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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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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정벌
對馬島 征伐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white> 시기 1차 정벌: 1389년 (창왕 2년)
2차 정벌: 1396년 (태조 5년) 음력 12월
3차 정벌: 1419년 (세종 1년) 음력 6월 19일
장소

쓰시마
원인 고려 말부터 지속되는 왜구한반도 침공
교전국 고려, 조선
(공세)
왜구
(수세)
주요 인물
고려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박위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종연
파일:고려 의장기.svg 박자안
지휘관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소 사다모리
조선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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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1차 정벌
고려 군함: 100척
고려군: 10,000명
규모 불명
2차 정벌
규모 불명 규모 불명
3차 정벌
군함: 227척
조선군: 17,285명
규모 불명
피해 사상자: 100여명 (3차 정벌) 참수: 114명, 포로: 21명,
가옥 1,939호 전소 (3차 정벌)
결과 대마도의 조선 복종, 조선의 남부 해안 안정화
영향 * 왜구의 세력 약화
* 쓰시마의 요청으로 계해약조 체결
* 웅천, 동래 부산포, 염포 등 3포 개항 실시
1. 개요2. 고려
2.1. 배경2.2. 제1차 대마도 정벌
3. 조선
3.1. 제2차 대마도 정벌3.2. 제3차 대마도 정벌
3.2.1. 배경3.2.2. 조선의 원정 준비3.2.3. 성공적인 상륙 작전3.2.4. 예상치 못한 패배3.2.5. 철수3.2.6. 태종의 엄포3.2.7. 대마도주의 복종3.2.8. 일본에 미친 영향3.2.9. 후일담
3.2.9.1. 이종무의 몰락3.2.9.2. 계해약조
4.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은 한반도여말선초 시기 고려조선 왕조에서 한반도를 침입하던 왜구의 주요 기항지 가운데 하나인 쓰시마섬을 토벌한 것을 가리킨다. 정벌은 총 3번 있었는데, 일반적으로는 조선 세종 1년(1419)에 단행된 제3차 대마도 정벌[1]을 칭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 연호를 따서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라고 불러, 왜구(倭寇) 문제가 아닌 한반도의 왕조를 침략의 주체로 칭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2. 고려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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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교천 전투요나라
금교역 전투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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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정벌동북 9성여진족
갈라수 전투여진족
길주성 전투여진족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강동성 전투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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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선역 전투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몽골 제국
안북성 전투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몽골 제국
처인성 전투파일:몽골 제국 국기.svg 몽골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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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성 전투합단적
연기 전투합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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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의 침공홍건적홍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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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배경

파일:15-16세기 왜구.png
15-16세기경 왜구의 활동과 침입 지역

고려 충정왕 2년(1350), 왜구가 고성, 죽림, 거제를 침략하자 합포의 천호 최선과 도령 양관 등이 이를 격퇴해 적 3백여 명을 죽였다. 이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장장 40여 년간 총 3백여 차례에 걸쳐 한반도를 침략해 고려 민중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 고려는 일본 정부에게 왜구를 막아달라고 호소했지만, 일본 정부는 그럴 힘이 없었다. 당시 일본은 남북조 시대라는 전란에 휘말렸고 특히 규슈 일대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전혀 먹히지 않았기 때문이다.[2]

이렇듯 한반도에서 맹위를 떨친 왜구는 한반도와 매우 가까운 대마도(쓰시마 섬)를 거점으로 삼았다. 본래 대마도 땅이 매우 척박해 식량 생산이 요원해서 고려와 교역해 식량을 구입함으로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여몽전쟁원나라의 일본원정 이후 교역량이 줄어들자 왜구의 선봉 역할을 해 생계를 유지했다. 이에 고려 우왕 13년(1387) 관음포 전투에서 전선 47척으로 왜구의 전선 120척을 괴멸시키는 등 왜구를 상대로 맹활약한 명장 정지는 대마도 정벌을 건의했다.
근래 중국이 왜를 정벌한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만약 그들이 우리 영토에까지 전함을 분산해 정박시킨다면, 각종 물자를 뒷받침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그들이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 왜는 온 나라가 도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반도들이 대마도와 일기도(壹岐島)[3]에 웅거해 가까운 우리 동쪽 변방으로 무시로 들어와 노략질 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세상에 공표한 다음 대군을 동원해서 먼저 여러 섬들을 공격해 그 소굴을 전복시킨 다음, 일본에 공문을 보내 빠져 달아난 적을 쇄환해 귀순시킨다면 왜구의 우환이 영원히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중국의 군대가 우리 영토로 올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현재 우리 수군은 모두 해전에 익숙해 신사년(1281)[4] 일본 정벌 당시 몽고병과 한병(漢兵)이 배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만약 적절한 때에 순풍을 기다렸다가 기동한다면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가 오래되면 썩고 군사가 오래되면 피로해 질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군역에 지쳐 날마다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타서 전략을 세워 소탕해야지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후 왜구황산대첩에서 이성계에게 괴멸된 뒤 수그러들었지만, 고려 창왕 즉위년(1388) 고려가 제2차 요동정벌을 단행하느라 부산한 틈을 타 양광도를 휩쓸었고 가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남부 일대에서 맹위를 떨쳤다. 이에 정지위화도 회군 직후 양광 전라 경상도 도지휘사로 임명되어 도순문사 최운해, 부원수 김종연, 조전원수 김백흥과 진원서, 전주목사 김용균, 양광도 상원수 도흥, 부원수 이승원 등을 이끌고 출전해 왜구를 진압했다. 이후 위화도 회군의 주역 세력은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옹립한 뒤 분위기를 쇄신할 겸 한반도를 빈번하게 침략하는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2.2. 제1차 대마도 정벌

파일:dGli0L5.jpg
박위 영정.[5]

고려 창왕 1년(1389) 2월, 전선 100척이 박위의 지휘하에 대마도로 출정했다. 박위는 공민왕 때 왕을 호위하는 숙위병인 '우다치'에 임명된 후 김해부사, 상주부사, 영흥부사, 진주목사, 계림 부윤 등을 역임했으며, 상주부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침략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을 안동까지 피신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상주 중모현 전투와 고령현 전투에서 왜구를 격파했고, 김해부사로 재임했을 때 황산강(낙동강)을 거슬러 밀양에 당도한 왜선 50척과 그 후속부대들을 고려 군선 30척으로 전멸시켰다. 그후 창왕 즉위년(1388) 요동정벌 때 경상도 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출정했다가 위화도 회군에 가담해 회군공신에 올랐다.

대마도에 당도한 박위는 왜구의 선박 300척과 그 근방 해안의 건물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원수 김종연, 최칠석, 박자안 등과 함께 공격을 감행해 고려 백성 남녀 100여 명을 구출한 뒤 고려에 무사히 귀환했다. 이에 창왕은 박위를 칭송하는 교서를 내렸다.
우리나라는 여러 해 동안 태평하여 군비가 차츰 해이해졌다. 그러므로 섬에 사는 왜적들이 함부로 노략질을 한지 이미 40여 년이 되는데 그 동안 우리나라 3면의 변방을 소란스럽게 하고 있었으나 국가는 다만 수세만 취하고 장수들은 아직도 가서 칠 것을 주저하고 있을 때 그대는 용기를 분발하고 정의에 입각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험한 바다를 건너가 다년간 자라오던 화근을 전복하고 건물과 함선을 모조리 불살랐으며 포로되었던 우리 백성들을 고향에 돌아오게 했으니 이로써 국가의 수치를 씻었으며 이로써 신민의 원수를 갚았도다. 승전 보고가 처음 왔을 때 나의 마음은 진실로 기뻤다. 이제 문하평리(門下評理) 서균형(徐鈞衡)을 보내 그대에게 의복, 안마(鞍馬), 은덩이 등 물건을 주노라.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위는 다만 집과 배를 불살랐을 뿐이고 실상 포로를 찾아온 일은 없었다.

<고려사>에는 동원된 병력의 규모가 나와 있지 않고 자세한 전투 경과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1차 대마도 원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우며, 박위가 백성 100여 인을 구출한 게 사실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다. 고려사가 조선초기에 쓰여졌다는 걸 감안하면 사료부족으로 기재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니 전공 자체가 처참 그 자체여서 흑역사로 취급되어 묻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현재로썬 300척을 불태웠다는 기본기록 역시 조작했거나 과장했다고 보는 게 옳다.[6]

3.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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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제2차 대마도 정벌

파일:익원공.jpg
김사형 영정.

박위의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조선 건국 후에도 왜구가 침략하여 조선 태조 2년(1393)부터 태조 6년(1397)까지 4년간 53회에 달했다. 특히 태조 5년(1396) 8월 9일 왜선 120척이 경상도에 침입해 동래, 기장, 동평현을 함락하고 전선 16척을 탈취했으며 수군 만호를 살해했다. 이에 진노한 태조 이성계는 12월 3일 우정승 김사형을 5도 병마도통 처치사로 임명하고, 남재를 도병마사, 신극공을 병마사, 이무를 도체찰사로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 대마도와 일기도를 정벌하게 했다. 김사형 등이 길을 떠날 때 태조가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전송했고, 김사형에게 부월과 교서를 주고 안장 갖춘 말, 모관, 갑옷, 궁시, 약상자를 내려줬으며, 남재, 이무, 신극공에게는 각각 모관, 갑옷, 궁시를 내려줬다. 또한 태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교서를 반포했다.
예로부터 임금 된 자는 항상 중외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데에 힘써왔다. 불행히도 쥐나 개 같은 좀도둑이 생겼을 때에는 오로지 방백에게 책임을 지워서 몰아 쫓고 잡게 했으며, 그 세력이 성해져서 방백이 능히 제어하지 못할 때에야 대신에게 명령하여 출정하게 하는 것이니, 소호(召虎)[7]가 회이(淮夷)를 정벌한 것과 윤길보(尹吉甫)[8]가 험윤(玁狁)을 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무릇 용병(用兵)의 도리를 한결같이 옛일을 따라서 일찍이 경솔한 거조가 없었던 것은 이들 백성들이 동요될까 염려했던 것인데, 이제 하찮은 섬 오랑캐가 감히 날뛰어 우리 변방을 침노한 지가 3, 4차에 이르러서, 이미 장수들을 보내어 나가서 방비하게 하고 있으나,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수륙으로 함께 공격하여 일거에 섬멸하지 않고는 변경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다.

