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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ruby(公, ruby=く)][ruby(家, ruby=げ)]

1. 개요2. 명칭3. 역사4. 역할5. 가격(家格)
5.1. 섭가(摂家)5.2. 청화가(清華家)5.3. 대신가(大臣家)5.4. 우림가(羽林家)5.5. 명가(名家)5.6. 반가(半家)
6. 공경(公卿)
6.1. 대신(大臣)
6.1.1. 태정대신(太政大臣)6.1.2. 좌대신(左大臣)6.1.3. 우대신(右大臣)6.1.4. 내대신(内大臣)
6.2. 납언(納言)
6.2.1. 대납언(大納言)6.2.2. 중납언(中納言)
6.3. 참의(参議)6.4. 비참의(非参議)
7. 관직8. 구가와 신가9. 여담10. 창작물

1. 개요

전근대 일본조정에 종사하는 귀족관리.

2. 명칭

원래는 천황이나 그를 모시는 조정을 가리켜 공경([ruby(公卿, ruby=くぎょう)]), 고케(こうけ) 또는 오야케(おおやけ)라고 했지만 가마쿠라 시대 이후 무력으로 조정에 봉사하는 막부 측 사람을 무가([ruby(武家, ruby=ぶけ)])라고 부르게 되자 이에 대응하여 조정의 일반 공무를 맡아 하는 문신 귀족과 관리를 공가([ruby(公家, ruby=くげ)])라고 부르게 되었다.

3. 역사

헤이안 시대부터 중앙 집권적인 율령 국가를 구성하기 위해 통용된 명칭으로 이전부터 귀족 세력은 존재하긴 했지만 이 시기부터 공가 안에서도 귀족의 격식 및 지위의 고하가 고착돼서 똑같은 공가라 할지라도 하위에 위치한 공가는 상류층으로 편입되기 불가능해졌고 각 가문의 격에 따라 맡을 수 있는 관직의 상한선이 정해졌다. 귀족이면서 공경에 오르는 집안이 한정되고 후지와라 가문에 의한 섭관 정치 확립에 따라 가문의 서열이 고정되어 가마쿠라 시대 전기까지 공가 사회가 형성되었다. 여기서는 가문의 서열에 따라 승진할 수 있는 관직이 한정되었는데 어찌 보면 신라골품제와도 비슷한 부분이다.

천황의 권력이 약해지면서 이 공가의 전신에 해당하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섭관 정치가 이루어졌으나 가마쿠라 시대가 개막되고 사무라이들이 권력을 가지면서 군권을 가지고 일본 동부 지방의 통치를 담당하는 무가 정권(가마쿠라 막부)과 조정의 일반 업무 및 일본 서부 지방의 지배를 관장하는 문신 정권(조정)이 서로 협조, 제휴하면서 정무에 임하였다.

천황 및 공가는 정치적 식견을 상당 부분 갖춘 계층으로 나름대로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지니면서 호시탐탐 막부 타도를 구상하곤 했다. 예를 들어 가마쿠라 막부 초기 고토바 덴노는 막부로부터 실권을 되찾고자 조큐의 난을 일으켰으며 고다이고 덴노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도움을 받아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고 이후 자신을 배신한 다카우지가 무로마치 막부를 수립하고 새 천황을 옹립하자 바로 탈출하여 새로운 조정을 수립하여 남북조시대를 만들었다. 에도 막부 말기에 고메이 덴노는 막부가 무능한 쇼군의 재임과 쿠로후네 사건으로 인해 권위가 실추된 틈을 타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막부를 크게 흔들었다.[1]

가마쿠라 막부 시기까지는 공가가 정치적 실권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지만[2] 무로마치 시대부터는 점점 공가의 권한이 약해져서 유명무실해지고 사무라이 계층인 쇼군, 다이묘들이 실제로 일본 각지를 지배하게 되었다.[3] 따라서 공가도 천황처럼 세력을 잃고 정치적 실권 없이 오직 가문의 명예와 신분만으로 먹고 사는 집단으로 전락했다.

에도 시대 들어 공가 사회는 막부에게 보호받았지만 천황과 공가를 규제하는 법도가 확립되어 이를 바탕으로 에도 시대의 공무관계가 규정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와는 달리 에도 시대에 공가는 굉장히 높은 대접을 받아서 오섭가에 속하는 가문들은 황족들과 함께 대대로 딸을 쇼군에게 시집보내면서 권세를 누렸고 그보다 낮은 직위의 가문도 사무라이들에게 예법이나 다도를 가르치면서 부를 쌓았다. 그 유명한 추신구라 사건도 쇼군이 천황과 공가가 보낸 사절을 대접하던 중에 대접 업무를 담당한 사무라이들끼리 쪼인트를 까다가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렇듯 정치적 실권은 전무하나 어느 정도 일본 역사에 적지 않게 개입을 해 왔던 집단이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파일:Kuge-machi_map.jpg
막말교토고쇼 주변 구게마치([ruby(公家町, ruby=くげまち)])

남북조시대부터 공가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근왕주의 운동은 막말까지 이어졌으며, 사쓰마 번이나 조슈 번 출신의 사무라이들로 구성된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과 함께 공가는 일본의 개화 운동을 주도하고 막부를 타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메이지 유신 이후 공가의 절대다수는 새로운 귀족 신분인 화족으로 인정받았고, 고노에 후미마로 같은 총리대신도 배출하는 등 천 년 만에 실권을 되찾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쇼켄 황후데이메이 황후, 쇼와 덴노황태자비 후보 중 오섭가 출신을 보면 문신 사회의 관습은 한동안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4. 역할

아무리 실권이 미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얼마 안 되는 고급교육을 받았던 계층이었기 때문에 학문과 예술, 예법에 통달한 자들이 많았고 이들을 초빙해서 가르침을 받은 사무라이와 다이묘들이 매우 많았다.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무렵의 일본에서는 한자만 알아도 엄청난 지식인으로 대접받았으며 자기 이름 하나 쓸 줄 모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사람이 무력만으로 일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무라이들은 듣보잡 호족 세력이 군벌화한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탈영병이나 부랑자 출신인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출세하더라도 뼈대 있는 무가 가문들[4]에 비하면 혈통상의 이유로 열등감을 느끼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각종 학문과 예법을 어릴 적부터 수련해 왔던 공경들은 자연스럽게 상당한 대접을 받았다. 즉, 전국시대 셀럽. 종종 다이묘들에게 고용되어 책사 노릇을 맡은 공경도 있었다.

