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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주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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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1768호 1769호 1770호
백자 청화 흥녕부대부인 묘지 및 석함 창덕궁 주합루 창덕궁 연경당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제1769호
창덕궁 주합루
昌德宮 宙合樓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 1동
지정연도 2012년 8월 16일
제작시기 조선 시대, 1776년 창건
파일:창덕궁_주합루_전경(가을).jpg
<colbgcolor=#bf1400> 주합루[1]
파일:창덕궁_주합루_부용지_전경.jpg
주합루와 부용정[2]
파일:창덕궁_주합루_야경.jpg
주합루 야경[3]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부용정과 같이 소개한다.
1. 개요2. 이름3. 역사4. 구조5. 부속 건물
5.1. 어수문5.2. 서향각5.3. 희우정5.4. 천석정
6. 여담

[clearfix]

1. 개요

창덕궁 후원에 있는 2층 누각이다. 남쪽에 부용지부용정, 동남쪽에 영화당, 서남쪽에 사정기비각이 있다. 창덕궁 후원을 관람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건물이다.

2. 이름

'주합(宙合)'이란 《관자(管子)》에서 유래한 말로, '우주(宙)와 합일(合)된다'는 뜻이다. 시간(宙: 왕고래금往古來今)과 공간(合: 상하사방上下四方 육합六合)을 의미하기도 한다.

본 항목의 건물 말고도 '주합루'란 명칭이 붙은 누각들이 몇 군데 더 있었다. 대부분 독서, 학문 등과 연관 있는 장소였다. 창덕궁 동궁에 딸린 도서관 승화루의 원래 이름이 소주합루(小宙合樓)였고, 경희궁 동궁에 있는 도서 보관용 누각 이름 역시 주합루였다.

3. 역사

1776년(정조 1년) 9월에 정조규장각 건물로 처음 지었다.# 규장각은 조선 시대 역대 임금들의 그림, 유교(遺敎), 선보[4] 등을 보관하던 일종의 왕실 도서관인데, 세조 때에 처음 설립되었다가 얼마 못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숙종 시기에 규장각을 세워 선대왕들의 어제 등을 모셨으나 그 규모가 작았고 오랫동안 존재감도 별로 없었다.[5]

이후 정조가 즉위한 뒤에 들을 견제하고 학문연구하며 자신의 정책을 펼치기 위한 핵심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대폭 개편 및 사실상 부활시키면서 건립한 건물이 바로 주합루이다. 규장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파일:규장각 현판.png
파일:주합루 현판.png
<colbgcolor=#bf1400> 숙종이 쓴 규장각 현판.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중. <colbgcolor=#bf1400> 정조가 쓴 주합루 현판
2층으로 지었는데 각 층마다 이름을 다르게 했다. 을 보관하고 사무실로 쓰는 1층은 어제각(御製閣)으로 했다가 숙종의 예를 따라 규장각(奎章閣)으로 고쳤으며, 정책을 논하고 독서하는 2층을 주합루(宙合樓)라 했다. 규장각 현판숙종이 직접 쓴 기존 것을, 주합루 현판은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다.

규장각을 지으면서 기능을 나눌 부속건물들이 필요하여 서쪽에 서향각, 동북쪽에 천석정, 서남쪽에 봉모당과 열고관, 개유와를 지었다. 현재는 이 중 서향각과 천석정만 남아있다.[6]

규장각 제도가 정비되고 관청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1781년(정조 5년) 규장각을 인정전 서쪽의 궐내각사(이문원)로 옮겼다. 이후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 불렀다. 그래도 주합루를 아주 방치한 것은 아니라서 , 그림, 물품 등을 보관하는 기능은 유지시켰다.

이후 고종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차츰 사용이 뜸해지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군러시아 군대를 격파한 뒤 자축하는 파티(...)와 경부선 철도 부설 기념 잔치를 이 곳에서 열었으며# 대한제국 순종창덕궁으로 이어[7]한 뒤에는 순종이 여기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 일본 화가 사쿠마 데츠소노(佐久間銕園)를 접견하고 관료들과 연회를 열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큰 훼손 없이 오늘에 이른다. 2012년 8월 보물 제1770호로 지정받았다.

