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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17:07:42

배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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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준의 주요 선정 · 수상 ·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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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화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08년
이름 배용준
분야 배우
화관문화훈장(5등급)

파일:MBC 로고.svg 연기대상 대상
송일국
(2006년)
배용준
(2007년)
김명민
송승헌
(2008년)

파일:kbs를 빛낸 50인 세로.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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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 김혜자 나문희 나영석 나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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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재 이영자 임성훈 전현무 조용필
최경영 최불암 최수종 허참 황수경
한국방송공사가 공영방송 50주년을 맞이하여 선정한 50인의 인물들로, 순서는 가나다순으로 정렬하였다.

선정을 위해 KBS와 여론조사기관 칸타퍼블릭이 공동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사내외 전문가그룹 100명과 인구통계학적 분포에 따라 성별, 연령별로 구성된 KBS 국민패널 1,800여 명이 참여한 1차 설문조사로 100명의 후보군을 우선 선정하였다. 이어 3주간 KBS 공영방송 50주년 홈페이지(kbs50.kbs.co.kr)를 통해 일반 시청자들 7만여 명을 대상으로 최종 투표를 실시하였다. 시청자 투표로 선정된 최종 50인은 한국언론학회와 한국방송학회, 한국언론정보학회의 추천을 받아 미디어 학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KBS를 빛낸 50인 선정자문위원회’에서 적격성 검토를 거쳐 확정되었다.

[A]: 가요무대 음악 감독을 맡은 KBS 악단장으로, 2022년 사망하였다.
[B]: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을 기획, 연출한 PD.
}}}}}}}}}

파일:시사저널 화이트 로고.svg
2000년대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 연예인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2000년대의 각 해마다 시사저널이 각 분야의 전문가 1000명에 칸타퍼블릭과 함께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선정했으며, 최대 3명까지 중복응답이 가능하였다. 해당 틀에는 1위만 기재함.
2000 2001 2002 2003 2004
서태지 최불암 이효리 안성기
2005 2006 2007 2008 2009
조용필 안성기 배용준
같이 보기: 한국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종합) / 여권 정치인 / 야권 정치인 / 법조인 / 경제인 / 언론인 / 문화예술인 / 연예인 / 스포츠 스타
연도별 보기: 1990년대 / 2000년대 / 2010년대 / 20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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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0B4FF><colcolor=#FFFFFF> 배용준[1]
裵勇浚[훈음]|Bae Yong Jun
파일:http-%2F%2Fmovie.phinf.naver.net%2F20111222_145%2F1324558365046QX7s0_JPEG%2Fmovie_image.jpg
출생 1972년 8월 29일 ([age(1972-08-29)]세)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3]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거주지
[[미국|]][[틀:국기|]][[틀:국기|]] 하와이
본관 성주 배씨
신체 180cm, 75kg, 265mm, O형
가족 아버지 배영진, 어머니 송기옥, 여동생
배우자 박수진(2015년 7월 27일 결혼 ~ 현재)
아들(2016년 10월 23일생)
(2018년 4월 10일생)
학력 서울명일초등학교 (졸업)
배재중학교 (졸업)
한영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학교 (영상학 / 중퇴)
종교 무종교[4]
소속사 무소속[5]
데뷔 1994년 KBS 드라마 〈사랑의 인사〉
링크 파일:다음 카페 아이콘.pn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6]

1. 개요2. 데뷔 전3. 활동4. 배우로서 평가5. 여담6. 필모그래피
6.1. 드라마6.2. 영화6.3. 배용준이 카메오 혹은 패러디되어 등장한 작품들6.4. 홍보대사6.5. 저서·사진집6.6. DVD6.7. 기타6.8. 광고
6.8.1. 국내6.8.2. 해외
7. 수상 내역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배우이자 작가, 기업인, 전업투자자.

1세대 한류를 이끈 '한류스타'로, 특히 2000년대 드라마 겨울연가로 극동아시아권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특히 일본에서 정말 크게 히트해 이후 일본에서 한류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하며 한국문화를 전파하기도 했다. 지금도 일본에선 가장 유명한 한류배우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2010년대 이후엔 사실상 연예계를 은퇴했고, 2015년 배우 박수진과 결혼한 후 두 자녀의 아빠가 되었지만, 도 쓰고 사진도 찍으면서 작품활동에도 매진하고 있다.

