와 동시에 일체의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이 가능해졌으며 통행금지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졌는데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박정희의 양해 요구에 미국은 협력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시위를 주도한 학생운동권 학생과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대거 체포되었고 이 중 주도자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간 복역하게 되었으며 나머지 재야 인사들도 반정부 혐의로 체포되는 등 진압이 강경해졌다.

이때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강경한 대처와 함께 "각하 트럭 1000대를 징발해 주십시요. 학생주동자 놈들을 무인도로 격리해 쥐도새도 모르게 해치우겠습니다"라고 요청했는데 옆에 있던 법무장관 민복기가 "그건 초월적인 위법 행위이고, 그랬다간 시위만 더 확산된다"고 반대하자 박정희는 "그래 그건 할 수 없다. 그 짓을 해서 전 국민을 적으로 만들겠다는 건가?"라며 그만두었다. 다른 버전도 있는데, 민복기의 발언에 김형욱이 화냈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

참고로 이 시위의 주동자격 인물들은 훗날 제17대 대통령을 역임하게 되는 당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고려대 상과대학 학생회장, 총학생회장 직무대행 중) 이명박을 비롯해 중앙대학교 학생 이재오서청원,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장 김덕룡과 영어영문학과 학생 한광옥, 경기고등학교 학생 손학규 등 하나같이 이후 정계의 거물급 인사들로 성장한 이들이었다. 특히 김덕룡과 이재오는 구속되는 선에서 끝난 게 아니라 학교에서도 제적당했다.

이런 반발 속에서도 한일간 협의는 계속되었고 계엄령이 해제된 1년 후인 1965년 12월 한일 양국은 결국 국교 정상화에 합의하여 해방 20년 만에 외교 관계를 복원했으며 이승만 정부 이래 15여년 동안 끝없는 줄다리기로 이어지던 한일수교가 이루어졌다.

6. 이후

6.3 항쟁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반대하여 1965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벌어지는 등 여파는 지속되었다.

한일수교로부터 5년이 지난 1970년 6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은 '기시 노부스케[5]' 등 70여 명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하였다. 전쟁범죄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한것은 안좋아 보아지만, 해당 일본인들에게 수여한 훈장은 우방과의 친선에 공헌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수교훈장으로, 이들에게 훈장이 수여된 이유는 한일국교정상화로 한-일 안보 구도를 확립해 이전보다 확연리 국가안보에 유이해졌기 때문에 국익에 유리하게 작용한 공로가 있다는 점이고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의 행적은 별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이 이후 대한민국 국회는 의정 활동 본연의 업무와 관련하여 급기야 처음으로 피소되기에 이른다. 한일기본조약 비준 동의의 무효를 구하는 행정소송이다. 두 번째로 피소된 사건은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2016년 선거구 상실 사태.

7. 평가

6.3 항쟁은 해방 20년만에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반발에서 일어난 항쟁으로 이듬해 한일기본조약한일수교가 체결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일본 문화 잔재를 청산하자는 움직임이 강화되어 한국에서의 일본 문화 등에 대한 배척, 일상생활에서의 일본 잔재 청산 노력 등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때도 마냥 반일적인 분위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65년 말 서울대에서 강연한 14대 심수관(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의 후손)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로 대학가가 시끄럽던 때였지만 자신은 계란을 맞을 각오로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강연장에서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강연장은 일순 고요해졌지만 좀 지나자 누군가가 일어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후 모두가 일어서서 노래를 부르며 무대를 향해 걸어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

8. 관련 문헌



[1] 당시 장면 내각 시절 총리가 히로히토 천황에게 생일 축전을 보냈다고 국회가 비난하던 시절이었다.[2] 애초에 뉴라이트가 숭배하는 이승만만 하더라도 6.25 전쟁 당시 "일본군이 국군을 돕는다면 인민군에게 겨누었던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겨눌 것이다"라고 엄포를 놓고 평화선을 선포하여 갈등을 겪을 정도로 일본에 부정적이었다.[3] 특히 장기적 역사, 정신적 측면에서 우려하는 기류가 상당했는데,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나 친일을 넘은 일뽕, 뉴라이트 등의 등장을 보면 이는 타당한 지적이라고 볼 수 있다.[4] 이때 고려대에서 시위에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이 이명박이었다. 당시 운동권이던 이명박은 국회의사당 앞 점거시위를 주도한 구국투쟁위원회 핵심 멤버로, 사태진압 뒤 체포돼 내란죄 혐의로 6개월간 복역한 바 있었다. 친이계 좌장인 이재오 역시 6.3 항쟁에 참여했다 대학 제적과 함께 수배자 신세가 된다. 이명박 정부 당시인 2011년에는 청와대 안에서 6.3항쟁 관련 인사들이 모여 기념행사를 열기도 했다.#[5] A급 전범 용의자이자 일본 보수방류계의 주요 정치가 중 한명으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할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