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1-31 00:30:48

순천왜성

검단산성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12px -0px"<tablebordercolor=#01454F>
파일:그림4ㅈㅂㄷㄱ4.png
왜성
倭城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min-width: 30%; color: #fff; min-height: 1em; word-break: keep-all;"
{{{#!folding [ 임진왜란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rowcolor=#888> 울산광역시 울주군 부산광역시 기장군
<rowcolor=#aaa> 서생포왜성
西生浦倭城
‡ 임랑포왜성
林浪浦倭城
기장왜성 | 죽성리왜성
機張倭城 | 竹城里倭城
<rowcolor=#888> 부산광역시 동구 부산광역시 동구
<rowcolor=#aaa> ‡ 동래왜성 | 동래읍성
東萊倭城 | 東萊邑城
부산포왜성 | 증산왜성
釜山浦倭城 | 甑山倭城
자성대왜성 | 부산진성
子城臺倭城 | 釜山鎭城
부산광역시 영도 부산광역시 중구 부산광역시 북구
<rowcolor=#aaa> ‡ 추목도왜성 | 동삼동왜성
椎木島倭城 | 東三洞倭城
† 박문구왜성 | 중앙동왜성
迫門口倭城 | 中央洞倭城
구포왜성
龜浦倭城
<rowcolor=#888> 부산광역시 강서구 경상남도 창원시
<rowcolor=#aaa> 죽도왜성 | 김해왜성
竹島倭城 | 金海倭城
‡ 눌차도왜성 | 가덕도왜성
訥次島倭城 | 加德島倭城
안골포왜성
安骨浦倭城
<rowcolor=#888> 경상남도 창원시 경상남도 거제시
<rowcolor=#aaa> 웅천왜성
熊川倭城
‡ 명동왜성 | 삼포진
明洞倭城 | 森浦陳
영등포왜성 | 구영등성
永登浦倭城 | 舊永登城
<rowcolor=#888> 경상남도 거제시 <#01454F>
<rowcolor=#aaa> 송진포왜성
松眞浦倭城
장문포왜성
長門浦倭城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color: #fff; min-width: 30%; min-height: 2em; word-break: keep-all;"
{{{#!folding [ 정유재란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울산광역시 중구 경상남도 양산시 경상남도 창원시
<rowcolor=#aaa> 울산왜성
蔚山倭城
양산왜성 | 증산리왜성
梁山倭城 | 甑山里倭城
‡ 합포왜성 | 마산왜성
合浦倭城 | 馬山倭城
경상남도 거제시 경상남도 고성군 경상남도 진주시
<rowcolor=#aaa> ‡ 견내량왜성 | 광리왜성
見乃梁倭城 | 廣里倭城
‡ 고성왜성 | 고성읍성
固城倭城 | 固城邑城
† 망진산왜성
望晉山倭城
경상남도 사천시 경상남도 남해군 전라남도 순천시
<rowcolor=#aaa> 사천왜성 | 선진리성
泗川倭城 | 船津里城
남해왜성 | 선소리왜성
南海倭城 | 船所里倭城
순천왜성
順天倭城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color: #fff; min-width: 30%; min-height: 2em; word-break: keep-all;"
{{{#!folding [ 산성개축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부산광역시 강서구 경상남도 거제시
<rowcolor=#aaa> ‡ 갈마봉산성 | 성북왜성
渴馬峰山城 | 城北倭城
‡ 율포산성
栗浦山城
‡ 탑포산성
塔浦山城
경상남도 창원시
<rowcolor=#aaa> ‡ 자마산성
子馬山城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color: #fff; min-width: 30%; min-height: 2em"
{{{#!folding [ 시기불명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경상남도 양산시 경상남도 김해시
<rowcolor=#aaa> † 호포왜성
弧浦倭城
‡ 마사리왜성
馬沙里倭城
‡ 농소리왜성
農所里倭城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color: #fff; min-width: 30%; min-height: 2em"
{{{#!folding [ 위치불명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경상남도 고성군? 경상남도 사천시? 전라남도 광양시?
<rowcolor=#aaa> § 영춘왜채
永春倭寨
§ 곤양왜채
昆陽倭寨
§ 광양왜채
光陽倭寨
전라남도 구례군? 전라남도 순천시?
<rowcolor=#aaa> § 순천왜채
順天倭寨
§ 구례왜채
求禮倭寨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color: #fff; min-width: 30%; min-height: 1em; word-break: keep-all;"
{{{#!folding [ 실체불명 ]
{{{#!wiki style="margin: -5px -1px -5px"
부산광역시 사하구 경상남도 거제시
<rowcolor=#aaa> † ¶ 서평포진성
西平浦鎭城
‡ ¶ 다대포진성
多大浦鎭城
¶ 지세포진성
知世浦鎭城
경기도 용인시 경기도 ??? 경기도 평택시
<rowcolor=#aaa> ‡ ¶ 임진산성 | 풍덕천진
壬辰山城 | 豊德川陳
§ 백련봉진
白蓮峰陳
¶ 농성
農城
서울특별시 중구 강원도 철원군 평안남도 ???
<rowcolor=#aaa> † ¶ 왜성대
倭城臺
¶ 성재산성 | 성산성
城齋山城 | 城山城
§ 마상산왜성
馬上山倭城
}}}}}}}}}
{{{#fff † : 멸실   ‡ : 멸실 위기   ¶ : 왜성으로 구전 / 개축 기록 불확실   § : 일본 측 자료에만 수록 / 상세 확인 불가}}}
파일:정부상징.svg 전라남도 기념물 제717호
순천왜성
[ruby(順, ruby=スン)][ruby(天, ruby=チョン)][ruby(倭城, ruby=わじょう)] | Suncheon Japanese Fortress
파일:71936_69392_1345.jpg
<colbgcolor=#01454F> 이칭 서로행장대왜채(西路行長大倭寨)
순천왜적둔거처(順天倭賊留屯處)
여천덕양리왜성(麗川德陽里倭城)
승주신성리성(昇州新城里城)
신성리왜성(新城里倭城)
순천왜영(順天倭營)
순천적굴(順天賊窟)
예교왜채(曳橋倭寨)
예교성(曳橋城)
왜교성(倭橋城)
왜성대(倭城臺)
망해대(望海臺)
왜대(倭臺)
형태 윤곽식 산성[주곽부]
제곽식 평산성[외곽부]
건설 1597년 (선조 30년)
고니시 유키나가
폐성 1598년 (선조 31년)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188,428㎡
지정연도 1999년 2월 26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소재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1
1. 개요2. 역사3. 위치 및 구조
3.1. 데지로(出城)
3.1.1. 검단산성3.1.2. 광양왜채
4. 과거 모습 및 현황5. 교통6. 여담7. 외부 링크8.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순천왜성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일본식 평산성이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했던 곳으로 유명하고, 이곳에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가 왜교성 전투다. 1997년 이전까진 '승주 신성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2. 역사

