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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암

최희암의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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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기아 시절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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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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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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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2)
최희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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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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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학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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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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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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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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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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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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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농구 감독 겸 기업인
파일:external/dimg.donga.com/60604334.1.jpg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최희암
崔熙岩
출생 1955년 12월 24일 ([age(1955-12-24)]세)
전라북도 무주군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신장 177cm|체중 82kg
학력 휘문중학교 (졸업)
휘문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 /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체육교육학 / 석사)
미국 연방체육대학원 (박사)
병역 대한민국 해군 수병 만기전역
직업 농구 선수 (가드 / 은퇴)
농구 감독
기업인
실업 입단 1977년 현대 농구단
소속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선수 현대 농구단 (1977~1982)[1]
감독 연세대학교 농구부 (1986~2001/2001~2002)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2002~2003)[2]
동국대학교 농구부 (2005~2006)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2006~2009)

1. 개요2. 일생
2.1. 선수 경력2.2. 지도자 경력2.3. 지도자 은퇴 이후
3. 모습4. 저서5. 수상 경력6. 기타
6.1. 공놀이 명언
7.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농구인, 기업인.

1955년 전라북도 무주군에서 태어나서 휘문고등학교(66회),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농구부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명감독으로 ‘농구대잔치’의 최전성기를 이끌었고 이후 프로 농구단 모비스전자랜드의 감독직을 역임했다.

운동 능력 대신 두뇌 플레이, 투지로 신화를 만든 농구 지도자로 유명하며, 겉으론 부드럽지만 쇠고집 때문에 아내로부터 '철인 28호'란 별명이 붙었다. 그 외에 선수 때 악바리 근성에서 비롯된 '아카징키'[3], 돌보다 단단한 독종 근성에서 비롯된 '돌빠구' 등도 붙었다.

2. 일생

2.1. 선수 경력

초등학교 시절 달리기에 소질을 보였으나 휘문중 시절 당대 장신인 168cm짜리 키가 담임교사의 눈에 띄면서 농구에 입문했다. 다만 실력으로 연세대 입학을 못하게 되자 예비고사를 보고 공부로 대학에 입학한 특이하고 드문 케이스이다.

2016년 2월 5일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농구 특기생으로 입학하지 못한 일화를 소개.
“중·고등학교 때 농구를 하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시험 치르고 연대 들어가는 내가 대견했던지 휘문고 감독님은 물론 교장선생님까지 연세대 농구부를 찾아가 최희암이란 애가 입학하면 농구부로 받아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제자가 농구로 대학 진학을 못하게된 데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들의 도움 덕에 1974학번으로 농구부에 입단했다. 그런데 체육특기자로 뽑힌 선수들의 실력은 대단했다. ‘불멸의 가드’로 불린 인창고 박수교, 고교 최고 센터인 용산고 신선우가 내 동기였다. 실력이 뛰어난 동기가 많다 보니 내겐 출전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다. 2학년 때 반짝 활약했지만 1학년 후배들로 신동찬, 박인규 등이 입단하면서 다시 벤치로 물러났다. 당시 국가대표 선수 12명 중 연세대 출신이 6명이나 됐을 정도로 다들 실력이 좋았다. 6명 모두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아마추어 농구지도자로 명성을 날린 딘 스미스 감독으로부터 직접 농구를배운 도널드 휴스턴이란 사람이 연세대 농구부를 찾았다. 이화여대 교환교수로 오신 분인데 학교 측의 주선으로 우리 학교에서 농구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딘 스미스의 농구가 무엇인지, 그가 어떤 기술을 전파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 그 시간이 향후 지도자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동기생 신선우, 박수교, 장봉학과 1년 후배 신동찬, 박인규 등이 모두 대표팀에 나가 있는 동안 학교에 남은 최희암은 딘 스미스에게 농구를 배운 도널드 휴스턴을 만났고, 그로부터 프리징 플레이(freezing play), 페이크 스위치(fake switch), 트래핑 디펜스(trapping defense) 등의 기술을 배우게 됐다.
“그때 농구부에서 통역 가능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그분의 말을 통역하고, 그분이 가르치는 새로운 기술의 농구를 배우면서 농구에 푹 빠져 지냈다. 그때 김영기 감독(현 KBL 회장)과 김인건 코치가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있었는데, 연세대 농구부와 세 차례 연습 경기를 했다. 우리로선 주전 멤버들이 모두 대표팀에 나가 있던 터라 2진 선수들을 데리고 연습경기를 치렀는데 휴스턴이 알려준 기술로 경기를 풀어가면서 대표팀을 상대로 한 번 지고, 두 번을 이겨버렸다. 김영기 감독이 얼마나 화가 나고 창피했겠나. 주전도 아닌 후보들이 뛰는 상대한테 두 번이나 졌으니. 나중에 우리한테 다가와선 ‘도대체 그 기술이 뭐야?’라고 물으시더라. 김영기 감독도 그때 처음으로 ‘프리징 게임’ ‘런 앤 점프’ 같은 용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대학 졸업 후 현대에 입단한 최희암은 당시 팀을 이끌던 방열 감독에게 휴스턴으로부터 배운 전술 노트를 모두 건넸다고 한다.
“방열 감독이 연세대 경기를 지켜보신 터라 그 전술에 대해 매우 궁금해하셨다. 그래서 내가 기록해놓은 노트를 모두 드렸다. 딘 스미스 감독이 한국 농구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대학 시절에 농구 실력에서 동기생들인 박수교, 신선우 등에 밀려 출장 기회를 많이 잡지 못했던 그는 1977년, 실업농구팀인 현대 남자 농구단에 입단하여 잠깐 교체멤버로 활동했으나, 선수시절 내내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데다 박수교, 신선우 등 동기들에게 밀려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79년에는 황유하, 이문규, 이종호[4], 권경구[5] 등이 입단하면서 또 후보선수 신세로 전락한 채 해군에 입대했고, 해군 농구단에서조차 마찬가지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해 제대 후 1982년에 은퇴하였다.[6]

