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이지(高台寺) 소장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초상[1] |
코바야카와 가문의 도모에(巴) 가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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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름 | 木下秀俊 - 羽柴秀俊 - 小早川秀俊 - 小早川秀秋 - 小早川秀詮 |
독음 | 키노시타 히데토시 - 하시바 히데토시 - 코바야카와 히데토시 - 코바야카와 히데아키(秀秋, 秀詮) |
별칭 | 킨고(金吾),[2] 킨고 쥬나곤(金吾中納言), 치쿠젠 쥬나곤(筑前中納言),[3] 오카야마 쥬나곤(岡山中納言).[4] |
생몰년 | 1582년 ~ 1602년 10월 18일 (향년 20세) (음력) 12월 1일(양력)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다이묘. 코바야카와 가 당주. 도요토미 일문의 세이카게 가격 쿠게나리 다이묘로, 탄바 카메야마, 북규슈 치쿠젠, 에치젠 등지의 영주를 지냈으며, 1600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수행, 그 공으로 초대 오카야마 번주가 된 인물이다.
2. 생애
2.1. 도요토미의 귀공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내 키타노만도코로 네네의 오빠인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다섯 번째 아들. 생년에 대해서는 이전에는 1570년대 말부터 1580년대 초까지 넓은 범위의 추정이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1595년에 쓰여진 무라야마 서장에서 "오(午)년에 태어나 14살이 되셨다"고 언급한 것을 근거로 하여 1582년생설로 굳어졌다. 탄생 이후 어린 나이로 친자식이 없던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고, 그 시점은 늦어도 1585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 해에 히데요시의 서장에서 그의 양녀였던 고우히메[5]와 함께 언급되기 때문. 이 이전 시점 히데요시에게 양자 히데카츠[6]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가 이 시기에는 병을 앓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에, 이 당시 킨고는 히데요시의 유일한 양자였다고 할 수 있다.1588년 히데요시의 저택인 주라쿠테이에 덴노가 행차하였을 때 덴노와 도요토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다이묘들의 서약서를 덴노의 대리로서 받는 등 도요토미의 후계자, 주요 일족으로 대접받았다. 이후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탄생하자 후계자의 자리는 상실하였으나 히데요시의 양자 자리는 유지하였고, 탄바 카메야마를 영지로 받았다. 이는 히데토시를 츠루마츠를 보좌하는 공가이자 일문 다이묘로서 성장시키려는 히데요시의 의중이 담겨있었다고 할 수 있다.
2.2. 코바야카와 가에서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이듬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다.[7] 1595년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숙청될 때 그에 연루되어 탄바의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 탄바 몰수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양부 타카카게의 은거에 의하여 그의 영지인 북규슈 치쿠젠을 상속받기에 탄바의 영지를 도요토미 정권에서 회수한다는 형태를 취했지만, 당시의 서장을 살펴보면 당초의 타카카게 은거 - 히데토시의 상속 예정보다 빠른 속도로 급히 이루어진 일임이 확인되어, 사실상 히데츠구 사건에 연좌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탄바를 상실하고 코바야카와 가를 상속하는 것으로서 히데토시의 도요토미 일족 다이묘로서의 지위는 소멸하였다. 그러나 이 이후에도 히데아키는 도요토미 정권 내에서 다이묘들 중 상당한 상위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회측의 기록에서 명의 사신을 히데요시와 함께 응접하였던 최고의 다이묘 여섯 명의 이름에 다른 세이카게 다이묘들[8]과 함께 킨고도노(金吾殿), 즉 히데아키가 있었던 것이 그 근거. 1597년 타카카게가 죽은 후 이름을 잘 알려진 히데아키(秀秋)로 바꾸었다.제1기 치쿠젠 다이묘 시절 히데아키의 정치는 히데아키가 아닌 가로 야마구치 무네나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는 히데요시에 의하여 히데아키의 가신으로 보내진 인물로, 도요토미 정권의 행정관 중 하나였다. 그는 검지를 실시하고 연공을 조정하는 한편 치쿠젠, 그중에서도 특히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던 하카타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서 만들려고 한 히데요시의 의향을 철저히 반영하여 하카타 마치슈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통제를 강화하여 마치슈를 압박하였다. 이외에도 전쟁의 기지로서 철저한 전시 태세로 영지를 운영해나간 무네나가에 대하여 히데아키는 상당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히데요시 역시 양자의 대립을 파악하고 있었고, 이는 이후 정유재란 시기 히데아키에게 무네나가의 뜻에 따를 것을 명령하는 근원이 된다.
