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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20:04:21

오사카 전투

<colcolor#fff> 오사카 전투
大坂の陣(役)
파일:오사카전투여름의진.jpg
에도시대에 그려진 '오사카 여름의 진 그림 병풍(大坂夏の陣図屏風)'
시기 1614년 겨울, 1615년 여름
장소
원인 도쿠가와 세력과 도요토미 잔존 세력과의 갈등
결과 도요토미가 멸문, 에도 막부의 일본 전역의 통치권 확립
영향 에도 막부의 안정적 통치 시작, 평화로운 에도 시대 개막
교전 세력
파일:도쿠가와 가몬.svg 에도 막부(江戸幕府)
파일:고시치노키리.svg 도요토미 군(豊臣軍)
지휘관 파일:도쿠가와 가몬.svg 도쿠가와 이에야스
파일:도쿠가와 가몬.svg 도쿠가와 히데타다
파일:다테 가문 문장.svg 다테 마사무네
파일:토도 가몬.svg 토도 다카토라
파일:이이 나오마사 가몬.svg 이이 나오타카
가타키리 카츠모토
하치스카 요시시게
아사노 나가아키라
이케다 타다카츠
우에스기 카게카츠
나오에 카네츠구
사타케 요시노부
마에다 도시츠네
마츠다이라 타다나오
파일:고시치노키리.svg 도요토미 히데요리
사나다 노부시게[5인중]
파일:모리 와카쓰키 가몬.svg 모리 카츠나가[5인중]
파일:쵸소카베 가몬.svg 쵸소카베 모리치카[5인중]
고토 모토츠구[5인중]
아카시 타케노리[5인중]
파일:mukaishou300.gif 오타니 요시하루
키무라 시게나리
쿠와나 요시나리
스스키다 카네스케
반 나오유키
오노 하루나가
오노 하루후사
와타나베 타다쓰
병력 164,000명(겨울)
150,000명(여름)
113,000명(겨울)
60,000명(여름)
피해 정확히 알 수 없음 정확히 알 수 없음
1. 개요2. 배경
2.1. 도쿠가와와 도요토미 세력의 대립2.2. 호코지 종명 사건
3. 전개
3.1.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3.2.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
4. 영향과 평가5. 여담6. 각종 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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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14년 겨울과 1615년 여름에 오사카 성을 배경으로 한 전투. 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은 단 2대 만에 망하게 되고, 도쿠가와 가문이 세운 에도 막부의 본격적인 치세가 시작된다. 겐나엔부를 선포한 것도 이 전투가 끝난 후이기 때문에 센고쿠 시대를 아무리 늦게 잡아도 이때를 마지막으로 본다.[6]

일본에서 주로 쓰는 용어는 오사카의 진([ruby(大坂の陣, ruby=おおさかのじん)])[7]으로 겨울의 진, 여름의 진으로 구분한다. 그 외에 오사카 정벌[8]이나 오사카의 난(大坂の亂)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주로 오사카 성 전투나 오사카 전투라 칭하며, 일본식으로 오사카의 진이라 하기도 한다.

2. 배경

2.1. 도쿠가와와 도요토미 세력의 대립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천하인의 지위를 공고히 갖춰 갔다. 1603년에 쇼군에 임명돼 에도 막부를 열면서 명실상부한 천하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큰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당시 도요토미 세력과 도쿠가와 세력 간의 복잡한 대립이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의 영토 배분에서 도쿠가와 가문과 그 직속가신 다이묘들이 얻은 것은 일본 전국의 3분의 1뿐이었다. 나머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편에 서서 서군과 싸웠지만,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심을 가진 도요토미 가신 출신의 다이묘들이 가져갔다.[9] 에도 막부를 열어서 실권을 쥐었다고는 하지만, 이에야스한테는 후견인 신분이여서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지키기 위해 따르던 히데요시의 가신들이었던 다이묘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충성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히데요리의 존재였다. 히데요리는 12살이 되면서 무럭무럭 장성하고 있는 것에 비해 그만큼 이에야스는 73살의 노령이 되었다.[10][11] 히데요리가 어린 나이지만, 도요토미 가의 영향력 자체는 남아 있어서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다이묘들과 조정의 공가들도 매년 정월에 오사카 성을 방문하였다. 이에야스의 입장에서는, 만일 자신이 여기서 이대로 죽는다면 다이묘들이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차기 쇼군으로서 따를 지에 대해 의문이 있었고 히데타다는 군사적인 능력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이라[12] 도쿠가와 가문의 미래에 대해 확실한 보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도요토미 가문을 숙청하려하나 영리한 이에야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쇼군이 된 해에 히데요시의 유언에 따라 히데타다의 딸 센히메를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면서 도요토미가를 안심시켰다.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오고쇼가 된 1605년이었다. 12살이 된 히데요리가 우대신[13]에 오르자 코다이인을 통해 신하의 예를 취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요도도노는 이를 거부했고 양자 간에 신경전이 계속된다.

1611년에 고미즈노오 덴노가 즉위하자 이에야스는 교토로 상경했고, 니조 성에서 히데요리와의 회견을 요청한다. 도요토미측에서는 역시 반대했지만 가토 기요마사아사노 요시나가 등의 노력으로 회견은 이루어진다.[14] 이렇게 겉으로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척 했지만 뒤로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하게 된다. 도요토미가 주변의 다이묘들을 압박해 포위망을 구축한 것이다. 공성을 위해 다수의 대형 철포를 제작하고[15] 외국에서 대포와 화약을 구입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이에야스는 이때 조선의 대포를 참고하여 대포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려는 시도도 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군화약 무기의 성능 면에서 우월한 부분은 조총으로 무장했다는 것이었다.[16] 당시 일본군은 실제로는 일부가 조총으로 무장하고 대부분의 전투를 이나 일본도 등의 냉병기를 쓴데 비해, 외려 조선군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명나라 군대가 대부분의 장병들을 조총으로 무장시키고 있는 등, 생각보다 화기로 무장한 정도가 낮았다. 게다가 대포는 죄다 포르투갈로부터 사들인 대포 몇 개를 제외하면 화포 제작기술이 전무한 일본이기에 자체 제작은 엄두도 못 내는 상황에다가, 히데요시 지휘 하에 견고하게 만들어진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려면 효율적인 공성병기 대포가 필요했기에 대포제조 국산화에 열을 올리고자 한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해서 간신히 일본 기술자들이 대포를 만들어서 이에야스 앞에서 시연을 하게 됐는데, 그 대포의 구조가 너무 부실해서 포신 내부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했다는 거다. 당시 이에야스는 드디어 일본의 화포 기술이 첫 발을 뗐다는 식으로 애써 포장하며 정신승리했지만, 이때의 처참한 실패와 더불어, 일본이 본래 섬나라라서 바다만 잘 막으면 외적 침입의 걱정도 할 필요없는데다, 이미 이에야스가 창립한 에도 막부가 천하를 통일하여 내부 정쟁에서도 대포를 더 활용할 필요가 없어진지라[17] 그 후의 일본의 화포 제작 기술은 제자리걸음만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가토 기요마사, 아사노 나가마사 등이 차례로 죽어갔다. 가토의 경우 니조성에서의 회담 직후 죽었는데 히데요리를 보호하기 위해 단도를 숨기고 갔었고, 이 때문에 이에야스가 독살했다는 설이 있었다. 심지어 조선에서도 이에야스가 독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도요토미가를 도울만한 다이묘들은 차례차례 죽어간 반면 세키가하라 이후 친이에야스파는 점차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멸문과 가이에키만큼은 막았던 우에스기모리 가문은 또 대들었다가는 진짜 끝장이어서 도쿠가와 가문에게 어떻게든 잘 보여야 하는 불안정한 입장이였다. 이 외에도 나름 다이묘이자 도호쿠의 패자 다테 가문은 세키가하라 참전 조건으로 고쿠타카 백만석을 약조받았으나 전후 이에야스가 백만석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보상을 받아 불만은 많았지만 대세는 도쿠가와임을 알았기에 일단 살기 위해 도쿠가와에게 아부하였다.

