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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7:13:29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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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bi ソンビ 书生/書生[1] سونب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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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조원역을 맡은 배용준

1. 개요2. 역사3. 소양
3.1. 토론3.2. 활 쏘기3.3. 칼에 대한 이야기
4. 현대의 인식
4.1. 모화사상4.2. 무능함과 한계4.3. 반론4.4. 결론
5. 기타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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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禮, 올바른 삶의 길)가 아닌 것에는 눈길도 보내지 말고, 예가 아닌 말은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닌 말은 입에 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도 마라.
- 논어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 살고, 때를 만나면 세상에 나와 벼슬하는 것이 선비의 떳떳한 일이다.
- 을파소

사전상 의미는 예전에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나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 영어로는 한국 발음을 그대로 로마자화하여 Seonbi라고 부른다.

항간에서는 선비라고 하면 조선조의 지식인들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인데 고려 시대 말기에 신진사대부조선을 세우면서 유학을 나라에 널리 장려하려고 하자 선비를 '유학을 공부하는 유생들'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2] 따라서 선비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과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당시 유학을 공부하던 사람은 대부분 양반들이었기에 점차 양반 계급(사족)을 의미하게 되었다. 때문에 유교적 선비는 고려시대에는 다소 생소했지만 명나라의 제도를 많이 들여온 조선시대부터는 한반도에서도 보편적인 계층과 전통이 되었고 조선 선비만의 이미지와 상징도 형성하게 된다.

선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벼슬 없이 유학 연구만 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조선시대 사회지도층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대개 양반과 일치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물론 공부 안 하고 놀고 먹는 놈들은 당시에도 선비라고 불러주지도 않았다.

한자어가 아니라 고유어인데 중세 한국어에서는 '션ᄇᆡ'였다. 용비어천가계림유사에서도 확인되는 어휘이다. 제주어에는 옛 어형에 조금 더 가까운 '선베'라는 어휘가 있다.

2. 역사

한자로 선비 사() 자는 춘추전국시대군주귀족에게 고용된 관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3] 조선시대식 선비 형태가 등장하기 한참 전인 고대부터 한국과 중국에서 이런 의미로 널리 쓰여 왔던 글자이다.

때문에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士를 한국어로 해석할 때 선비라고 하지 않고 '됴사(朝士)' 즉, 조정에 나아가 일을 하는 선비라고 칭했다. 한편 같이 선비를 뜻하는 한자인 유()[4]는 조선 전기부터 선비라고 말하였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도덕을 지키고 학문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계림유사에서는 進寺儘切이라는 형태로 등장하는 고려어 단어를 士로 풀이하고 있는데, 당시 송나라의 카이펑에서 사용되던 개봉음을 기준으로 재구하면 '션'에 가까운 음이 된다. 뒤의 음절 'ᄇᆡ'는 은 누락된 채 기록된 것이거나, 후대에 붙었을 수 있다.

한편 예부터 士는 공, 후, 백, 자, 남과 같은 제후나, 대부(大夫)와는 달리 영지를 받지 않고 봉급으로만 먹고 사는 계층이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공자가 가르친 인재들이 모두 나중에 士가 되었는데, 공자가 가르치던 자들이 누군지 생각하면,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던 사람들도 얼마든지 학문을 통하여 士가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공자 그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야합(野合)을 통하여 공자를 낳았으므로 士란 혈통에 의한 것도 있으나 자신의 능력에 따라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5]

춘추전국시대의 士는 전시에는 장수가 되어 싸웠다. 과거에는 문무의 구분이 없었던 것이다. 보통 알려진 선비는 춘추전국의 사가 아니라, 조선시대의 학자형 인물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싸움이 잦던 전국시대가 끝나고 안정적인 통일국가가 자리잡아 가면서 지금과 같은 문무의 구분이 생긴 것이다. 한자인 士자 자체가 도끼의 모양에서 따온 상형문자라는 주장도 있다. 춘추시대의 士는 기본적으로 전쟁에 수레(전차) 1승(乘) 이상을 낼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순신 같이 학식이 높지만 직업이 군인인 사람도 얼마든지 선비의 범주에 포함된다.[6] 이들은 말 그대로 무사(武士)라고 할 수 있다.[7] 추가로, 일상적으로는 거의 안 쓰이긴 하지만 '선비인 장수'를 뜻하는 유장(儒將)이라는 단어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족(士族) 혹은 사대부(士大夫)로 칭해지기도 하는 부류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양천제(良賤制)라고 하여 천민이 아니면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으나 사족(士族)들은 과전 등의 토지를 국가에서 지급받아 경제 기반을 가지고 있어서 농공상민과는 다르게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과거시험을 통과해 사회 지도층을 거의 다 독점하였고 차츰 잘 알려진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네 신분으로 분화되게 된다. 조선 시대에 비양반 계층의 과거 합격 및 관직 진출 비율이 타 문화권에 비해 매우 높았던 것은 맞으나 상민층 합격자들도 대부분 자식을 공부에 매진시킬 수 있는 부농이나 대상 집안 출신이었다.

3. 소양

3.1. 토론

선비들은 토론을 주요한 의사결정 방식으로 꾸준하게 사용했다. 논어(論語)의 헌문(憲問) 편에 있는 “비심이 초창(初創)하고, 세숙이 토론(討論)하며, 자우가 수식(修飾)하고, 자산이 윤색(潤色)한다”는 구절은 선비들 글쓰기의 금과옥조였다. 토론은 선비들이 사실을 확인하고 논리와 이치를 바루는 데 썼던 진리 탐구의 대표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토론이 글을 짓는 데만 쓰인 것은 아니었다. 토론은 국가 중대사를 결정할 때 최선의 해법을 찾는 문제해결방식이었다. 조선 선비들은 왕 앞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두고 스스로가 생각하는 견해를 개진하고 상대방 주장의 잘못을 논파했다. 『세종실록』에 그 좋은 예가 있다.

세종 14년, 세종은 원묘를 새롭게 만들 것을 논의하게 한다. 원묘란 공식적 종묘 외에 따로 세운 실묘를 말하는 것으로, 돌아가신 조상을 산 것처럼 모시려는 효성의 상징이었다. 효심이 지극한 세종은 그때까지 문소전과 광효전으로 나뉘어 있던 원묘를 한 군데로 모으고자 했다. 이 자리를 어디에 쓸 것인지를 놓고 조정에서 토론을 벌인다. 고중안과 최양선은 도성 북쪽 자리가 불가하다고 하고, 안숭선과 이양달은 가하다고 주장한다. 토론이 끝나자 왕은 이튿날 아침에 하교하겠노라고 말한다(1월 15일).[8]

이러한 방식으로 토론은 국가의 중대사를 논할 때 자주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문화가 제도화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경연이다. 이 경연이 성군이라고 불리는 세종대왕이나 정조가 다스리던 시기에는 활발했고, 폭군이라 불린 연산군 시기에는 폐지되었던 것을 보면 토론이 선비들의 소양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2. 활 쏘기

파일:external/www.archerynews.net/121209_11.jpg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는 쏘기가 교양과목이었기 때문에 활쏘기를 익힌 선비들이 많았다.

