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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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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를 통치하던 행정구역에 대한 내용은 북청도호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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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靑郡 / Pukchŏng County
북청군
北靑郡 / Bukcheong County
국가 북한
광복 당시 면적 2,375㎢
광역시도 함경남도
광복 당시 행정구역 3읍 11면
인구 161,886명
시간대 UTC+9

1. 개요2. 역사3. 교통4.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5. 출신 인물6. 기타

[clearfix]

1. 개요

함경남도 동부에 위치한 군. 동쪽은 리원군, 서쪽은 신포시, 남쪽은 금호지구동해, 북쪽은 덕성군과 접해있다.[1] 군 가운데로 남대천이 흐르고 있다.

광복 당시 행정구역 기준으로 최고점은 희사봉(해발 2,117m, 상거서면 · 이곡면 경계)[2], 최저점은 동해였으며, 북청군 내에서의 해발고도 차이가 남한 전토에서보다 더 컸다. 그런데 이런 고도차가 더 심한 곳이 함경도에는 수두룩하게 있다.

대한민국의 국가무형문화재 제15호인 북청사자놀음이 유명하다.

북청군이 동해를 남쪽으로 접한 탓에 북청군민들은 동해를 남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역사

원삼국시대옥저의 영역이었고,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가 신라진흥왕이 인근의 이원군으로 진출하여 마운령 순수비를 세우기도 했다.

남북국시대에는 발해의 남해부 소속이었는데 발해 5경인 남경남해부의 치소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학자들이 북청군 하호리의 청해토성을 발굴한 후 여기를 남경남해부라고 비정했는데, 남북 사이에 학자들의 교류가 힘들다보니 많은 대한민국의 학자들은 아직 이 결과를 회의적으로 여긴다.[3] 하지만 국사 교과서에서도 남경남해부의 위치를 북청에 표시하는 등 어느 정도 수긍하기도 한다.

발해 멸망 후 거란이 함경도 일대의 발해인들을 동경요양부[4]로 강제 이주시켜버리는 바람에 고려시대에는 천리장성 이북이 여진족들의 소굴이 됐다.[5] 윤관의 여진 정벌 때 이곳에 영주성을 축성함으로써 잠시 고려에 편입, 이후 여진족에 돌려줬다가 몽골 제국 쌍성총관부의 관할이 되었고 공민왕 때인 1356년에 쌍성총관부를 혁파하고 수복하여, 삼살(三撒)로 불리던 이곳에 1372년 북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선 건국 이후 1398년에 청주부로 승격하였으나, 충청도 청주목과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1417년 북청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1427년 북청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872년 북청부, 1895년 북청군이 되었다.

남북분단 이후 북한 치하에 놓였고, 북한이 1952년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북청군 북부 지역에 해당하는 상거서면, 하거서면, 이곡면, 성대면, 덕성면(13개 리)을 덕성군으로, 북청군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 신창면, 거산면, 속후면(17개 리), 신북청면(8개 리)을 신창군으로, 북청군 남서부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신포면과 양화면을 신포군(현재의 신포시)으로 분리 신설하여 면적이 대폭 축소되었다.

1974년 1월 신창군이 폐지되면서 신창군 동부 지역 1개 로동자구 17개 리를 돌려받아 현재의 ㄱ자 모양 군 형태가 되었다.

2015년 기준 로동자구는 신창로동자구, 신북청로동자구 두 개다. 리 경계까지 담고 있는 북한에서 제작한 지도는 이 링크 참조. 21세기의 북한의 군 지도에서 리 경계까지 공개된 지도는 찾기가 대단히 힘들다. 1990년대는 그나마 조선지리전서에 몇 개 도에 속하는 시와 군 전역의 동과 리의 경계가 그려진 지도가 있다.

3. 교통

철도는 평라선북청선이 지나가며, 신북청역에서 두 선이 분기한다.

평라선에는 경안역, 거산역, 건자역이 있고, 북청선에는 량가역, 북청역, 라하대역이 있다.

4.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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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당시 3읍 11면을 관할했다. 2008년 기준 인구는 40만 명에 육박한다.

