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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32:18

양희은

양희은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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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은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9년
이름 양희은
분야 가수
[[틀:은관문화훈장|{{{#EDE4D3 은관문화훈장(2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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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100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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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8545><colcolor=#fff> 양희은
楊姬銀 | Yang Hee-un
파일:양희은.jpg
[ 데뷔 초 모습 ]
파일:ddddddf.jpg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952년 8월 13일 ([age(1952-08-1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본관 청주 양씨 (淸州 楊氏)
신체 A형[1]
가족 아버지 양정길(?~1964년)[2], 어머니 윤순모(1930년~2024년 1월 4일)[3]
여동생 양희경, 양희정(1959년생)[4], 조카 한원균, 한승현
배우자 조중문[5]
학력 서울재동국민학교 (졸업)
경기여자중학교 (졸업)[6]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 58회)
서강대학교 문과대학 (사학 / 학사)
소속사 옹달샘엔터테인먼트
데뷔 1971년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데뷔일로부터 [dday(1971-09-01)]일, [age(1971-09-01)]주년)
종교 성공회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7]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8]

1. 개요2. 평가 및 위상3. 경력4. 음반 목록
4.1. 정규4.2. CCM4.3. 싱글
5. 현재 출연 프로그램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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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가수, 방송인.

2. 평가 및 위상

”대한민국 포크음악의 여왕, 시대의 아이콘”

1970년대 청년음악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평가 되며 이와함께 대한민국에 청바지와 통기타 열풍을 불러온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손에 꼽히는 수 많은 명반과 명곡을 발표하면서 보컬리스트로서, 싱어송라이터로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선 여성 아티스트로도 인정 받고 있다. 독보적인 보이스를 바탕으로 포크음악 외에도 발라드, 재즈, 팝음악까지 소화 하며 세대를 뛰어 넘어 젊은 뮤지션들과의 꾸준한 협업을 통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가수 아이유가 갖고 있는 영향력과 위치를 1970년대에는 양희은이 갖고 있었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실제로 아이유가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 중 한명으로 양희은을 뽑았고, 음악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3. 경력

데뷔 초인 1970년대 초에는 숏컷을 고수하는 등 미소년 같은 비주얼로 맑은 미성을 보여주었으나 현재는 중후한 성량, 노년 여성의 이상적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음색을 가졌다. 여기에 본인의 곡들도 가사 하나 하나가 연륜을 담고 있어 청자들의 감성을 금방 끌어낼 수 있는 가수. 특히 노래로 구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은 대한민국에서 따라올 가수가 없다. 엄마의 입장으로 부르는 노래도 몇 곡 가지고 있으며, 워낙 음색이 노래의 감수성과 잘 맞아떨어져서 방송에 출연해 "엄마가 딸에게"[9]를 불렀을 땐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특징으로는 친한 손윗남자들을 ''이라고 부른다는 것. 사실 1990년대 초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학에서 여자 후배가 남자 선배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종종, 운동권의 경우에는 흔하게 있었던 일이었다. 사실상 운동권에서 유행시킨 말. 사실 한국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님', '어머님', '언니', '형', '누나', '오빠'와 같은 친족 단어들은 원래 실제 혈연 친족 관계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부터 하나씩 비혈연 관계에도 사용되기 시작한다. 20세기 초반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빠져나온 게 시작이었고, '오빠'가 1980년대 후반 쯤 가장 나중에 빠져나왔다. 그래서 1950~60년대 출생자들 중,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친구에게 '오빠'하고 부르는 걸 "자기 오빠도 아닌데 왜 오빠라고 부르냐"며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1992년작 청춘드라마 내일은 사랑에서도 한혜빈(박소현)이 신범수(이병헌)를 형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민간에서는 이런 일이 어지간하면 없다고 보면 된다.

1952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에 서울 YMCA가 운영하던 청소년 쉼터 "청개구리"를 다녔는데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양희은의 음악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인 김민기였다. 김민기가 없었다면 현재의 양희은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육군 대령이었으나, 39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고 어머니가 보증을 잘못 선데다가 어머니의 가게인 양장점이 홀라당 타버리는 바람에 집안이 기울어 대학시절 끼니는 물론이고 교통비조차 없어서 걸어다녔다고 한다.[10] 이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노래를 해야만했고 무대에 올려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 바로 송창식이었다고 한다. 송창식은 자신이 노래를 부르던 명동의 맥주집에 데리고 가서 자신의 공연시간 10분을 떼주면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놀러와 설날 특집 세시봉 콘서트때 양희은이 직접 언급. 송창식에게 '형 저 노래 하고 싶어요' 라고 하자 송창식이 '노래 하고 싶어?' 라고 묻고는 자신이 공연하던 맥주집에 데려가서 자기 공연시간의 일부를 때줘 무대에 세워줬다. 받아준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양희은은 맹랑하게 사장에게 가불을 부탁했고 4만원을 받아냈다. 당시 국립대학교 한학기 등록금이 7천원이었다. 사장이 엄청난 대인배였던 셈. 물론 송창식을 믿고 내준 게 더 컸겠지만. 사람 추천 안하기로 유명한 송창식이 추천한 사람은 양희은이 최초라고 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가수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71년 9월에 발매된 양희은의 첫 정규앨범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을 냈는데 여기에 수록된 김민기의 "아침 이슬""세노야"는 양희은 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이 되었다.