당시 다이묘 중 가장 큰 세력을 지녔던 마에다 가문은 이전에 도요토미 가문이 지켜주지 않는 바람에 이쪽도 친 도쿠가와로 갈아탔고 호소카와는 요도도노가 지휘하던 도요토미 가문이였기에 승리할 가망이 없다 보고 이미 도쿠가와 가문에 붙었으며 시마즈 가문은 어차피 멀리 떨어진 규슈였기에 그냥 멀직이서 지켜보기만 하였다. 이렇게 전국시대를 호령한 거대가문 우에스기/모리/다테처럼 이름난 다이묘들이 도쿠가와에게 깨갱거리거나 대들려고 하지 않으니 다른 다이묘들은 당연히 이에야스에게 맞서지 못했다. 이에 불안했던 히데요리도 조정의 관위를 막부에 하사했는데 무가와 공가의 벼슬을 아예 분리하려 했던 이에야스에게 거역한 것이었다.[18] 도요토미 가는 막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논리였고, 이는 이에야스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다.

2.2. 호코지 종명 사건

이에야스는 겉으로는 계속 유화적인 척 했다. 그는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명분으로 긴키 지역의 각종 신사와 사찰들을 신설, 수리할 것을 히데요리에게 건의한다. 히데요리로서는 방심할만한 호의였지만 도요토미가의 부를 줄이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가문의 부흥을 위해 많은 돈을 쓰게 되었고, 결정적인 억지 명분 또한 여기서 나오게 된다.

1614년, 5년간의 공사 끝에 교토의 호코지 대불전이 완성되었고, 이어 범종도 완성되었다. 그런데 범종 완성 직후 종에 새겨진 글귀, 종명(鐘銘)의 해석을 놓고 갈등이 발생했다. "국가안강 군신풍락([ruby(國家安康, ruby=こっかあんこう)], [ruby(君臣豊樂, ruby=くんしんほうらく)])"을 두고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두 글자로 쪼개고 도요토미(豊臣)가의 이름을 거꾸로 넣은 것이므로, 이에야스를 저주하고,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는 음모론적 해석이 이루어져 트집거리가 된 것이다. 전자에 비해 부각되지 않지만 트집잡힌 문구 하나가 더 있었는데, 범종 초입부에 기재된 "우복야원조신가강공([ruby(右僕射, ruby=うぼくしゃ)][ruby(源朝臣, ruby=みなもとのあそん)][ruby(家康公, ruby=いえやすこう)])"이란 문구. 당시 어용학자들은 사원조신가강공(射源朝臣家康公),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19]를 (활로) 쏜다"라는 견강부회식 해석을 내놓았다. 이 해석들은 모두 이에야스의 어용 학자들[20]의 작품이었다. 이를 새긴 승려는 전자는 부정했지만 도요토미가의 부흥은 인정하였다. 이게 진짜 트집잡기라고밖에 볼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 글귀는 바꾸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잘만 남아있다. 물론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 비해 피휘 문화가 덜 발달한 덕분에 해당 글귀가 그대로 남아있는 면도 있을 것이다.

파일:external/kyoto-k.sakura.ne.jp/mhoukouji1.jpg
관광객 보라고 한 건지 후대에 하얗게 칠해놨다. 많은 문장 가운데 한 귀절이다.

어쨌든 이런 억지에 도요토미 측에서는 전쟁 준비를 하는 한편, 카타기리 카츠모토[21]를 보내 화의를 청한다. 하지만 이에야스를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3가지 요구조건을 듣게 된다.
1. 히데요리가 에도로 직접 와서 이에야스를 알현할 것
1. 요도도노를 인질로 에도에 보낼 것
1. 오사카 성을 나와 이에야스가 지시하는 곳으로 이봉할 것

셋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는데 1은 도요토미 가문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얘기고, 2는 히데요리의 생모를 인질로 보내서 히데요리가 일거수 일투족을 히데요리의 의도대로 행동할 수 없게 묶기 위한 것이며, 3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의 고쿠다카를 척박한 시코쿠나 규슈 끝자락과 같은 곳으로 힘을 빼려한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도쿠가와의 요구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어느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명분쌓기용 요구라, 결국 도요토미측은 이것을 모두 거부하고 이에야스와 전쟁을 결심한다.

3. 전개

3.1.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

오사카 겨울 전투, 오사카 겨울의 진(大阪冬の陣)은 1614년 겨울에 발생한 오사카 성에서의 전투이다.

이에야스는 히데요리 토벌을 명령했고, 다이묘들이 이에 호응해 무려 20만 명의 대군이 동원된다. 도요토미 측에서도 다이묘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대부분은 따르지 않았다.[22] 히데요시에게 은혜를 입은 은고 다이묘들도 마찬가지라,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군량 사용을 묵인한 걸 제외하면 지원할 형편이 못 됐다.[23] 심지어 화의를 주선했던 가타기리 가츠모토도 토벌군에 합류했는데, 이는 화의에 실패하자 도요토미 측에서 그를 배신자로 몰아붙인 것 때문이기도 하고, 가타기리는 히데요리의 목숨만은 살리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도요토미 측은 많은 돈을 풀어 로닌[牢人]들을 불러모은다.[25] 그 대부분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해서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전했다. 이제까지 도요토미 가문이 쌓아놓았던 막대한 부가 있었기에 10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이 중 대표적인 자가 쵸소카베 모리치카, 고토 마타베에, 모리 카츠나가, 아카시 테루즈미, 그리고 이 전투로 전설이 된 사나다 노부시게였다. 이들을 묶어 오사카 오인중(五人衆)이라 부른다. 이 오인중 외에도 스스키다 카네스케, 오타니 요시하루, 반 나오유키 등의 이름난 무사들이 모였다.