[ 조선왕조실록 보기 · 닫기 ]
> 이 이르기를, "가을 사이에 하늘이 패하도록 하여 예전의 소굴로 돌아가 둔치고 있는데, 동으로 기장서생포 등처에서부터 서쪽으로 순천 등처에 이르기까지 연해 지방 곳곳에 둔쳐 9백리에 뻗쳐 있소이다." 하였다.
본도의 적세가 점차 철수하여 물러가는 듯하지만 장흥과 보성의 적은 낙안의 적진에 합세하고, 순천과 흥양의 적도 군사를 나누어 낙안에 목책을 쌓고 집을 지으면서 날마다 곡식을 수확하여 오래 머물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그 형세가 스스로 물러갈 리는 없을 듯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2월 10일
의병장 소희익(蘇希益)은 순천의 왜적 둔거지를 야경하면서 개유(開諭)하여 남녀 2백 86명을 쇄출(刷出)하였고, 낙안의 접견 때도 개유하여 남녀 1백 27명을 쇄출하였습니다. 도원수의 별장 김운성(金雲成) 등은 낙안왜영을 개유하여 남녀 1백 54명을 쇄출하였고, 전주 출신 김익웅(金翼熊)은 순천왜영을 개유하여 남녀 95명을 쇄출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2월 17일
순천성 안에 있던 왜적들이 소굴을 불태우고 철거하였으며, 광양의 왜적들도 한밤중에 역시 군막을 불태우고 도주하였습니다. 예교(曳橋)의 왜적들이 복물(卜物)을 배에 싣고 해구(海口)에 가득하므로 신이 평안 병사 이경준(李慶濬)과 함께 정예병을 뽑아 거느리고 산 위에 진을 친 다음 형세를 보아가면서 진퇴하려 했는데 해농창(海濃倉)을 분탕한 왜적들이 예교에서 무수히 나온다는 말을 듣고 신들이 순천부에 달려갔더니 적도는 5 ~ 6백이었고 후원군은 없었습니다. 중국 장수 이 수비(李守備)도 마침 곡성에서 군사 50여 명을 거느리고 달려왔으므로 드디어 합세하여 독전(督戰)하면서 일제히 진격하여 급히 쳤습니다. 군사의 위세가 매우 성대하여 흉적들은 먼저 겁을 먹고 병기를 버리기도 하고 우마를 버리기도 하면서 허둥지둥 무너질 때 중국군과 아군이 승세를 타고 육박하여 갔습니다. 적세가 궁지에 몰려 바닷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쏘아 죽인 자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다음날 계속 송원(松院)에 머물면서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또 적도 1천여 명이 예교로부터 기치(旗幟)를 많이 설치해 놓고 순천부 성 밖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즉시 달려가 보니, 적도 3백여 인이 나뉘어 성중으로 들어가 남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예교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각진(各陣)의 기사(騎士) 7백여 인을 정선하여 고함을 지르며 독전하였습니다만, 적이 뽕나무 숲을 점거하여 빗발치듯 총을 쏘고 검광(劍光)이 번쩍거려 사람들이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공격하여 서로 접전하게 되자, 적들이 화살에 많이 맞아 형세가 이미 곤궁하게 되었고 대오도 흩어졌습니다. 아군이 유리한 형세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벤 것이 매우 많았으나, 적의 큰 진영이 멀지 않아 혹 뒤를 습격 당하는 걱정이 있을까 염려하여 끝까지 추격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1월 24일
지난 임진년 8월 산골로 피란했다가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장 산도(山道)의 진중에 소속되어 안골포(安骨浦)에 한달 남짓 머물러 있었습니다. (...) 또 하동에서 열흘 간 머문 뒤에 산도가 선척을 다 거느리고 수로(水路)를 따라 순천 · 흥양을 거쳐 전라우수영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통제사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안 지방으로 후퇴하여 정박하면서 날마다 분탕질을 한 뒤에 다시 순천으로 들어와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주난궁(走難宮)에게 지키도록 한 다음 산도는 즉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2월 11일
흥양 현감 최희량(崔希亮)의 치보(馳報) 내에 '정탐인 조언방(趙彦邦)이 와서 보고하기를, 「순천 삼일포(三日浦)에 진치고 있던 왜적이 주사(舟師)가 진영을 옮겼다는 것을 듣고 2월 24일에 예교로 옮겨가 합하여 현재 성을 쌓고 있다. 왜장 평수가(平秀可)가 2월 7일에 여역(癘疫)으로 죽었는데 10일에 배에 실어 본국으로 들여보냈고 현재 앓고 있는 왜적들이 적굴(賊窟)에 많이 있으며 죽은 시체가 널려 있다. 」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 해로(海路)의 적세는 흥양 이서(以西)는 아직까지 적이 왕래하지 않고 있으며 적중에서 불러온 사람의 초사(招辭)에 "예교(曳橋)에 적도들이 점점 들어와 군사를 증가하고 요새를 만들어 오랫동안 주둔할 계획을 세운다."라고 하였으니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3월 18일