중국에서 공자 이래로 士의 교육과목은 6예(예, 악, 사, 어, 서, 수)였는데, 구체적으로 예는 단순 매너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행하는 각종 의례(儀禮)절차를 배우는 것이고, 악도 그냥 음악만 말하는 게 아니라 각각의 의례에서 연주되는 음악도 포함하는 것이다. 대충 매너 좋고 시 좀 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사와 어는 전차를 타고 활을 쏘는 춘추시대의 군사훈련을 의미한다. 전차가 퇴화된 후에는 말타기로 바뀌었다. 서와 수도 단순 글짓기와 산수가 아니라, 공무원으로 일할 때 문서를 작성하고 세금이나 국가재정을 계산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9]

그러니까 선비, 즉 라는 건 관료가 되기 위해 특화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비를 놀고 먹는 한량과 혼동하지 말자. 실제로 조선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의병들은 거의 모두가 선비들이 일으킨 것이다. 평범한 마을에서도 선비들은 지역의 지도자와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일반 평민들을 제대로 결속시킬 수 있는 주체는 결국 선비밖에 없었다. 이는 선비들 중 전투 및 지휘에도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곽재우고경명, 조헌 등의 인물들이 있으며 안중근 의사와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다 알고 보면 선비적 소양을 닦은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10]

3.3. 칼에 대한 이야기

우선 글을 쓰기 전에 아래의 내용들은 이 곳에서 가져왔음을 밝힌다.

