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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01:50:46

한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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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한대수
韓大洙 | Hahn Dae-Soo
파일:한대수.jpg
출생 1948년 3월 12일 ([age(1948-03-12)]세)
경상남도 부산시
(現 부산광역시)
본관 청주 한씨
학력 P.S 125 초등학교 (졸업)
경남중학교 (졸업)
A.G Berner 고등학교 (졸업)
뉴햄프셔 대학교 수의과대학 (수의학 / 중퇴)
병역 해군 병장 만기전역 (해상병 149기)
가족 배우자 옥사나 알페로바,(1992~2024)[1],
딸 한양호 ,(2007~ ),
종교 개신교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활동
3.1. 음반3.2. 대표곡
4. 평가5.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가수, 사진가.

2. 생애

1948년 3월 12일, 부산광역시에서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가족들의 경력이 실로 엄청난데, 아버지는 핵 물리학자이고 어머니피아니스트이며, 할아버지는 신학자[2]였다. 하지만 한대수 가족에게는 실로 영화와 같은 슬픈 사연이 있다. 부친이 장기간 실종되었다가 기억과 한국말을 잊은 채 미국에서 발견된 것. 정황상 MK울트라 비슷한 실험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 한대수 아버지의 미스터리한 실종 실제로 한대수의 부친이 핵물리학을 배우게 된 이유도 한대수의 할아버지가 다신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4]

한대수가 17세일 때 FBI가 한대수의 부친을 찾았지만, 한국말을 잊고 인쇄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한다.[5] 인쇄업도 상당히 크게 벌리고 있어서, 대체 기반도 없고 기억을 잃은 핵물리학 전공 대학원생이 어떻게 그런 사업을 했냐고 한대수가 궁금해했을 정도. 재혼도 했는데 애가 아홉 명이나 있는 이탈리아계 여성과 했다고 한다. 다만 둘 사이엔 아이가 없었기에 한대수가 한창석의 유일한 직계 후손이다. 한대수는 아버지랑 재혼한 이탈리아계 여성을 미국 엄마라고 부르는데, 미국 엄마와 그쪽 친자식들하고 사이는 양호한 것으로 보인다. 2023년에도 미국 엄마의 친딸에게서 아버지 유품을 받았다고 밝혔을 정도. 출처

한대수의 아버지 한창석은 2009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17년에 대해서는 끝내 말씀이 없으셨다.[6] 다행히 가족에 대한 기억은 되찾는데 성공해 그때부터 가족이 미국으로 넘어가서 같이 살았다고 한다. 생전 아버지와의 관계는 나이가 들수록 좋아져, 나중에는 아들 한대수를 보기 위해 뉴잉글랜드에서 뉴욕까지 한시간 반을 직접 운전해서 자주 오셨다고 한다. <올드보이 한대수>라는 책 18p에 한대수 아버지의 메세지가 실려있다. 한대수의 친구들과 팬들에게 인사 드린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은 편지 형식의 명문으로 읽는 이의 코 끝을 찡하게 만든다.

군대는 해군 일반병으로 입대하였고 실무배치를 충무함으로 받아 근무했었다. 전출로 이함 후에는 해군본부 참모총장실에서 근무하다가 전역했다.

뉴햄프셔 대학에서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한국 축산학계에 이바지하라는 뜻으로 수의학을 전공할 것을 권했으나 후에 사진예술로 전공을 바꿨다. 한국과 미국에서 수차례 번갈아가며 생활했고, 나중에는 진짜 뉴요커[7]로 살았기 때문에, 한국어보다 영어를 좀 더 잘 한다.[8] 현재 아리랑 TV에서 영어로 라디오 진행을 하고 있다.

3. 활동

데뷔하자마자 한국 포크계에 큰 화제를 일으키니 그 이유는 오늘날에 봐도 파격인 1집 커버 사진과 수록곡 「물 좀 주소」 때문이었다. 정부에서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며 대차게 깠다.[9] 또한 이듬해에 발매한 2집 고무신은 전곡이 체제 전복을 꾀한다는 이유로 전량이 정부에 의해 회수되었으며 심지어 마스터 테이프마저 압수해 갔다. 아직도 반환이 안 됐는지 1집은 근 최근에 리매스터링 앨범이 발매되기도 했는데 2집은 몇십 년이 지나도록 리매스터링 판이 안 나왔다. 그러다가 박스셋인 The Box에서 리마스터링해서 최초 공개되었다.[10]

이후 실의에 빠져 미국으로 떠났다가 1989년 즈음에 귀국해 앨범 내고 2008년 즈음에 또 실의에 빠져 미국으로 아예 떠나려 하다가 한 음악 관계자와 인연을 맺고 계속 국내에서 음악하고 사진 찍고 여행하고 책 몇 권 내면서 활동했다. 일본, 중국에서 공연하기도 하고 김용옥과 함께 콘서트를 하기도 했다. 1집과 3집이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기도 했다.

노래를 들어보면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목소리로 부른 것이 대개이지만, 그 속에서 뭔가 모를 애환과 깊은 포스가 풍겨져 나온다. 인디밴드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포크 록의 대부이자 대선배로 존경받으며, 여러 밴드들이 모여서 대표곡 '물 좀 주소'만 리메이크한 앨범도 따로 있을 정도다. 강산에장기하도 '물 좀 주소'를 부른 적이 있다.

2011년에는 가수 이승열의 노래, 「그들의 Blues」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11]

기존 포크 음악 가수들이 외국곡을 번안하여 불렀던 것과 달리 한대수는 데뷔 때부터 자신이 스스로 곡과 가사를 만들어 싱어송라이터로서 활동했다. 이는 기존 포크음악 가수와는 아주 큰 차이점으로, 한국 포크음악이 발전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한 선구자였다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는다.

