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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0:47:59

신분제도

신분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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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괄사3. 사례
3.1. 한국
3.1.1. 고조선3.1.2. 고구려3.1.3. 백제3.1.4. 신라3.1.5. 발해3.1.6. 고려3.1.7. 조선3.1.8. 대한제국~일제강점기3.1.9. 대한민국
3.2. 세계
3.2.1. 전근대 동아시아
3.2.1.1. 중국3.2.1.2. 일본
3.2.2. 인도3.2.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3.2.4. 태국3.2.5. 유럽
3.2.5.1. 영국
4. 오늘날 경제적 차별과 신분제5. 창작물6. 게임에서의 대우에 대한 비유7. 여담

1. 개요

신분제도(, caste system)는 '개인의 사회적 신분이 광범위하고 세습적으로 고정된 계급 제도'이다. 즉, 신분제란 정의에서부터 인간의 평등을 부정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서열의 기준은 혈통, 가문,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논리 등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주로 이루어진다.

2. 개괄사

전근대 사회에서는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났지만 근대에 부르주아 세력이 민주주의/자유주의 혁명을 일으켜 귀족 세력을 타도함에 따라 만민 평등 사상이 퍼지기 시작한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부르주아는 평민이지만 재력만을 갖춘 존재인데[1] 이들이 귀족의 정치적 패권을 빼앗기 위하여 일반 대중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신분제도의 파괴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2] 프랑스 혁명에서 상당수 귀족들, 심지어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마저도 단두대로 처형당한 사건은 신분제도 붕괴의 단초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3]

근대기에 같이 발생한 민족주의와 이를 바탕으로 탄생한 국민국가, 그리고 국민개병제 역시 신분제도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민족주의는 국가 (혹은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일대의 지역)의 다양한 인민들의 단결을 주장하는데, 각각의 신분으로 나뉘어 서로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신분제도에서는 통합된 단결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국민개병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소에 종처럼 부려먹는 게 제도적으로 가능한 신분제 국가에서 국가에 무한한 충성을 강요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4] 특히나 총력전을 겪은 국가에서는 기존의 신분 질서가 급격히 무너져내리는 양상을 보였다. 대한민국 역시 6.25 전쟁을 겪으면서 기존의 신분제에 대한 개념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국가 중 하나이다.

20세기 초에 나타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세계의 절반을 장악한 공산주의는 신분제도에 더욱 적대적이었다. 마르크스의 4대 사회발전론에서 귀족은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부르주아보다도 구태적인 중세 봉건제도의 상징으로 타도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득권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귀족 신분은 거의 소멸했으며 역시 왕국이 대부분 소멸해가는 과정 속에서 입헌군주제의 형태로 형식화되는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후진국을 막론하고 암묵적인 형태로 잔존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일단 군주가 존재한다면 일반 백성들과 왕족이라는 두가지 신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로 볼 수 있다. 개중엔 카스트 제도부라쿠민관습법 형태의 신분제의 흔적이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곳도 있다. 특히나 인종 차별인종이라는 혈통에 따른 차별이라는 점에서 아파르트헤이트처럼 제도화된다면 사실상 신분제나 다를 것이 없다.

대신 전 세계에서 이제는 신분제를 엄격하게 지키고 옹호하는 경우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기존 상류층의 권위적인 요소를 없애는 움직임이 활발하고 민주주의와 전통적 계급제가 동시에 있던 나라에서는 동양권보다 상류층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심하게 비판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나라 중 유명한 영국 같은 곳이라면 한국에서 종종 쓰이는 '신분 상승'이라는 말부터 자신들이 진정으로 지향하는 능력주의나 삶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념 때문에 수백년간 투쟁해 온 역사적 배경의 잔재로 사람들이 불편하게 여길 가능성이 크다. 서양 민주주의란 한국처럼 '양반' 같은 사람을 모두가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이상향이며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사회 구조는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인도에서조차 그 잔재가 남아 있을 뿐이지 카스트에 대한 차별을 대놓고 옹호하는 것은 금기시된다. 아예 영국 식민 지배가 카스트로 인한 갈등을 부추겼다는 주장마저 존재한다. 국제사회에서 노예제가 있다며 비판받는 아프리카의 모리타니에서도 일제강점기 형평운동과 같은 노예제 반대 운동이 존재한다. # 사실상 신분제를 국가가 유지하는 북한에서도 주민 반발을 우려하여 은밀하게 신분제를 유지하려고 하며, 그래도 부모의 출신 등으로 원하는 진로도 막히는 현실을 접하면 주민들은 상당히 불만을 갖는다. 심지어 과거의 신분제에서도 대부분의 하류 계층은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대한 자율성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그것이 상류층의 이해관계와 다를 수도 있었다.

현재는 일부 신분제의 잔재가 강한 국가에서도 전통적 상류층은 자신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권력을 갖추거나, 미디어까지 장악하여 그렇지 못한 계층보다 훌륭한 학식을 갖추고 부러워할만한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것이며, 능력주의 사회의 승자라는 관념을 주입하는 경우가 현재도 존재한다. 그런 나라에서조차 상류층이 아닌 사람은 문화에 따라 비판 방식은 다르지만 어쨌든 정치로든 대중문화를 통해서든 이를 비판하고 있다. 태국처럼 사람들이 신분에 '순응'한다고 알려진 나라에서도 완곡어법으로 사회를 매우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이 있다. 아무리 미디어나 교육을 통해 긍정적인 이미지로 현실을 왜곡해도 권력에 취해 만행을 저지르던 상류층의 횡포를 직접 겪다보면 그런 관념도 무너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지니는 권력이 커짐에 따라 재력을 지닌 자, 즉 부자들의 권력 행사가 만인의 평등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재력에 따른 상하관계 외에도 여러 갑을관계에 따른 갑질이 나타나고 있다. 일단 큰 돈을 지니고 있으면 돈을 벌기 쉬운 구조, 그리고 상속으로 부의 대물림이 이어지면서 양극화를 일으켜 계급 고착화를 가속하는 점 등이 지적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비록 고착화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태어난 그 즉시 결정되는 것은 아니고 유동적이며 개인의 행동에 따라 바뀔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전근대 사회의 신분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3. 사례

3.1. 한국

3.1.1. 고조선

8조법에 따라 절도 행위를 한 경우 노비로 격하한다는 규정을 갖고 있었고, 이로 말미암아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존재했을 거라고 추측되고 있다.