4. 구조

파일:동궐도 부용지 영역.png}}} ||
<colbgcolor=#bf1400> 《동궐도》의 주합루 영역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 영역에 있다. 부용지 영역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4방에 건물(부속 건물 제외) 4채가 조성되어있는데 그 중 부용지 북쪽의 높은 지대에 넓은 터를 만들고 세운 것이 주합루이다.
파일:어수문 취병.png}}} ||
<colbgcolor=#bf1400> 취병
동, 서, 북쪽의 담장은 일반적인 벽돌과 사고석으로 쌓았으나, 남쪽 담장은 취병으로 세웠고[8], 취병 가운데에 주합루로 올라가는 인 어수문과 어수문 양 옆에 작은 문 2개를 놓았다.
파일:창덕궁_주합루_주합루_위에서_본_부용지_전경.jpg}}} ||<width=486>
파일:창덕궁_주합루_주합루_위에서_본_부용지_설경.jpg
||
<colbgcolor=#bf1400> 주합루에서 바라본 부용지 봄(왼쪽)과 겨울(오른쪽) 풍경[9]
2층이란 거대한 규모나 아름다운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 일대에 지은 것을 볼 때, 정조가 이 기관에 어떠한 기대와 어떠한 무게를 두었는지 알 수 있다. 2층에 올라 부용지 일대의 멋있는 풍경을 감상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업무연구에 지친 관원들을 위해 이 곳에 짓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한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정부 관청 중 하나일 것이다.

5. 부속 건물

5.1. 어수문

파일:창덕궁 어수문.png
파일:창덕궁_주합루_어수문_야경.jpg
<colbgcolor=#bf1400> 어수문[10]
昌德宮 魚水門

주합루 남쪽에 있는 주합루 정문이다. 이름은 (水)과 물고기(魚)란 뜻으로,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임금신하의 관계도 그만큼 가까워야 한다는 뜻이다.
파일:어수문 협문.png
<colbgcolor=#bf1400> 어수문 양 옆의 협문
어수문은 만이 다니는 이며 양 옆에 설치된 작은 문 2개로 신하들이 다녔다. 근데 이 문들이... 어수문과 달리 작아도 너무 작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겨우 들어갈까 말까한 높이인데 이는 ‘저런 자세로 들어가며 겸손함을 배우라는(...) 의미가 아닐까’라고 후원 가이드가 설명하곤 한다.[11] 당시 조선인 남성 평균키가 161cm라서 그런거 아닐까요?

1칸 너비로 2개의 사각기둥 위에 다포를 얹고 지붕돈화문, 숭례문과 같은 우진각 형태로 꾸몄으며 현판은 세로 형태이다. 자세한 건물의 구조는 이 곳을 참조.

5.2. 서향각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서향각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3. 희우정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희우정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4. 천석정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천석정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여담

}}} ||
<colbgcolor=#bf1400> 〈창덕궁 달빛기행〉 영상
〈창덕궁 달빛기행〉 코스 중 한 곳이다.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4] 왕실 족보.[5] 영조 시절에도 존재했다는 실록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폐지된 건 아닌 듯하다.#[6] 서북쪽의 희우정은 인조 연간에 세웠다.[7] 移御. 임금이사하는 것.[8] 나무로 뼈대를 세운 뒤 뼈대 사이마다 작은 나무나 덩굴 식물을 심어 자라게 하는 형태의 을 말한다.[9]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10] 오른쪽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1] 다만 겸손함을 배우라는 뜻이라는 근거 사료라든가 유물이라도 제시되지 않는 이상은 진지하게 믿으면 좀 곤란하고(...) 그냥 '의미가 아닐까'. 즉 카더라 통신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하다.[12] 實事求是. 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리를 탐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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