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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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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손 황수신 황효원 홍윤성10
김질11
1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한 제명, 1506년 중종 때 복권
2 1458년 6월 29일 세조에 의해 책록
3 1466년 연회에서 세조에게 양위를 종용한 혐의로 인한 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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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455년 10월 22일 세조에 의해 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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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699년 숙종 때 복권
8 1691년 숙종 때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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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455년 11월 12일 세조에 의해 책록
11 1456년 7월 3일 세조에 의해 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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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504년 조카 이세좌와의 연좌로 인한 제명, 1511년 중종 때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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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의정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위평공(威平公)
홍윤성
洪允成
출생 1425년(세종 7)
사망 1475년 10월 16일[1] (향년 49 ~ 50세)
(음력 성종 6년 9월 8일)
재임기간 제38대 영의정
1469년 10월 6일[2] ~ 1470년 5월 15일[3]
(음력 예종 1년 8월 22일 ~ 성종 1년 4월 6일)
봉호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시호 위평(威平)
본관 회인 홍씨
수옹(守翁)
영해(領海)
부모 부친 - 홍제년(洪齊年)
부인 남륙(南陸)의 딸
김자모(金子謀)의 딸 고령 김씨
자녀 장남 - 홍진(洪珍) 김씨 소생

1. 개요2. 생애 초반3. 악행4. 사망과 사후5. 전설6.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세조 때의 문신, 정치가, 군인이었다. 집채만한 바위를 드는 용력과 술을 동이째 거푸 비우는 호방함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문과 급제까지 한 문무 겸전이었다. 한명회의 측근으로서 계유정난 때 공신으로 출세해 세조(조선) 즉위 때 공으로 좌익공신에 올랐고 예조판서를 거쳐 이시애의 난 때 무려 우의정, 영의정까지 지낸 세조의 총신이었다. 입버릇처럼 자신이 주상의 벗이라 말해도 왕이 허물하지 않고, 조선 법도로는 말도 안될 중혼을 해 정실을 둘이나 두고도 세조가 웃어 넘겼다고 한다. 인산부원군에 올라 위평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평소 안하무인의 태도로 지위남용과 주색, 토색질 및 살인으로 크게 인심을 잃었으며, 악명 때문에 죽어서도 욕을 들었다. 직계는 물론 방계에도 후손이 없으며 봉사손[4] 역시 없었다.

2. 생애 초반

1425년 충청도 평택현(현 경기도 평택시)에서 홍제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증조부는 홍연보(洪延甫), 할아버지는 홍용(洪容), 아버지는 홍제년(洪齊年), 형은 홍대성이다. 초명은 우성(禹成)이고 자는 수옹(守翁)이며 뒤에 윤성으로 이름을 고쳤다.

1450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종6품 사복시 주부가 됐다. 사복시는 대표적인 한직으로서 집안의 받침이 없는 양민 출신은 당연한 대접이었다. 이어 한성참군 등을 역임했는데 수양대군과 의기투합하게 된다. 수양대군이 홍윤성에게 반란을 도모할 의사가 있는지 홍윤성을 떠보자 "장부라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며 망설이지 않고 가담했으며 계유정난이 있던 날에는 무사들의 호응이 예상외로 시원치 않자 당황하여 결단을 못하는 세조에게 "군사를 일으키는데 가장 난관인 것이 바로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다"라며 부추겨서 계유정난의 감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공적 덕분에 계유정난 이후 2등 공신과 인산군(仁山君)에 책봉되었다.

3. 악행

하지만 홍윤성은 권세를 휘두르며 세간의 비난과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행패를 부렸고, 남이 베풀어준 호의는 아랑곳 않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패악질을 해댔다. 집 앞에 을 타고 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해, 반드시 감시해 말 타고 지나가는 이를 두들겨 패 죽이게 했다. 참고로 홍윤성의 신분으로 보아 당시 홍윤성은 한양에서 살던 게 확실시되는데, 당시 한양도성 내에서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양반밖에 없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논밭을 탈취해서, 야사에서는 홍윤성을 아예 살인마 정승이라 불렀을 정도.