3.1.2. 고구려

고구려의 신분제 관련 기록은 매우 희박하며 단편적으로만 존재한다. 왕을 포함한 왕족, 준왕족(俊王族), 5부족의 우두머리인 대가(大加)와 하위 관료군, 호족 등을 가리키는 좌식자(坐食子) 등이 지배계층이며 노예, 농노(農奴), 일반 백성 등이 피지배계층인 하호(下戶)로 있었다.

3.1.3. 백제

불확실한 면이 있으나, 왕족과 더불어 해씨, 연씨, 협씨 등 8성씨의 왕비족이 왕족과 함께 지배계층의 최상층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이들 왕비족은 왕비를 배출하면 해당 씨족이 관직을 독점했기 때문에 실제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해씨, 진씨 등이 서로 비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암살을 통한 정권교체가 빈번했고 때문에 대성팔족 중 어느 한 가문이 장기간 독재를 하는 현상은 그다지 나타나지 않았다.

대성팔족 중에는 기존 마한, 가야에서 편입된 지방 귀족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목씨와 사씨, 그리고 국씨가 대표적이다. 목씨는 목지국에서 기원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있으며, 사씨는 금강 일대에 기반을 둔 귀족임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사씨는 근초고왕 시기 침미다례 정벌 관련으로 가문의 위신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성왕 때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면서 왕비를 배출해내는 등 최고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국씨는 주로 가야 외교 관련으로 등장했다는 점, 이라는 한자가 일본에서 카라로 읽히고, 가야는 가라라고 불렀다는 점에 연관성을 두어 추측되는 부분이다. 물론 자세한 기록이 없어 명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일단 고구려 침공 당시 지방의 토착 귀족들이 보낸 군대의 규모와 그리고 백제 후기까지 독자적 세력을 형성했던 침미다례의 예를 따지면 대성팔족은 아니지만 상당한 권세를 가진 마한계 귀족들도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야마토 왕권과의 관계가 각별했던 만큼 일본계 귀족들도 존재한다. 물부순의 물부씨는 야마토의 모노노베씨로 추측된다. 이들은 을사의 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형벌을 담당하는 가문이었고 본토에서는 마냥 백제 친화적이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가문들 일부가 백제의 관료로써 성왕 시기 관산성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과, 물부순 역시 흑치상지와 가족의 연을 맺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가와는 방향을 달리하고 아예 백제에 뿌리를 내린, 귀화 가문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피지배계층은 일반 백성과 노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역시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가 없다.

3.1.4. 신라

삼국시대의 국가들 중 유일하게 신분제 구조가 자세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바로 골품제(骨品制). 성골(聖骨), 진골(眞骨)과 6두품부터 1두품까지의 두품제로 분류되어 있었으며, 대략 정리하자면 성골은 왕의 적통 왕족, 진골은 왕의 서계(庶系) 왕족, 6두품 ~ 4두품까지는 귀족, 3두품 ~1두품은 평민, 그리고 두품이 없으면 노비층(천민)이다. 신라에서는 골품에 따라 출세의 한계가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었고 수없이 나라가 뒤집어졌던 고려와 달리 골품제는 신라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지켜졌다. 자세한 사항은 골품제 문서로.

3.1.5. 발해

대씨 등의 왕족과 우성망족으로 대표되는 유력귀족과 49성으로 기록된 일반귀족으로 구성된 지배층과 평민, 노비, 부곡민 등의 피지배층이 있었다.

부곡민은 노비처럼 개인의 소유였지만, 소유자가 풀어 준다면 평민이 될 수 있었다. 부곡민은 평민보다는 낮고 노비보다는 높다고 한다. 노비는 순장당하기도 할 정도로 대우가 낮았다.

3.1.6. 고려

신라 때의 골품제를 폐지한 대신 지배층, 서민층, 천민층으로 구분하고 있었으며 왕족, 종친, 척신, 공신 등이 문벌귀족이 되어 중앙 관료와 지방관직을 차지하고 지방의 호족들이 향직(鄕職)을 맡아 왔다. 과거 제도의 실시로 천인과 노비를 제외하고 왕족, 귀족, 지방의 향족(鄕族)들도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중간계층으로 서인층(庶人層)이 있는데 남반, 잡기, 잡직 등이 있고 기타 양민층이 속하였다. 남반은 주로 왕실의 내시, 궁중당직, 시종 등이 있고 잡기는 기술을 통해 벼슬을 얻는 계층이며 잡직은 사역 등을 맡는 최하급 관리였다. 그리고 천인층(賤人層)도 있는데 진척, 역정, 양수척, 광대, 상인, 공장(工匠), 악공, 노비, 향, 소, 부곡, 도민(島民, 섬사람)으로 이들은 이 시대에서 가장 천대를 받아왔던 하층으로 분류되었다. 특히 고려의 국교(國敎)가 불교였기 때문에 승려들은 이 시대에서 왕족이나 양반 못지않은 특대를 받아오기도 하였다.

3.1.7. 조선

기본틀은 고려 때와 비슷했다. 고려 때 천인에 속했던 장인(匠人)이나 상인(商人) 등은 조선에 들어서 평민으로 격상되었고, 다른 천인들 몇몇도 양인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거나 도중에 다시 천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음서공음전 제도를 통해 특권을 세습했던 고려의 문벌귀족과 달리 조선의 양반층은 과거 급제라는 신분 유지 조건이 있어,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한 가문은 평민이나 다름없는 잔반으로 몰락하는 등의 변화도 생겼다. 가장 큰 변화로 고려 때 높은 대우를 받아왔던 승려들은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과 건국 주도층 유림들의 특대로 인하여 결국에는 최하층 천민으로 분류되었다.

