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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2 21:31:48

양희은

양희은의 주요 수상 및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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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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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9년
이름 양희은
분야 가수
[[틀:은관문화훈장|{{{#EDE4D3 은관문화훈장(2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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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100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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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8545><colcolor=#fff> 양희은
楊姬銀 | Yang Hee-un
파일:양희은.jpg
[ 데뷔 초 모습 ]
파일:ddddddf.jpg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952년 8월 13일 ([age(1952-08-1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본관 청주 양씨 (淸州 楊氏)
신체 A형[1]
가족 아버지 양정길(?~1964년)[2], 어머니 윤순모(1930년~2024년 1월 4일)[3]
여동생 양희경, 양희정(1959년생)[4], 조카 한원균, 한승현
배우자 조중문[5]
학력 서울재동국민학교 (졸업)
경기여자중학교 (졸업)[6]
경기여자고등학교 (졸업 / 58회)
서강대학교 문과대학 (사학 / 학사)
소속사 옹달샘엔터테인먼트
데뷔 1971년양희은 고운노래 모음
(데뷔일로부터 [dday(1971-09-01)]일, [age(1971-09-01)]주년)
종교 성공회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7]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8]

1. 개요2. 평가 및 위상3. 일생4. 음반 목록
4.1. 정규4.2. CCM4.3. 싱글
5. 현재 출연 프로그램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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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가수, 방송인.

2. 평가 및 위상

대한민국 포크음악의 여왕

1970년대 청년 문화를 상징하는 가수이자, 대한민국에 청바지와 통기타 열풍을 불러온 시대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손에 꼽히는 수 많은 명반과 명곡을 발표하면서 보컬리스트로서, 싱어송라이터로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선 아티스트로 인정 받고 있다. 독보적인 보이스 컬러를 바탕으로 포크 음악 외에도 발라드, 재즈, 팝 음악까지 소화하며 세대를 뛰어 넘고 젊은 뮤지션들과의 꾸준한 협업을 통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가수 아이유가 갖고 있는 영향력과 위치를 1970년대에는 양희은이 갖고 있었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아이유 또한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 중 한 명으로 양희은을 꼽았고, 음악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 바 있다.

3. 일생

1952년 8월 13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으며, 상당히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육군 대령이었던 아버지는 같은 이북 출신 여성과 불륜 관계를 가져 가정을 떠났다가 양희은이 불과 12살이던 1964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양장점을 운영하며 집안을 이끌었으나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양장점마저 화재로 잃게 된다. 본인이 밝히길 중고등학생 때는 학교에도 잘 가지 않고 그리움과 원망이 뒤섞인 마음으로 아버지의 산소에 가 수 시간씩 앉아있다 돌아오곤 했다고.[9]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청소년기 막바지에 여러 귀인들을 만나게 된다. 송창식은 10대 후반부터 노래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양희은을 위해 본인의 공연 시간을 떼어 노래할 자리를 내줬고,[10] 공연을 위해 기타 반주자를 찾다 만난 사람이 바로 양희은의 음악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김민기다. 김민기는 양희은의 반주를 맡아주며 동시에 작곡을 시작했고, 데뷔작 아침 이슬을 비롯해 양희은이 부른 많은 노래들이 바로 이 때 만들어졌다.[11]

주변의 도움으로 돈을 벌며 데뷔를 준비하던 양희은은 1971년 9월 첫 정규앨범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을 발표, 여기에 수록된 김민기의 '아침 이슬'과 '세노야'가 히트하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하지만 아침 이슬이 1970년대 초중반 민주 항쟁의 상징적인 노래가 되고, 이 여파로 아침 이슬을 비롯해 그녀가 부른 30여곡의 노래들이 금지곡이 되면서 마음고생을 해야만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왜 못 이루어지냐"는 이유로, '작은 연못'은 "김종필이후락의 권력다툼을 비꼬았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으며, 1973년에 건전가요로 지정되기까지 했던 아침 이슬은 1975년 함께 금지곡이 되었던 2천여 곡의 노래들 중 유일하게 단 한 줄의 이유도 없이 금지곡이 되었다.[12]

이 시기 그녀는 당시 유신 정권에서 행하던 물리적 탄압을 받지는 않았으나 김민기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양희은 본인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김민기의 실체를 폭로하라며 협박을 받는 일을 겪었기 때문에 운신의 폭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70년대 후반 이주원과의 공동작업으로 '한 사람', '들길 따라서', '네 꿈을 펼쳐라' 등을 발표하며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으나,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활동기에는 노래 부르는 것이 지겹다며 공연 활동을 접고 라디오 DJ에만 집중하기도 했다.

