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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8 11:13:17

나미(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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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9a9c6><colcolor=#fff> 나미
羅美 | Nami
파일:가수나미.jpg
본명 김명옥(金明玉)
출생 1956년[1] 11월 11일[2] ([age(1956-11-11)]세)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
(現 경기도 동두천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O형
배우자 최봉호
자녀 장남 최정철(1984년생), 차남 최정환(1996년생)
조카 Heejoo
종교 불교
학력 무학
데뷔 1967년 영화 '엘레지의 여왕'

1. 개요2. 가수 활동3. 대표곡4. 음반5. 수상6. 가요 프로그램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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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매력적인 비음의 댄스여왕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 문구

대한민국가수.

태어나서 현재까지 단 한 번도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무학이며 사실상 태어나면서부터 가수의 길로 뛰어들었다.

2. 가수 활동

1956년생인데 1967년 데뷔라고 분류에 써 있듯 아주 어린 나이에 데뷔했다. 동두천시 출신이고 아버지가 미군 부대 앞에서 레코드 가게를 했기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과 친숙했다고 한다. 아버지 가게를 들락거리는 밴드 마스터들과도 어릴 때부터 안면을 트고 친해졌다는 듯.



위 서술내용은 1989년 KBS2 자니 윤 쇼에 나와서 본인이 들려 준 이야기들이다. 이 영상의 6분 30초경부터 나미의 무대.[3]

밴드 마스터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데뷔 이후에는 여성 5인조 브라스밴드에서 활동도 했다고 하며 종목은 소프라노 색소폰. 위 영상에 보면 송골매의 반주에 맞추어 잠깐 연주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15살이던 1971년경에는 월남전 위문공연(!) 참가 경험도 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호텔과 클럽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고 소공동 조선호텔에 공연하러 갔다가 이탈리아의 뮤지션인 프랑코 로마노를 만나게 되었는데 프랑코 로마노는 나미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하면서 나미를 제대로 된 가수로 만들어줬다. 그래서 나미는 프랑코 로마노의 도움으로 1979년 영원한 친구로 정식으로 데뷔하게 되며 많은 인기를 끌었다.

파일:나미와 머슴아들.jpg

나미와 머슴아들. 프랑코 로마노가 나미를 위해 결성해준 밴드였다. 위 사진에서 나미의 오른쪽, 사진의 왼쪽 아래에 앉아있는 사람이 프랑코 로마노이다.

그러나 자신을 후원해주고 프로듀싱을 해주던 프랑코 로마노가 1980년대 초반에 병으로 사망하면서 나미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고 이로 인해 나미는 큰 반응이 없이 가수 생활을 이어갔다. 박춘석 사단의 태양음향으로 넘어가 '마지막 인사'를 히트시켰으나, 다음 앨범 NAMI 83의 '기다림은 멀어라'의 인기는 짧았다.

그러다가 1984년 '빙글빙글'을 발표하며 완전한 히트가수 반열에 올라가게 된다. 공식적으로도 여러 매체에서 1985년 상반기 한국 최고의 히트곡으로 꼽혔으며, 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노래 1위에 꼽히기도 했다.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했는데 대표적으로 YB가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아들 최정철을 낳았고 나미는 가수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본인의 남동생으로 호적에 올렸다. 이후 1995년에 최봉호와 결혼하면서 호적을 정정했다.

빙글빙글에 뒤이어 1985년에 발표한 보이네, 슬픈 인연으로 1986년까지 활발한 활동으로 전성기를 이어갔다. 보이네와 슬픈 인연이 수록된 나미 4집은 나미의 음악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힌다. '슬픈 인연'은 시간이 흘러 나미의 아들 최정철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는데, 작곡자 명의가 김명곤에서 일본인으로 바뀐 것 때문에 표절설이 나돌았다. 그러나 사실은 1984년 현대 레코드에서 기획한 한일합작 프로젝트에 참가한 일본인 작곡가인 우자키 류도(宇崎竜童)가 나미에게 선물한 곡이다. 이는 한일 양국간 저작권 협정이 체결되기 전이었으므로 일본인 저작물의 한국 내 권리는 인정되지 않아 부득이 한국인 김명곤으로 등록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민해경의 ‘내 인생을 찾아서’, 조용필의 ‘마도요’에서 발견된다. ‘슬픈 인연’은 원래 양국 언어로 제작하려 했으나 어떠한 이유에선지 하시 유키오(橋幸夫)가 부른 일본어 버전이 먼저 발표되는 바람#에 부랴부랴 한국어 가사를 붙여 발표한 것이 나미의 슬픈 인연. 나미의 일본어 버전은 1984년 10월 21일 킹레코드에서#, 한국어 버전은 1985년 5월에 발매됐다.

