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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8년 |
이름 | 남진 |
분야 | 가수 |
은관문화훈장(2등급) | |
연도 | 2005년 |
이름 | 남진 |
분야 | 가수 |
보관문화훈장(3등급) |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 |||||||||
2004년 | ||||||||||
※ 2004년 한국갤럽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 ||||||||||
1위 | 공동 2위 | 4위 | 5위 | |||||||
이미자 | 나훈아 | 비 | 조용필 | 현철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태진아 | 신승훈 | 송대관 | 김건모 | 설운도 | ||||||
2009년 | ||||||||||
※ 2009년 한국갤럽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장윤정 | BIGBANG | 태진아 | 이미자 | 소녀시대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6위 | 7위 | 공동 8위 | 공동 10위 | ||||||
나훈아 | 조용필 | 현철 | 손담비 | 이승철 | 송대관 | }}} | ||||
2014년 | ||||||||||
※ 2014년 한국갤럽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조용필 | 이선희 | 장윤정 | 아이유 | 태진아 | ||||||
6위 | 공동 7위 | 9위 | 10위 | |||||||
EXO | 이승철 | 이미자 | 나훈아 | 소녀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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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한국갤럽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방탄소년단 | 장윤정 | 나훈아 | 아이유 | 조용필 | ||||||
6위 | 공동 7위 | 9위 | 공동 10위 | |||||||
이선희 | 태진아 | 이미자 | 이승철 | 김연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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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세 | 홍진영 | TWICE | 박효신 | 남진 | ||||||
16위 | 17위 | 공동 18위 | ||||||||
임창정 | 송가인 | 김건모 | 설운도 | 진성 | ||||||
21위 | 공동 22위 | |||||||||
성시경 | 거미 | BLACKPINK | 잔나비 | |||||||
2024년 | ||||||||||
※ 2024년 한국갤럽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수'를 선정.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임영웅 | 아이유 | 방탄소년단 | 나훈아 | NewJeans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장윤정 | 진성 | 영탁 | 송가인 | BLACKPINK | ||||||
11위 | 12위 | 13위 | 공동 14위 | |||||||
이찬원 | 성시경 | 김연자 | 김호중 | 조용필 | ||||||
16위 | 17위 | 공동 18위 | 공동 20위 | |||||||
이효리 | 린 | 전유진 | IVE | 이문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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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 이승철 | 장민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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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83593><colcolor=#fff> 남진 南珍|Nam Jin | |
본명 | 김남진 (金南鎭, Kim Nam Jin) |
출생 | 1945년 9월 27일 ([age(1945-09-27)]세) |
전라남도 목포부 창평정 7-3번지[2] (現 전라남도 목포시 창평동) | |
거주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김해 김씨 (金海 金氏)[3] |
신체 | 172cm[4] |
가족 | 아버지 김문옥, 어머니 장기순 형 김상진, 김응진, 남동생 김익진 딸 3명, 아들 |
학력 | 목포북교초등학교 (졸업) 목포중학교 (졸업) 목포고등학교 (졸업) 서라벌예술대학 (중퇴)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연극영화학 / 학사) |
종교 | 개신교(예장합동)[5] |
병역 | 대한민국 해병대 제2여단 병장 만기전역 (병 204기) |
참전 | 베트남 전쟁[6] |
데뷔 | 1965년 서울 플레이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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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0~70년대의 슈퍼스타
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대한민국의 가수로, 오빠부대의 원조격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Mnet 레전드 아티스트 100에서의 소개문구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으로서 라이벌인 나훈아와 함께 한 시대를 양분했던 연예계의 대선배이다.
1965년 데뷔해 2024년 기준 데뷔 59년차이며, 70대 후반인 현재도 현역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의 산증인이자 레전드라고 할 수 있다.