공가는 그런 사무라이들의 가문 세탁을 위한 아주 좋은 옵션이 되기도 했다. 전국시대다이묘들은 어떻게든 권력을 얻은 뒤에는 명문 무가나 공가의 방계 후손을 사칭하는 것이 기본이었으며[5] 나중에는 공경의 데릴사위양아들로 입적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세탁을 완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미천함과 근본없음의 대명사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고노에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는 꼼수로 지위를 빌어 일본에서 가장 고귀한 관직인 관백에까지 취임했으며 그 권위로 일본을 다스렸다.

오닌의 난처럼 극심한 환란이 아닌 '적당한 난리통'이 지속되는 경우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토 조정은 상당히 부유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는데 각지의 유력자들이 조정의 권위를 빌어 보기 위해서 천황과 공가에 꽤 많은 재물을 상납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서일본 최대 다이묘이자 백제 태자의 후손을 자칭했던 오우치 가문은 조정 관직을 얻기 위해 무려 황금 2000냥을 진상한 적도 있다.[6] 에도 막부 초기에는 개별 다이묘들이 사사로이 조정에 상납금을 주고 조정 관위를 받는 행위를 금지시키기도 했지만 에도 막부 중후기 이후에는 오히려 에도 막부 측에서 다이묘들이 적절한 조정 관위를 받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에도 막부 시기부터는 공가의 중요도가 다소 떨어졌다. 전란과 하극상의 시대가 끝나면서 더 이상 여러 공가에게 무가의 정치적 파트너가 될 기회가 두루 돌아가지 않게 되고 막부가 파트너로 선택한 오섭가만이 그 지위를 독점하게 되었으며 더욱이 국가적 안정기가 길어지면서 공가를 대접하고 선망해야 하는 '무식한 사무라이들'이 더 이상 배출되지 않게 되었다. 사무라이가 칼질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사무라이 집안에서 태어나야만 될 수 있는 말만 "무가"이지 사실상 제2의 귀족 계층으로 정착해 버렸다. 무사 계층의 학식 수준도 높아져서 유학[7]난학을 공부하고 책을 번역하는 사무라이가 나타날 정도였다. 하지만 어려운 전통 예법이나 천황을 비롯한 황족들에 대한 의례를 제대로 아는 이는 공경들뿐이었으므로 공가 출신자들은 사무라이들의 전속 예절 교육 강사 노릇을 하는 등 여전히 무사들의 흠모를 받았다.

5. 가격(家格)

교토고쇼의 남상(南廂, 귀족이나 시종들이 천황을 알현하기 위해 대기한 곳)에 오를 수 있는 승전(昇殿)의 자격을 허가받은 당상가와 승전의 자격이 없는 지하가로 나뉘었는데 에도 말엽에 당상가는 137가, 지하가는 460여 가가 있었다.

5.1. 섭가(摂家)

[ruby(摂家, ruby=せっけ)]

섭정, 관백을 맡을 수 있는 다섯 가문으로 모두 후지와라 씨족, 그 중에서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적통 계열인 미도류(御堂流)에 해당하는 가문들이다. 섭관가([ruby(摂関家, ruby=せっかんけ)]), 집병가([ruby(執柄家, ruby=しっぺいけ)]), 오섭가([ruby(五摂家, ruby=ごせっけ)])라고도 부른다. 메이지 유신 이후 공작이 되었다. 이들의 가업은 유소쿠코지쓰[8]다.

5.2. 청화가(清華家)

[ruby(清華家, ruby=せいがけ)]

초기에는 태정대신까지 오르고 황후 자리도 내놓았으나 에도 시대로 가면 태정대신의 자리는 도쿠가와 가문이 독점한 쇼군직이나 섭관가만이 오를 수 있었던 섭정, 관백을 역임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만 임명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실질적으로 좌대신까지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본래 화족은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들만을 칭하던 명칭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후작이 되었다.

다이고와 히로하타의 2가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청화가에 편입된 가문이기 때문에 같은 청화가라도 초기부터 다른 가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취급을 받았으며 이 2가문을 제외한 나머지 가문을 7가로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5.3. 대신가(大臣家)

[ruby(大臣家, ruby=だいじんけ)]

청화가 다음가는 가문. 본래 청화가의 서류 가문으로, 청화가에 준하여 승진한다. 대신직에 결원이 발생할 경우 대신가 구성원은 대납언에서 근위대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내대신으로 승진할 수 있지만 청화가와 달리 근위대장을 대신과 겸직할 수 없다. 명목상 승진 한계는 태정대신이지만 우대신까지 승진한 예도 드물고 내대신을 넘어 승진한 사례는 매우 적다. 메이지 유신 이후 백작이 되었다.

