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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22:37:43

을묘왜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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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경과
3.1. 1차 침공3.2. 2차 침공
4. 결과

1. 개요

을묘왜변(乙卯倭變)은 조선 명종 10년, 왜구가 침입하여 1555년 6월 9일(음력 5월 11일)부터 7월 25일(음력 6월 27일)까지 현 전라남도에 있었던 여러 군현들을 유린하고 제주도를 약탈거점으로 삼고자 공격한 사건이다.

왜선 70척에 5~7천명 규모로, 당시 조선이 건국된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왜구의 침입이었다. 을묘왜변과 니탕개의 난(1583년)은 각각 당시에는 건국 이래 최대의 외침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얻은 전훈은 37년 뒤 더욱 큰 규모로 발발한 임진왜란 초기의 대패에도 불구 조선군을 지탱하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2. 배경

세종 때의 계해약조를 시작으로[1] 조선왜구에게 세견선과 쌀과 같은 물자를 주고 달래는 계약을 맺어왔으나 삼포왜란, 사량진 왜변과 같이 계약을 자꾸 어기자 중종 때에 임신약조를[2] 명종 때에 정미약조를 맺어 세견선을 25척으로 줄이는 과감한 정책을 펼쳤다. 이에 왜구는 불만을 품고 1555년 전라남도 연안 지방을 습격하였다.

3. 경과

3.1. 1차 침공

1555년 5월 16일(음력), 전라도관찰사 김주(金澍)로부터 '5월 11일에 왜선(倭船) 70여 척이 달량포(達梁浦)[3] 밖에 와서 정박했다가 이진포(梨津浦)와 달량포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육지로 상륙하여 성 아래의 민가를 불태워버렸고 결국 성이 포위되고 말았다.'는 내용의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왔다. 이에 의하면 왜구들이 해안가로 상륙해서 행패를 부리자, 13일, 가리포수군첨사(加里浦水軍僉使) 이세린(李世麟)이 즉각 전라도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원적(元績)에게 이를 알려서 원적이 장흥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영암군수(靈巖郡守)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그를 구원하려고 달량포로 달려갔다가 포위된다. 원적과 한온은 달량포에서 버티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왜구에게 화친을 제안했지만 죽임을 당하고 이덕견은 항복하는 척 하다가 도망친다. 그렇게 해안가 일대가 순식간에 장악당하고 만다.

병마절도사의 정예군이 격파당하자 당시 각지를 지키던 장수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진다. 조정에서는 급히 이광식(李光軾)을 후임 병마절도사로,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순찰사로, 김경석(金景錫)은 전라우도방어사(防禦使), 남치훈(南致勳)은 전라좌도방어사로 각각 임명하여 내려보내고 이준경의 형인 전주부윤 이윤경(李潤慶)도 이에 합세하도록 한다. 또한 금군(禁軍) 등 수도 한성부의 정예군을 동원함과 동시에 산직(散職) 무신과 한량(閑良), 공사노(公私奴)[4], 승려들 또한 징집하였다.

이후 이준경의 지휘로 어찌어찌 왜구를 물리쳤지만, 일선 장수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결정적인 타격은 주지 못했다. 왜구는 퇴각하면서 26일에 강진현을 습격하는데, 강진현의 장수가 그냥 도망침으로써 함락된다.[5] 27일에는 가리포를 습격하였는데, 이세린은 성을 지킬 수 없다고 여겨 산으로 올라가 항전하였지만 곧 함락된다.

다만 사태가 확대되지 않은 데에는 여타 장수들의 공도 컸는데, 당시 나주를 거쳐서 북상하려는 왜구는 이흠례(李欽禮) 등에 의해 격퇴당했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최종호(崔終浩)가 나로도[6]에 정박한 왜구들을 견제하여 경상도까지 전장이 확대되는 걸 방지하였다.

왜구는 퇴각하는 길에 녹도(鹿島)[7]를 습격하였는데, 흥양현감의 보고를 받은 남치근이 대군을 이끌고 가자 포위를 풀고 금당도[8]로 도망간다. 남치근 등이 이를 쫓자 이번에는 보길도[9]로 도망간다. 남치근이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하여금 이를 또 쫓게 하자 마침내 왜구는 완전히 퇴각한다.