2. 특징
원래 스탠다드 팝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록큰롤 창법을 선호했고, 선이 굵은 저음의 남자다운 보이스를 가지고 있다.1990년대 두번째 컴백 이후로는 나이 등의 이유로 트로트 곡 위주로만 발표했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최전성기에 트로트와 로커빌리 로큰롤을 오고 가며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다.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를 깊게 의식하여 엘비스를 벤치마킹한 것도 유명하다. 그가 부르는 트로트는 다른 트로트 가수들에게서 나오는 뽕끼가 덜해서 지금 들어도 중후하고 세련된 느낌이 든다.
현재는 가수로서만 기억되지만, 원래는 영화배우를 지망한 연극영화과 출신 미남이었고, 실제로 전성기에는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한 경력이 있다.[7]
3. 활동
전라남도 목포에서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의 늦둥이[8] 겸 차남으로 태어난 남진은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연극과 음악에 심취했다.남진의 집안은 전쟁 직후인 1950년대에 집에 자가용이 있었을 정도로 목포에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는데,[9] 학생 때부터 닐 세다카나 폴 앵카 등의 팝송을 즐겨 불렀던 남진은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레스토랑에서 팝송을 불러 밴드마스터에게 가수 제의를 받게 된다. 비록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당시 남진은 영화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상경한 상태였다.
앞서 레스토랑의 밴드 마스터로부터 당시 최고 인기가수 남일해의 곡을 만들었던 작곡가 한동훈을 소개받고, 그로부터 자신의 음악학원에 등록하고 연습생 생활을 할 것을 제의받는다. 영화배우의 길을 꿈꾸어 왔지만, 당시 순전히 학원에 있던 여학생이 예뻐서 등록하고, 연습생 겸 연애 생활을 시작한다. 불과 몇개월 후인 1965년 드디어 첫 음반을 레코딩하게 된다. 데뷔곡은 한동훈이 작곡한 '서울 푸레이보이'라는 스탠다드 팝을 연상시키는 곡이었지만, 철저하게 폭망하고 실망한 그는 낙향했다.
다시 작곡가 한동훈이 당시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전속가수 제안을 하고, 두 번째 음반을 발표했으며, 첫 번째 음반과 달리 방송에도 제법 타는 등 히트 바로 직전까지 갔지만, 당시 노래 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국가에 의해 금지곡 처분이 되었다. 금지곡이 된 타이틀 곡명은 '연애 0번지'.
두 번째 음반도 실패를 하자, 다시 고향 목포로 낙향하여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의 어머니가 두 번째 앨범의 수록된 다른 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트로트 곡을 밀면서 이 곡으로 다시 도전할 것을 권유했다. 이 곡은 2집 레코딩 중 작곡가인 김영광이 남진에게 부르게 했으나, 남진이 트로트를 부르기 창피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곡이었는데, 이에 김영광이 그래도 노래가 아까우니 내가 불러서 곁다리로 음반 맨 끝에 넣겠다고 하였으나, 그가 사정이 생겨 녹음 시간에 오지 못하게 됐다. 어쩔 수 없이 곡 수는 채워야 해서 내키지는 않지만 녹음을 한 후, 앨범 맨 끝에 집어 넣었는데, 이곡이 그야말로 대히트를 치면서 남진이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게 된다.
트로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트로트 곡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이듬해인 1966년 정두수 작사 박춘석이 작곡한 '가슴아프게'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그 해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하였다. 이때부터 남진은 영화배우로도 대활약하게 되며, 가요계와 영화계를 넘나드는 빅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발매된 로커빌리 스타일의 불멸의 히트곡인 '마음이 고와야지'는 그를 단순히 트로트 가수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가요계의 독보적인 캐릭터로 인정받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잘생긴 얼굴,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방한 창법과 무대 액션에 당시의 소녀 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이는 그 후 '그대여 변치 마오', '님과함께' 같은 대표곡으로 이어졌다.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인 1968년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이후 베트남전에도 파병되었다.# 남진이 무릎팍도사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원래 1년 동안 파병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귀국한 후 베트남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대한남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여단장에게 부탁해서 2년간 파병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수많은 동료들의 전사를 겪으면서 사람은 죽으면 다 똑같다라는 사실이 와 닿았다고 한다.