선비하면 활쏘기로 유명하지만 의외로 칼을 잘 다루거나 애장하는 선비들도 많았다. 고려 이전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무인과 문신을 가리지않고 선비와 칼이 연관된 기록이 꽤 많은 편이다. 석천한유도포의풍류도 같이 선비와 칼이 같이 그려져 있는 그림도 자주 있다.
도필(刀筆) 칼과 붓의 집은 나무를 깎아서 만든다. 그 만듦새는 세 칸인데, 그 중의 하나는 붓을 꽂고 그 중의 둘은 칼을 꽂는다. 칼은 튼튼하고 잘 들게 생겼는데, 칼 하나는 약간 짧다. 산원(散員 일정한 임무가 없는 관원) 이하의 관리와 지응(祗應)ㆍ방자(房子)ㆍ친시(親侍)[11]가 그것을 찬다.
선화봉사고려도경
하위관리가 도필이라는 일종의 나무용기같은 걸 차고 다니는데, 붓 한자루와 서로 길이가 다른 검 두자루를 꽂고 다녔다고 한다. 다만 이 기록은 장검 패용으로 보긴 어려운 부분이 있다.[12]
양위표 讓位表 (부분발췌) 말할 때에는 반드시 하늘을 두려워하고, 걸어갈 때에는 모두 길을 양보하였으니, 이는 대개 인현(仁賢)의 교화를 받아서 군자의 나라라는 이름에 실제로 부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들에 새참을 내갈 때에도 변두(籩豆)를 갖추었으며, 장팔사모(丈八鍦矛)를 지게문에 기대어 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신라의) 풍속이 비록 허리에 칼을 차는 것을 숭상하긴 하면서도 지과(止戈)의 뜻이 담긴 무(武)의 정신을 참으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바로 전대인 9세기 통일신라시대 (남북국시대) 고운 최치원의 [양위표]에도 위의 구절이 있다. 당대에 지도층이 검을 소지한 것이 흔한 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유종식은 별장 김인문(金仁問)의 집을 찾아가 벽에 걸린 활과 칼을 보고는 가져다가 어루만지면서, “그대는 대장부다. 지금 이 시절에는 이 물건으로 재상이 될 수도 있는데 어찌 아녀자들처럼 하잖게 살아가는가?” 하고 속을 떠보았다. 그러나 김인문은 그 말을 이상하게 여기고 대답하지 않았다.
김준 열전
여기나오는 유종식(柳宗植)은 고려말기, 즉 14세기 중반의 인물이다. 제목인 '김준 열전'에서 볼수 있듯 이시대는 무인정권이 막장으로 치달을 때다.
무진년 전폐왕 우 14년(명 태조 홍무 21, 1388) 염흥방이 승복을 받으려고 국문을 참혹하게 하였으나, 조반이 굽히지 않고 욕하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 국적(國賊)을 베고자 한다. 너와 나는 서로 송사(訟事)하는 자인데, 어찌 나를 국문하느냐?” 하였다. 염흥방이 더욱 노하여 사람을 시켜 그 입을 마구 치게 하였다. 수일 후에 우(우왕)가 최영의 집에 가서 조반의 옥사를 의논하였는데, 이날 조반을 풀어 주도록 명하고 의약(醫藥)을 내리고, 마침내 염흥방을 순군(巡軍)에 내리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명철하시다.” 하였다. 우가 조반의 일곱 살 먹은 아이를 불러 그 아버지의 한 바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다만 칼을 빼어 시험하면서 말씀하시기를 ‘탐욕스러운 7~8인의 재상을 목 베어 나의 뜻을 시원하게 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자가 반드시 기한(飢寒)에 이르리라.’ 하더이다.” 하였다.
동사강목
조반(趙胖, 1341년~1401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조선개국에도 일등공신인 이 사람은 문신이지만 원간섭기의 군기의 정사를 담당하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맡는 등, '무'에 관심이 많던 인물로 보인다.
비지류(碑誌類) 의정부 영의정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공(韓公) 신도비명 병서 계유년(1453, 단종1) 10월에 의병(義兵)을 일으키려 하는데, 한두 명이 의구심을 품고 군중을 저지하는 자가 있자 공이 칼을 뽑아 들고 크게 외치기를,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은 사람이라면 면하기 어려운데,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그래도 헛되이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감히 다른 마음을 갖는 자는 벨 것이다.” 하였다. 이에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드디어 원흉을 제거하였는데, 머리를 빗고 벼 사이의 잡초를 제거하듯이 하여 큰 난을 평정하였다.
사가문집
조선 초 문신인 한명회(韓明澮, 1415~ 1487년)가 칼을 뽑아들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기껏해야 '모사꾼'의 이미지가 강한데 이런 기록을 보면 무도 갖춘 인물임이 드러난다. 사가집 자체가 조선초기 서거정(徐居正, 1420~1488년)의 글로, 완전히 동시대의 묘사이므로 믿을 만하다 생각된다.
말 타고 나가자니 진흙탕 길이 두려워 / 出門騎馬怕泥深, 권문세가를 날로 심방하지 못하노니 / 不向權門日訪尋, 칼 보며 술 마시면 한적하기 그지없고 / 看劍引杯閑寂寂, 책 베고 환약 지어라 늙음만 엄습해 오네 / 枕書丸藥老侵侵, 고독한 신세는 형체가 그림자 의지하고 / 伶仃身世形依影, 전원에 돌아갈 일은 마음에게 말하면서 / 歸去田園口語心, 요순 같은 임금 만들 꾀 없음이 부끄러워 / 堯舜慙無致君術, 백발의 사업을 조용히 읊조림에 부쳤다오 / 白頭事業付沈吟
사가문집
같은 사가집에 실린 서거정의 시다. 그 역시 칼을 보며 술을 즐기는 등 칼을 애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순천부(順天府)의 학사(學士)인 주전(周銓)을 만났는데, 상냥하고 사람이 좋으며 학문이 넓고 시를 잘 지었다. 나는 차고 있던 칼을 주어 선물로 하였고, 주(周)는 책을 두어 가지 주어 나에게 보답했다. 주는 말하기를, “한림(翰林) 이동양(李東陽)이 문학과 명망이 높다 하므로 나는 주를 통하여 한번 방문하려 했으나 돌아올 시기가 촉박하여 되지 않았다. 그대는 마땅히 나를 위하여 주를 찾아 보고 그 말을 전해달라.” 하였다.
속동문선
위의 기록은 조선시대 학자이자 문신인 김일손(金馹孫, 1464~1498)에 대한 기록인데 같은 학자인 '주전'을 만나서 마음에 들자 그에게 '차고 있던 패도'를 선물하고 교환물로 책을 받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조선전기까지 이런 선비의 '패도'가 문인들끼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화가 일어나던 날 숙직하였는데, 밤 이경에 정원 서리(書吏)가 말하기를, “재상 두어 사람이 가만히 영추문(迎秋門)으로 숨어 들어왔고, 근정전(勤政殿)에 불빛이 있는데 군사가 에워싸고 서 있습니다.” 하였다. 숙직하던 승지 공서린(孔瑞麟)ㆍ윤자임(尹自任)ㆍ한림 이구(李構)와 함께 합문(閤門) 밖에 나아갔다. 잠깐 뒤에 내수(內豎) 신순강(申順剛)이 나와서 성운(成雲)을 부르니, 성운이 칼을 차고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공이 붓을 쥐고 쫓아가니 신순강이 문지기를 시켜 잡인(雜人)을 금단하라고 하였다. 공이 성운의 띠를 거머쥐고 들어가려고 하니, 문지기가 공의 손을 쳐서 떼어 놓고 함께 붙들고 나왔다.
기묘록보유
1519년의 기묘사화를 기록한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이란 책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기서 칼을 차고 빨리 움직이는 인물은 무인이 아니라 조선중기의 문신인 성운(成雲, ? ∼ 1528년)이다.
내가 우연히 삼인(三寅)의 단검을 얻었는데, 삼인이라 함은 대체로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에 그 검이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는 삼인검은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물리쳐 준다고 하기에 내가 그 검을 사랑하여 허리에 차고는 부를 지어 기리는 바이다.
계곡집
16세기말 조선 중기의 문신인 계곡 장유(張維, 1587년∼1638년)에 대한 구절이다. 장유는 삼인검을 자랑스럽게 허리에 차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의 또다른 문신은 자신의 칼로 자결을 시도한다.
동계(桐溪 정온(鄭蘊))를 곡하며 세 차례나 간언을 올렸지만 공의 말씀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고 상황 또한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자, 공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결하였으나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은둔하여 일생을 마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 그 의리가 밝고 그 뜻이 순결하며 그 행위가 청렴하여 성인의 깨끗함을 얻었다고 할 만하니 공이 수립한 것은 거의 일월과 그 광채를 다툰다 할 것이다.
기언
정온(鄭蘊, 1569-1641년)은 계곡 장유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다. [기언]은 본인의 문집으로 조선 시대 우의정을 지낸 허목(許穆, 1595~1682년)이 편찬한 책이다. 정온은 선조에게 간언이 먹히지 않자 자신의 검으로 자결을 시도한다. 주목할 것은 하나같이 '허리에 차고'있었다는 점이다. 즉, 집안에 보관하던 검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소지하고 다녔음이 드러난다.
윤승해(尹承解) 묘지명 충의위(忠義衛) 윤공(尹公) 묘지명 병서(幷序) 공의 휘는 할(劼)이고, 자는 자고(子固)이고, 성은 윤씨(尹氏)인데, 고려 개국 공신 신달(莘達)의 후손이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왜적(倭賊)이 재차 쳐들어올 때를 당하여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이 상국(李相國)이 왕명을 받고 남쪽 지방을 체찰(體察)할 때에 황석산성(黃石山城)으로 세 고을을 보호할 수 있는 방패로 삼았다. 성을 넘을 당시에 어떤 사람이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져서 다리에 중상을 입자, 공이 그에게 차고 있던 칼을 뽑아서 다친 부위를 찌르라고 신속하게 명하였다. 이에 피가 흐르자 그 사람이 즉시 일어나서 걸을 수 있었다. 아, 이것이 어찌 사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추격하는 적들이 지척에 있어서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에 달려 있는데도 소리만 들리고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태연히 그 목숨을 살리고자 하였으니, 대개 공이 평소에 마음 씀씀이가 대부분 이런 것들이었다.
동계집
같은 정온(鄭蘊, 1569-1641년)의 문집인 [동계집]에 실려 있는 윤승해(1534~1607년)라는 인물의 비석명으로 1597년 정유재란대의 기록묘사가 실려 있다. 여기 나오는 윤승해라는 사람은 과거를 통해 서울에 올라오지 않은 '지방유지'이다. 황석산성전투의 묘사인데, 다른 고을의병이 쓰러지자 허리의 칼을 뽑아 응급조치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행장(行狀) 통훈대부(通訓大夫) 봉상시 정(奉常寺正) 죽창(竹窓) 이공(李公) 행장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부군께서는 필선 윤전(尹烇), 주부 송시영(宋時榮) 등 두 공과 더불어 스스로 처신할 방법을 상의하셨는데, 송 주부가 “우리가 이런 꼴을 보리라고 어찌 짐작이나 했던가. 어제 죽지 않았다가 오늘 적의 핍박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은가.”라고 하자, 윤 필선이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가리키며 “이것이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라고 하니, 부군께서 “우리는 평소 고인(古人)의 글을 읽은 사람으로 오늘과 같은 사태를 당하였으니, 신하로서 살기를 바라겠는가. 어젯밤에 소나무 사이에서 자결하려 하다가 하리(下吏)에게 들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매우 한스럽다.”라고 하셨다.
동춘당집
역시 허리에 칼을 차고 있던 이 윤전(尹烇 1575∼1636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적병과 교전하다 살해당한다.