5.4. 우림가(羽林家)

[ruby(羽林家, ruby=うりんけ)]

대신가 다음으로 명가와 동렬이며 에도 시대 무가관위에서 각 다이묘 가문에 주어지는 가격에 상당한다. 근위소장 및 중장을 겸해 참의에서 중납언, 최고 대납언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우림"이란 "날개(우)와 같이 빠르고 숲(림)과 같이 많다"는 뜻으로, 중국에서 북두성을 수호하는 별의 이름인데 그것이 변하여 황제를 지키는 궁중 숙위장 이름이 되었으며 일본에서는 근위부의 당명을 우림이라고 하여 근위장을 겸하는 가문들을 "우림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자작~백작이 되었다. 1884년 서임 당시 백작위를 받은 가문은 굵은 글씨로 표시한다.
우림가 가문들 [ 펼치기 · 접기 ]
*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 23가: 산조, 사이온지, 도쿠다이지, 기쿠테이 등 간인류 계통 청화가 4가의 분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 아네가코지(姉小路) - 가업은 카구라(神楽), 에도 시대 봉록은 200석, 문장은 렌교타스키(連翹襷)이며, 신가로 분류된다.
  • 아노(阿野) - 가업은 카구라(神楽), 에도 시대 봉록은 478석, 문장은 가라하나(唐花)이며, 구가로 분류된다.
  • 우메조노(梅園) - 가업은 없고, 에도 시대 봉록은 150석, 문장은 후지토모에(藤巴)이며, 구가로 분류된다.
  • 우라쓰지(裏辻) - 가업은 없고, 에도 시대 봉록은 150석, 문장은 후지토모에(藤巴)이며, 신가로 분류된다.
  • 오기마치(正親町) - 가업은 쟁과 필도, 에도 시대 봉록은 353석, 문장은 미쓰후지토모에(三つ藤巴)이며, 구가로 분류된다.
  • 오미야(大宮) - 가업은 없고, 에도 시대 봉록은 130석, 문장은 히다리미쓰토모에(左三つ巴)이며, 신가로 분류된다.
  • 오구라(小倉) - 가업은 카구라(神楽), 에도 시대 봉록은 150석, 문장은 미기미쓰토모에(右三つ巴)이며, 구가로 분류된다.
  • 오시코지(押小路) - 가업은 없고, 에도 시대 봉록은 130석, 문장은 무쓰초지(六つ丁字)이며, 신가로 분류된다.
  • 가자하야(風早) - 가업은 다도(茶道), 에도 시대 봉록은 30석, 문장은 가라하나(唐花)이며, 신가로 분류된다.
  • 가와바타(河鰭) - 가업은 카구라(神楽), 에도 시대 봉록은 100석이었다가 후에 152석으로 올랐다. 문장은 가라하나(唐花)이며, 구가로 분류된다.
  • 시게노이(滋野井) - 가업은 신악과 유소쿠코지쓰, 에도 시대 봉록은 180석, 문장은 가라하나비시(唐花菱)이며, 구가로 분류된다.
  • 시미즈다니(清水谷) - 가업은 서도, 생황, 능악(能楽), 카구라(神楽), 문장은 와리비시(割菱), 에도 시대 봉록은 200석, 구가로 분류된다.
  • 다카마쓰(高松) - 가업은 없고 문장은 가라하나(唐花), 에도 시대 봉록은 30석, 신가로 분류된다.
  • 니시요쓰쓰지(西四辻) - 가업은 생황, 문장은 가라하나(唐花), 에도 시대 봉록은 30석, 신가로 분류된다.
  • 하시모토(橋本) - 가업은 피리, 가몬(家紋), 문장은 오나가토모에(尾長巴), 에도 시대 봉록은 500석, 구가로 분류된다.
  • 하나조노(花園) - 가업은 비파, 문장은 가라하나(唐花), 에도 시대 봉록은 150석이며, 신가로 분류된다.
  • 무샤노코지(武者小路) - 가업은 가도(歌道), 문장은 가라하나(唐花), 에도 시대 봉록은 130석이며, 신가로 분류된다.
  • 야마모토(山本) - 가업은 없고, 문장은 가라하나(唐花), 에도 시대 봉록은 175석이며, 신가로 분류된다.
  • 요쓰쓰지(四辻) - 가업은 카구라, 와곤, 쟁이고, 문장은 가라하나(唐花), 에도 시대 봉록은 200석이며, 신가로 분류된다.
  • 후지와라 남가에 속하는 가문들이었지만 전국 시대에 한번 단절되었다가 에도 시대 초기에 후지와라 북가 간인류에 속하게 된 3개 가문들이다.
  • 야부(藪) - 전국시대에 2번 정도 중절을 반복하다가 에도 시대 초기에 부활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가업은 카구라와 쟁, 문장은 마루니다키쿄요(丸に抱き杏葉), 에도 시대 봉록은 180석이었지만 이후 150석으로 감면당했으며 에도 시대에 부활한 관계로 신가로 분류된다.
  • 나카조노(中園) - 가업은 없고, 문장은 가라하나(唐花), 에도 시대 봉록은 130석, 종가인 야부가가 신가로 분류되는 관계로 신가로 분류된다.
  • 다카오카(高丘) - 가업은 없고, 문장은 하나나시교요(花なし杏葉), 에도 시대 봉록은 30석, 여기도 마찬가지로 종가인 야부가가 신가로 분류되는 관계로 신가로 분류된다.