홍윤성이 정승에 오른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홍윤성 고향의 유향소에서 노비 2명을 선물로 주었는데 홍윤성은 노비들이 튼실하지 못하다며 노비를 고른 담당자인 나계문을 잡아가서 죽기 직전까지 팼고 나계문이 일생에 걸쳐 가꾼 나무들을 베어버렸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집 종의 남편인 김돌산이 3명의 동조자들과 함께 나계문을 발가벗겨서 때려죽였다. 하지만 관아는 홍윤성의 권세가 무서워 홍윤성의 명을 받아 아전을 때린 김돌산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홍윤성의 폭행에 가담한 3명의 종만 체포하여 조사하는 시늉을 했으며, 홍윤성 집의 종들이 떼로 몰려와서 이들을 풀어줘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나계문의 아내 윤덕녕은 감사에게 진정을 하는 등 억울함을 풀기 위해 만방으로 뛰어다녔으나 감사는 홍 정승의 비위를 건드렸으면 죽어도 싸다는 이유로 일가를 오히려 옥에 가두어버렸다. 조선 시대에는 노비가 자기 주인을 역모, 강상 이외의 사유로 형사 고발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소송에 제한이 없었다. 법이 문제가 아니라 홍윤성의 권력이 무서워 알아서 긴 것[5].

윤덕녕은 온양온천에서 요양중인 세조를 직접 찾아가서 진정했고, 세조는 크게 노하여 김돌산을 능지처참하고 함께 폭행에 가담한 종들을 참수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든 수령아전들을 죄다 곤장을 쳐서 유배했으며 감사도 잘라버렸다. 세조는 아전의 아내에게 10섬의 을 내려 "지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노력함이 가상하다"라고 치하했으나 홍윤성은 벌주지 않았다. 일화는 홍윤성이 노비를 선물로 받은 주제에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온갖 악행을 일삼았을 정도로 포악한 인물이었다는 것과 정작 패악을 부린 당사자는 처벌받지 않았고 노비만 처형되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홍윤성은 하루가 멀다하고 만행을 저질렀으나 그럼에도 세조는 홍윤성을 감싸고 벼슬을 자꾸 올려 주었다. 심지어 홍윤성을 어릴 때 거두어 돌보던 숙부가 홍윤성을 찾아와 벼슬 자리를 하나 부탁하자 홍윤성은 논 20마지기를 요구하여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 삼촌을 때려죽이고 앞마당에 암매장했다. 벼슬을 청탁한 숙부에게도 잘못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 시기에 청탁은 딱히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홍윤성의 숙모가 원한을 품고 세조에게 탄원하였는데 "공신을 죽일 수는 없다"하여 홍윤성의 몸종들만 도륙당했다. 세조가 "이게 탓이니 술을 금하라"는 금주령을 내렸으나 홍윤성이 "신은 술이 없으면 죽습니다."라고 보채서 취소시켰다고 한다.

세조는 홍윤성에게 직접 경음당(鯨飮堂)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도장까지 내려주었는데[6], 전술했듯 포악한 성격으로 밑사람을 하도 괴롭혀서 온갖 지탄을 받았으나 세조의 이러한 비호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실제로 평안도 군량미 30만 석을 혼자서 횡령했었음에도 세조가 덮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덮어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에, 하루는 술자리에서 "자중하지 않으면 숙부를 죽인 를 물어 극형에 처하겠다"고 꾸짖었는데 이에 홍윤성은 "주상께서는 조카를 죽이시지 않았느냐"라고 여유롭게 되받았고, 세조는 "배짱이 남다르다"며 웃고 말았다고 한다.[7]

어느 날 홍윤성에게 전재산이던 작은 논을 빼앗긴 노파가 땅을 돌려달라며 땅문서를 가지고 홍윤성에게 찾아가자, 그대로 노파를 잡아 돌 위에 거꾸로 매달고 모난 돌로 때려 죽인 후 그 시체를 길가에 버렸다. 그 길가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였지만 홍윤성이 두려워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홍윤성은 자기 집 근처 시냇가에서 발을 닦은 사람까지 건방지다며 때려죽였고, 판서와 부사직의 아내까지 때려죽이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길가에서 한가하게 바둑을 두는 사람에게 "백성이 생업을 일삼지 않고 바둑으로 세월을 허비하니 벌하지 않을 수 없다"며 강제로 바둑알을 먹이기도 했다.[8]

거기다가 홍윤성은 자기 마음에 들면 양반집 딸이라도 겁박해서 강간하거나 으로 삼았다는데, 한 번은 홍윤성이 양주를 지나가다 길거리에서 빼어난 미인을 보고는 그녀의 아버지를 부른 후 "네 딸을 첩으로 삼을 테니 집에 돌아가자마자 술상을 차려놓고 준비해라. 지체하면 죽인다"라는 협박까지 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홍윤성이 갑옷과 투구를 쓰고 그 집으로 들이 닥쳤는데, 중문 안쪽에 숨어있던 여자는 홍윤성이 중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뒤에서 홍윤성에게 칼을 겨누고는 "사족(양반)의 딸을 마음대로 첩으로 삼겠다고? 정식으로 아내로 삼는 거면 몰라도 첩으로 삼겠다면 당장 목숨을 끊겠다"라고 홍윤성에게 호통을 쳤고, 결국 천하의 홍윤성도 이 미녀의 절개에 굴복하여 그날로 원래 부인과 이혼하고 이 미녀를 새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악행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람이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많은 재물을 아끼지 않고 상으로 주는 등 의외의 면모가 있었다고 한다.도네

