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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3 20:49:47

TV는 사랑을 싣고

1995년[1]부터 2010년까지 15년 동안 오프닝 곡으로 쓰인 Earl Klugh[2] - Just Pretend

1. 개요2. 역사
2.1. 1기(1994년 5월 3일 ~ 2010년 5월 8일)2.2. 2기(2018년 9월 28일 ~ 2020년 6월 19일)2.3. 3기(2020년 9월 9일 ~ 2021년 6월 30일)
3. 역대 코너
3.1. 그리운 만남3.2. 아름다운 용서3.3. 잊지 못할 고마움
4. 방영 목록
4.1. 1994년4.2. 1995년4.3. 1996년4.4. 1997년4.5. 1998년4.6. 1999년4.7. 2000년4.8. 2001년4.9. 2002년4.10. 2003년4.11. 2004년4.12. 2005년4.13. 2006년4.14. 2007년4.15. 2008년4.16. 2009년4.17. 2010년4.18. 2018년4.19. 2019년4.20. 2020년4.21. 2021년
5. 논란 및 사건 사고6. 패러디7. 여담8. 둘러보기

1. 개요

파일:KBS 로고.svg홈페이지

KBS에서 1994년 5월 3일부터 2010년 5월 8일까지 총 805회[3] 방송된 시사교양이자 예능 프로그램이다.[4] 햇수로 따지면 약 16년. 처음에는 KBS 2TV에서 방송되었다가 1995년 9월 8일 1TV를 거쳐 1998년 2월 10일 ~ 2005년 5월 1일까지는 2TV로 돌아왔고, 2005년 5월 3일부터 포맷을 좀 바꾸면서 1TV로 재변경되었다.

의뢰인과 찾고자 하는 지인 간의 과거 회상을 무명배우들을 동원해 재현하는데 이때의 나레이션은 김종환, 장혜선. 이후 남자 나레이션은 김일로 교체되어 종영 때까지 유지했다. 관련 기사. 또 배우 노현희와 코미디언 이창명, 박수림, 김의환, 권영찬, 김종석[5] 등도 이 프로에서 리포터로 활약했다.

원래 첫 방영 전에 역시 KBS1에 동명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일반인들의 미담이나 봉사활동 등을 소개하는 포맷이 완전히 다른 별개의 프로그램이었다. 관련기사 1, 관련기사 2

2. 역사

2.1. 1기(1994년 5월 3일 ~ 2010년 5월 8일)

방영 초기에는 배우 한진희와 아나운서 임성민이 맡다가 이후 남자 MC는 이상벽, 이계진, 손범수 등이 거쳐갔는데, 이들 중엔 방송인 이상벽의 비중이 매우 컸고 진행 기간도 매우 길었다. 재연극과 리포팅 등이 결합돼 있으며, 사실상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90년대 후반에는 시청률이 30~40% 이상 올라갔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이에 힘입어 동창, 은사 찾기 사이트까지 유행했지만, 새천년이 되면서 새로 출연할 유명인들이 점점 줄어들다 보니 소재 고갈 문제가 생겼다.

일단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웬만한 원로 연예인들은 거진 출연을 마친 관계로 2000년대 이후에는 젊은 연예인이나 신인 연예인들의 출연 빈도 내지는 이미 나온 의뢰인이 재출연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는데, 고작 몇 년 동안 얼굴을 못 보고 지내다가 다시 만났을 때의 감동은 몇십 년 긴 세월 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과 다시 만날 때의 감동과 임팩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또한 인터넷 외에도 여러 통신매체들의 발달로 사람들을 찾기가 예전보다 쉬워졌다. 결국 시청률은 10% 아래까지 내려갔고 화제성도 미미해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1년 만인 2005년 5월에 '新 TV는 사랑을 싣고'로 개편하고 일반인 찾기 코너인 '아름다운 용서'를 신설했지만, 이것도 별 소용이 없었는지 이후에도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지 못하며 16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원래 교양국(2000년 이전에는 TV1국)이 직접 제작했으나 2003년 이후 외주제작으로 전환했는데, 해오름프로덕션, TNT프로덕션 등이 이 프로그램을 거쳤다.

2.2. 2기(2018년 9월 28일 ~ 2020년 6월 19일)

그 뒤 2018년 9월 28일김용만, 윤정수 2MC 체제로 8년만에 시즌 2로 부활했으며, 1기 중후반기 때처럼 외주제작 체제이며 독립제작사 블루팬더에 맡겼고, 이전과 달리 VCR 녹화로 진행했다. 지인과의 재회 시 The Power of Love가 BGM으로 깔리는 연출은 그대로 계승했기에, 당시 시청자라면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시즌 2는 일부 지역에선 본방송으로 시청이 가능했으며,[6] 대신 일요일 오전에 재방송으로 시청이 가능했다.[7] 시청률 7~9%를 기록하며 나름대로 선전했다. 참고로 일반인사생활 때문인지 홈페이지에서 시청자 게시판을 없앴다. # 또한 부활 이후에는 장르도 시사교양에서 예능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2020년 6월 19일 방송을 끝으로 시즌 2가 막을 내렸다.

2.3. 3기(2020년 9월 9일 ~ 2021년 6월 30일)

2020년 9월 9일부터 시즌 3로 새롭게 시작했으며, 방송 시간은 수요일 밤 8시 30분에 방영하였다. 2005년 이후로 16년만에 KBS 2TV에서 다시 방영하였다. 먼저 외주사부터 바뀐 데다 MC를 김원희현주엽, 추적 리포터서태훈이 맡는 등 많은 것이 바뀌었다.

