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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9 20:22:44

도요토미 츠루마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Toyotomi_Tsurumatsu.jpg
豊臣鶴松(풍신학송)
서력 1589년 7월 9일 ~ 1591년 9월 22일

1. 소개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소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측실부인 요도도노의 장남으로, 아명은 스테(棄).[1] 비록 서자였으나[2] 히데요시가 53세라는 나이에 얻은 늦둥이 장남이였기에 금지옥엽으로 자랐다.

에도 시대 때부터 현재도 무정자증을 의심받고 있는 히데요시라, 츠루마츠도 요도도노가 다른 남성과 불륜으로 얻은 자식이라는 이 있다.[3]

2. 생애

1589년에 야마시로국의 요도 성에서 태어났고,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가 오사카 성에서 길렀다.

1590년 음력 11월 7일, 히데요시는 조선통신사(황윤길, 김성일)들을 접견하는 자리에 츠루마츠를 대동했다. 중간에 츠루마츠가 오줌을 싸자 이를 본 히데요시는 크게 웃었는데, 통신사는 이를 보고 불쾌해했다.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흑포(黑袍)[4]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5]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 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 3월 1일 정유 3번째 기사.

지금도 외교 사절을 만나는 공식석상에 아기를 대동시키고[6] 심지어 오줌까지 싸 난감해지는 경우는 예의가 아닌데, 하물며 당시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츠루마츠를 데려온 그 자리에서 예복도 아니고 편복, 즉 평상복을 입고 들어왔었다. 쉽게 말해 외교 사절로 온 조선 통신사를 깔보는 행위를 한 것이었다.[7][8] 조선으로 치면 조선 국왕이 곤룡포가 아니라 그냥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입는 한복(왕에게는 평상복)을 입은 채로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거나 다름없다.

하여튼 이렇게 히데요시가 아끼던 아들이었으나, 츠루마츠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여 병치레가 잦았기에, 아버지 히데요시는 사찰에 기부를 하고 전국적으로 기도회도 올리고 지극정성을 쏟으면서 병약한 아들을 걱정하기도 했다. 허나 병세가 악화와 완화를 반복하다가 결국 음력 1591년 8월 5일에 2년 2개월(3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이때 히데요시는 촌마게를 자를 정도로 아들의 죽음을 크게 슬퍼했고[9], 수하 다이묘들도 분위기 파악해서 촌마게를 잘랐으며 운쇼우인을 세워 아들의 명복을 빌게 하고 이 절에 여러 물품을 하사했다. 또 츠루마츠의 죽음은 생모인 요도도노와 정실부인 코다이인 사이의 갈등을 고조시키게 된다.

츠루마츠가 사망하면서 더이상 후계자를 얻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포자기한 히데요시는 3개월 후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양자로 삼고[10], 1개월 후에는 후계자로 지명하고 관백 자리를 물려주고 후계자 계승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가 요도도노가 다시 임신을 하고 차남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으면서, 도요토미 집안의 후계자 구도는 크게 흔들리게 된다.

3. 대중매체에서


[1] '버린 자식'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개똥이'같은 이름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영아 사망률이 높던 당시 널리 퍼져있던, 갓난아기의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오래 산다는 미신에서 붙여졌다.[2] 다만 히데요시가 평민 출신이라 조강지처이자 정실이던 네네 역시 평민 출신이였고, 오히려 생모 요도도노가 귀족이였기 때문에 혈통으로만 따지자면 적자에 가까웠다.[3] NHK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는 이런 히데요시의 불안과 그런 소문을 자신의 집 담장에 적은 놈을 찾아내 죽이려는 에피소드를 다룬 화가 있다. 히데요시도 자신이 씨 없는 수박인 줄 알고 있고, 츠루마츠가 제 자식이 아니라는 의심을 한다. 고우 ~공주들의 전국~에도 나온다.[4] 소쿠타이 중 흰색을 제외하면 검은색이 가장 높은 관직을 상징하는 색이다. 그래서 히데요시의 관백 시절 초상화나 이에야스 등 후대 쇼군들, 과거 무로마치 및 가마쿠라 막부의 모든 쇼군들 초상화를 보면 다 흑색 소쿠타이를 입었다.[5] 예나 지금이나 고급 주류는 증류주였고, 조선 시대에는 청주나 삼해주가 명절 행사와 연회나 제사 때에 쓰이는 고급 술이었다. 그런데 외국 사신에게 맑지도 않은 싸구려 술을 내놓은 걸 예의 없다고 깐 것.[6] 물론 이후 만찬 등에선 아이를 대동하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분위기 전환용 등으로 권장되는 경우도 있지만, 외교 사안을 다루는 공식석상에 그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 꼬마 아이가 아니라 아기다.[7] 굳이 변호하자면, 히데요시의 출신이 평민임을 고려해 단순히 궁중 예절을 잘 몰라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후 임진왜란을 일으킨걸 보면 이때 예의를 차렸든 안차렸든 히데요시는 이미 조선을 침략할 궁리를 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만.[8] 작품에 따라서는 당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얀 소쿠타이를 입고 사모형 관모인 도칸무리를 쓴 격식있는 모습으로 조선 통신사를 맞이하는 걸로 묘사되기도 하는데(대표적으로 고우 ~공주들의 전국~징비록) 이는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에는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통신사를 맞이해 술을 나누다가 갑자기 방에 들어가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아이를 안고 나왔다고 기록된 것을 고증한 것이다. 다만 츠루마츠를 안고 나오는 장면에서도 여전히 소쿠타이를 입고 있으면 그건 고증오류다.[9] 오죽하면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진 이유가 1591년 츠루마츠를 잃은 히데요시가 슬픔에 정신이 나가(...) 다이묘들도 전쟁터에서 아들 잃는 슬픔 좀 느껴보라고 일으킨 거 아니냐는 설까지 있을 정도다. 물론 이전부터 외국(심지어 태국, 인도, 포르투갈 사신까지 건드린다.)에 입조 안하면 쳐들어간다고 엄포를 놓던 히스테릭한 히데요시를 고려하면, 츠루마츠가 사망하면서 더 맛이 갔을 순 있으나, 그 이전부터 침략 기회는 꾸준히 엿보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10] 또 다른 양자였던 우키타 히데이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명목상) 총사령관에 임명, 조선을 점령하고 조선왕을 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