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안쪽을 일컫는 지역에 대한 내용은 사대문 안 문서 참고하십시오.
세계유산 잠정목록 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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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세계유산 잠정목록 |
대한민국 사적 | |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서울 한양도성 서울 漢陽都城 | Hanyang City Wall, Seoul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산1-29 외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시설 |
면적 | 639,217.6㎡ |
건축시기 | 조선 시대, 1395년(태조 3년)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소유 | 서울특별시 등 |
관리 | 서울특별시 |
<colbgcolor=#bf1400> 한양도성 낙산 일원 |
문화유산채널에서 제작한 한양도성 관련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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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olbgcolor=#bf1400> 〈도성도〉(18세기 제작 추정) |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1396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후 궁궐과 도시를 방위하기 위해 지은 도성이다. 흔히 한양도성하면 성벽만을 생각하는데 숭례문, 흥인지문을 비롯한 서울 4대문과 그외 문도 한양도성에 포함된다.
'서울 성곽'이라는 이름도 한때 이 도성의 공식 명칭이었지만 2011년 7월 사적의 통일된 지정명칭 부여 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서울 성곽이라는 단어는 통용되고 있으며 문화재 안내판에도 서울 성곽이라고 표기된 곳이 많으며 서울시가 정한 도성 순례길의 명칭도 '서울 성곽길'이다.
2. 성문
도성에는 총 8문이 있다. 흔히 4대문과 4소문으로 나뉘며, 4대문에는 숭례문(남대문), 흥인문(동대문), 돈의문(신문), 숙정문이, 4소문에는 소의문(서소문), 광희문, 창의문, 혜화문(동소문)이 대응된다. <사대문>의 실 용례는 실록 등에서 주로 기우제, 기청제를 지내는 기사에 언급되며 이는 관념상의 구분, 즉 동서남북 방위에 맞추어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 29년 6월 28일 기사 참고.) 실질적인 조선시대에 실제로 대문이라 자주 불리고 규모면에서 이름값을 한 문은 숭례문과 흥인문 둘이다. 돈의문은 신문(新門)이라 불렸으며, 숙정문은 산 속에 있어서 그냥 존재감이 없었다. <사소문>의 용례는 찾아볼 수 없다.한편 조선 후기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실제 운영 양상과 비교할 수 있다. 홍순민 명지대 교수의 경우 조선 후기 '승정원 일기(정조 11년 기사)', '대전통편(大典通編)',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의 예를 들어 정문(正門)과 간문(間門)이라는 관리상 구분체계를 주목했다. 이 체계는 통행량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보이며 고종 4년 편찬된 법전인 육전조례의 경우 정문은 숭례문, 흥인문, 돈의문, 혜화문을 나타내고 간문은 소의문, 창의문, 광희문, 숙정문으로 정해져 있다. 둘의 차이는 관리 관원의 직책, 인원 수 등이다.#[2]
이외에 세조~예종 시기에 광희문 남쪽의 남산 동측 자락에 남소문(南小門)이 운영된 적이 있으나 폐쇄되었다.
다음 표에서 각 문에 관한 내용을 열람할 수 있다. 지금은 없는 문은 취소선 표시.
