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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0:57:01

남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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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수
南仁樹 | Nam In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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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8080> 본명 최창수(崔昌洙) → 강문수 (姜文秀)
출생 1918년 10월 18일
경상남도 진주군
사망 1962년 6월 26일 (향년 43세)[1]
서울특별시
가족 의붓아버지 강영태
어머니 장하방
배우자 김은하
슬하 2남 2녀
자형 손홍팔 (법조인)
종교 불교
데뷔 1936년 '눈물의 해협'

1. 개요2. 생애3. 대표곡4. 여담
4.1. 친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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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서정가요의 황제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 소개 문구

일제강점기~1960년대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가수.

2. 생애

1918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최창수(崔昌洙)이다. 본래는 최씨 집안(진주시 미천면 미곡리)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남인수의 친모 장하방(張下房)이 진주 강씨 문중으로 재가하여 의붓아버지인 강영태(姜永台)의 성을 따라 강문수(姜文秀)로 개명하였다. [2]

다소 불우한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인수의 가족은 미국에 살고있는데 그간 진주의 강씨집안과는 교류가 없었다. 이는 남인수의 어린시절이 힘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강씨집안에서는 추정한다.[3][4].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83997http://www.kny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89 남인수 묘소 근처에 진주시에서 설치한 작은 정자가 있는데 정자의 이름이 '문수정'이다. 남인수의 본명인 '강문수'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학력은 1932년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음이 일제시대 학적부[5]를 통해 확인된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211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36년 시에론 레코드 사의 가수로 선발되어 김상화[7]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남인수(南仁樹)는 가수로 데뷔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1938년 데뷔곡을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 년간 타고난 미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물방아 사랑〉, 〈꼬집힌 풋사랑〉, 〈감격시대〉, 〈항구의 청춘시(靑春詩)〉, 〈울며 헤진 부산항〉, 〈서귀포 칠십리〉, 〈청노새 탄식〉, 〈낙화유수〉, 〈남아일생〉, 〈일가 친척〉,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청춘 무성〉, 〈고향의 그림자〉, 〈고향은 내 사랑〉, 〈이별의 부산정거장〉, 〈청춘 고백〉, 〈추억의 소야곡〉, 〈산유화〉, 〈울리는 경부선〉, 〈무너진 사랑탑〉등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약 1천 곡에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노래였다.

남인수는 음역이 넓고 감정 표현도 풍부하여 가수로서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었다. 목소리가 옹골찬 미성인 데다 음높이와 발음이 정확하여 고음 처리에 강점을 보였다. 남인수의 등장으로 채규엽, 고복수, 강홍식 등 이전 세대 인기 가수의 시대가 저물고 가요계의 새로운 판도를 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3. 대표곡

4. 여담

4.1. 친일 논란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백년설박향림과 함께 부른 〈혈서지원〉을 비롯하여 〈이천오백만 감격〉 〈그대와 나〉 등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강제 동원 가요를 취입함으로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을 올렸다. 다만 이것이 자발적으로 부른 것인지 강압에 의해 부르게 것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친일 경력 때문에 진주시가 주최하는 예술제에 포함 된 남인수 가요제 개최에 관한 것을 어떤 시민 단체가 남인수의 친일 경력을 들어 반대하는 등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다.


[1] 결핵으로 사망했다.[2] 진주 강씨문중에서 남인수의 출생관련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진주시 미천면 미곡리 최씨집안 대종회를 방문하여 확인한 사실이다. 최씨집안에서는 남인수의 출생 관련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최씨문중의 족보에는 장하방의 첫 남편과의 자식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3] 현재 진주 강씨집안과 남인수 전승 보전회에서 진주시 하촌동에 있는 강씨집안 묘지에 남인수의 묘를 이장하여 단장하고 관리하고 있다/[4] 남인수의 묘를 이장할 당시에 강씨집안은 미국에 거주하는 남인수 가족의 허락을 얻었다.[5] 진주 강씨집안에서 봉래초등학교 학적부를 통해 확인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배우 김자옥의 아버지이며 눈물의 해협을 발표할 당시 9살이었다. 눈물의 해협을 비롯한 자작시들을 학교 문집에 발표해 시인으로 일찍 데뷔했다.[8] 김은하가 남인수와 이혼했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9] 다만, 생가의 경우, 후술한 친일 논란과 더불어 생가에 대한 근거가 부족한 이유로 인해서 2013년도에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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