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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
<colbgcolor=#bf1400> 경복궁 흠경각 景福宮 欽敬閣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 |
건축시기 | 1438년 (창건) 1554년 (중건) 1867년 (중건) 1888년 (중건) 1995년 (복원) |
<colbgcolor=#bf1400> 흠경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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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복궁의 전각으로, 자동 천문시계 및 해시계를 비롯한 각종 기상 관측 기구들을 모아 두고 연구하던 일종의 천문관이다.교태전의 서쪽, 함원전의 남쪽에 있다.
2. 이름과 현판
‘흠경(欽敬)’은 《서경》 - 〈요전〉에 나온 ‘흠약호천(欽若昊天)’, ‘경수인시(敬授人時)’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큰 하늘(昊天) 앞에 받들어 좇아(欽若) 공손한 자세로(敬) 백성들(人)에게 필요한 시간(時)을 알려 준다(授)’는 뜻이다.현판 글씨는 서예가 동강 조수호(趙守鎬, 1924 ~ 2016) 선생이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3. 역사
세종 재위 시절인 1437년(세종 1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438년(세종 20년)에 완공되었다. 이 때 당시 우승지였던 김돈이 기문을 지었다. 기문에 따르면 당시의 흠경각은 천추전 서쪽에 있는 작은 전각 1칸 규모였다고 한다. 세종은 흠경각을 여러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공간으로 만들었으며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옥루 등을 설치하는 곳으로 활용하였다. #1553년(명종 8년)에 경복궁 주요부에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고 다음해에 복구하였다. 이후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져 약 270년 간 재건하지 못했다. 흠경각은 이후 창덕궁으로 옮겨 세워졌다.
1868년(고종 5년)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었다. 이 때 현재 자리로 위치가 바뀌었다. 1876년(고종 13년) 경복궁 내전 영역과 함께 불탔다가 1888년(고종 25년)에 복구되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사라진 창덕궁 내전 영역을 복구할 때 자재로 쓰이면서 사라졌다. 현재 건물은 1995년에 복원한 것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과학문화융합콘텐츠연구개발사업' 일환으로, 국립중앙과학관에서 2019년 9월에 흠경각 옥루를 복원하였다. # 복원한 옥루는 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에 있는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관 전통과학분야에 전시 중이다.
자세한 건물의 구조는 이 포스팅을 참조.
4. 구조
<colbgcolor=#bf1400> 흠경각 내부 구성도 |
- 남쪽 가장자리 칸 전체를 툇마루로 놓고 중앙의 4칸을 대청으로 둔 뒤 대청을 중심으로 동, 서 양쪽 4칸을 온돌방으로 꾸몄다. 북쪽 가장자리 칸의 경우, 온돌방 쪽은 쪽방으로, 대청 쪽은 툇마루로 두었다. #
5. 옥루
<colbgcolor=#bf1400> 흠경각 옥루를 다룬 [[YTN|{{{#gold YTN}}}]] 뉴스 |
흠경각 옥루의 작동 원리 |
玉漏/Okru
위에 짧게 언급한, 세종 시기에 흠경각에 두었던 '옥루(玉漏)'가 유명하다. 옥루는 전통 중국의 시계에서 보이는 물레바퀴를 기어장치로 한 동력에다 중세 아라비아 물시계들의 유행이었던 인형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를 가미하여 조선식으로 현지화 한 물시계이다. 거기에 금으로 만든 태양의 모형을 덧붙여 천상시계로 만들었다.
흠경각 안에 약 3m 높이의 종이로 산을 만들고 그 안에 설치하였으며 장영실이 무려 6년에 걸쳐 제작했다고 한다.
흠경각 안에 호지(糊紙)로 높이 7척 가량 산을 만들고 금(金)으로 태양의 모형을 만들어 오운(五雲)이 태양을 에워싸고 산허리 위로 가며, 낮에는 산 위에 뜨고 밤에는 산중에 지면서 일주(一周)하는데, 절기에 따라 고도(高度)와 원근(遠近)이 태양과 일치한다.