89년 초에 발표한 정규 6집은 원래 트로트 발라드곡인 미움인지 그리움인지를 타이틀로 밀고 있었다. 그러다 인디언 인형처럼이 반응이 오기 시작하자, 1990년 DJ 신철, DJ 이정효와 함께 나미와 붐붐을 결성하여 한국 최초로 DJ Remix Single을 정식 발매하며 '인디언 인형처럼'을 히트시켰다. 이 때 나미는 바가지 머리를 한 댄서 두 명을 대동하여 이들을 '붐붐'이라 불렀고 활동명도 나미와 붐붐이었다.[4] 무대에서 토끼춤을 추던 나미는 결국 가요톱텐에서 90년 8월 4째주부터 4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아깝게 골든컵 달성에는 실패하게 된다. 이때 9주 연속 2위도 달성했는데 한창 활동할 시기에 5주간 KBS 노조 파업으로 결방, 상반기 결산이 끼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아깝게 골든컵을 놓쳤다고 할 수 있다. 이때가 한국 나이로 34살이니 요즘 가수들에게도 쉽지 않은데 DJ Remix로 완전히 흑인음악을 도입하고 토끼춤을 추며 가요계를 휩쓸고 다녔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미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참고로 인디언 인형처럼은 핑클과 조규찬이 리메이크 했었고, 데이브레이크도 커버하기도 했다.

잘 나가다가 어느 순간 활동을 접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며 의아해 했었지만, 사실은 그 전에 활동할 때 이미 불륜에 의한 사실혼 관계를 맺었고 아이가 있는 것도 숨기고 활동했다. 인디언 인형처럼을 부를 때 이미 애가 국민학생이었다. 나미의 불륜남인 최봉호 삼호기획 대표는 드라마 빛과 그림자의 주인공인 강기태의 모델이 된 연예계 실력자였는데#, 나미와 연령차가 스무살이 나고 서로 사귀기 전에 부인과 별거 중인 상태였으나 어쨌든 서류상으로는 유부남이었기에 나미와 비밀리에 동거하여 아이까지 낳았음에도 철저히 숨겨 왔던 것. 이걸 한창 잘 숨기고 있었는데 최봉호가 1989년에 조직폭력배를 시켜 주류업자를 살해하는 바람에 이 사실이 들통나버린 것이며 #[5] 더군다나 과도한 가수 활동으로 1990년대부터 목 상태가 나빠진 것도 또다른 원인으로 추정된다. 여담이지만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 나미를 모델로 한 인물이 손담비가 연기한 유채영이었다. 다만 현실과는 달리 유채영은 강기태와 맺어지지 않았다. 참고로 최봉호는 이 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받고 구속 수감되었으나 1995년에 가석방 되었다. 나미는 가수에서 은퇴하고 난 뒤 부터 최봉호가 석방되는 1995년까지 최봉호의 옥바라지를 했고 결국 1995년 최봉호가 석방되자 최봉호는 전 아내와 이혼 후 나미와 정식으로 결혼했으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최정철 역시 호적을 정정하여 최봉호와 나미의 아들로 정식 입적했다.

결국 92년 7집 앨범을 발매하면서 매우 오랜 시간 동안 활동은 정지하게 된다.[6] 그후 놀랍게도 92년 앨범의 수록곡인 가까이 하고 싶은 그대가 복고 시티팝 바람이 불면서 한국 최고의 시티팝 중 하나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가 활동기라 30대 이하 연령층에서는 '나미'라는 이름을 들으면 원피스리그 오브 레전드 등 서브컬처를 떠올리는 경우가 더 많다. 일단 보컬역량을 중시하는 게 90년대와 00년대 한국의 풍조였다. 당시에는 일단 음역대가 짱짱하게 높이 올라가고 성량이 빵빵해야 고평가를 받았는데 나미의 스타일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나미는 당시 기준으로 흑인음악 영향도 많이 받았는데 현재와는 달리 나미의 활동기인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흑인음악은 음악인들 사이에서 특정 연탄 상표를 멸칭으로 삼아 불릴 만큼 고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나미는 끝마무리가 좋지 않았고 이후 사라지다시피 했기 때문에 잘 언급도 되지 않았던 것이 크다. 또한 원피스와 롤이 각각 00년대 만화계의 최고 인기작 & 10년대 게임계의 최고 인기작이다보니 그런 것도 있다.