이때 사천(四川)의 거인(擧人) 한 사람이 있다 말하기를, “우리 고향은 아직 태평하지 못한걸요.” 하자, 좌중 사람이 눈을 흘기며 말을 막는 자가 있으므로, 그 사람은 뒷짐을 지고 가 버렸다. 최생의 나에 대한 대접이 심히 후하므로, 우리나라 필묵(筆墨) 및 남포연(藍浦硯) 1개를 선물로 주고, 또 찬 칼을 끌러서 주었더니, 최는 항주에서 나는 비단부채 한 자루로써 답례하였는데, 초화(草花)와 협접(蛺蝶)을 그리고, 화리(花利)로 자루를 만들고 만(卍) 자의 문금(文錦)으로 변(邊)을 꾸몄다.
연대재유록
유득공(柳得恭, 1748~ 1807년)은 유명한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신이다. 1801년 사은사일행으로 중국에 다녀온 그가 사천지방에서 답례를 하는 모습인데, 중국의 '최생'이라는 자의 호의에 본인 허리에 찬 칼을 선물하는 장면이다.
또 그를 따라 평양에 이르렀을 때 장복상(張福尙)이란 자가 있었는데. 공은(公銀) 1만 냥을 축내었다. 마땅히 사형감이었으나 그는 성격이 호협하여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서도(西道) 백성들이 다투어 저마다 그의 죄를 대신 받으려고 하였다. 공이 그를 위해 주장에게 고하여 자기의 봉급을 모두 털어 그것을 보상케 했으나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자 서인(西人)들이 다투어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칼자루를 장식한 테두리를 떼어 내놓았고, 아녀자들도 가락지를 벗어서 던져 주었다. 잠깐 사이에 은(銀)이 모자라는 양만큼 채워져서 장복상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성명(姓名)이 진신(縉紳) 사이에 알려져서 무릇 안절사(按節使)가 되어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다투어 공을 보조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다산시문집
이번엔 개인이 아니라 여럿의 선비에 대한 기록이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의 [다산시문집]의 기록으로 장복상이라는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평소 베풀기를 잘한 덕으로 평양의 백성들이 그를 구제하려 하는데, 서인(西人)들이 다투어 각자 차고 있던 칼을 풀어서 그 칼자루를 장식한 테두리를 떼어 기부했다는 장면이 나온다. 흥미롭게도 동인보다 온건파인 서인들조차 칼들을 지니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칼들이 고가의 장식을 한 작품들임을 유추할 수 있다. 정약용의 시대면 이미 서인들은 송시열 이후 힘을 잃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를 용서해 주사이다(乞饒), 그를 용서해 주사이다(乞饒), 장복선을 용서해 주시기를 만 번 이라도 비나이다(萬 乞饒 張福先), 미동 어르신, 채 판서님(美洞爺爺蔡尙書), 저 장복선을 용서해 주사이다(彼張福先乞饒全), 장복선을 용서해 주시면(張福先如得饒), 한양에 올라가셔서 정승이 되오리다(此回知登上台筵), 만약에 그리 되지 못한다 하여도(上台筵雖未筵), 고운비단 댕기를 맨(剪板樣子錦唐), 젊은 첩을 무릎 앞에 앉히리다(得小郞君在膝前), 그를 용서해 주사이다(乞饒), 그를 용서해 주사이다(乞饒), 장목선을 용서하여 명대로 살다 죽게 용서해 주사이다(乞饒張福先 終年)
잡인열전
참고로 이 '장복선'이란 사람 역시 조선의 협객이다. 이수광이 지은 잡인열전을 보면 평양기생들조차 노래를 지어 이 사람을 풀어달라고 하는데 무려 백여명이 몰려와서 이런 노래를 한다.
이중봉(李中峯)의 이름은 진예(辰豫), 하남부(河南府) 낙양현(洛陽縣) 사람으로 기묘년에 과거에 올랐으며, 30세의 젊은 나이에 영명을 날리고 있다. 사람됨이 단정하고 자상하며 시에 능하고 글씨를 잘 쓰는데, 이월정(李月汀)과 일가 형제이다. 그때, 운루(雲) 박재굉(朴載宏)이 나와 같이 갔었는데, 마음이 서로 가장 잘 맞아서 이중봉이 운루에게 작별시를 주었다. 술을 마시며 매우 즐거워하면서 운루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선사하니 이중봉이 말하기를, “옛사람은 서로 사귀는 데 있어 마음을 아는 것을 귀하게 여겼고 물건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운루가 말하기를,“한 사람의 좋은 벗을 얻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극한 즐거움인데, 어찌 주고 안 주는 것을 말하겠소.”하였다.
심전고
다산 정약용의 제자 '박재굉(朴載宏)'이 이중봉이라는 선비에게 허리에 찬 검을 선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조선 초기에도 나왔던 장면인데 선비들끼리 이런 검의 교환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건 조선 후기에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칼〔買刀說〕 작은 칼 한 자루를 행상한테 샀는데, 모양이 매우 질박하고 날이 지극히 무디었으며 물건을 베어 보면 이가 빠지거나 날이 휘어 버리니, 천하의 조악한 물건이다. 소꼬리로 칼집을 만들어 띠에 차고 다녔는데, 길손이 하찮게 깔보며 말하였다. “어디에 쓰려고 이런 걸 사셨소? 심하구려, 칼 보는 눈이 이렇게도 없다니. 물건 입장에서는 다행 반, 불행 반이구려. 만약 이 칼이 안목 있는 사람을 만났더라면 가차 없이 버려졌을 것이니 어떻게 사람한테 쓰일 수 있었겠소? 안목 없는 사람을 만난 덕에 사람한테 쓰이고 게다가 귀중히 다뤄지기까지 하니, 칼이 운이 좋아서 그대를 만난 것이외다. 반대로 이 칼이 그대를 만나지 않고 농부나 장사치 손에 들어갔더라면 그들한테 잘 어울렸을 것이니, 칼의 입장에서야 어찌 그 편이 더 큰 행운이 아니었겠소? 지금 그대가 이 칼을 집 안에서 차고 있으면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두 불편해하고, 밖에서 차고 돌아다니면 보는 이들이 다 비웃으면서 한편으로는 대장장이의 형편없는 솜씨를 탓하고 한편으로는 그대의 무지를 비웃을 것이오. 이렇게 보면 칼이 그대를 만난 것은 불행이라 할 것이오.” (주: 이 장면을 보면 선비가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칼'을 소꼬리칼집따위에 넣고 다니는 것을 비웃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차고 있던 칼을 꺼내어 자랑하는데, 칼자루를 무소 뿔로 만들고 칼집을 은으로 장식하여 겉모습이 사람의 눈을 놀래기에 충분하였다. 칼을 한번 뽑아 닦아 보니 서리 같은 광채를 뿜어 달빛 같은 빛을 내었고, 치켜들어 겨누어 보니 서슬 퍼런 기운이 교룡을 베고 옥을 자를 듯하였다. 참으로 내 칼과 나란히 놓고 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주: '길손'이라는 사람이 선비인지 중인인지 천민인지 알 길은 없으나 주인공(선비)과 나란히 동등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보면 (그리고 특히 칼을 빼들기까지) 같은 신분인 양반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내가 말하였다. “그대의 칼은 참으로 보검(寶劍)이오. 그러나 쓸모가 없으니 쓸모 있는 내 칼만 못하오. 그대는 훌륭한 칼을 좋아할 줄만 알고 사람마다 사용하기에 적합한 것이 따로 있음은 모르는구려. 또 그대는 칼을 볼 줄 모르는 내가 안목이 없다는 사실만 알고 칼을 잘 보는 그대가 안목이 없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소. 그대의 칼이 보검이긴 하나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외다.” 길손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오?” “칼의 쓰임새는 사람에게 달렸지 칼한테 달려 있지 않소. 그래서 옛사람은 칼을 논할 적에 천자의 칼, 제후의 칼, 서인(庶人)의 칼을 구별하였소. 지금 그대가 그 칼을 쓰려 한다면 장차 어디에다 쓸 수 있겠소? 내 칼의 쓰임 정도에 불과할 것이오. 내 칼이 조악하기는 하나 내 한 몸이 쓰기에는 충분하오. 글을 쓸 적에는 종이를 자르기에 좋고, 텃밭을 가꿀 적에는 각종 열매를 따기에 좋소. 또 손톱을 깎거나 뒷간용 나무쪽을 다듬기에도 좋소. 이처럼 일상생활의 긴요한 용도에 족히 쓸 수 있으니 쓸모 있다고 하지 않겠소? 나는 어려서부터 옛사람의 글을 읽어 성현의 도(道)에 뜻을 두고 문장을 배워 온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한 가지도 성취한 일이 없으니, 재주가 노둔하다 할 것이오. 그리고 활시위 하나도 잡아당기지 못할 만큼 힘이 약하고 큰 검에는 마음을 둔 적이 없으니, 천품이 졸렬하다 할 것이오. 그렇다면 큰 고래를 벨 수 있는 의천검(依天劍), 검광(劍光)이 두수(斗宿)와 우수(牛宿)의 자리를 쏘는 용천검(龍泉劍)이 있다 한들 나에게는 마치 궁녀가 창을 지니고 맹인이 거울을 지닌 것 못지않게 무용지물일 것이오. (주: 이 부분은 참 흥미로운데 문인임에도 활시위를 당기지 못하고 큰 검에 마음을 둔 적이 없음을 마치 "창피해 할것"이 아니라고 반론하고 있어, 많은 선비들이 역설적으로 장검등에 마음을 두고 있었음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의천검이나 용천검이니 하는 설명까지 문인이 하고 있죠). 더구나 지금은 명철하신 성상(聖上)께서 위에 계시어 팔도(八道)가 교화의 빛으로 환히 빛나고 있소. 무력을 잠재우고 문치를 펴시어 무기를 녹여 버리고 갑옷을 아름답게 꾸며 놓았으니, 활과 검이 무기고(武器庫) 안에서 먼지만 수북이 쌓여 가고 늙은이와 젊은이 모두 뽕나무 아래서 김을 매고 있소. (주: 이 부분은 한국의 무기사에서 한번 살펴볼 장면같습니다. 저자의 생몰년도로 보아 아마도 정조대가 아닌가 싶은데, 거꾸로 말하면 그 전대까지는 활과 검이 무기고안에서만 잠자고 있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이 같은 태평성세에 사람들은 수고로움을 잊고서 즐겁고 평화롭게 지내며 도검(刀劍)이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모르오. 오랑캐를 정벌하는 칼 울음소리와 초(楚)나라 성 위에서 태아검(太阿劍)을 휘두른 일 등은 문인의 한가로운 담소에나 끼어들 뿐이오. 지금 세상에 그대의 칼은 쓸모가 없으니, 일상적인 쓰임에 요긴한 내 칼보다 못하다 할 것이오. 그대가 만약 그런 줄을 알고도 그 칼을 차고 다닌다면 사람들에게 과시하여 남보다 좋은 패물(佩物)이 있음을 인정받으려는 것에 불과한데, 이 역시 옳지 않소. 만물은 실상이 있어야만 적합한 이름을 붙일 수 있고, 쓰임새가 있어야만 아름다운 외관을 칭찬할 수 있소. 만약 실상과 쓰임새가 없는데 한낱 이름과 아름다움만을 취한다면 식자들에게 비웃음을 살 것이오. 잘 생각해 보시오.” 길손이 물었다. “그대의 칼을 내 칼과 바꾼다면 어떻겠소?” 내가 대답하였다. “원치 않소. 물건을 서로 바꾸는 것은 피차의 가치가 대등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농부가 곡식을 질그릇으로 바꾸어도 옹기장이에게 손해가 되지 않고, 옹기장이가 질그릇을 곡식으로 바꾸어도 농부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 것이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몸에 차고 다니는 물건을 서로 바꾸는 것을 보면, 남에게 좋은 물건이 있는 걸 보면 자기 물건의 좋고 나쁨을 헤아리지 않고 무턱대고 바꾸자고 하여 베를 비단으로 바꾸고 돌을 옥으로 바꾸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상대방도 담담히 받아들여 이상하게 여기지 않더이다. 이것이 이른바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을 솔직히 말하지 않고 한사코 둘러댄다.’라는 경우요. 나는 내심 이런 습속을 해괴하게 여겨 왔으니, 평소 다른 사람과 패물을 바꾸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소이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그대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물건을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물건으로 바꾸려 하겠소? 내 칼은 조악하기 때문에 다행히 나에게 쓰이고 있고, 그대의 칼은 훌륭하기 때문에 다행히 그대에게 쓰이고 있으니, 각기 제자리를 얻었다 할 것이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바꾸겠소? 값을 논한다면 내 칼은 그대의 칼을 쳐다볼 수도 없으니, 나는 그런 염치없는 짓을 할 수 없소. 쓰임새로 말하면 그대의 칼이 내 칼만 못하니, 바꾸기를 원치도 않소. 그대는 나를 위하여 사람들에게 그대의 칼 쓰는 법을 배우지 말고 나의 칼 쓰는 법을 배우라고 말해 주기 바라오.” 길손은 묵묵히 부끄러운 기색을 띠더니 자기 칼을 들고 물러갔다. 이에 문을 닫고, 길손과 주고받은 말을 기록한다.
무명자집
이 '검'에 대한 이야기는 18세기의 문인 윤기(尹愭1741~ 1826년)가 쓴 [무명자집][13]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윤기는 자신이 활이나 칼을 다루지 못하는 걸 부끄럽게 여겼다는 듯한 말을 한다.