흥인문(동) | 숭례문(남) | | 숙정문(북) | |
사대문 | ||||
혜화문(동북) | 광희문(동남) | | 창의문(서북) | |
사소문 |
지형적으로 살펴보면 사이사이에 산들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북문인 숙정문을 제외하고는) 산을 피하여 성문을 설치하였고 방위가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크게 보아 북쪽에는 북악산과 인왕산, 남쪽에는 목멱산이 있으므로 서쪽 편에서 돈의문(서문), 소의문(남서문), 숭례문(남문)은 인왕산~목멱산 사이 서쪽~서남쪽에 집중되고 창의문(북서문)은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의 골에 위치하여 서측의 의주로, 삼남로 등과 통해 있다. 동쪽 편에서 흥인문(동문)과 광희문(동남문)은 각각 낙산 기슭, 목멱산 기슭에 설치하고 혜화문은 낙산과 북악산 사이의 골에 설치하여 동쪽 교통을 담당하였다. 마지막으로 숙정문은 북악산 산중에 설치하여 실질적인 통로 역할을 하지 않았다. 공통적으로, 성문의 방어력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한쪽 성벽을 산지 지형에 의지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성벽 및 성문의 관리와 수비, 도성 밖 순찰을 삼군영, 즉 훈련도감(訓鍊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이 나누어 맡게 했는데, 그 영역은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에 구체적으로 지정되어 있다.(숙정문~돈의문은 훈련도감, 돈의문~광희문은 금위영, 광희문~숙정문은 어영청) 여기에서 비롯된 용어로는 어영청이 순찰을 담당하던 소의문~숭례문 바깥의 시장을 일곱번째 구역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된 칠패(七牌)시장 등이 있다.
3. 축성
1395년 수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이성계는 도성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를 위해 도성건축 담당기구인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감독하에 건설했다.성이 낙성된 후에는 배수지(排水地)로 5칸 수문(五間水門)·2칸 수문 등을 만드는 한편 성곽의 관문(關門)으로 숙청문[3](肅淸門: 북대문)·흥인문(興仁門: 동대문)·돈의문(敦義門: 서대문)·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4대문과 혜화문(惠化門: 동소문)·광희문(光熙門: 시구문)·창의문(彰義門)·소덕문(昭德門: 서소문) 4소문을 합해 8문을 완성하였다.[4]
초축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태종, 세종, 숙종 연간 등의 여러 시기에 걸쳐 유지보수된 흔적이 남아있으며 그에 따라서 성석을 쌓은 모습이 차이가 있다. 그 양상의 변화는 태조 시절에는 일정한 패턴 없이 자연석을 쌓는 모습에서, 점차 정방형(정사각형)의 석재로 가공해서 쌓는 방법으로 변화하며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정교한 정방형의 형태가 완성된다. 북악산 안내소의 팜플렛에 이러한 시대별 축조 차이가 설명되어 있으며, 성벽을 조금만 살펴보면 쉽게 볼 수 있으니 알아두면 투어의 소소한 재미가 될 것이다.한양도성 성벽의 시대별 쌓기 변화 성벽 바위에는 그 구역 축성을 담당한 고을과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놓아 결과에 대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다.
성벽의 높이는 현재 소실된 높은 구간은 10 m가 넘었지만 낮은 구간은 5m 남짓이었고 해자조차 없었기 때문에 전시에 방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적이 한양까지 쳐들어오면 한양을 버리고 도주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모두 그러했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에도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도성은 전쟁이나 내란 방어용 성곽이라기보다는 왕권의 상징이란 의미가 더 컸고, 실용적 시설이라는 측면보다 인의와 예를 강조하여 평온을 기원하고자 했던 관념적으로 운영된 성격이 컸다고 설명한다.[5]
여러 전란을 겪는 동안 한양 방위체제는 계속해서 개편되었다. 또한 한양도성이 토성이 아닌 석성이 된 이유는 조선 전기 동아시아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 석성으로 둘러싸인 도성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양도성을 처음 축성했을 때 사대문을 제외한 대부분 성곽 축성기간이 49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군사적으로도 한양도성은 처음부터 지키기 힘든 곳이다. 규모가 너무 커서 방어하려면 병력이 많이 필요하고(모든 성벽을 완벽히 방어하려면 5만명 이상의 정예병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5만명의 정예병력이 있다면 애초에 더 나은 선택지가 많다.), 숭례문, 흥인지문 일대는 완전한 평지라서 지형상 불리하다. 게다가 성 바깥에 잇는 안산, 인왕산, 남산, 북한산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성 내부를 관측할 수 있는 감제고지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성 자체의 방위력을 확보하려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서 성벽을 요새화하고 대규모 상비군을 주둔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조선도 한양도성 자체의 방위력은 최소화하고 대신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같이 인근의 요새화한 산성을 방어 거점으로 사용하는 방위전략을 세운 것이다.
