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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7-19 11:57:38

조용필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동명의 이름을 가진 개그 콘서트의 코너에 대한 내용은 조용!필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조용필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KBS_로고.png 가요대상 대상[1]
조경수, 이은하
행복이란
아리송해
(1979)
조용필, 윤시내
창밖의 여자
열애
(1980)
조용필, 이정희
고추잠자리
그대여
(1981)
조용필, 윤시내
창밖의 여자
열애
(1980)
조용필, 이정희
고추잠자리
그대여
(1981)
조용필, 윤시내
비련
DJ에게
(1982)
조용필, 이정희
고추잠자리
그대여
(1981)
조용필, 윤시내
비련
DJ에게
(1982)
조용필, 윤시내
친구여
공부합시다
(1983)
조용필, 윤시내
비련
DJ에게
(1982)
조용필, 윤시내
친구여
공부합시다
(1983)
김수철, 이은하
못다 핀 꽃 한 송이
사랑도 못해본 사람은
(1984)
김수철, 이은하
못다 핀 꽃 한 송이
사랑도 못해본 사람은
(1984)
조용필, 정수라
어제, 오늘, 그리고
도시의 거리
(1985)
전영록, 정수라
내 사랑 울보
난 너에게
(1986)

파일:mbc.png 가요대상 대상 [2]
혜은이
제3 한강교
(1979)
조용필
창밖의 여자
(1980)
조용필
고추잠자리
(1981)
조용필
창밖의 여자
(1980)
조용필
고추잠자리
(1981)
이용
잊혀진 계절
(1982)
이용
잊혀진 계절
(1982)
조용필
나는 너 좋아
(1983)
조용필
친구여
(1984)
조용필
나는 너 좋아
(1983)
조용필
친구여
(1984)
조용필
어제, 오늘, 그리고
(1985)
조용필
친구여
(1984)
조용필
어제, 오늘, 그리고
(1985)
조용필
허공
(1986)
조용필
어제, 오늘, 그리고
(1985)
조용필
허공
(1986)
전영록
하얀 밤에
(1987)[3]

파일:골든디스크 시상식_로고.png
음반 대상
- 조용필
허공
(1986)
이문세
사랑이 지나가면
(1987)

파일:mama_logo_01.png
올해의 노래상
싸이
강남스타일
(2012)
조용필
Bounce
(2013)
태양
눈, 코, 입
(2014)
}}} ||
파일:attachment/choyongpil.jpg
2008년도 모습
이름 조용필(趙容弼)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대한민국
출생 1950년 3월 21일 ([age(1950-03-21)]세), 경기도 화성시
본관 임천 조씨
신체 166cm, O형
소속 YPC프로덕션
학력 송산초등학교
경동중학교[4]
경동고등학교
가족 배우자 안진현
취미 음악감상, 골프, 기타연주
특기 작곡, 작사
별명 가왕[5], 작은거인, 풀빵, 조방범
종교 불교
웹사이트공식 홈페이지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 파일:유튜브 아이콘.png

1. 개요
1.1. 주요 영상
2. 경력
2.1. 음반2.2. 대표곡2.3. 콘서트2.4. 출연 광고
3. 평가4. 창법/예술력
4.1. 위대한탄생, 그리고 편곡
5. 여담
5.1. 결혼5.2. 사건5.3. 기부5.4. 영웅적 면모5.5. 승부사적 기질, 그리고 19집5.6. 가왕의 눈물
6. 기록7.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설 그 자체인 가수로 사람들은 그를 한마디로 가왕[6]이라고 표현한다.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시 태생. 경동고등학교[7] 1969년 25회 졸업생.[8] 1968년 고등학생 시절 활동을 시작했고,[9] 1979년 "창밖의 여자"로 정식 데뷔했다. 데뷔 50년동안 꾸준하게 현역가수로 활동하고 있고 아직도 거의 매년 전국투어 콘서트를 진행중이다.

국내 탑클래스 가수만이 도전이라도 해볼 수 있는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를 무려 7번이나 매진시켰다. 국내 콘서트 최다 관객 동원 타이틀도 당연히 조용필이 가지고 있다. [10] 그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70년대, 80년대, 90년대, 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 보유. LP, 테이프, CD, 음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히트곡과 한국 내 최대 콘서트 인원 동원 기록,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진 가수다. 말이 필요 없는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 이 문서 최상단 항목에도 조용필이 KBS, MBC 연말 대상을 4연패씩 하고 통산 5회, 6회 수상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1987년 더 나은 음악을 하고자 tv프로 대상 수상 거부를 선언한 결과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가수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한명이자 동시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가요계의 제왕. 대개의 사람들이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슈스케에서 김태우이승철을 가왕이라고 호칭하자 이승철 曰 "그건 용필이 형이지."라면서 스스로 부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최정상급 가수들도 조용필은 소위 ‘논외’로 해둘만큼 치켜세울까? 그저 선배라서? 선배 가수가 한둘이 아닐텐데? 아래 영상을 보면 얼추 답이 나온다.



조용필의 음악적 재능, 음악성, 그리고 엄청난 업적도 있지만 그의 겸손함과 끊임없이 배우려는 마인드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이다. 조용필은 저런 멘트를 그저 웃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80년대초부터 정규 19집을 낼 동안 끝없이 자신을 넘고 넘어왔다. 판소리와 락/팝의 접목, 오페라와 락의 접목 등, 장르를 초월한 가수가 그저 되는 게 아니다. 2013년 바운스가 히트할때도 끝없이 배우고 도전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가왕이란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다름아닌 조용필 자신이다. 2011년 4월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이 본인에겐 민망하다며 크게 마음에 담아두진 않는다고 한다.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한다.

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가수이기도 하다.[11] 당시 9시 뉴스에서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 열성팬에 대한 보도를 이례적으로 내보낼 정도였다. 이 단어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는지 '오빠부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12]
여러분, 기도하는~[13]의 다음 가사를 아십니까? 바로 꺄악~입니다.[14]

그리고, 사실상 미8군 출신의 마지막 히트가수이다. 미8군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고 프로들의 무대였다. 장르 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인디 개념이 나타나기 전에 바닥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전국구 방송이 아닌 지역 기반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다.[15]

1.1. 주요 영상


1996년 열린 강원 수요예술무대 콘서트 1부 영상


1996년 열린 강원 수요예술무대 콘서트 2부 영상


1997년 열린 "97 자유 콘서트" 中 마지막날 피날레, 조용필 공연 40분영상.


2008년 열린 "조용필 40주년 기념 콘서트" 콘서트 中.


2013년 슈퍼소닉 출연 영상.


2018년 50주년 콘서트 [Thanks to you] 中 모나리자


2018년 50주년 콘서트 [Thanks to you] 오프닝


2016 서울 콘서트


2018 대구 콘서트


2018 부산 콘서트 모나리자

2. 경력

조용필은 경기 화성에서 염전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학창시절 음악에 푹 빠져 지냈고 결국 고3때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심하게 갈등을 겪으며 가출을 하게 된다.[16] 이후 1968년에 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출발했다. 미8군이라 하면 현재의 나이트클럽 밤무대같은걸로 연상한다든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을텐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모든 시작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60~80년대의 모든 대중음악 활동의 큰 장이었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가 곧 '화이브 핑거스'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주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1971년 5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17]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트리오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연주자였던 김대환(드럼), 조용필,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1972년에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앨범도 발매하였다.[18] 이때 발표한 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컬 '사랑의 일기'라는 앨범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앨범. 이 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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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그룹 25시"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이 곡과 함께 전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도 롯데 자이언츠의 대표 응원가로 쓰이고 있다.[19]

하지만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었다.[20] 1979년 지금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100만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되었다.