18세기의 이헌경이란 유학자는 유달리 칼을 좋아해서 칼을 찬 사람들을 보면 '장부의 복장'이라고 여기며 좋아했다고 한다.[14] 이는 본인부터가 유달리 칼을 좋아했다고 한 만큼 일반적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평소에 칼을 차고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단 점을 알 수 있으며, 칼이 대장부 같은 상징성과 연결되는 점도 보여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선비에게 칼은 의외로 상당히 애용됐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도검 패용 같은 경우 아주 일상적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일례로 도시나 마을의 모습을 묘사한 풍속화 등을 보면 군인을 제외한 인물이 칼을 찬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동래 왜관과 관련된 일본 측의 기록인 통항일람에서도 근무 중인 군관이나 무관은 칼을 찼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칼을 차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은 치안 자체도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기 때문에 굳이 마을 안에서 장검을 차고 다닐 이유도 적었다. 따라서 선비의 도검 패용은 개인의 성향이나 상황에 따라서 칼을 차고 다니기도 했다 정도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예를 들자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경우처럼 호신이 필요할 때는 활이나 칼을 차거나, 하다못해 장도칼 정도는 챙겼다고 한다.[15]

물론 이러한 이야기들은 당연히 시대나 지역, 개인 등에 따른 차이가 있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쟁이 일상적이며 상대적으로 치안이 나쁠 수밖에 없는 삼국시대와 평화로운 시기의 조선을 비교하자면, 당연히 전자가 검술을 익히고 평소에 도검을 패용하는 경우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4. 현대의 인식

상기했듯이 선비 자체는 나쁜 뜻이나 직업이 아니다. 자기 향상에 힘쓰고, 면학을 지향하는, 일견 학자와 비슷한 꼴이다.