도요토미군은 병력이야 많이 모였지만 문제는 이에야스가 이끄는 대군의 절반 정도였고 그 내실도 그리 좋지 않았다. 로닌들이 주력이라는 건 전투에 능한 베테랑 병사들이라는 장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들이 돈받고 싸우는 용병들이나 마찬가지라서 잘 뭉치지 못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특히 오사카 오인중을 뺀 로닌들은 실전에서는 최고이지만 군략에서는 무능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도요토미 측의 결정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 바로 수뇌부의 무능이었다. 당시 히데요리는 22살로 장성했지만 산전수전 다겪은 노련한 아버지 히데요시와 달리 아무런 경험이 없고 그저 편하게만 자란 부잣집 도련님일 뿐이었다. 거기다 병력을 지휘하는 장군들도 문제였는데 오사카 오인중을 제외하면 주요 장군들인 오노 하루나가, 하루나가의 아우인 하루후사, 기무라 시게나리 등 히데요리의 가신들이 실전 경험이 없어 전쟁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여기에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도노의 간섭이 지나칠 정도로 심했다.[26] 요도도노는 아들처럼 전쟁을 모르는데도 발언권만 세서 트롤링에 가까운 결과를 낳게 되었으며, 총지휘관이라는 히데요리는 어머니 요도도노에게 휘둘려 장성하다보니 유약하고 줏대가 없이 커버렸다. 사실 요도도노의 이런 행위가 가장 큰 해악을 불러왔다고 할 수 있는데 어린자식을 내세워 권력을 잡으면 자식이 나이가 차면 필연적으로 권력교체가 이뤄져야 하는데 요도도노는 그게 안 됐다.[27]

이때문에 큰 돈을 들여 스카웃 해온 오사카 오인중을 비롯한 장군들이 세운 계책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부시게는 이에야스가 오기 전에 수성전을 하기보다, 선공을 걸어 히데요리가 친정에 나서 이에야스가 교토에 있으니 후시미 성을 점령 후 니조성을 점령하여 이에야스 처단 후 오우미를 차지, 교두보를 끓어 이에야스의 부대를 분단시켜 도쿠가와 가문에 맞서자고 건의한다. 하지만 요도도노를 비롯한 수뇌부는 히데요리의 위험성과 병력이 열세이고 히데요시가 지은 오사카 성의 방어력과 많은 식량에 의지했던 수뇌부는 이를 듣지 않았고, 특히 노부시게가 원했던 히데요리의 친정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요도도노도 히데요리의 안전을 우려하여 친정을 결사반대하였기에 결론은 농성이었다. 결론적으로 토요토미 가문 입장에서는 노부시게의 건의가 최상책이었다. 토요토미 가문의 주력인 로닌들은 과거의 경제력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유인이 있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용병에 가까운 집단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끌 수록 막대한 재정을 잡아먹는 돈 먹는 하마가 될 수 밖에는 없는 존재들이었기에 잃더라도 도쿠가와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1석2조이다. 그리고 공세에 실패하더라도 이후 농성으로 들어가면 된다. 게다가 전체적인 전력이 열세에 있는 한, 후시미, 오우미등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관동에서 먼 거리를 행군하여 피로했을 도쿠가와측을 상대로 선제 기습 공격이 가장 좋은 전략이 되기에 충분했고 기습이 아니고 전면전이라 해도 미리 대기하고 있던 도요토미 군이 피로가 덜 하기에 피해를 입히기에도 충분했다.

당시 오사카 성방어력은 일본 최강이었다. 원래 일본의 성센고쿠 시대의 영향으로 성은 최후의 농성 수단이었기에 아시아에서도 방어력이 최고로 손꼽힌다. 대포가 아니면 고대중세의 공성법으론 함락시기 힘들었고, 울산성 전투에서도 일본식 성을 조명 연합군이 함락시키는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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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경의 오사카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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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에서 재현한 사나다마루 상상도[28]

1614년 11월 19일, 첫 전투가 시작된다. 이에야스는 일단 오사카 외부에 있는 도요토미 가문의 외성들을 공략했다.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 명인 가타키리 카츠모토와 이세 도도 가문의 도도 다카토라가 선봉에 나서 공격해왔다. 하치스카 요시시게, 아사노 나가아키라, 이케다 타다카츠 등이 오사카 성 외부에 있던 에다가사키 성을 함락. 일주일 후인 26일에는 시기노, 이마후쿠 전투가 벌어졌고 역시 도쿠가와 측이 승리한다. 여기서 우에스기 카게카츠나오에 카네츠구가 맹활약을 했다고 한다.[29] 3일 후에도 전투가 벌어졌고 역시 도쿠가와군의 승리였다. 이때 도요토미군이 보여준 졸전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창의 명수라 불린 와타나베 타다쓰는 우에스기군을 공격하다가 조총으로 반격받자 병력이 훨씬 많았음에도 달아나버렸다. 그것도 오노 하루나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오죽하면 우에스기군도 처음에는 도요토미군이 왜 달아났는지 이해를 못했을 정도. 또한 바쿠로부치 요새를 지키던 스스키다 카네스케[30]는 도쿠가와군에게 패하여 요새를 뺏겼는데 패한 이유가 어처구니없게도 유곽에서 유녀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도쿠가와군이 공격하는 줄 몰랐다고(...). 이렇게 해서 외부의 성채들이 모두 함락당하는 바람에, 이제 오사카 성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도쿠가와군은 드디어 오사카 성 남쪽으로 접근한다. 12월 4일 도쿠가와 측인 마에다 도시츠네[31]와 마츠다이라 타다나오가 공격해왔다. 노부시게는 먼저 평원에서 적군을 도발하고, 사나다마루로 유인해서 집중사격을 했고, 단 하루 만에 도쿠가와군은 사상자가 1만 명이 넘어 대패를 겪고 패퇴하였으며 도요토미군은 대승을 거둔다. 5천 명의 병사로 거둔 전설적인 승리였다.

성벽의 외측은 해자로 둘러싸여져 접근하지 못하거나 접근하려고 하면 사나다마루에서 견제할 부대가 오기에 도쿠가와군의 공격 목표는 사나다마루로 집중됐다. 연이은 공격이 계속됐지만 사나다마루는 높은 고지에 있는 요새에다가 조총부대가 다수 포진되어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으며 사나다마루는 보급로도 좋았다. 그러다가 사나다마루 후방에서 실수로 화약이 폭발했는데 이를 첩자의 신호로 착각한 도쿠가와군이 총공격을 개시해버렸으나, 노부시게는 되려 몰려오는 도쿠가와 군에게 피해를 입히기 좋은 기회라며 이를 이용해 공격을 모두 버텨냈고 큰 피해를 입혔다. 이 공성전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해자가 시체로 메워질 정도였고 각 군에서 셀 수 없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로도 도쿠가와군은 계속해서 공격했으나 함락할 수가 없었고 지루한 소모전으로 이어졌다.