언론에 나온 월남전에 파병된 남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파병초기에 촬영된 것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날씨가 너무 더워서 나중에는 군복을 제대로 입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남진의 인터뷰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몇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고 한다. #[10]
그런데, 남진이 월남전에 파병된 실제 이유는, 해병대 입대 후 군무를 완전히 이탈하여 자기 집에 돌아가 평소처럼 집에서 지내며, 연예활동을 계속 하는 등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군복무위반 비리를 저지르다가 군 수사당국에게 들통나 그로 인한 징계로 베트남에 강제로 보내진 것이었다고 당시에는 보도되었다. 남진 외에도 진송남, 박일남 등 당시 해병대 소속이던 10여 명의 연예인들이 해병대 간부들의 비호 아래 모두 그러한 혜택을 보았던 조직적인 비리였다. 당시 그 사건을 보도한 뉴스 기사 링크들. 기사1, 기사2 44년뒤에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저 사건에서 해병대 복무 중에도 집에서 지내고, 왔다갔다 하며 자유롭게 연예활동을 한 것은 남진 등 해당 연예인들이 군율을 어기는 잘못이 아니라 해병대 측의 약속과 비호에 따른 행위였을 뿐이었다.[11] 애초에 해병대가 군복무 중에도 연예계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하고, 그 조건으로 스타들의 "해병대 연예대" 입단을 추진하여 해병대 연예부대의 구성원을 유명스타들로 빵빵하게 채운 것이었다. 즉, 유명 연예인들을 육해공이 아닌 해병대로 데리고 오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과 대우를 걸고 스카웃한 것이었다.
근데 모 신문사 회장이 자기 딸의 생일파티에 당시 해병대 일병이던 남진을 포함한 연예병사 5명을 초청했지만, 군인 신분에 사적인 초대이기에 거절했고, 이에 신문기사를 통해 군복무 중에도 사회에서 연예계 활동을 계속 해왔던 것을 폭로하는 보복성 기사를 보도한 것이었다고 박일남이 티비쇼에서 밝혔다. 해병대 측이 당초 약속하여 보장한 바에 따른 연예인 활동이었을 뿐이었다는 원인 내용은 쑥 빼버리고 자유로운 사적생활과 연예계 활동을 했다는 결과만 폭로한 보도가 나가서 남진 등의 연예인과 해병대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해병대 고위간부들이 국내 연예활동을 보장했던 당초의 약속을 뒤집고 베트남으로 파병시켜버린 것이었다.
최고의 순간에 군대행을 택하고,[12] 해병대의 모습으로 월남전까지 다녀 온 그는 묘하게도 그가 벤치마킹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행보와도 매우 닮아 있다. 엘비스는 1950년대 후반 로큰롤 음악이 기성 사회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몰락 위기에 빠지자,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13] 이미지 쇄신을 노린 바 있었는데, 이후 G.I. Blues라는 곡과 동명의 영화를 발표하면서 "성실한 미국인 젊은이"의 이미지로 거듭났다. 남진 역시 엘비스의 G.I. Blues를 한국어로 번안하여 불렀고, 1973년 하와이 공연 때 엘비스가 입었던 점프수트를 매니저가 직접 미국까지 가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매니저를 직접 만나 구해온 것도 유명하다.
1971년, 군에서 제대하고 국내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영혼의 파트너 박춘석이 라이벌 나훈아와 손을 잡고 '물레방아 도는데' 등의 히트곡을 쏟아내는 중이라 이쪽과의 협력은 접고 다른 파트너(남국인)를 찾아 곡을 받고 다시 정상의 반열에 서게 되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남진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님과 함께"였다. 제대 후에 더욱 폭발적인 사랑을 받게 된 그는 국내 가수 최초로 서울 시민회관에서 귀국 기념 공연을 열었고, 컴백 4개월만에 TBC 남자가수상과 MBC 최고 가수상에 오른다.