3.2. 2차 침공

1차에서 전라도를 약탈•유린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왜구는 같은 해 6월 1차때와 같은 무리들을 이끌고 제주도를 침략했다. 1차의 단순한 약탈이라는 성격을 떠나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이었다. 이 시기의 왜구는 중국인 왕직이 대두목 중 하나로 참여하는 등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전라도-제주도-일본을 잇는 해상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10] 절해고도인 제주도에 근거지를 마련해야 했던 왜구는 1555년 6월 1,000여 명이 선박 60여 척에 분승하여 화북포에 상륙하였다. 이후 3일간 제주성을 둘러싸고 제주민과 왜구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11]을 중심으로 민·관·군이 협력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는데, 여기에는 김성조·김직손·이희준·문시봉의 이른바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의 공이 컸다. 이에 명종은 김수문의 벼슬을 올려주고, 비단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치마돌격대[12]에게는 건공장군의 벼슬이 제수되었다.

현재 제주도에서는 수문장 교대식과 무예 24기 공연을 겸한 연극《김수문 목사와 결사대》를 만들어 혹서기를 제외한 매주 일요일 오후 제주목관아에서 공연하여 이를 기념하고 있다.#

여담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이 전투는 74명으로 13배가 넘는 1,000여 명의 적을 무찌른 엄청난 대첩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당시 고려척계광원앙진 전법을 도입한 명나라군조차 14:1이라는 숫적 열세인 상황에서 이긴 적은 없었다. 심지어 저 74명 중 70명은 치마돌격대의 엄호와 적군 견제 역활이였고, 실제로 적진을 누비며 싸운 건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 4인의 치마돌격대였다. 사실상 74명 VS 1000명이 아니라, 4명 VS 1000명이였단 소리. 물론 이는 기병 VS 보병 간 싸움이란 걸 감안해야 한다.

4. 결과

이렇게 침입한 왜구를 토벌한 뒤 조선 조정은 대마도에 대한 무역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강경책을 썼다. 그러자 그 해 10월,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宗義調)가 해안가를 습격했던 왜구들의 목을 잘라 보내 사과하며 세견선의 증가를 간청한다.

왜구들의 침략을 물리쳤지만 조정에서는 이전과 다른 대규모 침략에 대비하고자 제승방략을 도입하고 비변사를 상설화하였다. 특히 3정승과 공조 판서를 제외한 5조 판서, 각 군영 대장, 국경 지방 관찰사, 강화 유수 등이 모두 참석한 비변사는 이후 권한이 점점 막강해져 세도 정치 때에는 다른 모든 기구를 초월한 강력한 부서가 되어버렸다.

이 일은 임진왜란 직전의 작계 기준이 되었다. 을묘왜변 당시의 왜구의 병력 숫자는 약 5,000명~7,000명이었는데 조정은 "또 왜구들이 노략질할 거 같다고? 그럼 일단 10,000여 명 정도의 침략을 방어할 수준의 대비를 해야겠다."라고 해서 삼남 전체에 걸쳐 전면적인 방비 태세를 갖췄다. 을묘왜변 당시에는 일본은 전국시대였기에 전국의 다이묘들끼리 서로 싸움을 벌이는 탓에 수만 명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워 이만하면 적절한 수준이었기는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은 통일된 상태였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대로 각오하고 군사력을 동원한 결과, 조선 조정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나게 많은 약 200,000명의 왜군[13]들이 침략함에 따라 최대 50,000명 정도의 침공만을 상정했던 당시 조선의 방비 태세는 속절없이 무너지게 된다.[14]

이 때 제주도가 대대적으로 공격받은 경험을 잊지 않은 조선은 임진왜란 때 능력있는 장수 이경록[15] 지휘 하에 제주도에 상당한 육, 수군 병력을 주둔시켜 두었으나, 막상 임진왜란 때는 제주도가 공격받지 않았다.[16]