4. 파손 및 철거
임진왜란 당시 성곽의 일부가 부서지고 광해군이 복원 작업을 진행했지만 이후의 병자호란때 청나라와의 조약 중 성곽을 복원도 추가로 쌓지도 하지 말라는 조약으로 그냥 방치되다가 1704년(숙종 30년) 이조판서 이유(李儒)의 주장으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숙종 37)까지 수축하였으며, 1743년(영조 19년)에 다시 고쳤다. 그 밖에도 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 부분적인 개수를 행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성곽은 대체로 태조·세종·숙종 때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양도성은 90%가량 복원되었으나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도성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과거에는 성벽으로 연결 되어 있었지만 일제가 교통 문제로 성문 쪽은 성벽들을 철거했다.# 그래서 낙산 같이 산 같은 곳은 성벽들이 보존 되어 있다.[6]4대문의 경우 북대문은 산 속에 위치한 덕분에, 남대문과 동대문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곳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일제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서대문은 얄짤없이 헐려버렸고 그 자리에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버려 현재로서는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또한 안타깝게도 남대문은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인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잃고 처음부터 다시 복원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적은 4소문은 더 심각하다. 북소문의 경우 북대문과 비슷하게 산 속에 위치한 덕분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부터 온전히 살아남은 유일한 4소문이 되었다. 서소문 역시 서대문과 비슷하게 일제에 의해 헐린 뒤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남소문과 동소문의 경우 일제에 의해 파괴된 후 현재 복원되긴 했으나, 원래 있던 제자리에 복원되지 못했다.
5. 복원
<colbgcolor=#bf1400> 서울성곽 복원 개요도. 2012년 자료다. |
2013년 5월 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과 함께 숭례문 남동측 광장구간 성벽복원까지 마무리 됐으며 남산 구간, 시장공관 구간, 동대문 성곽공원 구간이 추가로 복원될 예정이다.
2019년 정동길에서 돈의문터에 이르는 순성길을 정비하기로 했다. 그동안 사유지였거나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창덕여자중학교에 속해 있어 우회해야 했던 순성길을 원래 도성터 근처로 정비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성곽이 건물에 가려져 있거나 아직도 땅속에 파묻혀 있으며, 일부는 여장이 없는 채로 복원 된 곳도 있다. 그리고 숭례문같은 대문에 비해 성곽은 인지도가 많이 떨어져 일반인들의 관심도 필요할 듯 하다.
땅에 묻혔던 서울 남산 한양도성 유적 100여 년 만에 공개된다.
5.1. 세계문화유산 우선등재목록 등재
2012년 11월 23일 서울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르면 1년 뒤부터 등재신청 자격이 주어진다.이에 따라 서울시는 유네스코 권고 기준에 맞는 보존 관리를 하기 위해 올해 한양도성 전담부서를 신설한 데 이어 내년에 한양도성 연결 사업 등에 71억 원 가량을 우선적으로 투입할 계획이다. 2013년부터는 연차별로 총서와 자료집을 발간해 이를 바탕으로 2014년 초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만약 서울 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성곽은 물론 그 외 숭례문,흥인지문,숙정문같은 서울 4대문도 세계유산에 등재될수 있다.[7] 서울시는 체계적인 한양도성 관리를 위해 시 내부에 전담조직인 한양도성도감을 올해 하반기에 새로 만들고 책임자로 ‘도제조’[8]를 두기로 했다. 책임자는 4급 공무원이 맡게 될 예정으로 규모는 시 조직의 1개 과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공간을 활용해 한양도성 박물관과 연구소도 설립하기로 했다.