5.1. 상세
물시계의 일종.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준다. 1438년(세종 20) 장영실(蔣英實)이 만든 천상(天象) 자동물시계. 옥루(玉漏)는 조선시대의 천상시계(天象時計)이며 자동물시계의 하나이다. 즉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 장치와, 천체의 변화를 보여주는 천문시계 장치를 결합한 자동 종합물시계이며 또다른 이름은 옥루기류이며 장영실이 1438년(세종 20년) 1월에 완성하여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하였다. 흠경각루, 일명 옥루는 왕에게 사용하는 玉자에서 알 수 있듯이 임금의 시계이다. 자격루가 백성들에게 하루 일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국가 표준시계였다면 옥루는 장영실이 세종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만든 궁정 물시계였다. 그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고 김돈(金墩)의 흠경각기(欽敬閣記)에 기록하였다.흠경각 안에 호지(糊紙)로 높이 7척 가량의 산을 만들고 옥루의 기륜(機輪)을 설치하여 물을 떨어뜨려 회전케 하였다. 금(金)으로 크기가 탄환(彈丸)만한 태양의 모형을 만들었는데, 오운(五雲)이 에워싸고 산허리 위로 지나간다. 태양은 1일 1주(周)하며 태양의 모형 아래에는 옥녀(玉女) 4인이 있는데 손에 금방울을 들고 구름을 타고 4방에 서 있다가 인시(寅時), 묘시(卯時), 진시(辰時)의 초정(初正)에는 동쪽에 있는 옥녀가 금방울을 흔들어 시각을 알린다…….
농가 사계절의 모습을 그려 세웠고 조수·초목의 모양을 새겨 절기를 진열 민생의 고초를 알게 했다.
흠경각루, 일명 옥루는 왕에게 사용하는 玉자에서 알 수 있듯이 임금의 시계이다. 자격루가 백성들에게 하루 일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국가 표준시계였다면 옥루는 장영실이 세종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만든 궁정 물시계였다. 그러나 단순히 임금이 보고 즐기도록 만든 것은 아니다. 옥루는 각 계절별 하늘(태양)의 움직임과 이에 순응하는 농민들의 생활을 임금이 한눈에 보고, 계절별로 여러 가지 노동을 해야하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만든 수신과 치국의 도구였다. 이 옥루는 장영실이 세종의 총애를 입어 관노(官奴)에서 대호군에까지 승진된 은총에 보답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장영실은 이 자동물시계를 만들기 위하여 송(宋)·원(元)시대의 모든 자동물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리비아물시계들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하나의 독창적인 천상시계(天象時計) 장치를 완성하였다. 이 시계는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하였는데, 김돈(金墩)이 쓴 흠경각기(欽敬閣記)에서는
흠경각 안에 호지(糊紙)로 높이 7척 가량 산을 만들고 금(金)으로 태양의 모형을 만들어 오운(五雲)이 태양을 에워싸고 산허리 위로 가며, 낮에는 산 위에 뜨고 밤에는 산중에 지면서 일주(一周)하는데, 절기에 따라 고도(高度)와 원근(遠近)이 태양과 일치한다.
고 그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이 옥루는 중국의 천문시계에서 보이는 물레바퀴(water wheel)를 기륜(機輪)으로 한 동력에, 원나라 순제(順帝)의 궁정 물시계와 중세 아라비아물시계들의 하나의 유행과도 같았던 인형에 의한 보시(報時) 장치를 가미, 조선화(朝鮮化)하였고, 거기에다가 태양의 모형을 덧붙여 천상시계로 한 것이다. 김돈에 의하면, 중국 물시계의 여러 장치들은 모두 사람의 손이 조금씩 필요하지만, 옥루는 인력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작동하였다고 하므로 장영실의 독창적 고안과 개량이 이 궁정시계에서 잘 조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옥루는 명종 초에 경복궁 실화로 불타 없어졌다가, 1553년(명종 8)에 박민헌(朴民獻)·박영(朴詠) 등이 다시 만들기 시작하여 다음해 8월에 완성하였다. 흠경각루, 일명 옥루는 왕에게 사용하는 玉자에서 알 수 있듯이 임금의 시계이다. 자격루가 백성들에게 하루 일과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국가 표준시계였다면 옥루는 장영실이 세종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만든 궁정 물시계였다. 그러나 단순히 임금이 보고 즐기도록 만든 것은 아니다. 옥루는 각 계절별 하늘(태양)의 움직임과 이에 순응하는 농민들의 생활을 임금이 한눈에 보고, 계절별로 여러 가지 노동을 해야하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만든 수신과 치국의 도구였다.
