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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5 18:24:01

후쿠시마 마사노리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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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sanori_Fukushima.jpg
후쿠시마 마사노리
福島正則 (ふくしま まさのり)
1561년 ~ 1624년 8월 26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8px-Alex_K_Hiroshima_Fukushima_kamon.svg.png
후쿠시마 벗풀
福島沢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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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의 필두였다.

칠본창 창설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는 가토 기요마사보다 입지가 더 좋았으나, 임진왜란 직전부터 칠본창 중 가장 고쿠다카가 높았던 사람은 가토 기요마사(24만석)였기에 임진왜란의 선봉장을 맡지는 못하였다. 당시 후쿠시마는 11만 3천석으로 2위였다. 결국 칠본창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은 가토 기요마사로 52만 석이 되었다. 물론 후쿠시마는 본인이, 가토는 아들이 개역 당해서 몰락하였다. 칠본창 중 최후의 승자는 5만 3,500석을 받고 가문을 잘 유지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이다. 와키자카가 초기에는 "이 따위 놈들이랑 동급이라니"라는 소리를 들으며 후쿠시마에게 까인 것을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는 결과가 된 셈이다.[1]

임진왜란 때는 가토 기요마사가 2군 대장,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5군 대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가토 요시아키는 수군장수로 참전한다.[2]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국에 돌아온 이들 젊은 과격파 장수들인 무단파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회유하는데, 리더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주 타켓으로 삼았다. 결국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설득에 성공하자 자동으로 기타 장수들을 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붙어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2. 생애

오와리[3]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이치마츠(市松)였다. 일설에 의하면, 어머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모로, 어릴 적부터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히데요시의 저택에 거주하며 무사 수업을 받으면서 무술을 익혔다고 한다. 창을 잘 다루었고, 용맹함으로 이름을 날렸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공을 세운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공을 세운다. 1586년 규슈 정벌 후 이요 이마바리의 다이묘가 되었고, 1595년 도요토미 히데츠구 사후 오와리 키요스로 옮겼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제5진의 지휘관을 맡아 충청도경상북도 일대를 공격하였으며, 그 공으로 오와리국의 영주가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영천성에서 의병장 권응수와의 영천성 전투에서 패해 권응수의 의병 부대들에게 영천성을 빼앗기기도 했었고, 조선군, 명나라군과의 대규모 전투에 참전한 전적이 별로 없어 가토 기요마사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하였던 다른 칠본창 계열 일본군 장수들과 달리 한국 대중들에게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그리 유명하지 않다. 이 때문인지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도도 다카토라, 소 요시토시등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던 다른 일본군 적장들은 국내의 임진왜란 사극 드라마/영화 작품들에서도 자주 나오는데 이 사람은 잘 나오지 않는다. 물론 2015년 징비록이나 2016년 임진왜란 1592처럼 그간 출연한 적이 없었던 우키타 히데이에가메이 고레노리,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조연이나 단역으로나마 출연하였던 것처럼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국내 임란 사극에서 출연할 가능성도 없지만은 않아 보인다.[4]

그러나, 히데요시가 죽은 뒤 벌어진 도요토미 가의 가신들 사이의 대립은 깊어졌고, 무단파였던 마사노리는 절친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1599년 3월 관료파의 리더 이시다 미츠나리의 저택을 습격하기도 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 때까지만 해도 야심을 감추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야 말로 어린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리님을 지켜줄 것이라고 잘못 판단해서(라기보다는 사실 이시다 미츠나리에 대한 원한 때문에) 동군 편에 섰다.[5] 결과 동군의 승리에 기여한 전공으로 히로시마의 49만 석의 영주로 영전하기는 했다.