원칙적으로는 양민과 천민의 단 2가지 분류만이 있는 양천제 체제였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였던지라 천 명 안팎의 관료를 의미하던 양반이 어느새 세습되는 상위계급이 되었다. 과거 제도는 일단 명목상으로는 낮은 신분의 사람도 시험을 잘 치면 신분이 올라가는 것이 가능했지만 실제로는 교육의 기회가 더 있고 인맥도 있는 명문가가 대대로 잘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이랑 비슷한데? 아예 과거 제도 자체가 명문가에게 유리하게 바뀌기도 하고, 돈이 있는 가문이 과거를 볼 수가 있었으나 지방에서 돈을 잘 벌어서 이 시험에 붙으면 벌열 가문의 이너 서클에 들지 못해 승진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이것이 19세기 세도정치기라는 조선시대의 최악의 암흑기의 모습이다.

왕과 왕족을 포함하여 양반은 왕족과 관료 가문이 속했고 양반과 평민 사이에 중인이라고 의관, 역관 등이 속했으며 평민층은 장인, 상인, 일반 백성 등이 속했으며 최하층의 천민층은 광대, 창우, 승려, 기생, 노비, 역리(驛吏), 백정, 진정, 무당 등이 속했다. 1894년과 1895년 갑오개혁을미개혁을 실시하면서 제도적으로는 폐지되였으나, 일제강점기8.15 광복이후 한국 전쟁 직후까지 그 의식은 잔존하였다.[5]

서얼금고법적서제도(嫡庶制度)가 부가되어서 조선시대 이전에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서얼 차별이 조선 시대 때 생겼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조선 이전 시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서 생긴 오해에 불과하며 서얼 차별은 사실 조선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고 조선 시대 때 서얼금고법과 적서제도는 사실 조선 이전 시대부터 내려온 서얼 차별을 명시만 하는 법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조선은 태종 때 한품서용제라는 서얼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제도를 시작으로 조선은 서얼 차별 완화를 이루어 나갔다. 서얼 출신은 적자 출신과는 달리 사실상 높은 관직까지 오르기는 어려웠고 무관(武官)의 말단직이나 기술직, 서리(胥吏) 등을 맡았던 편이었다.

조선시대 사회상에 대해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시기에는[6] 조선을 소설에나 등장할[7] 극단적인 신분제 사회로 해석하여 상민은 글을 못 배우게 했다느니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막았다느니 양반이 상민을 사소한 이유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고 글을 아는 상민은 역적이 될 놈이라고 처참하게 죽였다는 둥 황당한 묘사가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일본이나 유럽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내려오는 걸 보면 신분제에 대한 현대인의 몰이해로 취급해도 좋을 듯하다. 강력한 성리학 국가인 조선에서 상위 계층의 사람이 하위 계층의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면 그 사람은 인간 취급 못 받는다. 왕도 예외가 아니어서, 왕이 그렇게 한다면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고 반발이 일어난다. 일단 조선 초기부터 세종의 노력에 의해 글을 아는 상민이 많았고, 노비는 기본적으로 주인에게 의식주를 제공받는다. 게다가 그 노비가 어린아이라면 주인 입장에서는 잘 길러야 하고, 나이가 너무 많으면 주인이 수발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서 요즘 말로 하자면 주인 입장에서 노비는 가성비가 좋지 못한 존재였다. 이로 인해 가난한 양반 입장에서는 노비가 오히려 경제에 부담되어 조선 후기로 갈수록 노비 수가 줄고 반대로 고공(머슴 또는 계약직)이 늘어난다. 반대로 노비 입장에서는 해방되고자 하지만 막상 해방되어 평민이 되면 집도 없고, 땅도 없고, 누군가 소작을 주는 것도 아니고, 전국을 떠돌다 결국 스스로 다시 노비가 되겠다고 옛 주인집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가계를 위해서 자신을 포함한 일가족을 부유한 양반집에 판다는 문서도 발견되었다.

19세기 말 무렵에는 서양에서는 계몽주의 등을 토대로 한 평등 사상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고, 노예제 폐지 같은 조치가 도덕이 명목적으로 근거가 되기도 하여 실제로 시행되기도 했다. 조선에서 차별적 인식이 강한 상공업자에 대한 인식도 서구에서는 전통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말세에 가까운 상황이었던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조선 방문기에 주민들의 예의나 자연 환경 등은 좋게 묘사했어도 양반의 특권과 그 외 계층이 핍박 당하는 모습을 매우 부정적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영국 출신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노동을 경멸하는 잘못된 위선', '조선의 양반들은 귀족적 삶의 분위기였던 강압과 독재의 무한한 기회를 누려왔다'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아펜젤러도 신분제적 인식을 매우 나쁘게 여겨서, 스스로 '미국에서는 노동이 고위층 사람들에게도 명예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 돈이 많은 하인이 '양반'이 되는 모습도 묘사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하게 취급 받는 것 자체도 좋지 않게 본 것이다.

이런 주장들이 좀 와전된 측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조선 사회가 아예 신분제적 의식을 부정한 능력주의 사회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권력층이 얻기 쉬운 높은 학식 등이 오히려 신분 유지의 강력한 근거였다. 그래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던 사람들이 신분제 타파를 주장하여 예수를 믿거나, 전통적으로는 무속이나 불교 등에 의지하기도 했다. 갑오개혁에서 과거제가 폐지 되었을 때 신분 유지 수단에 타격을 입게 된 양반들은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흔히 조선시대에는 노비를 사람이 아니라 그저 집안의 재산으로만 취급했다고들 알고 있는데 사실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소리다. 물론 학대를 당하여 완전히 짐승 취급을 받는 일도 많았지만, 정신이 똑바로 박힌 조선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는 재산이긴 하되 물건은 아니고, 노비도 사람이었다. 주인에게 물건 취급받지 않았고, 주인 호적에 노비로 기재되었으며, 외거노비는 별도로 호적을 만들어 스스로 호주가 되었다. 사노비가 국가에 부세를 납부하는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다른 양인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의무를 바치는 백성이란 뜻이다.