1981년에 한국을 떠나 1년여간 미국유럽 등을 여행하고 돌아왔지만, 이듬해인 1982년에 난소암 진단을 받고 생의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2번에 걸쳐 암수술을 받았고 투병 생활[13]을 하는 등 인생의 굴곡이 많았다. 여동생인 양희경이 직접 옆에서 병간호를 했으며, 훗날 병고로 신음소리만 겨우 내는 그녀의 모습에 "정말로 언니가 죽는 줄 알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 일로 자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지만, 남편을 만나 강아지들을 자식 삼아 키우며 긍정적으로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도 1985년에 발표한 하덕규 작곡의 "한계령"은 뛰어난 곡으로 평가를 받았다. 발표 당시에는 너무 무거운 분위기라 음반사가 홍보를 포기해버렸지만 1990년에 다시 발표했을때 큰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연작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마지막 편인 "한계령"이 바로 이 노래에서 제목을 따왔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 양희은의 금지곡들은 모두 해금조치 되었고 뛰어난 뮤지션으로 다시 평가받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데뷔 30주년을 맞아 30주년 기념음반과 콘서트를 가졌고 2011년에는 데뷔 40주년을 맞아 그동안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뮤지컬 "어디만큼 왔나"를 2011년 8월 중순까지 공연하였다.

1집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과 20주년 기념앨범 '양희은 1991'은 각각 85위와 80위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었다.

포크 가수로 유명한 편이지만 의외로 신중현과 협업하면서 사이키델릭 포크를 시도하기도 했다.[14] 평은 좋지만 너무 시대를 앞서갔는지 묻혔다. 리뷰 2010년 시점으로도 이 음반은 60만원을 호가하는 희귀 음반이다.

가수 경력 뿐만 아니라 라디오 DJ로서도 전설적이다. 젊은 시절부터 CBS, TBC 등에서 팝 음악방송 DJ를 했을만큼 방송 경험도 풍부한 편이다. 1992년에 다시 CBS로 돌아와 "양희은의 정보시대"를 진행했고 SBS에서 "두시의 친구 양희은입니다"를 1998년까지 진행했으며 손숙의 뒤를 이어서 1999년부터 2024년 현재까지 MBC 표준FM 여성시대를 진행 중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이런 경력에도 불구하고 MBC 라디오에서는 타 방송사의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아 MBC 라디오 명예의 전당인 골든마우스에서 2019년이 돼서야 골든마우스 시상을 하였다.

아직도 목소리에 힘이 가득하기로 유명하다.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목소리가 매우 힘차고 또렷해서 듣기만 해도 양희은임을 알아챌 수 있다. 다만 동생도 목소리가 매우 비슷해 속기 쉽다. 물론 양희경이 좀더 나긋나긋하지만 양희경이 작정하고 따라하면 친척도, 지인도 구분이 어렵다. 심지어 둘의 모친도 목소리가 둘과 같아서 가족들과 모친의 지인들이 많이 속는다고 한다.

2014년 윤종신과의 <배낭여행> 작업을 시작으로 '뜻밖의 만남'이라는 후배 음악인들과의 프로듀싱 음반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적, 이상순, 성시경 등 현재까지 9번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새로운 변화를 성공적으로 시도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2024년 진행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에서의 '북미 원주민의 지혜' 내용을 낭독하여 녹음했다.

