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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금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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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colbgcolor=#bf1400> 창덕궁 금호문
昌德宮 金虎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창건연대 미상 (1405년 추정)
중건연대 미상 (1608년 추정)
파일:금호문.png
<colbgcolor=#bf1400> 2010년 11월의 금호문 모습

1. 개요2. 이름3. 이용4. 역사5. 구조6. 여담

[clearfix]

1. 개요

창덕궁의 궁문이다. 돈화문의 서북쪽에 있으며 금천교와 마주본다.

정문인 돈화문을 주로 왕의 행차 같은 큰 의례에 이용했기에 사헌부 대사헌을 제외한 승정원, 홍문관 같은 궐내각사[1]에 근무하는 관원들이 주로 이용했다.[2] 조선 후기에 각 문마다 출입하는 사람들을 관행적으로 고정했는데, 이 때 금호문은 조정의 관리인 조신(朝臣)들이 이용하는 문으로 기능했다. 1789년(정조 13년)에 정조가 그러지말고 각자 다니고 싶은 문으로 다니라고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2. 이름

이름은 당나라의 서쪽 궁문 이름에서 따왔다.# '금(金)'은 오행에서 서쪽을 뜻한다. '호(虎)'는 호랑이로, 역시 서쪽을 나타내는 동물이다. 즉 서쪽 문이라는 뜻이다.

3. 이용

현재도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입장은 할 수 없고[3] 나가는 것만 가능하다.

그런데 금호문으로 입장하려는 사람이 많았는지, 헷갈리는 관람객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인지 창덕궁관리소 측에서 금호문 앞에 돈화문으로 입장하라는 안내판을 설치해두었다.
파일:금호문 안내판.png
<colbgcolor=#bf1400> 금호문 앞에 있는 출입 안내판.
금호문은 출구이며 돈화문으로 입장하라는 내용이다.

4. 역사

파일:동궐도 금호문.png
<colbgcolor=#bf1400> 〈동궐도〉 금호문
태종창덕궁을 창건하면서 같이 지은 듯 하다. 원래는 이름이 없었다. 그러다 1475년(성종 6년)에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금호문이란 이름을 지었다.#

1645년(인조 23년)에는 궁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너도나도 금호문으로 드나들자 근처에 있는 서연청에서 세자가 조용히 공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폐쇄당했다.# 그리고 3년 뒤 다시 열렸다.# 이후에도 여러 번 폐쇄와 개방이 반복되었다.#

5. 구조

6. 여담

파일:송학선 의사 의거 터 표지석.png}}} ||
<colbgcolor=#bf1400> 송학선 의사 의거 터 표지석
1926년 4월 28일에 송학선 의사가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암살하려다 실패한 의거의 현장이다. 거사 이틀 전에 순종황제창덕궁에서 승하했다. 그리고 창덕궁 내 빈소로 가는 출입문을 금호문으로 정했다. 송학선 의사는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문상을 하러 금호문을 드나드는 것을 보고 사이토가 지날 때를 노려 암살하기로 했다. 그리고 4월 28일에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나올 때 뛰어들어 안에 타고 있던 일본인 2명을 죽이고 달아났다. 그러나 송학선 의사가 죽인 인물은 사이토가 아닌 다른 일본인이었다.[5] 결국 송학선 의사는 체포당한 뒤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5월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현재 '송학선의사 의거 터'란 표지석이 있다. 한때 금호문이 아닌 돈화문 근처에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금호문 앞에 놓여있다.

[1] 궁궐 내의 행정관청.[2] 위치도 궐내각사와 가깝다.[3] 돈화문으로만 입장이 가능하다.[4] 가칠단청 위에 만 그어 마무리한 단청이다. 가칠단청은 무늬없이 단색으로만 칠한 단청이다.[5] 죽은 일본인은 국수회(國粹會) 지부장 다카야마(高山孝行)와 경성부회 평의원 사토(佐藤虎次郎)였다. 함께 탑승했던 평의원 이케다(池田長次郎)도 칼에 맞았으나 중상에 그쳤다.[6] 순종의 계후 순정효황후를 가리킨다. 순종이 승하한 후여서 당시 순정효황후는 이왕대비 신분이었다.[7] 현재 가치로 대략 1300만 원 정도하는 고가의 금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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