그래도 80년대의 주요 여가수들 중에 나미가 가장 현대적인 여가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세대들도 '빙글빙글' 정도는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백지영티아라가 '빙글빙글'을 리메이크하고 걸스데이가 '반짝반짝'으로 재해석, 나가수시즌 1에서 YB가 편곡해서 부르기도 했다. 마이너하게는 일렉트로니카계열 그룹 하우스 룰즈 멤버인 서로의 1집 'Sentimental'에 일렉트로니카로 편곡되어 수록되기도 했다. 심지어 초대박 영화 써니에서도 그 시절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당당히 수록되었다.

나미의 리즈시절과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이 많기에 재해석 활동이 활발해진 거라고 카더라.[7] 그리고 개그 콘서트나미와 붕붕과 선보이고 핑클이 1999년에 리메이크한 '인디안 인형처럼' 역시 젊은 세대들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그리고 1990년대 최고의 혼성그룹 룰라의 의상 컨셉을 나미가 지정해줬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패셔니스타이기도 했다.

2013년 11월 11일, 신곡 'Voyeur'를 들고 컴백했다. 소녀시대-태티서의 'Twinkle', f(x)의 'Electric Shock', EXO의 '으르렁' 등을 만든 잼팩토리에 소속된 독일 작곡가들이 만든 유럽식 일렉트로니카. 뮤직비디오는 마돈나 등과 작업한 마이클 파이저가 작업에 참여하였다는데 여러 모로 충공깽. '보여'라는 제목은 영어 단어 'voyeur'의 뜻도 있지만, 나미의 히트곡 '보이네'와의 연관성을 염두에 둔 듯하다.

장남 최정철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가수의 길을 걷고 있다. 2002년에 데뷔했으며 이상민이 프로듀싱한 5인조 보이그룹 Q.O.Q로 활동했으나 그 해에 멤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팀이 와해되자 2003년에 솔로로 전향했다.

차남 최정환은 형인 최정철보다 12년 연하이며 나미가 40살이 넘어서 낳은 늦둥이이다.#[8]

2010년 뮤지컬 배우 최낙희가 나미를 새어머니로 받아들였는데, 최낙희는 최봉호의 전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

여담으로 나미의 유튜브 채널도 있다.

3. 대표곡

영원한 친구 (1979) (1992년 8월 22일 KBS 가요무대)
빙글빙글 (1984) (1985년 12월 30일 KBS 가요대상)
슬픈 인연 (1985) (1986년 12월 31일 MBC 10대 가수 가요제)
보이네 (1985) (1986년 12월 30일 KBS 가요대상)
사랑이란 묘한거야 (1987) (1987년 4월 11일 KBS 쇼특급)
인디안 인형처럼 (1989) (1990년 12월 30일 KBS 가요톱10)

4. 음반

5. 수상

6. 가요 프로그램 1위

총 9회 1위
<rowcolor=#FFFFFF> 날짜 방송명 곡명 비고
1985년
3월 3일 KBS 가요톱텐 빙글빙글
(5회)
3월 10일
3월 17일
3월 24일
3월 31일 골든컵
5주 연속
1990년
8월 26일 KBS 가요톱텐 인디언 인형처럼
(4회)
9월 2일
9월 9일
9월 16일 4주 연속


[1] 프로필 상 1957년생.[2] 음력 10월 9일[3] 백밴드가 송골매다.[4] 이 '붐붐' 유닛은 나미가 무대활동을 접은 이후에도 90년대 내내 DJ판과 가요판을 오가며 꾸준히 흥행했는데, DJ 신철철이와 미애라는 듀오를 결성하여 다시 한 번 가요계 정상권에 올랐었다.[5] 정확히는 주류업자가 나이트클럽 납품 연장을 하지 않고 다른 업자를 선임한 최봉호에게 앙심을 품었고, 최봉호의 업장에 조폭들이 폭행을 일삼고 그 과정에서 최봉호도 폭행을 당하자 빡친 최봉호가 다른 조폭을 시켜 살해해버린 것이다. 임화수가 활개치던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연예계 사업은 이처름 조직폭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6] 1996년 '설득'을 타이틀로 한 싱글이 나왔고, TV에도 드문드문 출연했으나 둘째 출산이 임박해 급히 활동을 접었다.[7] 누가 이런 장르도 했네 저런 장르도 했네 이런저런 얘기가 많지만 수박 겉핥기 정도만 했던 것을 홍보하려고 하는 소리고, 당시 인기 여가수들 중에서는 나미가 가장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다.[8] 남편인 최봉호 같은 경우엔 더 심하다. 완전한 늦둥이로 볼수가 있는게 애초에 최봉호는 나미보다 20살 연상이라 장남최정철을 48살에 얻었고, 막내아들을 육순에 얻었다.[9] 참고로 CBS 음악FM 행복한 동행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당시 진행자였던 오미희가 진행했을 때 원곡보다 지누션 리메이크 판을 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