2.1. 음반

조용필정규 음반 목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1980198019811982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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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1집조용필 2집조용필 3집조용필 4집조용필 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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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6집조용필 7집조용필 8집사랑과 인생과 나!조용필 1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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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10집
Part.II
Sailing SoundThe DreamsCHO YONG PIL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1997199820032013-
파일:external/www.choyongpil.net/vol16-s.jpg파일:external/www.choyongpil.net/vol17-s.jpg파일:external/www.choyongpil.net/vol18-s.jpg파일:external/cmsimg.mnet.com/287369.jpg-
EternallyAmbitionOver The
Rainbow
HelloT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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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라이브 음반 목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1981198119831990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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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장애자를 위한 조용필.서세원.송골매 자선공연 실황음반히트곡 메들리쇼조용필 콘서트 실황음반 (일본 NHK 主崔)'90 ConcertLive Live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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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세종문화회관 실황 - 魂의 소리해운대 콘서트飛上조용필 35주년 기념 콘서트:The History나는 조용필이다
20092015---
파일:external/i.maniadb.com/309192_1_f.jpg파일:external/i.maniadb.com/722076_1_f.jpg---
The History 킬리만자로의 표범45th Anniversary Concert HelloT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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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컴필레이션 음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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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Vol.1Best Vol.230주년 기념 음반 Part 130주년 기념 음반 Part 230주년 기념 음반 Part 3
}}}||

정규앨범만 무려 19개, 비정규앨범까지 포함하면 50개에 달한다.

2.2. 대표곡

대표곡은 "고독한 Runner", "고추잠자리", "그 겨울의 찻집",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 "그대여", "기다리는 아픔", "", "나는 너 좋아", "눈물의 파티", "내 이름은 구름이여",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돌아오지 않는 강", "마도요", "모나리자", "못 찾겠다 꾀꼬리", "미워미워미워", "미지의 세계", "바람이 전하는 말", "바람의 노래", "바운스", "비련", "서울 서울 서울", "슬픈 미소", "슬픈 베아트리체", "어제, 오늘, 그리고", "여행을 떠나요",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정의 마음", "창밖의 여자", "촛불", "추억 속의 재회", "친구여", "킬리만자로의 표범", "태양의 눈", "한강", "한오백년", "허공", "헬로", "Q" 등 매우 많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공연이 히트곡으로만 구성되었는데도 양일 겹치는 노래 없이 이틀이나 진행되었다.

실제로 본인도 콘서트 멘트 중 발표한 곡이 너무 많아서 다 하려면 며칠을 해야한다고 언급하셨다. 조용필의 콘서트를 마치고 콘서트장을 빠져 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oo가 듣고 싶었는데 ㅠㅠ 하는 반응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데 멘트도 거의 없이 노래로 모든 공연을 꾸며서 타가수들에 비해 콘서트에서 부르는 곡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음에도 이 정도니.. 히트곡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2.3. 콘서트

조용필/콘서트 문서 참조.

2.4. 출연 광고

3. 평가

영미권 음악을 비틀즈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누듯 한국의 대중음악은 조용필의 등장으로 전후를 나눌 수 있다.
- 평론가 임진모
아이돌적인 인기와 아티스트적인 위상을 거의 처음으로 한꺼번에 거머쥐었던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 사실 한국에서 가능한 음악적인 실험을 거의 다 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조용필 씨의 영향이 대중음악계 곳곳에 남아있고요.
- 평론가 이무원[21]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쓴 가수, 현재 모든 가수들이 바라는 진정한 표상[22]
가왕(歌王)

현 대중가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며, 후배 가수들의 꿈 같은 존재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신해철이 개기지 못했던 오히려 공손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23] 과거 '김혜수의 플러스 유'라는 방송에 출연했을 당시 "마왕으로 불리는 후배 신해철을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질문에 귀여운 후배로 평가해서 진행자 김혜수를 비롯해서 관객들이 뜨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스트스테이션에선 신해철이 조용필의 히트곡들을 직접 리마스터해서 특집으로 튼 적이 있었는데 혹시라도 혼날까봐 조용필이 곯아 떨어질 것이 확실한 공연날 밤을 골라서 방송을 했다. 그 외 이승철이나 이은미도 조용필 앞에서는 고개를 못 든다고 한다. 물론 조용필이 군기반장이란 소리가 아니고 존경심에서 하는 소리.
파일:attachment/choratnya.jpg
방시혁의 배꼽인사.jpg

조용필은 대중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현역 시절의 수많은 음악적 시도의 성공 덕에 대중성과 다양성을 오랜 기간 동안 잡아낸 보기 드문 가수이기 때문. 조용필은 이전 세대 이미자, 패티김, 나훈아, 남진, 동시대인 80년대 전영록, 김수철, 이용, 이선희, 조용필 이후 등장한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이승철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다. 조용필은 음악적인 면에서 상술된 전시대 대표 가수들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상술된 후배 가수들과 비교하면 서태지를 제외하곤 그들보다 음악적으로 뒤지지 않으면서도 더 높은 인기를 누렸다는 장점이 있다. 서태지와 비교해봐도, 폭발성과 파급력 면에서는 서태지가 더 앞설지 모르나 조용필은 폭넓은 계층에서 더 길게 전국민적 인기를 누렸다는 장점이 있다.
파일:attachment/조용필/yongpil_and_taiji.jpg
1990년대 끝판왕을 풋풋한 후배로 만드는 80년대 끝판왕의 위엄.jpg

조선일보의 대한민국의 최고 가수는 누구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으며, 2위는 이미자, 3위는 나훈아, 4위는 서태지. 조용필이 2위를 하는 경우는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간간히 서태지의 팬들이 비교되는 가수를 언급할 때 조용필을 언급하기도 한다.[24]

더불어, 방송국이 굽혀주는 몇 안 되는 가수 중 하나로 가요계 배분과 위상이 높은 점에 기인한다.[25] 보통 PD들이 가수를 지칭할때 '~씨'라는 호칭으로 큐시트를 주는데 조용필은 방송국에 떴다 하면 최고위급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사실 조용필만 선생님이라 불리는 건 아니고 이 정도 연배의 배우나 가수들은 모두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 패티 김이 방송국에 떴는데 패티 김 씨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실제로, 2013년 각 방송국 예능국장급은 다 조용필과 같은 시대 인물이거나 그 아랫세대다.

이승철이 회상하기로는, 자신의 신인 시절은 PD들의 힘이 워낙 세던 때라 어린 가수들이 지각을 하거나 하면 '저기 가서 손 들고 서 있어!' 라고 윽박지르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시절임에도 조용필이 오면 반드시 국장급 이상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이승철의 신인 시절이면 조용필이 중견가수긴 해도 30대 후반일텐데 이미 그 때도 엄청났다는 얘기가 된다.

국내 역사상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가수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가수이기도 하다. 80년대는 음악 평론이란 것 자체가 거의 전무한 시기였기 때문에 조용필의 크로스오버적인 실험들이 90년대 중반 들어서야 겨우 조금씩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단독 공연으로는 2003년 잠실주경기장에서 데뷔 35주년 콘서트를 하였으며, 자신의 데뷔 00주년 공연 중 마지막으로 게스트를 초청한 35주년 콘서트에는 신승훈, 신해철, GOD, 이은미, 장나라, 유열이 출연하였다.[26] 이후 수차례 잠실에서 더 공연을 하게 되는데 만석은 기본이었다. 그 중 03, 05년 공연은 우천 속에서도 이룬 매진이었다는게 주목할 점. 이후 잠실 공연에 도전한 이승환도 우천을 만나며 객석이 비게 되었고, 이후 이문세, 싸이 등도 도전했지만 잠실주경기장은 쉽사리 만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용필은 괜히 가왕이 아니다.[27] 또한 99년 말 대중가수 중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였으며 향후 몇 년간 연말 투어로 그곳에서 마무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국내 공연문화(콘서트)에 있어서도 선구자이다. 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계속 이끌어오고 있고 현재진행형이다. 해외 아티스트들도 아무나 시도하지 못하는 무빙스테이지를 2010년 국내에 도입했다. 너비 120m, 높이 33m의 초대형 무대는 잠실주경기장을 80m나 움직였다. 이 2010년 Love in Love 콘서트때 이틀간 10만 관객을 동원했다. 2018 50주년 콘서트도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규모, 조명, 폭죽 모든 게 넘사벽이다.

모든 활동은 전속 밴드 '위대한 탄생'과 같이 하고 있는데 그의 위상과 걸맞는, 대한민국에서는 전설급이라 할 수 있는 세션들만 거쳐갔다. 대표적인 예가 김광민, 송홍섭, 정원영, 유재하, 김종진, 전태관 등.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영향력은 가요계를 넘어서 방송계에서도 통용된다. 떴다 하면 PD가 아니라 최소 국장급이 나오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도 그럴게 지금 국장 or 사장급인 사람들은 대부분 조용필의 전성기에 막내로 시작한 사람들이다.

