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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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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422호
하남 이성산성
河南 二聖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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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산36번지 외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231,313㎡
지정연도 2000년 9월 16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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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외부 링크4. 사적 제422호

1. 개요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초일동, 광암동 일대에 조성된 삼국시대산성이다. 2000년 9월 16일에 사적 제422호로 지정되었다.

2. 상세

1989년 이래 2020년까지 발굴조사가 총 14차례 있었다.

이성산성에서는 하남 이성산성 출토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발견된 목간의 대부분은 신라가 이성산성을 지배했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1]

이성산성은 한때 백제의 수도 위례성의 후보지로 주장되거나[2], 고구려 축조설이 주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풍납토성, 몽촌토성을 발굴조사하여 백제가 축성했다고 확인했음과 달리, 이성산성에서는 신라 유물들이 대다수 출토되므로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6세기 중반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대다수이다.

현재에도 백제성 축조설, 위례성 후보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최몽룡 교수는 왕성 이동설을 제기할 때 이성산성을 언급하기도 했고[3], 심기원[4] 심정보 한밭대학교 명예교수는 2020년 1월 남문 저수지에서 통일신라, 고구려 지층보다 앞서 백제 토기편이 출토된 점, 이성산성이 백제가 축조한 양천고성, 설봉산성, 설성산성과 유사한 점, 이성산성이 고구려 환도산성과 유사한 점을 들어 백제가 축조한 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남시라는 지자체 이름은 하남위례성에서 따온 것으로, 과거 이 곳이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된 데서 유래한다.

3. 외부 링크

4. 사적 제422호

이성산성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방향으로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형성하는 금암산의 줄기에 접해 있으며, 남쪽은 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들이 있으나 북쪽은 작은 구릉만 있어 한강 주변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산성은 배후의 평야지역을 방어하고 강북의 적으로부터 한강유역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춘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총길이 1,925m인 이성산성과 성내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한양대학교박물관의 주관으로 지난 '86년부터 '99년간 7차에 걸쳐 실시되었으며, 삼국시대 건물지(8각, 9각, 장방형 등)와 부대시설(문지, 배수구 등), 목간, 철제마 등 총 3,352점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특히 3차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목간 전면의 명문기록「무진년정월십이일 붕남한성도사< 戊辰年正月十二日 朋南漢城道使...>」 중 "무진년"은 603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된 토기들은 황룡사, 안압지 출토 토기들과 유사하여 통일신라토기로 판명되며, 신라가 5세기[5] 중엽 한강유역을 점령한 후 축조된 것으로 역사상·학술상으로 매우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1] 고구려 관직인 욕살을 언급한 목간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 목간도 신라가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항목 참조.[2] 조선시대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근현대 사학계의 거두 이병도 등이 주장하였다.[3] 풍납토성(1~ 2세기) - 몽촌토성(3 ~ 4세기) - 이성산성(4 ~ 5세기) - 춘궁동토성 순으로 이동했다는 설이다.[4] 어느 출처인지 불명확[5] 문맥이나 발굴보고서를 토대로 작성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술(#)을 보았을 때 6세기의 오타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