영주로 있는 동안에는 히로시마 성을 증축하고, 상업을 번창하게하고, 히데요리가 있던 오사카와 히로시마를 잇는 길을 재정비해서, 결과 도요토미 가의 재정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어린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받드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충신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야심을 드러내고, 1603년 정이대장군(쇼군)이 되었어도, 히데요시의 중신들에게 주군은 히데요리였다. 16살이 된 히데요리가 중병으로 쓰러졌을 때는 눈치보지 않고 병문안을 하러 달려갔다.

1611년 3월 28일 니조 성에서 이루어진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첫 대면식에서는, 옆에서 보디가드 역을 한 가토 기요마사를 지원하기 위해, 1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오사카 성에서 대기, 무슨 일이 생기면 이에야스를 처단하려고 했다. 이런 행동들은 이에야스의 심기를 건드렸고, 오사카 전투 후에는 도요토미 가의 충신들은 몰락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1614년~ 1615년 오사카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모반을 일으킬 거라는 견제를 받아서, 에도 성에서 칩거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마사노리가 할 수 있던 일이라고는 오사카 성 내에 비축해뒀던 자신의 영지 소유의 쌀 8만석을 가져다 쓰는 것을 묵인했던 정도다. 한국에서는 쌀을 보냈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그 즉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추궁을 당하고 본인 목 날아가고 집안 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사노리 대신 아들이 차출되어서 오사카 전투에서 이에야스 편에 서서 참전해야 했다.
1619년 태풍으로 인해 히로시마성의 상당 부분이 파손되었다. 당시 무가제법도에 의하면 이는 에도에 보고를 한 이후 허가가 떨어져야 성의 보수가 가능했으나 마사노리는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보수에 착수했다. 이미 이전에 1국1성령을 어긴 전적이 있었던 마사노리였기에 마찰을 피하지 못했고 직후의 에도로 볼모를 보내는 것을 거부한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히로시마번을 몰수당하게 된다.[6][7] 마사노리가 전봉된 뒤 히로시마번은 아사노 가문이 다스렸다.

이후 마사노리는 시나노 가와나카지마[8]의 소영주(4만 5천석)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막부는 시신 화장을 명분삼아, 실제로는 재기를 막기 위해 기존 영지를 몰수했다. 다만 그 아들인 후쿠시마 마사토시를 중앙으로 불러들여 3,000석의 영지를 갖는 하타모토로 삼았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에도 막부 시대 고위 무사의 지위를 메이지 대까지 유지하였다.

내정에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던 가토 기요마사와는 달리 100% 무장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다이묘 재직 직후 모든 영지를 측량하고, 현재 명품으로 꼽히는 히로시마의 빈고 돗자리 생산을 독려했다고 하니 내정에 완전히 젬병은 아니었던 듯 하다.

그의 출세와 몰락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1582년 야마자키 전투 - 500석
1583년 시즈가타케 싸움 - 5,000석(다른 칠본창 멤버는 각 3,000석)
1587년 히데요시 큐슈정벌 - 이요(伊予)11만석 다이묘
1595년 임진왜란 - 오와리 24만석 다이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 아키 및 빙고 49만 8,200석 다이묘(이후 51만 5,800석까지 증가)
1619년 히로시마성 무단수리 - 시나노 4만5천석 감봉
1620년 아들 타다카츠 사망, 2만5천석 막부에 헌납(2만석)
1624년 사망, 막부의 허락없이 시신을 화장한 죄로 나머지 2만석 몰수
아들 마사토시, 3,000석짜리 하타모토로 몰락[9]

3. 여담

4. 대중 매체에서

기본적으로 가토 기요마사와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으며,[15] 가토에 비해 좀 더 와일드하거나 무식해 보이는 이미지가 강하다. 시바타 카츠이에와 더불어 창작물에서 여성화가 좀처럼 되지 않는 유이한 센고쿠시대 장수이기도 하다. 하긴 둘다 너무 마초남 이미지가 강해서 그럴수도 있겠다.

NHK 대하드라마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에서 카니에 케이조가 와일드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상을 열현했는데, 역대 최고의 후쿠시마 마사노리 연기로 꼽힐정도로 명연기를 보여줬다.