연예기획사 키이스트의 前 오너로 연예 사업도 하고 있었지만, 2018년 SM 엔터테인먼트에 키이스트 경영권을 넘긴 이후 SM 주식을 양도받아 해당 기업의 대주주로서 활동하고 있다. 연예계 대표 주식부자 중 한명이기도 하다.

2. 데뷔 전

1972년, 아버지 배영진과 어머니 송기옥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6살 때부터 태권도와 유도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어린 시절에 태권도 경기 도중 상대방에게 눈을 맞아 시력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배용준은 대학입시 낙방과 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해 어려워진 가정 형편으로 자원 입대를 하려 했지만 낮은 시력으로 병역 면제 판정을 받았다.

학창 시절은 서울 강동구 명일동에서 성장했다. 한영고등학교2부입니다. 야간이란 소리죠 입학 당시까지는 성적이 중·상위권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사춘기 시절 영화에 심취하면서 진로가 변경됐는데, 이후 학교 공부를 등한시, 시간 날 때마다 극장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고3 때 본격적으로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대학 입시에 두 차례나 낙방했고 다시 마음 잡고 재수 공부하기 위해 진위사라는 절에 들어갔는데, 엉뚱하게도 공부 대신 벌꿀 내리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얼굴과 손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벌떼가 우글거리는 벌통을 만지는 기술인데 그가 절에서 배운 것은 그것 하나 뿐이라고 한다.

그러다 어릴 때부터 반듯하고 잘생긴 외모 덕분에 주위에서 "배우 한번 해봐"라는 소리를 듣던터라,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지도 있어 배우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결국 대학 입시를 포기하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다가, 영화사 스태프로 들어갔다. 말이 스태프지 길거리에서 영화 홍보 전단을 뿌리거나 촬영 전후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이때 영화 '삘구'와 배창호 감독, 이정재 주연의 '젊은 남자'에 단역으로 잠깐 출연하기도 했다. 참고로 삘구는 원래 94년작이나 개봉이 밀려 97년에야 국내 공개되었고 흥행에 참패했는데, 배용준이 일본에서 유명세를 얻자 다시 발굴되어 거의 10년이나 지나 일본에서 개봉이 예정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상영은 배용준이 삘구의 일본 개봉을 막으려 고액에 매입을 시도하는 등 강한 반대로 인해 상영되지 못했다. [7]

이후 합동영화사의 스태프로 일하면서 친구와 연기 공부도 하고 발레도 배우며 준비하던 중 KBS 오디션에 특채로 뽑혔다. 나이상 91학번이지만, 실제로 한창 활동중이던 2000년, 성균관대 자기추천전형으로 입학하였으며, 졸업은 하지 않았다.

3. 활동

1994년 오디션을 통해 KBS 특채 탤런트로 발탁되어 청춘 드라마 <사랑의 인사>로 데뷔하게 된다.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끈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서 영화감독을 꿈꾸는 재벌 2세 역할로 큰 인기를 얻었는데, 당시 20대 여대생들에게 '결혼하고 싶은 남자' 1순위로 배용준이 꼽히기도 했다.

그리고 <파파>, <첫사랑>, <맨발의 청춘> 등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톱스타로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99년에 방송 된 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이후에는 많은 작품의 캐스팅 제의를 받았지만 역할 등의 의견이 맞지 않아 작품이 무산되면서 2001년 <호텔리어>에 출연하기까지 2년 간의 공백기를 갖게 되었고, 2000년에는 성균관대학교[8] 예술학부 영상학과 00학번으로 뒤늦게 입학해 학업에 몰두하기도 했다.

허나 이런 공백기 때문인지 드라마 배우로서는 그만한 원톱을 찾기 힘들 정도의 흥행 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평가절하되는 측면이 있었다.[9]

그런데 일본에서 욘사마 열풍이 터지면서 그의 인생에도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2004년 11월, 나리타 공항 입국 당시 영상.[10][11][12]

2002년 그가 출연한 겨울연가가 2004년 일본 지상파 TV를 통해 방영되면서[13] 그는 명실상부한 욘사마[14]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며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실상 일본 한류스타의 시발점이자 주역. 때문에 당시 언론의 보도는 가히 도배 수준이었고, 배용준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거의 국빈급 대우를 받았다. 최상급 스위트룸이 제공되었는데 1박 98만엔인 방과 한 층 전체를 빌렸고, 해외에서 고용한 보디가드까지 완비된 상황. 또 당시 헬기로 그의 이동경로를 촬영, 호텔에선 밀착 다큐멘터리를 방송할 정도였다.