지난 95년 왕과 왕비의 침소인 강녕전과 교태전 사이의 서쪽 뜰에 복원됐다. "흠경각기"에는옥루의 모양을 '풀을 먹인 종이로 일곱자 높이(약 1.5m)의 산을 만들어 집(흠경각) 한가운데 놓았고… 금으로 태양(의 모형)을 만들었는데 크기가 탄환만 하다… 비스듬히 기운 궤도를 따라 해가 돌며, 뜨고 지는 시각을 절기에 맞게 하였다
고 기록했다.
5.2. 옥루가 만들어진 과정과 탄생기
세종대왕의 재위기간(1418년 8월∼1450년 2월)에는 실로 방대한 과학사업이 세종의 명에 의해 행해졌다. 그러한 사업에 주류를 이루었던 분야는 물론 천문학 및 역학분야이다. 농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전하여 온 천문학, 역학은 4계절을 정하고, 1년간 할 일을 규정하는 사업으로써 제왕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 되어왔고, 그런 이유로 해서 정부, 즉 왕이 관할하는 과학분야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살펴 볼 때 신분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지 않고서는 좀처럼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사람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미천한 신분, 가장 천대받던 노비의 신분으로 과학기술과 응용에 탁월하여 놀랄만한 기계를 만들어 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비 출신이었던 장영실이 신분적 제한이 엄격했던 당시 봉건적 사회에서 어떻게 상호군(上護軍)의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보자. 그가 이룩한 가장 훌륭한 업적은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自擊漏)의 제작이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김빈(金鑌)과 함께 제작한 이 자동시보장치의 물시계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동물시계를 비교, 연구하여 새로운 형태의 물시계를 만든 것이었다. 이 옥루는 장영실이 세종의 총애를 입어 관노(官奴)에서 대호군에까지 승진된 은총에 보답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장영실은 이 자동물시계를 만들기 위하여 송(宋)·원(元)시대의 모든 자동물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리비아물시계들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하나의 독창적인 천상시계(天象時計) 장치를 완성하였다. 이 시계는 경복궁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설치하였는데, 이 옥루는 중국의 천문시계에서 보이는 물레바퀴(water wheel)를 기륜(機輪)으로 한 동력에, 원나라 순제(順帝)의 궁정 물시계와 중세 아라비아물시계들의 하나의 유행과도 같았던 인형에 의한 보시(報時) 장치를 가미, 조선화(朝鮮化)하였고, 거기에다가 태양의 모형을 덧붙여 천상시계로 한 것이다. 김돈에 의하면, 중국 물시계의 여러 장치들은 모두 사람의 손이 조금씩 필요하지만, 옥루는 인력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작동하였다고 하므로 장영실의 독창적 고안과 개량이 이 궁정시계에서 잘 조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옥루는 명종 초에 경복궁 실화로 불타 없어졌다가, 1553년(명종 8)에 박민헌(朴民獻)·박영(朴詠) 등이 다시 만들기 시작하여 다음해 8월에 완성하였다. 그 공로로 대호군에까지 승진하였고, 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다시 천상시계와 자동물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어냈다. 1438년에 만들어져 흠경각(欽敬閣)에 설치된 이 옥루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모든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이룩한 독창적인 천상시계였다. 세종시대의 장영실(蔣英實)은 두 가지의 자동 물시계를 제작했다. 