언론은 그의 컴백과 더불어 당시 촉망받는 신인인 나훈아와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초기 3년간은 남진이 내리 3연속 가수상을 타며 나훈아를 완전히 압도했다.
이후 1972년 '나훈아 피습사건'이라는 큰 사건이 터졌다. 이때 나훈아 피습사건의 범인으로 낙인이 찍혔고, 루머가 당시엔 급속도로 퍼졌다. 피습 당시보도 당시 기사
이후 라디오 스타 622회에서 밝혔지만, 이어 남진은 "몇십 년 지나서 안 사실이다. 신성일 선배한테 그 괴한이 제일 먼저 갔더라. 그 다음으로 저한테 왔다. 아침에 인기척에 눈을 떴는데 머리맡에 모르는 얼굴이 있었다"면서 괴한이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남진은 이를 거부했다면서 "(괴한이) 당신 라이벌을 해치면 돈을 줄 거냐고 말을 하더라. 정상이 아니구나 싶었다"고 덧붙여 좌중을 경악케 했다.
이어 남진은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가 사고가 난 거다. 나중에 저희 목포 집에 와서 방화도 하고 그랬다. 어머니가 계신 집이었다. 지금도 마음이 아픈 게,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 초상화가 탄 게 지금도 성질이 난다"고 고백해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안겼다.#
1976년에 윤복희와 결혼하여 화제를 끌었지만, 1979년 이혼을 하고[14] 1980년대 신군부의 등장으로 조직적으로 탄압받으며, 미국으로 가게 된다. 조용필 등 후진들이 치고 올라온 탓도 있다...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거는 한참 나중 일이고, 김대중과 친분이 있는 집안 자손이라는 이유로 아예 방송 출연을 금지시킨 탓이 훨씬 크다. 김대중의 학창시절에 남진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목포일보에서 사장상을 받았고, 그 외에도 남진 아버지 덕[15]을 많이 봤다고 한다. 목포에 내려가면 항상 남진의 부친의 집에 묵었다고... 1990년대에 국내로 다시 복귀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에겐 가수로만 알려져서인지 오랜만에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집창촌 부근 성당의 욕쟁이 주임신부 역할로 출연하자 "남진이 영화에도 나온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이미 전성기이던 1970년대에 히트곡의 이름을 딴 님과 함께 등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가수 겸 배우라고 해도 문제가 없다.[16] 잘 생긴 얼굴과 큰 인기 덕에 영화에도 나온 거고 배우로서는 연기가 좋다고 할 수 없어 별다른 성과가 없긴 하였지만. 나훈아도 인기빨(..)로 연기를 몇 번 한 적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어머님 생전에(1973년)'같은 영화에 나란히 출연하기도 했다.
1989년에 조폭에게 칼로 허벅지를 찔리는 큰 부상을 입었으며, 지금도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고 한다.## 허벅지에는 큰 동맥이 지나가는 곳이라, 조금만 옆으로 맞았으면 그 자리에서 사망할 수도 있었다고.