2004년 발매된 근육질 사진집 역시 어마어마하게 팔렸다. 이와 관련해 배용준 사진집 판매 대행사 측은 공식 홈페이지에 "『더 이미지 볼륨 원The Image Vol.One』 판매 개시 사흘 만에 10만 부가 팔렸다" 라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판매된 배용준의 사진집 세트는 세금 포함 한화로 약 15만 1200원이었는데, 10만 세트가 판매로 약 151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것이다. 이례적인 것은 사진집이 초 고액인 15만원 대 였는데도 이 정도 팔렸다는 것은 확실한 구매층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욘사마의 인기로 인해 일본에서 개봉된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배용준이 여러 여자를 꼬시는 바람둥이에 꽤 리얼한 정사신도 여러번 있는 주인공역으로 나오면서 멘붕 일본 배용준 팬들 중엔 욘사마에 대한 환상이 깨져 기겁하고 우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일본 야후 영화 같은 평점 사이트에서도 5점 만점에 2점대로 평가가 상당히 안 좋은 편. 아무튼 일본팬들에겐 스캔들에서의 배용준은 흑역사.[15]

허나 배용준의 인기는 여전했는데, 사실 이 때쯤부터 그는 의도한다 싶을 만큼 철저한 이미지 바꾸기에 돌입한다. 자신의 부드러운 매력보다는 남성적인 매력도 어필하고 싶었기에 그는 2004년에 근육질 몸매를 만들어 화보까지 찍었으며, 이때도 일본 내 배용준 팬들은 기겁을 하였지만 그냥 받아들인 듯 혹은 계속 보니 몸매가 꽤 괜찮다? 인기에 큰 영향은 없었다. 오히려 배용준을 트레이닝했던 헬스 트레이너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2005년 허진호 감독의 영화 외출에 출연. 최루성 짙은 멜로물답게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로 멘붕한 일본 팬들에게 다시 욘사마의 부드러운 이미지가 어필되어 300만 관객을 모으며 당시 한국 영화 사상 최고 일본 흥행작이 되었다. 한국에선 관객수가 80만명에 그쳤으나, 이미 제작 초기 단계에 일본에 700만달러(약 66억원)로 선수출하여 손익분기를 넘었고 이후 개봉하여 일본에서 27억엔(약 230억원)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2007년엔 잡음이 많았지만 어쨌든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주인공 담덕으로 출연해 그해 MBC 연기대상과 인기상을 받게 된다. 특히 인기상은 투표결과 100만표가 나왔을 정도.

다만 이후 작품들에선 까메오와 단발성 특별출연만 함으로써 사실상 배우 생활을 접었다고 볼 수 있는데, 여러 사정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론 건강 문제가 꼽힌다. 태왕사신기를 촬영하면서 손가락 뼈가 골절되는 등 자잘한 부상을 입다가 급기야 척추부상까지 당하면서 여러차례 수술 및 재활훈련을 해야 했고, 이후 드라마 컴백을 타진하고 있었으나 패혈증 진단을 받으면서 거의 반강제로 배우 생활을 쉬게 되었다.

여담으로, 2000년 초반 일본 한류붐 당시 안티들은 배용준의 팬들이 주로 중장년층 여성에 국한되어있다고 폄하하는 시선도 일부 있었지만, 이는 좁은 시선인게 이런 일부 계층의 팬들이 이후 일본내 한류 열풍을 다른 세대에까지 전파시키는 주춧돌이 되었단 점에서 그 중요성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티비 채널 선택권은 여성이 가지는 경우가 많고, 가족 내 자녀들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렇다보니 주로 중장년층 여성이 다수였던 그의 팬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자녀 혹은 손주들에게 영향을 미친 경우가 많았다. 2020년대 기준으로 20대~30대 젊은 한류팬들에게 처음 한국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언제냐고 물으면 많은 경우가 가정에서 조부모 혹은 부모의 영향으로 팬이 되었다고 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그는 그리 길게 활동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큰 영향력과 발자취를 남긴 배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2년 11월 13일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그의 대표적인 홈페이지의 도메인이 다른사람에게 팔렸고, 현재 가족들이 하와이에 거주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는데 사실상 은퇴한게 아니냐는 반응들이 많다. #1 #2