오사카 성을 포위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이에야스군은 사나다마루와 성 밖을 두룬 외측의 해자 때문에 성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예상치 못하게 길어진 농성전으로, 가지고 온 군량미와 땔감이 떨어져서 병사들은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려 고전해야 했다. 갑옷과 마구를 담아왔던 상자를 땔감으로 태워 추위를 버텼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전략을 바꾸어 도요토미 측을 심리적으로 동요시킬 작전을 펼친다. 땅굴을 파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고[32], 어느 날 밤은 병사들에게 소리를 지르게 하여 야습이 일어난 것처럼 해서 성 내의 사람들이 잠을 못자고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밤낮으로 성 밖에서 자체생산한 300여 문의 대포천수각을 향해 위협 사격을 퍼부었다. 당시 일본에서 쓰인 대포는 유럽이나 중국, 조선에 비교하면 안쓰러울 수준이었으나[33] 이에야스는 유럽 상인들로부터 유럽산 대형 대포인 컬버린을 몇 문 도입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컬버린을 가져와 포탄 중 한 발이 16일에 우연히 수뇌부가 있던 천수각에 명중하여, 요도도노의 시녀 한 명이 그 자리에서 포탄에 맞아 즉사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한 발이 요도도노의 이마를 다치게 하고 주위에 있던 시녀들 7, 8명이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으로 도요토미군 수뇌부는 도쿠가와 군의 대포의 위력에 크게 동요 및 오사카 성의 방어가 뚫린다는 공포감을 심어, 요도도노는 이때의 충격으로 정신적인 노이로제 상태에 빠졌다.

오사카 성의 방어가 삼엄해진 것을 보고 심리전이 성공한 것을 알게 된 도쿠가와 측은 화의를 제의하고, 요도도노는 오사카 오인중을 비롯한 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화의를 진행된다. 화의 회의 중 도쿠가와 측에서 낭인들 해체 및 사나다마루를 비롯한 해자 철거를 한다면 병력을 물리겠다는 조건이 화의 조건이라 하였고 협상을 진행한 요도도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19일에 겨울의 전투는 끝이 났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첫 전투가 시작되고 다음 날인 11월 20일에 도쿠가와 측은 오사카 성의 방어가 철통인 것을 알고 그날부터 사신을 보내 화의를 제의했다고 한다. 또, 12월 15일에는 요도도노가 자신이 직접 인질이 되어 전투를 멈추려고 했다고도 한다.

3.2.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

오사카 여름 전투, 오사카 여름의 진(大阪夏の陣)은 1615년 여름에 발생한 오사카 성에서의 전투이다.

문제는 화의의 내용이었다. 도쿠가와 측은 군대를 퇴병하고 도요토미 측에 죄를 묻지 않는다. 다만, 이에야스가 그냥 군대를 철수하게 되면 면목이 안 선다. 형식적으로나마 로닌 해체와 오사카 성의 외측을 둘러싼 해자를 도쿠가와 측이 메울 수 있게 해달라고 한다. 이에 도요토미 측은 의례적으로 외측의 해자를 메울 것을 허락하고, 우리 측에서도 니노마루, 산노마루의 장벽을 철거한다는 약속을 한다. 당시 이에야스는 73세로 살 날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으니까[34], 그가 죽으면 훗날을 도모하려는 의도였다.[35] 그렇게 강화 회의는 성립됐다.

전쟁에서 이긴 쪽이 진 쪽의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고, 도요토미 측도 언제까지 해자를 메워야 하는지 기한을 정하지 않았으므로 시간을 끌면서 천천히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7만 명을 동원하여 고의적으로 오지랖을 떨며 오사카 성을 둘러싼 8킬로에 달하는 외측의 해자를 단 3일 만에 메워버렸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철군하기 전에 아들 히데타다를 불러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해자도 메워버려라. 3살짜리 어린이라도 올라갈 수 있도록 묻어버리라고 명한다. 애초부터 화의의 목적은 오사카 성 공략에서 가장 골치아팠던 난공불락의 사나다마루와 해자를 없애는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고 그 목적을 이루었다.

시간을 끌려던 도요토미 측은 당황해 항의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공사가 늦어지는 것 같으니 우리가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도요토미 측은 이에야스 본인을 직접 만나 항의하기 위해 사자를 보냈으나, 이에야스는 사자를 만나도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며 조치하겠다고만 하고 시간 끌기만 했다. 그 사이에 인력을 투입하여 남은 해자들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한 달이 흐르고 모든 해자가 메워졌다. 이에 분노한 도요토미 측이지만 방어시설이 전부 철거되어 벌거벗은 상태나 다름없기에 방어를 위해 해체하기로 한 로닌들을 유지, 다시 외성들을 쌓고 해자를 파내는 대공사를 시작했다. 당연히 이 소식은 도요토미가 화평조건을 어기고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고 도쿠가와가 주장하기에 딱 좋은 명분을 알아서 제공해준 셈이였고 로닌들을 오래 붙잡아 두는 것도 재정적 부담에 사기증진을 위해 보수를 주기 시작했으나 문제는 일부 로닌들이 무기를 구입하면서 추가 구실을 줘버렸다.

1615년 3월, 이에야스는 '다시 모반을 일으키려는가'라고 도요토미 측에 책임을 묻는다. 오노 하루나가가 해명을 위해 슨푸를 찾아갔지만,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오사카 성을 떠나 지정한 영지로 이전하던가, 성 안에 있는 병사들을 모두 내보내라는 요구를 한다. 이는 말그대로 항복 요구에다가 항복한다 한들 이전시키려는 땅은 험한 시코쿠나 규슈 언저리일게 분명하였기에 도요토미 측이 어느 쪽도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당연히 도요토미 측은 이를 거부, 이에야스는 네놈들이 그럴 줄 알았다며 4월에 다시 다이묘들의 병력을 모았고, 5월에 진군을 시작하여 여름의 전투가 시작된다.

오사카 여름의 진의 상황은 겨울과는 달랐다. 이때 병력의 차이는 도쿠가와 측이 약 15만 명, 도요토미 측이 약 5만 5천 명 정도였다. 약 3배에 달하는 병력차에다, 오사카 성은 방어력을 잃고 그야말로 벌거벗은 상태였다. 해자가 메워진 오사카 성의 농성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성에 주둔하던 많은 로닌과 주민들이 성을 떠났다.(겨울의 진은 10만 명, 여름의 진은 5만 5천 명)[36] 그래서, 방어시설도 없으니 오사카성 농성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고 병력차로 인해 바닥에 가까운 병력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이번에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직접 성 밖으로 나와 싸워, 병사들의 사기도 올리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처럼 다이묘들의 배반을 유도, 히데요리의 본진에 군사가 집중되는 틈을 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는 본진을 기습공격하자는 작전을 짰지만, 문제는 그렇게 하기에 병력이 열세에 히데요리가 전사하면 안된다며 거품을 무는 요도도노를 비롯한 수뇌부는 불가능하다며 기각한다. 이에 유키무라(노부시게)는 다시 선공으로 후시미 성을 점령할 것을 건의한다. 다른 오인중들도 찬성했지만 이 역시 수뇌부는 또 불가능하다며 듣지 않았다.