3. 역대 코너

3.1. 그리운 만남

프로그램 제작진이 유명인의 지인(첫사랑, 은사, 동창 등등)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오랜 기간 연락이 끊겼던 지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스튜디오에 서서 지인이 들어올 문을 바라보며 지인의 이름을 재차 부를 때의 긴장감, 문이 열리면서 스튜디오에 등장한 지인과 재회했을 때의 감동이 주된 관전 핵심이었다.

방영 초기에는 경찰청 측이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출연자의 지인을 찾는데 협조를 안 해준 탓에 소문만으로 온 동네를 뒤지다가 허탕쳐 왔으나, 나중에야 경찰청이 프로그램의 진가를 알아보고 적극 협조해 주기 시작했다. 1994년 연합통신 기사. 그럼에도 단서가 너무 없어서 정말로 찾지 못하기도 했다. 게다가 아예 출연자를 과거의 지인이 기억하지 못 해서 출연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보통 출연자가 고령이고, 너무 먼 과거에 만났는데 그 인연도 영향이 강하지 않아서 기억을 잃어버렸다. 또는 항공편으로도 국내에서 한 번에 쉽게 가기 어려운 나라에 이미 오래 전에 이민을 가버린 상황에 거기로 제작진이 가서 찾는다고 쳐도 출연자가 준 단서만으로는 단기간에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운 좋게 그 사람을 아는 지인을 현지에서 쉽게 만나서 찾아내는 기적도 있었다. 또 유명인이 찾는 지인이 세상을 떠나고 없어서 영영 만날 수가 없는 안타까운 사례도 간혹 있었다.

최수종, 김영호, 이경진, 배한성, 하일성, 김종필 총재, 최불암, 이영범 등은 학창시절 은사를 찾았으나, 모두 이미 고인들이 돼서 만나지 못했고, 윤다훈은 중학교 시절 첫사랑을, 선우재덕은 군복무 시절 상사를, 박원숙김한국은 자신의 친구를, 고두심은 학창시절에 짝사랑했던 인물을, 엄앵란은 대학 시절 도움을 받았던 아저씨를 각각 찾았으나 모두 역시 고인들이 되어서 만날 수가 없었다. 김한국과 고두심, 엄앵란, 최불암, 이영범의 경우 해당 지인의 유족이 대신 출연해서 부고를 전했으며, 김종필 총재는 찾는 과정에서 고인이 되었음을 확인 후 유족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참고로 최불암, 하일성, 박원숙, 엄앵란은 첫번째 출연 당시에는 찾는 인물과 재회를 하였으나 2번째 출연 당시 고인이 된 사례였으며, 성우 배한성은 첫 번째 출연 당시 찾는 사람이 이미 20여년 전 고인이 되었다고 하며 다시 출연하였으나 두 번째 출연 당시에도 찾는 사람이 고인이 된 데다 유족들조차 출연하지 않아서 출연하였던 두 회차 모두 사회자들과 함께 퇴장하였다.

사망 이외에도 지승현김동완의 경우에는 찾는 사람의 개인사정으로 스튜디오에서 만나지 못하였으며,[8][9] 임동진은 역대 유일무이 찾는 인물을 추적 실패한 사례로 남아 있다. 아울러 송대관은 처음엔 친구를 찾으려 하였으나 찾으려던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딱한 소식을 접하여 대신에 그 친구 덕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친구의 형을 찾았고, 이순재의 경우는 초등학교[10] 시절 단짝친구를 찾았는데, 찾는 과정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소식을 접하자 한국에 있던 친구의 형이라도 뵐 수 있다면 좋다며 아무라도 좋으니 왔으면 나오라고 외쳤는데, 놀랍게도 찾던 친구가 이순재를 손수 보기 위해서 미국에서 날아왔고, 남능미 또한 중학교 시절 은사를 찾았는데 브라질로 이민을 갔으나, 남능미를 보기 위하여 브라질에서 시간을 내어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주현미 역시 마찬가지로 학창시절 단짝친구를 찾았는데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주현미가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한국으로 와서 주현미와 만날 수 있었다. 이휘재, 정준도 찾는 인물이 캐나다에서 넘어왔고, 전혜진은 프랑스에서 넘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아래 내용에 기대한 것처럼 레전드를 만드는데... 전술한 1994년 <연합통신> 기사에 따르면 몇몇은 남편의 반대 탓에 재회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역대 만남 중 가장 극적인 만남은 강부자 편으로, 아래에도 후술한 내용이지만 고등학생 시절 교장선생님을 찾았는데, 100세였음에도 생존해서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종종 선생님을 만나기도 했다. 방영 이후 1년이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작고하면서 만일 조금만 더 늦게 출연했으면 만남이 불발될 상황이 왔을 수도 있다. 반대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엄앵란 편으로, 방송 출연 이후 2년 전에 찾는 인물이 이미 고인이 된 상태였다. 한편 엄앵란에게 사전에 먼저 섭외 제의가 왔었으나 고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더욱 더 안타깝게 했고, 섭외 제의를 조금만 더 빨리 받아들였다면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엄앵란의 출연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며, 첫번째 출연 당시엔 은사와의 만남을 성공했고, 그 이후에 2번째 출연 제의가 들어왔을 때, 이미 본인은 한 차례 출연해서 다른 출연자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섭외를 고사한 것이었다.

참고로 김한석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첫사랑을 다시 만났고, 결혼까지 했다.