21세기에도 방송에서 다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에 낸 "둥지"가 대표적. "신비주의" 컨셉의 나훈아와 대비된다. 2008년 이후 나훈아가 모종의 사건 이후 활동을 중단하면서 최근 더욱 두드러진다. 2009년에는 장윤정과 함께 남녀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듀엣 가요 "당신이 좋아"를 발표하면서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본업인 가수로서 각 지방 공연은 2018년 현재에도 쉬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으며, 곧잘 매진이 되고 있다. [17]
2023년 1월 28일 배구선수 김연경, 국민의힘 김기현 의원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악성 댓글들이 달리자, 김연경 선수와는 같은 고향 출신이라 만난 것이며 김기현 의원과는 모르는 사이라고 해명했다.# 사실 남진은 워낙에 지역과 직업을 가리지 않고 인맥이 폭넓은 연예계 대표 마당발인 만큼, 다양한 정치인 혹은 정치인 지망생들과도 친분이 있고 그만큼 지원유세나 사진 촬영 요청을 많이 받는다. 그가 지원유세를 다닌 인물들을 쭉 보면 안민석, 성일종, 박주선 등 당을 전혀 가리지 않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4. 음반 목록
- 1965년 1집 《서울 플레이보이/ 연애 0번지》
- 1967년 2집 《가슴 아프게/ 울려고 내가 왔나》
- 1971년 3집 《마음이 약해서/ 지금은 헤어져도》
- 1972년 4집 《아랫마을 이쁜이/ 목화 아가씨/님과 함께》
- 1973년 5집 《그대여 변치마오/ 그 소녀 이슬비》
- 1976년 6집 《떠나면 되지/ 어머님》
- 1976년 7집 《어머님 사랑/ 너와는 바꿀 수 없어/ 우수》
- 1976년 8집 《너의 고운 마음씨/ 오늘은 기분이 좋은 가봐》
- 1977년 9집 《형/ 기다려야지》
- 1979년 10집 《사나이기에/ 만나야해》
- 1982년 11집 《빈잔/ 정 때문에》
- 1984년 12집 《사나이라면/ 화끈해야죠》
- 1987년 13집 《내가 나를/ 가시려나 그대여》
- 1992년 14집 《바다/ 사랑은 어디에》
- 2000년 15집 《둥지/ 고개숙인 남자》
- 2002년 16집 《모르리/ 옛사랑》
- 2005년 17집 《저리가/ 사랑의 퍼레이드》
- 2008년 18집 《나야 나/ 바람의 여인》
- 2009년 19집 《님 오신 목포항/ 내 마음 모르리라》
- 2012년 20집 《뽀뽀/ 이력서》
5. 대표곡
- 1966년 울려고 내가 왔나
- 1967년 가슴 아프게
- 1967년 너와 나
- 1967년 마음이 고와야지
- 1967년 우수
-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
- 1972년 님과 함께
- 1972년 목화 아가씨
- 1972년 젊은 초원
- 1973년 그대여 변치 마오
- 1974년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
- 1975년 김포가도
- 1982년 빈 잔
- 1993년 내 영혼의 히로인
- 1999년 둥지
- 2002년 모르리
- 2008년 나야 나
- 2009년 당신이 좋아(with 장윤정)
- 2012년 이력서
- 2014년 상사화
- 2014년 파트너
- 2016년 사치기 사치기(with 윤수현)
- 2016년 너는 나만믿고 따라와
- 2018년 남자다잉
- 2020년 오빠 아직 살아있다
6. TV 출연
6.1. 광고
- 쏘팔 코사놀(2020년) - 전립선영양제로 MBC 라디오스타에서 지상렬이 언급 하기도 했다.