조선 말기로 갈수록 돈 많은 상인에게 멸시를 당하는 몰락 양반들의 사례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게다가 조선 말에 이르면 지역에 따라서는 호적상 유생(幼生)으로 등록된 인구가 70~80%가 넘어가는 곳도 있었다.[8][9]

3.1.8. 대한제국~일제강점기

1894년 갑오경장으로 형식적으로는 신분제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일부 수구 성향의 양반층과 고위층들로부터 여전히 잔존하고 있었으며 여전히 평민과 천민으로 구분지었던 경우가 있었다.

신분제가 혁파된 이후로도 백정 등 천인 출신은 차별을 심하게 받아서 형평사라는 조직을 만들어 수 십년을 추가적으로 활동했었다. 이것을 형평운동이라 부르는데, 이 형평운동을 주동한 사람들이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처럼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것이 일제 당국의 반감을 사서 결국 일제의 탄압을 받아 형평운동은 중단되고 말았다.[10] 일제강점기에 대한 증언에서도 반상의 법도가 지엄한 시대라고 묘사되거나 해방 전까지는 혼례를 할 때 상놈이 가마를 매었다는 식의 증언이 있다. ##

3.1.9. 대한민국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모든 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③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
현재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신분제를 완벽하게 부정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11] 시골에서는 누가 양반, 평민, 천민 집안이였는지 대략 알았다. 1894년에 법적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되었지만 시골 집성촌에서는 양반 혈통이 모여사는 마을과 평민, 천민 등 머슴 혈통이 모여사는 마을, 백정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어서 신분제도가 암묵적으로 남아있었는데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일어났을 때 출신 성분에 상관 없이 전부 새롭게 바뀌면서 완전히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특히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촌향도를 하게 되면서 누가 양반, 평민, 천민 집안이였는지 구분할 수도 없게 되었으며, 1970년대 산업화 등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면서 암암리에 존재하던 신분제는 명목상으로던 실질적으로던 대도시 지역에서는 완벽에 가깝게 소멸되었다.

현재에도 양반 집안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분명 있지만 비웃음거리에 불과하다. 이석과 같은 고종의 손자에게 한 노인이 "옛날에 도둑놈이 앉았던 자리야 저기가. 청와대랑 똑같다."라고 황실을 비판하기도 할 정도다. 하지만 경제와 사회가 고속으로 성장하면서 조금이나마 변형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토호 문서에서 보듯 수도권 도농복합시나 지방에서는 전통적인 지역 유지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심지어 안동시/문화 문서에서는 진짜 종가를 따지거나 과거의 신분 때문에 명절 때 불편한 경우가 묘사되기도 한다. 그나마 이것도 독립운동을 하며 공통의 적을 만나다보니 기득권을 포기한 경우가 생겨 문제가 줄어들었다는 말도 있다. 1995년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오히려 다른 혜택을 입으며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다만 정치인 가문의 영향력이 다른 나라보다 약한 것은 사실이다. 대신 해외는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곳은 정치인 자체가 권위가 한국만큼은 아니며, 한국보다 정치인의 출신이 다양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경향이 약한 지역에서도 직업 귀천 의식[12], 기업인, 정치인[13], 법조인, 교수, 전문직 같은 아비투스의 절정에 이르는 사람들이나 간부급 공무원만이 고귀하게 취급되는 풍조나## 군대 같은 곳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기수제 등의 형태로 남아있다. 그래서 영국 등지에서 드러나는 서양의 '계급제도' 같은 것을 두고 상류층이 엄청나게 높은 권위를 가진다고 오해[14]를 한다든가, 계층 이동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오해를 한다든가[15], 좋은 학벌 이외의 성공의 길을 생각하는 서양이나 일본 등지의 사람을 두고 오해를 많이 하는 편이다. '쌍놈'이라는 비속어 또한 신분제 하 보통 백성이라는 의미의 상민()에서 유래한다. 그나마 학력이나 직업 차별 같은 전통적으로는 신분제가 엄격하나 현대에는 차별의 이유가 없는 분야는 점차 차별이 줄어드는 추세라서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제도가 생기고, 공부를 잘 하던 사람이 연예인으로 데뷔하거나, 급여가 높은 회사의 생산직의 경쟁률이 치솟는 등의 변화가 생기고 있다.

3.2. 세계

하단의 내용은 세계의 신분제도가 직/간접적으로 도입되어있는 일부 국가들만을 설명한 것이며, 기본적으로 군주가 있는 국가들은 일반 백성과 군주 사이에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므로 신분제도가 제한적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2.1. 전근대 동아시아