경은 의관의 명문이며 조정에서는 재상의 큰 재목이라, 기품이 삼엄하고 입지가 홍의(弘毅)해서 서정(庶政)을 처리할 때는 다 이치에 맞고, 인재를 천거하면 모두 그 소임에 합당하여, 밝기는 허(虛)와 실(實)을 잘 알고, 슬기로움은 외적의 난을 제어할 것이다. 이에 제도 병마 도통처치사(諸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절월(節鉞)[9]을 주어 동렬(同列)을 시켜 돕게 하고, 널리 막료를 두어서 그 위엄을 중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부복해서 명령을 들을 것이요, 적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떨어질 터이니, 경은 앉아서 계책을 세워서 장수와 군사들을 지휘하여 두 번 출병할 일이 없게 하여, 만전을 도모하여 나의 생각에 맞게 하라. 혹시나 장수나 군사가 군율을 어기거나, 수령들의 태만한 일이 있거든 법대로 징계할 것이며, 크거나 작은 일을 물론하고 즉시 처결하라.

김사형의 조선 수군이 어느 정도의 전력이며 언제 대마도로 떠났으며 구체적인 전과와 피해는 어느 정도인지는 기록이 미비해 전혀 알 수 없다. 일각에서는 대마도 정벌 첩보를 접한 나가온 왜구의 투항과 조선 육지에서의 왜구 토벌 등의 성과로 인해 이미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고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던 한겨울이었으므로 대마도, 이키섬으로의 정벌이 실제로는 실시되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1419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이 주원방포를 출발해 거제도로 귀환할 때까지 14일이 걸린 것을 감안해 볼 때 상대적으로 2개월간의 긴 원정 기간이 있었고 또 1397년 1월 30일 김사형이 두 달 만에 돌아오자, 태조는 홍인문 밖까지 거동하여 그를 맞이해 위로했고 의안백 이화, 좌정승 조준, 봉화백 정도전에게 명해 김사형에게 잔치를 베풀게 했으며 그에게 서대(犀帶)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전과를 거둔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이므로 대마도 정벌이 실행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조선왕조실록엔 원정을 단행한 지 18일이 지나 12월 21일에 왜인 구육(㡱六)이 3인을 인솔하고 와서 장검 하나와 환도 하나를 바치면서 "전하께서 항복하는 자를 어루만져 안정시켜 주시고 지난날의 악한 것을 생각지 않으신다기에, 토지를 청해서 백성이 되려고 하옵니다."라고 밝혔다는 기록이 있고, 이듬해 4월엔 왜구 나가온(羅可溫)이 병선 24척을 이끌고 조선에 항복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있었다. 나가온은 당초 1월에 조선에 항복할 뜻을 밝히고 아들 도시로(都時老)와 반당(伴黨) 곤시라(昆時羅)를 볼모로 삼아 계림 부윤 유양에게 보냈다. 그러나 유양이 병을 칭하며 나가서 보지 않자, 왜구들은 진의를 의심하다가 지울주사 이은을 납치해 도망갔다. 이때 경상도 도절제사 최운해, 충청도 도절제사 이귀철, 전라도 도절제사 김빈길, 경기우도 절제사 김영렬은 이들을 잡지 못했고, 5도 통제사 김사형은 이 네 장수들을 경산부에 잡아 가두고 이 사실을 태조에게 보고해 죄를 물으라 요청했다.

이에 태조 6년(1397) 2월에 태조 이성계는 최운해, 이귀철, 김빈길, 김영렬을 순군부에 가두고 대간과 형조로 하여금 국문하게 했다가 김사형과 의성군 남은이 죄를 감해 주기를 청하자 최운해를 안변 진명포에, 김영렬을 옹진에, 김빈길을 청해에, 이귀철을 평양에 유배하고 모두 수군에 편입시켰다. 그러다가 4개월 후에 다시 최운해에게 곤장 100대를 치게 한 뒤 청해도 수군에 복무하게 했고, 김빈길을 장 90대 후 흑림 수군으로 옮겼으며, 이귀철을 장 90대에 안주 수군으로 옮겼고, 김영렬을 장 90대에 옹진 수군으로 옮기게 했다.

이런 불미스런 일이 있었지만, 태조는 다시 항복해온 나가온 등을 너그러히 용서하고 나가온을 선략 장군(宣略將軍)에 임명하고 부하 도시라(都時羅) 등 8인은 각각 영사정(領司正)·부사정(副司正)의 직책을 줬다. 또한 나가온의 아들 도시로가 사망하자, 태조는 사람을 보내 장례를 정중하게 치러주게 했고 나가온은 감격하여 울었다. 이후 나가온은 임온(林溫)으로 개명했고 그의 부하들 역시 조선 이름으로 개명해 조선의 관직을 역임했다.

3.2. 제3차 대마도 정벌

제3차 대마도 정벌
第三次對馬島征伐
파일:세종대 쓰시마섬 토벌.jpg
장소
<colbgcolor=#b0313f><colcolor=#fff> 시기 1419년(세종 1년) 음력 6월 19일
장소 쓰시마
원인 왜구들의 조선 침탈에 대한 상왕 태종의 정벌 선언
교전국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쓰시마 소 가문
쓰시마 주둔 왜구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3군도통사 류정현
파일:조선 어기.svg 3군도체찰사 이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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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svg 중군절제사 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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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어기.svg 우군도절제사 이지실
파일:조선 어기.svg 우군절제사 김을화
파일:조선 어기.svg 우군절제사 이순몽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쓰시마도주 소 사다모리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호족 사에몬 미즈카[포로]
파일:쓰시마 소 가문 문장.svg 호족 후지지로[포로]
병력 군선 227척, 군사 17,285명 미상
피해 180명 전사[12] 143명 이상 전사
1000명 포로[13]
2007호의 가옥 파괴
군선 124척 파괴
군선 40척 나포[14]
결과 조선의 승리
쓰시마도주 생포 실패
영향 조선 포로 8명 구출
명나라 포로 146명 구출
쓰시마도주 소 사다모리조선에 대한 복종
계해약조 체결
명나라일본 정벌 억제

3.2.1. 배경

태조 7년(1398) 1월, 대마도의 사절이 조선을 방문해 조하(朝賀)에 참예한 이래, 대마도에서 파견된 사절단은 거의 매년 조선을 방문해 예물을 바치고 그 대가로 쌀과 콩을 받아갔다. 이들 사절단은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宗貞茂)가 보낸 자들이었고, 왜인 상인들도 이들을 따라가 항구에 돌아다니며 교역했다. 이로 인해 여러 폐단이 발생하자, 조선 조정은 부산포와 내이포에 한해 왜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고, 통행 증명서인 행장(行狀)을 소지한 선박에 한해 기항하게 했다. 또한 태종 18년(1418) 3월 경상도의 염포와 가배량에 왜관을 설치하고 왜인을 분치시켰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은 계속되어 태종 대에만 소규모 침략이 60여 차례 있었다. 그나마 소 사다시게는 조선의 요구에 응해 왜선을 가능한 통제하고 왜구를 금하려 노력했으며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 백성들을 돌려보냈기에 조정에서는 그를 괜찮은 인물로 여겼다.[15] 그러다가 소 사다시게가 사망한 뒤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뒤를 이었는데, 이 시기에 기근이 들어 대마도의 생활이 궁핍해지자 다시 왜구가 활개를 쳐 조선과 명나라를 향한 약탈 행렬이 이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소 사다모리에게 왜구를 제어할 것을 요구했지만, 당시 대마도의 실권은 왜구의 두목이자 소다만호(早田萬戶)인 사에몬타로(左衛門太郞)가 장악하고 있어서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세종 1년(1419) 5월 초, 왜선 39척이 비인현 도두음곶을 침략했다. 그들은 조선 병선 7척을 탈취하여 불사르고 많은 조선 병사들을 살육했으며, 만호 김성길은 창에 찔려 물에 떨어졌다가 겨우 헤엄쳐서 살았고, 아들 김윤은 아버지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여기고 "아비가 이미 물에 떨어져 죽었으니, 내가 어찌 혼자 싸우다가 적의 손에 죽으리오."라며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후 왜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육지에 올라 비인 현감 송호생의 군대를 격파하고 송호생이 달아난 성을 포위해 거의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이면서 성 밖에 있는 민가의 닭과 개를 노략해 거의 다 없어지게 했다. 이에 지서천군사 김윤과 남포진 병마사 오익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반격하고 송호생이 성밖으로 나와 협공하자, 왜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또한 5월 12일엔 왜선 7척이 해주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했고, 13일엔 황해도 조전절제사 이사검 등이 병선 5척으로 왜구를 토벌하러 갔다가 해주 연평곶에서 적선 38척에게 포위되었다. 이때 왜구들은 이사검 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조선을 치러 온 것이 아니라, 본래 중국을 향하여 가려고 했으나 마침 양식이 떨어졌으므로 여기에 왔노라. 만일 우리에게 양식을 주면 우리는 곧 물러가겠으며, 전일에 도두음곶에서 싸움한 것은 우리가 먼저 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대의 나라 사람들이 우리들을 하수(下手)하기에 부득이 응했을 뿐이다.

