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의 주요 선정 · 수상 · 수훈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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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03년 | |
이름 | 배만금 | |
분야 | 가수 | |
옥관문화훈장(4등급) |
레전드 100 아티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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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60C30><colcolor=#fff> 배호 裵湖 | Bae Ho | |
본명 | 배만금[2] |
출생 | 1942년 4월 24일 |
[[대만| ]][[틀:국기| ]][[틀:국기| ]] 산둥성 지난시[3] | |
사망 | 1971년 11월 7일 (향년 29세) |
가족 | 부친 배국민[4], 모친 김금순[5] |
학위 | 삼성중학교 (중퇴) |
종교 | 개신교 |
데뷔 | 1963년 "굳바이"[6] |
활동 | 1963년 ~ 197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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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개속에 가버린 사람
- 배호의 히트곡 중 하나. 그의 인생을 단편적으로 설명해 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 배호의 히트곡 중 하나. 그의 인생을 단편적으로 설명해 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혼으로 노래한 보컬리스트
엠넷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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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가수.
2. 생애
독립운동을 위해 대한민국에서 산둥성으로 이주한 광복군 제3지대 출신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러다 광복 이후, 3살이 되어 한국으로 귀국했다. 어릴 적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운동 감각도 뛰어나 수영과 야구에도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1955년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사망하고 그 이후 부산에 있는 이모의 집에 내려가 살다가 집안 사정이 더욱 어려워지자 부산 삼성중학교를 중퇴하고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삼촌 김광빈의 집으로 상경하였다. 참고로 "배호"라는 예명도 이 때 김광빈이 지어주었다. 오로지 드럼을 배우겠다는 열정에 사로 잡혀 외삼촌에게 음악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1958년부터 1964년까지 삼촌 김광수와 김광빈의 악단, 미군부대, 캬바레, MBC 악단, 김인배 악단 등에서 드럼을 연주하며 음악활동을 시작했으며, 6~7인조 캄보 밴드인 <배호와 그 악단> 을 결성해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후 김광빈에게서 받은 <굿바이>, <두메산골>[7] 등의 곡을 취입하지만 별다른 히트를 치지 못했고 여전히 가수를 부업으로 하는 드러머 생활을 이어갔다.
그가 부른 초기의 곡들은 트로트가 아닌 재즈나 라틴음악 등이 섞인 스탠더드 팝 계열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1967년 배상태가 작곡한 노래 <돌아가는 삼각지>가 대히트하였고 그는 곧 1960년대 최고의 인기 가수로 자리잡았다. 그 이후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가 울어>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10대 가수로 선정되었다.
그는 1966년부터 앓아온 신장염으로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건강이 회복될 틈도 없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며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1969년 MBC 10대 가수상 시상식 때는 몸이 아파 출연 여부를 타진하다가 간신히 출연해 노래를 불렀는데, 몸이 안 좋아 걸음도 못 걸었을 정도라고 한다. 당시 발성이 제대로 되지 않는 배호를 본 동료 가수들은 울음을 터트렸다고. #
그러다 1971년 라디오 출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맞는데 저체온증으로 감기 몸살에 걸리고, 투병생활로 면역력이 약해 몸살이 악화되면서 끝내는 졸도, 여기에 복막염까지 합병증으로 겹쳐 1971년 11월 7일 눈을 감았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배상태와 함께 퇴원해 미아리에 있던 자택까지 택시를 타고 가던 도중 사망했다고 한다.
대구 공연에서 만난 여성 팬과 약혼까지 했는데, 그를 계속 간호했다고 한다. 결국 배호가 모진 말을 해서라도 임종 직전에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당대의 사회상을 고려하면 팬의 미래(= 새로운 짝을 찾는 것)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고 할 수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최희준, 현인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참석하고 소복을 입은 여인들이 길게 늘어섰으며 장례식에서는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낀 장충단공원> 등 고인을 대표하는 히트곡과 함께 유족들과 동료들, 스승들의 서글픈 흐느낌만이 울려퍼젔다.[8][9]
경기도 양주시 신세계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여기에 어머니와 동생의 묘소까지 함께 있다.[10]
1981년 MBC에서 특집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에 선정되었고 2005년엔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은 국민가수 10인'으로 선정되기도 하는 등 요절한 후에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배호와 함께 일한 음악인이 훗날 흡사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를 발굴하고자 했지만, 음악 실력 및 목소리 활용 능력 측면에서 차이가 있어 포기했다는 일화도 있다. 신장염에 + 복막염까지 앓는 중에도 박자, 음성에 흐트러짐 없이 정확한 음정을 선보인 고인의 그것에 비해 손색이 있었기 때문.[11]
배호의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프랑스에서 재즈바를 운영하는 프랑스인이 소개되었는데, 그가 배호의 곡을 라이브에서 연주하며 배호를 알게 된 외국인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또한 2003년 10월 20일에 대한민국 가요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옥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2003년부터 배호 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2005년 5월 20일에는 소담출판사에서 <배호평전>(김선영 지음)이 출간되었다(노트북 - RISS : 배호평전). 그리고 삼각지의 한 거리가 배호 길로 명명되었다.