3.2.1.1. 중국
3.2.1.2. 일본
일본에서 전근대적인 신분제는 메이지 유신으로 폐지되었지만 1947년 이전까진 귀족에 해당하는 화족이 있었다. 화족과 평민 사이에 사족(士族)도 있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특권이 폐지되어 평민들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3.2.2.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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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원래 인도에서는 카스트가 법제화되어 있었으나 해방 이후 신헌법에 카스트의 폐지를 못 박았다."고 잘못 알고 있는데, 인도사에서 카스트는 법제화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불문율성 종교 관습이었다. 그래서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초대 법무부장관이 헌법에 못 박은 말의 진의는 엄밀히 말하면 카스트 자체의 폐지가 아니라 카스트에 의한 차별 금지였었다. 애초에 법제화된 적도 없었던 카스트를 이제 와서 헌법에 "카스트를 폐지한다."라고 쓴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였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카스트 등 어떠한 선천적, 후천적 요인을 이유로도 차별받을 수 없다."로, 카스트 자체를 폐지하니 법제화하니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카스트는 엄연히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신분제이며 인도 정부 역시 카스트를 뿌리뽑기 위해 엄청나게 애를 써오고 있다. 불가촉천민의 후손에 대한 어퍼머티브 액션 등의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상위 계급에 대한 역차별 논란도 있다. 인도인들도 암베드카르처럼 불가촉천민 출신이라도 카스트의 불합리함을 개혁하려는 시도를 높게 평가하여 존경하는 경우가 많으며, 부와 같은 요소도 권력에 있어서 어느 정도 중요하기는 하다. 오죽하면 힌두교를 옹호하는 계층에서도 차마 신분 차별을 옹호하지는 못하겠으니 모든 힌두교인은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든가, 카스트란 분업을 주장하는 제도지 차별 옹호는 후세에 왜곡된 것 뿐이라는 말까지 등장할 정도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소/원숭이에게도 카스트가 적용되었다는 것도 특이점이다. 자세한 것은 카스트 문서 참조.

'불뮨율성'이라고 하는 이유는 나라에서 차별을 권장하지는 않지만 상위 카스트들은 기득권을 자녀 세대에게 물려주려는 의도가 강하고,
권력 기반을 위협할 수 있는 하위 계층의 상승 이동을 차단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매체에서 상위 카스트는 세련되고 교양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하위 카스트는 주로 하인, 범죄자, 무식한 인물로 재현되는 식으로 계급의 편견을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 성공이 카스트의 '타고난 능력'으로 포장하는 식으로 계급을 공고화하려는 시도가 잦기도 하다. 교육 기회 또한 하위 카스트에게는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그들이 성공하는 제도를 '불공정'하거나 그들의 업적을 성공이 아닌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 여론을 왜곡하려고 하기도 한다.

3.2.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북한사회주의 공화국을 표방하는 국가임에도 실질적으로는 봉건 군주제 국가나 다름없어서 사실상 4~50여 개의 계급(!)이 있다. 당연히 북한은 이러한 계층에 따른분류가 모든 공민이 평등하다고 주장하지만 탈북자들의 증언들을 들어보면 북한 내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계급이 있었고 그것이 당연하다듯이 여겨왔다고 한다.

크게 3개 계급으로 나누는데 구조는 다음과 같다.

이들 신분은 자동적인 강등[17]은 가능하지만 상승은 김정은이 직접 신분을 올려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3.2.4. 태국

태국/사회 문서 참조. 인도와 더불어 전통적 계급 차별이 세계적으로도 심한 곳에 속한다. 재산, 인품, 종교적 업보의 논리, 현대에는 학벌로 이어지는 하류층 차별의 논리가 매우 공고하였다. 이로 인한 부의 편중이나 각종 하류층에 대한 차별이 전통적 신분제의 잔재로 매우 심각한 나머지 태국인들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런 현실에 크게 반발하며 2020년 태국 민주화 운동 같은 일을 벌였다. 태국의 상류층은 자신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동경의 대상이 되도록 하며, 대중문화를 통해 물질주의를 조장하여 상류층 문화를 미화한다. 서민을 못 가는 매우 비싼 국제학교에서 '국제적 감각과 시야 획득'과 같은 구실로 대중을 지배하려고 하기도 한다. 교육 등의 기회를 독차지하고서는 약간의 자선활동을 대대적으로 강조하며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문화도 있다. 정치적인 탄압이 상류층이 아닌 사람에게 가해져 불만이 표출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으나,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경우가 있다.

3.2.5. 유럽

과거 유럽은 신분제 사회였으며 귀족들에게만 쓸 수 있는 이름(Nobiliary particle)이 있다. 영국처럼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름을 통해 "과거에 귀족이었구나"라는 정도만 알 수 있다.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샤를 드골도 전치사 'de(드)'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 선조들이 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영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도 민주주의 운동으로 국가의 의사 결정에 관여하는 정치적 권한은 많이 사라지고, 상류층의 생활양식을 우월하게 보는 권위도 아시아 국가보다도 적은 편이다. 현대 유럽 사회에서의 '계급' 개념은 한국의 '신분' 개념과는 다르다. 유럽에서 노동자 계급이나 이와 유사한 계급은 단순히 낮은 지위가 아니라 하나의 정체성이자 자부심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귀족, 농노제, 부르주아 문서에서 더 자세한 과거 유럽의 신분제를 파악할 수 있다.
3.2.5.1.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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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 중에서 뿌리 깊은 신분제도에서 유래한 '계급제도'를 가진 나라로 대표적으로 영국이 있다. 다만 계승자 한 명만 귀족으로 인정하는 독특한 신분제도로 인해 숫자가 적었고 귀천상혼도 없어 신흥계급과 마찰없이 통혼등으로 상류층에 편입시켜주는 길을 택했고 차티스트 운동, 노동조합 등의 민주주의 운동의 견제를 받아 사회•관례적 특권은 각계에서 티안나게 우대하는 것[18]과 사관학교 지원시 좀 모자라도 널널하게 입학시켜 주는 것[19] 정도이고 법적 특권은 귀족원 피선거권[20], 조언권[21], 재판특권[22], 민사 불체포특권[23]만 남았다.