프로그램에서 딱 한 번 엉뚱한 사람을 찾아 의뢰인이 당황한 적도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의뢰인이 찾는 사람의 이름을 다른 비슷한 이름으로 잘못 기억한 것인데, 스튜디오에 출연한 것은 아니고 리포터가 찾는 과정에서의 영상에 등장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찾고자 하는 인물을 제대로 찾았다.

이 외에도 방송사고가 여럿 있었는데, 가장 회자에 남는 방송사고는 전혜진이 어린 시절 첫사랑이었던 오빠를 찾았으나, 그 찾는 오빠가 MC 이금희에게 달려가 포옹했고, 이금희는 방송 내내 당황하여 정확한 진행을 하는데 애를 먹었다.

3.2. 아름다운 용서

과거의 잘못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하거나 관계가 데면데면해진 일반인들에게 서로 화해하고 용서할 기회를 주는 코너였다. 신청자의 사연을 토대로 드라마 형태로 에피소드를 소개한 다음에, 용서를 구할 자와 용서를 받을 자가 블라인드 사이에서 대화를 나눈 뒤에 블라인드에 있던 사람이 나와서 본격적으로 서로 화해를 하게 된다.

다만 이혼 등으로 자식과 헤어지고 한참 연락을 끊었다가 대뜸 재회를 희망하게 된 어머니들이 단골로 출연한데다, 자식들에게 만남과 화해를 강요하는 듯한 에피소드도 적잖이 있었기에 홈페이지 게시판 등을 통해 불편하다는 반응을 보인 시청자들이 꽤 있었다.

3.3. 잊지 못할 고마움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받고 그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고마움의 자리를 마련하는 코너로, 형식은 아름다운 용서와 유사했다. 그리운 만남, 아름다운 용서와는 별개의 코너였지만 가끔씩 해당 코너로 대체되는 경우가 있다.

4. 방영 목록

†: 찾는 인물 중 이미 사망한 인물에게 표시.

4.1. 1994년

1994년 9월 20일 방영분은 추석 특선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편성, 11월 15일 방영분은 대하드라마 <인간의 땅> 1~2회 연속편성으로 각각 쉬었다.

● 진행자: 한진희, 임성민

● 진행자: 이상벽, 배영란

4.2. 1995년

1995년 1월 31일 방영분은 설날 특선영화 <패왕별희> 편성, 8월 15일 방영분은 광복 50주년 특선영화 <결혼이야기 2> 편성, 9월 22일 방영분은 제18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겸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예선 《한국-대만》 중계, 10월 13일 방영분은 트리니다드 토바고 축구 국가대표팀 초청경기 중계 등으로 각각 쉬었으며, 9월 8일 67회부터 1TV로 옮겨 저녁 7시 35분으로 옮겼다.

4.3. 1996년

1996년 5월 17일 방영분은 2002 월드컵 유치기념 국가대표 초청경기 《한국-AC밀란 전》 중계, 8월 16일 방영분은 《애틀랜타 올림픽 선수단 개선 및 2002 월드컵 유치기념 국민대축제》 편성으로 각각 휴방됐다.

4.4. 1997년

4.5. 1998년

10월 16일 방영분은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LG:삼성 2차전, 23일 방영분은 한국시리즈 1차전 중계방송 탓에 각각 휴방되었다.
● 진행자: 이상벽, 김지영

4.6. 1999년

4.7. 2000년

2000년 3월 3일 방영분은 공사창립 27주년 기념 <쇼 KBS 2000>의 편성으로, 9월 24일 ~ 10월 1일 방영분은 시드니 올림픽 중계방송으로 인해 각각 휴방되었고, 4월 28일부터 월요일 밤 11시였다가 7월 30일부터 일요일 오전 11시로 변경되었다.

● 진행자: 이상벽, 이매리

● 진행자: 이계진, 이다도시

4.8. 2001년

● 진행자: 이상벽, 설수진

4.9. 2002년


● 진행자: 손범수, 김미화

4.10. 2003년

4.11. 2004년

● 501회부터 연예인과 일반인을 함께 의뢰인으로 받으며 일반인은 따로 기재하지 않는다.[33]

4.12. 2005년

4.13. 2006년

원본 영상이 정상 영상이 확인되지 않아(소리 울림 현상으로 인하여) 방송국에서 판매도 불가능하며 유튜브에서도 비공개 처리 되었습니다.※ 노현정 아나운서 하차, 윤수영 아나운서 합류

4.14. 2007년

2007년 5월 4일부터 매주 금요일 오후 7시 30분으로 변경되었다.

4.15. 2008년

배우 김진태(중학교 입학시험을 대비해서 함께 과외했던 친구를 찾았다.), 서문심배우 김학철 (33년의 세월을 넘어 보고 싶은 친구), 이정선성우 김기현(군 복무시절 잊지 못할 후임을 찾았다.), 지현정오미연(여고시절, 즐거운 추억을 선사해준 단짝친구를 찾았다.), 함정희

4.16. 2009년

4.17. 2010년

연기자 신신애(드라마 '똠방각하'에서 아들 역을 맡았던 황성탁), 김동수
가수 윤희상(초등학교 첫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박윤경
연기자 강성필(중학교시절 첫사랑 선생님), 최지숙
가수 주병선(가수 주병선을 만들어주신 선생님), 김숙애
마술사 최현우(초등학교 시절 단짝 여자친구), 최양순(양어머니에게 구하는 용서)
가수 김종훈(무명시절에 도와줬던 후배 어머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시사만화가 박재동(초등학교때 4살 많았던 선배를 만나고 싶습니다.)

