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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 ||
<colbgcolor=#bf1400> 경복궁 건청궁 景福宮 乾淸宮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 |
건축시기 | 1873년 (창건),2007년 (복원) |
<colbgcolor=#bf1400> 경복궁 건청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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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 경복궁 중건이 끝난 뒤 고종이 흥선대원군 몰래 궁궐의 내밀한 북쪽에 국고가 아닌 사비로 지은 '궁 안의 궁'이다. 실제로 1873년부터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건청궁 건설은 아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정치적 행보라는 해석이 있다.2. 상세
고종은 이곳을 처소로 주로 사용했으며 양반가 저택의 형식으로 세운 건물이어서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1]이곳은 아시아 최초로 에디슨식 전기 가로등이 켜진 곳이다.[2] 1882년에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1883년 미국에 보빙사를 보냈는데 이때 미국을 다녀온 보빙사가 미국은 밤이 대낮 같다고 고했다. 이는 1879년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고 미국 대도시 전구로 된 가로등이 설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빨리 미국에 연락해 전기 가로등을 설치하라고 명했고, 이에 1887년 3월 6일에 아시아 최초로 에디슨전기회사 직원들이 조선에 와서 발전기로 전력을 얻는 전기 가로등을 건청궁에 설치해 밤을 환하게 했다. 총 설치 비용이 당시 가격으로 무려 24,525달러[3]였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재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한편 이 가로등의 발전기는 향원정의 연못 물을 끌어와 증기로 발전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발전기에서 배출된 고온의 발전용수가 향원정 연못에 배출되자 그곳에 살던 비단잉어 등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사람들이 증어망국(蒸魚亡國)이라며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이 가로등의 불빛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통에 '건달불'이라는 오명도 생겼다고 한다.
또한 건청궁은 이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고종과 왕실이 경복궁을 떠나자 건청궁은 빈 건물이 되었다. 1909년(융희 3년) 이후 철거되었다가 훗날 복원, 수리 작업을 거쳐서 2007년에 일반에 공개되어 오늘에 이른다.
자세한 건물의 구조는 이 포스팅을 참조.
3. 부속 건물
3.1. 장안당(長安堂)
<colbgcolor=#bf1400> 장안당 |
장안당은 고종이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사랑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북서쪽에는 침방인 정화당(正化堂)이 남서쪽에는 누마루인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가 붙어있다.
3.2. 곤녕합(坤寧閤)
<colbgcolor=#bf1400> 곤녕합 |
역사는 장안당과 같다.북동쪽에 침방인 정시합(正始閤)이 서쪽의 장안당과 연결되는 복도가 붙어있고 동쪽의 누마루는 동쪽에 사시항루(四時香樓), 남쪽에 옥호루(玉壺樓) 현판이 붙어있다. 명성황후 민씨가 머물던 처소로 민가의 안채 역할을 하던 장소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에게 명성 황후 민씨가 시해된 장소이며, 시신은 곤녕합 옥호루(玉壺樓)에 잠시 안치했다가 곧 건청궁 뒷쪽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졌다. 이곳 역시 아관파천 이후 버려졌다가 1909년(융희 3년) 철거되었고, 2007년 복원되었다.
복원할 때 현판이 원형과 달라 논란이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중인 원본 현판은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인데, 복원한 모습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검은 바탕에 금색 글씨로 바뀌었다.
3.3. 관문각(觀文閣)
<colbgcolor=#bf1400> 관문각 |
1888년(고종 25) 경복궁 건청궁 영역에 건립되었던 유럽식 2층 건물로 원래는 건청궁이 지어질 때 단층 한옥 건물로 관문당으로 불리다가 관문각으로 개칭했으며, 1888년 러시아 제국의 건축가인 사바틴의 설계하에 유럽식 2층 건물로 준공되었다.
고종이 관문각에 거처한 내용은 보이지 않으며, 창덕궁의 주합루(宙合樓)에 보관하던 대전의 계유년 옥책(玉冊)과 옥보(玉寶), 대왕대비전의 계미년 옥책과 기묘년 옥보, 중궁전의 병인년 교명(敎命)과 옥책·금보(金寶) 및 계유년 옥책, 세자궁의 을해년 교명과 죽책(竹冊) 등을 옮겨와 봉안하고 있었다. 또한 어진도 보관하였는데, 1897년(광무 1) 6월 15일자 관보에 경복궁 내 어진 장소로 관문각이 거론되었다.
을미사변 당시 사바틴과 미국인 다이 대령이 관문각 2층에서 을미사변을 목격했고, 이후 경복궁이 버려지면서 관문각도 같이 버려지다가 1901년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관련 도면 등이 현재 존재하지 않고 복원시 러시아 회사에 수십억의 세금을 지불해야 하며 조화롭지 못할 것 같다는 문화재청의 의견으로 건청궁이 복원될 때 같이 복원되지 못했다. 만약 도면과 관련 자료들이 좀더 나온다면 복원될 가능성은 있다.
참고로 2층 양관으로 준공되면서 사진에서 보다시피 2층 창문이 깨지는 등의 실무자들의 부실 시공으로 인해 훼철될 때까지 수 없이 보수 공사를 해야 했으며, 이것이 훼철의 원인으로 보인다.
3.4. 복수당(福綏堂)
<colbgcolor=#bf1400> 복수당 |
3.5. 녹금당(錄琴堂)
<colbgcolor=#bf1400> 녹금당 |
[1] 고종은 어렸을때 잠저 생활의 추억 때문인지 궁궐 정전에 거주하기보다는 사대부가 형식의 별채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한 것으로 보이며, 창덕궁에도 본래 소규모 연회장이던 창덕궁 연경당을 사대부가 형식으로 개축하는 모습을 보였다.[2]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아시아 최초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아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1878년 3월 25일 오늘날의 도쿄대학 공학부 홀에 초기형 전구인 아크등이 설치되었고(이후 일본에서는 3월 25일을 '전기 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1882년 11월 1일 도쿄 시내에 아크등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1879년 7월 24일 인도에서도 콜카타에서 전깃불을 시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년 12월 24일 콜카타 시내에 아시아 최초의 전기 가로등이 설치되었다. 에디슨식 전구가 탄생한 게 1879년 10월 21일이므로 인도에 설치된 전깃불 역시 아크등이었다.[3]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80만 달러(약 10억 원)를 거뜬히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