신이 수차례에 걸쳐 적의 정세를 조사해 보니, 동쪽으로 울산의 도산에서부터 서쪽으로 순천의 왜교에 이르기까지 병영과 둔전(屯田)을 연달아 설치한 것이 수미(首尾) 9백여 리에 달하는데, 조그마한 목책은 제외하고 큰 병영만 꼽아도 모두 20여 군데나 되며, 날마다 성을 쌓고 해자를 파며, 둔전을 설치하여 곡식을 축적하고, 노쇠한 군사는 교체하여 정병으로 보강하고 있으니, 어찌 그 뜻이 없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1598년 7월 1일
이 말하기를, "별로 긴급한 보고는 없었는데 성윤문(成允文)과 정기룡(鄭起龍) 등의 문보(文報)가 왔기에 이미 군문(軍門)에 보냈습니다. 대체적인 내용은 경상우도의 적이 성주를 범하려 하고 있고 예교의 적이 성 밖에 3개의 진(陣)을 나눠 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8월 9일
남해의 적에 빌붙은 유학(幼學) 이문욱(李文彧)이 적의 진중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순천의 적군은 1만 5천 명이고, 적 소굴의 형세는 3면이 바다로 둘러 있어 1면만 공격이 가능한데, 땅이 질어서 실로 진격하기가 어렵다. 남해의 왜적은 그 숫자가 8백 ~ 9백 명으로 장수는 탐욕스럽고 사나운데 군사가 잔약(殘弱)하며, 거제의 적도 겨우 수백 명이니 이 두 곳의 소굴을 수병(水兵)으로 공격하면 썩은 나뭇가지를 꺾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9월 23일
신이 유지(有旨)를 가지고 남원의 부유창(富有倉)에 달려가서 들으니, 중국 군대가 처음 후퇴할 때에 왜적이 의심하여 나오지 않고 내버린 군량과 무기 및 각 진영의 장막도 들여가지 않다가 4 ~ 5일이 지난 뒤에 처음으로 목책을 철거하여 굴(窟) 밖에 더 설치하고 또 흰 바탕에 붉은 그림을 넣은 기(旗) 하나를 만들어 순천의 중로(中路)에 나와서 꽂아 놓았는데, 그 내용은 대략 '군량과 무기가 부족하였는데 중국과 조선이 우리에게 군량을 주고 무기를 보조하였으니 대단히 감사하다.'고 했다 합니다. (...) 각 진영의 장수들이 날마다 기병 1백여 명을 보내 왜적의 굴 밖에서 정탐하게 하였는데, 하루는 적이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몰래 기병(奇兵)을 내보내 갑자기 습격하려고 하는데, 뒤에 있던 중국 군사가 소리를 치며 돌격하니 왜적이 달아나 도로 소굴로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 중국인 오자화(吳自化)라고 하는 자가 왜적의 소굴에 들어가 행장(行長)을 보니, 소서행장이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이미 죽고 국가에 큰 변고가 있어서 내가 들어갈 것이다. 원컨대 도사(都司) 오종도(吳宗道)를 인해 유 제독 노야를 뵙고 28일에 즉시 철병하겠다.'라고 하므로 22일에 오종도가 적중(賊中)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11월 2일
금월 19일 사시에 예교의 왜적이 모두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유 제독(劉提督)이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성중에는 다만 우리 나라 사람 3명과 우마(牛馬) 4필만 있었습니다. 남해의 대양(大洋)에서 진동하는 대포 소리가 멀리 들렸는데, 이는 반드시 수군이 접전하는 소리인 듯하나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11월 2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요구한 무리한 강화조건으로 말미암아 1597년 강화교섭이 결렬, 정유재란이 발발했으며 일본군 총대장으로 임명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일본군을 좌, 우군과 수군 총 3개군으로 편성해 우키타 히데이에모리 히데모토에게 지휘권을 주었다. 우키타 히데이에의 좌군은 고성, 사천, 하동을 거쳐 8월 16일에는 남원, 전주까지 진출한 뒤 모리 히데모토의 우군(右軍)과 합류했다. 그러나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일본군은 9월 초 직산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에 전라도 전선을 고착화시키기 위해 9월 중순 이후 임진왜란 때처럼 다시 왜성을 쌓으며 수성 준비에 들어갔다.