하지만 2017년 3월 21일 이코모스로부터 다른 나라의 세계유산 도시 성벽과 비교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 등재 반려되었다.#
현재 2022년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자료를 보강하여 재추진하는 중이다. 참고로 이 성 내에 자리한 5대 궁궐중 하나인 창덕궁과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022년 12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한 데 묶어《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이라는 제목으로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등록 성공하여 추진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 문서 참고하십시오.
6. 한양도성 순성길
한양도성은 서울 도심을 순환하며 수록이 적당히 우거져 시원하면서 보기 좋고 높낮이도 적당히 있어서 산책하기에 매우 좋다. 과거에도 한양도성을 따라 걸으면서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는 여행을 순성(巡城)놀이라고 하며 조선시대 당시 한성부 사람들이 여가활동으로 하였다. 현대까지 풍경이 잘 남아있는 인왕산-북악산 지역은 물론이고 낙산, 목멱산(남산)등지 또한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명승지였다. 최근들어 한양도성 순성길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시내에 위치한 순성길 주변에 많은 편의 시설이 갖춰지기 시작했으며 외국인 들에게도 인기코스가 되어가고 있다.그런 산책의 소소한 재미로 각 구간에서 지정된 가장 높은 곳에서 인증 셀카를 찍어서 홈페이지에 등록하면 인증 배지를 받을 수 있으며 사계절 인증 배지 네개를 모두 모으면 인증메달을 받을 수 있다. 동대문이 있는 동대문역에 한양도성박물관도 있다.
<colbgcolor=#bf1400> 한양도성 순성길 세부지도, 2012년 자료[9] |
6.1. 인왕산 구간
강북삼성병원 입구 돈의문 터에서 인왕산 정상, 창의문에 이르는 인왕산 구간은 비교적 최근 지어진 경희궁자이 단지를 끼고 있어 무난히 출발할 수 있다. 가는 길 중간에 홍난파 가옥과 사직터널 위를 통과하며 세븐일레븐 편의점 앞 길을 건너면서 본격적인 산행 코스가 시작된다. 평소에 운동을 좀 했다면 무난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꽤 힘든 여정이 될 수 있다. 의외로 외부 순성길에서 바라보는 성벽이 훨씬 멋지므로 외부 순성길을 통해서 오르다가 인왕산 정상에 가까워 질 무렵 내부 순성길로 들어갈 수 있다. 참고로 해가 지기 1시간 반 정도 전부터 강북삼성병원에서 오르기 시작하면 서울 사대문 도심의 마천루들이 조명을 켜는 순간을 볼 수 있으므로 일몰 시간을 체크한다면 멋진 서울 도심의 야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colbgcolor=#bf1400> 인왕산 중턱에서 본 사대문안 도심 |
<colbgcolor=#bf1400> 창의문 방면 야경 포인트에서 바라본 사대문안 |
6.2. 백악(북악) 구간
숙정문 부터 혜화문까지의 순성 구간으로, 북악산을 지난다. 한옥 건축가로 유명한 황두진이 지은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2005년 출판, 해냄출판사)를 보면 그 당시만 해도 개방되지 않은 구간이라 상상으로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사대문안을 스케치한 이미지를 실을 정도로 이 구간에서 바라본 사대문 도심, 경복궁과 창덕궁 후원이 매우 아름다울 것으로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북악산, 청운대 뿐만 아니라 구간 대부분에서 서울 사대문안이 멋진 모습으로 보이며 인왕구간의 곡장처럼 이곳도 곡장이 있어 아리랑 고개 뒷편과 성북동 방향도 아주 잘 보인다. 창의문 방향에서 숙정문 방향으로 가다보면 1.21 소나무(68년 무장공비 침투 때 생긴 총탄 흔적)도 볼 수 있다. 2007년에야 개방되었기에 나무가 꽤 우거졌다. 말바위 안내소에 있는 화장실은 사용된 물을 정화해서 다시 사용하는 순환수세식 화장실이다.<colbgcolor=#bf1400> 백악 구간 스케치[10] |
