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각 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외관직 무관.
1. 개요
병사라고 약칭하며 조선 초기부터 개칭 전에는 병마도절제사라고 불리었다. 절도사라는 호칭은 중국 당나라의 절도사에서 유래한 것이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절도사는 단병사와 겸병사를 모두 합하여 총 15명이 있었다.
평안도·충청도·전라도·각각 1명씩, 그리고 함경도[1]와 경상도[2]에는 2명씩 모두 7명의 전임 절도사가 임명되었고, 그들을 단병사라 하였다. 함경도와 경상도가 2명씩 배치된 이유는 이곳들이 각각 여진족과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는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각 감영의 관찰사(감사)가 겸직하는 겸병사가 8도에 1명씩 있었다. 경기 ·강원도 ·황해도에는 단병사가 파견되지 않았으므로 관찰사가 겸병사로서 그 도의 군대를 통할하였다. 1593년 선조 때부터는 황해도에도 단병사를 두어 조선 후기에는 16명의 병마절도사가 파견되었다.
지방군에선 이 병마절도사가 최고위 지휘관이다. 단, 외적의 침입이 벌어지거나 그에 대한 대비를 위해서 통합 지휘의 필요성이 생길 경우 복수의 절도사들을 통합 지휘하는 임시 관직인 도원수를 파견한다. 도원수가 관할하는 절도사의 범위는 유동적이다.
2. 현대와 비교
겸병사 | 현대의 도지사가 군단장(중장; ★★★)급 지휘관을 겸하는 직책.[3] 대규모 외침이 발생하면 자기 휘하의 수령 및 병들을 집결시켜 1~4만 정도의 병력을 지휘했다. 단병사와 큰 고을의 수령이 겸하는 방어사는 사단장급 지휘관이 되어 감사를 보필했고 작은 고을의 수령과 각 진의 장수들은 중대~대대급 병력들을 거느리고 합류했다. 하지만 군사적 능력보단 행정 능력이 중요했던 감사의 지휘능력은 대부분 민간인 수준이었고 지휘체계도 명확하게 잡혀있지 않아[4] 수령들끼리 계급의 차이는 있었지만 상하관계는 불분명했다. 수령들끼리 손발을 맞추기 어려웠다. 그래서 실제 상황에선 각자 따로 노는 경우가 많았다. |
단병사 | 현대의 사단장(소장; ★★)급으로 보통 수백 ~ 수천의 병력을 지휘했다.[5] 소규모 왜구나 부락 수준의 여진족이 침입했을 때는 감사까지 나서지는 않고 단병사가 최고 지휘관을 맡아 대응했다. |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지상작전사령관 및 제2작전사령관(대장; ★★★★)급 이상의 직책은 상설직이 아니라 전란이 일어났을 때만 임명되는 임시직이었는데, 이에 해당하는 직책이 도원수[6]였다. 한 개의 도가 감당하기 힘든 대규모 적군이 처들어 왔을 경우엔 해당 지역과 인근 지역의 도 2~3개의 병력을 지휘하는 야전군사령관급 도원수가 임명되었고, 전란의 규모가 총력전 수준으로 번지면 수군을 포함한 조선군 전체를 총 지휘하는 합참의장급, 팔도 도원수가 등장했다.[7]
3. 8도의 절도사
도 | 겸병사 (관찰사) | 단병사 (절도사) |
경기도 | 경기 관찰사 (한성 → 수원) | |
강원도 | 강원 관찰사 (원주 → 춘천) | |
충청도 | 충청 관찰사 (충주) | 충청 병사 (해미) |
전라도 | 전라 관찰사 (전주) | 전라 병사 (강진) |
경상도 | 경상 관찰사 (상주 → 대구) | 경상 좌병사(울산) 경상 우병사 (창원→진주) |
황해도 | 황해 관찰사 (해주) | 황해 병사 (1593년, 해주) |
평안도 | 평안 관찰사 (평양) | 평안 병사 (영변) |
함경도 | 함경 관찰사 (함흥) | 함경 북병사 (경성) 함경 남병사(북청) |
병마절도사(종2품)가 수군절도사(정3품)보다 높은 품계이다. 수군절도사를 거쳐서 병마절도사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였다. 즉 준장 진급한 장성이 여단장을 거쳐서 2년 뒤에 소장에 진급하여 사단장에 진출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오히려 조선왕조실록에 대장에 속하는 직위는 훈련대장, 어영대장, 금위대장, 총융사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위의 대장 밑의 부사령관 또는 작전사령관에 속하는 중군(아장이라고도 한다)에 임명되려면, 병사(병마절도사)를 지낸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현재의 군계급과 관련지어서 보면 방어영의 방어사와 수군절도사를 거쳐야(준장) 병마절도사로 나갈 수가 있고, 병마절도사를 거쳐야(소장) 5군영의 중군[8], 삼도수군통제사, 좌우 포도대장이 될 수 있으며(중장), 아장을 거쳐야 5군영의 '사'(대장)가 되는 것이다.
조선 고종 시절에 잠깐 수렴청정하던 대왕대비의 명으로 삼도수군통제사를 대장에 똑같이 대우하는, '외등단'(바깥에 있는 대장)으로 올린 적이 있었다. 이때 통제사 밑의 통제우후가 직급에 맞지 않다 하여 5군영의 중군과 같이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사람으로 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외등단을 폐지하여, 통제사는 원래대로 각 군영의 '사'보다 한단계 아래로 내려갔다.
단, 위에도 서술했지만 각군영의 대장과 지방 병사의 품계는 종2품으로 같다. 현대의 국군과 비교했을 때, 합참의장이 대장인 것과 2작사령관이 모두 대장이나 그 보직의 급이 다른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한다.
4. 관련 문서
[1] 북병사와 남병사[2] 우병사와 좌병사[3] 참고로 현대 미국에도 주방위군 평시 체계가 이와 유사하다.[4] 실질적으로 감사에게 허락된 건 병력 결집까지였다. 그 이후부턴 왕의 명령이 필요했는데 그때 그때 자기 밑에 배속되는 병력들이 달라졌다.[5] 다만 단병사의 품계는 겸병사와 똑같이 종2품으로 겸병사가 단병사의 상관은 아니다. 실제 상황에서 행정권까지 쥔 겸병사가 병력 집결을 총괄했기 때문에, 그리고 대체로 겸병사는 문관 출신이라 무관 출신인 단병사보다 위세가 높았다. 하지만 문관 출신답게 군무에는 어두운 경우가 많아 겸병사는 단병사의 보좌를 받아 군대를 움직였다. 실제 전장에선 겸병사는 후방에 있고 단병사가 수천 규모로 병력의 일부를 인계 받아 선봉에서 적군과 전투를 벌이는 사례가 많았다.[6] 꼭 도원수라는 명칭만 사용되었던 건 아니다. 신립의 경우엔 삼도순변사로 임명되어 함께 파견된 경군과 함께 충청, 전라, 경상도의 병력을 통합한 야전군을 지휘할 권한을 받았다.[7] 팔도도원수로 제일 유명한 사람은 임진왜란 당시의 권율이 있다.[8] 아장이라 불렸으며, 각 군영의 최고지휘관인 '사'와 품계는 종2품으로 같다[9] 백두산 최고봉의 이름이 병마절도사에서 따온 병사봉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兵使를 兵士로 오해한 무식쟁이 김정일이 자신의 백두혈통도 강조할 겸해서 장군봉으로 바꿔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정권 수립 직후부터 한자 교육을 폐지하고 한글전용을 단행해버려 한자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