이미 잘 알려진 보루각루(報漏閣漏, ‘자격루’로 많이 소개됨)는 1434년에 완성되어 국가 표준시계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이어서 만들어진 흠경각루(欽敬閣漏, 1438년 제작, ‘옥루’로도 부름)는 세종을 위한 특별한 시계였다. 흠경각루는 천체운행을 담당하는 태양장치가 있고, 천상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어 천문시계의 역할도 하고 있다. 가산 위에는 4신(神)과 12지신(支神), 옥녀(玉女), 종·북·징을 타격하여 시간을 알려주는 다양한 시보인형이 등장하고 있다. 내부에는 물시계인 누각이 있어 내부기어장치에 동력을 만들어 주어 자동으로 운행되도록 하였다. 자격루의 제작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장영실은 또 하나의 자동물시계 제작에 착수했다.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를 결합한 천문기구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자격루와 혼천의, 이 두 가지를 결합하면 절기에 따른 태양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고 그 절기에 농촌에서 해야 할 일을 백성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하늘과 땅, 인간이 하나로 연결되는 이른바 세종이 꿈꿨던 왕도정치가 이뤄지는 것이었다. 자격루가 완성된 지 4년 후, 1438년(세종 20)에 장영실은 또 하나의 자동물시계인 옥루를 완성하였고, 세종은 경복궁 침전 곁에 흠경각을 지어 그 안에 설치하도록 했다. 옥루는 소송(蘇頌)의 천문시계에서 보이는 워터휠(water wheel)을 기륜(機輪)으로 한 동력(動力)에, 13세기 전후한 중세 아라비아 물시계들의 하나의 유형과도 같았던 인형에 의한 시보장치(時報裝置)를 조선화(朝鮮化)하여 가미(加味)하였고, 거기다가 태양의 모형을 덧붙여서 천상시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영실의 옥루는 명종 초에 경복궁 실화(失火)로 불타 없어졌다가, 1553년(명종 8년)에 박민헌(朴民南犬), 박영(朴詠) 등이 다시 만들기 시작하여 다음해 8월에 완성하였다. 옥루(玉漏)는 물을 이용해 자동으로 움직이는 천상시계로, 장영실이 세종대왕을 위해 1438년(세종 20년)에 만들어 경복궁 천추전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그 곳에 설치하였다. 장영실이 송·원나라 및 아라비아의 물시계 관련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독창적으로 만든 이 물시계는 하루의 매 시간을 종·북·징으로 타격하여 해당하는 시간을 알려주고 천체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까지 있어 동지·춘분·하지·추분 등을 알려주는 종합적인 자동물시계 장치이다. 옥루의 자동장치는 자격루와 같은 물의 힘을 이용한 것인데, 그 기계장치부분을 옥루기륜이라고 하며, 내부 속에 장치되어 겉으로는 보이지 않게 설계 되었다. 흠경각안의 옥루에는 높이 7자쯤 되는 종이로 만든 산 모형이 있는데 이것은 우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 곳에 탄환만한 크기의 태양이 매일 이 산을 한 바퀴씩 돌게 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실지 태양이 계절마다 높이가 달라지듯이 그 높이도 달라지게 하였다. 옥루는 태양 아래의 산위에서 산 밑 평지까지 옥녀(玉女), 사신(四神), 사신(司辰)·무사(武士), 12신(神)·옥녀·관인(官人)의 인형들이 있다. 인형들은 각각의 맡은 역할에 따라 요령을 흔들거나, 방향을 회전하거나, 종·북·징을 치거나, 시패장치로 시간을 알려주게 설계 되었다. 하루 12시간 중 4개의 옥녀와 사신(청룡/백호/주작/현무)들에 의해 각각 3시간씩 분담하여 매 시간마다 옥녀는 방울을 흔들고, 사신의 모형들은 90°씩 돌게 하였다. 따라서 4신은 4시간마다 그 자리에서 한바퀴씩 도는 것이다. 산의 남쪽 기슭에 세운 사신(司辰)이 해당하는 시간이 되면 종을 치는 무사를 향하여 보면 무사는 사신을 향하여 보고 종을 친다. 이런 방법으로 매경, 매점마다 북, 징을 치는 무사들이 움직인다. 특히 12신인 짐승모형들은 그에 해당되는 시간에만 움직이는데, 엎드렸다가 일어나도록 고안되었다. 물의 깊이가 달라져서 파수호에서 내려가는 물의 양이 달라지면 시계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므로 물 단지 안의 물깊이가 일정한 깊이를 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장치도 고안되었다. 