4. 배우로서 평가

배우 활동 당시엔 필모그래피를 보면, 작품 텀도 1~2년 정도이고 단막극도 출연하는 등 다작배우는 아니었어도 꾸준히 연기변신을 하는 상당히 영리한 배우였다.

대충 살펴봐도 이 정도다. 게다가 드라마, 영화 모두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 더 많다. 이처럼 배용준은 자기 커리어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과감히 수정해나갈 정도로 괜찮은 판단력을 지닌 배우였다. 뜨자마자 이미지 변신에 들어갈 정도로 도전적이면서도, 그런 노선에 아집을 지니진 않았다. 대본을 보는 눈도 상당히 좋아, 청춘의 덫에 밀려서 시청률은 떨어졌지만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도 노희경 작가의 작품으로 그 당시 PC통신에서 우정사 커뮤니티가 생겼을 정도로 엄청난 매니아를 양산했던 작품이었다. 한편, 이렇게 무리하다 싶을만큼 다양한 역할을 맡아본 경험 덕분인지 연기력도 일취월장하게 된다. 자기 이미지를 고수할 줄도, 파괴할 줄도 아는 능란한 연기자라는 평도 받았다. 고3 때 로버트 드 니로의 비열한 거리를 보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일화나 연기 공부, 연출 공부도 꾸준히 한 점에서 보면 오히려 스타보다는 배우에 가까운 모습이란 평도 있었다.

그러나 겨울연가 신드롬이 터지고 난 이후 그의 행보들은 상당히 아쉽다. 연극영화과 학생들이 뽑은 가장 과대평가된 배우로 뽑히는 불명예를 얻기도. 배우 이순재 역시 인터뷰에서 최민식송강호, 이병헌, 배용준을 비교한 적이 있는데 최민식, 송강호, 이병헌의 경우 꾸준하게 연기 활동을 이어간 반면에 "배용준은 '겨울연가' 하나로 끝난 사람이다. 솔직히 이후 그 이상의 작품이 나온 적이 없다. '태왕사신기'는 전혀 안 맞는 역할이더라"라고 평가했다. 물론 재능있는 후배가 활동이 적어 안타까운 마음에 한 소리일텐데, 이순재가 언급한 배우들 면면[17]을 보면 그가 배용준의 가능성을 높게 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허나 이전까지만 해도 배우로 상당한 의욕이 있었으나, <태왕사신기> 이후 부상, 건강 문제로 오랫동안 쉬고 출연하려고 했던 작품들도 무산되면서, 이제는 콘텐츠 제작에만 참여하거나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정도로 물러난 듯 싶다.

5. 여담

6. 필모그래피

6.1. 드라마

<rowcolor=#FFFFFF> 방영 연도 방송사 제목 배역 활동 시청률[39]
1994년 파일:KBS 2TV 로고(1984-2018).svg 사랑의 인사 김영민 주연
1995년 젊은이의 양지 하석주 62.7%
드라마게임 : 이별하는 여섯단계 경민 단막극
파일:PSB 부산방송 로고.svg 해풍 장문영
1996년 파일:KBS 2TV 로고(1984-2018).svg 파파 최현준 30.0%
컬러 (시리즈: 블루) 옴니버스
1996년 ~ 1997년 첫사랑 성찬우 65.8%
1998년 맨발의 청춘 장요석 31.3%[40]
1999년 파일:MBC 로고(1986-2005).svg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강재호 29%[41]
2001년 호텔리어 신동혁 38.6%
2002년 파일:KBS 2TV 로고(1984-2018).svg 겨울연가 강준상/이민형 28.8%
2007년 파일:MBC 로고(2005-2011).svg 태왕사신기 환웅/담덕 31.9%
2009년 파일:테레비 아사히 로고.svg 호텔리어[42] 특별출연
2011년 파일:KBS 2TV 로고(1984-2018).svg 드림하이 정하명 특별출연, 제작