이에 이사검이 사람을 보내 쌀 5섬과 술 10병을 줬으나, 왜구는 도리어 보낸 사람을 잡고 양식을 더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사검은 진무(鎭撫) 2인과 선군(船軍) 1인을 보내어 쌀 40섬을 주었으나, 왜구는 이속과 진무는 돌려보냈지만 선군을 잡아두고 이시검과 대치했다. 이에 태종과 세종은 근심하며 대호군 김효성을 경기, 황해도 조전 병마사에, 예빈 소윤 장우량을 황해도 경차관으로 임명하여 각기 병사를 이끌고 해주로 파견했다. 또한 태종과 세종은 박은, 이원 및 조말생과 이명덕을 대궐로 불러 왜구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 세종이 말했다.
각도와 각 포구에 비록 병선은 있으나, 그 수가 많지 않고 방어가 허술하여, 혹 뜻밖의 변을 당하면, 적에 대항하지 못하고 도리어, 변환(邊患)을 일으키게 될까 하여, 이제 전함(戰艦)을 두는 것을 폐지하고 육지만을 지키고자 한다.

판부사 이종무와 찬성사 정역 등이 반대했다.
우리나라는 바다에 접해 있으니, 전함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전함이 없으면, 어찌 편안히 지낼 수 있겠습니까.

이지강도 반대했다.
고려 말년에 왜적이 침노하여 경기까지 이르렀으나, 전함을 둔 후에야 국가가 편안했고, 백성이 안도했나이다.

그러나 세종은 "이사검이 왜구에게 협박하여 식량을 내줬으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왜적은 병선이 많이 모이면 약한 틈을 치러 할 것이다." 하며 여전히 수군의 효용성을 의심했다. 반면, 태종은 류정현, 박은, 이원, 허조 등을 불러 왜구가 중국으로 치러 간 틈을 타 대마도를 치는 게 어떤지 물었다. 이에 신하들이 대마도를 치는 건 위험하니 적들이 귀환할 때를 노려 역습하자고 제의하자, 태종은 단호하게 답했다.
만일 물리치지 못하고 항상 침노만 받는다면, 한나라가 흉노에게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허술한 틈을 타서 쳐부수는 것만 같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처자식을 잡아 오고, 우리 군사는 거제도에 물러 있다가 적이 돌아옴을 기다려서 요격하여, 그 배를 빼앗아 불사르고, 장사하러 온 자와 배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구류(拘留)하고, 만일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베어버리고, 구주(九州)에서 온 왜인만은 구류하여 경동(驚動)하는 일이 없게 하라. 또 우리가 약한 것을 보이는 것은 불가하니, 후일의 환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

이후 태종은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임명해 중군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 이숙묘, 황상을 중군 절제사로, 유습을 좌군 도절제사로, 박초, 박실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 이순몽을 우군 절제사로 삼게 했으며, 경상, 전라, 충청의 3도 병선 2백 척과 배를 타는 데 능숙한 병사들을 이끌고 6월 8일에 견내량에 집결하여 대마도 정벌을 준비하게 했다.또한 영의정 류정현을 3군도통사로 삼아 경상도에 가서 이를 총감독하게 했다. 이리하여 제3차 대마도 정벌의 막이 올랐다.

3.2.2. 조선의 원정 준비

대마도 원정을 결정한 태종은 대마도주의 사신을 함경도로 보내고, 왜구와 내통한다고 의심되는 왜인 21명의 목을 베었으며, 경상도에 거주하던 왜인 591명을 경상도에 355명, 충청도에 203명 강원도에 33명으로 나눠 보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자와 자살한 자가 136명에 달했다. 또한 간첩이 있을 것을 우려해 요해지(要害地)를 지켜 행인들을 점검하고 통행증이 없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하게 했다. 이후 태종은 6월 9일 전국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교서를 반포했다.
병력을 기울여서 무력을 행하는 것은 과연 성현이 경계한 것이요, 죄 있는 이를 다스리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으로서 부득이한 일이라, 옛적에 성탕(成湯)이 농삿일을 제쳐 놓고 하나라를 정벌하고, 주나라 선왕(宣王)이 6월 같이 더운 때에 험윤(玁狁)을 토벌했으니, 그 일에 있어 비록 대소는 다름이 있으나, 모두가 죄를 토벌하는 행동은 한 가지라.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1410)으로부터 변경에 뛰놀기 시작하여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 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으니, 뜻 있는 선비와 착한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탄식하며, 그 고기를 씹고 그 가죽 위에서 자기를 생각함이 여러 해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강헌 대왕이 용이 나는 천운에 응하여 위덕이 널리 퍼지고 빛나서,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해 주시는 덕을 입어 그렇지 않으리라 믿었더니, 그러나 그 음흉하고 탐욕 많은 버릇이 더욱 방자하여 그치지 않고, 병자년(1396)에는 동래(東萊) 병선 20여 척을 노략하고 군사를 살해하니, 내가 대통을 이어 즉위한 이후, 병술년(1406)에는 전라도에, 무자년(1408)에는 충청도에 들어와서, 혹은 운수하는 물품을 빼앗고, 혹은 병선을 불사르며 만호를 죽이기까지 하니, 그 포학함이 심하도다. 두 번째 제주에 들어와 살상함이 많았으니, 대개 사람을 좋아하는 성낸 짐승처럼 간교한 생각을 숨겨 가지고 있는 것은 신과 사람이 한 가지로 분개하는 바이지마는, 내가 도리어 널리 포용하여 더러움을 참고 교통하지 않았노라.

그 배고픈 것도 구제했고, 그 통상을 허락하기도 했으며, 온갖 구함과 찾는 것을 수응(酬應)하여 주지 아니한 것이 없고, 다 같이 살기를 기약했더니, 뜻밖에 이제 또 우리나라의 허실을 엿보아 비인포에 몰래 들어와서 인민을 죽이고 노략한 것이 거의 3백이 넘고, 배를 불사르며 우리 장사(將士)를 해치고, 황해에 떠서 평안도까지 이르러 우리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며, 장차 명나라 지경까지 범하고자 하니, 그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며, 하늘의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게 함이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내가 삶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잃어버리는 것을 오히려 하늘과 땅에 죄를 얻은 것같이 두려워하거든, 하물며 이제 왜구가 탐독(貪毒)한 행동을 제멋대로 하여, 뭇 백성을 학살하여 천벌을 자청하여도 오히려 용납하고 참아서 토벌하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랴. 이제 한창 농사짓는 달을 당하여 장수를 보내 출병하여, 그 죄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아아, 신민들이여, 간흉한 무리를 쓸어 버리고 생령을 수화(水火)에서 건지고자 하여, 여기에 이해(利害)를 말하여 나의 뜻을 일반 신민들에게 널리 알리노라.

6월 19일, 원정군은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16]를 출발했다. 이때 동원된 병선은 227척, 병력은 17,285명이었고, 함선에 실린 식량은 65일치였다. 이때 태종은 6월 8일 견내량에 집결한 함대의 출항 소식을 기다렸지만 좀처럼 오지 않자 형조 참판 홍여방을 체복사(體覆使)로 삼아 원정을 떠나지 않는 까닭을 알아보려 했지만 정현이 17일에 이미 출항했다고 보고하자 그만뒀다. 그 후 태종은 함대가 역풍으로 인해 거제도로 돌아왔다고 하자 병조 정랑 권맹손을 경차관으로 삼고 파견해 질책하는 내용의 교지를 류정현에게 전달하게 했다.
금월 11일 갑신은 곧 발선하는 길일이거늘, 제장이 배가 떠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고, 12일 을유에 겨우 배가 떠나서 거제도에 도착하고, 17일 경인에 이르러 또 제장이 배 떠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고, 또 제장의 보고에 이르되, '17일에 배가 떠났으나, 바람에 거슬려 거제도로 돌아왔다.' 하니, 이것은 다 행군하는 큰 일이어늘, 경이 어찌하여 분변하여 장계하지 않았는가. 위에 적은 그날의 더디게 된 사유와 역풍의 진위를 속히 분변하여 장계할 것이며, 또 제장을 독촉하여 발선하게 하라.

권맹손은 명을 받들어 거제도로 내려갔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함대가 대마도로 떠난 뒤여서 교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한편 태종은 중국으로 간 왜구가 대마도로 돌아올 것을 대비해 경상, 충청, 전라 해도 각처의 조전 절제사로 하여금 각각 병선을 거느리고 요해지에 머무르면서 돌아오는 적을 요격하게 했다. 또한 일본 정부가 대마도 정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할 것을 우려해 원정 함대가 출항한 뒤에 일본 사신을 돌려보내게 하고 일본 정부에게 일본 본토를 칠 의사가 없음을 알리게 했다.

3.2.3. 성공적인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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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 선봉 함대 10여 척이 먼저 대마도에 도착했다. 섬에 있던 왜구들은 이들을 바라보고서 요동으로 출정한 대마도의 왜적들이 원정 약탈에 성공한 후 귀환한 것으로 오해하고 술과 고기를 가지고 환영했다 한다. 그러나 그 직후에 조선 함대가 모두 도착해 두지포에 정박하자, 왜인들은 모두 넋을 잃고 도망갔다. 다만 50여 인이 남아서 두지포에 상륙하는 조선군과 교전했으나 패퇴해 양식과 재산을 버리고 험준한 산에 숨었다. 이종무는 귀화한 왜인 지문을 보내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의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한 자는 자손에게까지 마땅히 후하게 하려니와, 은혜를 배반하고 들어와 도적질한 자는 처와 자식까지도 아울러 죽일 것이니, 이것은 천리의 당연한 바요, 왕자(王者)의 대법(大法)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더불어 물 하나를 서로 바라보며 우리의 품안에 있는 것이어늘, 전조가 쇠란했을 때에 〈그 틈을 타서〉 경인년으로부터 우리의 변경을 침략했고, 군민을 죽이었으며, 가옥들을 불사르고 재산을 빼앗아 탕진했다. 연해 지방에서는 사상자가 깔려 있는 지가 여러 해이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이 용비(龍飛)하시어서 운을 맞아서 〈너희들을〉 도와 편하게 하여 서로 믿고 지내게 했으나, 오히려 또한 고치지도 아니하고, 병자년에는 동래에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병선을 빼앗고, 군사를 살육했으며, 우리의 성덕 신공(聖德神功)하신 상왕이 즉위하신 후 병술년에는 조운선을 전라도에서 빼앗아 갔고, 무자년에는 병선을 충청도에서 불사르고 그 만호까지 죽였으며, 재차 제주에 들어와서는 살상이 또한 많았다.