그러나 현대 한국에서 선비에 대한 인식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권도나 융통성을 발휘할 줄 모르는 답답한 사람을 씹선비라고 속칭하기도 하는 것이 일례다.[16]

비록 효도와 같은 파편이 민간에 남아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명칭과 관계 없이 부모에 대한 감정 등이 일방적이거나 과하지만 않다면 상식 수준에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직접적으로 효도, 효자라는 개념을 말하거나 강변하는 이들도 아직 한학이 고급 지식으로 취급될 적에 성장한 중장년배들이다. 요즘 청년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리라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한국 지폐에 조선조 거유로 대접받는 학자들의 초상이 들어가 있지만, 사실상 이들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한국인은 몇몇 역사와 철학에 관심 있는 학도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다. 상기한 학자들과 대비되는 이미지를 가진 무인들, 이를테면 이순신이나 그외 이름을 날린 과거 군인들이 꽤 대접을 받는 것과 대조적이다.

4.1. 모화사상

조선조 선비 대부분은 극심한 모화사상 견지자들이었다.

그나마 초창기였던 개국~조선 초반에는 그래도 나았다. 이때는 명분에만 따르는 게 아니라 실리를 추구했기에 이 시기에는 좀 많이 모화사상에 취한 이들이 아닌 한 사대교린을 실리적인 측면으로 해석해 심지어 세조 때에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대접이 시원찮았던 적도 있었다. 초반기만 해도 실용적이었던 이것이 갈수록 교조화되다 보니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모습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 진짜 문제이다. 광해군 시기에 대북파 신하들이 재조지은에 매몰되어 "나라가 망하더라도 중국(명나라)을 따르겠다!"라는 식으로 주장했을 정도가 되었다.

더 큰 문제는 이게 필요 이상으로 진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관복을 바꾸려고 했는데 신하들의 반대 주장 중에서 "명나라가 준 것인데 어찌 바꿉니까?"라는 게 있다. 명나라는 240년 전 멸망했고, 조선의 관복은 근 500년 전부터 입던 것인데도 ‘명나라가 준 것’이라는 속성에 매여 있던 셈이다. 만력제 등을 모시는 만동묘에 제사지내는건 1931년까지도 있었다.

물론 이유가 완전히 결여된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에 엄청난 도움을 준 게 명나라이기 때문이다. 당시 신하들이 과장하여 말하는[17] 것이 많은데, 이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를 버리겠습니까?’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명나라의 영향을 받은 모든 나라에서 나오는 영향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베트남이고, 일본에서조차 소중화사상과 더불어 중국학이 대대적으로 들어왔다. 당시에도 바쿠후에 물 밀듯이 들어온 관학(퇴계학 부류)와 중국학과 불교로부터 일본 고유의 문화를 지키자고 나온게 고쿠가쿠(국학)이다. 그니까 이게 딱히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청나라의 조공국이 된 후에도 이런 건데 이는 조선이 마냥 청나라의 종속적인 형태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도 작용된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저기 야만족(청나라)이 천자국(명나라)를 멸망시켰어도 우리는 저런 야만족(청나라)를 천자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이는 훗날 영조 때에도 그렇고 대중화사상이라는 형태로도 나온다.

이와는 별개로 조선인들도 만력제가 암군임을 인지하고 부정적으로 여겼던 기록이 있다. 조정에서 명나라가 망했다는소식을 듣고 나라가 망했음에도 자결한 충신이 없는 것에 대해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지조와 절개 있는 자들이 떠나 그렇다’라며 은근히 명나라를 디스하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현대의 편견처럼 명나라를 무조건 긍정일변도로 바라본 것만은 아니다.
상이 이르기를, "3백 년을 지켜온 종묘 사직이 일조에 빈 터가 되어 버렸으니, 의당 순절한 신하들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하니, 석윤이 아뢰기를, "만일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반드시 모두 그들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반드시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고, 예의가 쓸어버린 듯이 흔적도 없고, 염치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지조와 절개 있는 사대부들이 이미 먼저 자리를 떠나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출처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사십 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송준길

게다가 1930년대에 만력제에게 제사를 지내던 것을 그냥 생각 없는 수구적 모화사상으로 보기는 정황상 힘들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어느 나라에서 누구의 지원을 받으며 1592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세와 같은 일제에 맞서 저항하고 있었는가? 폭압적인 일제도 근본적으로 공유하는 문화도 있고, 무작정 폭정으로만 일관할수는 없을뿐더러, 유림 내부에서도 친일파들의 영향력이 강해서 굳이 조질 필요도 없는지라 조선의 유교문화는 함부로 건들지 못했다. 정황상 당시 만력제를 모시는 제사를 지낸 것은 안 그래도 독랄했던 일제가 파시즘 뽕까지 맞아 전 세계랑 같이 미쳐돌아가던 살벌했던 시절 그나마 일제가 함부로 터치하기 힘들었던 전통 유교 제례를 빌미로 고도의 섬세한 독립의식을 표출했다고 볼 수도 있다.

4.2. 무능함과 한계

유교 자체에 대한 거부감뿐만 아니라 선비 혹은 선비를 지향했던 자들 자체에 대한 대중의 혐오도 있다. 일단 유교 경서는 현대에도 대학교나 여타 기관 등에서 추천 도서에 넣을 정도로 어느 정도는 명저 취급을 받는 편이다. 문제는 오로지 이것만을 전적인 교양으로 삼았을 때에 일어나는 부작용이다.[18]

국가의 정치인 혹은 일반인이라도 살아가고자 하면 당연히 익혀야 할 다른 상식, 교양이 있기 마련이다. 나라의 정치인이 가장 기본적으로 신경써야 할것은 도시 정비하는 법, 호적을 정리하는 법 등 머리를 굴려서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치인이 오로지 유교라는 하나의 학문의 경서만 공부하고 행동 지침으로 삼으면 저것조차도 할 수가 없다.[19]

경제적 지식을 쌓지 못했으니 경제가 바닥이고, 경제가 바닥이니 민생과 군사력도 바닥이고 그럴 때마다 상대를 오랑캐라고 모욕하지만 변변한 저항조차 못한 채 매도만 일삼으면 그걸 현대의 속된 말로 '입만 살았다'고 보일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선비들이 근대화를 시작했다고 옹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근대가 태동했으며, 그 기반 사상에 실학이 있었다는 주장은 현재 주류 역사학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다. 설령 이를 인정한다 해도, 선비들은 조선을 근대화하는 데 실패했고, 그 실패의 원인은 일제에 의한 국권 피탈이었다. 나라를 쇠약하게 만들고, 나라를 매국한 것은 모두 지배계급인 선비들의 책임이다. 선비들이 저지른 거악인 망국과 매국을 감추고, 선비들이 실현하지 못한 근대화의 업적만을 내세우는 것은, 자신들의 계급을 수호하려는 지식인 계급의 위선으로 볼 수 있다.

개화기 이후 청,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의 각축으로 조선이 몰락하는 과정에서도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도 시대적 변화를 모르고 기존의 질서와 기득권 사수 등 개혁을 반대하는 모습으로 항일 의병이나 독립운동 세력을 분열시키는 행동으로 기득권만 지키려는 사람 등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4.3. 반론

사실 이건 대중적인 인식에 가깝고 역사 연구 결과에 따른 밝혀진 사실들은 거의 180도 다르다. 일단 선비들이 유교 경전에 빠저서 국가의 경제력도 말아먹고 군사력도 말아먹고 유교에 빠진 탁상공론가 내지 모화사상에 심취한 광신도들로 묘사하는 말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당시 조선에서 정권을 많이 잡고있던 서인들은 이이의 이기이원론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회 개혁적인 정책을 많이 주장했다. 실제로 이게 실현되기도 했다.