- 사상역 경보센트리안(2021년)
7. 여담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인기가수 나훈아와는 대한민국 모든 가요계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수 없는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둘도 없는 양대산맥 라이벌 관계 이다. 나훈아가 시골의 정서나 고향의 향수를 노래했다면, 남진은 철저히 도시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나 도시의 느낌을 다룬 노래로 유명했다. 또 나훈아는 선원인 아버지를 둔 부산의 평범한 집안이었고 남진은 목포의 부유한 집안이라는 출신의 차이도 있다. 그런데 나훈아 역시 꽤 유복한 편이었다고 한다. 1950년대 유년기였음에도 집에 축음기가 존재했다고. 사실 선원이라고 하면 '마도로스'라고 해서 외화 벌어오는 엘리트 노동자 취급이었던 때가 저 시절이다. 다만 최상류층인 지역 부호 집안의 늦둥이 남진에 비하면 '비교적' 평범한 수준인 건 맞다. 오죽하면 신문에서도 두 사람을 대놓고 비교하는 칼럼을 시리즈로 실으면서 두 가수 팬덤 간의 견제와 싸움을 부추겼다.[18] 그런데 이런 남진-나훈아 대결구도에 대해 남진 본인은 언짢은 반응을 보인다. 유재석이 MBC 토크쇼 놀러와에서 남진에게 이 얘기를 꺼냈다가 면박(?)을 당한 적도 있다. 남진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워딩은 방송용 치고는 강한 것이어서 유재석도 순간 당황하는 게 보인다. 그리고 그 날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남진은 녹화 도중에 일정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저게 진짜 스케줄 때문인지 아니면 자리를 박차고 나간 건지는 편집점 때문에 알 수 없는 부분이지만.전체적으로 남진은 저음의 목소리에 수려한 외모를 가진 타고난 슈퍼스타로서 높은 대중성으로 가요대상을 매년 수상했고, 나훈아는 투박한 외모에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가졌다. 지금은 라이벌로 비교되는 2명이지만, 남진이 인지도를 얻게 된 것은 나훈아보다는 한참 앞서고, 라이벌이라고 불리게 된 건 1970년대에 들어서이다. 이후의 방송 활동도 방향이 차이가 많이 났다. 나훈아는 콘서트 같은 류의 특집방송을 제외하면 방송에 거의 나오는 일이 없다. 평소 행적도 신비주의 컨셉을 강하게 유지하면서, "음악을 들으려면 표를 사서 내 공연에 와라"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반면 남진은 음악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도 자주 나오는 등 각종 방송에 적극적으로 출연했고, 신비주의보다는 익숙하고 편안한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다.
이는 두 사람의 가수로서의 철학이 정반대이기 때문인데, 나훈아가 '스타는 저 하늘의 별과 같아야 한다' '스타는 30% 안티가 있어야 한다' 등 말 그대로 우상으로서 본인을 포지셔닝 하고, 행사나 방송 섭외에는 고의적으로 본인의 몸값을 매우 높게 부르며 출연 횟수 자체도 상당히 제한적으로 자신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기회의 희소성을 매우 높였다. 나훈아 콘서트의 인기가 매우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남진의 콘서트 역시 매번 매진을 기록하며 인기가 높지만, 나훈아 콘서트는 예매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으로 대단히 어렵다.
반면 남진은 '대중 가수는 대중과 호흡해야 한다'며 방송 출연이나 공연 섭외도 개의치 않고 다 나섰다. 이를테면 "내 음악이 듣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방법이야 어찌 되었건 내가 대중을 찾아가면 된다"는 태도이다. 까마득하게 젊은 후배들과 협업해서 신곡을 내거나 토크쇼와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최대한 많이 노래를 부르고, 최대한 많이 들리게 활동하고 있다. 외모 이미지도 이러한 성향과 맞물려서 변한 부분도 있다. 남진은 대중성을 지향하면서 외모도 친근하고 수더분한 이미지가 된 반면 나훈아는 신비주의 이미지로 카리스마 있고 단단한 외향의 이미지로 변하였다. 즉 결론을 내리면 누가 맞고 틀린 게 아니라 오로지 지향점이 다른 것. 아이돌 가요계에 비유하면 코어팬덤형 아이돌과 대중형 아이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 파병 당시, 어머니가 보내 주신 파김치(담그자마자 부쳤는데도 오는 도중에 다 쉬어버린...)를 동료들과 싸워가며 잘 때도 끌어안고 아껴 먹었다고 한다. 평생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다시 먹어본 일이 없었다고...