<colbgcolor=#bf1400> 실제 모습 |
6.3. 낙산 구간
혜화문 옆을 통과하는 창경궁로를 건너면 바로 낙산 구간에 진입할 수 있다. 한양도성 성곽의 산 구간 중 가장 완만하고 듬성 듬성 있는 장수마을 카페나 외부 순성길의 도성은 특히 저녁이나 밤에 로맨틱한 광경을 제공해 내국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길게 연결된 도성에 비치는 조명이 상당히 독특하면서 로맨틱한 장면으로 보이는 듯. 낙산공원 정상에서 동숭동, 서울대 병원 방면으로 나즈막히 보이는 도심 풍경과 멋진 구간이다. 이후 암문을 거쳐 내부 순성길을 통해 이화벽화마을로 진입할 수 있으며 이후, YWCA방면으로 갈 수도 있다. 계속 순성길을 따라 남쪽으로 걷다보면 한양도성박물관 - 서울성곽공원 - 흥인지문까지 갈 수 있다.<colbgcolor=#bf1400> 낙산공원 인근의 한양도성 |
6.4. 흥인지문 구간
이곳 흥인지문 구간은 흥인지문을 걸쳐 이간수문, 동대문 운동장 터에 세워진 DDP, 광희문을 연결한다. 간선도로 및 전차도선이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놓였기 때문에 숭례문-정동 지역더불어 한양도성이 가장 많이 파손된 지역이다. 오간수문도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 복원 같지 않게 복원되었다. 사실 사대문안을 관통하여 물길이 빠져나가는 청계천은 이전 조선 시대부터 사대문안 구역의 하수도 역할도 맡았으며 운반된 퇴적물이 막혀 바닥 준설을 주기적으로 해줘야 했던 곳이다. 이후 한양공고부터 광희문(수구문, 시구문)에 이르는 구간은 그 한양도성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6.5. 남산(목멱산) 구간
광희문에서 이어져서 서울신라호텔, 국립극장, 남산서울타워를 거쳐, 안중근 의사 기념관, 백범광장을 거쳐 서울 힐튼호텔, 숭례문까지 이르는 구간이다. 목멱산(남산)에는 굳이 입장료를 내고 N서울타워에 오르지 않더라도 경관이 좋은 전망대가 여러군데 있다[12].<colbgcolor=#bf1400> 목멱 구간의 한양도성 |
6.6. 숭례문 - 정동 구간
한양도성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소의문(소덕문, 서소문)과 돈의문(서대문, 새문)의 멸실 과정에 대해 많이 들어봤을 것이며 이후,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이 구간 대부분의 도성이 멸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지역도 그 위에 빌딩이나 학교가 들어서 있어 앞으로의 실질적인 복원에도 매우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왕 구간 중 사직터널 윗 구간도 마찬가지. 본 지역도 소실된 곳이 많아 별도의 구간을 형성하지 못하고 인왕구간에 포함되어 있다<colbgcolor=#bf1400> 성문 폐문 시간 이후 소의문 근처 성벽을 넘는 외국인과 안내인 소년: 한양도성박물관 내 모형 촬영 |
7. 기타
-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은 객관적인 높이 자체는 높지 않지만 서울이 낮은 평지가 많다보니 꽤 경사가 있다. 특히 북악산을 창의문(북소문)쪽에서 올라가기 시작한다면 단번에 200m를 계단으로 걸어올라가야 하니 급격히 증가하는 운동량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바꾸어말하면 넓은 평지 위에 드문 산이니 올라가면 서울 일대가 한눈에 보인다.
잠실 롯데월드타워와 63빌딩으로 동서남북 가늠하기도 쉽다나름 굉장한 장관이니 운동을 겸해서 종종 올라가면 재미가 있다.