결국 노부시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본진으로 쳤던 차우스 산의 요새를 재활용하여 제2의 사나다마루를 짓는다. 그리고 모리 카츠나가, 고토 마타베에와 함께 도쿠가와군이 오사카로 가는 길목을 막고 요새에서 농성을 하면서 주력부대를 묶어두고, 기마부대로 이에야스가 있는 본진을 기습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적군이 사나다마루에 접근하기 전에,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토 마타베에 부대가 단독으로 도쿠가와군과 먼저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스스키다 카네스케 등이 함께 매섭게 싸웠지만 도쿠가와군이 압도적이라서 중과부적이었고, 모리 부대가 구원왔을 때는 이미 전사했다. 여기에는 이에야스를 위해 첫 전투에서 일부러 전사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고토 마타베에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작전이 처음부터 꼬이자 차우스 산 요새를 버리고 나온 사나다군은 다테 마사무네의 병력과 맞서게 되는데, 여기서 마사무네가 자랑하는 기마철포대에게 대승을 하게 된다. 철포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바닥에 숨어서 접근하면 창으로 찌르는 야리부스마(槍衾) 작전이었다. 한편 초소카베 모리치카와 기무라 시게나리도 도쿠가와군을 함께 습격하기 위해 오다가 야오, 와카에 부근에서 이이 나오타카[37], 도도 다카토라의 부대와 조우해서 전투를 벌였다. 전 주군 모토치카를 위한 쿠와나 요시나리의 희생과 모리치카의 분전으로 모리치카와 시게나리 군은 도도군을 거의 괴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으나, 극적으로 이이 나오타카의 원군이 도착하면서 중과부적으로 수에서 밀려 기무라 시게나리는 전사, 모리치카는 패주하게 된다.

다음 날 도쿠가와군은 총공격을 시작한다. 이에야스는 전날의 전투가 장기전으로 고생한 만큼 이번 전투는 3일 만에 끝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에 노부시게와 모리 카츠나가는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목을 노린다. 병력의 차이는 여전하기에 이에야스를 죽여서 한 방 역전을 노린 것이다. 카츠나가가 다른 병력들을 상대하면서 길을 열어주는 사이에 노부시게는 이에야스의 본진으로 돌격한다. 이는 어느정도 성공하여 이에야스 자신도 예상 못한 공격이라 당황했고, 미카타가하라 전투 이후 최대의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무서운 돌격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에야스는 2번이나 할복을 각오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사나다 노부시게의 병력은 고작 3천 명 뿐이었고, 3차례나 돌격했지만 이에야스가 피신하여 부재중인 터라 그를 죽이는데 실패했고 이에야스 군이 반격해오면서 모두 실패하고 노부시게도 텐노지에서 전사한다. 이 과정을 텐노지(天王寺) 전투라고 한다. 여기서 만약 히데요리가 출전했다면, 전황은 바뀌었을 꺼라고 도쿠가와 측도 기록하지만, 끝까지 히데요리의 출전은 없었다. 출처

이렇게 도요토미측 중 실전경험이 있고 지휘력도 있던 장수들인 오사카 오인중이 전멸해버렸고 오사카성 상층부는 어중이 떠중이에 가까우니 곧바로 무너져내렸고 방어시설이 없는 오사카성을 향해 도쿠가와군은 공성을 계속하였다. 도요토미 군은 마지막까지 저항은 했으나 병력열세와 무능한 지휘부로 인해 결국 도쿠가와 군이 오사카 성의 성문을 뚫고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진 끝에 오사카 성의 구역은 도쿠가와군에게 차례차례 함락당한다. 나중에는 성의 대부분이 함락당했고, 도요토미 측으로부터 진짜 항복을 하러 온 사신이 히데요리를 살려달라는 요청도 당연히 무시당한다. 당연히 이에야스에게는 자신이 죽고나면 히데요리에게 다시 붙을 가능성도 없지않아 있기에 숙청시켜놔야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히데요리의 아내였던 이에야스의 손녀인 센히메가 나서서 남편을 살려달라고 이에야스에게 찾아가 간절히 빌었지만 역시 거부당했다. 결국 이이 나오타카가 히데요리가 있던 야구라에 화공을 벌였고 야구라는 파괴되기 시작했으며 그틈에 도쿠가와 군이 진격하여 저항하는 도요토미군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을 알고 이 안에서 할복 자결한다. 당시 히데요리에 대한 카이샤쿠를 한 사람은 모리 카츠나가였다고 하고, 그 후 그도 자결한다.

이렇게 난공불락이자 도요토미 가문의 권위와 부를 상징하던 오사카 성은 무너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도 단 2대 만에 그의 사세구대로 오사카의 영화는 정말 꿈 속의 꿈이 되었다.

4. 영향과 평가

이에야스는 이렇게 눈엣가시인 도요토미가를 완전히 멸망시켜 힘을 과시함으로써 다른 다이묘들은 도쿠가와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 밖에 없었고 자신의 후계자 히데타다에게 권력계승을 하며 에도 막부의 통치를 확고히 하게 된다. 이 직후 겐나엔부를 선포, 전란이 모두 끝났다는 것을 알렸고, 일국일성 등 다이묘들이 제멋대로 군비를 확장하는 것을 규제하며 제법 강력한 중앙집권을 누리게 된다. 이후 매튜 페리가 오기 전까지 일본은 약 250여년의 평화를 누렸다.

이 전투로 유명해진 것은 역시 오사카 오인중(五人衆)이다. 비록 고용된 입장에다가 각자 다른 속셈[38]을 가지고 수락한 것이지만, 도쿠가와 가문이 더 싫어서 항복하느니 주군 히데요리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치며 강력한 적에 맞서 멋지게 싸우다 갔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물 먹이고 죽일뻔한 사나다 유키무라(노부시게)는 사후 이것으로 에도 시대는 물론 현대에도 초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도쿠가와 측에서도 그를 최고의 무장으로 평가했기에 그를 띄우는 데 거부감도 없었을 것이다.[39] 다만 이 때문에 모리 카츠나가와 같은 2인자 다른 인물들이 저평가 받는 부분도 있다. 특히 모리 카츠나가는 최후의 돌격에서 시선을 이끌며 자신에게 병력이 몰리도록 하는 맹활약했는데 노부시게에게 그게 다 넘어가 버렸다. 코에이 테크모에 따르면 사나다 노부시게의 그림자에 가려진 모리 카츠나가를 가리켜 누군가 '안타까운 후세. 사나다는 이야기하지만 모리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도쿠가와뿐만 아니라 도요토미 측도 방해가 되었다는 것도 특이하다. 전쟁의 ㅈ자도 몰라서, 사나다 마사유키로부터 전술의 지식을 전부 이어받은 노부시게처럼 전쟁에 잔뼈가 있는 그들의 계획을 매번 방해했기 때문이다. 요도도노와 오노 하루나가 등도 마찬가지로 악역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래도 히데요리 생존설이 있는 걸 보면 역사의 동정 정도는 받은 듯하다.