  • 후지와라 북가 시조류에서 시작했지만 간인류에 편입된 가문이다.
  • 소노이케(園池) - 가업은 없고. 문장은 가라하시비시(唐花菱), 에도 시대 봉록은 30석이며 3대 당주인 긴야(公屋)가 대신가인 오기마치산조가의 유자가 되었다가 환속했기 때문에 간인류에 편입되게 된다.
  • 후지와라 북가 가산노인류 5가: 가산노인과 오이노미카도 등 모로자네류 또는 가산노인류 청화가의 분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 나카야마(中山) - 가업은 꽃(花), 문장은 하나카키츠바타(花杜若), 에도 시대 봉록은 200석. 구가로 분류된다. 메이지 덴노의 생모인 나카야마 요시코의 집안이기도 하다. 작위는 후작
  • 난바(難波) - 가업은 게마리(蹴鞠), 문장은 가라하나비시(唐花菱), 에도 시대 봉록은 300석, 구가로 분류된다.
  • 아스카이(飛鳥井) - 가업은 와카, 게마리, 서도, 문장은 이초(銀杏), 에도 시대 봉록은 928석, 구가로 분류된다.
  • 노미야(野宮) - 가업은 없고, 문장은 가키쓰바타(杜若), 에도 시대 봉록은 200석, 신가로 분류된다.
  • 이마키(今城) - 가업은 와카와 유소쿠코지쓰, 문장은 하나카키쓰바타(花杜若), 에도 시대 봉록은 181석이며, 신가로 분류된다.
  • 후지와라 북가 나카미카도류 9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차남 요리무네를 시조로 하는 분파인 나카미카도류에 속하는 가문들이다.
  • 나카미카도/마쓰키(中御門/松木) - 가업은 생황, 문장은 교요(杏葉), 에도 시대 봉록은 341석, 구가로 분류된다.
  • 지묘인(持明院) - 가업은 신악과 능서, 문장은 나카미카도가와 동일하며, 에도 시대 봉록은 200석, 구가로 분류된다.
  • 소노(園) - 가업은 비파, 화도, 에도 시대 봉록은 186석, 문장은 지묘인가와 동일하고, 구가로 분류된다. 메이지 덴노의 측실인 소노 사치코가 이 집안 출신이다.
  • 히가시조노(東園) - 가업은 신악, 에도 시대 봉록은 180석, 문장은 지묘인가와 동일하다. 신가로 분류된다.
  • 미부(壬生) - 가업은 없고, 에도 시대 봉록은 130석, 신가로 분류되고, 문장은 오이카케카키츠바타(老懸杜若)이며 작위는 자작에서 백작으로 승작되었다. 이 가문의 당주인 미부 모토히로(壬生基博)가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차남이자 나루히토 덴노의 고종사촌 형이다.
  • 다카노(高野) - 가업은 신악, 에도 시대 봉록은 150석, 문장은 지묘인가와 동일하며, 신가로 분류된다.
  • 이와노(石野) - 가업은 신악, 에도 시대 봉록은 30석, 문장은 지묘인가와 동일하며, 신가로 분류된다.
  • 이시야마(石山) - 가업은 서도, 에도 시대 봉록은 30석, 문장은 지묘인가와 동일하며, 신가로 분류된다.
  • 롯카쿠(六角) - 가업은 서도와 신악, 에도 시대 봉록은 30석, 문장은 마루니다키하나쿄요(丸に抱き花杏葉)이며, 신가로 분류된다.
  • 후지와라 북가 미코히다리류 4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6남 나가이에를 시조로 하는 분파인 미코히다리류에 해당하는 가문들이다.
  • 레이제이(上令泉/카미레이제이)
  • 레이제이(下冷泉/시모레이제이)[16]
  • 후지타니(藤谷)
  • 이리에(入江)
  • 후지와라 북가 시조류 7가: 후지와라노 이에나리를 시조로 하는 분파다.
  • 시조(四条)
  • 야마시나(山科)
  • 니시오지(西大路)
  • 와시노오(鷲尾)
  • 아부라노코지(油小路)
  • 구시게(櫛笥)
  • 하치조(八条)
  • 후지와라 북가 미나세류 5가: 후지와라노 지카노부를 시조로 하는 분파[17]다.
  • 미나세(水無瀬)
  • 시치조(七条)
  • 마치지리(町尻)
  • 사쿠라이(桜井)
  • 야마노이(山井)
  • 후지와라 북가 타카쿠라류 2가: 후지와라노 나가라의 후손 다카쿠라 나가스에를 시조로 하는 분파이다. 2가 모두 분가로, 정작 종가인 다카쿠라는 상대적으로 격이 낮은 반가에 위치해 있다.
  • 호리카와(堀河)
  • 히구치 (樋口)
  • 우다 겐지(宇多源氏) 3가: 우다 덴노를 시조로 하는 우다 겐지 일파이다.[18]
  • 니와타(庭田)[19][20]
  • 아야노코지(綾小路)
  • 오하라(大原)
  •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8가: 청화가 공가의 분가들이다.
  • 로쿠조(六条)
  • 이와쿠라(岩倉)
  • 지쿠사(千種)
  • 히가시쿠제(東久世)
  • 구제(久世)
  • 우메타니(梅溪)
  • 오타기(愛宕)
  • 우에마쓰(植松)
(편집 중)

