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2-09-01 20:42:23

경복궁 기별청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font-size:0.6em"
현무문
천하제일복지천
오운각 옥련정
벽화실 청와대 관저
청와대 본관 청와대 녹지원 춘안당 융문당
칠궁 양정재 수궁(구 관저터) 융무당 태화궁
지희실 경농재(관풍루) 대유헌 경무대
청와대 위민관,헬기장
수궁 청와대 춘추관
마장 관가문 희맹공신단
금화문 팔도배미
청와대 영빈관,경호실
추성문 금위군직소 춘화문 춘생문
신무문 수문 계무문 광무문 춘도문 수문
태원전 수문장청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각감청 건청궁 관문각 서녹산
남여고 육우정
직처소 어구 동녹산
어린이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선원전 경안당
종각 가회정 보현당 장고 통화당 순화궁 외소주방
순화궁 내소주방
영선문 진전 소주방 진전 생물방 화락당 나인처소
회안전 문경전 장고
숙설소
향원정
전기등소
만화당 벽혜당(왕대비전 생물방) 대향당
정훈당
나인처소
함화당 집경당 영훈당 만경전 건기당(왕대비전 내소주방) 요광당(왕대비전 외소주방)
원역처소 빈궁 수랏간 다경합 건복합
원역처소
제관방
흥복전 중궁전
침방,수방
대왕대비전
침방,수방
제수합 영보당 벽월당(상궁처소)
하향정 원역처소(접견소) 장방(기무처) 아미산 자미당 자경전 집희당(대왕대비전 내소주방) 춘소당(대왕대비전 침방) 취운당(대왕대비전 수방)
국별장직소 함원전함홍각건순각원길헌인지당 예춘당(대왕대비전 생물방) 벽하당(상궁처소) 웅향당(상궁처소)
국출신직소 경회루 흠경각교태전임향당함정당(대왕대비전 외소주방)계응당(상궁처소)
양의문복회당(대전 생물방) 보월당(상궁처소) 자운당(상궁처소) 나인처소
무겸직소 응지당 강녕전연길당
북위장직소경성전 연생전대전 내소주방난지당(대전 외소주방)대소대금방(나인처소)
수문파수각향오문
영추문 수문장청 내각(규장각) 검서청(규장각) 대전장방(내시부) 습회당 협오당 장원당 천추전사정전만춘전자선당비현각 장방 삼처 관리소
수문장청
건춘문
초관직소 장무관직소 입심억석(내의원) 주원(사옹원) 수정전 사정문 오상방 원역처소 세자궁 수랏간 등촉방 장방
훈국군번직소 침의청(내의원) 약방(내의원) 내반원(내시부) 수정문 협의문
융무루ㅓ
근정전계인문
융문루ㅏ
통장청 문기수청 춘방 별감방 초관처소
서소위장직소 의약청(내의원)
옥당
(홍문관)
검서청(규장각) 대전 수랏간 영화문계조당계방 훈국군번처소
누국 당후(승정원) 정원(승정원) 월화문 근정문 일화문
일영대 선전관청 빈청 숭양문 기별청
유화문
수각
┃덕양문
수각
별군직청
춘방책고대청
주차장
상의원 면복각
영제교
신당 덕응방 북마랑 흥례문
전사청 국립고궁박물관
연고 내사복 거달처소 중마랑
동마랑 용성문 어도 협생문 계방
행각
오위도총부
우마랑 좌마랑 내구 연지 수문장청
매표소
군사방
수문장청
매표소
서소부장청
남소위장청
동소부장청
동소위장청
견마배청 남마랑 군사방 초관처소
영군직소
측사
측사 충장장청
수장장청
서십자각 수문 광화문
(월대)
수문 동십자각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기별청
景福宮 奇別廳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건축시기 1867년 (창건 추정)
2001년 (복원)
파일:기별청.png
<colbgcolor=#bf1400> 기별청[1]
1. 개요2. 역사3. 특징4. 여담

[clearfix]

1. 개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곳[2]

흥례문 서쪽 행각에 있으며 유화문의 북쪽에 있다.

왕명을 출납하는 기관인 승정원에서 매일 발행했던 ‘조보(朝報)’를 만들던 곳이다. 조보는 일종의 신문으로 지금의 관보같은 역할을 했다. 과거시험 날짜나 신하들이 올린 상소 및 그에 대한 의 답변, 그리고 조정인사이동과, 외국 소식, 심지어 날씨까지 적히는 등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매체였다. 조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보 문서웹툰 《조선왕조실톡》의 163화를 참조.

조보를 적은 종이를 ‘기별지(奇別紙)’라 했다. 기별지를 내는 곳이 바로 ‘기별청(奇別廳)’이다. 기별청 뿐 아니라 조보를 담당하는 몇몇의 관리들 역시 직책에 기별이란 이름이 붙었다. 매일 아침마다 각 관청에서 조보를 베껴 쓰라고 보낸 서리들을 ‘기별서리(奇別書吏)’라 했으며 지방에 조보를 배달할 전령을 ‘기별군사(奇別軍士)’라 했다.

즉, 엄밀히 말하면 관청기구의 이름이며 건물의 이름이 아니다. 당연히 다른 궁궐에도 기별청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 사라졌고, 현재는 복원해 둔 경복궁의 기별청만이 존재한다.

현판 글씨는 예서체로, 서예가 현암 정상옥 선생(玄庵 鄭祥玉, 1946~)이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吳玉鎭, 1935~2014)이 새겼다.

2. 역사

언제 처음 세웠는 지는 모른다. 조선 전기에도 조보가 있었으니 그 때도 기별청은 있었겠지만 지금 자리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1868년(고종 5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현 자리에 지은 듯 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종 시기인 1892년(고종 29년) 4월에 딱 한 번 나온다. 하지만 이것도 기별청 건물을 다룬 게 아니고, 도목정사[3] 때에 농간을 부린 죄인 김두형을 문책하던 중 기별청에서 일했다는 진술로만 등장한다.#승정원일기》에는 정조와 고종 시기를 합쳐 기별청이 3번 나오는데, 정조 때는 경복궁이 없었고, 고종 때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과 같다. 그러니 공식 기록에 경복궁 기별청에 대한 내용은 저 이외에는 없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조보가 사라지고 근대식 관보가 생겼다. 이 때 기별청이 사라지고 다른 곳에서 관보를 발행했는지, 아니면 기별청에서 계속 관보를 내었는지는 모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가 경복궁에서 열리면서 흥례문 및 주변 행각과 같이 헐렸다. 그리고 공진회 개최 1년 뒤인 1916년에는 일제가 흥례문, 영제교, 유화문, 기별청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졌다.

8.15 광복 후인 1990년대대한민국 정부에서 경복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고, 2001년 10월 26일에 흥례문과 같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특징

4. 여담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정말로 저 기별이 이 '기별(奇別)'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3] 都目政事. 매년 2회 또는 4회씩 이조병조에서 행하던 인사행정.[4] 부재 끝 부분만 화려하게 칠하는 단청.[5] 먹은 음식량이 적어 뱃속에 소식이나 갔겠냐(음식이나 도달하겠냐)는 뜻이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