히데요리부터 노부시게 등 각종 인물들이 생존설이 있다. 특히 아카시 테루즈미는 아예 생사불명이다. 모리치카는 도주하다가 체포돼서 죽었기에 생존설이 없는 듯. 한국에도 이순신 생존설이 있듯 맹활약하다가 쓰러진 무장들에 대한 동정 섞인 설일 것이다.

5. 여담

히데요리의 유일한 소꿉친구인 키무라 시게나리는 오사카 겨울의 진이 첫 출진이었다. 그는 오사카 겨울의 진이 끝나고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이 화의를 할 것을 서로 약속한다는 글을 적은 맹세서를 주고받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만났다. 이때 이에야스는 맹세서에 자신의 피를 연하게 묻혔다. 시게나리는 이에야스에게 맹세서에 피가 너무 연하니 만일에 사태에 대비하여 다시 피를 묻혀 달라고 하였고, 이에야스는 피를 다시 묻힐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무명이었던 시게나리의 대담한 행동은 일본 전국에 퍼지게 되었고, 시게나리의 이름이 전국에 알리졌다. 시게나리가 실제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이에야스와 대면하였을 때, 어떤 대담한 행동을 하여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키슈에 있는 쿠도산에 유배된 사나다 노부시게는 오사카로 향하기 위해 산을 탈출해야만 했다. 키슈의 아사노 가문은 유배인들을 감시하는 역할이었지만, 키슈인들은 독립적인 성격이 강하여 도쿠가와, 아사노의 지배를 좋게 여기지 않았다. 사나다 노부시게가 쿠도산을 탈출할 당시 키슈인들은 사나다 노부시게를 동조하여 모른 척을 하던지 추격을 대충 했기에 사나다 노부시게는 쉽게 쿠도산을 탈출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전투가 메이지 유신 전의 일본에서 최초로 포병이 창설되었고 대포가 투입된 전투였다. 그 이전에는 일본에서 포병 자체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대포한테 아예 관심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포가 등장한 것은 전국시대 말기였다. 특히 유럽 상인들과 거래하는 사이라서 일본인들도 대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규슈의 유력한 영주였던 오토모 소린은 포르투갈 선박에 비치된 대포를 비싼 돈을 주고 사들여 "쿠니쿠즈시(國崩し)"이라며 최종병기처럼 취급했고 포르투갈 선박을 고용해 적의 성에 대해 함포 지원을 의뢰하기도 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모리 수군에 대항하기 위해 대형선을 건조하고 대포를 2, 3문 설치하여 모리 수군을 격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고 사실상 일본 다이묘들은 대포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국가단위로 화약을 생산하고 수입했던 명, 조선과 달리 영지 단위로 전쟁중이던 일본의 다이묘들은 화약 소모량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포 1발 쏠 화약이면 조총을 수십-수백발을 쏠 수 있으니까.

오사카 전투에서는 양측이 대포를 보유하며 포격전을 벌였다. 특히 이에야스측은 애초부터 대포의 중요성을 알고 서양 상인들에게서 대포를 사들이는데 열중해서 서양식 대포를 수십문이나 보유했다. 반면에 히데요리측은 이런 대포가 고작 수 문에 불과했고 이것을 나무로 만든 목포로 대체하여[40] 화력에서 이에야스측보다 열세라서 포격전에서는 항상 이에야스측한테 불리했다.

하지만 이에야스 측의 대포유럽의 대포에 비하면 약하다보니 치명타를 주는 수준이 아니라서 일반적인 근접전공성전도 여전히 시행되었다. 왜냐면 첫째, 일본의 대포는 가장 큰 구경조차 겨우 5~6kg의 포탄을 날릴 수 있는 소형포였기에 야전이나 공성전에서 공포스러운 효과를 발휘하기에는 위력이 매우 부족했다.[41] 둘째로 운반 수단의 결여에 있다. 무거운 대포를 끌고 다니기에는 체격이 작은 일본말이나 일본소로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이나 중국의 경우에는 대포를 끌 때 보다 를 활용했는데 일본도 소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매우 드물었다.[42] 물론 이는 전국시대에 국한된 것으로, 대포의 위력을 톡톡히 절감했던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에서 노획한 다수의 대포를 사용하거나 직접 주조하여 반란 진압에 사용했다. 막부 말기 서양선과 싸울 때에도 사무라이들이 낡은 청동대포를 창고에서 꺼내어 쏘았으나 폭발하여 사상자가 나올 정도였다.[출처] 그리고, 전쟁에 휘말린 민중들은 많은 고초를 겪였다.

조선광해군이 재위하던 시대였는데,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소식을 들은 건 전투 종료 후 몇 달 뒤 대마도주를 통해 알려졌다.

명나라후금 또한 조선에서 보낸 서찰과 상인, 간첩들을 통해서 종결 후인 3년 뒤인 1618년에 알게된다.

6. 각종 매체에서의 모습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NHK 대하드라마, 2000) - 사나다 노부시게를 주연으로 한 아래의 사나다마루보다는 극중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의 분량인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의 전투 스케일이 더 크다. 기마철포대까지 등장하고 오사카성 내부의 암투나 전투의 진행등은 오히려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가 역사적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사나다마루(NHK 대하드라마 2016) - 최후반부는 오사카 겨울의 진과 오사카 여름의 진을 중심으로 극을 전개하였다. 사카이 마사토가 주인공 사나다 노부시게를 연기 하였다.

사무라이의 시대(넷플릭스 시리즈, 2021) - 6화에서 다룬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 시나리오로 가끔 등장하긴 하지만 역시 보기는 어렵다. 이에야스가 워낙에 압도적인 상황이고 선택하고 싶을 가문들도 거의 없어서이다. 14번째 시리즈인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의 PK2격으로 출시되는 전국입지전에서는 꽤 상세한 이벤트와 여러 차례의 합전으로 전투와 참전한 무장들을 다루었다. 도요토미 측은 고토 마타베에 등 실제론 전사한 장수들을 살리면 유키무라도 각성해서 이에야스를 죽이고 승리하고, 다테 마사무네는 마지막에 이에야스를 배반하고 도요토미 측에 붙어 승리, 이조어소를 차지하고 유키무라를 등용하는 파격적인 if 전개를 보여준다.