4.18. 2018년

4.19. 2019년

4.20. 2020년

4.21. 2021년

5. 논란 및 사건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개인정보 보호 개념이 희박했던 1990년대 당시 출연자와 찾는 사람의 주소가 그대로 전파를 타기도 했고 특히 출연자가 학교 친구나 은사를 찾을 경우 그 출연자뿐만 아니라 그들이 찾는 사람(일반인)의 생활기록부에 기재된 주소와 성적이 고스란히 공개되기도 했었다. 21세기 이후 이렇게 지상파 방송에서 민감한 개인정보를 공개하면 난리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1999년 유승준 출연 회차처럼 개인정보 공개 절차가 까다로운 미국까지 가서 스승의 신상정보를 무작정 캐려고 시도하거나 콩글리시를 남발하는 식의 글로벌 에티켓 문제가 방송 업계 차원에서 문제시되기도 했다.

1996년 6월 7일 전도연 편에서는 전도연의 초등학교 동창을 찾으러 새벽 1시 35분에 일반인의 가정집을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기도 했다.

슬픈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서 출연 연예인에게 전후 사정을 너무 뒤늦게 알려준다는 비판이 있다. 찾고 있던 사람이 고인인데 이를 사전에 알리지 않고 대뜸 묘지나 납골당으로 안내하고, 충격받은 연예인이 슬픔에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는 연출을 자주 사용했었다. 배우 원기준 편과 가수 김혜연 편에서 이런 연출이 특히 심해서 시청자들의 거센 비판[103]을 받기도 했다. #

2018 버전 25회 내과의사 남재현의 방송분 중에 학창시절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1982년도에 학생운동을 해 서울대 치대에서 제적당하게 된 사연을 말했다. 이어 두 달 반을 공부해 연세대 의대에 합격한 내용. 이 과정을 설명하던 중 CG로 서울대학교의 로고가 전파를 탔다. 하지만 실제 서울대학교의 로고가 아닌 중간에 '일베'가 영문으로 쓰여진, 일베에서 조작한 로고가 전파를 탄 것이었다. 그 전에는 예능국 연예가 중계도 일베 로고를 같은 날 2번 띄운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제작진은 "경위를 파악한 결과, 출연자의 출신 대학 로고를 CG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사내 아카이브에 보관 중인 검증된 이미지 대신 인터넷을 통해 다운로드한 이미지를 사용해 벌어진 일로 확인됐다"고 밝혔으며 "다만 담당자는 그동안 제작에 임하는 태도로 보나 평소 언행을 볼 때 일베 회원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없기에, 이는 오로지 관련 시스템을 충분히 숙지시키지 못한 제작진의 잘못이다"고 덧붙였다. 그로 인해 25회는 홈페이지에서 다시보기가 불가능하다.

[단독] 'TV는 사랑을 싣고' 일베 로고 사용 '파장 예고', 공식 입장.

시즌 3를 앞두고 새로이 영입된 MC 현주엽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데, 전문 방송인도 아니고 진행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발탁된 것에 대해 밀어주기 논란이 있다. 특히 현주엽은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도 프로그램 의도와 무관하게 먹방 유튜브 홍보로만 진행돼서 논란이 됐는데, TV는 사랑을 싣고에서도 내용에 현주엽의 먹방을 넣고 있어 시청자들의 불만이 많다.

6. 패러디

7. 여담

8. 둘러보기

파일:KBS 2TV 로고.svg 수요일 밤 9시대 프로그램
제보자들
(2020년 4월 8일 ~ 2020년 9월 2일)
TV는 사랑을 싣고
(2020년 9월 9일 ~ 2021년 6월 30일)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3
(2021년 7월 7일 ~ 2022년 4월 13일 )