4. 사망과 사후

세조 사후 예종, 성종 때는 위세가 꺾이기는 했어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만 50세에 병으로 죽었는데, 죽기 전에 의원들이 가망이 없다고 하자 의원들에게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다"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홍윤성에게는 원래 홍진이라는 아들이 1명 있었는데, 일찍 죽었는지 홍윤성의 핏줄은 끊겼으며 결국 자손을 1명도 남기지 못했다. 봉사손도 없었는데, 회인 홍씨 가문에서도 홍윤성의 악명 때문에 홍윤성의 봉사손을 배출하기를 꺼린 듯하다. 홍윤성이 온갖 만행에도 불구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걸로 보아, 만약 세조의 치세에 홍윤성이 일찍 죽음을 맞이했다면 홍윤성의 죽음을 슬퍼했을 세조를 의식해서라도 억지로나마 회인 홍씨 중 누군가가 홍윤성의 봉사손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 역사에서 홍윤성이 세조 사후에도 안 좋은 일을 당하지 않고 편하게 살아간 것과 별개로 세조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세조와 같은 든든한 빽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종의 장인이자 계유정난의 동지인 한명회가 빽이 되주지 않았을까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홍윤성이 죽을 당시에는 한명회의 딸이자 성종의 비였던 공혜왕후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한명회는 더 이상 외척이 아니었으며, 홍윤성 정도의 악행을 저지른 자는 같은 계유정난 공신이라 해도 옹호하기 불가능할 것이다.[9]

결국 홍윤성의 재산은 애첩이 상속받게 되었다. 그 애첩은 재산으로 풍족하게 살다가 갔으며, 홍윤성에게는 제사 1번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홍윤성은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 정수터에 무덤에 안장되었다.

홍윤성의 악행의 업보는 사후에야 비로소 받게 되었는데, 먼저 생전에 저지른 악행이 엄청나다는 이유로 홍윤성이 쓴 글은 모조리 불태워졌으며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있던 성주군 세조대왕태실비문도 세조에 대한 원한을 가지던 백성들이 비문을 돌로 찍고 갈면서 비문이 지워졌기 때문에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다만 당시 비문의 내용 자체는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홍윤성에게 원한이 있던 사람들이 홍윤성의 무덤에 와서 비석을 깨부수고 침을 뱉었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 내버려두어, 마침내는 성종이 홍윤성을 치하하며 세운 묘비문이고 뭐고 남아있던 게 없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묘비문과 신도비는 마멸되어 해석이 불가능하게 된 데다가, 부인의 묘비는 깨져 있었다고 한다. 한참 뒤에야 조정에서 죽은 이에게 너무하다고 다시 묘비문을 세웠지만 그마저도 관리가 안 되었으며, 현재는 부여군 향토유적 제49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무덤에 오줌을 누던 사람까지 나타났고, 2003년 3월 13일에는 무덤 앞에 있는 장명등[10]이 도난당하고 20년 넘게 행방불명 상태가 되는 등[11] 홍윤성의 무덤은 오늘날에도 배척받는 상태가 되었다.

5. 전설

홍윤성이 1450년 과거에 급제하기 전의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데, 전설에 의하면 세종충청도 회인에 살던 그의 형 홍대성은 주점을 하는 설패두의 데릴사위가 되고 자신은 군관이 되어 공주감영으로 갔고 공주감영의 토포군관(討捕軍官)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태만석의 유혹에 넘어간 형수 설씨가 병든 그의 형 홍대성을 독약으로 독살하자 그가 돌아와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독살이며 형수 설씨와 태만석이 살해했음을 밝혀내고 태만석과 설씨를 죽여 복수한다. 곧 충청도 관찰사부에까지 올라가 심문 끝에 사형은 면하여 양산으로 유배형을 받았으나 추풍령에 이르러 태만석의 아우 태만흥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이춘달의 술청을 부수었으며 백성들의 민심을 현혹하던 양산군 통도사의 괴승 청월을 처단하고 밀양의 어느 양인 노인의 딸을 재취로 데려다 주막집 시킨다는 이춘달을 살해하고 풀어주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 뒤 경상북도 청도에 있다가 밀양을 거쳐 충청북도 황간의 당숙의 집에까지 갔으나 공교롭게 당숙모가 원수 태만석의 누이임이 밝혀져 영동 마니산으로 다시 떠났다고 한다.[12]