5. 출신 인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분류:북청군 출신 인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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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사과가 특산물이며, 사과 생산 지역으로는 최북단이다.

관련 작품으로 김동환의 시 '북청 물장수'가 있다. 실제로 서울의 물장수 일은 함경도 출신 사람들이 많이 했고, 그 중에서도 북청 출신 사람이 가장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들 물장수들이 번 돈으로 북청의 교육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이러한 인연으로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북청 출신 실향민들의 주도로 북청군장학회를 세워서 장학 사업을 벌이고 있다.

'북청 물장수'라는 이름을 딴 개그 코너도 있었다[9]. 1980년대 중후반 유머 1번지에 나왔던 이 코너는 장두석이봉원, 조금산 등이 출연했다. 특히 이 코너에서 일본 유학생 출신 역할로 나온 조금산이 장두석과 이봉원과 인사할 때 말했던 멘트[10]가 유행어로 퍼지기도 했다. 이 인사법은 2015년 방영된 응답하라 1988에서 극중 TV 유행어를 따라하기로 소문난 김성균에 의해 다시 유행되기도 했다.

강원도 속초시에 북청군 출신이 2017년 기준 200명 이상 거주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지금은 폐지된 같은 함경남도영흥군처럼 경주 김씨집성촌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대한민국의 국가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북청사자놀음이 유명하며, 조선시대의 명재상이었던 백사 이항복이 유배를 와 여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청해 이씨의 본관인 청해면이 이곳에 있었다. 청해면은 1917년 신창면[11]에 편입되어 폐지되었다.
[1] 광복 당시 북쪽 풍산군, 서쪽 신흥군, 홍원군, 동쪽 이원군, 단천군과 접했다.[2] 한반도 37위의 고봉[3] 사실 북한의 고고학계는 정치가 학문을 지배하는 경향이 있기에 신뢰도가 없는 수준이다. 평양단군릉, 동명왕릉을 구체적 근거도 없이 확정해버리고 동수의 묘임이 거의 확실한 안악 3호분을 '이 정도 규모면 왕릉이어야 한다' 따위 빈약한 근거로 고국원왕릉으로 일방적으로 서술하는 등, 역사를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선전용 도구로나 쓰지 학문 그 자체를 탐구하려는 시선은 거의 없는 편이다. 북청의 청해토성 또한 '북한 측에서 토성 하나 발굴되었다고 확정적으로 몰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시선이 있다. 다만 남북 역사학계의 교류가 거의 없고 대한민국의 고고학자들의 북한 탐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니 남경남해부 연구에 진척이 없는 상황.[4] 오늘날의 중국 랴오닝성 랴오양시 일대로 옛 고구려의 요동성 일대.[5] 발해 멸망 이전에도 발해-신라 국경에 말갈 소국들이 출몰해 중앙정부를 무시하고 통교를 시도했다는 기록을 봤을때 발해가 쇠락해 말갈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져 이들이 꽤 남하해 있었거나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발해가 의도적으로 말갈인을 사민시킨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실제로 주민들을 몽땅 사민했다기엔 백두산 폭발과 발해부흥운동의 여파로 함경도 같은 변방에 대한 요나라의 통제력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다만 동북쪽 일대에서 여진족이 발흥했을 무렵에는 부흥운동이 실패하고 요동으로 사민당했다거나 아예 고려에 내투해버렸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미 발해인들의 세가 크게 약해져 흔적이 별로 남지 않게 된 상황이었다.[6] 현재까지 알려진 여진 문자 비석은 총 12기로 그 중 2기가 한반도에 있었는데, 나머지 하나는 경원군 아산면 수정동에 있었던 비석으로 1918년 일제에 의해 경성으로 반출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7] 길이가 무려 10km를 넘고 울창한 송림(松林)을 낀 해변이다.[8] 철광산[9] 1982년에 이미 동명의 드라마가 KBS-TV에서 방영되었다. 항목 참조.[10] (오른손을 높이 들고) 아이고~ O사장! (오른손을 높이 들고) 아이고~ O사장! (악수하며 앉았다 일어난다) 이거 정말 반갑구만! 반가워요! 반갑구만! 반갑습니다~![11] 1942년 신창읍으로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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