6.2. 영화

<rowcolor=#FFFFFF> 개봉 연도 제목 배역 활동 관객수 흥행
1997년 삘구[43][44] - 단역 5,634명 실패
2003년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조원 주연 352만명 성공
2005년 외출 인수 80만명[45]

6.3. 배용준이 카메오 혹은 패러디되어 등장한 작품들[46]

6.4. 홍보대사

6.5. 저서·사진집

6.6. DVD

6.7. 기타

6.8. 광고

6.8.1. 국내

6.8.2. 해외

7. 수상 내역

<rowcolor=#FFFFFF> 수상 연도 시상식 수상 부문 작품
1995년 KBS 연기대상 남자 신인상 젊은이의 양지
남자 포토제닉상
1996년 한국 모델센터 베스트 드레서 특별상
KBS 연기대상 남자 우수 연기상 첫사랑
남자 인기상
1997년 경향신문 독자가 뽑은 광고대상 특별상
제33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남자 인기상 첫사랑
2002년 제38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남자 인기상 겨울연가
KBS 연기대상 남자 최우수 연기상
남자 인기상
2003년 제24회 청룡영화상 신인남우상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
인기스타상
2004년 제4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자 신인 연기상
한국언론인연합회 제4회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 대중예술 부문
제33회 일본 남자패션협회 올해의 베스트 드레스상 인터내셔널부문
2005년 문화관광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영화 부문상
2007년 제1회 일본 건강한 치아&식육(食育) 추진 위원회 건강한 치아&식육 대상
MBC 연기대상 베스트 커플상 태왕사신기
남자 인기상
대상
2008년 제2회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한류공로상
문화체육관광부 화관문화훈장[50]
2009년 제1회 대한민국 브랜드 이미지 어워드 방송인부문
2010년 한국관광의 별 특별 부문 공로상
2013년 한류 10주년 대상 드라마 대상 남자배우 부문 그랑프리
대상
2023년 KBS KBS를 빛낸 50인