그러나 우리 전하께서는 거치른 것과 때묻은 것을 포용하시는 도량이시므로, 너희들과 교계(較計)하고자 하지도 않으시고 올 적에는 예를 두터이 하여 대접하시었으며, 갈 때에도 물건을 갖추어서 후히 하시었다. 굶주림을 보고 도와주기도 했고, 장사할 시장을 터주기도 하여, 너희들이 하자는 대로 하여 주지 아니한 것이 없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저버린 일이 있었던가. 지금 또 배 32척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틈을 살피며, 비인포(庇仁浦)에 잠입하여 배를 불사르고 군사를 죽인 것이 거의 3백이 넘는다. 황해를 거쳐서 평안도에 이르러 장차 명나라 지경을 침범하려 하니, 은혜를 잊고 의를 배반하며, 천도를 어지럽게 함이 심한 것이다. 변방을 지키는 장사가 비록 잡으려고 쫓아 갔으나, 만호 중[僧] 소오금(小吾金)을 도두음곶[都豆音串]에서 죽였고, 만호 중 요이(饒伊)를 백령도에서 죽였으며, 구라(仇羅) 등 60여 인을 다시 궐하에 끌고 갔다.

이에 우리 전하가 혁연히 성내면서 용서함이 없이 신을 명하여, 가서 그 죄를 묻게 하시니, 수죄하는 말에 이르기를, '수호(守護)의 선부(先父)는 〈조선〉 왕실을 마음껏 섬겨서 정성을 모으고 순종함을 본받았으니, 내 이를 심히 아름답게 여기었더니, 이제는 다 그만이로다.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여도 얻지 못하니, 그 자식 사랑하기를 그 아비와 같이 여기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을 토죄할 적에도 수호의 친속들과 전일에 이미 순순히 항복하여 온 자와 지금 우리의 풍화(風化)를 사모하여 투항한 자들만은 죽이지 말고, 다만 입구(入寇)한 자의 처자식과 여당만을 잡아 오라고 한 것이다. 아아, 우리의 성덕 신공하신 상왕 전하의 지인 대의(至仁大義)는 멀리 고금에 뛰어나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케 했으니, 수호는 우리 전하의 뜻을 받들어서 적당(賊黨)으로서 섬에 있는 자들은 모조리 쓸어서 보내되,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선부(先父)의 정성을 다하여 바치던 뜻을 이어 길이 길이 화호함을 도타이 하는 것이 어찌 너의 섬의 복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렇지 못하면 〈뒷날에〉 뉘우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 오직 수호는 삼가 도중(島中)의 사람으로서 대의를 알 만한 자들과 잘 생각하여라.'고 했노라.

그러나 소 사다모리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이에 조선군은 길을 나누어 수색하여 크고 작은 적선 129척을 빼앗아 아군이 사용할 20척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조리 불살랐다. 또 가옥 1939호를 불살랐고 114명의 목을 베고 21명을 사로잡았으며, 밭에 있는 벼 곡식을 베어버리고 중국인 남녀 131명을 구출했다. 이 과정에서 구출한 중국인 포로들을 통해 왜인들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는데 그것은 대마도가 현재 기근이 심하고 또한 갑자기 침공을 당해 모두 겨우 양식 한두 말만 가지고 달아났기 때문에, 오랫동안 포위한다면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정보를 접한 조선군은 훈내곶(訓乃串)으로 진출하여 목책을 세워 놓고 적이 왕래하는 중요한 요지를 지키면서 장기 주둔할 태세를 보였다.

훈내곶은 지금의 코후나코시(小船越) 아소만 내해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요충지이며 대마도는 아소만을 기준으로 북쪽 지역을 상현(上縣)이라 하고 남쪽 지역을 하현(下縣)이라 하는데 훈내곶은 양쪽 지역을 육로로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따라서 이곳을 장악하면 대마도의 중심을 끊어 상현에서 하현으로 이동하는 왜인의 육상 통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대마도의 중허리를 끊어 장악하고 나서 이종무는 함대를 두지포에 정박하여 날마다 병사들을 이끌고 수색작전을 실시했다. 이것은 하현 지역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그 가운데 가옥 68호와 선박 15척을 불태우고, 적병 9명을 참하고 중국인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했다.

이러한 전과를 올린 이후 원정군 측은 국내 지휘부에서 파견한 영의정 류정현의 종사관 조의구를 대마도에서 귀국시킨다. 그가 6월 29일에 조정에 도착하여 승전을 고하자, 3품 이상 관료들이 수강궁에 나아가 태종에게 하례했다. 태종은 훈련관 최기에게 선지 2통을 가지고 가서 이종무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게 했다. 첫 번째 선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예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도적을 치는 뜻이, 죄를 묻는 데 있고, 많이 죽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니라. 배도(裵度)는 헌종(憲宗)의 명을 받아 채(蔡)나라를 치고, 조빈(曹彬)은 태조의 명을 이어 촉나라를 정복시킨 것이 사기에 실려 있어, 환하게 볼 수 있는지라, 오직 경은 나의 지극한 생각을 몸받아 힘써 투항하는 대로 모두 나에게 오게 하라. 또한 왜놈의 마음이 간사함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이긴 뒤라도 방비가 없다가, 혹 일을 그르칠까 함이 또한 염려되는 것이며, 또는 생각하니, 7월지간에는 으레 폭풍이 많으니, 경은 그 점을 잘 생각하여, 오래도록 해상에 머물지 말라.

두 번째 선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봄에 나게 하고 가을에 죽이는 것은 하늘의 도이다. 왕자는 하늘의 도를 몸받아 만민을 사랑하여 기르는지라, 그 도적과 간사한 무리로 패상난기(敗常亂紀)[17]하는 자는 베고 토벌을 하는 것은 마지못하여 하는 일이지마는 삼가며 불쌍히 여기는 뜻도 언제나 떠나지 않는도다. 근자에 대마도 왜적이 은혜를 배반하고 의를 저버리고 몰래 우리의 땅 경계로 들어와 군사를 노략한 자이면, 잡는 대로 베어서 큰 법을 바르게 했고, 전일에 의리를 사모하여 전부터 우리나라의 경계에 살던 자와 이제 이익을 찾아 온 자는 모두 여러 고을에 나누어 배치하고 옷과 식량을 주어서 그들의 생활이 되게 한다.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해서 심고 거두는 데 적당하지 않아서, 생계가 실로 어려우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기는 것이다. 혹 그 땅의 사람들이 전부 와서 항복한다면, 거처와 의식을 요구하는 대로 할 것이니,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도도웅와(소 사다모리)와 대소 왜인들에게 깨우쳐 알려줄 것이니라.

그러나 얼마 후, 대마도로 출정한 조선군은 뜻하지 않은 패배에 직면한다.

3.2.4. 예상치 못한 패배

원정군 수뇌부 측은 처음에는 이 정도의 전과를 거두고 철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앞서 언급되었듯이 국내 지휘부 소속 영의정 류정현의 종사관으로 대마도에 파견된 조의구가 위의 전과 사실을 가지고 귀국하여 6월 29일에 조정에 승전했음을 고했기 때문이다. 군사작전이 종료되기 전에 승전 보고를 조정에 전했다는 것은 전쟁의 종료와 함께 철병을 전제로 한 것이다.[18]

하지만 이후 원정군 총사령관 이종무는 철군하기 전에 왜인들이 일기도(一岐島)와 상송포(上松浦)에 구원병을 요청[19]하는 한편, 상현(上縣) 지역의 이로군(尼老郡)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6월 26일에 전진하여, 이로군(尼老郡)에 이르러 3군에 명해 육지에 내려서 산속에 숨은 적을 수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생각을 바꿔 좌, 중, 우군 절제사 중 한 사람만이 육지에 내리기로 하고 제비뽑기를 했다. 그 결과 좌군 절제사 박실이 뽑혀 좌군만이 단독으로 적이 숨은 산속을 수색했다.[20]

박실이 군사를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 싸우려 하는 그 순간, 험한 곳에 숨어 있던 적들이 뛰쳐나와 아군을 급습하자, 병사들은 삽시간에 무너져 전사하거나 언덕에서 떨어져 죽었으며 함선 정박지까지 달아난 인원들 중에서도 아군끼리 서로 밟고 오르다가 배가 전복되어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이때 편장 박홍신(朴弘信)은 적들이 계속 추격하자, 힘을 다해 싸워서 적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적들이 지목하여 상발도(上拔都)[21]라고 했다. 화살이 떨어지자, 손으로 사졸(士卒)들을 지휘하면서 말하기를,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니, 너희들은 속히 배에 올라서 떠나라.”라고 하고는, 마침내 박무양(朴茂陽), 김해(金該), 김희(金熹) 등과 함께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박홍신 등이 시간을 번 덕에 박실은 군사들을 거두어 겨우 배에 올라탔으나 왜구들은 계속해서 조선군을 추격해 왔다.

그러자 우군 절제사 이순몽과 병마사 김효성이 우군을 이끌고 배에서 내려 근처 언덕으로 올라가 추격해오는 적을 향해 화살 세례를 퍼부으며 분전했다. 특히 이순몽이 적 선봉의 우두머리(魁首)를 화살을 쏘아 사살하자 왜구들은 추격을 중단하고 패주했다.[22] 그러나 이종무가 이끄는 중군은 끝내 하륙(下陸)하지 않았다.[23]

3.2.5. 철수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는 조선군이 오래 머물 것을 두려워해 글을 받들고 군사를 물러 수호(修好)하기를 빌면서 말했다.
7월 사이에는 항상 풍파의 변이 있으니, 오래 머무름이 옳지 않습니다.