2018년 4월 1일과 3일 평양에서 공연된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에도 합류했고, 1차 공연에선 출연자 중 가장 많은 4곡을 불렀다.[28]

4. 창법/예술력

록 음악에서 트롯트, 발라드, 재즈[29], 민요에 심지어 동요, 가곡, 크리스마스 캐롤까지 수많은 음악 장르를 다뤘으며, 히트까지 시켜버린 가공할 능력의 소유자.[30]
작곡가로서도 국내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아티스트.[31]

한창 활동할 당시엔 노래부터 작곡, 편집, 무대연출까지 못하는 게 없는 초인이었다. 앨범 사운드, 공연 퀄리티도 당시 기준으론 압도적이었다. 데뷔곡 '창밖의 여자'는 드라마 주제곡 하나 써 달라는 라디오 PD 주문에 즉석에서 5분만에 쓱싹 써낸 노래라는 말도 있는데 실제로는 15~2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나는 가수다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부분.[32] 창법의 경우 현시대의 (믹스보이스적인) 발성과 창법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애초에 창법에 우위 논쟁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거고[33] 발성이나 창법 자체에 대한 지식이 지금보다 못하던 당시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해가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조용필을 성대모사하는 연예인들이 웃음을 목적으로 과장되게 따라해서 그렇지, 조용필의 가창력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한다. 심지어 50주년 콘서트에서 2시간 내내 20여곡을 라이브로 소화했을만큼 그의 목 내구도는 수준급이다.[34] 원래 데뷔 초기[35]에는 선천적인 미성으로 노래를 했으나, 이후 대마초 파동 당시 자숙하던 도중에 판소리에 매료되어 공부하기 시작하고, 로드 스튜어트와 조 카커 등 허스키한 보컬들의 음악도 참고하면서 지금의 창법이 되었다.[36] 한 기자가 '어느 정도의 음역까지 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기타를 만지며 '이게 낼 수 있는 소리 정도는 뭐든지'라고 대답한 일화도 있다고는 하지만, 사람인 이상 당연히 음역대에 한계는 있고 조용필이 걍 농담삼아 한 발언일 확률이 높다.

보컬 트레이닝과 발성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된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많은 성대모사에서 볼 수 있듯 고도로 앞쪽에 집중된 비음이 듣기 불편할 수도 있으나, 그게 조용필만의 개성이라고 느끼는 청중도 있으니 아이러니. 애초에 대중창법에 정답은 없다. 판소리를 연마한 이후로 벨팅스러운 창법을 활용하는데, 음역대의 제한은 있으나 특유의 개성있는 톤과 어울려 댐핑감을 선사한다. 다만 입을 벌리는 크기가 작고 상, 하악의 움직임이 큰 편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인 골라도 포함한다.

특이점으로는 저, 중, 고음에서의 파장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인데, 보통 파사지오를 넘겨 고음으로 치솟을수록 소리가 커지는 것과 달리 조용필의 경우 세기가 상당히 일정하게 나타난다. 이는 초창기의 발성과 중, 후반기의 발성이 바뀌면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는데, 9집까지의 발성이 흔히 그 시대 어른들이 말하는 지르는 방식으로 감정 조절보다는 후련하게 내뱉는 판소리식 발성에 가까웠다면, 10집 이후로 앨범에 직접 참여하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자신이 만드는 곡에 보컬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비음이 강조된 보컬은 바로 이 10집 때부터 활용하기 시작한 것.

또한 원래 밴드 기타리스트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리듬을 굉장히 잘탄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살펴보면, 특히 중후반기의 앨범의 경우 베이스를 중심으로 꽤 펑키하거나 Jazzy한 리듬의 곡 (10집 - I Love you / 모나리자, 12집 - 내모습, 13집 - 어젯밤 꿈속에서, 14집 - Jungle City) 이나 뉴웨이브 스타일의 록 음악 (13집 - 꿈꾸던 사랑), 심지어 트립합 (14집 - 흔들리는 나무)까지 종종 등장하는데, 미묘하게 싱코페이션을 음마다 컨트롤 하는 게 장난이 아니다. 사실 발성으로 따졌을 때 자음을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된소리로 강조하는 방식이 이런 리듬웍과 묘하게 상성이 맞으면서 생기는 효과 중 하나. 이런 점 때문에 단순히 노래를 잘 하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보컬에 맞게 곡을 쓰고 편곡하는 레벨이 상당히 높다고 인정받는다.

다만 라이브를 할 때와 스튜디오에서의 음색 차이가 분명히 있기는 한데, 이는 더블링[37]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에 라이브를 할 때도 원래 가진 소리 자체는 가는 음색이었으나, 앨범에서 들리는 소리는 약간 굵게 들린다. 다만 라이브를 다녀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노래할 때 성량 자체가 상당히 커서 어느정도 커버된다고 한다.

의외로 주목받지 못한 부분인데, 자기 노래의 대부분에 코러스까지 다 해먹는(...) 몇 안되는 보컬리스트 중 하나다. 소리 자체가 가늘지만 워낙 다각도로 활용도 잘하고 음정까지 정확하게 딱딱 들어맞는 보컬이라 주멜로디의 화음을 자기 보컬로 다 채워넣으면서 곡을 더 맛깔나게 하는데에 있어서 초고수다.[38] 보통 이런 방식은 주로 블랙 뮤직을 장기로 하는 보컬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킨 부분에 대해서 뮤지션들에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39]

다만 초기에 가창력에 대해 지적을 받은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것은 미8군 시절 대세가 패티김, 조영남 등의 스탠더드 팝류의 창법이 노래 잘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가늘고 흐느끼는 듯한 느낌의 조용필은 마치 트로트를 연상시켜서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메이저로의 진출 전까지는 감정 표현이 부족한 가수라는 평가도 받았었다. 단지 시대가 만든 편견의 희생양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 시대의 전설적인 세시봉 출신이자 가창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송창식이 거의 그 시대 유일하게 그를 꿰뚫어 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가장 노래 잘하는 가수를 단 한명만 꼽아보라는 말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조용필을 지목했던 일화도 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조용필은 80년대 음반 뽑아내기에만 급급한 소속 레코드 사와의 갈등 속에서 음악적 퀄리티에 대한 성찰과 고뇌를 이어간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표현하는 자신의 창법[40]이 듣기에 과하다고 생각하여 절제하는 창법을 이어가게 된다. 실제로 조용필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식으로 부르는게 아니라 "그대가 돌아서면. 두눈이 마주칠까."의 느낌으로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유의 창법은 조용필을 다른 가수들과 구분짓는 특징이 되어 많은 연예인들의 성대모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용필의 노래를 듣지 못한채 성대모사만 들은 젊은 층들은 조용필을 '특이하게 노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앨범이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노래의 특징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재능과 감각이 타고났으나 그것만 믿고 노력을 안 한건 아니다. 득음을 하기 위해 노래 연습하다가 각혈이 나오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노래 연습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었지만 2013년 SBS에서 방영된 조용필 스페셜에서 인터뷰어였던 이승기가 "득음하다가 목에서 피가 나셨다는 일화가 진짜인가요?"라는 질문에 "아니에요. 목에서 피가 나면 죽지요."라며 웃으며 대답했다.[41] 재능과 노력이 지금의 명성으로 이어진 것. 이런 창법이 불을 뿜는 대표곡들을 꼽자면 한오백년, 자존심, 한강 등 민요풍 노래 외에도 창밖의 여자, 촛불 등 다른 장르도 가리지 않는다.

게다가 시도한 장르도 매우 다양했다. 록 음악(미지의 세계), (Jungle City), 발라드(슬픈 베아트리체), 재즈(단발머리), 블루스(대전 블루스), 민요(자존심), 트로트(허공), 동요(난 아니야), 오페라(도시의 Opera)[42]. 더 무서운건 저렇게 시도를 하고 대부분 다 성공을 했다는데 있다. 18집에서 안토닌 드보르작의 9번 교향곡(신세계 교향곡)에 가사를 붙인 '내일을 위해'라는 곡에서 오페라가 아닌 클래식, 19집의 타이틀곡인 Hello의 경우엔 일렉트로니카, 버벌진트의 피처링으로 Rap까지 섭렵했다.[43] 이러한 수많은 노력과 그의 천재성으로 공존하기 어려워보이는 장르들이 대중가요라는 하나의 용광로처럼 녹아든 것은 상당수가 그의 공헌이다.