[1] 그런데 이미 1994년 후반부터 사회자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쓰였다.[2] 1953년 생인 미국의 재즈 기타리스트다.[3] 기존 TV는 사랑을 싣고 체제(1기)로 554회 + 新 TV는 사랑을 싣고 체제(1.5기)로 251회.[4] 농담은 아니지만 약간 예능 같은 면도 있었다.[5] EBS 딩동댕 유치원의 전 MC가 아닌 한때 유재석의 매니저로 이름을 알린 그 김종석이다.(이 인물의 나무위키 문서가 없음.)[6] 해당 지역은 강원도, 충주시,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진주시, 대구광역시, 경상북도.[7] 해당 지역은 청주시, 전주시, 대전광역시,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창원시, 제주시.[8] 둘 다 초등학교 시절 은사를 찾았는데, 지승현의 은사가 중풍에 걸려서 방송 출연을 할 수 없었기에 스튜디오에 선물과 편지를 보냈으며, 김동완의 은사는 공부를 더 하겠다며 미국으로 갔는데 스케줄이 너무 많아 대한민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고 하며 전화통화로 대신 안부를 물었다. 그 당시 은사가 사는 곳의 시간은 새벽 5시였는데, 전화가 올 때까지 안 자고 기다렸다고 한다.[9] 여담으로, 김동완은 추후 재출연하여 중학생 시절 짝사랑했던 여성을 찾는데 성공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그 편이 지승현이 선생님을 찾으려 했는데 만남이 불발된 편이었다.[10] 당시는 국민학교.[11] 석광렬은 이 방송 후 3개월 남짓 지난 8월 1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12] 당시 '김현아' 명의로 출연.[13] 윤다훈과 군입대 전까지는 연락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투병을 했던 걸로 추정된다.[14] 이후에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하필 제작진이 찾아가기 바로 직전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영안실을 촬영했다고 설명했으나, 링크된 유튜브 영상을 통해 잘못된 정보임이 확인되었다.[15] 당시에는 '임경옥' 명의로 활동.[16] 현 서울특별시장[17] 더군다나 이때 동창들도 이춘란의 근황을 모르고 있어서 최수종 편을 본방으로 보고 있었다고 한다. 뒤늦게 이미 사망했다는 말을 들은 최수종은 "이럴거면 나오지 말라 그러죠..."라고 흐느꼈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춘란의 기일이 5월 15일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했다.[18] 해태 타이거즈에서 선수 커리어를 마감한 직후였다.[19] KBS 유튜브 채널 '같이삽시다'에선 1997년 11월 6일로 오기돼 있었으나, 이후 날짜 수정.[20] 정확하게는 이 사람이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21] 강부자가 굉장히 기뻐한 건 물론이고 객석에서도 박수를 쳤다.[22] 그런데 처음 등장할 때 지팡이를 짚고 도우미의 도움으로 나와서 무대까지 강부자가 부축했지만 나이를 생각했을 때는 굉장히 정정했던 편이다.[23] 이로 인해서 원로 연예인들이 은사를 찾을 때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면 당시 MC였던 이상벽이 이 회차를 항상 언급했다. 여담으로 당시 이상벽은 50살이었다.[24] 추적 중 선생님이 고인이 되었다고 말한 2명의 여선생님들이다.[25] 사실 최불암, 최진실 등 스튜디오에서 2명의 의뢰인이 나온 경우가 있긴 하나 이는 최초에 의뢰한 인물이 같이 나와서 부른 사례였고 처음부터 2명의 인물을 찾지는 않았다.[26] 동요 구슬비, 우리의 소원의 작곡자이다.[27] 85분 특집 방송.[28] 스승의 날 특집.[29] 회차 자막은 234회로 오기돼 있다.[30] 이후 2023년 김한국의 유튜브에서 자세한 이야기와 함께 다시 한 번 언급했다.[31] 국내에 있는 입양아 기록 보관소에도 50년대 입양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조병록과 같은 고아원 출신을 만나서 그 이름은 확인했지만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고 했다. 심지어 미 대사관 이민 비자 담당관도 찾아가 봤지만 1950년대 기록은 없다고 할 정도였기에, 직접 미국 비자를 발급(이 당시에는 미국 비자를 발급받아야 미국 입국이 가능했다.) 받아 미국까지 건너가서 한인 신문지 구인광고, 라디오 코리아 방송, LA 경찰서 수사 및 사고 기록 조회, 심지어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모임까지 찾아가는 대장정을 펼쳤지만, 한국 이름 하나만을 갖고 넓은 미국 땅에서 사람을 찾는 건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나 마찬가지였다.[32] 찾는 인물이 사망이나 기타 사정으로 인해 만남이 불발된 경우는 있어도 소재 파악 자체를 못 한 경우는 이 회차뿐이다.[33] KBS 유튜브 채널에선 일반인 나오는 부분은 대부분 통편집되며 아무래도 일반인의 사생활 침해 우려 때문인 듯.[34] <이장호의 외인구단> 등 출연.[35] 개그맨이나 부활의 보컬과는 당연히 동명이인이다.[36] 가족오락관 1080회(2006.02.18)방영분 중 폭탄선언에서 언급한지 12년만에 만났다.[37] 3기 첫 방송 후 처음으로 추적에 실패한 사례가 되어서 그냥 영상편지 보내는 걸로 방송이 마무리하긴 했는데, 이후 76화에 출연한 여에스더가 밝히길 방송 후 약 1~2주 있다가 이 사람이 그 방송을 봤는지 직접 남편 사무실에 전화를 해서 통화 목소리로나마 만나게 되었다고 후일담을 밝혔다.[38] 원래 단순한 팬이라도 가수 대기실에 들어갈 수 없었겠지만, 이 분만은 워낙 하춘화를 따른데다가, 특히 하춘화의 친아버지가 이 친구를 너무 예뻐했기 때문에, 이 분에게만 특별히 대기실 및 분장실 출입을 허용시켜 줬을 정도였다고 한다.[39] 그냥 이름으로만 부르고 다녀서, 처음 이 분을 소개할때도 성씨도 정확히 기억하질 못했다.[40] 방송 당시에도 직업(경매사)은 그대로 갖고 있으나, 충북 괴산의 은티마을의 산 중턱자락에 있는 조그만 주택에 기거하면서 속세와 거의 단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만남의 자리에서 이제는 그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할 계획이라고 했다.