이에 원정군은 태풍이 올 것을 우려하고 요동으로 북상한 왜구 주력부대가 귀환할 시기가 되어 이들을 조선 연안에서 요격해야 할 2차 작전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7월 3일 대마도에서 철수해 거제도로 돌아갔다. 7월 7일, 태종은 이종무를 의정부 찬성사, 이순몽을 좌군 총제, 박성양을 우군 동지총제로 삼는 등 원정군을 이끈 제장들의 직급을 높이고 전투에서 죽은 병마부사 이상에게 쌀과 콩 각각 8석, 군관은 사람마다 각각 5석, 군정은 사람마다 3석을 주게 했다. 그리고 동지총제 이춘생을 보내 원정을 갔다 돌아온 군영에 가서 술로 제장들을 위로하게 했다. 그러나 7월 4일 왜구의 전선 2척이 안흥량에 들어와 전라도의 공선 9척을 노략하고 대마도로 가는 일이 벌어지자, 태종은 대마도롤 재정벌하는 문제를 고려했다. 태종은 류정현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중국으로부터 돌아온 적선 30여 척이 이달 초3일에는 황해도 소청도에 이르고, 초4일에는 안흥량(安興梁)에 와서 우리 배 9척을 노략하고 도로 대마도로 향하니, 우박과 권만으로 중군 절제사를 삼고, 박실과 박초로 좌군 절제사, 이순몽과 이천으로 우군 절제사를 삼아, 각각 병선 20척을 거느리게 할 것이니, 도체찰사가 다 거느리고 다시 대마도로 가되, 육지에 내려 싸우지는 말고,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에 떠서 변을 기다릴 것이며, 또 박성양으로는 중군 절제사를, 유습으로는 좌군 절제사를, 황상으로는 우군 절제사를 삼아, 각각 병선 25척을 거느리고 나누어 등산(登山)·굴두(窟頭)와 같은 요해처(要害處)에 머무르게 하고, 적의 돌아오는 길을 맞아 쫓으며, 협공으로 반드시 대마도까지 이르게 하라.

그러나 우의정 이원이 "군사들의 예기가 이미 쇠하고 선박의 장비가 또한 파손되었고, 더구나 천후가 점점 바람이 높으니, 멀리 불측한 험지를 건너가다가 혹 생각치 않은 변이 있으면 뉘우쳐도 따를 수 없을 터이니, 바람이 평온해지기를 기다려 군사를 정제하여 다시 쳐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 대마도 재정벌을 미뤘다. 이때 대마도로 막 가려던 원정군은 태종의 지시를 받고 구량량에 정박했는데, 7월 15일 밤에 동풍이 폭풍우를 타고 급히 불어와 병선 7척이 파괴되고 1척은 배 전체가 뒤집혀서 빠져 죽은 이가 7명이었으며, 8척은 바람에 휩쓸려 행방을 모르게 되었다. 이후 태종은 요동 총병 유강이 망해과 전투에서 왜군을 괴멸시켰다는 소식을 듣자 대마도 재정벌을 완전히 중단하고 각 장수들에게 전라, 경상도의 요해처에 보내 엄히 방비하며 왜구가 대마도로 귀환하는 걸 기다렸다가 추격하여 잡게 했다. 그러나 왜구는 한반도를 들리지 않고 곧장 대마도로 돌아갔기에, 조선군은 그들을 잡지 못했다.

3.2.6. 태종의 엄포

7월 17일,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명해 귀화한 왜인 등현 등 5인에게 교지를 가지고 대마도로 가서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에게 전하게 했다. 교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본조가 계하여 선지를 받들어 이르노니, 거기에 이르기를, '하늘이 이 백성을 내실 때에 기운으로 형체를 이룩하고, 이치도 또한 품부하여 주었으니, 착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상서를 내리고, 불선한 일을 하면, 백 가지 재앙을 내리나니, 옛적 제왕이 천도를 받들어 백성에게 곡식을 심고 거두는 것을 가르쳐서, 오곡을 길러서 그 몸을 기르는 것이다. 그 고유한 의리를 좇아 깨쳐서 인도하여, 그 마음을 착하게 하는 것이니, 만일 굳세게 버티어 굽히지 않고 사람을 재물로써 죽이고 짓밟아서 민망하게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작으면 형벌하여 죽이고, 크면 정벌하여 없애는 것이 요(堯)·순(舜)과 삼왕의 사람의 임금 노릇하는 법이 이와 같을 뿐이다.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이러므로 왜인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며, 때로는 도적질로 나서서 평민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전곡(錢穀)을 약탈하고, 마음대로 고아와 과부, 사람들의 처자를 학살하며, 사람이 사는 집을 불사르니 흉악무도함이 여러 해가 되었으나, 우리 태조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신무(神武)하시므로 하늘 뜻에 응하여 혁명을 일으켜 비로소 집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창조하매, 저자와 전포도 변함이 없이 큰 기업이 정했졌으니, 이것이 비록 탕임금과 무왕의 성덕이라 할지라도 어찌 여기에서 더하겠는가.

국세가 크게 확장되고 병력이 뛰어나게 충실하니, 산과 바다를 뚫어서 통하게 할 수도 있고, 천지를 뒤흔들게 할 수도 있으니, 높고도 높으며 성하고도 성함이여, 대저 혈기있는 자 두려워서 굴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한 편장(褊將)을 명하여 대마도의 작은 추한 놈들을 섬멸하게 하니, 마치 태산이 까마귀 알을 누르는 것과도 같고 맹분(孟賁)·하육(夏育) 같은 용사가 어린아이를 움키는 것과도 같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도리어 문덕을 펴고 무위(武威)를 거두시고 은혜와 신의와 사랑과 편안케 하는 도리를 보이시니, 내가 대통을 이어 나라에 임한 이래로 능히 전왕의 뜻을 이어서 더욱 백성을 측은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비록 조그마한 공손하지 못한 일이 간혹 있어도 오히려 도도웅와의 아비 종정무(宗貞茂: 소 사다시게)의 의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한 것을 생각해서, 범하여도 교계(較計)하지 않았으며 통신하는 사신을 접할 때마다 사관(使館)을 정하여 머물게 하고, 예조에 명하여 후하게 위로하고 또 그 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이를 꾀하는 상선의 교통도 허락했으며, 경상도의 미곡을 대마도로 운수한 것이 해마다 대개 수만 석이 넘었으니, 그것으로 거의 그 몸을 길러 주림을 면하고 그 양심을 확충하여, 도적질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천지 사이에 삶을 같이할까 했노라.

나의 용심(用心)함도 또한 부지런히 했더니 뜻밖에도 요사이 와서 배은 망덕하고 스스로 화근을 지으며, 망함을 스스로 취하고 있으나, 그 평일에 귀화한 자와 이(利)를 얻으려고 〈무역하거나〉 통신 관계로 온 자와, 또 이제 우리의 위풍(威風)에 따라 항복한 자는 아울러 다 죽이지 아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고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어서 그 생활을 하게 한 것이며, 또 변방 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영솔하고 나아가서 그 섬을 포위하고 모두 휩쓸어와 항복하기를 기다렸더니, 지금까지도 그 섬 사람들은 오히려 이럴까 저럴까 하며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긴다. 섬 가운데 사람들은 수천에 불과하나, 그 생활을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섬 가운데 땅이 거의 다 돌산이고 비옥한 토지는 없다. 농사하여 곡식과 나무를 가꾸어서 거두는 것으로 공을 시험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틈만 있으면 남몰래 도적질하거나 남의 재물과 곡식을 훔치려 하는 것이 대개 그 평시에 저지른 죄악이며 그 죄악이 벌써부터 가득차 있는지라, 어두운 곳에서는 천지와 산천의 신이 묵묵히 앙화를 내리고 밝은 곳에서는 날랜 말과 큰 배며 날카로운 병기와 날쌘 군사로써 수륙의 방비가 심히 엄하니, 어디가서 주륙(誅戮)의 환을 만나지 아니할 것인가. 다만 고기 잡고 미역 따고 하여 매매하는 일은 이에 생활의 자료가 되는 바인데, 이제 와서는 이미 배은하고 의를 버려 스스로 끊는 것이며, 내가 먼저 끊을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를 잃은 자는 기아를 면치 못할 것이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니, 이에 대하여 계책하기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만약 능히 번연(飜然)히 깨닫고 다 휩쓸어 와서 항복하면, 도도웅와는 좋은 벼슬을 줄 것이며, 두터운 녹도 나누어 줄 것이요, 나머지 대관들은 평도전(平道全)의 예와 같이 할 것이며, 그 나머지 여러 군소(群小)들도 또한 다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서, 비옥한 땅에 살게 하고, 다 같이 갈고 심는 일을 얻게 하여, 우리 백성과 꼭 같이 보고 같이 사랑하게 하여, 도적이 되는 것이 부끄러운 것임과 의리를 지키는 것이 기쁜 일임을 다 알게 하여, 이것이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길이며, 생활하여 갈 도리가 있게 되는 것이라. 이 계책에서 나가지 아니한다면, 차라리 무리를 다 휩쓸어서 이끌고 본국에 돌아가는 것도 그 또한 옳을 일이어늘, 만일 본국에 돌아가지도 아니하고 우리에게 항복도 아니하고, 아직도 도적질할 마음만 품고 섬에 머물러 있으면, 마땅히 병선을 크게 갖추어 군량을 많이 싣고 섬을 에워싸고 쳐서 오랜 시일이 지나게 되면, 반드시 장차 스스로 다 죽고 말 것이며, 또 만일 용사 10여 만명을 뽑아서 방방곡곡으로 들어가 치면,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 같이 오도가도 못하여, 반드시 어린이와 부녀자까지도 하나도 남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는 까마귀와 소리개의 밥이 되고, 물에서는 물고기와 자라의 배를 채우게 될 것이 의심 없으니, 아, 어찌 깊이 불쌍히 여길 바 아니겠는가.