순천왜성의 경우 1593년 임진왜란 당시의 최전방이었던 웅천왜성에 주둔했던 바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비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난중잡록」의 기록[1]과 12월 초에 고니시 유키나가우키타 히데이에토도 타카토라에게 축성을 끝냈다는 내용의 서장을 보낸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1597년 연말 이전에는 완공한 것으로 추정한다. 즉, 1597년 9월부터 11월 말까지 약 3개월간에 걸쳐 쌓은 것인데, 일반에는 축성자가 우키타 히데이에토도 타카토라가 순천왜성을 축성한 것으로 와전[2]되어 있다.

왜교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포위당했으나 명군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불완전한 작전을 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뒤이어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하면서 정유재란의 끝을 맺은 장소이기 때문에 여러 왜성 중에서도 한국 대중에게 상당히 잘 알려져 있다. 성을 쌓은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일본군이 조선에서 전면 철수하면서 폐성되었고, 이후 조선군이 다시 활용한 적이 없기 때문에 성곽시설로서 기능한 기간은 유명세에 비해 대단히 짧다. 그러함에도 가장 그 형태가 잘 보존된 왜성 중 하나이기도 하다.

왜란 이후, 광해군 연간에 순천부사 이수광이 왜교(倭橋)라는 이름이 좋지 않다 하여 망해대(望海臺)로 고쳤다. 17세기 즈음 되면 신성리로 주민들이 이주하는데 왜교성 전투에서 죽은 일본인의 악귀가 마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주민들을 불안해하자 1697년경 충무사(忠武祠)를 짓고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를 봉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다른 왜성들과 마찬가지로 1938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해방 이후에도 그 지위가 유지되었으나, 1996년 일제 지정 문화재 재평가를 거쳐 1997년 1월 1일에 지정문화재에서 해제한 뒤 1999년 2월 26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71호로 재지정했다.

3. 위치 및 구조

파일:그림5324.png
순천왜성 위치관계도
파일:search.pstatic1234567890-.jpg
『정왜기공도권』에 묘사된 순천왜성
파일:스크린샷 2025-01-30 110031.png
『조선일본도설』 「서로왜채분도(西路倭寨分圖)」에 묘사된 순천왜성
파일:2(1).jpg
순천왜성 상상 조감도 #

파일:그림723243567.png
순천왜성과 검단산성의 관계
파일:그림7908765432.png
순천왜성 항공사진 (1969)
파일:스크린샷 2025-01-30 115055.png
순천왜성 위성사진 (2022)
파일:21331234123243123245.jpg
순천왜성 구조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최전방 요새로 쓰기 위해 건설한 왜성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견내량 바깥으로 쏟아져 나와 새로 건설한 전진기지 중 가장 서측의 최전방으로 깊숙하게 나가 있었다. 순천왜성이 위치한 순천부의 예교포(曳橋浦)는 여수반도와 한반도 본토 사이의 연결부에 툭 튀어나온 작은 반도 지형으로, 왜성들 중 최전방 전진기지를 설치하기에 이보다 좋은 여건의 입지는 없다. 현재는 율촌제1일반산업단지가 들어서 있어 순천왜성 바깥의 바다가 모조리 매립된 상태이기 때문에 전혀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지만, 상기한 60년대의 항공사진을 보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해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3]

예교(曳橋)라는 지명은 순천왜성의 특징인, 성의 허리를 갈라놓는 해자와 해자교를 '옛다리'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일반적이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이미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는 민간어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실제로 조선일본도설에서는 예교 다리와 순천왜성의 해자가 별개의 장소로 그려져 있어, 실제 예교는 순천읍성과 순천왜성 사이 어딘가의 하천을 건너는 다리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예교가 정유재란 도중 발음이 비슷한 왜교(倭橋)로 바뀌어 일본군의 주둔지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위치상 바로 코앞의 순천읍성과 광양읍성, 산 너머 낙안읍성까지 육로로 진격할 수 있었고 해로로는 광양왜채와 섬진강을 따라 하동읍성, 구례읍성, 멀리는 남원읍성과 전주읍성까지도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에 있었다. 다시 말해 전라도 지방을 타격하기 위한 주요 거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수반도 남쪽의 전라좌수영과도 가까워 당시 좌수영과 고금도를 주요 거점으로 삼고 있던 조명연합 수군에게도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다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사천왜성남해왜성 등 중요한 거점이 되는 왜성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곳들에서 순천왜성을 지원하려면 반드시 노량 해협을 지날 수밖에 없어서, 노량을 차단당한다면 고립당하기 딱 좋았다. 실제로 고니시 유키나가왜교성 전투 당시 결과적으로는 패배를 면했으나 조명연합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되는 바람에 차칫했다가는 말라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다.

예교포 반도의 가장 동남측으로 돌출된 끝단, 해발 약 50m 구릉지에 주곽부를 두고, 그 앞으로 여러 겹의 방어선을 둘러쳐 진격 형세를 취했다. 현재 관광지로서 꾸며져 있는 부분은 주곽부와 해자까지의 제1, 2 방어선이며 최외곽의 제3 방어선은 농경지가 들어서고 수풀이 우거져 그 모습을 제대로 관찰하기 힘들지만 상당히 양호하게 윤곽이 남아있다.