이 중에서 의무가 병행되지 않는 특권이라 볼만한 것은 귀족원 피선거권과 민사 불체포특권이 전부다. 심지어 귀족원(상원)은 의원이 입각할 권리와 법안공포를 2년 유예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사실상 실권이 없는 자문기구이기 때문에 정치적 힘이 의미있는 수준으로 보기도 어렵다. 귀족원에서 통과시킨 법은 반드시 하원이 동의해야 작동하지만 반대로 하원이 통과시킨 법은 귀족원이 반대해도 2년 밀릴 뿐 어쨌든 그대로 통과되기 때문.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영국 쪽에서 상류층에 대한 비판 내지 좀 낮은 계층을 옹호하는 태도가 한국인이 보기에 더 강해보이는 부분도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크게 오해하거나 이해를 힘들어하는 것이 이런 나라에서는 반드시 쉽게 사는 계층은 우대해 주고, 어렵게 사는 계층은 여러가지 면에서 멸시하고 그 계층 스스로도 자부심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한국에서도 어떤 차별을 철폐하는 노력과 인식의 변화가 있듯 영국도 이런 변화가 수백년간,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직장 문화는 영국이 더 수평적이다.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나이, 결혼 여부, 직위 등)를 파악하기 위해 사적인 질문을 하는 습관이 한국에 있는데 이런 질문은 영국에서 좀 무례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학벌 말고도 실력과 경험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영국이 더 강하고, 한국에서 그렇게 학벌이 낮아 '게으른' 계층을 옹호한다고 여겨져서 현대도 다소 생각하기 힘든 Working Class Hero라는 노래까지 70년대에 히트하기도 했다. 다운튼 애비 같은 20세기 초를 다루는 작품을 보아도 산업화와 더불어 신분이 크게 동요되는 사회적 현상이 묘사된다. 영국 사회는 동양과 비교했을 때 계급제보다는 심한 개인주의로 인한 인프라의 불편함, 차브족 같은 계층조차 옹호하는 식의 문제가 더 큰 편이다.

노동 계급 중에서는 진심으로 자신이 인품과 성실성으로 따지면 평균 이상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영국인의 과반수는 상류층이 아닌 사람 중에서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잘 나온다고 믿고 있으며, 45% 정도는 가장 부도덕한 계층은 상류층이라고 생각한다는 설문 조사도 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마거릿 대처 같은 인물도 일부 계층에서는 그가 사망하자 '마녀'[24]가 죽었다며 죽음을 축하하러 거리로 몰려나올 정도로 환호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Private Eye라는 총리 등의 살아있는 권력을 풍자하는 잡지도 있으며, 왕실에 대한 비판도 사실에 기반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허용된다. The Windsors라는 왕실 소재의 시트콤까지 있을 정도다. 언론자유지수도 한국보다 높고, 심지어 건국 자체가 평등한 계층으로부터 시작된 미국보다 높게 조사되기도 하는 편이다. 영국도 물론 경제적 격차 등에 따라 좀 쉽게 사는 계층은 있지만, 심지어 그 제도를 한국이 민주주의 제도를 정착하는데 참조했을 정도로 엄연한 민주주의 국가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나 못 가진 계층을 두고 인격까지 차별하고 비난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이웃을 사랑하되 울타리는 철거하지 마라” 英 속담으로 보는 비즈니스 관행, KOTRA에서도 영국의 계층이란 위아래를 강요하는 신분제가 아니라 총리나 노동자조차 명목적으로라도 그저 역할만 다르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위계의식이 강한 한국 직장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을 위해 비즈니스 부분만 빼면 단순화된 설명이 있지만 대체로 사실이다. 실제로 영국 회사의 직원과의 미팅에서 '중요한 일'을 맡은 '말단' 직원을 두고 한국업체 대표가 왜 낮은 사람을 데려오냐며 오해하는 일조차 있다고 한다.

4. 오늘날 경제적 차별과 신분제

수천년 간 존재했던 법적 신분제 대다수가 사라졌지만, 경제 계급에 따른 분쟁이 마치 신분제와 같은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임대 아파트와 일반 혹은 고급 아파트 주민의 대립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jtbc 뉴스룸(2015년 2월 4일)의 사례를 보면 서로 같은 분교에서 다닐 수 없다는 고급 아파트 주민의 반발과 전학으로 분교가 붕괴되어버린 사건이 보도된 바 있다. 이 때문에 다른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 유명 브랜드를 써달라고 해서 아파트 이름을 유명 브랜드로 바꾸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유명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이 평수의 값을 말하며 싫어했다. 이러자 임대 아파트 주민은 결국 임대 티를 내라는 것이라 말한다. 비록 하나의 사건이겠지만, 진중권 교수가 말하길 일본이 메이지 시대를 맞이해 신분제가 철폐되자 반발한 쪽은 귀족이 아니라 천민층 위에 있던 평민들이었다고 한다.

jtbc 뉴스룸(2016년 6월 8일 방송)에서 또 다시 일반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가 대립한 사례가 다루어졌다. 일반 아파트 주민들은 마치 임대 아파트 주민을 빈민 취급하며 철조망을 설치해 분리해 놓았으며 학군도 나뉘어 버렸다. 임대 주민들은 철조망을 풀고자 하지만, 일반 아파트 주민들은 원래 다르게 지어진 곳이라며 반대한다. 즉 심리적으로 임대아파트 사람들을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세월이 10년이라고 한다. 신분제가 당연시되었던 옛날에 천민과 양민(귀족 및 상류층 아님)을 구분시켜가며 살았다. 그리고 양민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천민을 천대하고 하대했다. 심지어 같이 밥을 먹는 것조차 모욕으로 여겼다.[25][26]

전술했듯 단순 철조망을 세우는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임대아파트 주민이 자기 자식은 임대로 끝나게 하지 않으려고 분양아파트 주민의 자녀가 많이 다니는 학교로 자녀를 보낸다. 바로 옆에 학교가 있음에도 말이다. 문제는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임대 주민과 분양 주민의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분양 주민들은 임대 주민에게 집이 어디인지 물어보는데 이게 단순히 주소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계층인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결국 경제적 수준에 따른 신분제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를 아는 임대 주민들은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위장전입을 하는데 아마 분양 주민들의 차별이 원인일 것이다. 문제는 이를 관리할 교육당국과 시 당국은 서로 책임만 미루고 있다는 것이다.