하지만 아침 이슬이 금지곡이 되면서 그녀의 노래들도 덩달아서 금지곡이 되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녀의 대표곡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왜 사랑이 못 이루어지냐라는 황당한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고, "작은 연못"의 경우는 김종필이후락의 권력다툼을 비꼬았다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돼버렸다. 무려 30여곡의 노래가 금지곡이 돼버렸으니... 이때는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금지를 먹이는게 허다했다. 송창식의 "왜 불러"만 해도 사용된 영화에서 청년 둘이 장발 단속을 피해 튀는 장면에서 나와서 공권력을 조롱한다는 이유로 금지를 먹었던 시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1975년에 정부에서 수여하는 대한민국 가수상을 수상했다. 70년대 후반에 이주원과의 공동작업으로 나온 "한 사람", "들길 따라서", "네 꿈을 펼쳐라" 등은 주옥같은 곡들로 평가받는다.

1981년에 한국을 떠나서 1년여간 미국유럽 등을 여행하고 돌아왔지만 이듬해인 1982년에 그녀는 난소암 진단을 받고 인생의 중대 기로에 서게 되었다. 2번에 걸쳐 암수술을 받았고 투병 생활[11]을 하는 등 인생의 굴곡이 많았다. 여동생인 양희경은 직접 옆에서 병간호를 했으며, 병고로 겨우 신음소리만 내는 그녀의 모습에 "정말로 언니가 죽는 줄 알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 일로 자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지만, 남편과 강아지들을 자식 삼아 키우며 긍정적으로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1985년에 발표한 하덕규 작곡의 "한계령"은 뛰어난 곡으로 평가를 받았다. 발표 당시에는 너무 무거운 분위기라 음반사가 홍보를 포기해버렸지만 1990년에 다시 발표했을때 큰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연작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마지막 편인 "한계령"이 바로 이 노래에서 제목을 따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 양희은의 금지곡들은 모두 해금조치 되었고 뛰어난 뮤지션으로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데뷔 30주년을 맞아 30주년 기념음반과 콘서트를 가졌고 2011년에는 데뷔 40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뮤지컬 "어디만큼 왔나"를 2011년 8월 중순까지 공연하였다.

1집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과 20주년 기념앨범 '양희은 1991'은 각각 85위와 80위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었다.

포크 가수로 유명한 편이지만 의외로 신중현과 협업하면서 사이키델릭 포크를 시도하기도 했다.[12] 평은 좋지만 너무 시대를 앞서갔는지 묻혔다. 리뷰 2010년 시점으로도 이 음반은 60만원을 호가하는 희귀 음반이다.

가수 경력 뿐만 아니라 라디오 DJ로서도 전설적이다. 젊은 시절부터 CBS, TBC 등에서 팝 음악방송 DJ를 했을만큼 방송 경험도 풍부한 편이다. 1992년에 다시 CBS로 돌아와 "양희은의 정보시대"를 진행했고 SBS에서 "두시의 친구 양희은입니다"를 1998년까지 진행했으며 손숙의 뒤를 이어서 1999년부터 2024년 현재까지 MBC 표준FM 여성시대를 진행 중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이런 경력에도 불구하고 MBC 라디오에서는 타 방송사의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아 MBC 라디오 명예의 전당인 골든마우스에서 2019년이 돼서야 골든마우스 시상을 하였다.

아직도 목소리에 힘이 가득하기로 유명하다.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목소리가 매우 힘차고 또렷해서 듣기만 해도 양희은임을 알아챌 수 있다. 다만 동생도 목소리가 매우 비슷해 속기 쉽다. 물론 양희경이 좀더 나긋나긋하지만 양희경이 작정하고 따라하면 친척도, 지인도 구분이 어렵다. 심지어 둘의 모친도 목소리가 둘과 같아서 가족들과 모친의 지인들이 많이 속는다고 한다.

2014년 윤종신과의 <배낭여행> 작업을 시작으로 '뜻밖의 만남'이라는 후배 음악인들과의 프로듀싱 음반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적, 이상순, 성시경 등 현재까지 9번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새로운 변화를 성공적으로 시도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2024년 진행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서의 '북미 원주민의 지혜' 내용을 낭독하여 녹음했다.