서인들의 후신인 노론들의 개혁 정책도 마찬가지다. 신분제 완화, 여성교육 중시[20], 여군 창설, 내수사 약화, 조선의 금납화 주장[21] 등 과연 선비들이 유교에 빠진 광신도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의문스런 모습이 많다.

경제력이 높아도 무조건 민생과 군사력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예로, 북송은 경제력은 엄청났지만 군사적으로 좋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였으며 청나라 역시 경제력으로는 서구열강들을 압도했으나 열강들에 비해 여러 기술들이 부족했으며 정예병인 팔기군마저 약화되어 아편전쟁, 태평천국의 난, 청일전쟁 등에서 큰 피해를 입는다. 다만 이는 북송과 청나라가 무능한 지도자들의 실정으로 국력이 바닥나고 재정은 거덜났으며 시대에 안맞는 군사체계만 고집한 탓이 크다.

민생이 바닥이니 유의미한 개혁을 할 수가 없으며, 군사력이 바닥이니 외침으로 인해 국가가 초토화된다고는 하지만 조선군의 문제점이라고 지적되는것들은 알고보면 조선이 영향을 많이 받은 명나라도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이라 조선에게만 뭐라하는것도 부당한 면이 크다. 당장 조선을 비웃은 명나라만 해도 토목보의 변에서 대군을 동원하고도 2만의 몽골군에게 참패하여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으며 1555년에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했을 정도로 처참했다.출처 게다가 명나라도 조선처럼 장군들에 대한 견제와 감시가 지나칠정도로 심했으며 황제들과 대신들이 군사적 역량이 모자라는데도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장수들에게 무리한 전쟁을 강요했다가 토목보의 변, 정난의 변, 송산 전투처럼 우세한 상황인데도 열세인 적군에게 참패하는 참사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군이 중점으로 뒀던 토벌전만 놓고 보면 명나라와 비교해도 조선군의 전과는 나쁘지 않았다.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군의 5분의 1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군보다 병력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으며, 예상치 못했던 럭키샷이 터져 예전부터 골칫거리였던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조선군이 직접 죽여 복수하기도 했다.조선군이 건주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세조(조선)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신문물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선비들이고, 그 과정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이며 조선인 최초로 라틴어, 프랑스어 등 서양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 사람들도 선비들이었다. 조선의 근대화를 시작한 사람들도 선비들이었다. 개화기에 미대륙을 여행하면서 미국 정치의 민본주의를 각성한 점부터 그러하다. 실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킨 사람들도 선비들이었다. 당장 실학자 중에 중상학파는 청나라와 교류하여 문물과 제도를 본받아 한다고 주장하고 정약용처럼 중농학파 경우 기존의 제도의 문제점들을 살피고 개혁하려는 경세유표 경전을 만드는 여러가지 신경을 썼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유림 세력들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나 독립운동활동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이들 중 박은식, 김창숙 등의 개혁적 성향의 유림 지도자들이 조선의 독립과 더불어 민족적 계몽과 유교적 구습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등의 근대적 가치체계와 인식의 확산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4.4. 결론

선비에 대해 현대 한국인들은 실용성이 없는 학문에 빠져 나라를 망친 집단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 중 하나이기도 해서 유럽기사도일본사무라이 정신과 같은 아이콘으로 선비 정신을 브랜드화해서 홍보를 하자는 의견도 있다. 즉, 호불호가 갈린다.

선비와 자주 대비되는 사무라이는 한국인들이 선비에 대해 느끼는 이미지와 달리 현대 일본인에게 상당히 이미지가 좋다. 과거 경직되고 무능한 사무라이도 많았지만 막말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것도 사쓰마나 조슈, 도사의 사무라이 계층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완벽히 몰락한 선비계층과는 다르게 사무라이와 그들의 소위 무사도에 대한 인식은 근현대 일본에 자연스럽게 긍정적으로 녹아들게 된다. 정작 그 무사도는 유교적 개념(본분을 다한다던지, 충의를 지킨다던지)을 진하게 내포하고 있다.[22] 따라서 한국인들이 진정으로 싫어하는 것은 유교 그 자체보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시작된 유교랍시고 그 사상을 곡해하거나 왜곡하여 유교로부터 상당수 내려받기는 했지만 원래의 유교로부터는 변질된 유교적 전통임을 알 수 있다.

선비하면 붓과 유교만 떠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선비들은 필수 교육 과목인 6예(六藝)의 하나인 궁술을 갈고 닦았으며, 검술을 갈고 닦은 선비도 많았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선봉장들 다수가 선비와 양반 출신이었던 것처럼 직접 몸으로 행동하고 나라를 위해 국가를 발전시키고 지킨 훌륭한 선비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하필 그런 선비와 유교가 지배한 조선의 결말 때문에 한국에서 선비는 구시대의 부패한 지배층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고[23], 선비의 본질적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유교 사상'이 현대인에게 와닿지 않는 것을 넘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며, 아래의 은어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선비라는 단어 자체가 비하적으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에 무리하게 선비를 브랜드화하려고 시도하면 역효과만 날 가능성이 높다. 서양의 기사 인식, 일본의 사무라이 인식과 달리 무언가를 지키는 사람이라기보다 통치하고 군림하는 정치인에 훨씬 더 가깝게 인식되기도 한다.예시[24]

게다가, 선비들은 극심한 모화사상으로 중국에게 사대를 했던 지식인 계급이라는 점에서 국가의 이미지를 해치는 원인밖에 되지 못한다. 만일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이 "선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중국의 정신적 속국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조롱한다면 변명하기가 몹시 곤란해진다.

한국에서 브랜드화할 만한 컨텐츠가 선비'밖에' 없는 것도 아니라서 신라시대의 화랑이나 임꺽정이나 홍길동 같은 의적 혹은 처녀귀신을 브랜드로 삼는 경우도 있다.