그러한 물의 양 제어는 관인(官人)이 하였는데 2번째 파수호에 정해진 물의 양이 넘으면 청동으로 만든 파이프인 관을 통하여 관인 앞의 수조로 모이게 되는데 수조안의 물이 절반이상 차면 그것이 저절로 기울어져서 물이 쏟아지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옥루 시보시스템은 혼천시계의 시보시스템보다 복잡한 과정들로 이루어졌다. 옥루는 12시간을 종소리로 알려주었고, 경점시간은 북과 징소리로 알려주었다. 이상과 같은 모든 복잡한 장치들은 옥루기륜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데, 물에 뜨는 살대의 직선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꾸고, 인형에 의한 시보장치, 태양운행시스템 등 옥루의 제작원리와 기계장치들은 매우 정교하여 우리나라 과학기술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당시 흠경각은 세종의 정치적 구상을 위한 장소로 사용됐다. 이는 흠경각루를 이루고 있는 외형 부분인 가산(假山)에 빈풍사시(豳風四時)의 풍경을 그린 점과 기기(欹器)를 설치한 정황에서 알 수 있다. 빈풍사시의 그림은 당시에 유행하던 그림화법으로 계절에 따른 농사일이 그려져 있어 농사짓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필 수 있었다. 또한 물시계와 함께 작동되는 기기(欹器)는 누수(漏水)에 의해서 그릇에 물이 담겨져 균형을 이루거나 기울어지는 것을 권력의 모습으로 비유하여 보여주었다. 옥루를 만든 또 다른 이유는 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하늘의 운행을 살피는 천문관측 기기가 모두 경복궁의 후원인 경회루 주변에 설치되어 세종이 매번 나가서 살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세종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사용해 온 각종 천문관측 기기와 제도들이 우리 나라 실정에 맞지 않으므로 재위 14년(1432년)에 의표창제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쳐 1437년까지 자격루와 해시계 물시계 혼천의 간의 등 각종 기기를 개량하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기구들이 침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한 가지 기구로는 한 가지 현상 밖에 볼 수 없으므로 장영실에게 그때까지 만들어진 각종 기기의 특징을 압축한 종합적인 기기를 만들도록 했다. 세종 20년(1438)에 세워진 흠경각은 이처럼 의표창제사업의 대미를 장식했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옥루의 구조와 작동 원리는 그 동안 베일에 가려 있었지만 최근 건국대 한영호(기계항공공학부) 교수가 왕조실록 등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을 검토해 상당한 수준까지 밝혀냈다. 옥루의 구조는 산 위의 태양운행부, 산 중턱의 옥녀와 사신(청룡/백호/주작/현무) 및 자동시보 장치, 평지의 옥녀와 12지신의 움직임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산 위로 태양이 정확하게 움직인 것은 산마루 아래에 혼천의를 설치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원형의 궤도들로 이뤄진 혼천의는 해와 달, 오행(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기기이며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부터 이용됐다. 흠경각루에는 태양의 움직임만 나타나므로 기존의 혼천의를 최대한 간소화시켜 산 아래 숨겨논 것으로 보인다. 태양이 하루 360도를 회전한 것은 물레방아와 같은 장치를 이용해 그 힘으로 혼천의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계절에 따라 태양의 움직임이 다르듯이 혼천의는 황도(태양이 다니는 길)를 따라 하루에 365분의 1씩 움직였다. 이는 황도에 달아맨 해의 모형을 어떤 기구를 이용해 끈으로 당겨 매일 1도씩 물러나게 한 것으로 보인다. 