5.5. 명가(名家)

[ruby(名家, ruby=めいけ)]

우림가와 동렬로 대납언이 승진 한계인 것은 우림가와 같지만 우림가가 근위중장 등의 무관직계를 거쳐 대납언으로 승진한 반면 명가는 시종, 변관 등의 문관 사무직을 통해 중납언, 대납언으로 승진했다. 히노류는 시종을, 카쥬지류는 정중좌를 초임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막부 말 당시 명가는 30가문 정도 남아있었는데 이 중 히노, 히로하시, 가라스마루, 야나기하라[21], 다케야, 우라마쓰, 간로지, 하무로, 간쥬지, 마데노코우지, 세이칸지, 나카노미카도, 보우조는 십삼명가(十三名家)라고 불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자작이 되었다.
명가 가문들 [ 펼치기 · 접기 ]
* 후지와라 북가 히노류 12가: 후지와라노 이에무네를 시조로 하는 분파로 무로마치 막부 초기부터 아시카가 가의 편을 든 덕에 막부 중기까지 쇼군가의 외척 지위를 과점하면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 히노(日野)
    • 히로하시(広橋)
    • 야나기하라(柳原)
    • 가라스마루(烏丸)
    • 다케야(竹屋)
    • 히노니시(日野西)
    • 가데노코지(勘解由小路)
    • 우라마쓰(裏松)
    • 도야마(外山)
    • 도요오카(豊岡)
    • 미무로도(三室戸)
    • 기타코지(北小路)
  • 후지와라 북가 카쥬지류 13가: 후지와라노 사다카타를 시조로 하는 분파로 주로 조정 실무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기록을 중시하는 가풍을 가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본가 및 분가 당주들이 남긴 기록들이 오늘날까지 많이 남아 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 여러 분가로 나누어졌는데 이들 중 가장 장유의 서열이 높은 간로지가 종가 포지션이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전국시대까지 간토 간레이를 역임한 것으로 유명한 무가 우에스기(上杉)가 카쥬지류 계통이었다.
  • 간로지(甘露寺)
    • 가주지(勧修寺)
    • 하무로(葉室)
    • 마데노코지(万里小路)
    • 세이칸지(清閑寺)
    • 나카노미카도(中御門)
    • 보조(坊城)
    • 시바야마(芝山)
    • 이케가미(池尻)
    • 우메가코지(梅小路)
    • 오카자키(岡崎)
    • 호나미(穂波)
    • 쓰쓰미(堤)
  • 간무 헤이시 타카무네오류 3가: 니시노토인 유키토키를 시조로 하는 니시노토인류의 분가 3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가인 니시노토인은 상대적으로 격이 낮은 반가에 위치해 있다.
  • 히라마쓰(平松)
  • 나가타니(長谷)
  • 가타노(交野)
(편집 중)

5.6. 반가(半家)

[ruby(半家, ruby=はんけ)]

당상관 자리를 차지하던 가문 중 최하위로 원평등귤(源平藤橘)을 비롯하여 특수한 기술로서 조정을 섬겼다. 벼슬은 우림가와 명가에 준하여 승진하지만 공경에 올라도 비참의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자작이 되었다. 그래도 종4위~5위의 당상관 자리를 차지하던 만큼 결코 한미하지는 않았는데 전근대 일본의 관위가 30개나 된 걸 생각하면 대충 감이 올 것이다.

6. 공경(公卿)

공가 중에서도 일본율령에 의거하여 국정을 담당하는 태정관(太政官)의 간부급 고관들은 특별히 공경([ruby(公卿, ruby=くぎょう)])이라고 불렀는데 협의의 공경은 이 공경을 의미한다.

공경은 문자 그대로 삼공구경(三公九卿)[34]의 약칭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율령이 같지 아니하였으므로 정확히 같지는 않았지만 태정대신(太政大臣), 좌대신(左大臣), 우대신(右大臣)을 공이라고 부르고[35], 대납언(大納言) 이하 종삼위 이상의 비 참의(非参議)를 경이라고 칭한 것에서 유래했다.

거의 모든 율령이 그러하듯 공경이 되는 데는 엄격한 기준이 있었는데 능력보다는 혈통에 근거한 것이었다. 일례로 당상관 가문이 아닌 집안에서 공경이 나온 경우에는 공경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앉아 회의를 할 수 없었는데 이는 율령에 의해 정해진 공경보다 관례로 내려오는 전상(殿上)/지하(地下)가의 구분이 더 엄격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하가나 무가에서 공경이 나온 예는 극히 드물다.[36]

공경은 다음과 같은 관직으로 구성된다.

6.1. 대신(大臣)

율령제하에서 중요한 정치 결정을 담당하는 태정관의 장관(長官[37])이다. 아주 드물게 귀족이나 무가 등에서 나오는 경우가 있었으나 대부분은 섭가(摂家), 청화가(清華家), 대신가(大臣家) 출신자들이 차지했다.

6.1.1. 태정대신(太政大臣)

정원 1명. 훈독으로는 '오오이마츠리고토노오오마에츠기미(おほいまつりごとのおほまへつぎみ)'라고 한다. 별칭은 상국(相国)이나 사공(司空) 등 한나라삼공의 이름으로 불렀다. 관위 상당은 일품(황족) 또는 정일위, 종일위(인신). 요로령의 직원령에서 태정대신을 "한 사람 사범으로서 사해의 모범이 된다. 나라를 다스리고 도를 논하며 음양을 섭리한다. 적당한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비워 둔다(師範一人、儀形四海、経邦論道、燮理陰陽、无其人則闕)."고 규정했는데 이 구절에서 여기서 마지막 두 자를 따와서 측궐(則闕)이라고도 불렀다. 율령이 정한 대로라면 중국의 삼사와 삼공을 모두 합친 것보다 권한이 더 커서 공석으로 놔둔 기간이 길었다.

6.1.2. 좌대신(左大臣)

정원 1명. 훈독으로는 '히다리노오오이마치기미(ひだりのおおいもうちぎみ)' 라고 한다. 별칭은 좌부(左府) 또는 좌승상(左丞相). 관위 상당은 정이위, 종이위. 이치노카미라고 하여 실제 국정을 담당하는 대신 중 최고위였으며 단조다이에서 규탄할 수 없는 사건 등도 규탄할 수 있었다.

6.1.3. 우대신(右大臣)

정원 1명. 훈독으로는 '미기노오오이마치키미(みぎのおほいまちきみ)'. 별칭은 우부(右府) 또는 우승상(右丞相). 직장은 좌대신과 동일하되 좌대신이 결원중이거나 사정이 있어 출사하지 못한 경우, 좌대신이 관백 등을 겸하고 있을 경우에 태정관을 통솔한다.