2.3. 정유재란과 그 후
그 후로는 정유재란에 참가하였으며, 일부 기록에서는 정유재란의 총대장으로 기록되어있다. 전후 30만 석의 치쿠젠에서 15만 석의 에치젠으로 전봉되었다. 히데아키가 물러난 치쿠젠은 도요토미 정권의 부교 관리지가 되었다. 이 전봉의 구체적인 이유는 불명확하다. 2차 사료, 군키모노 등에서는 울산성 전투 때 총대장의 신분임에도 위험하게 전선에 직접 나아가 싸웠기 때문에 "대장의 본분을 잊었다"며 히데요시에게 질책당하고 전봉된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러한 일로서 전봉되는 것은 다소 상식적이지 않으며, 히데아키의 울산 참전 여부 자체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상당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아키의 이봉은 정유재란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파악된다. 이에 대한 시각들을 살펴보면, 당시 히데아키와 무네나가의 대립은 완화되지 않고, 양자의 대립이 심화되자, 히데요시가 자신의 의중에 따르지 않는 히데아키를 전쟁의 총지휘관역에서 배제하는 한편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영지인 치쿠젠에서도 배제한 것이라는 시각, 히데요시 사후 조선에서의 철수가 완료된 이후 치쿠젠 영지로 복귀하였다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군의 철수 거점인 치쿠젠을 도요토미 정권 측에서 직접 관리하며 제장들의 귀환을 감독하기 위해 히데아키를 에치젠으로 이동시켰다는 시각, 일본군 철수 목적이 아닌 장기화된 전쟁의 병참 기지로서의 안정화를 위하여 그에 반대하던 히데아키를 배제하고 치쿠젠을 정권에서 직접 관리하려 시도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어느 것이던 정유재란과 연관이 있으며, 히데요시가 히데아키를 견제하려 한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이봉으로 인하여 히데아키의 원 가신단은 해체, 일부는 히데아키를 따라 에치젠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주가인 모리 가문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일부는 이시다 미츠나리 등 도요토미 정권의 인물들의 치하에 들어갔다. 지속적으로 히데아키와 대립하여 결국 이봉의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는 가로 야마구치 무네나가의 경우 완전히 독립 다이묘로서 카가 다이쇼지 성주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죽고 전쟁이 완전 종결된 뒤 히데아키는 본래 영지였던 치쿠젠의 다이묘로 복귀, 농민의 안정화를 꾀하는 한편 야마구치 무네나가가 탈취하였던 하카타 상인들의 특권을 다시 그들에게 부여하고 간섭 정지를 선포하여 상업 증진을 도모하였다.
2.4. 동서군 분열과 세키가하라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도요토미 정권은 정권 핵심 인물들(십인중)에 의한 합의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 시기 히데아키는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도요토미 일문으로서 고다이로에 준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일례로, 덴노의 퇴위 의사를 알리는 칙사 파견의 대상에 대하여 쿠죠 카네타카(九条兼孝)가 일기에 기록한 것을 보면 도쿠가와, 마에다 등 고다이로와 함께 히데아키에게 칙사가 보내졌다고 나온다. 또한 이에야스의 참내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에야스의 뒤를 이어 히데이에, 히데아키가 봉헌한 것을 언급하고 타 다이묘들의 봉헌을 기록하여 히데아키의 위치가 여타 다이묘들 이상이었음을 보여준다.한편, 도요토미 정권 내부는 점차 혼란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시다 미츠나리와 마에다 겐이, 마시타 나가모리, 나츠카 마사이에(도요토미 삼봉행), 고니시 유키나가와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아사노 요시나가[9] 등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오대로 사이에서도 1인자라 할 수 있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 모리 테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카게카츠 사이의 갈등이 격발되었다. 두 갈등은 서로 얽히게 되어, 구로다, 후쿠시마, 아사노, 가토, 호소카와 등이 도쿠가와와 연합하고 이시다, 봉행중, 고니시와 반 도쿠가와 파가 연합하는 형세가 나타났다.[10] 이러한 갈등 속에서 히데아키는 특정 진영에 속하여 움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1600년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을 이끌고 동진하자, 오사카 일대에서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테루모토, 도요토미 삼봉행과 이시다 미츠나리는 거병하였다(아이즈 정벌과 서군 거병). 히데아키는 이 시점에 서군에 가담하였고, 토리이 모토타다가 지키고 있던 후시미 성을 공격하는 데 주력으로서 군을 이끌고 참여하는 한편 다이고, 오츠, 야마시나 등 기나이의 요충에 군을 전개, 해당 지역들을 제압하였다. 적어도 서군 거병 초기에는 히데아키는 오사카측의 주력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이후 히데아키의 정확한 움직임은 명확치 않다. 확실한 것은 이 시기 히데아키에게 동군 측에서 접근해온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구로다 나가마사와 아사노 요시나가가 있다. 이들은 동군이 키타노만도코로 네네를 위하여 싸우고 있다고 주장하며 히데아키에게 에도측으로 돌아설 것을 요청하였다. 히데아키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동군에 가담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이 이루어진 시점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세키가하라의 본 전투 이전이라는 것만에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음력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동서군이 격돌하는 결전이 벌어졌다. 시라미네 쥰(白峰旬) 박사의 당대 서장, 일기에 근거한 연구에 의하면, 당일 히데아키와 오사카 측, 에도 측의 움직임은 다음과 같다.