한 교수는 1669년에 만들어진 혼천시계(국보 230호, 고려대 소장)도 옥루의 제작기법을 이어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옥루는 계절별로 해가 뜨는 시간과 위치가 다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중앙의 산봉우리 주위를 높이가 각각 다른 산봉우리로 에워싸 해가 떠있는 시간이 절기에 맞도록 정밀하게 맞췄다. 산중턱의 옥녀와 사신은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낸다. 십이시(24시간)를 방위에 따라 4등분해서 오전(묘卯 진辰 사巳, 새벽 5~오전 11)에는 동쪽의 옥녀가 구리로 만든 큰 방울(金鐸)을 흔들고, 그 앞의 청룡이 매 시간마다 오른 쪽으로 90도씩 회전토록 하여 시간을 알렸다. 여기에는 자격루 내부의 회전원판에서 움직이던 12지신의 작동 원리가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산중턱 남쪽 기슭의 시보장치는 자격루에서처럼 십이시와 밤시간인 경과 점을 종 북 징을 이용해 알려 줬다. 자격루에는 인형이 3개였는데 옥루에는 지휘자 인형을 하나 더 세웠다. 평지의 옥녀는 시간이 되면 땅에 설치된 둥근 구멍 위로 올라오고, 그 앞에 엎드려 있던 12지신 인형도 자동적으로 일어나 시간을 알린다. 1시진(2시간)이 지나면 옥녀는 땅속 구멍으로 들어가고 12지신 인형도 땅에 엎드렸다. 이와 동시에 다른 시간을 알리는 옥녀와 12지신이 움직였다. 후세의 기록인 명종실록에는흠경각루의 구슬이 다니는 길을 살피고
(권10, 1550년)라고 적혀있고 광해군일기에는
일월의 출입과 주야시간의 빠르고 느림이 모두 기계로 움직이고 물항아리가 대중소 3개 있다
(권80, 1613)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뤄 평지에 있던 인형들은 물을 동력으로 해서 돌아가는 톱니바퀴들과 자격루에서처럼 구슬의 운동에너지로 작동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옥루는 산마루 아래에 혼천의를 설치해 해가 움직이도록 했고, 나머지 공간에는 톱니바퀴와 자격루에 적용한 구슬장치, 지렛대, 회전판 등을 장치해 시간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자격루에서는 물 받는 항아리의 부력을 이용해 구슬을 떨어뜨렸으나 옥루는
기계바퀴를 설치하여 물을 떨어뜨려 쳐서 회전케 했다
는 흠경각기의 기록으로 미뤄 중국식 물시계에 사용되던 톱니바퀴 장치를 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루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남쪽 오시(낮 11~1시)를 알리는 인형 앞에 설치된 기울어진 물그릇(즠器 의기)이다. 사모관대를 차려입은 사람 인형이 금으로 만든 물병을 들고 의기에 물을 따르는데, 그릇이 비면 기울고 반쯤 차면 반듯해지지만 가득 차면 엎어져서 처음과 같이 된다. 의기는 하늘의 차고 비는 이치를 알려 왕이 겸양의 도를 깨닫도록 특별히 설치된 것이다. 흠경각은 이미 완성된 보루각의 자동물시계와 경복궁 후원 簡儀臺의 천문 의기가 멀리 떨어져 있어 시시때때로 편리하게 관측하기 어려워 이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자동으로 작동하는 천문시계인 옥루를 설치했던 건물이었다. 흠경각 옥루는 자동물시계에 태양 운행 장치를 결합하여 대단히 작고 정밀하게 만든 것으로, 時 · 更 · 點을 모두 청각과 시각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欹器를 설치하고 《빈풍도》를 벌려 놓아서 天道의 차고 이지러지는 이치를 보고 백성이 농사짓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창안이었다. 이런 흠경각의 설치는 세종이 추구한 7년에 걸친 대규모 천문의기 제작 사업이 완성되었다는 선포였으며, 하늘을 본받고, 시의에 순응하며, 공경하는 뜻을 극진히 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중히 여기는 인후한 덕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천명한 기념물이었다.
한 교수는
옥루에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며 하늘의 뜻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는 왕도정치의 이상이 담겨 있다 며 >제작기법도 송나라와 원나라까지 이어졌으나 명나라 때 단절된 중국 천문시계의 전통을 조선 초기의 앞선 기계기술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기계시계의 맥을 이은 대표작이자 우리나라 기계기술분야의 가장 자랑스러운 유산 이라고 말했다.