6.1.4. 내대신(内大臣)

정원 1명. 율령에는 규정이 없으나 직장은 좌대신, 우대신과 같다. 대신가의 승진 한계선. 별명은 내부(内府) 또는 내승상(内丞相). 사극 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나이후(内府)라고 부르는 것이 당시 이에야스의 관위가 내대신이었기 때문이다. 상위 대신들이 결원일 경우 권한대행을 맡는다.

6.2. 납언(納言)

納言이란 말을 모은다는 뜻인데 아랫사람들의 말을 위에 상주하고 윗사람의 말을 아래로 전한다는 의미다. '모노모스츠카사(ものまうすつかさ)'라고도 한다. 납언직에는 대납언, 중납언, 소납언이 있으나 품계가 낮고 직무가 많이 다른 소납언은 일반적으로 납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6.2.1. 대납언(大納言)

정원 없음. 훈독으로는 '오오이노모노모스노츠카사(おほいものまうすのつかさ)'. 관위 상당은 삼품, 사품(황족), 정삼위(인신). 상하의 말을 전달하고 대신과 함께 정무를 담당하며 달리 아상(亜相) 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고 한다.

대신은 극히 적은 특권층만이 오를 수 있었던 것에 반하여 대납언은 그 밑의 귀족들도 오를 수 있는 관직이었기 때문에 항상 과밀했다. 이로 인하여 본래 2명이었던 정원이 10명까지 불어났다가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결국 정관(正官)을 없애고 권관(権官)[38]만을 두기에 이르렀다. 우림가(羽林家), 명가(名家), 반가(半家) 중 일부의 승진 한계선이 보통 대납언이었다.

6.2.2. 중납언(中納言)

정원 없음. 훈독으로는 '나카노모노모스츠카사(なかのものまうすつかさ)'라고 한다. 별칭은 황문시랑(黄門侍郎). 관위 상당은 종삼위, 직장은 대납언과 같다. 정원의 추이도 비슷한데 본래 참의를 15년 이상 지낸 자에 한하여 승진 자격이 주어졌으나 이를 채우는 귀족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기준이 유명무실해졌고 이와 함께 정원도 본래의 3명에서 10명까지 늘어났다가 남북조 시대 이후 정관을 폐지하였다.

승진의 기준이라고 하는 참의 15년 재임 이외에도 참의로서 좌대변(左大弁), 우대변(右大弁)[39]을 겸하는 자, 참의로서 근위중장(近衛中将)[40]을 겸하는 자, 참의로서 검비위사별당(検非違使別当)[41]를 겸하는 자는 연공서열만으로 츄나곤을 지내는 자보다도 우선적 또는 단기간에 승진할 수 있었고 이후 대납언에 이를 가능성도 더 컸으며 이 모든 기준보다 우선하는 것은 천황, 섭정, 관백 등 높으신 분들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6.3. 참의(参議)

정원 없음. 조정에서 대신, 납언 다음으로 높은 관직. 훈독으로는 '오오마츠리고토(おほまつりごと)'. 별칭은 재상(宰相) 또는 간의대부(諌議大夫). 참정조의(參政朝議)의 약칭으로 대신, 납언 등과 함께 국사를 논하는 것을 직책으로 한다. 관위 상당 없음.[42] 그러나 업무가 업무인 만큼 참의에 오른 자는 위계가 종삼위에 이르지 못하였더라도 공경으로 취급한다. 참의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영예였던 만큼 승진 조건이 까다로웠는데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장인두[43], 좌우대변, 근위중장[44], 좌중변, 식부조를 지낸 자.
2. 5개국의 국사를 무사히 지낸 자.
3. 삼위의 위계를 가지는 자.

변관[45]이나 장인두를 지낸 참기는 실무자로 취급받았다.

6.4. 비참의(非参議)

이건 관직명이 아니라 '참의가 아니지만 참의를 지내도 될 만한 자' 정도의 뜻이다. 넓은 의미로는 이하의 1~3을 전부 가리키지만 공경의 구성원을 가리킬 때에는 1만을 지칭한다.

1. 참의를 지내지 아니하였으나 위계가 종삼위 이상인 자.
2. 이미 참의를 지낸 종삼위 미만인 자.
3. 참의 임용 자격을 가진 사위의 자.

7.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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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구가와 신가

가격 안에 또 가격이 있는데 자세히 구가(旧家)와 신가(新家)로 나뉜다. 구가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있었던 가문들이고 신가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에도 시대가 성립할 즈음에 생긴 가문들이다. 137개의 당상가문 중 절반 가까이인 68개 가문[46]이 신가에 속하였지만 당상가문들을 구가와 신가로 나눈 건 1750년 관위어정(官位御定)에서 나눔이 시초이다.

신가가 생기게 된 계기는 도쿠가와 막부의 대조정 정책으로 어소(御所, 천황·황후·원 등의 거주지)가 다수 생겨났기 때문이다. 일시적으로 레이겐 천황의 어소·고사이 덴노의 법황어소·히가시후쿠몬인(고미즈노오 덴노의 황후 도쿠가와 마사코)의 어소·고미즈노오 천황의 어소·메이쇼 천황의 어소 등 5개 이상의 어소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어 각 어소를 섬기는 공가가 필요해졌는데 종래의 공가만으로는 이러한 수요를 충족할 수 없었던 차에 막부에서 공가의 영지를 더 늘려 새로운 공가를 설립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다. 그래서 에도 초기에 집중하여 신가가 많이 설립되었지만 신가가 대부분 우림가·명가·반가에 속해 있어 구가에 비해 공경으로 승진해도 비참의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하치조노미야에서 신적강하한 히로하타 가와 이치조 가에서 분가한 다이고 가문에서 대신까지 승진한 사람도 있어 이 둘은 대부분의 다른 신가와의 대우 차이는 매우 달랐기 때문에 이 두 집안을 신가로 묶어도 되는지는 의문시하는 설도 있다.