5. 창작물

신분제도는 전근대 사회의 생활 곳곳에 영향을 끼치는 핵심 제도이면서 현대와는 매우 차이를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전근대 배경을 묘사한 작품에서는 좋든 싫든 묘사를 안 할 수가 없다. 아래는 그 중 특히 신분제도를 중심 주제로 다룬 것을 모았다.

6. 게임에서의 대우에 대한 비유

주로 다인원이 한 곳에서 플레이하는 온라인 게임, 특히 파티플레이가 기본인 MMORPG에 존재하는 개념으로 다인원 파티 플레이를 위해 파티를 직업별로 나눠서 구성할 때, 누구는 구하기 쉬워서 사람을 가려받을 수 있지만 누구는 구하기 어려워서 할줄만 알면 무조건 받아야 하는 직업별 분포의 불균형 때문에 발생한다.

귀족은 인구수가 적어서 구하기 힘든 직업, 천민은 썩어날 정도로 넘쳐서 공챗에 파티모집 말만 하면 귓말이 폭주하는 직업을 의미한다. 귀족 중에서도 그 정도가 심해서 "xx님만 오시면 출발" 같은 메시지가 돌 정도면 황족 내지는 신[29], 천민에도 급이 있어서 아예 안받는 불가촉천민급 직업이 있다. 이들을 부른 칭호는 돚거, 도냥법풀, 판금풀 등이 있다. 블레이드&소울 같은 경우에는 특유의 버그와 처참한 딜량으로 인해 외면받는 소환사를 가리켜 '솬업 폐기물'이라 부르기도 했고...

공통적으로 귀족의 특징은 구하기 힘들지만 파티 내에서 주요 역할을 하며, 막상 파티 플레이 들어가면 고생한다. 인구수가 적은건 다 이유가 있는 법. 대부분 솔로 플레이가 어렵거나 파티 내에서 하는 역할이 많고 피곤하거나, 조금만 실수해도 금방 티가나는 운영 난이도를 가진 경우가 대부분. MMORPG에서는 주로 힐러, 메인 탱커, 혹은 특정 역할이 절대적인 클래스가 이렇다. 천민들은 이와 반대인 경우가 많다. 솔로 플레이는 쉬워서 무개념 발컨 유저들이 득시글거리는데 파티 내에서는 하는 역할이 적고 이들이 하는 실수를 귀족들이 책임져야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그런 면에서 대미지 딜러들이 천민이 되는 경우가 잦다.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서가 바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직업 별 레이드의 위치 문서. 읽어보면 신분제도를 확실히 느낄수 있다.