[41] 과거 건강검진 때 작은 뇌출혈 이력이 2번 있었다고 하여, 건강이 염려스러워서 명예퇴직을 결심했다고 언급했다.[42] 당시 <천년의 사랑>으로 엄청난 인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속사와의 불공정 계약으로 인해 수익은 거의 발생하지 못했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가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이 사실은 선생님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43] 사실 과거에도 홍기훈이 어린 시절 같이 살던 누나를 찾으러 왔을 때도 찾는 분의 본명을 전혀 모른 채로 출연했음에도 결국엔 찾아냈던 과거도 있었긴 했지만, 워낙 추적과정이 어려웠던지라, 최종 만남 장소로 가는 와중에 추적하는 과정을 따로 영상을 통해 보여 주기도 했다.[44] 몸이 좀 안 좋아서 정기 검진차 암센터에 간 것이라 해명했다. 다만 실제로 이전에 암에 걸린 병력이 있었던 것인지, 당시 암 치료 중이었는지 대해서는 방송에서 따로 언급이 없었다.[45] 작고한 원장 선생님은 2011년부터 치매를 앓아 고생을 하다 사망했다고 하니, 설령 생존했다 해도 홍인규를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46]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형제자매도 많았던 대가족이라, 중,고등학교도 다닐 수 없었고, 본인의 학창시절 중 유일하게 남은 기억이 초등학교 1,2학년때가 전부라고 술회했다.[47] 실제로 MC 윤정수가 사전에 만나서 설득하는 장면을 보여 주었다.[48] 방송 초기에 김인귀가 하남시로 이사가고, 나중에 찾으러 갔을 때는 비닐 하우스에서 나오는 모습을 봐서 매우 슬펐다고 술회했는데, 김인귀는 하남에는 가본 적도 없고, 비닐하우스가 아닌 신축 아파트(아파트만 덜렁 있고, 그 주변이 온통 비닐하우스였다고는 했다.)에서 살고 있었다고 말해 손헌수가 뻘쭘해 했다.[49] 해후의 자리에서 그동안의 근황을 전했는데, MBC 탈락후, 한 기업의 사내 아나운서로 6개월 정도 근무했다가, 본인의 적성과 꿈에 안 맞음을 느끼고 퇴사, 이후 친누나가 미국에 이미 갔기 때문에, 큰 물에서 놀아보자는 각오로 이민을 결심했다고 했다.[50] 위로 언니가 6명 있었는데, 다 어린 시절 폐 병으로 요절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페니실린 같은 폐 질환 치료제가 국내에 없던 탓에 언니들은 손을 쓰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장미화도 폐 질환을 앓았지만, 다행히 그 당시에 치료제가 들어온 덕에 기적적으로 살 수 있었다고 한다.[51] KBS 전속가수로 5년간 있으면서, 밤무대 가수 등을 전전했는데, 부모님이 결혼 전에 사망했고, 심지어 친동생도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생계를 위해 가수의 꿈을 포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수로서의 실력은 어디가지 않았는지 해후의 자리에서 그 당시 불렀던 팝송을 허스키한 보이스로 부르는 여유를 보여 주었다.[52] 정확한 사유는 나오지 않았지만, 김범수가 찾았던 성기동 선생님은 몸이 불편했고, 윤택이 찾았던 박재욱 선생님은 미국에서 생활 중이고, 방송 당시 코로나로 인한 규제가 심해져서 한국에 초대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대신 김범수가 성기동 선생님을 만나는 영상이 나왔는데, 건강해진 모습이었다. 윤택은 박재욱 선생님과의 영상통화로 인사를 전하는 형식으로 근황을 대신했다.[53] 현재 서울 서초구 원지동 원터골[54] 건강 365라는 라디오 방송으로, 기존 여성 MC가 당시 정애리였고, 그 당시 정애리와 더불어 건강 박사 전문가로 출연하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남편인 홍혜걸이었다. 아무 의도 없이 그저 남편을 위로하러 들렀던 여에스더를 보고서는 후임 MC를 고민하던 이원규 PD는 아무 방송 이력도 없던 그녀를 바로 후임 MC로 채택하기로 했었던 것이었고, 이것이 여에스더의 첫 방송 데뷔였다.[55] 여에스더는 경북 출신에 일본에서의 유학 경험 때문에 심한 사투리와 일본식 억양으로 방송 진행에 어려움이 겪었고, 스스로 외모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이 당시 남편 홍혜걸의 다양한 사업 벌리기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상황이었는데, 이원규 PD는 그녀의 발음과 억양을 교정해 줘서 방송인의 억양을 만들어 주었고, 늘 "대한민국 최고 미녀 MC"라는 칭찬을 해 주면서 여에스더를 1년 6개월 동안 MC로 이끌어 주었고 경제적 어려움도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56] 상술했듯 남편 홍혜걸과는 여에스더와 같이 프로그램을 했던 관계가 있는 PD였던 만큼 홍혜걸도 기꺼이 이 만남을 반겨 했을 것으로 보인다.[57] 당연히 남자아이가 가방 안에 화장품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선생님도 사실은 많이 당황했는데, 이를 혼내거나 지적하진 않았고, 그 당시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그냥 조용히 묻어둔 것이었다.[58] 여담으로, 김창옥은 성가대 활동 시절, 지휘자로서의 길을 권유했던 또 다른 은인, 같은 교회의 백창길† 장로에 대해서 언급했었고, 교인 수첩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안타깝게도 3년 전 별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59] 이는 SBS 시트콤 LA 아리랑과 비슷한 사례다. 주 4~5회로 방송되었던 1기와 구분을 위해 주 1회로 방송됐던 2~3기에서는 1회부터 다시 시작했다. 다만 LA 아리랑에서는 2기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3기가 시작되었다.[60] 만남의 자리에서 이유를 밝혔는데, 자신이 이 방송을 본 바로는 주로 여기에 그 스타에게 대단한 은인 같은 사람이 주로 나오곤 하는데, 자신은 딱히 해 준 것도 없는 것 같아 그랬다고 한다.