구릉지의 정상부에 남북으로 길게 뻗고 군데군데 굴절부가 있어 대체로 장방형을 띠는 제1곽을 배치하고서, 그 내부에 북측으로 치우친 2단의 천수 기단을 쌓아올렸다. 이 기단 위에 올렸을 천수 목조 건축물은 한반도에 남아있는 30여 곳의 왜성 중 유일하게 상세한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있다. 임진왜란의 기록화로 볼 수 있는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에는 3단의 지붕을 올려 길쭉하게 탑처럼 쌓아올린 천수가 묘사되어 있고, 오층망해루(五層望海樓)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기단의 크기로 미루어 보아 5층의 천수가 올라가기는 무리이며 츠키야구라(付櫓)[4]까지 포함하여 조명연합군 측에서 5층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을 점치는 상황이다.

현재까지 천수 기단을 중심으로 많은 기와편을 수습했는데 색이 적색, 다갈색, 흑색 등 다양하여 상당히 화려한 천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기와는 인근 사찰 등에서 약탈하여 조달했다고 보지만 정확한 약탈 장소와 운반과정 등은 알 수 없다. 개중에는 왜란 당시의 흔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직도 검게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는 와편이 있어서, 소탕전 도중에 불에 타 소실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1곽의 주변으로는 계단형의 작은 부곽들이 몇 곳 붙어있으며 제1곽의 사면을 크게 감싸는 제2곽이 있다. 따라서 주곽부의 평면형태는 윤곽식 산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1곽의 서측과 남측으로는 마스가타 고구치(枡形虎口)[5]를 내어 제2곽으로 출입하도록 했고 제2곽은 서측과 서남측에 출입구를 내었다. 서측 출입구가 주곽부의 주출입구인데 돌출시킨 공간에 북측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앞에 1줄의 수직 해자(竪堀)[6]가 있어 진입 경로를 Γ자 모양으로 제한한다. 구릉지의 동남쪽은 절벽이며 급경사로 바다와 직접 맞닿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유구가 남아 있지 않으나, 섬호집에 목책을 두 겹으로 둘렸다는 기록이 있다.

구릉지 아래로는 외곽부가 펼쳐진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과 기록에서 묘사하는 외곽부의 방어선은 총 3겹인데, 석축과 토루가 혼용되어 있다. 가장 안쪽의 제1외곽부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고 북측 끝과 남측 끝이 해자와 직접 닿는다. 가운데에 마스가타 고구치를 냈는데 현재 출입구 양측 석축 중 ㄴ자 모양의 남측 석축만이 복원되어 있어 실제 방문했을 때 마스가타인지 알아보기 쉽지 않다. 출입구의 남측에는 조선식 와 같은 돌출부가 1곳 있다. 가장 북측 끝단에는 바다와 맞닿는 작은 구릉지가 있는데 이곳에 데쿠루와(出郭)[7]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제2외곽부는 제1외곽부의 출입구 바깥으로 조그맣게 덧대어 설치했다. 하나의 독립된 공간이라기보다는 넓은 이중문의 성격이 있으며, 외부와 통하는 출입구는 어긋문(喰違い虎口)으로 냈다. 이곳 역시 11자 모양으로 엇갈려 있는 출입구 부분만이 복원되어 있으나, 본래는 그 양측으로도 길게 석축이 이어져 제1외곽부와 맞닿았다.

제2외곽부 바깥으로는 순천왜성에서 가장 특징적인 해자(水堀)를 팠다. 순천왜성 해자는 여타 왜성들과 비교해 보아도 상당히 독특한데, 성 전체를 가로질러 아예 두 부분으로 끊어내는 역할을 한다. 이는 진격 및 방어의 기능이 강조된 순천왜성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바닷물을 그대로 끌어와 주곽부 부분을 섬과 같이 만들었고 그 한가운데에 흙다리(土橋)를 놓아 통하게 했다. 예교, 왜교성이라는 이름 때문에 순천왜성 하면 해자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또한 해자 주변으로 물과 땅 곳곳에 목책을 박아 성으로의 잠입을 막았고 해자와 제1외곽부가 만나는 북측 지점에는 배가 들어오는 선착장(舟入り)이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해자 바깥으로는 최전방을 막는 제3외곽부를 설치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낮직한 구릉지 선을 따라 토루와 석축을 쭉 쌓았는데 중앙부에 툭 튀어나온 작은 언덕을 이용해 크게 Γ자로 감싸는 돌출부를 만든 뒤 그 안쪽으로 출입구를 내어 돌출부가 개구부를 보호하게 했는데 이곳이 순천왜성의 주출입구이다. 돌출부를 기준으로 남북에 각각 크고 작은 형 돌출부가 1곳씩 있고 그 바깥으로 몇 단의 작은 부곽들이 길게 덧대어져 있다.