또한 60대의 나이라는 말에 무색하게 계속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고, 젊은 트렌드에 맞춰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데[44], 평소 케이티 페리, 브루노 마스, 마룬 5와 같은 음악을 즐겨 듣고[45] 19집 작업의 모토를 아예 '음악의 깊이' 보다는 '편안함'과 '세대 간의 융합'으로 잡았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다. 그 결과 Hello와 Bounce라는 젊은 가수들과 비교해도 전혀 촌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곡들이 나왔다.

그의 콘서트가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리면, 지하철 배차간격이 바뀌며, 막차시간이 2시간 연장되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지금은 저세상간 김정일도 조용필의 '허공'을 애청했다고 한다. 물론 남북정상회담 당시였으니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지만, 탈북자들이 쓰는 대북 관련 책자들에서도 북한 고위층 자제들이 조용필 노래를 몰래 듣고 다닌다고 하는 얘기 정도는 훨씬 이전부터 나왔었다. 또한 진짜 립서비스였다 하더라도 그 많은 가수 중 조용필을 언급했다는 데서 그의 위용을 알 수 있는 게 된다.

2011년 문화일보가 실시한 창간 20주년 '대중음악사 20년 최고의 가수와 노래' 조사에서 당당하게 가수와 노래 부문 모두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이승철, 3위가 서태지, 4위가 김건모, 5위가 소녀시대.

4.1. 위대한탄생, 그리고 편곡

조용필은 엄밀히 따지면, 밴드의 보컬이다. 따라서 위대한탄생을 빼놓고는 조용필을 논할 수 없다. 위대한탄생 또한 멤버 개개인이 조용필처럼 각 분야에서의 최정상급 능력자들이다. 조용필의 음악은 밴드의 사운드가 있어야만이 완성되는 것이고, 밴드음악의 최고 묘미는 매 공연마다 달라지고 진화하는 편곡과 사운드라 할 수 있다.



간주중 기타솔로, 듀엣 영상. 부활 김태원이 스승님이라 부를만하지 않은가!

편곡에 대한 부분을 논하기에 앞서, 위대한탄생 밴드가 얼마나 ‘위대’한지 짧게 얘기해볼까 한다. 2018년 평양공연에서 레드벨벳, YB, 강산에를 제외하고 위대한탄생과 호흡을 맞췄는데 해당 가수들이 상당히 만족했다고 한다. 또한 음악계 전문가들을 비롯해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들, 해당 가수들의 골수팬들은 공연을 보고 위대한 탄생의 완벽한 연주에 아주 놀랐다고 한다. 누가 봐도 가히 최정상의 밴드다웠고, 평양공연에서 가장 돋보인 건 참가한 가수들이 아니라 위대한탄생이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몇시간 호흡 맞춰보고 그 정도로 연주할 수 있는 밴드가 국내에 몇이나 더 있을까.

더 자세한 건 기사를 참고.


알리-펑펑. 정말 역대급의 공연이다. 이 영상을 보고 기존 곡을 들어보면 비트가 쓸데없이 너무 세고, 갈수록 조잡하게 따로 논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특히 원곡에서 가장 심각했던 문제가 클라이막스에서 드럼하고 보컬이 겹치면서 정박-엇박-정박-엇박 느낌이 나는 것과, 기타인지 바이올린인지, 둘다일지 모를 정도로 개입이 심해서 보컬이 죽는것, MR을 보컬이 쫓아가는 느낌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알리가 먼저 나가고 뒤늦게 세션이 따라가는 형국이다. 그럼으로써 보이스가 더 선명하게 귀에 박히는 효과를 냈다. 뒤로 갈수록 알리가 신나서 부른다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드럼이 MR과 달리 상당히 절제돼서 전혀 거슬리지가 않는다. 보컬과 겹치면서 뭉개지는 것도 보완했다. 아래에서 알리의 평소 MR 라이브 버전을 듣고 비교해보자.


위에서 위대한탄생의 사운드가 얼마나 ‘위대’한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이에 따른 편곡이 얼마나 또 ‘위대’한지 살펴보자. 먼저, 조용필이 만약 솔로 가수였고, 각 시대별로 발표한 곡들을 당시와 같은 음정, 멜로디로 그대로 부른다면 여전히 콘서트에 그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까? 이젠 촌스럽게 들리지 않을까?

위대한 탄생의 리더 최희선(기타)[* 그룹 부활의 프론트맨인 김태원이 기타리스트로서의 스승으로 꼽는 인물 중 한명이다.] 인터뷰에 따르면, 예를들어 투어 콘서트를 한다고 치면, 최소 반년동안은 편곡을 준비하고 여러가지 실험을 해보고 최종 완성까지 또 몇개월을 쓴다고 한다. 그렇게 완성을 시켜놓고도, 서울을 시작으로 대구-광주 이렇게 이어지는 투어라고 치면, 서울 공연 끝나고 바로 대구 내려가는 차에서 계속해서 들어보고 고칠 부분 찾아내고, 리허설에서도 해보고 고치고, 그렇게 대구 공연을 하고, 대구 공연 끝나고 광주로 가면서도 그 작업을 또 한다고 한다. 일례로 현재 2018 [thanks to you] 콘서트에서는 ‘미지의 세계’ 마지막 부분을 밴드가 반복하면서 피날레하는걸로 변화를 줬는데 그 피날레의 길이마저도 서울, 대구 공연 때와 다르게 의정부 공연에서는 상당히 길어졌다.

수십년간 이런 작업이 수없이 축적되었다보니 같은 곡이라지만 최소 수 십, 수 백번 편곡이 진행되어 전혀 촌스럽지 않은 것이다. 조용필은 늘 같은 히트곡을 불러도 다른 느낌으로 더 세련되게 부르니 사람들이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는 것이다. 수십년 팬들이라지만 세월이 흐르는만큼 그 곡도 새롭게 변하고, 새롭게 다가오니까 질리지 않는 것이다.


1983년의 ‘나는 너 좋아’

당시로는 아주 세련된 사운드와 퍼포먼스를 갖춘 트렌디한 곡이었지만, 지금 듣기에는 촌스러운 감이 있다.


1991년의 ‘장미꽃 불을 켜요’ 지금 들으면 전혀 감흥이
없다.


2013년 콘서트 버전. 완전히 다른 곡이 되었다.


1986년의 ‘그대여’ 당시로는 아주 파격적인 사운드와 박자였다. 지금 들으면 템포가 상당히 느리고 처지는 느낌이다.


2018년 콘서트 버전. 정말 세련된 느낌이다.

5. 여담

80년대까지 국내와 일본에서 잘 알려진 남성 트로트 장르 가요는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는데, 조용필 이후 일본에서의 인지도 1위 남성 트로트 가요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뀌었다. 국내에서도 김정구 사후 눈물 젖은... 이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데 비해,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아직도 줄기차게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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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활동 당시 1987년 kbs 가요대상에서 마츠다 세이코와 인터뷰하는 조용필

5.1.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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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인이 된 부인 안진현과 함께.

조용필은 1984년 3선 국회의원 박찬의 딸 박지숙과 결혼[65]하지만 결혼기간의 갈등 끝에[66] 4년만에 합의 이혼했다. 이혼 당시 대부분 재산을 양도하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등 가왕다운(?) 모습을 보였으며 원만하게 이혼을 하여 별 추문 같은 게 없이 조용히 끝났다. 이후 그는 94년 미국 로비스트 출신 안진현과 재혼했다.[67][68] 안진현은 조용필의 음악적 삶을 존중하며 내조하고, 그는 이러한 아내에 대해 애정을 숨기지 않는 잉꼬부부의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결혼 5년만에 심장병에 걸린 안진현은 2003년 투병 도중 사망하게 된다. 당시 안진현의 사망소식은 주요언론매체에 의해 자세히 보도되었는데, 조용필은 장례를 치르는 내내 핼쑥한 모습으로 상주를 서다가 간간히 오열하는 모습 등을 보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내의 사망이후 조용필은 상속액 전액을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였으며, 현재까지 수익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69] 2003년 18집에 수록된 노래 '진' 은 바로 아내를 그리며 작곡한 노래로 알려져 있다. 같은 해 조용필이 잠실운동장에서 처음 공연을 한 35주년 기념 콘서트날 공교롭게 비가 엄청나게 내렸는데 조용필은 이 노래를 부르던 말미 잠시 울먹이기도 했다. 정치인 허경영이 2004년 10월엔 “가수 조용필의 부인인 안진현에게 동양화 매매대금을 받지 못했다”면서 조용필을 상대로 50만달러의 매매대금 청구소송을 냈다. 증인이 없으니 우기면 삥좀 크게 뜯어낼꺼라고 고인을 이용해서 정신나간 소송을 했지만, 어차피 근거도 없고 증거도 없어 패소했다.