5.3. 옥루의 형태
옥루는 지금 남아 있지 않아 아쉽게도 그 형태를 완벽히 알 수는 없고, 전해지는 기록과 내용으로 대충의 모습을 집작해 내서 추측해 볼 뿐이다. 옥루는 자격루와 같은 물시계 장치뿐 만 아니라 태양의 운행 등 천체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까지 있는 천문시계이다. 또한 동지, 춘분, 하지, 추분까지 알려 주는 자동 종합물시계였다. 옥루의 자동장치는 자격루와 같은 물의 부력을 이용하였다. 그 기계장치의 핵심은 옥류기륜인데, 이를 고안한 사람은 장영실과 이천이다. 옥류기륜은 속에 들어가 있는 장치였다. 따라서 겉으로만 보면 옥루는 땅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태양과, 그에 따라 시간을 알려주는 각종 인형들이 파노라마처럼 움직이는 천상의 공간이었다. 옥루에는 높이 7자(약 212cm)쯤 되는 종이로 만든 산 모형이 있는데 이것은 '우주'를 상징한다. 거기에 탄환 크기의 '태양'이 매일 이 산을 한 바퀴씩 돌게 되어 있다. 실제 태양이 계절마다 옥루는 계절별로 해가 뜨는 시간과 위치와 높이가 달라지듯이, 태양 모형의 옥루는 계절별로 해가 뜨는 시간과 위치와 높이도 달라지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단순히 임금이 보고 즐기도록 만든 것은 아니다. 옥루는 각 계절별 하늘(태양)의 움직임과 이에 순응하는 농민들의 생활을 임금이 한눈에 보고, 계절별로 여러 가지 노동을 해야하는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만든 수신과 치국의 도구였다. 이러한 기구를 만들도록 지시한 것은 세종이지만 장영실이 있기에 제작이 가능했다. 흠경각기에는 옥루의 모양을
풀을 먹인 종이로 일곱자 높이(약 1.5m)의 산을 만들어 집(흠경각) 한가운데 놓았고… 금으로 태양(의 모형)을 만들었는데 크기가 탄환만 하다… 스듬히 기운 궤도를 따라 해가 돌며, 뜨고 지는 시각을 절기에 맞게 하였다
고 기록했다. 여기다 옥루에는 자격루에 사용한 자동 인형시계를 이용해 시간을 알리고, 배경에는 농촌의 모습을 4계절에 따라 그린 화폭을 세워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농촌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구현했다. 왕조시대에는 임금이 백성들의 실상을 알기 위해 행차하는 자체가 국가적인 큰 행사였기에 오히려 백성들에게 불편을 주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어려움과 국가경제의 기본인 농사활동을 왕궁 밖에 나가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옥루를 만들고 그 집을 '흠경각'이라고 해 왕조의 이념과 왕도정치의 방향을 나타냈다.
5.4. 옥루의 자동 시간 알림 방법
인형 모형을 통해 시각을 알리는 방법은 자격루보다 더 다양하다. 선녀 모습을 한 '옥녀' 인형 4개, 시간을 알려주는 서운관 관리인 '사신'과 '무사' 모습을 한 인형 3개, 그리고 십이지의 짐승모형들과 4신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시간을 알려준다. 하루 24시간 중 4개의 '옥녀'인형과 '4신'들이 각각 3시간씩 분담하여 매 시각마다 '옥녀'는 방울을 흔들게 하고 '사신'은 90°씩 돌게 하였다. 따라서 '4신'은 4시간 만에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돈다. 산의 남쪽 기슭에 세워져 있는 서운관 관리 '사신'은 해당한 시각이 되면 종을 치는 '무사'를 향하며, '무사'는 '사신'을 향하고 있다가 '지시를 받고' 종을 친다. 이런 식으로 매 경, 매 점마다 북, 징을 치는 '무사'들이 움직이는 구조이다. 12개의 짐승모형들은 그에 대응한 시간이 되면 각각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장영실은 이 모든 것이 옥류기륜이라는 장치에 의해 움직이게 하였다.5.5. 옥루의 동력원
응지당과 경성전, 흠경각의 접점에 우물(우물돌 밖으로는 부챗살 모양의 판석을 깔고, 8각의 테두리를 둘렀다. 이 테두리 모서리에는 작은 구멍이 있다. 구멍에 기둥을 끼우고 지붕을 덮은 우물 집의 자취이다.)이 하나 있다. 강녕전 전용 우물로서 임금의 음용수, 세숫물의 공급원이다. 이 우물이 자동 시보장치를 갖춘 옥루기륜의 동력원이었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