전체적인 평면구조는 제곽식 평산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 범위는 부산포왜성에 맞먹는, 왜성 중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데 웅장함으로는 손에 꼽는 서생포왜성마저도 순천왜성보다 면적이 훨씬 좁다. 다만 순천왜성의 경우 토축으로 이루어진 부분도 많았던 데다 높고 웅장한 석축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는 않아서 규모에 비해 체감상 그리 웅장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3.1. 데지로(出城)

파일:스크린샷 2025-01-30 192017.png
「사로왜채총도」 순천왜채와 그 주변에 있는 작은 전진기지들
순천왜성은 사서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최전방인 만큼 몇 곳의 부속 전진기지를 운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순천의 일본군 본진에 딸린 작은 진영이 낙안, 순천, 광양 세 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중 순천읍성에 일본군이 주둔한 적이 있는 것은 확실히 기록되어 있다. 낙안읍성과 광양읍성도 순천왜성의 전진기지로 운용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고, 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고성왜성과 같이 본격적으로 왜성 개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일부 목책과 막사만을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 『조선일본도설』의 「사로왜채총도」이 2019년 공개되면서 새로이 밝혀진 왜성들이 있는데, 그 중 광양왜채는 '왜채'라는 표현을 사용해 왜성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나 순천[8]과 구례에 그려진 왜성은 따로 왜채라는 표현을 써놓지 않아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순천읍성과 광양읍성 모두 완전히 멸실되어 시가지가 들어선 상황이기 때문에 확인할 방법도 전무하다. 그 밖에도, 순천왜성과 대치하는 위치에 검단산성이 있다.

3.1.1. 검단산성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344c3c> 서울특별시 배봉산 보루 · 북한산성[A] · 불암산성[A] · 아차산 일대 보루군[A] · 아차산성 · 탕춘대성 · 호암산성
경기도 남한산성 · 당항성 · 도기동 목책성 · 독산성 · 문수산성 · 반월성 · 북한산성[B] · 불암산성[B] · 아차산 일대 보루군[B] · 이성산성 · 파사성 · 죽주산성 · 행주산성 · 호로고루
인천광역시 강화산성(강화석수문)강화중성 ·강화외성정족산성 · 계양산성
충청북도 단양 적성 · 덕주산성 · 삼년산성 · 상당산성 · 온달산성 · 장미산성 · 충주산성
충청남도 공산성 · 부여 가림성 · 부여 나성 · 부소산성 · 영인산성
전북특별자치도 동고산성 · 미륵산성 · 위봉산성 · 우금산성
전라남도 자미산성 · 마로산성 · 검단산성 · 봉대산성
광주광역시 무진고성
경상북도 가산산성 · 가야산 산성 · 금돌성 · 금오산성 · 명활성 · 주산성
대구광역시 달성 · 용암산성 · 초곡산성 · 팔거산성
경상남도 고성 만림산 토성 · 분산성 · 우불산성 · 화왕산성 · 갈마봉산성 · 자마산성 · 제덕토성
부산광역시 금정산성
울산광역시 관문성
강원특별자치도 영원산성
[A]: 경기도와 겹침. [B]: 서울특별시와 겹침.
행정구역은 현재 대한민국 기준
읍성  조창성  차단성・관문  왜성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418호
<colbgcolor=#344c3c> 검단산성
檢丹山城 | Geomdansanseong Fortress
파일:20101231-00-sc24.jpg
국가유산
명칭
순천 검단산성(順天檢丹山城)
이칭 퇴병산성(退兵山城)
피봉산성(皮峰山城)
조선산성(朝鮮山城)
입지 산성
건설 미상
최소 삼국시대[백제]
폐성 미상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34,544㎡
지정연도 1999년 12월 29일
링크 공식 홈페이지
소재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 산 84



파일:search.pstatic123456321.jpg
검단산성 성벽 구조
파일:search.pstatic54233456789.jpg
집수지의 모습
[clearfix]
순천왜성과 약 1.5km의 간격을 두고 마주보고 서 있는 해발 약 138.4m의 야산 위에 자리한 테뫼식 산성이다. 그동안 정유재란 당시 유정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의 부대가 주둔해 육로로 순천왜성을 공격한 것으로 구전되어 왔으나, 1996년 발굴조사 결과 그보다 훨씬 이전인 6세기 중엽에 백제가 수축한 산성인 것으로 드러났다.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이며, 둘레 430m, 높이 13m, 성벽의 두께는 500cm 가량이다. 성벽은 협축식(夾築式)이고 외벽과 내벽은 부정형의 할석을 사용해 허튼층쌓기로 쌓아올렸다. 내벽과 외벽 사이에는 생토층 위에 30 ~ 50cm 두께로 흙을 다지고 그 위에 잡석을 채워 넣었다. 외벽에는 4 ~ 7단 높이까지 붉은 점토와 잡석으로 성벽의 몸체 부분을 보강했고, 약 250m 길이의 체성에서 출입구 3곳, 건물터 5동, 수혈 건물지 4동, 저장공 3개소, 대형 우물 1개소, 팔각집수정 1개소 등 다양한 유구가 발굴되었다.

남문지와 서문지는 능선 정상부에 있는데 그 중 남문지는 능선에서 계곡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있다. 문은 모두 개거식이었으며 남문지는 너비가 내부 440cm, 외부 380cm이고 바닥에서 목조 문을 세웠던 기둥구멍이 나왔다. 그 바닥에는 부소산성의 백제 건물지와 마찬가지로 판석이 1매 놓여 있었으며 서문지와 북문지의 형태도 거의 유사하다.