9. 여담

근세까지 이어진 일본 공가와 귀족 사회의 존재는 한국사와 비교하면 신라의 골품제가 19세기 개화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빗댈 수 있으며 귀족 사회라는 점에 있어서는 고려 문벌귀족, 중국 문벌귀족과도 비슷하다. 다만 당나라선비족한족 혼혈의 이씨 황실도 최고 서열로 취급하지 않던 문벌귀족들과 달리 일본 황실은 신격화와 만세일계라는 역사가 있어 무시는 당해도 최고 가문으로 여겨졌다.

10. 창작물

창작물, 특히 막부 시기를 다룬 작품에서 공가의 귀족들은 대부분 겉으로 보기에는 놀고 먹기만 하는 니트지만 속으로는 과거 헤이안 시대 귀족정치의 영화를 꿈꾸며 막부를 타도하고 땅에 떨어진 조정의 권위, 정확히는 자신들의 권위를 되찾기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는 흑막이자 하라구로 속성을 띄고 있다.

일본 창작물에서 묘사된 공가 귀족들의 스테레오타입은 다음과 같다.

[1] 다만 고메이 덴노의 목적은 막부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굴복시키고 자기 뜻대로 굴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여동생을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시집보내 혼맥을 만들고 막부를 적대하며 폭주한 조슈 번의 정벌을 명하는 등 친막부 행보도 보였다.[2] 대한민국승려이자 작가인 법정의 에세이인 무소유에 의하면 가마쿠라 막부 시기 일본에 청렴하고 검소한 삶으로 명망이 높던 도엔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그의 제자가 천황과 조정 대신들에게 아첨해서 장원(=영지)을 하사받았다가 스승인 도엔에게 파문당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이때까지는 조정이 자신들과 가까운 승려나 사무라이들에게 영지를 내릴 정도로 막부와는 별개로 자기들만의 권력기반을 갖추었다는 뜻이다.[3] 특히 오닌의 난은 덴노고 공가고 입지를 추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본부격인 교토가 아작났기 때문. 덴노조차 생계를 알아서 꾸려가야 했을 정도로 비참했으니 그 아래는 오죽할까. 그래도 공가는 장사하든 사무라이의 가신이 되든 사무라이들에게 예절을 가르치든 어떻게든 일이라도 할 수 있었고 극단적으로는 자신도 칼을 들어 다이묘가 된 자도 있었지 덴노나 최고위 공가인 고셋케는 그것도 못 했다.[4] 일본 역사상 가장 먼저 득세했던 미나모토 가문이나 타이라 가문은 아예 천황가의 먼 방계 후손들이었으므로 사무라이들 사이에서는 성골이나 진골 같은 대접을 받았다. 우에스기 가문 같이 대놓고 공가 출신인 다이묘도 있었다.[5] 오우치처럼 백제 부여씨 왕족의 후손을 자처한 일부 예외를 제외한 대부분의 다이묘는 천편일률적으로 겐페이토키츠(미나모토, 타이라, 후지와라, 타치바나)를 사칭했다.[6] 이와미 은광을 차지하고 주코쿠규슈 사이의 주요 무역 거점을 차지하고 조선과도 수백 년 동안 독자적으로 통교하고 있어서 부유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의 다른 어지간한 다이묘들이 보통 크게 내봐야 황금 200냥, 진짜 많이 내봐야 황금 500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7] 아메노모리 호슈미토 코몬처럼 유학자를 겸하는 사무라이가 나타났다.[8] 有職故実. 옛 조정이나 무가의 예식, 전고, 관직 등을 연구하는 학문[9] 더 정확히는 후지와라 북가 계통. 후지와라 남가가 종가 가문이다. 물론 후지와라 북가가 훨씬 성공했다. 후지와라 남가의 종가인 타카쿠라(高倉, 반가의 타카쿠라 가문과 관련 없음)가는 전국시대에 한 번 단절되었다가 에도 시대 초기에 부활하여 간인류 계통의 야부가로 부활했지만 종가의 이미지와 달리 정작 격이 떨어지는 우림가에 속한다.[10] 후지와라노 다다미치의 자식 3명의 분쟁 끝이 갈라진 가문들 중 하나로 다다미치의 5남이자 3명 중에서는 둘째에 해당하는 마쓰도노 모토후사를 시조로 하는 가문. 원래대로면 고노에구조와 마찬가지로 섭가의 지위를 유지했을 혈통이지만 초대 모토후사가 급성장하던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대립한 끝에 다자이후로 좌천되고 이후 후손들은 남북조 시대에 남조의 편을 드는 등 정치적인 실패가 누적되어 가문이 쇠퇴했고 결국 센고쿠 시대에 가문 자체가 단절되었다.[11] 13세기 싯켄 호조씨가마쿠라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던 무렵으로, 미나모토 요리토모 직계의 혈통이 끊겨 옹립되었던 4대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츠네의 형제들이 각각 이치죠니죠의 초대 당주다.[12] 무라카미 덴노(村上天皇)의 후손에서 갈라진 미나모토 씨족[13] 그 외에도 4대 당주의 자식 대에서 나카노인과 같은 시기에 분기한 쓰치미카도(土御門), 호리카와(堀川) 등의 분가들이 있었으나 두 가문 모두 무로마치 시대에 단절되었다. 가격은 본가와 같은 청화가.[14] 통칭 간인다이진(閑院大臣). 