5.2. 사건

활동 경력 중 오점이라면 대마초 흡연 사건.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이 연예가를 휩쓸었을 때 조용필 역시 구속되었다. 당시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에 수많은 연예인들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희생을 당했는데, 조용필도 피해갈 수 없었다. 어쨌든 죄가 경미하다는 처분을 받고 활동금지는 면했었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가수 대열에 서자 과거 경력이 다시 문제가 되었고, 결국 다른 가수들처럼 1979년 완전 해금까지 활동금지가수가 된다.

무면허 음주운전 사고를 낸 흑역사가 있다. 1993년 12월 2일 새벽 자신의 벤츠 승용차를 몰고 가다 중앙분리대에 설치된 지하철 환풍구를 들이받아 중상을 입는 사고를 냈는데 조사결과 혈중알콜농도 0.26%로 음주운전에다 무면허였던 것. 구속요건인 0.35에는 못미쳐 불구속으로 입건되었다. # #

2000년에 저작권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현재 자신의 곡들 중 31곡의 저작권을 지구레코드임정수에게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다. 뒤늦게 깨닫고 법정까지 갔으나 결국 패소했고 이 31곡의 저작권은 임정수의 사후에 그의 아들인 임재우에게 상속되어 넘어갔다. 그리고 임재우는 저작권을 다시 되돌려줄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해당기사.

다만 초기에 이 노래들을 부르기 위해선 저작권료를 내야한다고 잘못 알려졌었는데 이는 사실 관계가 다르다. 조용필이 지구레코드사에 넘긴 것은 엄밀히 복제권과 배포권, 유무형 복제권이다. 따라서 조용필이 본인의 노래를 녹음하거나 공연할 때 A회장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공연을 하는데는 하등 문제가 없다. 이는 공연권으로 조용필에게 있으며 창작실연자에게 부여된 권리다. 지구레코드가 강제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2013년 Hello가 발표된 이후 신대철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퍼지면서 조용필의 빼앗긴 저작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다 2013년 10월경 해당 곡들의 저작권을 조용필이 다시 되찾았다고 한다.# 자세한 합의 내용은 양자 합의에 의해 5년간 비밀을 유지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2018년 10월 이후에는 뭔가 드러날거 같다. 벌써 5년이 지나가나?



조용필이 데리고 있던 기타리스트가 작곡한 곡 중 표절 논란이 일기도 했는데, 9집에 들어 있는 곡 "청춘시대"[70]의 기타연주 부분이 잉베이 맘스틴의 "Far Beyond The Sun"의 기타연주와 비슷하다는 부분이 밝혀졌다. 표절 의혹으로만 제기되었고 표절로 판명된 것은 아니지만, 조용필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이 곡의 프로모션을 중지했고, 해당 곡을 작곡한 멤버를 문책했다고 한다.

자신의 곡 '어제 오늘 그리고'라는 곡을 후배 가수에게 리메이크 하라고 빌려줬는데 그 놈이 이 곡을 발표하자마자 병역기피 목적으로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튀었다. 그 녀석이 누구냐 하면...

5.3.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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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운영중인 YPC프로덕션은 주주배당금 대신 기부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덕에 기부금액만 연평균 3억원.

표면적으로 드러나있지는 않지만 기부를 엄청나게 많이 했다. 위에서 나와 있듯이 소속사의 주식배당금액의 일정부분을 기부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아내였던 안진현의 유산인 24억원을 심장병어린이 치료를 위해 기부를 했고 2009년에도 조용필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3억원씩 기부하고 있다. 또한 콘서트 수익금 역시 매년 기부를 해 62억원 상당의 금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포브스지에서 선정한 아시아의 기부영웅 중에 한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공식적인 금액은 84억원 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00억원이 넘는 듯. 매스컴에 드러나기를 싫어하는 본인 성격탓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5.4. 영웅적 면모

조용필은 지역 최고의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필은 음악이 하고 싶어서 가출을 했다. 집을 나왔다가 형한테 잡혀 들어갔다가 또 나오고를 몇번이나 반복했다고 한다. 유복한 가정환경으로부터 오는 안락함, 안정감, 심지어는 가족과의 관계까지, 모든 걸 버리고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건 보통 열정이 아니다. 그리고 당시로는 대중음악 그 자체인, 프로들의 무대인 미8군에 가기까지 독기 또한 보통이 아닌 것이다. 소위 잘 사는 집 자식이면 열정이 있더라도, 어떤 순간에는 열악한 환경, 치열한 경쟁에 지쳐 결국 포기했을법한데 그런 시련을 그대로 이겨냈다는 게 대단하다. 이 대목에서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끈기(독기), 그리고 결단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후 1집부터(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대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2집, 3집을 꾸준히 냈다. 이 시기 언제쯤, 조용필 아버지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내 아들이 누가 봐도 대한민국에서 지금 돈을 제일 많이 버는데, 아직까지도 지 집 하나 없이 전세 살고 있다. 아무래도 매니저가 됐든 누가 됐든 중간에서 해 먹는거 같다. 기자가 함 알아봐주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해당 기자가 말하기를, “아버님. 누가 중간에서 해 먹는 게 아니라, 아드님(조용필)은 100을 벌었다치면 90 이상을 음향장비, 악기 등에 전부 투자하고 해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1등급 장비로 모두 맞추려하니까 돈이 없는 겁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그 엄청난 음향 장비를 운송하려고 덤프트럭을 2대씩 사서 끌고 다녔다고 한다. 최정상의 자리에서 오히려 더 나아가기 위해 음악에 그 모든 걸 재투자했다는 점이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1집부터 그런 대히트를 치는 것도 어려운데, 갑작스런 인기에도 묵묵히 재투자, 더 나은 음악을 위한 도전... 진정 영웅적 면모를 갖춘, 타고난 수퍼스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후로도 나왔다하면 1등, 연말 대상. 가요계는 조용필이 과장이 아니라 8할 이상이었다. 그야말로 지배를 했다. 그리고 1987년, 공식적으로 연말 시상식 수상을 거부하는 ‘결단’을 보였다. 더 이상 순위에 집착하지 않고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이미 1987년 이전의 활동과 히트곡만으로도 한국역사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뮤지션이 되었을텐데, 또 한번 더 도약하기 위해, 더 고차원의 음악을 하기 위해 콘서트로 본인의 주무대를 옮긴 것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TV는 상당히 열악한 사운드 시스템이었는데 조용필은 이에 대한 갈증과 불만이 상당했다. 뮤지션으로서 더 나은 무대, 더 나은 사운드와 퍼포먼스를 갈망한 것이다. 방송과 결별하며 그때동안 이뤄놓은 대중적 인기, 명예, 돈 모든 걸 버리고, 오로지 음악적 진화만을 추구한 결단이었다. 조용필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 뮤지션으로서의 자세가 어떠한지 또 한번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때부터는 선진화된 해외의 공연무대를 보고 분석하고, 공부했다. 이때부터는 가수 조용필을 초월해 무대 총감독 역할까지도 겸하게 된다. 그전까지 국내 무대는 그저 조명 몇개 반짝반짝하고 진부한 폭죽 터뜨리기가 전부였다면, 조용필 콘서트는 완전히 새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사운드부터가 달랐다. 모든 좌석에서 골고루 느낄 수 있는 사운드, 어떤 각도에서 보든 화려한 조명, 그리고 무빙스테이지, 어마어마한 규모. 해외의 일류 공연을 그대로 모방해왔기에 모든 게 달랐다. 음악관계자들은 물론 뮤지컬이나 연극쪽에서도 조용필의 무대를 참고하고 분석했다고 한다. 초기 몇년은 티비에서 안보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고, 그때만해도 가수를 직접 보러 콘서트에 간다는 문화가 대중화되지 않았을때이다. 그래서 관객이 좀 적었는데 그럴수록 더 돈을 쏟아부으며 무대에 집중, 아니 집착했다. 비로소 점점 입소문을 타고 주목을 받으면서 그 이후로 현재까지 만석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 당시에 밤무대에 나가서 노래 몇곡하면 수십억을 준다고 했지만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현재로 치면 곡당 4~5천만원선. 진정한 음악인으로서, 어떻게 음악을 대하는지도 알 수 있다. 최근 50주년 공연에도 무대에 3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데뷔 40주년까지 완벽한 정체성을 확립하며 활동해왔고 마침내 2013년에는 완전히 새로운, 다시 한번 전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가 되겠다고 19집을 내놓는다. Bounce는 당시 초등학생들도 따라 불렀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런 곡이 나올 수 있었던건 아직까지도 국내 아이돌음악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항상 듣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 작업을 수십년 해왔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트렌드, 감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조용필 본인에게 EDM이 익숙한 것이다. 단순히 한국 아이돌을 참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앨런 워커, 시아 등을 즐겨듣는다니 완전히 20대 뮤지션, 아이돌들과 같이 경쟁하는 가수인 것이다. 정상의 자리에서도 늘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자세, 자만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조용필은 늘 새롭게 배우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 민요, 판소리를 접목시킨 곡도 있고, 뮤지컬, 오페라와 접목한 노래도 있다. 한때는 뮤지컬을 하려고 하기도 했었다. 비록 그런 음반이 대히트까지는 치지 못했어도 그런 끊임없는 시도, 도전이 그를 발전시킨다.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변화, 혁신을 추구하는, 더 나은 차원으로 가려는 뮤지션으로서의 순수한 갈망이 엿보인다.

