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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9:58:26

서얼금고법

庶孼禁錮法

1. 개요2. 내용3. 완화 노력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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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시대 이전부터 쭈욱 내려오던 서얼의 관직 진출과 승진을 제한하던 법과 관행. 조선 건국 이후 점진적으로 개선되어가다가 고종 31년인 1894년에 갑오개혁으로 폐지할 때까지 이어졌다.

2. 내용

조선 후기에 촉발된 오해와 달리 이 법은 1415년 태종 이방원이 처음으로 반포한 게 아니다. 서얼에 대한 차별적 대우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쭉 내려온 것이고 서얼의 등용과 관직 진출을 차단하는 것 역시 법과 관행으로 조선 이전 시대에 공고히 존재했다. 1415년에 시행된 것은 없던 차별을 제도적으로 굳힌 게 '아니라' 그냥 조선 이전 때 원래 있던 제도에 유교 껍데기를 씌운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조선 이전 시대에는 본인이 시류를 잘 타거나 하지 않으면 관직 진출이 힘들었던 서얼들에게 제한적이나마 관직 진출 보장과 합법적인 면천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1]

고려의 사회상에 대한 연구가 조선보다 늦어서 고려때까지 서얼이 크게 차별받지 않았다는 오해가 있는데 고려 시대의 첩은 차등은 둘 지 언정 가족의 일원으로 제도적으로 보장받는 조선의 첩과 달리 노비랑 크게 다를 바 없는 불안정한 지위였고 덕분에 왕실에서조차 서얼 차별이 공공연했다. 천한 궁인 소생들을 소군(小君)이라 부르며 출가시켜버리는 고려의 관행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원인은 고려식 가족제도에 있는데 부계와 모계 가문의 서열이 동등하다보니 혈통이 보잘 것 없는 첩과 그 소생들의 대우가 확 떨어져 버린 것이다. 조선시대 들어서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사회와 윤리가 조금씩 변화하면서 비로소 서얼들은 하나의 신분으로 고착화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이들을 향한 차별을 완화해야 한다는 사대부들의 주장도 힘을 받을 수 있었으며 태종, 성종, 명종, 인조, 영조, 정조를 거치며 느리지만 꾸준히 향상되어 갔다.

국성전주 이씨는 태종 대의 이속 사건과 간택 제도 신설을 기점으로 고려 시대의 차별적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관직 임용 제한이나 문과 응시 제한도 처음부터 해당 사항이 없었는데 왕과 대군의 서얼은 종친으로 대우받고 적통 왕손과 비교했을 땐 차별받긴 했지만 왕족 대우는 해 주었고 왕위 계승권도 있었다. 그 후손들 또한 일반 사대부로 취급을 받았다.

과거를 볼 일이 없는 평민들은 다른 이유로 해당되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평민들은 사생아를 낳든, 재가를 하든 삼가를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생존에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고 역병과 기근 등으로 가족의 해체가 빈번한 전근대 농경 사회 특성상 평민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배우자가 사망하면 다시 혼인하여 가정을 꾸렸다.

3. 완화 노력

태종은 조선 이전시대보다 좀 더 개방적인 신분사회를 정비하면서 백성들이 좀 더 신분상승하기 쉬운 사회를 만들었고 한품서용제를 통해 서얼들에게 기회를 주는 서얼 차별 완화를 시작하였다.

선조는 1567년에 서얼 1600여 명이 도성에서 당시 막 즉위한 임금 선조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자 이들을 딱하게 여기고 서얼들을 해바라기[2]에 비유하며 차별을 그만둘 것을 주변에 명한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선조 16년인 1583년에 율곡 이이가 조정 내의 경연에서 공식적으로 서얼의 과거 응시 허통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5년인 1613년에 칠서지옥(七庶之獄) 사건이 터지면서 이때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칠서사건 이후 광해군은 선조가 추진했던 서얼허통 운동을 되돌리고 서얼차별을 강화시켜 나갔다.

숙종은 1695년에 영남지방 서얼들이 상소를 올리며 차별을 철폐해줄 것을 호소하고 송시열, 박세당, 김수항 등이 서얼허통운동을 벌이자 이에 동의하여 허통을 명하였다. 다다음대 왕인 영조는 무수리 출신 친어머니를 두었고 정통성에 대한 지적을 많이 받았던 왕이었기에 깊이 공감, 서얼을 청요직에도 서용한다는 통청윤음(通淸綸音)을 내리고 서얼을 위한 직책을 신설하였다. 또한 서얼도 아버지를 아버지로, 형을 형으로 부를 수 있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법률로 다스리도록 한다는 조치를 내리고 선전관 등 최고 청요직에 서얼들을 임명했으며 기타 여러 서얼차별을 혁파했다.

정조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두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의 서얼들을 대거 등용하고 서얼들이 부사와 향임직에 자유롭게 오를 수 있게 하였으며,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을 전국에 반포하여 신분차별을 타파하려 했다. 이후에도 순조, 헌종, 철종 등의 왕들이 서얼허통소(庶孼許通疏), 계미소통절목(癸未疏通節目), 신해허통 등을 통해 사헌부, 승정원 등의 관직에 서얼이 진출할 수 있게 하거나 종2품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등 지속적으로 차별정책을 완화해나갔다.

그리고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때 비로소 완전히 폐지된다.

4. 참고 문헌

이정란, 2003, 고려전기 庶孼에 대한 사회적 인식, 민족문화논총 vol.28
박경, 2019, 서얼 관직 진출 관련 법과 논의에 반영된 조선의 친족 질서, 국학연구 vol.40


[1] 서얼이 하나의 계층으로 정착하지 못 한 고려 때는 극심한 차별을 받는 와중에 최우의 후계자가 된 최항처럼 드물게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면. 조선은 고위직에 나가기는 힘들지만 면천과 제한적인 관직 진출은 확실하게 제도적으로 보장해주었다고 생각하면 된다.[2] 철종대에 편찬되는 책 규사의 유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