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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25 03:14:38

창덕궁 보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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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colbgcolor=#bf1400> 창덕궁 보경당
昌德宮 寶慶堂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1405년 (창건)
1908년 이후 (철훼)
파일:창덕궁_보경당.jpg
<colbgcolor=#bf1400> 〈동궐도〉 보경당. 서쪽, 북쪽에 장독이 있는 건물이 보경당이다.
아래 푸른 지붕은 [[창덕궁 선정전|{{{#gold
선정전}}}]].

1. 개요2. 역사3. 구조4. 여담

1. 개요

창덕궁 내전 영역에 속했던 건물. 선정전 북서쪽에 있었으며, 동쪽으로 태화당(泰和堂), 재덕당(在德堂)이 행각을 사이에 두고 연이어 놓여있던 형태였다.

2. 역사

태종창덕궁을 창건하면서 서별실(西別室)로 지었고, 세조 때 비로소 공식적인 당호를 부여받았다.[1] 세조는 재위 13년(1467) 9월 28일 보경당에서 영의정 최항, 좌찬성 홍윤성, 형조판서 서거정 등을 불러서 술자리를 베풀었고, 같은 해 11월 11일에는 정희왕후의 탄신일을 맞아 보경당에서 잔치를 열었다.[2]

보경당은 왕이 신하를 접견하거나 경연을 여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세조를 따라 예종, 성종, 연산군도 보경당을 정치를 위한 공간으로 이용했는데, 성종 재위 연간에는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이곳으로 신하들을 부르고 일을 처결했다. 또한, 정희왕후가 승하했을 때는 성종이 보경당을 거려청(居廬廳)[3]으로 잠시 사용한 적도 있었다.

연산군은 보경당을 화려하게 꾸미느라 화계(花階) 공사를 일으켜 대간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동궐도〉의 보경당에서는 화려한 화계와 너른 마당은 보이지 않는다.[4] 오히려 〈동궐도〉의 보경당은 담장 너머 옹기가 줄지어 서있다. 보경당 안쪽 뜰에도 옹기가 가득해서 정치와 거리가 먼 왕실 내 생활 공간처럼 보인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보경당은 후궁을 위한 공간으로 쓰였다. 대표적인 예로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는 이곳에서 영조를 출산했다. 영조 49년(1773) 영조는 자신의 나이 80세를 기념하여 직접 쓴 편액을 보경당에 걸게 했다.
어필(御筆)로, '탄생당 팔십서(誕生堂八十書)' 여섯 글자를 써서, 호조 판서 채제공에게 명하여 보경당(寶慶堂)에 현판(懸板)을 걸게 했다.
영조실록》 영조 49년(1773) 10월 11일.

그런데 영조뿐만이 아니라 경종도 잠시 보경당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숙종 16년(1690) 숙종희빈 장씨의 몸에서 얻은 원자를 왕세자로 세우면서 책례 장소를 정할 때, 숙종이 "지금 원자가 보경당(寶慶堂)에 있으니"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5][6]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는 보경당에서 세상을 떠났다.[7] 그 이후, 더 이상 실록에서 보경당의 쓰임새에 대한 중요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대한제국 순종 초기(1900년대 초반)에 제작한 〈동궐도형〉에서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그때까지도 남아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헐리고 현재는 빈 터로 남았다.

3. 구조

4. 여담


[1] 세조실록 세조 7년(1461) 12월 19일 3번째 기사. #[2] 세조실록 세조 13년(1467) 11월 11일 1번째 기사. #[3] 잠시 관을 모시는 빈전(殯殿) 주변에 국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공간.[4] 연산군도 만만찮게 궁궐 공사에 열을 올렸는데, 그가 폐위되면서 차츰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5] 숙종실록 숙종 16년(1690) 5월 20일 1번째 기사. #[6] 그렇지만 보경당이 좁고 날씨가 덥다는 이유로 경종의 왕세자 책례는 창덕궁 희정당에서 행했다.[7] 순조실록, 순조 22년(1822) 12월 26일 5번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