위에서 언급된 구가의 시조인 무라카미 덴노가 킨스에의 외숙부에 해당하며 동시에 누나인 후지와라노 안시가 무라카미 덴노의 중궁이었는데 긴스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생모이자 무라카미 덴노의 친누나이기도 한 야스코 내친왕이 죽었기 때문에 중궁인 누이 안시에 의해 어릴 때부터 다른 황자들과 함께 궁에서 자랐다. 긴스에 본인은 미치나가 정권하에서 태정대신까지 올랐으나 그의 적손인 긴나리가 주나곤에 그치는 등 정권의 중심에서 멀어질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긴나리의 딸 시게코의 아들이 즉위에 성공해 시라카와 덴노가 되고 이후 토바 덴노 등 간인류를 외가로 둔 천황이 여럿 즉위하면서 자연스럽게 간인류는 후지와라의 여러 분파들 중에서도 미도류 다음가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15] 다만 이는 족보상이고 실제 혈통상 사이온지 긴모치는 황실 방계인 간인노미야의 후손이다.[16] 레이제이 3대 가주인 타메마사의 차남 모치타메를 시조로 하는 분가로 무로마치 막부 당시 실력을 인정받아 본가에서 독립해 레이제이의 성을 쓰는 것을 허락받아 세워진 가문이다. 본가와 분가 모두 레이제이씨를 칭했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본가 쪽을 카미레이제이, 모치타메의 분가를 시모레이제이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했다.[17] 더 거슬러 올라가면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 실권을 두고 대립하던 미치나가의 큰형 미치타카의 후예이기도 하다.[18] 이들은 아마고, 롯가쿠, 교고쿠 등 대체로 무가 계통으로 진출한 우다 겐지 일족 중에서는 드물게도 공가에 머문 부류다.[19] 그 일파 중 아쓰미 친왕의 아들이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정실 린시의 아버지이기도 한 미나모토노 마사자네를 시조로 한다.[20] 여담이지만 전국시대에 혼간지의 주지였던 겐뇨의 모친이 이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잇코잇키로 골머리를 앓던 여러 다이묘 가문과 혼간지 본산의 대화를 주선하는 중개역을 맡기도 했다.[21] 다이쇼 덴노의 생모 야나기하라 나루코의 가문[22] 세이와 덴노(清和天皇)에서 갈라진 미나모토 씨족[23] 우다 덴노(宇多天皇)에서 갈라진 미나모토 씨족[24] 카잔 덴노(花山天皇)에서 갈라진 미나모토 씨족[25] 간무 덴노(桓武天皇)에서 갈라진 타이라 씨족[26]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씨족이다.[27] 일본 역사상 최초로 일본(日本)이라는 국호와 천황(天皇)의 칭호를 사용한 덴무 덴노(天武天皇)의 아들이자 준닌 덴노(淳仁天皇)의 아버지 추존 스도진쿄 황제(崇道盡敬皇帝) 토네리 친왕(舎人親王)의 후손으로, 세이 쇼나곤이 기요하라 씨족 출신이다.[28] 신자체로는 沢이고 신자체로 표기하는 경우도 표기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이 성씨는 정체로 쓴다.[29] 아스카 시대 신토(神道)에 관한 일을 맡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집안 나카토미(中臣) 씨족의 분가로, 후지와라 씨족의 시조 후지와라노 후히토가 (덴무 덴노의 사생아라는 설도 있지만) 그의 아들이기 때문에 후지와라의 사촌뻘쯤 되는 집안이다.[30] 아스카 시대부터 조정에서 활동한 오래된 호족으로 이름처럼 헤이안 시대까지 신도, 음양도와 관련된 일을 주로 맡았다.[31] 아베 신조의 가문이 아니라 아스카 시대부터 정계의 중진이었던 대호족 아베 씨족을 말한다. 아베 신조도 한자는 똑같지만 아베 신조의 아베씨는 무가인 오슈아베씨(奥州安倍氏)로, 아예 다른 가문이다. 여기서 설명하는 아베씨는 헤이안 시대에는 주로 음양도의 음양사 일을 관할했고 아베노 세이메이가 이 씨족 출신이다.[32] 아스카 시대부터 꾸준히 활약하던 호족 집안으로, 단바 국(丹波國)이 발원지였다.[33] 아스카 시대부터 꾸준히 활약하던 호족 집안으로 오에(大江) 일대가 발원지였다.[34] 명칭의 유래는 중국의 진한시대의 관위인 3공9경으로 3공은 승상, 어사대부, 태위이고 9경은 태상, 광록훈, 위위, 태복, 정위, 대홍로, 종정, 대사농, 소부를 가리킨다.[35] 사실 공석이었던 적이 많았던 태정대신을 빼고 내대신을 넣어 삼공이라고도 한다.[36] 관위 인플레가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시절에도 히데요시의 근친만이 누릴 수 있는 지위였다.[37] 율령하의 사등관 중 최상위 사등관은 장관(長官), 차관(次官), 판관(判官), 주전(主典)의 순서다.[38] 임시 관직이라는 의미다.[39] 각 성청을 관리하는 실무직[40] 중앙군 부사령관[41] 교토의 치안 및 민정 총괄[42] 따라서 위계보다 높은 관직을 맡을 때 붙이는 守나 이와 반대의 경우에 붙이는 行을 붙이지 않고 참의 종이위, 참의 종사위하 등으로 지칭한다.[43] 천황의 비서실장.[44] 장기간 근속에 한함.[45] 좌우대변 등.[46] 단, 세이카케인 히로하타가와 다이고가를 포함시킬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47] 동그랗게 점을 찍은 모양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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