그냥 한마디로 조용필은 한평생 음악에 미쳐있는 음악 중독자고, 정말로 음악을 진정성 있게 대하는 순수한 뮤지션이다. 그의 삶이 곧 음악이고, 음악이 곧 조용필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5.5. 승부사적 기질, 그리고 19집

2013년 45주년을 맞아 조용필이 19집을 발표했는데 대한민국 전체에 바운스 열풍을 일으켰다. tv 가요프로에 출연 하지 않고도 1위를 했다. 혹시 당시 가요계가 침체기내지는 휴식기였을까? 전혀 그렇지않았고, 오히려 그 어느때보다 뜨거운 2013년이었다. 결국 연말 결산에서도 조용필의 바운스가 ‘올해의 노래’로 선정되었는데, 2위가 싸이의 젠틀맨, 3위가 크레용팝 빠빠빠, 4위가 엑소 으르렁, 5위가 아이유 분홍신이었다. 정말 쟁쟁한 한 해 였다. 심지어 싸이의 젠틀맨으로 말하자면 그 노래의 후광으로 발매이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노래였다.[71]

이런 엄청난 앨범을 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음악평론가 강헌은, “19집의 음악성 자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기보다, 최고의 슈퍼스타지만 또 한번 이런 시도를 했다는거 자체가 ‘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앞으로 쓰러지겠다’라는 조용필의 승부사적 기질을 엿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라고 했다. 이미 수많은 세월을 최정상의 자리에 서 있었지만, 또 한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전하고 모험하는 자세. 비록 19집이 실패하더라도 그래서 비록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어쨌든 본인은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고 쓰러지겠다는 그런 승부사적 기질...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본인이 음악적으로 지향하는, 가야할 길을 갔기에 뮤지션으로서 상당한 의의를 가지는 시도였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한 시대에 잘 나가다가, 한 두 번 정도 앨범이 히트를 못치면 그 이후에는 엄청난 음악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그 이후엔 두려워서 앨범 발표를 못하게 되는데 조용필은 언제나 그렇듯 거침없이 밀어붙였고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비록 중간중간에 대히트까지는 못 친 앨범들도 있지만 본인의 음악적 진보를 위해서 거침없이 도전했기에 결과론적으론 발전하게 되었고 차후에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시도가 수십년 이어져 오면서 19집은 또 한번 어떤 기존의 틀을 다시 한번 완전히 깼고, 10대, 20대에게까지 신선함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조차도 열광하게 만들었다.

조용필은 19집 앨범을 발표하면서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그런 자세로 준비했다”라고 했는데 으레 가수들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난 이렇게 전략적이고 치밀한 사람이다’라는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10대, 20대는 조용필이라는 사람을 들어는 봤지만, 그 가수가 어떤 노래를 하는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자세히는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19집을 발표하게 되면, 조용필은 베테랑 가수지만 그들에게는 신인으로서 다가가게 된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준비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런 점을 긍정적인 기회로 여겼다고 한다. 요즘 트렌드에 맞는 곡을 하나 낼 뿐인데, 자신이 내면 틀을 깨는 게 되고, 반전의 효과가 극대화되니까 말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하면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있나 판단하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초등학생도 흥겹게 따라부르는 bounce.

한편으로, 바운스는 초창기 80년대보다 더 의의가 있는, 우리 가요사의 정말 한 획을 그은 의미있는 곡이다. 예를 들어 1집 당시, LP를 한장 사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아빠, 엄마는 창밖의 여자를, 아들, 딸은 단발머리를 듣는다하여 세대를 아우르는 가수라하였는데, 바운스는 단 한 곡으로 세대를 통합했으니 말이다.

5.6. 가왕의 눈물




1993 세종문화회관 공연 중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부르는데 여러 설이 있다. 당시에 공연 얼마전 모친상을 당해서라는 말도 있고, 앵콜을 10번가까이 받아서 그렇다는 설도 있다. 저 곡 이전에 ‘그대 발길 머무는 곳에’를 부를때도 약간 울고 있었다는점에서 전자쪽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냥 마음편하게 둘 다라고 믿으면 된다.



2018 대구 콘서트 중

오로지 음악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가왕의 5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에서 가왕과 팬들의 눈물바다가 된 50주년 투어 [Thanks to you]의 명장면 중 하나

팬클럽 단관석쪽으로 나와서 관객들과 소통하며 얘기를
주고 받다가 비련을 부르기 시작했다. 1절에서부터 약간 그런 낌새를 보였는데 2절을 통으로 날렸다. 수 십년 한결같이 본인에게 열광해주는 팬들에 대한 고마움과 한편으론, 그 젊었던 소년소녀들이 이제 늙은 중장년층이 되었다는데서 오는 서글픔 등 만감이 교차하여 흘렀던 눈물이 아닐까 싶다.