이것은 화복의 소재가 소소하게 밝은 일이어서, 망매(茫昧)하여 분명치 못하거나 궁구하여도 끝까지 모를 일이 아니다. 옛 사람의 말에 「화와 복은 자기 스스로가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했고, 또 말하기를 「열 집만이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 한 사람은 있다.」 했으니, 이제 대마도 한 섬 사람에도 역시 다 하늘에서 내린 윤리와 도덕의 성품이 있을 것이니, 어찌 시세를 알고 의리에 통하여 깨닫는 사람이 없겠는가. 병조는 글을 대마도에 보내어 나의 지극한 생각을 알려서, 그 자신(自新)할 길을 열어 멸망의 화를 면하게 하고, 나의 생민(生民)을 사랑하는 뜻에 맞도록 하라.'했다. 이제 선지로써 일의 마땅함을 자세히 알게 하노니, 오직 족하(足下)는 잘 생각하라.

이후 태종은 9, 10월 사이에 군사를 일으켜 다시 대마도를 칠 뜻을 밝히고 각도에 독려하여 각 병선을 정리하게 했다. 또한 대마도에서 도망쳐 온 중국인이 '왜구가 9, 10월 간에 조선을 침략하자고 의논했다.'고 알렸다는 경상도 우도 도절제사의 보고가 올라오자, 태종은 우도 각 포구의 좌우령 선군들을 징집해 선군이 없는 병선에 분승하고 비상사태에 대비토록 했다. 그리고 충청, 전라, 경상 등 도의 감사들에게 대마도 재정벌에 동원되지 않으려고 군역을 회피하는 군정들을 모조리 서울로 잡아올려 대대적으로 징계하도록 조치했다. 이후 대마도주가 10월 말에 화친 의사를 밝히는 글을 보내오자, 태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내가 듣기로 하도(下道)의 백성들이 다시 출정하는 것을 꺼려 유이(流移)하는 자가 무척 많다고 하오. 그런데 대마도는 섬이 험조(險阻)하고 바다를 격해 있어 출정 토벌하기가 쉽지 않소. 지금 다행히 도도웅와가 항복을 빌어 왔소.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여, 다시 정벌하러 가리라는 소문을 그가 어찌 듣지 않았겠소. 왜적이 이미 이 소문을 들었으니, 거짓으로 다시 정벌하는 것 같이 하여서, 그들을 동요시킨다면, 또한 좋지 않겠소?

신하들은 이에 동의를 표했고, 박은과 이원 등은 "신 등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각도에, '지금 왜인이 성심으로 항복해 왔으므로, 잠시 재차 정벌하는 일을 정지한다. 만약에 앞서 같이 나쁜 짓을 한다면, 반드시 다시 정벌해야 할 것이니, 각각 준비하고 기다리라.'고 이문(移文)해야 할 것으로 압니다."라고 의견을 제시하여 태종이 승인했다.

3.2.7. 대마도주의 복종

이듬해(세종 2년, 1420) 윤1월 10일,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의 부하 시응계도가 조선을 방문해 대마도주의 뜻을 전했다.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이 곤란하오니, 바라옵건대, 섬 사람들을 가라산(加羅山) 등 섬에 보내어 주둔하게 하여, 밖에서 귀국을 호위하며, 백성으로는 섬에 들어가서 안심하고 농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 땅에서 세금을 받아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어 쓰게 하옵소서. 나는 일가 사람들이 수호하는 자리를 빼앗으려고 엿보는 것이 두려워, 나갈 수가 없사오니, 만일 우리 섬으로 하여금 귀국 영토 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의하여,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한 해적의 배 30척 중에서 싸우다가 없어진 것이 16척이고, 나머지 14척은 돌아왔는데, 7척은 곧 일기주(一岐州)의 사람인데, 벌써 그 본주로 돌아갔고, 7척은 곧 우리 섬의 사람인데, 그 배 임자는 전쟁에서 죽고, 다만, 격인(格人)들만 돌아왔으므로, 이제 이미 각 배의 두목 되는 자 한 사람씩을 잡아들여 그 처자까지 잡아 가두고, 그들의 집안 재산과 배를 몰수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사오니, 빨리 관원을 보내어 처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태종은 판서 허조에게 명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서를 대마도주에게 보내게 했다.
사람이 와서 편지를 받아 보고 귀하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깨달아서, 신하가 되기를 원하는 뜻을 자세히 알았으며, 돌려보낸 인구와 바친 예물은 이미 자세히 위에 아뢰어 모두 윤허하심을 받았으니, 실로 온 섬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귀하가 요청한 바 여러 고을에 나누어 배치한 사람들에게는 이미 의복과 식량을 넉넉히 주어서, 각기 그 생업에 안심하고 종사하게 했는데, 섬 안에는 먹을 것이 부족하니, 돌아간다면 반드시 굶주릴 것이다. 또한 대마도는 경상도에 매여 있으니, 모든 보고나 또는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본도의 관찰사에게 보고를 하여, 그를 통하여 보고하게 하고, 직접 본조에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이요, 겸하여 청한 인장의 전자(篆字)와 하사하는 물품을 돌아가는 사절에게 부쳐 보낸다. 근래에 귀하의 관할 지역에 있는 대관(代官)과 만호(萬戶)가 각기 제 마음대로 사람을 보내어 글을 바치고 성의를 표시하니, 그 정성은 비록 지극하나 체통에 어그러지는 일이니, 지금부터는 반드시 귀하가 친히 서명한 문서를 받아 가지고 와야만 비로소 예의로 접견함을 허락하겠노라.

그러나 이후에도 양측의 갈등은 이어졌다. 세종 3년(1421) 4월, 소 사다모리는 부하를 보내 예조에 조선을 비난하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나의 부덕(不德)한 소치로 백성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여, 마침내 경내 백성들이 대국의 변경을 침범했으니, 이는 대국이 용사(容赦)할 수 없는 바이라, 비록 죽음을 당한다 할지라도 실로 내가 원하던 바이니, 어찌 추호라도 마음에 거리끼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고을 사람으로서, 혹은 사명을 띠고, 혹은 무역을 종사한 자들로, 당시 대국 경내에 있던 자 3백 여 명이 모두 관련되어 구류당하고 있으니, 그 부모와 처자들이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는 정을 견디지 못하여, 밤낮으로 울며 정신을 잃은 자가 10에 8, 9에 달합니다. 백성 한 사람이 제대로 살지 못할지라도, 인자한 사람은 이를 걱정하는데, 하물며 3백여 명에 달하지 않습니까. 대국에는 다행히 지금 위로는 훌륭한 임금이 계시고, 아래에는 어진 신하가 있사오니, 어찌 이를 위하여 측은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내가 옛 역사에서 이를 본다면, 요(堯)와 같은 어진 이가 아버지인데도 단주(丹朱) 같은 못난 이들이 있으며, 순(舜)도 큰 성인이지만 고수(瞽叟) 같은 모진 아버지와 상균(商均) 같은 어리석은 아들이 있었으니, 성품의 선악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도 서로 닮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다스리는 자는, 그 자신에만 국한하고, 그 친족에까지 연루시키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다른 사람이야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금 형을 받고 죽음을 당한 자들과 구류를 당한 자들은 서로 골육의 친족도 아니며, 그들이 한 짓도 서로 관련이 없어, 월(越)나라 사람이 진(秦)나라 사람의 비대하고 수척한 것을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대국에서는 옥과 돌을 구별하지 않고 곤륜산(崐崙山) 불 속에 섞어 버리며 죄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노여움을 옮겼으니, 어진 임금이 먼 곳의 사람을 애휼하는 도리가 과연 이러합니까. 만일 대국에서 은혜를 베풀어 일일이 옛 고장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다만 내가 감사히 여길 뿐 만아니라, 죽은 아비 정무(貞茂)의 영혼도 지하에서 응당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또한 최공(崔公)이 금년 정월에 보낸 서계(書契)를 받자오니, '대마도가 경상도에 예속되었다.' 했는데, 역사 서적을 조사하여 보고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사실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대왕께서 훌륭한 덕을 닦고 두터운 은혜를 베푸신다면, 누가 감히 귀의하지 않겠습니까. 옛날 주(紂)가 무도한 까닭에, 억조의 무리가 모두 창을 거꾸로 잡고 대항했으며, 주공(周公)이 정치를 잘한 까닭에, 월상씨(越裳氏)가 아홉 번이나 통역을 거쳐서 이르렀으니, 반드시 옛날대로 〈일본 소속으로〉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덕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바라옵건대, 여러분들께서는 나의 작은 정성을 임금님께 전달하여 주옵소서. 앞서 주신 전자(篆字)로 새긴 나의 이름을 지금 찍어서 신빙할 수 있는 표적으로 삼습니다. 현하 혹독한 추위에 모두들 나라 위하여 건강에 유의하옵소서.

이에 조정에서는 글 내용이 공손하지 않다 하여, 사절을 예절대로 접대하지 아니하고, 그가 바친 예물도 거절했다. 이로 인해 한때 양측의 갈등이 첨예해졌지만 결국 조선과의 교역이 끊어지면 손해보는 것은 자신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대마도주는 어쩔 수 없이 조선에게 예전처럼 조공을 바쳤고, 조선 역시 그동안 억류했던 왜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다만 태종은 대마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지를 보내 다시는 조선을 건드리지 말라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이후 대마도는 조선의 속주가 되었으며, 이후 대마주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다.
너희들이 말로만 귀속한다 하나, 실은 성관을 들이지 아니하니, 우리는 경상 좌·우도 여러 포구에 있는 병선과 수군을 모아서 거제도에 나누어 수비시켜 도적의 변란을 대비하게 하고, 여러 포구의 수군은 부근에 있는 시위패(侍衛牌)로 대행하게 하겠다.

