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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는 발해의 다섯 중요 도시였던 5경 중 하나로 5경 중 만주에 있었거나 만주설이 존재하는 다른 4경과 달리 유일하게 한반도 안에 확실하게 있었던 도시이다.[1] 발해에서 신라로 가는 길에 있던 교통의 요지였다. 신당서 발해전에서 '옥저의 옛 땅'으로 옥주 정주, 초주 3주를 관할하고 있다고 나온다. 특산물은 곤포(昆布, 다시마)였다고 한다.2. 위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여러 가지 비정설이 존재한다.- 함경남도 함흥시설. 남경남해부의 위치 비정을 처음 시도한 정약용이 함흥으로 판단했으며, 일제 학자 와다 기요시나 중국의 중국역사지도집에서도 함흥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함흥 일대는 동국여지승람에서 다시마의 산지가 아니었다는 점과 적당한 성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 신라 국경에서 너무 가깝다는 점을 비판받았다.
- 함경남도 영광군 백운산성 설. 동북역사지리 편자들이 주장하였다. 14,573미터에 이르는 둘레를 돌로 쌓아 규모나 위치나 남경남해부의 소재지가 될 만하다고 보았다. 다만 개마고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지역으로 동해 바닷가와 멀어서 교통이 불편하다는 점을 비판받았다.
- 함경북도 경성군 남산성 설. 일본 학자 마츠이 히토시가 주장하였다. 경성은 다시마 산지기도 하고 남산성의 규모도 상당히 크다. 다만 남산성은 조선시대의 유물만 존재하고 발해 유물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 함경남도 북청군 청해토성 설. 가장 유력한 설로 여겨지고 있다. 북한 학계에서 지지한다. 위치도 신라 국경이나 동경용원부 관할지역에서 지나치게 가깝지 않고, 성의 구조가 중경현덕부로 유력시되는 화룡 서고성이나 동경용원부로 유력시되는 훈춘 팔련성과 유사한데다, 발해 시기 건물의 주춧돌과 온돌, 부엌, 우물, 기와 등 관련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북청 청해토성 위치와 형태》 그리고 증보문헌비고 등에서도 북청부를 '숙신의 고도'라고 하고 있어 과거에 정치 중심지였던 적이 있다는 전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선 청해토성으로 확정시키다시피 했고 청해토성은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다만 남한 학계에선 청해토성 비정에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남북 역사학계의 교류가 거의 없고 남한의 고고학자들의 북한 탐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니 남경남해부 연구에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3. 기타
대한민국 교과서에서는 발해에서 신라로 가는 길 신라도→남경남해부, 일본으로 가는 길 일본도→동경용원부로 가르치고 있지만, 사실 일본으로 갈 때도 남경남해부 루트로 간 적도 있다. [2][1] 다만, 서경압록부와 동경용원부는 일반적으로 현 중국 영토 쪽으로 비정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확실치 않고 북한 영역 안쪽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2] 속일본기 777년 1월에 등장하는 9차 견일본사. 사도몽(史都蒙)을 대사로 하는 이들 발해의 9차 견일본사 선단은 776년에 남경남해부의 토호포(吐虎浦)라는 항구를 출발해 규슈 방면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하필 바람을 잘못 만나서 46명만 살아남고 다 죽었다. 토호포에 대해 남한에서는 북청군이라거나, 함흥시의 옛 포구 가운데 도련포(都連浦)라는 포구가 있음을 들어 함흥으로 비정하기도 하고, 북한 학계에서는 지금의 북청군 신창항(新昌港)에 해당한다고 비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