[1] 한때 본명이 '배춘배'라는 루머가 퍼졌던 적이 있었는데, 배용준이 본명이 맞다.[훈음] 날랠 깊게 할 [3] 태어난 곳은 중구지만 학창 시절은 강동구에서 보냈다.[4] 공식적인 입장은 무종교이나, 친구인 박진영성경 공부 모임에 참가한 바는 있다. 다만, 이게 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자세한 건 후술된 내용 참조.[5] 자신이 설립했던 연예기획사 키이스트SM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가 될 때 키이스트에서 나왔다.[6] 2017년 6월 19일 이후로 업데이트가 없다.[7] 그럴만한게 영화속에서 배용준은 바지를 내린채 성기 털을 가위로 잘리는 등 굉장히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한다(..)[8] 실제로 배용준의 배우 커리어 최고의 히트작인 첫사랑에서 그가 분한 성찬우가 다니던 학교가 바로 성균관대학교이다.[9] 때문인지 배용준이 겨울연가로 뜨기 전 한국에선 인기 없었다는 드립이 안티들에게서 나오기도 하는데, 아래 필모그래피의 출연작 시청률을 보면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얻은 폭발적인 인기와 대조되는 현상 때문에 한국에서의 인기가 상대적으로 묻힌 것일 뿐이다. 시청률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10] 공항에 모인 엄청난 환영인파(3500여명)와 배용준의 인기를 2003년 당시 일본을 방문한 데이비드 베컴의 입국장면과 비교한 영상이 나온다{38초경}. 그리고 영상에서도 보이지만 당시 모인 팬들의 상당수가 40대에서 50대, 그리고 60대 할머님들도 간혹 보일 정도로 중장년 일본 여성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11] 배용준이 일본에서의 겨울연가 열풍 이후 두 번째로 입국한 영상이다. 최초 입국은 겨울연가가 NHK 지상파 방송을 시작한 2004년 4월이다. 당시에는 하네다 공항으로 입국했는데, 당시의 하네다 공항은 국제선 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작아 방문객이 몰려들 경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다분했다. 그런데 하네다에 5,000명이 몰렸다. 하네다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배용준은 다음 입국 때는 나리타를 이용하라는 하네다 공항 측의 요청으로 2004년 11월 사진집 홍보 목적으로 방문한 이 때 나리타를 이용한 것.관련링크1관련링크2[12] 실제 2004년 4월의 하네다 입국 영상은 여기를 참고하자. 문서 본문의 나리타 입국 때와 비교하면 첫 입국 당시에 공항 질서가 훨씬 흐트러져 있음이 느껴질 것이다.[13] 2003년 NHK 위성채널을 통해 방영하다 매니아층 사이로 인기를 끌자 2004년 NHK 종합채널에서 재방영한 것.[14] 배사마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배'의 일본어식 표기인 ぺ가 침뱉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퉤사마'.(...) ペ가 아닌 ベ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는 '메롱사마'가 된다. 배씨 지못미.[15] 다만 일본에서만 안 먹혔지 영화 자체는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국내 흥행과 평도 좋았고 유럽에서도 평이 좋았다. 전도연, 이미숙이라는 연기파 배우들의 연기와 더불어 쇼테를로 드 라클라의 소설인 <위험한 관계>(이미 미국에서 영화화되었으며 프랑스에선 발몽이란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를 조선시대에 잘 재현했다는 평. 허나 이때 호평받은 이재용 감독은 이후 다세포 소녀를 감독하며 뭉개진다.(...)[16] 의외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목처럼 첫사랑의 대상이 두 형제 모두 같았다.. 그러나 그 소녀가 형을 좋아해버려 자신은 몰래 마음을 접게 되면서 문제아로 변모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물론 자신 또한 형을 진심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형의 진솔한 마음을 드라마 완결때까지 적극 지지해준 장본인. 마음을 다잡게 만든 원인 또한 형과 그 첫사랑이었다. 어찌보면 드라마 타이틀은 메인 주연인 성찬혁, 이효경은 물론 서브 남주 성찬우나 여주 강석희에게도 꽤 멋들어지게 잘 맞는다.[17] 세 사람 모두 한국에서 연기력을 논할 때 첫손에 꼽히는 배우들이다.[18] 사실 배용준이 일본으로 진출하기 이전의 한류는 중화권이 주요 타겟이었고, 일본은 현지화 전략으로 진출한 보아나 그 이전에 영화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정도가 단타성 히트를 친 정도였다. 즉, 오늘날 일본에서도 인정하는 지속적인 한류 열풍의 1세대 붐은 배용준의 겨울연가부터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 당시 한국 언론의 보도도 가히 상상 그 이상이었다.[19] 다만 그래서인지 열풍 당시에도 연예인에게 과하게 높은 호칭이라며 욘사마를 '욘상'으로 바꾸자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인기가 워낙 폭발적이어서 걍 묻혔다. 물론 일본 연예인 중에서도 팬덤 내에선 해당 연예인을 사마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20] 국가를 대표하는 총리대신조차 '상'으로 불린다.