3.1. 음반

3.2. 대표곡

얄팍한 노인네의 목소리와 함께 하모니카 소리가 울려퍼지는 노래를 부른 사람이 한대수다. 2015년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가수 이선희가 리메이크했다.
2017년 제19대 대선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첫 TV 광고 삽입곡이다.#
2022년에 나온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에 모스크바가 조폐국 밖으로 나가는 땅굴을 팔 때, 강도들이 계획을 다 세우고 뒷풀이 파티 할 때, 그리고 교수가 선우진 경감을 쏘고 엔딩 크레딧과 함께 노래가 나온다.
참고로 이 노래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라는 가사가 군사정권 시절 행복의 나라라는 것이 북한을 의미한다는 이유와 "그럼 대한민국은 행복의 나라가 아니란 말이냐?"라는 이유로 금지곡에 등재되기도 했었다.[15]

4. 평가

한국 음악계에 큰 획을 그은 선도적 아티스트로 현대 한국 대중음악사, 특히 197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사를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음악인이다. 한국 포크 록의 시작이자 대부이자 대명사로, 걸걸하고 촌스러우면서도 깊은 목소리와 노래가 특징이다.

5. 여담



[1] 1970년생, 2024년 사별[2]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신학대학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3] 한대수 말로는 에드워드 텔러 제자였다고 하는데, 텔러는 강력한 반공주의자로 깊은 정치적인 커넥션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대수 본인도 이것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4] 출처: 명작 스캔들 61회[5] 출처: 티비는 사랑을 싣고[6] 한창석 본인이 가족한테조차 과거는 과거라고 철저히 함구했다고 한다. 심지어 할머니가 임종 직전 알려달라고 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한대수와 취하도록 마시고 한대수가 물었음에도 집에 가자면서 대답을 안 했다고 한다.[7] 미국에서의 직업은 사진 스튜디오 매니저.[8] 영어 책, 영어 신문 독서량이 엄청나서 고급 지식은 거의 영어로 배웠다고 한다.[9] 대중들은 이 '물'을 민주주의로 보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노래로 받아들였다.[10] 한대수는 그래도 마스터 테이프 보존이 잘 된 편이여서 수월하게 나왔다고 한다. 저작권 문제 해결하는 게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참조 링크 참고로 이 박스셋은 한대수 본인이 직접 관여를 한지라 상당한 퀄리티를 보장한다.[11] 재밌는 점이라면 한대수는 U2의 보컬 보노의 목소리가 짜증난다고 깐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닮아 한국의 보노라는 별명이 따라붙곤 했던 이승열의 피쳐링을 흔쾌히 수락했다.[12] 이성의 시대 반역의 시대 라는 제목으로 더 알려져 있으나, 한대수가 원래 의도한 제목은 영어라임이 딱 맞는 이 제목일 것이다.[13] 한대수 자신이 유작이 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14] 사실 이 노래는 뉴질랜드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포크가수 그레이엄 올라이트(Graeme Allwright)(1926. 11. 7. ~ 2020. 2. 16.)의 자작곡인 '축제의 발라드(Ballade de la désescalade)'의 표절곡이라는 의견이 보이고 있다. '축제의 발라드'는 1971년에 음반으로 나왔고, '행복의 나라로'가 한국에서 처음 음반화된 것은 1972년 5월 6일 발매 된 "조영남 애창곡집"에서이다. 그리고 한대수 본인 음반으로는 1973년에 발표되었다. 한대수 및 여타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개인적으로 이 노래를 만들어 놓은 게 1967년이고, 1969년에 방송과 남산드라마센터 공연에서 처음으로 불렀으니, '축제의 발라드'의 표절곡일 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현재 방송과 드라마센터의 공연 자료나 녹음 결과물도 남아있지 않고, 또 정식 발표도 안 한 노래를 뉴질랜드의 한 가수가 어떤 경로로 알아내 표절하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반론이 있다. 그리고 그레이엄 올라이트야말로 음반으로 정식 발표하기 전인 1966년에 작곡하여 이후 계속 불러 온 사실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한대수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이 곡이 순수 창작곡이며, '축제의 발라드'와의 유사성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바, 결국 각자가 비교해 들어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겠다. 사람들의 증언 등이 아니라, 공연 자료나 녹음 결과물 같은 객관적 증거만 발견된다면 표절 의혹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15] 사실 이 시기에는 현대는 물론 당시의 상식으로도 전혀 공감도 이해도 가지 않는 기준으로 금지곡 판정을 내리는 짓거리가 빈번했다. 송창식의 '왜 불러'는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 장발 단속에 걸린 두 청년이 도망칠 때 나와서 공권력을 조롱했다고 금지. 윤형주의 '비의 나그네'는 이장희 덕에 비 오는 날 한정으로 금지를 당했다. 이장희가 윤형주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0시의 다이얼' 후임으로 들어 왔는데 전국에 호주 주의보 경보 터지고 난리난 날에 이걸 틀었는데 가사가 내려라 밤 비야 내님 오시게 내려라 주룩주룩 내려라 끝없이 내려라. 심지어 가사가 아닌 곡 분위기(이미자의 '동백아가씨' - 왜색이 짙다는 이유)나 창법('한국의 재니스 조플린'이라 칭했던 사이키델릭로커 김정미의 노래들)을 가지고 딴지를 걸기도 했다. 심지어 전인권은 가창력 미달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던 적도 있다.[16] 사유 중 하나는 아내가 연하의 독일 남자와 외도를 했다는 것.[17] 이스트빌리지의 월세 50달러짜리 아파트에 살며, 부모의 도움 없이 음식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마련했다.[18] 2009년 6월 20일 방영한 다큐멘터리 3일 모래내시장 편 초반부에 딸을 업은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19] 옥사나의 모계 가족력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