[61] 신범식은 과민성 대장 증후군으로 인해 영화 출연 당시보다 30KG이상 감량된 상황이라, 좋았던 추억을 깨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함이 있었지만 과거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출연에 응했고, 주명철은 본인이 현재 활동을 안 하다보니,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괜히 고집 부려서 안 나갔다가는 서운해 할 거라는 판단에 두 번째 전화 때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62] 1970년 당시 <대한시스터즈>라는 명의로 활동했다. 만남의 자리에서 제작진들이 영상을 찍어서 보여 주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잊지 않고 찾아 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표했다.[63] 한국에는 어떠한 연고도 없으신 상황이라, 제작진 측에서 한국 도착 후 15일 시설 격리 기간 동안 직접 케어해 주었다고 한다.[64] 유산 이후, 신체적 건강에 타격이 있었고, 그런 와중에 지인들과의 안 좋은 일로 인해 심리적인 아픔까지 겹치다보니, 집과 직장 외에 외출을 일절 하지 않았던 것이 12년 넘게 지속되었다고 한다.[65] 당시 돈 100만원으로 현재 가치로 치면 약 1억원 정도라고 하는데, 이후 만남의 자리에서 직접 밝히기를 150만원을 빌려줬고, 그 중 50만원은 자신도 다른 친구에게 빌려서 대준 것이라고 했다.[66] 배일집의 가족들이 고3 이전까지만 해도 나름 잘 살았기 때문에 길영대의 가족들이 배일집의 집에서 셋방살이를 했었다고 하며, 배일집 결혼 후 5년 후에 본인이 결혼하면서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67] 빌려 준 혼수자금을 돌려받은 기억이 없다고 능청을 떨거나, MC 김원희가 배일집에게 소개팅을 주선해 줄 수 있냐는 한마디에 자연스럽게 배일집과의 티키타카를 뽐내서 MC들을 자지러지게 했다. 배일집이 원래 말수도 없고 조용한 친구였는데 아주 명랑해졌다고 감탄을 마다하지 않았다.[68] 1989년에 일본 유학을 가서 10년 동안 한국 방송을 본 적 없어서 한참 김송이 핑계걸이나 콜라 활동을 하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그 연예인이 자신의 제자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이 아이를 셋이나 잃는(병으로 사망, 유산, 자궁외 출산) 바람에 병원에 누워 있는데 김송과 친구들이 찾아온 것을 보고, 이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주겠다는 각오로 좀 더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도 이후 아이 둘을 더 낳아서 잘 키워 냈다고 한다.[69] 나중에 밝히기를, 방송국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다고 한다.[70] 공교롭게도 만나게 된 건 군대에서 후임으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71] 난청이 있으신 관계로 드라마는 잘 못 보지만, 그래도 꽃보다 할배가 제일 재밌었다고 하고, 유일하게 끝까지 보는 광고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광고라고 말해서 현장 분위기를 재밌게 해 주었다.[72] 이 날 만남의 장소를 가진 중식당은 85화 게스트였던 여경래 셰프의 중식당이었다.[73] 다만 당시 기혼자에 임산부였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봤을 가능성이 크다.[74] 만남 당일 친정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으로 모시러 가던 중에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75] 초등학교 때 유재환이 쓴 러브레터에 대한 답장 편지와 머플러를 선물로 주었다.[76] 홍지민의 아버지가 독립 운동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전해 들은 후 크게 감명을 받아 이들의 수업료를 면제하라고 했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고등학생이던 홍지민의 큰 언니에게는 유치원부 사범직도 맡겨서 눈치 보일 수 있는 부분을 막아 주었다. 이 이야기는 홍지민의 큰 언니가 직접 출연해서 회고했다.[77] 체육관으로부터 유능한 무도인을 경찰로 채용하고 싶다는 공문을 받고,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열심히 공부해서 당당히 합격했다고 한다.[78] 20여년 전에 밥집 어머니 식솔분들께 따로 방문해서 식사를 대접한 사실이 있다고 했는데, 그 때도 첫마디가 이만기의 안부를 묻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79] 연극 극단과 드라마 촬영 현장이 워낙 현장감이 달랐던 것도 문제였지만, 당시 황순선의 상대역이 당대 트로이카 중 한 명이었던 정윤희였던터라, 거기에서 오는 압박감이 워낙 커서, NG만 7~8번은 냈다고 한다. 하필 그 장면은 정윤희에게 따귀를 맞는 장면이었다. 지금은 그래도 웃으며 넘길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지, 정윤희가 아닌, MC 김원희가 상대역이었으면 한번에 OK였을 것김원희 의문의 1패이라든가, 서대문구 독립문만 봐도 마음이 떨린다는 농담으로 임혁과 MC들을 자지러지게 했다.[80] 같은 극단 후배이자, 배우로 황순선과 같이 극단 생활을 같이 해왔고, 임혁 보다도 먼저 알던 동료였기에 임혁에게 추천까지 했던 적이 있던 만큼 본인도 황순선을 꼭 만나고 싶다고 언급하기도 했다.[81] 아버지 사업 부도로 인해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줄리어드 예비학교 시험 치를 수 있게 저렴한 가격에 레슨을 받을 수 있게 해준 것은 물론, 카네기 홀 공연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유진박 어머님이 직접 송솔나무 어머님을 설득하였고, 200만원 짜리 공연 좌석 티켓을 건네 주어 이걸 팔아서 무대에 올라 가기 위한 공연비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한다.[82] 여담으로, 김명곤은 서편제의 감독이었던 임권택 감독을 중간에 만나는 시간을 가졌었다.