1. 히데아키의 에도 측 가담을 오사카 측이 확인, 오가키 성을 나와 히데아키의 토벌에 나섬.
2. 이에야스, 오사카 측을 쫓아 세키가하라로 진군.
3. 개전. 히데아키, 오오타니 요시츠구를 격파. 에도 측과 함께 오사카측에 맹공.
4. 정오경, 오사카 측 궤멸. 2시간 만에 세키가하라 전투 종결.
결전 후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에게 오사카 측을 격파하는 데 크게 공헌한 것에 대하여 감사받으며 그 자식인 히데타다에 맞먹는 대우를 약속받았다. 그 뒤 미츠나리의 본거지 사와야마를 공격하는데 참여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를 보여주는 1차 사료는 없다. 문서상에 나타난 히데아키의 이후 행적은 우키타의 본거지인 비젠 공격이다. 일전 우키타 소동 때 우키타 히데이에와 반목한 비젠의 무사들을 포섭한 히데아키는 전 우키타령을 무난하게 접수하였다.
2.5. 오카야마 번주
동서군 전쟁의 공적으로 히데아키는 옛 우키타의 영지인 비젠, 미마사카로 가증전봉, 오카야마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영지에서 그는 농업 진흥책을 시행하는 한편 오카야마 성에 해자를 정비하고[11] 구루와를 정비하여 조카마치를 확대, 정비하였다. 누마 성(비젠 카메야마 성)의 천수를 오카야마로 옮겨 망루로 사용하게 하기도 하였다.1601년, 히데아키는 히라오카, 이나바, 마츠노, 스기하라 등 중신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행하였다. 숙청 과정에서 스기하라는 처벌, 죽임을 당했고, 이나바, 마츠노, 히라오카는 출분하였다. 이는 중신 세력들의 권력이 다이묘인 히데아키의 권력을 위협하였기 때문이었으며, 에도 초기 여러 번주들에 의하여 행해진 권력 집중 정책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중신 세력을 일소한 뒤 히데아키는 군의 법도를 정비하고, 세키가하라 이후 낭인이 된 무사들을 등용하고, 농촌 진흥을 실시하고, 검지를 통하여 정확한 영지의 생산력을 파악하였다. 히데아키의 이 개혁 정책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오카야마 번의 경제, 군사는 모두 안정되었고 히데아키의 권력 역시 그의 측근들에 의하여 굳건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 개혁은 모두 완벽히 끝을 맺지 못했다.
1602년, 히데아키는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스승이던 쇼고인 도쵸의 글에 의하면 매사냥을 나갔다 돌아온 뒤 갑작스럽게 쓰러졌고, 이튿날 상태가 급속히 악화, 그 다음날에는 상태가 완화되었으나 새벽 결국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3. 참고 문헌
- 구로다 모토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戎光祥出版, 2017
- 구로다 모토키, "근세 초기 다이묘의 신분질서와 문서", 戎光祥出版, 2017
- 미츠나리 쥰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 히데아키", 미네르바, 2019
- 구로다 모토키, "하시바를 칭한 자들", 카도카와 선서, 2016
4. 기타
-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름[12]이 종종 보이는 무장. 물론 조선측이 첩보로 얻은 정보가 대부분이라 다소 부정확한 내용도 많이 보인다. 그 예 중 하나인 정원이 비변사가 항왜를 공초한 것으로 아뢰다의 경우에는 가족 관계부터 틀려놓았다.[13]
- 죽은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3년 안에 천벌이 내릴 것"이라고 저주 때문에 앓다가 죽었다는 설은 있었지만 이건 물론 야사다.[14] 이외 '길에서 시비가 붙어서 칼에 베여서 죽었다', '식사를 나르다가 엎어버린 코쇼[15]에게 할복을 강요하다가 거꾸로 베여서 죽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방침 때문에 암살당했다', 낙마설 등이 사망의 원인으로 주장되나 일단 당대 기록상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은 쇼고인의 기록처럼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2명의 형이 모두 병몰했기 때문에 '유전병이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것은 아니었는가'하는 설이 있다. 술로 인한 주독으로 죽었다는 의견이 현대에는 있다.