5. 기타

6. 같이 보기



[1] Shūshēng, 슈셩, 서생.[2] 이러한 해석은 용비어천가에 실려 있다.[3] 원래 의미는 전쟁에 수레 1승(乘)을 낼 수 있는 계층을 의미함. 천승지후, 만승(천자를 의미)라는 말이 있었듯 지방의 잘사는 집안을 의미했음.[4] 원래 문자 자체는 제사를 지낼때 옆에서 절차를 말해주는 사람을 의미함.[5] 서양Knight도 혈통에 의한 신분 계승과 자기 자신의 수련을 통하여 된 경우도 많으므로(나이트 베츌러) Knight의 동아시아 번역어가 騎士인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할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士는 그야말로 '문무겸전 관리'라는 이미지가 크고 knight는 '무인이자 영지의 관리자'라는 이미지가 크다.[6] 이순신이 직접 기술한 난중일기에서 사용된 어휘를 보면 이순신의 학식이 보통 이상의 성취를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문체들이 군인답게 무미건조하고 행정, 사무에 관련된 용어들이 다수이기는 하나 스스로와 나라가 위급한 순간이었던 명량 해전이나 어머니와 아들의 사망에 대한 기록 등을 보면 학문적 성취가 없었다고 볼 수 없다. 공문서를 다루는 관리로서 임금에게 올리는 장계들에도 '신에게는 전선이 아직 열두 척 남아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등의 기록에서 보다시피 명문장이 많다.[7] 바다 건너편 애니메이션이나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자객이나 사무라이(侍)만 무사인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지만 무사(武士)의 뜻은 글자 그대로 무예에 종사하는 선비다.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크게 되려면 어느 정도는 유학적 소양이나 행정 실무 능력은 갖춰야 했고, 막부 중후반기로 갈수록 이들에게 요구되는 학식과 교양, 행정 실무 능력이 늘고 무예의 비중이 줄며 아예 은 장식으로만 차고 다니면서 정작 쓸 줄은 모르는, 사실상 문관인 사무라이들이 수두룩해졌다. 이 때문에 일본의 사무라이들도 과거에는 사족(士族)이라는 칭호로 불린 적이 있었다. 애초에 '사무라이' 의 한자는 '모실 시' 자를 쓴다. 시종, 시비 할 때의 그 시. 원래 귀족들을 모시다가, 가마쿠라 막부 붕괴 후부터 실권자가 되었기에 그 뿌리가 '모시는 자(servant)'인 것이다.[8] 결론적으로 영정을 두던 문소전과 신위를 두던 광효전을 합쳐 원묘를 만들고, 원묘의 명칭에 대한 논의 끝에 문소전으로 정한다.[9] 이 중 한국은 문무 중 문에 특화된 유교적 선비가 를 대표하게 되었고, 일본은 무에 특화된 사무라이(侍)가 士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10]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신자인 '도마' 라는 세례명이 있으나 남겨진 유묵의 내용이나 유년 시절 받았을 한학교육을 고려하면 천주교 신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유교적인 선비에 가깝다. 물론 조선시대 때 천주교를 들여온 사람들이 선비들이었고, 이로 인해 독자성을 어느 정도 인정받는 상황, 그리고 안 의사가 천주교로 개종한 사실을 본다면 한학과 유교는 그냥 별개의 학문으로 배우고 종교는 천주교를 믿는 것일 가능성도 크다.[11] 지응(祗應)은 심부름을 다니는 하급관리이며, 방자(房子)는 고려대에 중국의 사신일행이 머무는 사관(使館)에 속하여 허드렛일을 맡아보던 잡직이다. 조선시대에도 관청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인에 속한다. 친시(親侍)는 궁중에서 사환 노릇을 하는 청년 혹은 남자아이를 말한다.[12] 원래 동아시아권에서 칼은 붓과 더불어 필기구에 속했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부터 대나무나 나무로 만든 간독에 붓으로 기록을 남겼는데, 오자가 발생하면 그것을 칼로 긁어내고 다시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사무를 보조하여 기록하는 하급관리를 가리켜 "도필리(刀筆吏)"라고 하였고, 이들이 휴대하는 붓과 칼 및 그 용기를 도필이라고 불렀다.[13] '무명자'는 윤기의 호다.[14] 다만 정작 본인은 힘이 약해서 검술을 익히진 못했다고 한다.[15] 방랑시인 김삿갓도 호신을 위해 한손검 수준의 길이를 가진 죽장도를 들고 다녔으며, 시에서 칼에 대한 구절이 종종 등장한다.[16] 이는 동북아시아가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가 유교 때문이라는 인식 탓이 크다. 현재 유교 창시국인 중국에도 유교는 시대에 뒤처진 학문이라는 인식이 있다. 사실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에도 탈춤에서 선비를 심하게 비판한다든가, 동학에서 이미 유교에 개혁할 부분이 있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이것 또한 과거로부터 내려온 면도 없지는 않다. 구한말에는 조선이 서구화로 오랑캐 국가가 된다는 입장과 서구적 근대문화의 적극적 수용을 외치되 전통 유교사상과 유교문화 일체는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는 태도, 전통 유교사상의 일부 가치를 정신문화의 핵심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며 이를 서구적 근대와 절충 혹은 융합하려는 세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17] 이건 당시 실학자들도 조선의 문제점을 과도하게 과장하여 비판할 때 쓰기도 한다. 즉 조선 선비들은 과장하여 말하는 말이 많다.[18]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조광조.[19] 이전까지만 해도 훈구파의 평가가 나빴다가 그래도 현재는 훈구파의 평가가 좀 더 올라간것도 훈구파는 사림파에 비해 부패했다든가 하는 식의 안좋은 모습도 있긴 했지만(사실이긴 하다.) 그뿐이다. 훈구파가 부패한 현실정치가라 가정한다면 사림파는 현실적 능력이 아닌 유교의 경전과 교리에 빠진 근본주의자로 현실 정치에서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한 부류였다. 심지어 개념까지 없었다.[20]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은 여성들의 유학교육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대부 여성의 재혼 금지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21] 심지어 송시열이 주장한 것도 많다[22] 단순한 어원 얘기지만 무사란 단어 자체가 똑같은 선비 사자 앞에 좀 전문분야가 싸움이니깐 무자가 붙은 거지, 기본은 다 같은 유교 한자문화권의 바로 똑같은 그 선비 지배층이었다. 조선 이전 아예 문반, 무반 구별 자체가 뚜렷하지 않았던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반대로 일본도 전국시대의 전란이 완전히 끝나고 일본 역사상 전례없는 평화가 이어지면서 전통적인 군사 지배계급을 무장해제, 문반화시킬 필요성이 있었던 도쿠가와 에도 막부쯤으로 가면 한국의 선비나, 일본의 사무라이나 본질은 크게 다를바 없게 된다. 결국 현대 일본에선 사무라이를 여전히 긍정적인 역사적 코드로 홍보하는 반면, 한국에서 선비를 비롯한 유교적 전통 문화가 당장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찬반논쟁을 일으킨 건 전자는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룩해 제국주의 열강으로까지 올라섰던 반면, 한국은 근대화에 실패해 구 조선왕조가 철저하게 싸그리 몰락하면서 그 일본의 먹잇감이 되어 수난기를 겪은 끝에 탄생한 그 후신은 뿌리부터 조선왕조와 그 뒤에 깔려있던 성리학적 전근대성을 부정하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 체제가 들어선 다분히 결과론적인 관점이라 할 수 있다.[23] 단, 계승범 교수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에 따르면, 선비에 대한 사람들의 긍정-부정적 인식은 각각 50% 정도거나 또는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인 인식을 가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이치억은 계승범 교수가 제시한 통계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선비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다만, 유의미한 표본에서 선비에 대한 인식 실태를 통계적으로 조사한 논문은 없어 보이는데, 이 부분이 아쉽다고 할 수 있겠다. 계승범,『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P 268.; 이치억,「‘선비’의 현대적 구현을 위한 시론」, 2021 을 참고할 것.[24] 와카미야 이브 같은 와패니즈 캐릭터가 한국발이면 어떻게 되나 대입해본 풍자 만화. 신분 드립으로 끝나는 걸 보면 결국 선비의 대중적 이미지는 군림하는 통치자를 벗어나기 어렵다.[25]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26]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27] 이것은 어느 정도 전통으로 남아 현대에도 학원 시스템 발달 이전 소위 고시공부를 할 때 절에 들어가서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