검단산성 서쪽 가장 낮은 지점에서는 대형의 석축 우물이 있다. 형태는 장타원형, 길이 810cm, 너비 400cm, 깊이 350cm로 규모가 꽤 크다. 벽체도 성벽 몸체 부분의 성돌과 같은 부정형의 석재로 쌓아 올렸다. 면석 뒤쪽으로는 1m 이상의 두께로 점토를 다져 놓아 물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고, 우물지 내부에는 나무를 끼워맞춘 구조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량의 기왓조각, 바가지형 나무그릇, 물동이 모양의 나무그릇 등의 목제품과 철모, 철촉, 석환 등이 출토되었다.

그 외에도 팔각 집수정과 직사각형 저장공, 초석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산성의 정상부에서 12각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곳을 백제 삽평군(㰱平郡)의 치소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정유재란 당시 다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곳이 순천왜성으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데다 해발고도가 더 높아 왜성을 내부까지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입지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곳을 조명연합군이 재활용했다는 내용은 조선시대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1942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처음 나오는 전승이라 후대의 와전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순천왜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순천읍성 방면을 조망하기 위해 전진기지로 사용했을 가능성 역시 충분하다.

백제의 성이지만 현대에 와서는 순천왜성과 엮여 정유재란왜교성 전투의 주요 격전지로 인식되고 있는 장소다.

3.1.2. 광양왜채

<colbgcolor=#01454F><colcolor=#fff> 광양왜채
[ruby(光, ruby=クァン)][ruby(陽, ruby=ヤン)][ruby(倭寨, ruby=わさい)] | Gwangyang Japanese Fortress
파일:스크린샷 2025-01-25 211936.png
이칭 광양왜성(光陽倭城)
형태 미상
면적 미상
건설 미상, 최소 1597년 이후
미상
폐성 미상
위치 미상


파일:스크린샷 2025-01-25 210331.png
「사로왜채총도」에 묘사된 광양왜채[9]
[clearfix]
「사로왜채총도」가 공개되면서 새로이 존재가 밝혀진 왜성으로, 섬진강 하구 서측의 광양시 해안가 어딘가에 있었다. 다만 기록에 제대로 남은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큰 요새가 아닌, 사천왜성과 순천왜성 사이에서 연결하는 중계지(中繼地) 역할만을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견내량왜성과 같이 대부분 토축으로 이루어진 성이었던 듯하다. 그나마 사천성 전투에 등장해 소략하게나마 기록이 남은 세 전진기지와는 달리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전무한 수준이어서 알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다. 다만 『대동여지도』를 보면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위치하는 천왕산의 남측 산줄기에 증산(甑山)이라는 표기가 있어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의심만을 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10]

4. 과거 모습 및 현황

파일:pan002839.jpg
전남 여천 덕양리 왜성[11]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이하 유리건판 사진 동일)
파일:pan012722.jpg
순천 왜성 전경[12]
파일:pan012723.jpg
순천 왜성 전경[13]
파일:pan012725.jpg
순천 왜성 전경[14]
파일:pan012731.jpg
순천 왜성 이환 환계형문[15]
파일:pan012729.jpg
순천 왜성 이환에서 본 천수대[16]
파일:pan012727.jpg
순천 왜성 본환과 이환[17]
파일:pan003724.jpg
순천 왜성 이환 유지[18]
파일:pan003725.jpg
순천 왜성 천수대지[19]
파일:pan012729.jpg
순천 왜성 본환 동벽 축벽
파일:5949679091_0d77d4dc42_o.jpg
순천왜성 원경
파일:3024_10280_659.jpg
파일:search.pstatic534565.jpg
복원된 북측 해자의 모습
파일:5950238742_1374007c14_o.jpg
해자와 제2외곽부 주출입구
파일:5949682049_81c29ba76f_o.jpg
파일:search.pstatic87654356789.jpg
11자 모양의 제2외곽부 주출입구
파일:5950241088_10e66cf0ae_o.jpg
복원된 출입구 석축과 등성계단
파일:search.pstatic324566432.jpg
제1외곽부 출입구 내부의 모습
파일:5949685871_7bdc719579_o.jpg
제2곽 주출입구 내부에서 천수 기단을 올려다본 모습
파일:5950245064_e32243b870_o.jpg
제1곽 남측 출입구
파일:5949687399_40fd1f44fa_o.jpg
제1곽 남측 출입구 내부에서 천수 기단을 올려다본 모습
파일:5950248754_0a123ca536_o.jpg
제1곽 동측 석축 축조 상태
파일:search.pstatic657686754.jpg
파일:search.pstatic23435467.jpg
천수 기단의 모습
파일:search.pstatic3454324567.jpg
천수 기단에서 제1곽을 내려다본 모습

5. 교통

위치가 해룡면 신성리라는 여수 - 순천(여순로) 중간쯤에 있는데 상당히 외져서 대중교통도 매우 불편하다. 신성리 왜성 정류장이나 조금 떨어진 현대제철 정류장에 내려서 걸어와야 하는데, 두 노선을 합쳐도 하루에 8대만 운행한다. 따라서 자가용이나 택시가 필수다. 차로 갈 경우 신성리 117번지 일대가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비포장 흙바닥이고 주차 구획선도 없지만, 순천시 주요 관광지 안내 간판이 있어서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간임을 보여주고 있다.

6. 여담

파일:hongane2013_223368245053_4.webp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 재현한 순천왜성의 모습

7. 외부 링크

8. 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낮은 구릉지대에 내·외성 2중으로 돌로 쌓아 만든 성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장 소서행이 일본군의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하여 쌓은 왜성이다.