- 자신에게 훈계를 하는 가신을 베어죽이거나 히데아키의 인물됨에 실망하여 재야로 내려갔다는 가신이 있다는 점하고 인기가 낮다는 점[16]에서 능력 면에서도 혹평을 받아왔으나 실제로 히데아키의 지배령에서는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었다는 점과 전공을 세운 기록이 있기 때문에 창작 작품이나 후세의 평가만큼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 정설. 또한 기록에 따르자면 히데아키의 죽음을 백성들이 몹시 아쉬워했다는 부분이 남아있으며 가신에 대한 이야기의 경우 전형적인 다이묘들의 권력 장악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요즘 학계의 주류 의견이다.
-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와카 등을 배우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는 말도 있고 특히나 천하를 갈랐지만 정작 다수의 대다이묘들은 천하를 가르는 전투라고 생각조차 못했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렇게 넓은 영지를 지닌 다이묘는 아니면서도 병력을 정말 미친듯이 긁어모아 무려 15,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요충지에 진을 쳤다. 정말 다수의 병력이다보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는 참전을 댓가로 비젠과 미미사카 2개국을 포상으로 받을 것을 약속받았고 이시다 미츠나리로부터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의 자리와 함께 긴키 지방 2개국을 포상으로 받을 것을 약속받았던걸 보면 확실히 그냥 범용한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일본 내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군을 치켜올리게 되었기에 코바야카와는 서군을 배신했기 때문에 부당한 비난까지 듣게 된 기색이 강하다. 어쨌거나 코뱌아카와 히데아키에 대해서는 다른 다이묘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연구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서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 따라서 게임이나 소설의 인물됨은 어디까지나 후세의 창작이다.
- 평생 친자식을 얻지도 못하고 양자를 들이지도 못했기 때문에 전국시대 코바야카와 가문의 계보는 히데아키 본인을 끝으로 단절되었다.
5. 대중매체에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기타 창작물[1] 이 초상화는 사후 그려진 것으로, 그의 양어머니 코다이인이 히데아키를 추모하고자 하여 그려진 것이다. 초상화의 히데아키는 유년기의 모습에 가깝다.[2] 그의 관위인 사에몬노카미의 당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구로다 모토키 박사는 아명이라 주장하였다.[3] 북규슈 치쿠젠에 영지를 두고 있던 시절.[4] 세키가하라 전투의 공적으로 오카야마에 전봉된 이후.[5]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 우키타 히데이에의 부인.[6]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7] 히데아키를 양자를 받은 것으로 타카카게의 도요토미 정권 내에서의 지위는 더욱 상승, 최종적으로는 쥬나곤의 관위에 올라, 코바야카와 가문은 세이카게에 해당하는 가격(家格)을 얻는다.[8] 이후 히데요시의 죽음 직전 오대로가 되는 인물들.[9] 아사노 나가마사의 아들.[10] 하지만 이 역시 확고한 적대 양상이었던 것은 아니어서, 삼봉행과 테루모토는 이에야스에게 협력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고, 마에다 토시나가의 주도에 의하여 벌어졌다고 생각되어 이에야스가 카가 침공을 준비하는 상황까지 치달았던 이에야스 암살 미수 사건 당시에는 미츠나리조차도 이에야스에 협력하였다.[11] 평민뿐 아니라 무사들까지 정비에 참여시켜 20일만에 빠르게 완성시켜 현재 그 해자는 "20일 해자"로 불린다.[12] 엄밀히 말하자면 별칭인 '킨고'나 '치쿠젠 쥬나곤'으로 나온다.[13] 삼하가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데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의 아들이 아니다. 타카카게는 딸이 없다. 1595년 당시 히데아키는 14살이었다. 하지만 모든 부정확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이 히데아키인걸 알 수 있는 것은 코바야카와와 관련되어 있고 축전주라는 사실을 통해서다.[14] 요시츠구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보이는 것은 17세기 말~18세기 초 성립된 군키모노(군담 소설)들이다.[15] 시중을 드는 역할을 가진 비교적 신분이 낮은 무사 등의 자식.[16]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이 인기가 높은 무장은 낮은 무장의 공로까지 흡수하는 경우가 있다. 사나다 노부시게와 모리 카츠나가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