3.2.8. 일본에 미친 영향

대마도 정벌은 조선이 일본과의 전면전을 각오하고 군사를 동원한 것이 아니라, 조선 조정에서 일본의 규슈 쪽에 설명하는 등 제한전으로 기획되었다.
조말생과 허조에게 명하여 일본국 규슈(九州)에서 사자(使者)로 보내온 정우(正祐) 등 네 사람을 제군(諸君)의 처소에서 대접하게 하고, 따라온 사람들은 배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보내라고 이르고, 우리 나라에서 대마도를 토벌할 뜻을 말하되, 너무 놀라게 하지는 말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각각 따라온 사람들을 다 내세우니, 5인이므로, 임금이 옷을 주어 판관 최기(崔岐)로 하여금 압행(押行)하게 했다.
『세종실록』 4권 1년 (1419년 기해) 5월 23일(정묘) 6번째 기사
"규슈 절도사(九州節度使)가 우리 나라의 대마도 정벌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반드시 의혹을 이룰 것이니, 우리 나라 병선이 떠난 뒤에 규슈 사신의 배를 돌려 보내게 하고, 규슈에 간여하지 아니할 뜻을 알리라."
『세종실록』 4권 1년 (1419년 기해) 6월 6일(기묘) 4번째 기사

이 정보를 들은 일본 측의 반응은 왕족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伏見宮貞成親王)의 일기인 『간몬교키(看聞御記)』에서 드러나는데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무로마치 막부에선 이 같은 소식을 듣고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건 그렇고 지금 막 대당국, 남만, 고려 등이 일본을 공격해온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려가 알렸다고 한다. 무로마치도노는 매우 놀라셨다. 단 신국(神国)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간몬교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막부는 조선의 예고를 듣고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쓰시마 섬을 공격하는 나라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았고 명나라(대당국) 등도 공격의 주체로서 회자되고 있었다. 물론 1419년 사건을 전후해서 명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요구하는 등의 사건은 있었지만, 직접 쓰시마 공격에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은 계속되어 이후에도 '대당봉기(大唐蜂起)' (応永26年 6月25日), '당인습격(唐人襲來)' (応永26年 6月29日), '사쓰마에 도착한 이적은 몽고라고 한다(薩摩ニ付異賊蒙古云々)' (応永26年 5月23日) 등 명나라가 크게 의식되고 있으며, 그 호칭도 당(唐), 몽고(蒙古)라고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이러한 용어의 혼동은 조선의 쓰시마 정벌이 1274년과 1281년, 2차례 있었던 몽골의 일본 습격을 상기시키고 있다는 점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전황의 전모는 쓰시마 정벌이 끝난 지 두 달 후인 같은 해 8월에 규슈(九州)로부터의 단다이 주진장(探題注進状)이 교토에 도착하여 밝혀지게 된다. 일본측 위키백과에는 주진장의 최초 작성자는 쇼니 미츠사다(少弐満貞)로 되어 있다.
황송하옵게도 아뢰옵니다. 6월 20일 몽골, 고려 모두 협동하여 군세 500여 척이 쓰시마 섬에 접근해 왔습니다. 그 섬을 빼앗으려고 하는 동안은 우리들과 다자이노쇼니의 군세만이 바로 쓰시마 섬의 포구에 도착하여 낮과 밤 사이에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동안 죽은 적의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전투가) 이미 몹시 어려워졌을 때에 (규슈의) 9개 지역의 군세를 모았습니다. 같은 달 26일 각각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안부를 알 수 없는 전투를 치르는 동안 이국의 군병 3천7백여 명을 죽이고 베어버렸습니다.[24] 그 외에는 숫자를 알 수 없습니다. 전체 해상에 떠있는 것 적의 함선은 1300여 척이었습니다. 수군에게 명령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인 곳곳의 전투, 또는 미처 배에 타지 못하고 해상에 가라앉은 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는 동안 한창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에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적의 배에서 비와 바람이 진동했습니다. 천둥이 치고 싸락눈이 내렸습니다. 추위로 손이 얼어 무기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얼어 죽는 자 그 수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기이한 현상은 전투가 어려울 때에 어디로부터 인지 알 수 없는 3종류의 비단의 깃발을 단 큰 배 4척이, 대장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여인이었습니다. 그 힘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몽골의 배에 옮겨 타 군병 300여 명을 손으로 들어 바다로 던져버렸습니다. 대장은 몽골의 남자와 그 외에 죄가 있는 자 28명을 즉시 베어버렸습니다. 남은 7명은 위의 뜻에 따라 남겨두었습니다. 27일 한밤중에 이국의 남은 병사들도 모두 물러갔습니다. 몽골군은 전사했다고 소문이 났지만 그것은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외의 적선도 7월 2일 모두 물러갔습니다. 이와 같이 급속하게 종결된 것은 모두 신명의 위력에 의한 것입니다.

이 문서는 7월 15일 자 「단다이 모치노리(探題持範)」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인데 당시의 규슈 단다이는 모치노리가 아니라 시부가와 요시토시(渋川義俊)이며, 내용적으로도 다자이노쇼니는 물론, 1419년 사건에서 규슈 단다이가 대마도에 협력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적군의 배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추위로 인해 손이 얼어붙었다는 기록 역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즉 이 주진장의 출처는 불분명하며, 그 내용도 전황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은 다자이노쇼니와 규슈 단다이의 공을 강조하고, 기이현상을 보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만 태풍과 관련해서는 쓰시마 섬을 공격한 조선군이 태풍이 올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여 후퇴했다는 기록만이 확인될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배가 나타났고 그 배의 대장은 여인이었으며, 이러한 싸움의 종결이 신의 위력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고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에 대해서도 신공황후(神功皇后)라는 설이 제시되고 있다. 또한 훗날에 편찬된 다른 일본 사료인 『소 씨 가보(宗氏家譜)』에선 조선군 사망자가 2,500여 명이라는 기록이 나오고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에선 조선군 1,500명을 죽이고 배를 불살랐다고 나오나 마찬가지로 전공을 과장한 것이다.

어찌 됐든 이러한 인식에 기초해 일본에선 이 전쟁을 승전으로 여겨 신들이 일본을 지켜주고 있다는 신국사상(神國思想)이 더 짙어졌으며 노가쿠(能楽) 「백낙천(白楽天)」의 제작에까지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25]

그러나 이런 과장된 승전보는 조선의 병력 규모를 과대평가하게 만들었고, 이 소식을 들은 일본 막부에선 조선이 일본 침공을 하는 줄 알고 소동이 일었다. 1420년 일본에 회례사로 파견된 송희경이 지은 『일본행록』에 따르면, 막부 관료들에게서 '조선이 일본 정벌을 명나라와 준비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당황해하며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진실은 쇼니 미쓰사다가 올린 보고에 자신이 상대한 게 명나라 1천 척, 조선 3천 척이 언급되었기 때문. 덕분에 송희경은 이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야 했다.[26] 송희경 본인도 원래는 회례사로 일본에 방문하려 했는데 쓰시마에서 막부가 조선의 침공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교토 근처에선 쇼니 미쓰사다의 왜곡 보고를 들어서 일정에도 없던 오해를 풀어야 했다.

3.2.9. 후일담

3.2.9.1. 이종무의 몰락
이종무는 대마도 정벌을 마치고 귀환한 뒤 태종으로부터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받았고 의정부 찬성사로 승진했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박실의 패전 원인이 이종무에게도 있음을 밝혀내자, 대신들은 이종무를 처벌해야 한다며 그를 앞다퉈 탄핵했다. 이에 대해 태종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박실의 패군한 죄는 모두 다 아는 바이지만, 만약 법대로 논한다면, 정현이 도통사가 되어서 즉시로 실을 구속하고 벌을 줄 것을 청하지 아니했으니, 그것은 역시 죄되는 일이므로, 이제 장온을 무고죄로 벌주고, 여러 장수들을 상주었다가, 또 다시 정현과 종무를 옥에 하옥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하물며 동정할 때에는 승리가 많았고 패전은 적지 않았는가. 뒷날의 일도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대거(大擧)할 계획을 한다면, 또한 권도(權道)를 써야 할 것이나, 내 어찌 그런 일로 하여, 끝까지 그 죄를 치죄하지 않을 수야 있겠는가. 이제 실은 공신의 자식이라 하여, 면죄시키게 하라.

사간원 우정언 이견기가 재차 이종무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자, 태종은 "종무 등은 공이 작지 않는데 간원들의 마음에는 공이 없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이견기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종무 등이 비록 공이 있다고 하지만, 모두가 다 신자된 직분에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인데, 무엇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종무가 상장군이 되어서 군에 명령을 실행시키지 못하고, 많은 부상자를 내게 했으니,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종무·습·초 등과 박실을 대질시켜 묻게 되면, 죄상이 귀착되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그 죄를 밝히고 처분하시어 뒷사람을 경계하게 하시는 것이 신들의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태종이 끝내 듣지 않자, 사간원 좌정언 하결이 다른 문제를 꺼내들었다.
김훈과 노이는 일찍이 불충한 죄를 범한 자이므로, 임금이 비록 거느리고 가라고 분부하셔도 신하된 자가 감히 거느리고 갈 수 없는 것이어늘, 이제 이종무는 훈과 이를 불러서 선중(船中)에 오르게 한 연후에 보고하고, 또 명령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떠났으니, 신하의 의리에 어그러짐이 있사오나, 이종무는 지금 사신을 대접하는 관반(館伴)이 되었사오니, 신 등이 우선 먼저 종사관 서성(徐省)을 심문하여 서류가 다 된 뒤에 그것을 가지고 수강궁에 가서 아뢰게 하소서.