6. 기록

음악차트 및 음악 시상식
콘서트
수상 및 설문조사 기록
앨범 및 싱글
음악 및 음향
일본 관련
기타

7. 관련 문서



[1] 1980년까지는 TBC 방송가요대상이라는 이름의 시상식으로 진행됐고 언론통폐합 이후인 1981년부터 KBS 가요대상으로 이름을 바꿔 진행했다.[2] 10대 가수 가요제 시절의 대상 정식 명칭은 '최고인기가수상'이었다.[3] 사실 1987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의 최고인기가수상은 조용필로 확정돼 있었다. 그러나 모종의 사유로 조용필이 수상을 거부하면서 공식 시상 순서가 취소됐고 프로그램 자체도 시상식이 아닌 그냥 공연으로 대체했다. 형식적으로 선정한 1987년 최고인기가수상에는 전영록, 최고인기가요상에는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가 뽑혔다.[4] 당초 송산중학교에 다니다가 2학년 때 전학[5] 다만 후술되어있듯 본인은 가왕이란 표현이 민망하다고 겸손을 표하기도 했다.[6] 이런 조용필이지만 2003년 여론조사에서 올해 과소평가된 아티스트 1위로 선정된 적이 있다.[7] 고교 비평준화 시절 서울시내 5대 공립고교 중 하나로 꼽히던 명문학교였다.[8] 중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경동고등학교 동창회 등에서 졸업생으로 소개되는 것을 보면## 중퇴건 졸업이건 경동고등학교 동창회에서는 졸업생으로 인정하는 듯하다. 졸업식날 가출해서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얘기도 있는걸 보면 졸업은 한 듯 하다.[9]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본래는 기타리스트로 데뷔했다. 정확히는 기타리스트 겸 보컬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10] 과거부터 국내 음악계에선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뮤지션으로 국내에선 조용필이 유일하다고 여겨졌다. 참고로 이문세, 이승환, 싸이 등도 잠실주경기장에서 공연을 했지만, 이들은 매진에 실패해서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용필은 그런 주경기장 콘서트를 순식간에 매진시킬 정도의 티켓파워를 가지고 있다. 무려 7번을 했다.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은, 잠실주경기장: 2010 Love In Love 이틀 10만명, 1993 해운대 콘서트 단일 10만명.[11] 사실 오빠부대라는 용어 자체는 1960년대에 영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당시 처음 생겨난 용어며 국내가수로는 70년대 남진/나훈아 시대부터 있긴 있었다. 그 오빠부대가 짜임새 있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조용필 쯤부터인 것.[12] 조용필의 인기를 설명해주는 실화 하나를 공개한다. 부산의 한 여고에서(여대일 수도 있음 -작성자 주-) 어느 교사가 수업중, 조용필에 관해 얘기를 하면서 " 그 친구,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 메면 영락없는 하우스보이지" 라고 했더니 수업중이던 여학생들이 일제히 "그 발언 취소하라"고 들고 일어났고 그것도 모자라 해당교사가 지도하는 수업도 거부하는 사태까지 있었을 정도. 당시나 지금이나..[13] <비련>의 도입부.[14] 멜X 등의 음원사이트에서 라이브 공연 버전을 들어보면 관중들의 저 반응이 그대로 나온다. 대표적인 예시. 43초부터 시작.[15] 이종환이 라디오에서 지금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벚꽃마냥 부산에서 대구 대전을 거쳐 서울로 올라오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16] 아버지가 굉장히 권위적이고 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들들을 데리고 야외에서 사냥을 다니기도 했는데, 조용필은 피 묻은 동물 사체를 보는게 너무 싫었다고 한다. 음악 반대 이유 외에도 부자의 성향이 무척 안 맞았던 듯.[17] "연안부두"를 부른 밴트 '김트리오'와는 다른 그룹이다.[18] 이 당시에는 최이철이 나가고 '울고 싶어라'로 유명한 이남이가 베이스를 맡게 된다.[19] 부산 갈매기도 그렇다.[20] 사실 이 대마초 사건은 당시 대마초에 느슨했던 대중예술계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으며 조용필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연예계 전반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다.[21] 출처.[22] 하단에도 후술하겠지만 판소리부터 오페라까지, 발라드부터 , 록 음악까지 음악장르를 가장 다양하게 시도하고, 가장 많이 성공한 가수다.[23] 다만 이건 신해철이 무한궤도로 데뷔한 대학가요제에서 당시 심사위원이던 조용필이 후한 평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종의 은인인 셈. 또 신해철이 마왕이란 별명에서 느껴지듯 독설가, 카리스마 이미지이긴 했어도 안하무인은 아니었다. 실상은 걍 100분 토론에 후드티와 가죽장갑 입고 나오던 귀여운 아저씨였을 뿐[24] 서태지 팬의 시초들이라 하는 1980~90년대 10대 후반 20대를 보낸 팬들마저 원래는 조용필 팬이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물론 있겠지만 그렇다고 얘기할 정도는 아니다. 조용필의 공고한 인기는 어디까지나 8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이며,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에 데뷔했다. 인터넷도 없는 당시 92년 고등학생이면 조용필의 전성기 때는 초등학생이었다. 다만, 이 세대는 부모가 조용필의 광팬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트로트 곡은 잘 몰라도 조용필의 노래는 아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걸 확대해석해서 이들도 조용필 팬이라고 하는 게 문제라는 것. 당시 실질적인 음반구매력 등을 생각해 보면 그닥 신빙성은 없는 얘기다. 조성모도 2000년에는 가요계 황제였지만, 2005년 기준으로 고등학생이 비록 조성모의 노래를 틀면 '어? 들어본 적은 있는 거 같은데?'라는 반응은 충분히 나올 수 있어도 조성모의 팬이라고 하면 어색하게 보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25] 언론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가수는 없다.[26] 조PD는 신해철 차례 때 보이지도 않는 뒤에서 랩을 했다(...).[27] 잠실 주경기장 즉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은 69,950석에 더해 가변석 5216석이다. 상암동 의 월드컵 경기장(66,704석)보다 더 크다.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없다.[28] 모든 출연자가 합창한 친구여까지 합치면 5곡이 자신의 노래이다. 다만 2차 공연 땐 2곡만 불렀다. 몸이 안좋기도 했을 뿐더러 다른 출연자들 공연도 많아 여건상 2곡만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순서는 솔로 공연 중에선 마지막 무대였다.[29] 조용필은 1950년생이다.[30]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 것도 모자라 민요에다가 락을 접목시켜 버리기까지 했다. 물론 음악의 장르는 넓고 깊기에 그가 거의 모든 장르를 다룬 것은 아니다.[31] 작사도 수준급이다. 다만 2013년 19집 앨범 발매 당시 인터뷰에선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요즘 젊은이들 취향의 곡들은 떠오르질 않는다고 그래서 타이틀곡도 후배 작곡가들한테 맡겼다고 일종의 투정을 하기도 했다.[32] 물론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완벽하게 연주가 가능한 곡을 만들어냈다는 뜻은 아니다. 멜로디라인을 만드는 것을 작곡이라고 하고 그 멜로디에 맞춰서 세션들이 어떻게 연주할 지 만들어내는 것을 편곡이라고 하는데, 편곡은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33] 대중가요는 결국 듣는 이들의 몫이기 때문.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그의 콘서트에 몰려들면 그게 노래 잘하는거다. 고음 짱짱맨보다 톤이나 감성이 중요한 이유. 게다가 조용필의 판소리 비슷한 벨팅스러운 창법도 지금 가수들이 많이 구사하는 믹스보이스적 창법에 어울리지 않는 것일뿐 (성대를 노래 못할 정도로 상하게 하는 창법이 아닌 한) 잘못된게 아니다. 대중가요 창법에 정답은 없다.[34] 조용필 콘서트를 직접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콘서트 때 멘트가 굉장히 짧고 공연시간을 모두 노래로 채워서 한다. 잡다한 것들은 빼고 순수하게 공연에만 집중하겠다는 프로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35] 미군부대 밴드에서 기타를 담당하다가 보컬이 갑자기 입대하게 되어(...) 마이크를 잡기 시작했다.[36] 실제로 로드 스튜어트의 평소 목소리가 생각보다 꽤 하이톤이라는 점을 캐치해, 금관 악기를 하나 주문하고 성대의 떨림판과 비교해가면서 허스키한 보이스를 연마했다고 자신이 직접 인터뷰에서 밝혔다. 피를 토한 것은 언론의 과장된 부풀리기였다고 부정했고, 대신 성대가 피로를 느끼면 소금물을 마셔가면서 붓기를 약간 가라앉히고 다시 연습했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성대 자체의 내구력을 연마해 온 셈. 