4.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파일:福島市松.png 파일:福島正則2.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external/vignette2.wikia.nocookie.net/Masanori_Fukushima_%28NAS%29.jpg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전형적인 맹장. 가토 기요마사에 비해서 약간 낮은 평가를 받는다. 거기에 도요토미 가는 족경가문인데 이 인간은 기마 특기를 가지고 있어서 미묘하다. 삼국지 12에서 나왔는데 전법은 전공격강화이지만 전법이 지력에 영향을 받고있고 본인의 지력이 33이라서 조루포스가 있다.

창조에서는 가토와 더불어 히데요시의 무력 담당이 된다. 전법은 장시간 이동속도와 공격을 올려주는 '칠본창'. 가토가 칠본창 멤버임에도 불구하고 '호랑이 사냥'이라는 좋은 고유 전법을 얻음에 비해 후쿠시마 본인은 칠본창 멤버들 공용의 전법을 쓴다. 그만큼 게임 내에서 위상도 가토가 높은 격이 아닌가 한다. 독립 세력으로 나오는건 세키가하라 시나리오 뿐. 그 외에서는 오로지 히데요시의 부하로 나온다. 가토가 군웅집결에서 따로 살림차려 나오는 것과는 대조적.

1586년 이후에는 다이묘로 등장하는데, 1595년 전까지는 이요, 이후에는 오와리에 자리를 잡는다. 1586~1595년 시나리오가 별로 없어서 대개는 세키가하라 전투 전후의 오와리에서 플레이하게 된다. 동생 후쿠시마 타카하루와 창술에 능한 가니 사이조가 있어서 전투력은 갖출 수 있지만 다들 근육머리라 두뇌가 문제.

4.2. 전국무쌍 시리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후쿠시마 마사노리(전국무쌍)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3. 바사라 2

파일:external/www.visco.co.jp/f_5mb4.jpg
파일:external/www.visco.co.jp/mp5_fukusima.gif
우랴아아아아!!! 이 공격 받아봐라!!

중간보스들 중 1명으로 나오는데, 남미 출신을 연상케 하는 와일드한 모습으로 나온다. 가토 기요마사 대신 나오며, 그의 기체의 강화판을 타고 나온다.

4.4. 지휘봉의 행방

파일:external/images.wikia.com/Masanori-saihai.jpg
비주얼 신장 180cm, 비주얼 연령 43세, 취미는 단련, 좋아하는 음식은 단 맛 음식.

오랫동안 도요토미를 모셔왔지만 이시다 미츠나리를 증오해 동군에 붙었다. 목표를 향해 무작정 돌진하는 성격 탓에 게임 내의 여러 인물로부터 '멧돼지'라 불린다. 도요토미의 천하를 위해 무(武)를 통해 진력해왔으나 천하가 안정되자 점차 미츠나리처럼 지(知)에 능한 자가 중용되고 자신은 푸대접을 받자 이것이 모두 미츠나리의 참소라 여기고 미츠나리를 미워하게 되었다. 있을 곳이 없어지는 것을 불안해 해 도쿠가와 측에서도 집요하리만큼 열심히 싸우고 있다.

4.5. 태합입지전

여기서도 전형적인 맹장. 가토 기요마사보다 전투쪽에선 확실히 앞서나 지모가 바닥인게 조금 걸린다. 시바타 카츠이에의 다운그레이드 버전 느낌. 내정쪽 기능은 아예 전멸인 것도 아쉬운 점.

4.6. 세키가하라(2017)

세키가하라 전투가 배경인 영화이기에 나오는데 다혈질로 나온다.