3. 대표곡
- 1963년 굳바이[12]
- 1965년 안개속에 가버린 사람
- 1966년 누가 울어
- 1966년 두메산골
- 1966년 황금의 눈
- 1967년 돌아가는 삼각지
- 1967년 비겁한 맹세
- 1967년 안개낀 장충단 공원
- 1968년 능금빛 순정
- 1968년 파도
- 1968년 황토 십리 길
- 1969년 그 이름
- 1969년 당신
- 1969년 만나면 괴로워
- 1970년 막차로 떠난 여자
- 1970년 비 내리는 명동
- 1970년 오늘은 고백한다
- 1970년 비 내리는 경부선
- 1971년 마지막 잎새 - 유작.
- 1971년 영시의 이별 - 유작.[금지곡][14]
4. 가족
- 아버지 배국민 : 대한 광복군 제3지대 대위 출신 독립운동가 (1912년 ~ 1955년 8월 21일)[15]
- 둘째 큰아버지 배경진 : 한국광복군 상사 출신 독립운동가 (1910년 4월 18일 ~ 1948년 12월 30일)
- 삼종숙 배상태 : 배호의 대표곡 여러개를 작곡해준 작곡가. (1939년~ )
- 어머니 김금순 : 1918년 11월 19일 ~ 1995년 9월 9일
5. 여담
돌아가는 삼각지의 배경인 삼각지 로터리 (현재 삼각지역 교차로) 에는 입체 교차로가 있었지만 1967년 12월 26일 개통되었다가 수도권 전철 4호선과 서울 지하철 6호선이 교차하는 대공사에 휘말리면서 방해물로 전락해 결국 1994년 7월 9일 철거되었다.현재는 삼각지역 인근에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 배호길, 배호 동상, 배호 패널 등이 설치되어 있다.
다만 그림이나 패널이나 동상이나 퀄러티가 영 좋지 않다. 그림은 전문가의 솜씨 같지가 않고, 동상은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광이 번쩍번쩍 나는 게 너무 싼 티가 난다. 패널은 사진과 비슷하게 그린다고 그린 것 같은데 오히려 본인보다 못생겼고, 심지어 동상 근처의 벽에 돌아가는 삼각지를 소개하는 짤막한 안내판이 붙어 있는데 이 안내판은 맞춤법이 틀렸다.
그의 창법은 일반적 트로트 가수들과 달리, 스탠더드 팝의 남자가수들이 보여준 중후한 저음을 그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으로 강조하고 절정부에서 애절한 고음을 구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고음이 올라가면 목소리 톤이 바뀐다. 대표적으로 돌아가는 삼각지에서 서글피 찾아왔다~ 부분.
하춘화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배호가 죽기 사흘 전 하춘화가 그를 찾아갔을 때, 배호는 극심한 고통으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너 왔구나" 라고 말한 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고.[16] 하춘화는 배호의 유족들과 살아 생전 가끔 연락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또한 지금은 영상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배호는 살아생전 하춘화와 함께 무대에 선 적도 있다고 한다.
배호의 유가족들도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배호가 가수활동 등을 통해 구입한 주택과 여러 재산이 있었지만 정신질환자였던 여동생과 심장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어머니가 사용하면서 수입이 없지만 지출이 생기다 보니 더 가난 속에 시달려야 했다.[17]
여동생은 아주 짧은 기간동안 가정교사로 활동했었는데 오빠의 사망 뒤 조울증부터 시작되며[18] 오랜기간 동안 여러 질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 2003년 정신질환으로 비롯된 당뇨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19] 그녀를 마지막까지 돌보던 목사에게 웃으며 "목사님 사랑해, 정말 고마워."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동생도 독신이었기 때문에 남은 가족은 없다. 그나마 배호의 5촌 조카들의 혈통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들 또한 생전의 배호와 달리 가요계와는 상관없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전국에 그의 노래비가 7개 세워져 있다. 대표적으로 삼각지에 돌아가는 삼각지의 노래비와 그의 동상이 있고, 배호의 묘지에는 '두메산골'의 노래비가 있다. 또한 경주시와 강릉시에 각각 '마지막 잎새' 와 '파도'의 노래비가, 인천항에 '비내리는 인천항 부두'[20]의 노래비가 있다.
배호와 함께했던 악단의 멤버들은 대부분 생존해 있다. 그들과 팬들에 의해 삼각지역에 세워진 동상 앞에서 정기적으로 배호가요제와 모창 대회를 개최한다.