7. 여담



[1] 실상은 이보다 다소 복잡하기는 하다.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를 참고하면 부르주아/귀족의 구별은 이처럼 명료하지는 않고, 프랑스 혁명 직전 구체제 시기를 보아도 '귀족'이라고 불린 이들 중에서도 상업 행위를 통해 귀족의 지위에 이른 이들이 상당수 존재했다.[2] 때문에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자유주의 혁명을 '부르주아가 새로운 귀족이 되었을 뿐'이라고 평가절하하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3] 사실 프랑스 혁명의 그러한 공포 통치적 이미지와는 달리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섣부르게 도망치지만 않았다면 목숨을 부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4] 일례로 조선에서 천민은 군역을 지지 않았다.[5] 광복 후에도 시골에서는 머슴들이 계속 있었고, 1950년 한국 전쟁 이전에 남한에는 25만명의 머슴이 있었다.[6] 사실 세간의 인식은 요즘도 비슷하다. 우선 신분제에 대한 몰이해 이외에도 현대 한국인들이 조선에 대해서 워낙 부정적으로만 보는지라(...)[7] 삼국시대에도 '사소한 이유'로 하위 신분을 죽이지는 못했으며, 고구려에도 경당 같은 교육 기관에서 '문지기나 말먹이 주는 미천한 집안의 자제들까지 그곳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으며 공부했다'고 구당서에나 신당서에 언급되기도 했다. 고구려 미천왕의 이야기에서도 머슴살이나 소금장수를 먼저 했는데도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서동요의 이야기도 신분제가 아주 엄격하지는 않은 모습을 묘사한다.[8] 식민사학자 시카타 히로시의 영향을 받은 기존 통설 때문에 조선 후기가 되면 양반 매매가 횡행하여 양반 비율이 70%가 넘고 종갓집을 빼면 족보가 다 가짜라는 인식이 퍼졌으나, 연구를 할수록 다른 부분이 나타나기 때문에 다시 생각을 해한다. 애초에 양반이라는 신분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만 있었을 뿐 성문화되어 존재한 적이 없었고, 양반 매매 문서가 지금까지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일대일로 매매를 했으면 서로 맞바꿨다는 말이므로 비율이 그 정도로 늘어난다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9] 정확히 말하면 호적상으로 유생(幼生)을 자칭하거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 70~80%였다는 것일 뿐 실제 향촌 사회에서 단순히 호적상으로 유생이나 학생을 자칭한다해서 진짜 양반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그 고을 양반들 사이에서 양반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그 기준은 이름난 학자를 조상으로 두었는가, 본인이나 가족 중에 이름난 학자나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있는가 등이 있다. 즉 일차적인 기준은 혈통이다. 같은 양반이라도, 고을 내에서만 위상이 있는 양반, 도(道) 단위로 위세가 있는 양반, 전국적으로 위세가 있는 양반 등 차이가 있다. 고을 내에서 양반으로 인정된 자는 고을 향안(鄕案)에 이름이 등재된다. 다른 고을의 양반은 이 명부에 등재되지 못한다. 몰락 양반들은 '잔반'이라 불렸는데 어쩔 수 없이 생계를 위해 농사나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글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서당의 훈장이나 중인들이 주로 하는 송사의 소송서 써주기나 의약업 등을 하며 간신히 체면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았다. 최악의 상황으로가면 족보를 팔거나 족보에 신분상승한 사람을 넣어주고 돈을 받는 식으로 생계를 꾸려가기도 하였다. 다만, 이 경우는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 지금의 문중 개념이 조선 후기에 생기고, 전국의 모든 양반들이 씨족 단위로 모여 살고, 심지어는 돈이 많아 여유가 있는 중인이나 평민들 중에도 그런 풍습을 본받아 씨족 단위로 모여사는 자들이 생기는데 혈통이 다른 자가 양반 사이에 안전하게 편입하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10] 당시 일제는 1917년 소련이 등장한 이후로 줄곧 소련을 가상적국으로 여겼고, 특히 소련에서 들어온 사회주의를 국가와 사회를 혼란케 하는 위험한 불온사상으로 여기고 탄압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형평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여겼다.[11] 동학농민운동과 법적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된 1894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이 아직 많이 살아있던 시절이고, 1923년 신분 형평사 운동이 일어난지 아직 50년도 안됐을 때라 이 때까지 머슴이 많았다.[12] 배관공이 주인공인 슈퍼 마리오나, 석공의 단체 프리메이슨이 세계 정치를 좌우한다는 주장도 나돌던 것을 생각해보면 직업관이 다른 나라와 다른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양반은 집안에 4대째 과거 급제자가 안 나오거나 전업을 하면 신분을 박탈 당할 정도로 '학력'으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근대화 과정에서 이것이 인텔리로 옮겨졌다. 현재는 약해졌지만, 과거 IMF 이전에는 학벌주의가 만연했다.[13] 국회의원의 학력 수준은 세계 1위 수준이다. # 영국, 이탈리아는 아예 대졸이 아닌 사람도 4분의 1은 된다. 직업군도 교사, 기술자, 노동자 출신이 드문 식으로 꽤 한정되어 있는 편이다.[14] 상류층은 다른 사람이고 쉽게 산다는 인식까지는 있는데 그런 행태가 모범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고, 학벌 같은 요소를 두고 상류층이 고귀하고 좋은 품성을 가졌다는 권위가 약하여, 상류층이 부도덕하다는 인식이나 사회에 기여를 못한다는 인식이 한국보다 강하다.[15] 심지어 부라쿠민조차 일본에서도 정치계에서는 대놓고 차별하면 안된다는 인식이 있다. 아소 다로가 대학도 못 나온 부라쿠민이었던 노나카 히로무의 출신을 두고 비난하자 노나카 히로무의 강한 반박을 두고 아소 다로가 이에 대해 반박을 못했다. 영국의 경우도 노동 계급에서도 데이비드 베컴, 비틀즈 등 성공한 경우가 많이 나왔다. 영국 상류층에서 자발적으로 힘든 직업을 택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9세기 사람이다.[16] 북한에서는 재포, 째포 등으로 불린다.[17] 즉, 김정은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북한의 관료 체계 내에서 반동으로 판정된 특정 인민을 자동으로 강등시킬 수 있다.[18] 비행기 비즈니스 샀는데 퍼스트로 승급되거나 기차 예약시 매진인데 귀족임을 밝히면 어떻게든 한두자리 나거나.[19] 귀족은 기원이 군인이라 참전이 전통적 의무이다.[20] 본래 모든 귀족은 당연직 의원이었으나 개혁으로 각 분야 전문가나 실각하거나 은퇴한 정치인을 세습불가 종신남작으로 임명하고있다. 종종 실각한 정치인이 '의원'자격으로 입각하기도 한다.세습귀족 쿼터가 따로 있어서 정치에 관심있는 귀족들이 돌아가면서 재임 중.[21] 대회의 참석권과(Magnum Concilium, 국왕이 귀족들과 국사를 논의하기 위해 임시소집하는 최고의회.1640년 이후로 소집된 적이 없음.)과 군주면담권 현재는 아주 오랬동안 어느 귀족도 공식적으로 행사한 적은 없다.[22] 평민은 평민이, 귀족은 귀족이 배심한다는 구법에서 기원한 특권들이다. 반역과 살인 등 중범죄를 제외한 초범면책특권, 탄핵심의권, 형사사건의 최종심의를 담당할 권리가 있었다. 이 중 초범면책특권은 19세기 중반 카디건 백작이 결투할 때 강선과 방아쇠 개조를 숨기고 상대방을 상해하고 면책특권을 행사해서 악용 가능성이 너무나 쉽게 입증되었기에 폐지되었으며, 형사사건의 최종심의권은 이해관계가 없는 귀족이 얼굴도 모르는 쌩판 남에게 딱히 높은 형량을 주장할 이유가 없으므로 자꾸 형을 가볍게 선고했기 때문에 1948년 개혁으로 폐지되었다. 탄핵심의를 관장할 권리는 여전히 남아있으나 탄핵은 1848년 이후로 소추조차 된적이 없어 사실상 사문화된 권리이다.[23] 형사는 불가능하고 법원명령불복시 즉시 체포가능. 주로 몰락귀족들이 채무불이행시 체면때문에 행사한다.[24] 한국으로 따지면 악귀가 퇴치되었다는 표현 정도의 강도라서, 영국에서도 반대 여론이 있었다.[25] 이 뉴스에서 더 무서운 것은 이 상황을 아이들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어릴 때부터 이러한 차별에 익숙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26] 일반 분양으로 아파트를 구입한 주민들의 겨우 그 아이들조차도 임대 아파트나 빌라 등에 사는 아이들을 '휴거(휴먼시아에 사는 거지), '빌거(빌라에 사는 거지)', '엘사(LH에 사는 사람) 등으로 놀리고 천대하는 일까지 생겨나고 있는 정도이다.[27] 나이트 엘프의 귀족층 출신으로 현재는 나가로 변모함.[28] 세계귀족으로 거의 치외법권적인 권세와 특권을 지니고 있다.[29] 대표적인 경우가 WOW 오리지널 시절 드워프 사제. 당시만 해도 거의 제발 누가 키워만주세요 수준이었다. 이후 불성 때의 복원 술사나 리분 때의 특무술사 등이 같은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