- 성벽 위에 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서 위험하다고 곳곳에 써있지만, 감시가 느슨한 곳에서 위에 걸터앉거나, 올라서서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극소수의 조선시대의 벽돌이 아직까지 남아서 사용되고 있으니 잘 찾아보면 보인다. 한자로 축성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길이가 상당히 긴편에 속하는데 한양도성의 총 길이는 18.627㎞이고 현재 길이는 12.344km이다.[13] 해외의 도시성곽과 비교해보면 세계 최장의 성은 중국의 남경성으로 총 길이는 약 34km이고 현재 길이는 약 25km이다.출처 비교해보면 길이가 남경성의 절반 정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긴 성벽으로 역사상 총 길이가 약 19km였던 로마시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나 그보다 더 거대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은 한양 도성보다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가장 두꺼운 삼중성벽 부분만 잘 보존되어 있으며,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경우 3분의 2 정도 남았지만 한양도성의 현재 길이보다 약간 짧다. 과거 춘추전국시대 중국 최대의 도시였던 임치의 성벽둘레는 21km였고 전한시대의 장안성벽의 둘레는 25km, 당나라 장안성의 경우 36.7Km에 달하였지만 오늘날에는 고고학 조사를 통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14] 국내에 소재하는 도시성곽과 비교해보면 개경 나성은 길이가 약 16km, 개경성 총길이는 23km로 더 길고출처[15] 평양성은 총 길이가 약 16km로 약간 짧으며 성벽의 총 연장길이까지 따지면 약 23km로 더 길다.출처 태봉국 철원성은 총 길이가 약 12.6km이며 수원 화성은 총 길이 약 5.5km이다.
- 역사적으로 1980년대 무렵까지 '서울 시내' 는 한양도성이 있던 전통적 중심지인 사대문 안 중구, 종로구 일대를 지칭하는 표현이었지만 이후 부도심이 발전하고 서울 내에서 생활권이 분산되면서 근래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이 되었다. 하지만 '사대문안'이라는 표현은 2020년대에도 여전히 현역이다.
8. 외부 링크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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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임체는 문루 및 성곽이 대부분이 소실되어 터만 남은 읍성, 볼드체는 대부분이 보존, 복원된 읍성 행정구역은 현재 대한민국 기준 산성 틀 바로가기 | }}}}}}}}} |
[1]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2] 홍순민, "조선후기 도성문 관리 방식의 변동", 서울과 역사, 2019, vol., no.101, pp. 61-105 KCI[3] 또는 숙정문(肅靖門)[4] 위키백과[5] 나각순. 2012. "서울 한양도성의 기능과 방위체제". 향토서울 80. 서울역사편찬원 자료제공[6] 산은 성벽이 있으나 없으나 낭떠러지므로 지나 갈 수 없으니 그냥 놔둔 것이다.[7] 돈의문은 아직 복원을 못했다.[8] 실지 제조, 도제조는 대게 판서, 정승급의 대신들이 겸직했다. 그리고 도제조는 정일품 관료들의 명예직이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우측 링크를 참조. # 대장금 등 드라마에 나온 개념을 차용한 티가 팍팍 난다.[9] 연합뉴스 인터랙티브 미디어 랩에서 원본 이미지 열람 및 다운로드가 가능하다.[10] 그림 출처 -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황두진 저, 2005, 해냄출판사.[11] 반드시 원본이 필요하고 사본이나 사진은 인정되지 않는다.[12] 잠두봉 등[13] 4. 복원 단락 이미지 참조[14] 현재 시안 시에 있는 성벽은 명나라의 것으로, 약 14km이다.[15] 개경성은 한양도성처럼 1단 구조가 아닌 4단 겹구조이다. 가장 바깥의 외성만 있는것이 아니고 내성, 황성, 궁성이 외성 안에 또 있었다. 개경성은 강감찬 제의 왕가도 건설으로 1009년~1029년의 21년간 30만 4,000여명의 인력으로 나성(외성), 황성(발어참성), 궁성 3중 구조로 건설하고 여말선초 1391년~1393년 8.5㎞의 내성 축조로 총 둘레 약 23㎞의 나성(외성), 내성, 황성(발어참성), 궁성 구조의 4중구조, 25개 성문으로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