5. 참고 자료


[1] 원래 와카자카는 친(親) 도쿠가와 성향이었으므로 많은 다이묘들이 개역당하는 상황에서도 다이묘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면 후쿠시마는 비록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으로 참전했지만 이후로는 친(親) 도요토미 편에 섰다가 크게 대였다. 가토는 후쿠시마만큼은 아니었어도 친(親) 도요토미 성향이라 당대에는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결국 아들 대에는 꼬투리를 잡혀 개역당했다.[2]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이순신에게 패했다. 애시당초 수군 장수들 중에서 이순신에게 당하지 않은 장수들이 드물었다.[3] 지금의 아이치현 서부[4] 이 중 타치바나 무네시게노량: 죽음의 바다시마즈 요시히로의 부하장수이자 중간보스로 등장하였다.[5] 이야에스가 에도 성에서 도요토미 가신들을 포섭하기 위해 쓴 120여통의 편지 중 후쿠시마 마사노리한테 보낸 편지만 10통이 될 정도였다. 심지어 하루에 3통을 보낸 적도 있다고 한다. 명분을 내세워서 꼬시고 영지를 주겠다고 꼬시고 하는 등 가장 신경을 쓴 상대였다.[6] 이는 에도 막부에서 히데요시의 손에 자란데다가 오사카 전쟁 당시와 그 이후의 행적이 친 도요토미였던 마사노리를 막부가 쳐낸 것. 그 때문에 가이에키를 당한 대다수의 다이묘들을 처벌했던 명분이 후사문제인 것에 비해 성의 무단보수가 공식적 처벌사유가 된 것이다. 같은 히데요시파 동료였던 가토 기요마사나 가토 요시아키라가 철저히 몸을 사려 그나마(?) 후대에 이르러 가이에키당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마사노리라는 남자의 경솔한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7] 오사카 전쟁 이후 50만석 이상의 대영주가 가이에키당한 것은 총 5번이다. 히데타다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후쿠시마 마사노리, 모가미 요시아키의 아들인 모가미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 가토 요시히로, 그리고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차남 도쿠가와 다다나가[8] 신겐과 겐신이 자웅을 겨룬 주무대로 잘 알려져 있는 곳.[9] 그나마 가토 기요마사보다는 나은게, 가토 집안은 아예 영지를 모두 몰수당하고 막부 시절 무사 지위를 유지했는지조차 의문인 신세로 전락해 후손만 겨우 이어져 오는 반면 이쪽은 고위 무사인 하타모토로 남아 권력을 유지했다. 그리고 에도 시대에 있어서 막부직속이면서 봉록이 천석 이상인 하타모토 집안은 다이묘와 동격으로 놀았으니 영향력도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10] 히데요시의 어머니이며 히데요시가 극진히 섬겼다고 한다. 마사노리에게는 할머니가 됨.[11] 몇 대 전의 쇼군들에게서 대대로 내려온 엄청난 이력을 가진 무기였고, 주군 히데요시에게 친히 하사받은 아주 귀중한 물건이었다. 그걸 주폭행위를 하다가 잃은 것.[12] 오다이는 마츠다이라 가문에서 이혼당한 뒤 히사마츠 토시카츠라는 사람과 재혼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사마츠의 자식들을 형제처럼 여겨서 자기 구성인 마츠다이라를 하사하고 후대했다.[13] 에도 막부 초기는 그야말로 무단 통치가 행해지던 시절로, 도쿠가와 가문의 지배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어떻게든 다이묘들의 트집을 잡아서 영지를 몰수하거나 가문을 단절시켜 버리는 등 대단히 폭력적이고 살벌한 시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놓고 불평을 한 건 자신을 함정에 빠뜨릴 구실거리를 주위에 흩뿌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걸 농담거리처럼 끌고 가 상황을 풀어지게 만든 것.[14] 어떻게 보면 가토가 마사노리를 곤경에 빠지게 하지 않기 위해 먼저 단속을 한 것일 수도 있다.[15] 위의 축성의 경우도 그렇고 임진왜란 때 가토의 2군이 함경도 쪽으로 진출할 때 마사노리의 5군은 후방을 맡아 2군을 지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