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04:56:08

이덕무

성명 이덕무(李德懋)
본관 전주 이씨
출생 1741년(영조 17) 7월 23일[1]
사망 1793년(정조 17) 3월 7일[2] (향년 52세)
국적 조선
무관(懋官)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3]
별칭 선귤자(蟬橘子), 간서치(看書痴)
가족관계 조부 이필익
아버지 이성호
아들 이광규
손자 이규경

1. 개요2. 생애3. 여담4.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전주.[4]

정조 집권기 실학자[5] 중 출생연도 순으로 박지원, 유득공, 박제가, 정약용, 서유구 등에서 2번째이며 높이 쳐주는 인물이다. 실제로 역대 실학자들 중에서 제일 박식했다고 한다.[6] 박지원의 제자이자 친구 사이로 박지원의 글 중 훌륭하다 생각하는 것들을 몇 개 추려내어 각각 그 글에 대한 비평을 달아 놓은 <종북소선>이라는 책을 쓰기도 할 정도였다.

별명으로는 간서치(看書痴)가 있는데,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다. 자서전 격인 '간서치전'에서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2. 생애

어렸을 때도 다방면에서 큰 재능을 보였지만 서얼인 관계로 벼슬직에 크게 등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정조 대에 이르러 박제가와 함께 서얼 출신임에도 중용되었고 박제가와 함께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였다. 청나라에서 여러 문학 자료와 고증학 자료를 가져와 학문을 발전시키고 귀국 후 북학을 제창하였다. 청나라에서 자료만 수입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 선비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청나라 사행 전후로 계속 청나라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러한 인연은 훗날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인정을 받고 명성을 떨치는 것으로까지 이어지는 긴 흐름의 한 부분이 되었다. 아들로는 이광규가 있는데 훗날 이광규가 이덕무의 저술을 묶어 <청장관전서>를 펴냈다. 손자 이규경 역시 뛰어난 학자로 문집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남겼다.

3. 여담

4. 대중매체



[1] 음력 6월 11일.[2] 음력 1월 25일.[3] 알바트로스에서 따온 호이다[4] 정종의 왕자 무림군의 10대손인데 보통 왕이나 왕자의 후손들이 서얼 금고법에서 예외인데 비해서 그의 경우 조상인 무림군이 <선원록>이 아닌 종친의 딸이나 서얼을 기록하는 <유부록>에 올랐던데다가 왕자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까닭에 그는 왕의 후손임에도 서얼 취급을 받아야 했다.[5] 성호 이익, 유수원, 홍대용영조 때 실학자에 해당된다.[6]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덕무를 조선 최고의 박물학자라고 평가한다. 3세기 말 고대 중국에서 편찬한 《박물지》부터 18세기 일본의 《화한삼재도회》까지 당대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지식 정보를 모두 소장하고 열독하는 학자였다.[7] 영조 때부터 서얼 출신도 문과 실시가 가능했고, 정조 때부터는 청요직인 규장각 검서관까지 진출을 하였다.[8] 하지만 일로 책을 접하는 것이다보니 자신의 집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처럼 편하지 않다는 기록 역시 남겼다.[9] 이는 다른 실학자들도 마찬가지라 '독극물이 있어 젓가락을 대기도 전에 소름이 돋는다', '복어 따위에 목숨 걸지 마라' 등으로 경계했다.[10] 조선 시대에도 상추에 싸서 먹는 요리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록이기도 하다.[11] 해당 내용을 묘사한 만화 작가는 누나향이다.[12] 18세기 말 정조 시절 무예 비급을 사이에 둔 청나라-조선-일본의 무사들이 벌이는 대결이 펼쳐지는 드라마이다.[13] 영화에서는 우의정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정5품 통도랑까지만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