실제로 이런 발성은 서편제에서 말하는 '수리성' 단련 방식과 상당히 비슷하다.[37] 한 선율을 부를 때 오버더빙을 하는 방법. 똑같은 멜로디를 똑같은 음색으로 노래를 한 번 더 부르기 때문에 청자가 들을 시에 소리가 좀 더 풍성하게 들린다.[38] https://www.youtube.com/watch?v=RySAATlcsWI 라든가 아니면 이곡에서 처럼https://www.youtube.com/watch?v=WINAu3tJXBo 후렴구에서 잠시 등장하는 스캣 부분에서 들을 수 있다.[39]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보통 가수 스스로가 코러스를 만들기 보다는 주로 외부 객원 보컬들을 활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팝 계에서 코러스를 잘 넣기로 유명한 가수로는 프레디 머큐리, 마이클 잭슨, 알 지아로 등이 있다.[40] '기도하는꺄~~'으로 유명한 초기 조용필의 대표곡 '비련'의 후렴구를 들어보자. 풍부한 성량을 터트리듯이 노래하는 당시 조용필의 창법을 들을 수 있다.[41] 실제로 목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3가지 정도인데, 하나는 내부장기 손상으로 이건 얄짤없는 사망루트(...)고, 그 다음은 폐를 포함한 호흡기 손상인데 이것도 노래에 치명적이다. 마지막으로 득음이라고 칭하는 판소리쪽인데, 이쪽에서 피가 난다는건 이렇게 피가 난다는 소리가 아니다. 애초에 현대가요쪽 창법과 판소리 창법은 상당히 달라서, 이런 식으로 피를 보면 성대가 변형되기 때문에 평상시 목소리가 쇳소리가 난다. 목을 험하게 굴려서가 아니라, 자기 노력으로 목소리를 이정도로 바꾼 가수는 현대 가수중에서는 거의 없다시피한 수준. 나무위키에 적힌 인물 중에선 야마가타 유키오 정도가 있는데 이쪽도 다소 애매하다. 애초에 판소리도 세부적인 창법으로 들어가면 다양하다.[42] 이상 각주는 모두 대표적으로 한곡들만 기재하였음.[43] 처음 프로듀서가 버벌진트를 추천하자 일주일 동안 활동중인 거의 모든 국내 래퍼들의 음악을 다 들어본 후 선택했다고 한다. 버벌진트는 제의 받았을 때 벌써 만우절이 왔나 싶었다고.[44] 의외의 친분으로 빅뱅의 태양이 있는데 태양이 RISE 앨범을 준비하면서 신곡 '버리고'를 직접 조용필에게 찾아가 들려주었다고 한다. 거장과 독대하는 아이돌 정점의 위엄 그 자리에서 같이 백 번도 넘게 들었다고.[45] 인터뷰에서 어떤 음악을 즐기시냐는 질문에 빌보드 차트에 있는 음악을 주로 듣는다고 답변한 바 있다. 물론 옛날 노래도 많이 듣는다고 덧붙였다.[46] 내용에 로맨스가 들어가긴 하는데, 실상은 조용필의 노래를 소재로 만든 음악 영화이다.[47] 상대역은 유지인이고, 위대한 탄생 멤버들도 출연했다.[48] 훗날 조용필은 이때의 경험이 너무나 쑥스러워서 두번 다시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49] 상대역은 조용필 본인. 그 사랑, 한이 되어에 이은 두 번 째 연기[50] 이 때문에 1970년대와 80년대에 100만장 넘게 팔린 노래들은 90년대의 밀리언셀러보다 더 엄청난 전설로 취급받고 있다.[51] 1979년 일본국유철도의 DISCOVER JAPAN 캠페인의 BGM으로 쓴 노래로 유명하다.[52] 올리비아 핫세의 두번째 남편으로 유명하고, 재일교포설도 있던 가수.[53] 2화 초반에 나오며 극 상에는 조용팔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친구여 이후에 전영록의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봐'도 나왔다. 당연하지만, 이 노래도 정말 유명했던 히트곡이었다.[54] 지금은 작고한 중견가수였던 고 박상규 역시 경험했던 적이 있다. 공연이 끝나고 한적한 곳에서 식사중 그 지역 불량배가 와서는 너 혼자 쳐먹냐는 식으로 반말짓거리로 시비를 걸길래 무시하고 식사를 계속했는데 그래도 시비를 계속걸자 홧김에 주먹을 날렸더니 마치 고목나무 쓰러지듯 넘어지더라고. 후일 후배들이 이 사건을 얘기하면서 '대단하다'고 하니 박상규 왈, "그 친구가 약하니까 단방에 간거지 뭐".[55] 바로 위에서 설명한 영화에도 이런 장면이 등장했다.[56] 하루에 5만명씩 총 10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다.[57] 지금으로선 이해가 안되지만 당시엔 가요음반마다 널리 알려진 가곡이나 동요들이 1곡씩은 꼭 들어 있었다. 조용필의 경우에도 겨울나무가 있었던 적이 있고, 변진섭의 1집에도 과수원 길이 수록되어있었다.[58] 한국 스탠더드 팝 최고의 디바로 불린 가수로 197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최초로 공연을 했다. 조용필 이후 한국인 두번째로 미국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한 가수로 최근에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줬지만 2012년 2월 15일에 은퇴 기자회견을 가지고 6월부터 은퇴공연을 갖는다. 대표곡만 해도 600곡 이상이 되는 가수.[59] 당시 KBS는 전년도 대상 수상자가 나와서 발표를 했는데, 3년 연속 대상을 타던 1983년에는 본인도 헛웃음을 지으면서 "접니다...조용필"이라고 발표했다.[60] 이때 이용의 가수왕 수상이 말이 많았다. MBC에서는 팬들의 우편에 의한 투표로 비밀집계로 가수왕을 뽑았는데, 성난 조용필의 팬들이 투표 공개를 요청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MBC는 말도 안되는 해명을 하는데, 그 이유가 조용필은 너무 많은 상을 탔기 때문에 다른 가수에게 기회를 줘야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조작을 했다는 것을 MBC가 인정했던 셈.[61] 영국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소록도에 방문공연을 했었다. 조용필은 약속된대로 그 연주에 맞춰 본인의 잔잔한 대표곡 2곡만을 불렀는데, 노인들이 너무 아쉬워 하자 곧 다시 공연을 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62] 참고로 KBS는 1981년 2월 '가요톱10'으로부터 순위제가 시작되었고, MBC는 1989년 10월 말 '쇼 네트워크'로부터, SBS는 대충 1994년부터 시작되었고, M.net은 2004년 '엠카운트다운' 첫 방송과 동시에 순위제를 시행하였다.[63] 다만 위에서도 기술되었듯이 실제로는 동갑이다. 출생기록처리가 전산화 되기전에는 호적상 나이와 실제 나이가 들쭉날쭉한 경우가 꽤 있었는데, 꽤가 아니라 매우 1980년대까지도 매우 흔했다. 안성기가 50년생들과 같이 학교를 다녔고 조용필과 중학교 동창이었으니 안성기 실제 나이가 50년생 또는 빠른 51년생일 가능성이 있다.[64] http://archive.is/JonOT[65] 여담으로 결혼식 장소는 유현상이 비밀리에 결혼식을 했던 장소로 유명한 봉선사다.[66] 음악에 지나치게 몰두했던 조용필과, 가정에 충실해주길 바랐던 박지숙 간에 의견차이가 있었음.[67] 이당시 청와대에서 결혼식 내내 긴장했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안진현과 앨 고어 부통령이 친분이 있었는데 그를 대신해서 그의 사촌동생이 참석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고라도 났더라면.....[68] 원래는 앨 고어 부통령의 아내도 참석할 예정이었고 그래서 백악관에서 청와대에 정식으로 통보했었다고 한다.[69] 조용필은 자녀를 두지 않았다. 첫번째 결혼에서는 아내와의 불화가 원인으로 보이며, 두번째 결혼에서는 부부만의 삶을 가지기를 원하여 아이를 두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70] 맥콜 CM송으로도 쓰였다.[71] 물론 성공한 노래지만 실제로 2013 최고의 흥행을 거둔 노래라고 하기엔 성적이 아쉬운편이다. 실제로 멜론과 가온에서의 연간차트에서의 성적은 아쉬운편.[72] KBS 가요 톱10에서 '못찾겠다 꾀꼬리'가 10주 연속의 흠좀무한 기록을 세우면서 나타나게 된 제도이다.[73] 월드컵 경기장을 꽉 차게 만드는 공연을 하려면 최소 2~3만명 정도는 불러모으는 티켓 파워를 가져야 하는데, 서울을 제외하면, 인천, 수원 등 수도권 중에서도 서울과 가까운 지역이 아니고서야 이만큼의 관중을 불러모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특히나 지방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야말로 조용필만이 가능한 공연.[74] 다만 이 공연은 국제평화마라톤대회의 축하 행사로서 무료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단독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6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니, 가왕의 위엄을 느끼기엔 충분하다.[75]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해 마련한 유료 콘서트로서, 2010년 5월 28~29일 양일간 총 10만명을 동원하여 대한민국 콘서트 역사상 최단 기간 최다 유료 관객의 기록을 쓴 공연이다.[76] 하루에 5만명씩 2010년 5월 28일~29일 양일간 총 10만명을 동원하였다. 특히나 이 공연의 수익금을 500여명의 소아암 어린이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세브란스병원에 기부하였다.[77] 킬리만자로의 표범으로 탄자니아를 알린 것이 바로 그 계기. 킬리만자로 산은 실제로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 지대에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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