4. 음반 목록

4.1. 정규

4.2. CCM

4.3. 싱글

5. 현재 출연 프로그램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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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은 민주당계 정당 지지자로 유명하며,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에도 참여해 상록수를 부른 적이 있다. 상록수민주당계 정당의 상징곡이란 걸 감안했을 때, 민주당계 정당에 이벤트가 있으면 상록수를 열창하러 무대에 서는 경우가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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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 패키지로 세계일주 - 뭉쳐야 뜬다 86회에서 공개.[2] 한국 전쟁 때 월남했다. 양희은은 이를 ‘삼팔따라지‘라고 칭했다.[3] 0시 5분 별세[4] 심리학자[5] #[6] 경기여중 재학 시절 교사(校舍)가 소실(燒失)되는 바람에 체육관에 칸막이를 쳐놓고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노래를 잘하기로 유명했고 가끔 친구들의 권유에 등 떠밀려 노래를 하면 칸막이 위로 지붕이 없어 자체 에코가 되어 더 노래가 잘 됐다고 한다. 노래가 끝나면 친구들이 항상 박수를 쳤다고.[7] 주 SNS이다. 소소한 일상이나 연예인들 셀카들 사진들도 다 올라온다.[8] 공식일정이나 공식적인 정보만 올라오고 있다.[9] 문서 수정 이전에는 양희은이 어려운 성장기를 보내는 와중에도 종로의 고급주택으로 유명하던 옥인아파트에 거주했다고 작성되어 있었으나, 양희은이 옥인아파트에 입주한 시기는 1980년이다. 당시 양희은은 29살이었고 가수 데뷔를 한 지도 9년째였으며, 옥인아파트는 과거의 명성을 잃은 낡고 작은 아파트로 불리던 때다. 당시 인터뷰를 옮긴 기사[10] 이 때 양희은은 송창식의 도움으로 공연 자리를 얻은 맥주집에 첫 날부터 가불 4만원을 요구했고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시기 대학교 등록금이 7천원이었으니 굉장히 큰 돈인데, 젊을 때부터 사람 추천 안 하기로 유명하던 송창식이 자기 공연 시간까지 떼가며 자리를 만들어줬으니 안 줄 수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11] 다만 아침 이슬은 김민기가 마음에 안 들어 찢어서 버린 악보를 주워맞춘 양희은이 부탁해 부르게 된 곡이다.[12] 아이러니하게도 양희은은 같은 해에 정부에서 수여하는 대한민국 가수상도 수상한다.[13] 암투병 자체는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의외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정도로 병세가 위중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암치료를 끝내 거부했다는 점이다.[14] '신중현 작편곡집'이란 이름으로 발매했으며, 당신의 꿈이라는 곡이 그나마 유명한 편.[15] 2018년 8월에 음악평론가들이 모여서 정하고 멜론을 통해 발표한 '(세 번째)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85위에 랭크되었다.[16] 수출용 음반[17] 다만 처음으로 발표된 것은 1971년의 옴니버스 앨범 "'71 폭송 힛트모음 제1집".[18] 훗날 남궁옥분의 리메이크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19] 1997년 10월 ~ 12월에 방영되었던 SBS 드라마 달팽이의 OST로 사용되었다.[20] 2018년 9월에 음악평론가들이 모여서 정하고 멜론을 통해 발표한 '(세 번째)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서 80위에 랭크되었다.[21] 8년만에 내놓은 CCM. 자식은 부모를 이길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22] 논쟁 버라이어티 당신의 선택에 메인 MC로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양희은의 울렁증과 더불어 방송을 끝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물론 시청률이 낮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기는 하였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서세원쇼 하단 부분 참조.[23] 다만 둘 다 70년대 데뷔라곤 해도 나이나 경력 차이도 꽤 있고, 무엇보다 인순이는 훨씬 젊은 가수들과 콜라보를 하는 등 대중들 사이에서 이미지는 차이가 제법 있다. 예를 들어 현 젊은 사이에서 인순이의 가장 큰 이미지는 거위의 꿈(물론 리메이크지만)이거나 더 거슬러 올라가도 친구여 정도인데, 양희은은 아직도 아침이슬의 이미지가 가장 크다. 쉽게 말해 둘 다 대가지만 10~20대 사이에서 대중적인 이미지는 인순이는 세련되게 차려입고 차트인하는 곡을 부르는 가수라면 양희은은 수수하게 차려입고 흘러간 명곡을 부르는 "양희은 선생님"의 이미지가 강하다. 후술되는 "올드하다"는 느낌은 여기서 오는 듯. 인순이는 경력은 길어도 계속 최근 트렌드를 반영해 변신해온 가수기 때문에 올드하다는 느낌은 그리 없다. 사실 양희은이 올드하기보다는 인순이가 나이나 경력에 비해 대중적인 이미지가 굉장히 젊다. 뮤지컬 "시카고"에서 50이 훌쩍 넘은 그녀가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섹시한 쇼걸 벨마 역할을 맡아도 큰 거부감이 없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24] #[25] KCC 건설 스위첸의 광고음악으로 유명한 그 곡이다.[26] 양희은에게는 상기에 설명된 이유로 딸이 없는데, '내가 딸이 있다면 어떤말을 해줄까' 라는 생각에서부터 가사가 나왔다고 한다.[27] 맨 위에 있는 사진이 양희은의 젊었을 적 모습이다.[28] 언니는 "잘생긴"편이었지만 양희경 본인은 "예쁜" 쪽이었다.[스포일러] 참고로 양희은에게 모창자들이 앞선 횟수는 이 2R의 단 1명인데, 모창자가 남자였다.[30] 방송에선 양희운으로 나왔다.[31] 본인을 포함하여 박미선, 이경실, 선우용여, 조혜련, 안문숙, 이경애, 김지선 8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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