6. 대중매체


[1] 율리우스력 10월 7일[2] 율리우스력 9월 27일[3] 율리우스력 5월 6일[4] 봉사손: 남의 집에서 양자를 들여 제사를 받들게 하는 것[5] 일부 역사학자들은 연산군 시절 만행때문에 조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때부터 조선의 망국이 시작되었다는 의견이 있을 정도다.무엇보다 조선은 유학을 앞세워 (부패했다고 주장하는)고려를 무너뜨렸는데 개국한지 얼마 안되어 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정권을 빼앗지 않나, 그 삼촌의 수하가 막나가질 않나, 법은 그 권력 눈치만 보고 있고... 이건 공정해야할 정권이 권력에 빌빌 기는 2024년 현실에도 빗대어 대한민국도 드디어 하락세로 접어든다는 기쁜 징조이기도 하다[6] '경음'은 '고래 경'자에 '마실 음'자이니 한마디로 술고래라는 뜻이다.[7] '술자리에서는 군신 간의 예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왕명이 있었다고는 해도 배짱이 남다른 정도가 아닌데, 그럼에도 용서한 것은 세조가 술자리에서 저지르는 망언에 관대했던 것도 있고, 홍윤성이 세간의 욕을 얻어먹으면 얻을수록 보신 차원에서라도 세조에게 충성을 다 바칠 것이었기 때문이다.[8] 삼국지로 유명한 중국 후한 시대의 포악했던 권신 동탁도 봄에 축제를 벌이는 백성들을 보고 "농사철에 일은 안 하고 노는 것들이니 도적떼가 틀림없다."라며 군사들을 풀어 모조리 죽여버린 일화가 있다.[9] 다른 계유정난 공신들도 단종 및 단종의 충신들, 단종을 동정하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홍윤성과 똑같이 간신배에 불과했지만, 최소한 세조 즉위 후에는 홍윤성처럼 막나가는 언행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람비리 같은 건 저질렀을지언정 대놓고 무고한 백성을 죽이던 홍윤성처럼 굴지 않았다.[10] 長明燈, 묘 앞에 불을 밝힐 수 있도록 만들어 세운 등. 조선시대에는 1품 이상의 지위나 신분을 가진 사람의 묘소에만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11] 참고자료[12] 이러한 전설을 근거로 1925년 소설가 이해조(李海朝)는 홍장군전을 쓰기도 했다.[13] 몰락양반으로 되뽀리(장뇌삼 순우리말)를 키우던 걸 그와 알던 독대가 말도 없이 다 캐어갔다. 이걸 알자 혼절하였지만 독대가 가져간 이유가 복수를 위해서였다. 이걸 홍윤성에게 산삼이라고 속여서 바쳐 믿음을 얻게하고 술자리를 갖게되는 자리에서 칼로 찔러죽였던 것. 이 양반도 바로 극중 홍성윤 때문에 집안이 무너졌기에 이 모든 걸 알자 되뽀리가 아깝지않다, 되려 우리 집안 한을 푸는데도 큰 도움이 된거 아니냐고 좋아했다. 그리고, 난 덤빌 생각도 못했는데 독대는 목숨을 걸고 원한을 갚았다고 울적해하며 명복을 빌었는데 독대의 목을 가지러온 방실이랑 와서 몽둥이로 수문장을 겨누며 분노했던 것.[14] 코르테스 대신 테노치티틀란을 무너뜨렸다.[15] 전장에서 광기에 휩싸여 적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명나라에서 공치사로 2품을 수여하자 더 심해졌다.[16]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과로로 말하자면 두말 하면 서러울 수준이고 수틀리면 주변 관료들에게 물귀신 짓거리를 자행하던 작자들이였는데 그런 그들이 홍윤성의 광증을 보고 너나할것 없이 기겁한 것이다.[17] 위장복 개념의 도입만 하더라도 세계 전쟁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업적이며, 근육겁박지계도 심리전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18] 역사개변된 현대로 돌아간 최영직이 박물관에 찾아가 홍윤성의 기록을 찾았을 땐 차마 PTSD로 인해 눈은 울면서 기괴하게 웃는다는 기괴한 모습을 그대로 묘사할 수 없어서 미화를 한 건지 해당 기록이 전해지지 않거나 야사로 취급받은 건지 본 모습 대신 당당한 모습으로 호탕한 웃음을 짓는 모습의 인형이 놓여 있었다.[19] 대만 원정에서 자식이 올해 8세라고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