김훈은 이적의 누이의 남편으로서, 본래 문과로 급제했으나 본성이 무예를 좋아하여 능히 사나운 짐승을 쏘아 잡으므로 문, 무에 재주가 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하는 짓은 삼가지 않는 일이 많고 또 여색을 좋아했다. 수원 관기 벽단단(碧團團)을 사랑하여, 가만히 서울에 데리고 왔다. 벽단단의 숙모 소매향(小梅香)은 인덕궁(仁德宮) 궁인이었다. 김훈은 이 인연으로 남모르게 인덕궁을 만나 보고, 인덕궁은 훈에게 활과 화살 및 입던 옷을 주었다. 이적의 어버지 이행(李行)은 본디 세상을 두려워하고 조심하던 사람이라, 자못 그 정상을 알고 집안에 화가 될까봐 두려워하여, 아들을 시켜 조정에 고발하게 했다. 결국 김훈은 사형을 당할 처지에 몰렸지만, 태종은 그를 용서하고 장형과 유형에 처했다. 그 후 대마도 원정이 있기 전 이적이 이종무에게 부탁했다.
김훈은 무예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니, 공(公)이 만약 그를 종군시켜 공을 세우게 하면, 거의 지난날의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종무는 이를 허락하고 거제도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 김훈과 노이를 종군하도록 청했다. 태종은 이종무의 청을 허락했지만, 이종무는 회보가 오기 전에 원정군이 출항하게 되자 김훈과 노이를 같이 데리고 갔다. 대간은 이를 문제삼아 거세게 탄핵했다.
훈은 일찍이 불충한 죄를 범했는데, 종무가 역(逆)과 순(順)을 돌보지 않고 종군하게 했으며, 적은 처음에는 아비의 말로 훈의 죄를 고발했다가, 지금에는 아비의 말을 저버리고 도리어 종무에게 추천하여 뒷날의 출세할 기회를 바랐으며, 성(省)은 〈종무의〉 종사관으로서, 〈그런 일을〉 바르게 하지 못했으니, 모두 죄를 다스리기를 청합니다.

결국 태종은 대간의 청을 받아들여 이종무, 이적, 서성을 하옥시켰다. 이후 대간은 이종무 등을 왕명의 집행을 기다리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 죄를 물어 사형시킬 것을 요구했지만, 태종은 김훈과 노이의 재산을 몰수하고 관노로 만들고 이적 등을 서인으로 폐하고 먼 지방에 부처해 영구히 서용되지 않게 하면서도 이종무만은 자원 부처[27]로 처리했다. 이후 대간은 이종무가 자신의 처벌에 분하게 여기고 원망했다며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고 류정현 등 대신들도 힘껏 청했지만, 태종은 "분하게 여기고 원망하는 말을 한 것은 어리석고 고지식한 때문이다. 어찌 딴 마음이 있으리오."라며 묵살했다.

그렇게 이종무는 목숨은 건진 채 귀양을 갔지만 1년 후 관직에 복귀했다. 그러나 세종 6년(1424)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권희달을 따라갔다가 권희달이 명나라에 진헌하는 말을 가리켜 "똥을 싣고 다니던 것이다."라고 농담하고 명나라 조정에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주먹을 쥐어 종관을 때리려 하고 대신을 욕하고 꾸짖은 일이 드러나는 바람에, 권희달을 막지 않은 죄로 연루되어 삭탈관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관직에 복귀했으나 세종 7년(1425)에 사망했다.
3.2.9.2. 계해약조
조선은 대마도 정벌 후 대마도와 교역을 중단했다. 이에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는 어떻게든 조선과 다시 교역하기 위해 매년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며 왜구를 억누를 테니 교역해달라고 요청했다. 세종 8년(1426), 조선 정부는 이들의 요청을 계속 거부했다간 그들이 앙심을 품고 또다시 왜구를 키울 것을 우려해 웅천의 제포, 동래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 등 3포를 개항하고 그곳에서 교역하는 걸 허용했다. 아울러 삼포와 서울에 왜관을 설치하고 그곳에 한해서만 왜인이 숙박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대마도주에게 입국 증명서를 만들어 줘서 입국하는 왜인은 이를 소지하도록 했고, 세견선은 1년에 50척으로 제한했고, 선원 수는 대선 40명, 중선 30명, 소선 20명으로 정했다. 또한 3포에 머무르는 자는 20일까지만 그곳에 있을 수 있게 했다.(계해약조)

이렇게 해서 대마도와 조선의 무역이 재개되었고, 왜구는 백여 년간 조선 남해를 위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포왜란, 사량진 왜변 등이 발발해 양측의 갈등이 생기자, 조선은 중종 대에 임신약조를 체결해 세견선을 절반으로 축소하고 삼포 거주를 불허했으며, 명종 대에 정미 약조를 맺어 세견선을 25척으로 줄였다. 이에 왜구는 조선에 반감을 품고는 을묘왜변을 일으켰다. 조선은 이 일로 상당한 피해를 입자 비변사를 상설화하고 제승방략을 도입했다.

4. 같이보기


[1]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불린다.[2] 심지어 규슈 일대의 왜구들이 수도 교토 인근 기나이(畿内)까지 약탈하는 사태도 벌어졌다.[3] 지금의 나가사키현에 있는 이키섬[4] 1281년은 충렬왕 7년인데, 여몽연합군의 2차 일본 원정을 가리킨다.[5] 한참 후인 조선 후기에 생겨난 두석린갑을 입은 모습이라서 후대의 상상화의 한계라고 보는 게 옳다.[6] 박위는 왕자의 난때 정도전 일파의 일원으로 태종 이방원에게 살해당한 인물이라 태종의 직계자손인 세종,문종대에 편찬된 고려사에서 박위의 전공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저술한 게 반대파를 좋게 평가할 수 없어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굳이 뺄 필요는 없는 원정의 전개과정은 왜 없는지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실패한 원정이란 건 빼도박도 못하는 사실이니 왜곡없이 사실관계만 적어도 후대에 박위의 오점을 합법적(?!)으로 길이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7] 주나라 선왕 대 신하[8] 주나라 선왕 대 명신[9] 지방에 관찰사, 유수, 병사, 수사, 대장, 통제사 등이 부임할 때 임금이 내려주는 절(節)과 부월(斧鉞). 부하들을 처단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포로] [포로] [12] 세종실록 권 4 세종 1년 7월 10일(계축)[13] 세종실록 권 54 세종 13년 11월 8일(기사). 대마도 원정 당시 국내 지휘부의 삼군 도절제사 최윤덕의 회고. 다만 이 기록에서 포로 숫자는 국내에서 억류한 왜인까지 포함한 것인지, 순수하게 대마도 원정군이 잡아온 포로의 숫자를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조선 측에선 대마도 원정의 전과가 크다고 평가했고 또 대마도 원정군이 잡아온 포로들 중에 대마도의 호족인 좌위문삼랑(左衛門三郞)과 등차랑(藤次郞) 등이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규모 자체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14] 세종실록 권 54 세종 13년 11월 8일(기사)[15] 태종 7년(1407)엔 대마도 주민들을 울릉도에 옮겨 살게 하고 싶다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조정에서는 일본의 반발이 있을 것을 우려해 받아들이지 않았다.[16] 현 지명 통영시 추봉도 추원마을[17] 천도를 어기고 인륜을 어지럽게 하는 것[18] 김일환, 2012, 「세종대 대마도정벌의 군사적 전개과정」[19] 다만 전투 당시 합류해 있었는지는 불명.[20] 이종무의 방심이나 왜인들의 유인책과는 별개로 당시 전장이었던 누카우라(糠浦)만은 지형이 매우 좁아 조선 원정군 전체는 차치하고, 좌군 전체도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력이 동시에 상륙할 수 없는 지형이었다. 이에 작전이 갑자기 바뀌어 제비뽑기를 통해 박실의 병력만이 상륙한 것으로 보이며 박실이 거느린 병력도 자신이 속한 좌군 병력 모두가 아니고 박실이 직접 지휘하는 휘하 병사로 그 숫자는 1,000명을 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일환, 2012, 「세종대 대마도정벌의 군사적 전개과정」, 게다가 상륙할 병력을 정할 때 하필이면 제비뽑기로 정하면서 상륙하게 된 좌군 병력들의 사기도 매우 저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임용한, 1998, 「조선국왕이야기 1」[21] '발도'는 아기발도의 경우에서 보듯 몽골어로 용사를 뜻하는 '바토르'의 한자 표기이다.[22] 박실의 패전에 수행했던 중국인 송관동(宋官童)의 증언에 따르면 양측 피해 규모는 왜인은 20여 명이 죽었고 조선군 측은 100여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세종실록 권 5 세종 1년 8월 5일(정축).[23] 일본 측에선 이 전투의 승리로 조선군의 원정은 완전히 실패하여 결정적 타격을 입고 퇴각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조선 조정에선 대마도 원정 전체 전과에 비하면 이 패전은 미미한 것으로 정리했다.[24] 골때리게도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선전성 전과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여 조선군의 손실이 3,700명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 측의 전과 기록이 일본측의 손실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것과 대조적이다.[25] 天野文雄(2002) 「≪白楽天≫と応永の外寇ー久米邦武と高野辰之の所説を検証する」 松岡心平編 『ZEAMI』 森話社, pp.128~146. 김정희, 2014, 「백락천(白楽天)」과 조선의 대마도 정벌과의 관련성 -노가쿠(能楽)와 정치의 관계라는 시점에서-[26] 일본행록의 기록에 따르면 송희경은 이후 쇼니 미쓰사다는 조선에게 쓰시마 섬이 입은 피해 때문에 조선 해안 마을을 불태우겠다는 말을 했으며, 이에 송희경이 쇼니 미쓰사다와 직접 만나서 해명을 하려고 했으나 쇼니 미쓰사다는 중을 보내서 '조선이 쓰시마 섬을 침공해서 매우 불쾌하다'라는 말을 전달했을 뿐 만나지를 않았다. 10여 년 후의 일이지만 오우치 모리하루에게 패배하자 조선은 쇼니에게 줄 선물을 오우치에게 주면서 빅엿을 먹여 버린다.[27] 자기가 원하는 곳에 보내어 거주를 제한하는 형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