[1] 대마도 정벌 이후 줄긴 했는데 문제는 이 왜구들의 노략질이 먹고 살려고 하는 행위인지라 무조건 막으면 또 날뛸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삼포 개항, 삼포에 왜관을 두어 거주 허용(단 왜관 하나당 60명씩만), 세견선 50척 허용, 세사미주 200석 하사, 고초도에서의 어업 행위를 승인하에 허용.[2] 세견선과 세사미두 절반으로 축소, 삼포 거주 불허, 제포로 오는 직로 외의 배는 전부 왜구로 간주.[3]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4] 이들은 공을 세우면 면천시켜준다는 조건이었다.[5] 이 장수는 조정에 "부하들이 명령을 듣지 않사옵니다."라고 거짓 장계를 올리고 이에 기세가 오른 왜구가 "이 길로 걍 한성까지 가자!"라고까지 한다.[6]전라남도 고흥군에 있는 섬.[7]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에 있는 소록도로 추정.[8] 전라남도 완도군 금당면에 있는 섬.[9]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에 있는 섬.[10] 이미 1552년 7월에 왜구는 제주 동쪽 천미포에 상륙해 2일 동안 조선군과 교전을 벌여 왜구를 격퇴하기는 했지만(천미포 왜란) 당시 제주목사 김충렬(金忠烈:1550~1552)과 정의현감 김인(金仁)은 이들을 막지 못하였다는 책임을 물어 파직되고 제주목사와 정의현감으로는 남치근(南致勤:106대, 1552~1555)과 신지상(愼之祥)이 부임하였다. # 여담으로 제주목사 남치근은 1554년 5월에 천미포 인근에 정박한 왜인 10명 가운데 한 명을 활로 쏘아 죽이고 이를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당시 비변사에서는 "때맞추어 추격하여서 한 놈을 쏘아 맞추어 참획하였으니 그 공로를 논상하지 않을 수 없다"며 남치근에 대한 포상을 주장했지만, 명종은 "우리 변방을 침범했다면 적으로 간주한다고는 했지만, 이미 가버렸으면 굳이 끝까지 쫓을 필요까지는 없잖아. 저 사람들이 처음부터 도적질하려던 게 아니라 항해하다 급해서 물 좀 얻어가려고 잠깐 배에서 내린 걸 가지고 적병인 줄 알고 죽였다면 그게 사람의 의리로 볼 때 가당한 일이겠어?"라는 반응을 보였고, 사관도 "지금 제주의 왜는 우리 국경을 침범한 것이 아니라 그냥 표류해온 힘없는 한 척의 상선에 불과한 것이고, 관할 구역 안에서 이상한 배를 발견하면 변방 장수로써는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쫓아버리는 것이 맞고, 그네들이 상륙해서 실제 교전이 일어났다고 한들 그건 변방 장수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뭘 그런 걸 가지고 공이랍시고 포상을 주네 마네 하냐? 이 따위 공을 가지고 '관례'라면서 포상을 주면, 정말로 큰 공을 세운 사람한테는 뭘로 포상할 건데?"라고 평하고 있다. #[11] 107대 제주목사(1555~1557)이다.[12] 정로위 김직손(제주목사 김수문과는 6촌형제 지간으로 김수문이 제주목에 부임할 때에 같이 파견되었다), 갑사 김성조·이희준, 보인 문시봉[13] 아무리 조선과 일본이 비교적 가깝다 하더라도 전근대 전쟁에서 20만에 육박한 병력들을 상륙시키는 것 자체가 당대 상식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정신나간 규모다.[14] 상정했던 규모를 훨씬 넘는 대규모 침공에 결과적으로 수도가 함락당하기도 하였으나, 조선이 짠 작계는 전근대국가 답지 않게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임진년 겨울,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나온 왜군 잔존 병력은 고작 7만이었다. 반년 만에 침공군 15만명 중 8만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어 전열에서 이탈한 것이다.[15] 이순신이 북방에서 근무할 때 벌어진 녹둔도 전투 당시 이순신과 함께 있던 인물이다.[16] 그래서 이경록이 조정에 지원병을 보내려고 했지만 조정에서는 제주도의 방비도 중요하다며 거절했다. 다만 물자 지원은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