4. 음반 목록

4.1. 정규

4.2. CCM

4.3. 싱글

5. 현재 출연 프로그램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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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은 민주당계 정당 지지자로 유명하며,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에도 참여해 상록수를 부른 적이 있다. 상록수민주당계 정당의 상징곡이란 걸 감안했을 때, 민주당계 정당에 이벤트가 있으면 상록수를 열창하러 무대에 서는 경우가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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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 패키지로 세계일주 - 뭉쳐야 뜬다 86회에서 공개.[2] 한국 전쟁 때 월남했다. 양희은은 이를 ‘삼팔따라지‘라고 칭했다.[3] 0시 5분 별세[4] 심리학자[5] #[6] 경기여중 재학 시절 교사(校舍)가 소실(燒失)되는 바람에 체육관에 칸막이를 쳐놓고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노래를 잘하기로 유명했고 가끔 친구들의 권유에 등 떠밀려 노래를 하면 칸막이 위로 지붕이 없어 자체 에코가 되어 더 노래가 잘 됐다고 한다. 노래가 끝나면 친구들이 항상 박수를 쳤다고.[7] 주 SNS이다. 소소한 일상이나 연예인들 셀카들 사진들도 다 올라온다.[8] 공식일정이나 공식적인 정보만 올라오고 있다.[9] 동물원의 김창기가 작곡한 곡들 중에서는 가장 최근 히트곡이 되었다.[10] 가세가 기울었다고 하나, 당시 살던 곳이 종로구 누상동의 옥인아파트이다. 70년대 초에 각 집마다 경유 보일러로 개별 난방/온수 공급에 자가용 가진 집도 여럿이었고 아파트에 전용 교환실이 있어 전화 없는 집 없고, 실외이었지만 입주자용 수영장까지 있어 연예인들이 여럿 살던 아파트이다. 집을 유지할 정도 군인 유족 연금은 나왔겠지만 다른 수입이나 재산 없이 집만 있었던 듯.[11] 암투병 자체는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의외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정도로 병세가 위중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암치료를 끝내 거부했다는 점이다.[12] '신중현 작편곡집'이란 이름으로 발매했으며, 당신의 꿈이라는 곡이 그나마 유명한 편[13] 2018년 8월에 음악평론가들이 모여서 정하고 멜론을 통해 발표한 '(세 번째)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85위에 랭크되었다.[14] 수출용 음반[15] 다만 처음으로 발표된 것은 1971년의 옴니버스 앨범 "'71 폭송 힛트모음 제1집".[16] 훗날 남궁옥분의 리메이크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17] 1997년 10월 ~ 12월에 방영되었던 SBS 드라마 달팽이의 OST로 사용되었다.[18] 2018년 9월에 음악평론가들이 모여서 정하고 멜론을 통해 발표한 '(세 번째)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80위에 랭크되었다.[19] 8년만에 내놓은 CCM. 자식은 부모를 이길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20] 논쟁 버라이어티 당신의 선택에 메인 MC로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양희은의 울렁증과 더불어 방송을 끝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물론 시청률이 낮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기는 하였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서세원쇼 하단 부분 참조.[21] 다만 둘 다 70년대 데뷔라곤 해도 나이나 경력 차이도 꽤 있고, 무엇보다 인순이는 훨씬 젊은 가수들과 콜라보를 하는 등 대중들 사이에서 이미지는 차이가 제법 있다. 예를 들어 현 젊은 사이에서 인순이의 가장 큰 이미지는 거위의 꿈(물론 리메이크지만)이거나 더 거슬러 올라가도 친구여 정도인데, 양희은은 아직도 아침이슬의 이미지가 가장 크다. 쉽게 말해 둘 다 대가지만 10~20대 사이에서 대중적인 이미지는 인순이는 세련되게 차려입고 차트인하는 곡을 부르는 가수라면 양희은은 수수하게 차려입고 흘러간 명곡을 부르는 "양희은 선생님"의 이미지가 강하다. 후술되는 "올드하다"는 느낌은 여기서 오는 듯. 인순이는 경력은 길어도 계속 최근 트렌드를 반영해 변신해온 가수기 때문에 올드하다는 느낌은 그리 없다. 사실 양희은이 올드하기보다는 인순이가 나이나 경력에 비해 대중적인 이미지가 굉장히 젊다. 뮤지컬 "시카고"에서 50이 훌쩍 넘은 그녀가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섹시한 쇼걸 벨마 역할을 맡아도 큰 거부감이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22] #[23] KCC 건설 스위첸의 광고음악으로 유명한 그 곡이다.[24] 양희은에게는 상기에 설명된 이유로 딸이 없는데, '내가 딸이 있다면 어떤말을 해줄까' 라는 생각에서부터 가사가 나왔다고 한다.[25] 맨 위에 있는 사진이 양희은의 젊었을 적 모습이다.[26] 언니는 "잘생긴"편이었지만 양희경 본인은 "예쁜" 쪽이었다.[스포일러] 참고로 양희은에게 모창자들이 앞선 횟수는 이 2R의 단 1명인데, 모창자가 남자였다.[28] 방송에선 양희운으로 나왔다.[29] 본인을 포함하여 박미선, 이경실, 선우용여, 조혜련, 안문숙, 이경애, 김지선 8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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