우승자 중 조명섭처럼 컨셉을 잡으며 활동하는 가수가 있는데, 활동명은 배오 (본명 심우경)다. 영상을 보면 정말 선글라스를 낀 풍채며 창법 등이 배호와 비슷하다.
배우 박근형의 젊은 시절과 상당히 닮았다.[21] 다만 배호가 눈이 좀 더 작기에 특정 구도에서만 닮음이 부각된다.
6. 관련 유튜브 영상
활동 기간도 타 가수에 비해 길지 않았고 영상 기술이 많이 발전하지 못한 시기에 활동했다보니 안타깝게도 그가 실제로 노래를 부르는 영상은 몇 개 밖에 남지 않았다. 팬들에게는 매우 아쉬운 부분.남정임 주연 "여군에 가다" 中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
[1] 1980년까지는 TBC 방송가요대상이라는 이름의 시상식으로 진행됐고 언론통폐합 이후인 1981년부터 KBS 가요대상으로 이름을 바꿔 진행했다.[2] 사망 당시 보도된 기사 가수 裴湖(배호)씨死亡(사망) 참고. 호적명은 배만금이지만, 네이버 등의 포털 사이트에는 배신웅으로 기재된 기록도 있다. 참고로 배호의 묘비명은 배신웅으로 적혀있다.[3]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가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배호를 낳았다.[4] 대한 광복군 제3지대 대위 출신 독립운동가 (1912년 ~ 1955년 8월 21일)[5] 1918년 11월 19일 ~ 1995년 9월 9일[6] 당시에는 "굳바이"로 적었었다. 1986년 외래어 표기법 제정 이전이었기 때문.[7] 이 노래를 처음에는 촌스럽다고 부르기 싫어했으나, 외삼촌 김광빈이 불러보라고 강요하자 결국 불렀다고 한다.[8] 특히 배호가 활동할 당시 트로트는 전반적으로 슬픈 가사와 멜로디를 가진 장르였고, 당연히 장례식은 더욱더 눈물바다가 될 수 밖에 없었다.[9] 당대 최고의 남성 가수 중 한 명이었기에 장례식장에 하얀 소복입은 여성들이 수백미터나 줄을 서 있었다고 한다. 짧지만 활동시기가 겹치는 나훈아가 배호 선배는 정말 좋은 가수였지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참고로 나훈아도 배호의 장례식장에 갔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식장에 들어 가보지도 못했다고 한다.[10] 이 가족묘지에 아버지 배국민과 첫째 동생 천금은 함께하지 못하였다.[11] 나중에 중견가수인 설운도, 록가수였던 그룹 노라조가 무대에서 배호의 노래를 불렀다. 특히 노라조는 <돌아오는 삼각지> 편곡에 공을 들여 고음에 능한 이혁이 개성을 담아 소화하고자 한 모습이 호평받았지만, 이 역시 고인의 중후한 노래를 기억하는 팬분들은 못내 아쉬움을 보였다는 후문.[12] 표기법 현재의 외래어 표기법상 옳은 표기는 '굿바이'지만 취입 때에는 당시의 기준 상 '굳바이'로 표기했다.[금지곡] 발표 후 몇 년 뒤에 영시(오전 12시)는 통금 시간대이기 때문에 영시의 이별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았었다.[14] 지금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통제하는 입장에서는 연예인의, 그것도 당대를 풍미한 최고 인기 가수의 노래에 영향을 받아서 통금시간에 몰래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곤란하긴 했을 것이다. 배호의 인기를 생각해보면 아예 없진 않았을 것이고, 걸리고 나서 괜히 배호 핑계를 대는 사람까지 치면 꽤 있었을 확률이 높다.[15] 일제강점기 시절 경북 의성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인 배달근 (裵達根, 1865년 9월 3일 ~ 1944년 6월 24일)의 아들이다. 슬하 5남 3녀를 두었으며 1983년에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16] 참고로 그때도 그의 나이는 고작 29살이었다 물론 현재와 70년대의 평균수명은 다르지만 그 당시에도 29살은 어린나이었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17] 당시 이들과 20여년 동안 친하게 지냈던 교회 목사의 말에 의하면 사실 소속사와 음반사의 도움으로 인해서 막대한 금액의 저작권료를 전달 받았으나 어머니인 김금순이 이 돈을 친하게 지내던 이웃에게 빚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18] 처음부터 정신질환은 아니었다. 오빠가 투병생활을 시작하자 다니던 대학을 중퇴한뒤 간호에 매달렸으나 나중에 배호가 사망한 뒤부터 조울증이 발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한참뒤인 1995년에 어머니인 김금순씨 까지 사망하자 끝내 정신분열이 심해지고 말았다.[19] 관련기사[20] 원곡은 원로 가수 안다성의 '서울역 광장'이며, 이 곡에 가사만 바꾸어 부른 것이다.[21] 여담으로 박근형 배우는 드라마 대물에서 "조배호"라는 인물의 배역을 맡았던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