영화 국제시장에서 아이돌그룹 동방신기의 멤버 유노윤호가 1970년대의 아이콘이자, 당대의 아이돌 스타였던 가수 남진의 베트남전의 참전 시절을 연기했다. 작중에서 전투기술 면에서 상당한 베테랑인 것으로 나온다. 사실 작중 시대상으로 배경은 이미 주월한국군이 철수한 이후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재현 오류지만, 어쨌거나 유노윤호의 남진 연기는 능숙한 전라도 사투리와 털털하고 정감있는 캐릭터로 영화에 활력을 더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으로 파견을 간 주인공들을 위기에서 구해주는데, 작 중 주인공 윤덕수(황정민 분)의 생명의 은인[19]이라 현재 장면에서 나훈아 팬인 부인한테 "가수는 남진!"이라고 주장하며 언쟁한다. 덤으로 여동생 끝순이(김슬기 분)의 남편이 나훈아랑 닮아서 더욱 질색하는 듯...
한때 콘서트 홍보 포스터의 영어 문구때문에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대한가수협회의 초대 협회장을 맡은 적이 있으며, 벤츠 S63AMG 쿠페의 오너다. 메르세데스-벤츠를 워낙 좋아해서 S63AMG 말고도 마이바흐와 G바겐 등 6~7대의 벤츠 차량을 더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2016년 정영진 최욱의 불금쇼에 출연하여, 그야말로 레전드 방송을 찍었다. 구수한 사투리와 더불어 조영남(45년생 동갑), 김흥국(59년생 한참 연하)등 연예계의 거목들을 거침 없이 '그새끼'라고 부르는 등 그야말로 술자리에서 들을만한 꿀잼썰들이 폭발한 에피소드였다. 가수 데뷔 55주년을 기념해서 수익금을 전액 기부했다고 한다.
2011년 9월 12일 추석 특집 프로그램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 출연해 심수봉의 '비나리'를 불러 1위를 차지했다.
2008년 '나야 나'라는 곡을 발표했었는데, 남진의 까마득한 후배들인 Wanna One이 프로듀스 101에서 나야 나 (PICK ME)라는 동명의 곡을 발표해서 뒤늦게 재조명이 되기도 했다. 이전에도 2012년 설날 특집 나는 트로트 가수다에서 문주란이 이 노래를 불러 1위를 했으며, 이후 2018년 나 혼자 산다에서 사이먼 도미닉이, 또 2020년 미스터트롯에서 김수찬이 이 노래를 불러 제대로 역주행을 했다. 새로운 대표곡 중 하나로 꼽힐 정도.
전남의 정치인 집안 출신이지만, 본인은 정치색이 그리 강하지 않다. 단지 친분만 있다면 여야 정치인 홍보에 다 참석하는 편. 그래도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던 것으로, 고인의 사후인 2009년에 고인에게 바치는 추모 앨범을 발표했다.
보이스트롯, 트롯신이 떴다2 - 라스트 찬스, 트롯 전국체전 등의 트로트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참가자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점수도 상당히 후하게 주는 등 심사위원들 중 독보적으로 관대한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최고참인 만큼 가장 깐깐할 거라는 편견을 깨는 인물이다. 2021년 방영된 보이스킹에서 기존 트로트 업계에서 사도로 불렸던 이박사에 대해 천재라고 극찬할 정도.
2015년에 그의 고향인 전라남도 목포에 있는 전통시장인 자유시장에 야시장이 개설되었는데, 그의 이름을 딴 남진야시장이다. 시장 입구 여러 곳에 노래하는 남진의 모습을 모형물로 만든 조각상이 있다.
2021년 12월 14일, 신발 벗고 돌싱포맨에 조영남, 진성, 설운도와 함께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2022년 8월 유튜브에서 교통사고로 대수술을 받아 혼수상태라는 등의 가짜뉴스가 돌아다니는 상황이다.[20]
2022년 9월 21일과 28일에 MBN의 특집방송 우리들의 남진에 출연한다.
2024년 9월 4일에는 남진의 가수 활동을 회고한 영화 오빠, 남진이 개봉했다.