시나리오 이름은 '오사카의 진'으로 전투에 참여하는 도쿠가와 측과 도요토미 측 주요 무장으로 시작하면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도쿠가와 측으로 플레이 해서 승리하면 기존의 역사로 도요토미 측으로 승리하면 오고쇼 도쿠가와 이에야스, 2대 쇼군도쿠가와 히데타다, 다테 마사무네 등 실제 역사에 사망하지 않는 인물들이 사망하고 쵸소카베 모리치카는 시코쿠 토사에 영지가 생기고 사나다 노부시게는 시나노의 사나다 영지로 복귀하며 아카시 테루즈미는 귀향에서 돌아온 우키타 히데이에와 함께 비젠에 우키타 영지로 돌아오는 도쿠가와에게 충공깽 같은 결과로 종료된다. 그리고 한정 DLC로 오사카의 진에서 도요토미가 승리한 시나리오가 있다.
전국무쌍 시리즈- 주인공 사나다 유키무라 최후의 전장인만큼 매번, 그것도 최고 난이도의 최종 시나리오로 등장한다. 시리즈 첫 작인 전국무쌍에서는 혼노지의 변이 중심이라 사실상 노부시게의 연무에 따로 튀어나온 느낌이 강하지만, 전국무쌍 2 이후부터 점차 스토리 비중이 늘어간다. 문제는 전국무쌍의 플레이 캐릭터 대부분이 오사카 전투의 시기엔 이미 퇴장한 시점이라는 것. 때문에 전국시대를 마무리짓는 최후의 전투임에도 사실상 클론무장이 대부분이라는 다소 맥빠지는 배치를 가지고 있다.
- 도요토미 진영에선 주역이 되어야 할 오사카 오인중이 사나다 유키무라를 제외하면 전부 클론무장이다. 때문에 전국무쌍 첫작에서는 아군 레귤러가 쿠노이치 하나라는 어이없는 연출을 보여준다. 이는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면서도 변화가 없어서 기껏 캐릭터가 추가되는 와중에도 미야모토 무사시, 후마 코타로, 카이히메 등 실제 역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캐릭터들로 땜빵을 하고 있다.
- 도쿠가와 진영도 사실 큰 차이는 없다. 이 시기, 도쿠가와 사천왕 같은 장수들은 이미 수명을 다했기 때문에 나오는 장수들이 영 상태가 좋지 않다. 아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플레이 캐릭터가 아닌 1편에선 레귤러가 다테 마사무네 한명이었다. 그나마 시리즈가 이어져 레귤러 캐릭터가 늘어가면서 도요토미 진영보다는 상황이 나아지지만 여전히 라인업은 빈약한 편. 오죽하면 유키무라를 상대하는 최후의 상대가 2에선 마에다 케이지였고 3에선 이나히메였다. 이는 시리즈의 4편에 가서야 도쿠가와 진영에 사나다 노부유키가 추가되면서 나름대로 형제의 비극 같은 시나리오로 연출되었다.

전국무쌍 사나다마루에선 사실상 후반의 절정부를 담당하는 전장으로 최고의 비중을 가진다. 문제는 여기서도 오사카 오인중이 여전히 클론무장이기 때문에 노부시게가 혼자 다 해먹는다는 것.

임진록 2+ 조선의 반격 - 오사카 전투를 반영하여 시나리오의 최종장으로 설정되었다. 22~24번 임무가 모두 오사카 전투로, 22번 임무 <오사카 전투>는 명나라 시점에서 동군을 지원하고, 23번 임무 <위기의 오사카>는 조선군으로 시작했다가 김시민이 전사하는 순간부터 서군 시점으로 되돌아와 전투를 벌이며, 마지막 임무 <오사카 최후의 전투>는 조선군 시점에서 서군을 도와 명-동군과 전투를 치른다. 실제 역사에서는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전사한 이시다 미츠나리가 작중에 등장하지 않는 사나다 유키무라를 대신하여 오사카 전투 때까지 생존하지만 결국 오사카성 남쪽으로 군사를 이끌고 싸우다 최후를 맞이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 확장팩 - 일본 스토리 첫 미션부터 오사카 전투가 나오는데 고증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려서 대체역사 수준의 퀄리티를 보여준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도요토미 사망 - 이시다 vs 도쿠가와 - 세키가하라 전투 발발 - 오사카 전투여야 하는데 에오엠3에서는 오사카 전투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가 나온다.

센고쿠히메 7 - 사나다 유키무라 루트의 메인 시나리오가 오사카의 진이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지만, 일본사 전체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지면한계상 위에 언급되었던 도요토미측 지휘부의 무능이나 오사카 오인중 등의 상세한 내용이 나오진 않는 대신 전투의 발생 원인과 해자로 인해 공략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묘사가 나온다. 이후 실제 역사대로 도쿠가와측과 화의를 하며 해자를 메워 버리고 이후 다시 도쿠가와의 공격에 함락된다. 순진하게 "내가 바보였다... 이에야스를 믿다니."라며 자결한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바보고 말고! 전쟁에서 적을 믿는 바보가 있다니..."라고 비웃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습이 백미.