[83] 이 날 따님을 같이 대동했는데, 딸이 마침 엄마가 서편제를 연기했던 12살이었고, 딸은 가야금 연주를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84] 계기가 되었던 것이 PD 재직 시절 마지막으로 맡았던 것이 바로 국풍81이었는데, 항목에 들어가 보면 나오겠지만 이게 순수한 목적의 축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대로는 자신의 신변이 위험할 것이다고 판단해 그 길로 사표를 쓰고 퇴직한 후 목회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고 술회했다.[85] 여성 소리꾼, 배우들로만 구성된 창극 공연 집단을 말하며, 진경이라는 이름은 당시 유명한 여배우 세자매 중 첫째와 둘째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날 찾는 인물 김혜리는 그 세자매 중 막내라고 한다.[86] 4년전 허리 골절을 당해서 평상시에는 바깥 출입도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대통령이 불러도 못 갈 정도였지만, 양택조가 보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는 처음으로 바깥 출입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87] 공교롭게도 방송 최초이자 유일하게 찾는 인물이 2회 연속으로 고인이 된 상황이 나오고 말았다.[88] 생전에도 왕종근이 자신의 친구였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던 것과 더불어 공교롭게 이 때가 의뢰인이 죽은 지 20주기가 되는 해였던 터라 왕종근이 직접 이렇게 찾아준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하다는 위로의 말을 전해주었다.[89] 허재를 포함해, 한만성(2000년 교통사고로 향년 38세로 사망), 이민형, 이삼성[90] 여담으로, 이삼성 선수를 찾고 싶어하던 사람이 한 명 더 있었으니, 바로 前 용산고 농구부 감독이었던 양문의 감독. 이 날도 중간에 출연하여 유일하게 연락이 안되는 아끼는 제자라고 꼭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고, 만남 후 저녁식사 자리에 같은 용산고 제자였던 이민형 감독과 같이 방문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제자 이삼성을 만나게 되는 뜻깊은 자리를 함께 했다. 여담이지만 공교롭게 이 날 만남 이후 1년 6개월 뒤에 양문의 감독님이 향년 78세로 별세했기 때문에 이 방송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찾고 싶었던 제자와의 만남이 끝내 이뤄지지 못할 뻔했다.[91] 그 때 특강을 해 준 것이 당시 연극 배우였던 진선규였다고 한다.[92] 데뷔작은 작중 하희라의 학교 친구 역.[93] 이때 사람을 찾기 위해 최수민 성우와 캐스팅 디렉터로 활동했던 양치승의 은인이었던 박태길의 도움을 받았다.[94] 뭉클티비에 올라가 있는 공식 영상 댓글 중 이용구의 딸로 추정되는 사람이 방송 업로드 후 1년 뒤의 시점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상이라며 영상을 내리지 말아 달라는 댓글을 올린 것으로 보아, 방송 당시 당뇨를 앓고 있다고 했는데, 방송 이후 병세가 갑자기 심해져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95] 군대 다녀온 것만 진실이고, 베트남전은 주변에 진짜 갔다온 사람들의 경험담을 그냥 그대로 얘기한 것 뿐이었는데, 박광수는 그게 너무 사실 같이 얘기해서 누구라도 진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96] 코치의 동생이 운영하는 칼국수 집에서 식사 자리를 마련했는데, 이 날 육상부 시절 회식 때를 떠올리게 하려는 의미로 원래 메뉴에도 없던 <돼지 불고기>를 특별히 요리해 내왔다.[97] 처음 스카우트를 위해 이봉주의 부모를 직접 만나서, 반대하는 부모에게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설득했던 일과 고 3때 학교 육상부가 해체되었음에도 육상부가 있던 광천고등학교로 갈 수 있었던 이유도 당시 광천고 육상부 코치가 자신의 후배여서, 직접 그 후배에게 <이 아이는 무조건 태극 마크 달 인재>라고 추천을 해 준 덕에 이봉주가 계속 육상을 할 수 있었던 일화를 술회했다.[98] 여담으로, 이 날 첫 촬영을 김형자 자택에서 진행했는데, 손수 MC들을 위해 이것저것 요리를 해서 MC들이 배불리 포식을 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99] 알고보니, 개명을 해서 현재는 "김영희"로 살고 있다.[100] 홍석관 선생님은 사실 아버지도 본인을 자주 만나러 오고 직접 전화도 걸 정도로 조관우를 끔직이 생각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날 아들이 그 당시 담임 선생님을 만난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조통달 선생님은 아들에게 영상편지로 사랑을 표현했다.[101] 상술한 기사를 쓸 당시에도 작은 분식집을 운영하고 있었다.[102] 아버지가 어릴 적 사망했고, 출생신고를 이모부가 해서 학창시절엔 이모부 성씨를 따랐다가, 군 제대 후 양자파기를 하면서 다시 친아버지 성씨로 돌아가게 된 것이라 설명했다.[103] 그나마 원기준에겐 윤정수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미리 미안하다는 언질을 줬지만, 김혜연은 아예 그런 것조차 없었기에 더더욱 비판이 많았다. 이후 찾는 사람이 고인인 경우 출연자가 가족을 먼저 만나서 가족들에게 직접 전후 사정을 듣는 식으로 연출 방식을 변경했다.[104] 여기서 MC는 김선응이다.[105] 이계인은 연극배우 준비생 시절 짝사랑하던 여선배를 찾았는데 정씨로 알고 있었으나 찾는 과정에서 전씨임이 밝혀졌고, 이민우 역시 아역배우 시절 짝사랑하던 어린이합창단 멤버였던 누나를 찾았는데 임씨로 알고 있었으나 이씨임이 밝혀졌다. 스티브 유는 은사를 찾으려 했는데, 줄리 김(Julie Kim) 선생님으로 알고 실제로 그 선생님을 찾았지만, 스티브 유의 추억 속 선생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입을 통해 실제 찾고자 하는 사람은 줄리 윤(Julie Yoon)이란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찾으러 가는 장면이 나온 적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