순천왜성은 왜교 또는 예교(曳橋)라 하며 일본사람들은 순천성이라 부르고 있고, 1997년 1월 1일 국가 사적 제49호에서 해제되기 전까지는 ‘승주 신성리성’으로 불려왔다.

성벽은 외성 3첩과 내성 3첩으로 쌓았는데 내성만 그 흔적이 분명하고 외성은 분명치 않으며, 성 주위에는 연못을 둘러 판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은 1598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 사이에 최대의 결전이 벌어진 곳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소서행장을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둔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9. 관련 문서


[1] "행장 등 적이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하여 왜교에 결진하여 성을 쌓고 막사를 지었다."라는 기록이 정유년 9월 초하루 기사에 기재되어 있다.[2] 1922년 일본군 참모본부가 편찬한 「일본전사조선역(日本戰史朝鮮役)」405p.에 위의 두 장수가 순천성을 구축했다고 기술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짐작한다.[3] 다만, 이런 지형적 특징은 내륙 방향에서 침입해오는 적을 막을 때에 유효한 것으로 바다에서 들어오는 적을 막아야 했던 조선 입장에서는 요해지라 할 수 없었다. 즉 왜성에 특화된 입지였기 때문에 그 규모에도 불구하고 왜란 후 조선이 활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규모가 큰 왜성을 조선 측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남아있는 부산진성이나 서생포진성과는 대조적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부산포왜성이나 서생포왜성의 경우 전자는 최후방의 본진으로서, 후자는 최전방인 울산왜성을 보조하는 연결성으로서 둘 다 바다를 향해 진출하기 용이하도록 설계되어 조선 수군도 이를 이용할 수 있었던 반면, 순천왜성은 오로지 최전방으로 진격하기 위한 형세를 하고 있기 때문에 바다에서 들어오는 지원을 받고 내륙으로 진출하기만 용이하다는 구조상의 극명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4] 천수에 이어붙인 망루로, 한 몸체를 이룬다. 보통 천수 기단이 2개 이상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면 츠키야구라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천수가 본래 중심 망루에서 발전해 후에 다이묘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규모를 키우고 급기야 한 지역의 랜드마크로까지 기능이 확장된 시설인데, 왜성을 쌓을 당시는 센고쿠 시대 말기였기 때문에 천수에 망루 본연의 기능이 아직 많이 남아있던 시기였다. 때문에 왜성천수들은 그 잔존 기단부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천수각의 이미지보다는 많이 왜소하다.[5] 일본의 성에서 조성하는 출입구 형태의 한 가지로, 한국의 옹성과 비슷한 역할을 하나 살짝 다르다. 출입구의 외부나 내부에 방형의 공간을 두어 출입 경로를 굴절시키고, 대부분의 경우는 이중문을 설치해 방어력을 높이는 동시에 적의 측면을 공격할 수 있게끔 설계한 시설이다. 그 형태가 네모난 되박을 닮았다고 하여 마스가타(枡形)라는 이름이 붙었고, 때에 따라서는 ㄱ자 모양으로 꺾는 카기카타(鍵形)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6] 이 수직 해자 때문에 이 출입구는 형태상 마스가타가 아님에도 마스가타처럼 기능할 수 있다.[7] 일종의 전진기지이지만, 독립된 성으로 기능할 수 있는 데지로(出城)와는 다르게 성에 종속된 부곽으로 분류되는 시설이다.[8] 「사로왜채총도」에서는 현재의 순천왜성을 '서로행장대왜채'로 표기하고 있고, 그와 별개로 '순천'이라고 써 놓은 표지에 왜성의 모양을 그려넣어 구분하고 있다.[9] 우측에 섬진강구(蟾津江口)가, 하단에 노량도(露梁島)와 남해왜성이, 좌측에 순천왜성이 보인다.[10] 왜성은 조선에서 증성(甑城)이라고 자주 표현했는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城의 일본어 훈독음인 しろ가 '시루'로 변용되었다는 설, 왜성의 형태가 떡시루처럼 켜켜이 쌓인 형태를 하고 있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 의견이 엇갈린다. 실제로 왜성이 있던 지역에는 증(甑)이 붙은 곳이 많은데, 울산왜성(내증성), 서생포왜성(외증성), 부산포왜성(증산), 양산왜성(증산), 송진포왜성(증봉), 장문포왜성(증성) 등지가 있다.[11] 구릉지 위의 계단 모양의 구조물이 순천왜성 주곽부이다.[12] 제3외곽부에서 주곽부를 바라본 모습. 구릉지 위에 주곽부가, 그 아래에 제1외곽부와 제2외곽부의 출입구 석축이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에서 깊게 구덩이처럼 파인 부분이 원래 바닷물이 들어왔던 해자로, 촬영 시점에서 이미 매립되어 농경지로 쓰이고 있었다.[13] 해자의 북측 모습.[14] 주곽부의 근경. 천수 기단이 두드러진다.[15] 제2곽의 주출입구를 내부에서 본 모습.[16] 제1곽 서측 출입구에서 천수 기단을 바라본 모습.[17] 천수 기단 위에서 남측을 바라본 모습. 바로 앞이 제1곽, 그 뒤의 Γ자 기단은 제2곽의 모서리 망루 기단이다.[18] 천수 기단 위에서 제1곽의 남측 출입구를 바라본 모습.[19] 2단으로 된 천수 기단의 모습.[20] 특히 천수 기단의 줄눈 형태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