[5인중] [5인중] [5인중] [5인중] [5인중] [6] 다만 극단적으로 무려 시마바라의 난을 센고쿠 시대의 끝으로 잡는 학설도 있기는 하다.[7] 한국에서는 단독으로는 거의 쓰지 않고, 진지나 진영 등으로 쓴다. 전쟁할 곳에서 진을 치는 것이 전투 자체로 뜻이 확장돼서 쓰인다.[8] 大坂の役 직역하면 오사카의 역인데 이 을 대군을 동원한 정벌에 주로 쓰인다.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도 규슈의 역이고, 임진왜란도 분로쿠, 게이쵸의 역으로 부른다.[9]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웃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홀라당 삼키고 50만 석이 넘는 대영주로 등극한 가토 기요마사다. 가토는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보호를 위해 힘쓰다 사망하고 사후 후손들은 영지가 개역된다. 사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장 득을 많이 본 것은 이에야스긴 했지만 이 전투 자체는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가문의 내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10] 도요토미 가문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222만석이었던 영지가 65만 석으로 줄었다고 하는데, 이에야스도 히데요리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다는 점, 잃은 영지에 오사카 전투 전까지도 통치를 한 기록이 있다는 점 등으로 영지축소를 부정하는 설도 있다.[11] 사실 이 때 이에야스는 장성한 아들이 있어서 후계자 면으로 고민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이전 동맹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적장자와 함께 혼노지에서 죽었고 그 때문에 히데요시에게 일본이 넘어갔기 때문에 고민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오다 노부나가에게도 장성한 둘째, 셋째 아들이 있었는데도 히데요시에게 권력이 넘어갔기 때문.[12] 그래도 정치적인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다.[13] 오다 노부나가가 마지막으로 오른 관직이며 바로 전임 우대신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기도 했다. 그리고 점차 관위를 높여나가며 다시 관백과 태정대신 자리에 취임하여 아버지가 가진 권위를 되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관백의 자리는 공가인 쿠조가에게 돌아갔다. 실제로도 우대신으로도 만족 못했는지 요도도노가 태정대신 자리를 요구하자 도쿠가와도 "아니 오다 노부나가님도 천하를 재패하셨음에도 태정대신직조차 사양하고 우대신을 받으셨는데 히데요리가 태정대신? 관위가 유명무실이라지만 태정대신이 뉘집 똥개 이름인줄 아냐?" 라는 식으로 디스했다. 이후에 히데요리가 태정대신이 되지 못한 것을 봐서는 아무래도 도쿠가와의 말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정으로부터 태정대신에 오를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4] 이 때 18살로 장성한데다 남들보다 체격이 컸던 히데요리를 보고 도요토미가를 멸할 결심을 했다고도 하는데 실제로는 이전부터 쭉 계획해 왔을 것이다.[15] 길이 2미터, 무게 20킬로의 대형 철포로 사정거리는 일반 철포의 3배가 넘는 300미터. 혼자서는 쏠 수 없고 3명이 달라붙어야 사격이 가능한 성안에서 다가오는 적을 저격하기 위한 방어용 철포였다.[16] 애초에 화약이라는 것 자체가 군사용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아서 원나라 시기에는 지도와 더불어 유출 금지 목록에 올라와 있었다. 고려는 그나마 일본 정벌때 찔끔찔끔 들어올 수야 있었지만 일본은 그것도 안 되었다. 애초에 견당사 폐지 후 무로마치 막부 시절 감합 무역을 시작하기 전까지 중국과의 공식적인 교류 자체가 거의 없었으니 당연하겠지만.[17] 공성전이 벌어지면 대포를 사용할 기회가 많은데 도쿠가와 가문이 집권한 이후로 일본에서 공성전이 벌어질 정도의 큰 전투는 시마바라의 난과 막부 말기 빼면 없다고 보면 좋다.[18] 오사카 전투가 끝난 후 이에야스는 무가제법도를 선포하며 이를 확고히 한다.[19]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다이진(= 우복야) 직위를 임명받았었고, 도쿠가와 가문은 마츠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바꿀 때에 세이와 겐지(그중에서도 카와치 겐지)의 후손인 닛타 씨의 후손을 자칭했었다.[20] 이들 중에는 동아시아사를 공부하면 익숙한 하야시 라잔도 있었다.[21]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 명이다.[22] 아오키 카즈시게, 이토 나가자네 등이 도요토미 측에 참전했고 아오키는 겨울의 진에 참전했다가 도쿠가와 측의 압박에 여름의 진에는 참전하지 않고 은둔했으며, 이토는 특이하게 도자마 다이묘다보니 도요토미 측에 참전하고 여름의 진이 끝난 이후에도 다이묘로 존속할 수 있었다. 이토(伊東)가문은 미야자키현 일대의 휴가 국 슈고 다이묘인테 전국시대에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에도 털리고 오사카 여름의 진에서 도요토미 가문에 서고도 에도 막부에서 다이묘로 남아서 일본 제국 시절까지 화족으로 남을 수 있었다.[23] 마사노리는 이에야스에 의해 연금 중이었기 때문에 따로 군량을 보내라고 시키지 못했고, 이것만으로도 이에야스에게 찍혀서 몇 년 후 허락 없이 태풍으로 부서진 히로시마 성을 수리했다는 트집이 잡혀 개역당하게 된다.[牢人]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떠돌이 무사 로닌(浪人)이 아니라,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처럼 영토와 지위를 잃고 몰락한 무사 계급을 말한다.[25] 예를 들면 쿠도산에 유폐돼 있던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히데요리는 황금 200매와 은 30관을 보낸다. 현재 시가로 10억 엔, 약 100억 원의 돈이다.[26]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지원을 거부하는 이유로 요도도노가 대장이라는 걸 들었다.[27] 가장 이상적인 교체는 순순히 자식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방식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역대 수렴청정들이 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양되었다. 심지어 조선 역대 수렴청정 중 여걸이란 소리까지 들었던 가장 강력했고 유명한 문정왕후조차 명종이 20세가 되자 수렴청정 거두는거 말리는 쇼 몇 번만 하고 자연스럽게 물러나줬을 정도. 반대로 끝까지 권력욕을 못 버린 흥선대원군은 추하게 물러나야 했다.[28] 歴史秘話ヒストリアスペシャル▽徹底解明! これが真田丸だ - 地中に残された幻の城 20160106 水曜日 2200 NHK 総合 #[29] 세키가하라 때 서군으로 감봉(영지 일부 몰수)당했으니 여기서 충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으며 여기서도 전공이 빈약했다면 가이에키 조치 당해 일개 평민이 되는 꼴이었다.[30] 괴물인 히히를 퇴치했다는 전설로 유명한 이와미 쥬타로와 동일인물로 여겨진다.[31] 마에다 토시이에의 차남. 형인 마에다 토시나가가 세상을 떠나자 가독을 상속.[32] 이는 병사들이 도쿠가와 군이 땅굴로 침공해한다는 불안감과 이들이 발밑에서 나타날까봐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하였다.[33] 오오즈츠라고 해서 조총의 사이즈를 키운 정도의 수준이었다. 유럽이나 유럽식 대포를 도입하여 대규모로 운용하던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만성적인 화약 부족에 시달리는 조건 속에서도 나름대로 다량의 화기를 운용한 조선도 일본보다는 나았다.[34] 실제로 이에야스는 이 시점에서 불과 2년 뒤에 병사한다.[35] 당시의 상황을 포르투갈의 예수회의 선교사는 이에야스에 이어 2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히데타다다이묘들이 싫어해서 도쿠가와 가문은 이에야스가 죽으면 곧 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36] 전투로 인한 피해를 받지 않으려는 목적이 크다. 실제로 이 당시 일본에서 패배한 세력의 주민들이 이긴 세력의 군대에게 약탈과 강간, 잔혹행위, 학살당하며 노예로 팔리는 것이 비일비재했다.[37] 붉은 귀신이란 별칭으로 유명한 이이 나오마사의 아들.[38] 고토 마타베는 자신의 전 상관 쿠로다 가문에 원한을 가져서, 아카시 테루즈미는 기리시탄이기에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도요토미 가문을 통해 종교 허락을 받기 위해, 모리 카츠나가는 개인적으로 가진 도쿠가와에 대한 원한, 쵸소카베 모리치카는 자신이 서군에 가입했다가 패배후 가이에키 당하고 아버지 모토치카에게 먹칠을 했다는 마음이 있었고 이 전투 승리후 이전 봉지를 다시 받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사나다 노부시게는 돈을 받긴 하였으나 이전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 있었고 은혜가 있었기에 참여한 것이다.[39] 물론 다케다 신겐처럼 이에야스를 애먹였기에 띄워준 부분도 있을 것이다.[40] 당연히 목포는 화력이 매우 떨어진다. 특히 목포는 화약의 힘을 견딜 수 있는 내구력이 금속 대포보다 약해서 몇 번 쏘고나면 금방 갈라지고 파괴되어 못 쓰게 된다.[41] 왜냐면 수입한 서양 대포들이 죄다 소형이었으니까. 대형 대포는 그 당시 선박의 선적 기술상 장거리 운반은 무리였다. 다만 유럽에서는 갈래온등에 포 무게만 1톤이 넘어가는 대형포들이 탑재되고 있었다.[42] 특히 일본에서는 처럼 개체 수가 부족하고 농업 때문에 소를 말과 함께 중요하게 여겨 도살도 금지했을 정도다. 심지어 일본에 거래하러 오는 서양인들이 고기를 얻기 위해 일본 소를 사겠다고 해도 판매를 거부할 정도였다.[출처] 구보타 마타시의 전국시대 일본군의 무기와 전술, 교리를 다룬 "일본의 군사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