[21] 그래서 엄밀히는 '상'을 '씨'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경우가 많다. 운텐슈'상'(기사'님') 같은 명칭을 보면 알 수 있다.[22] '유느님'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유재석이 한국 연예계에서 가진 위상을 생각해 본다면, 바다 건너 일본에서 이 정도 위상에 오른 배용준은 대단한 업적을 이뤄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MC와 배우의 특성상 완전히 같진 않고, 오히려 한국으로 치면 80~90년대 인기를 끈 홍콩스타들 입지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23] 역사적인 정치인, 기업인이 창작물에서 재연되는데 한국의 배우 중 거의 최초라고 볼 수 있다.[24] 민주노총한국노총 그 어디에도 속하지않은 독립노조다.[25] 정확히 말하면, 서구권에서는 배우들의 노동조합 설립과 가입을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해서, 사실상 배우협회의 역할을 노조가 대신하고있는 실정이다.[26] 보통 머플러 두르는 법과 다르게 배배 꼬아서 거의 목에 묶다시피하는 스타일이다. 이것도 욘사마가 유행시켰다. 여담으로 일본의 모 통신판매회사에서 갈색 웨이브 헤어 가발, 뿔테안경(아이러니하게도 뿔테안경을 쓴 남자는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도 미남으로 간주되지 않았었다. 이걸 겨울연가에서 배용준이 바꿔버린셈이다), 목도리를 한데 모아서 욘사마 3종 세트로 팔기도 하였다. 캐치프레이즈는 '내 남편도 욘사마로.'[27] 이 당시의 배용준은 일본 주부들에게는 거의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못 만나는 애인내지는 남친'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오죽하면 첫 방일 때도 오랜만에 만나 흥분되고 열정적으로 환영해 줄만 하건만, 폐를 끼치면 안된다며 거리를 두고 볼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28] 물론 배용준 역시 자신을 강준상과 같은 이미지에 맞추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29] 이게 파격적이었던 이유는 일본내에서도 '사마'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연예인이 극소수였던데다 외국 연예인에게도 붙여지지 않던 칭호였는데 배용준에게 붙여진 것이다. 게다가 일본 문화를 아는 이들은 아는 사실이지만 존경받는 인물에게만 붙여지는 극존칭이므로 함부로 불리지 않는 호칭이다.[30] 그렇다고 이종석같은 미인형 미남과는 다르다.[31] 저 유명한 일본 방문 역시 화보 발매 기념으로 간 것이다.[32] 동갑인 유재석, 이정재가 방위판정을 받았고, 개그맨 이윤석은 면제다. 70년생 박명수도 시력때문에 면제. 배용준 연배(70년대 초반생)는 베이비붐 세대 끝자락이라 현역병 충원에 큰 문제가 없었다.[33] 젊은이의 양지에서는 재벌2세로 태어난 영화감독 지망생 하석주, 첫사랑에서는 서민 가정의 막내로 태어난 법대생 성찬우 역을 각각 맡았다.[34] 젊은이의 양지에서는 독자사유로, 첫사랑에서는 생계곤란 사유로 면제받았다.[35] 젊은이의 양지에서는 같은 대학 경영학과에서 만난 베스트 프렌드 박인범(이종원 분), 첫사랑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애가 깊은 형 성찬혁(최수종 분).[36] 젊은이의 양지에서는 임차희(하희라 분)를 대학 친구 박인범의 연인으로(하지만 극중 배용준은 하희라를 이종원의 사촌 여동생으로 알고 있었다.) 상대하게 되고, 첫사랑에서는 최수종과 우애 깊은 형제지간으로 등장한다.[37] 1938년 출생~2010년 사망. '100만번 산 고양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38] 국내에 여러권 번역 출판되었다.[39] 최고 시청률 기준.[40] 당시 라이벌로 여겨졌던 장동건 주연의 사랑과의 맞대결로 관심을 모았으나, 시청률 면에서는 압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에서는 다소 아쉬운 평을 받았다.[41] 초반부 최고 시청률이며 중반부부터 동시간대에 방송된 김수현 작가의 청춘의 덫에 밀려 10% 초반대까지 낮아졌다.[42] 일드 리메이크.[43] 조해인 작가가 1993년에 지은 동명의 청소년 소설이 원작이며, 본격적인 데뷔 전인 1994년에 단역으로 출연하였으나,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 과정에서 선정성을 이유로 반려되자 영화사 측이 심의를 거부하면서 미개봉 상태로 남다가 1997년에야 개봉하였고, 이때는 젊은이의 양지첫사랑으로 이미 스타가 되어서인지 단역이던 배용준을 주연으로 둔갑시켜 홍보하였다.[44] 파일:TKV000854.jpg[45] 일본에 약 66억원에 수출하여 손익분기를 넘었고 이후 약 230억원의 흥행수입을 올렸다.[46] 그라나도 에스파다, 삘구를 빼고 모두 일본 작품.[47] 데스노트를 보았던 사람들은 다들 알 것이다. 미카미 테루가 40!이라고 말할 때 40의 일본어가 욘주(よんじゅう)로 들려서 몬데그린이 들리기 때문인지 음질앞에 '배'까지 들린다.[48]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잘 있었고 뻘짓하다 잡혀간 건 임해군이다. 어떤 의미로는 디스?[49] 국내 정발이 나오기 이전엔 이유종이 발음상 맞다고 하는 유저들이 있었지만 정발판으로 나오게 된 리메이크작 극 2은 이루전으로 나온다.[50] 배우로써 최초로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