[1] 1980년까지는 TBC 방송가요대상이라는 이름의 시상식으로 진행됐고 언론통폐합 이후인 1981년부터 KBS 가요대상으로 이름을 바꿔 진행했다.[2] 집 앞에 '남진 생가'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3] 삼현파 21대손, 수로 69세손이다.[4] 네이버 프로필 기준[5] 새에덴교회 장로.[6] 베트남 참전을 자청하여 파월 해병 2여단 청룡부대로 배속되었다. 원래 1년간 가기로 되어있었지만, 수많은 전우가 눈앞에서 산화하는 것을 보고 파병 연장신청을 해 베트남에서 3년의 복무를 마쳤다.[7] 그 당시는 영화를 매우 빨리 찍어서 그것이 가능했다. 당연히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남진이 출연한 작품이 지금까지 기억되는 것이 없는 탓에 그가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는 사실을 1970년대 이후 사람들은 잘 모른다.[8] 부친인 김문옥이 1896년생인데, 남진은 1945년생이다. 즉, 오십줄 다 되어 얻은 늦둥이.[9] 경찰관들이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돌던 시절에 일본산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원조 폭주족 당시 남진이 탔던 오토바이는 메구로 제작소의 모델이었다고 한다. 메구로제작소는 1964년 가와사키 중공업에 합병되었다.[10] 영화 국제시장에도 해병대원 시절의 남진이 잠깐 등장한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 청년 남진의 역할을 맡은 배우는 동방신기의 멤버인 유노윤호이다. 남진과 생김새가 닮진 않았지만 유노윤호도 일단은 아시아를 호령하던 인기스타였고, 무엇보다도 젊은 시절 상당히 미남이고 광주 출신이라 목포 출신인 남진 특유의 사투리 말투를 그런대로 재현할 수 있는 캐스팅이었다.[11] 해병대 부대측이 허락하고 보장해주지 않으면 현역 군인이 밖에서 생활하며 연예계 등 사회활동을 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12] 1969년 그가 베트남에 있던 시기에도 TBC에서 최고남자가수상을 수상했다.[13] 당시에는 이미 미국에서 징병제가 중단된 상황이었지만, 한국 전쟁 종전으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10년 정도 되는 시점이었기에 군대에 가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오히려 애국심도 있고 책임감 있는 젊은이들은 군대에 자원해서 가는 경우가 꽤 있었다.[14] 윤복희가 이혼에 대해서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사정을 털어놨는데,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남진은 엄청난 대인인 셈이다.#[15] 대표적으로 국회의원 지역구를 물려받았다.[16] 애초에 남진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학사 출신이다. 정극 연기를 제대로 배웠다는 소리[17] 방송에 자주 나오는 아이돌 가수와 트로트 가수는 팬 층의 두께가 다르다.[18] 이 시기에는 "라이벌", "트로이카" 라는 식으로 잘나가는 연예인 두셋을 묶어서 대결구도를 부추기는 보도행태가 많았다. 대표적인 게 여기 나오는 남진-나훈아, 그리고 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가 있는데 이 트로이카는 심지어 70년대 초 1세대와 70년대 후반 2세대가 있다. 여기서 재미를 본 당시 언론들은 나중에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자 현진영과 와와, 신승훈, 김건모 등 당시 잘나가던 가수들을 일부러 붙여서 계속 라이벌 구도를 형성케 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애초에 지향점이 다른 가수(그룹)들을 억지로 붙였으니... 연예 언론사가 이런 라이벌 기믹을 끝내 다시 성공시킨 건 1996~97년 H.O.T와 젝스키스, S.E.S와 핑클이라는 K팝 아이돌의 시조새 격인 그룹들이 우루루 데뷔하면서부터였다.[19] 두 번이나 구해주었는데, 한 번은 베트콩에게 사로잡히려는 찰나에 베트콩들을 사살해 구출해줬고, 물에 빠진 베트남 소녀를 구하려다 베트콩이 쏜 총에 맞고 강물에 빠졌을 때 이를 구해준 것도 남진이었다.[20]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의 뉴스 탭을 확인해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