2.2. 지도자 경력

파일:external/www.donga.com/200312050241.jpg
전성기인 연세대 감독 시절
이후 현대건설에 몸담으며 1985년 이라크 바그다드 지사에서 근무한 바 있었고, 이듬해 귀국해서 삼일중학교 체육교사로 재직하다 모교인 연세대학교 농구부의 김동원 감독이 갑작스레 물러나자 감독대행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1986년 3월 연세대 코치로 부임했는데, 후임 감독이 올 때까지만 팀을 맡는 한시적 감독 대행이었다. 그런데 후임 감독이 17년 뒤에 오더라(웃음). 처음에는 잘 가르치고 열심히만 하면 좋은 성적이 나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 좋은 선수를 모으는 것이 70%, 잘 가르치고 관리하는 것이 30%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스카우트에 힘을 쏟게 됐다.”
이후 정식 감독으로 승격하여 중앙대에 밀려 침체하는 팀을 살리고자 맹훈련으로 리빌딩에 착수했고, 먼저 정재근이상범, 오성식, 문경은, 이상민 등 고교농구의 특급 유망주들을 낚아챘고, 거기에 김훈, 우지원, 서장훈, 황성인, 조상현 등을 입학시켜 완전체를 만들었다.

또한 문경은을 연세대로 스카우트했을 때도 이렇게 말하길,
“당시 경은이는 광신상고에 다녔는데 이 학교 농구부장이 경희대 농구후원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광신상고 선수들은 경희대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직접 농구부장을 만나보니 문경은을 데려가고 싶다고 한 감독은 처음이라고 했다. 다른 대학 감독들은 광신상고와 경희대의 관계를 의식해 미리 포기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경은이를 데려가려면 동기생 4명을 다 데려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순간 큰 결심을 했고, 경은이와 다른 3명의 선수를 다 데려왔다. 그게 ‘신의 한 수’였다. 경은이가 연세대의 기둥 노릇을 맡게 됐으니까.”
그의 감독 커리어에서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연세대학교 감독 시절 그는 철저하다못해 극단적인 분업 농구의 신봉자였다. 선수들의 역할을 철저하게 분업화하고, 외곽 슈터 중심의 농구를 통해 연세대를 강팀으로 만들었다. 실업팀과 대학팀을 망라한 농구대잔치에서 3차례 우승했고, 특히 1993~94년 시즌 우승은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우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문경은 SK 감독은 인터뷰에서 감독 최희암을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연습할 때는 ‘독사’나 다름없는데, 경기할 때는 선수들에게 무척 살갑게 대한다고 했다. 선수들이 실전에서 자신이 가진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얘기다. 문 감독은 연세대 시절 최 감독의 강권에 못 이겨 하루에 슈팅 1000개씩을 쏘며 지옥훈련을 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연대 농구부 제자였던 김수환은 다른 팀보다 확실히 2배 이상의 다양한 전술을 운용해서 머리를 많이 쓰게 하는 감독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선수들에게 굉장히 가혹한 지도자로 얼음물에 속옷만 입고 들어가기, 시궁창에 빠트리기, 속옷만 입고 산을 타게 하는 등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는 듯한 훈련으로 악명이 높아 중도 포기자들이 속출할 정도였다. 특히 우지원은 오빠부대 앞에서 혼쭐나다 못해 최희암 감독이 무서워 도망치는가 하면 문경은은 가혹한 훈련으로 농구를 포기하겠다며 최희암에게 독대를 요청했고, 서장훈은 최 감독의 훈련에 반발해서 탈출을 시도했다. 또 김훈은 고향에서 전지훈련 당시 대전고와 연습시합하다 부진하여 부모와 친지, 동문들 앞에서 최 감독에게 매를 맞는 등의 일화가 있었다. 다만 선수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과학적인 훈련과 선진화된 전술에 감화되어 최 감독을 점차 인정하고 따랐다.

또 그는 열린 사고로 팀을 운영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연세대가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할 때 내가 고려대 출신의 이우재 선생을 코치로 모셔왔다. 학교 측에선 라이벌 고려대 출신을 연세대 코치로 임명하는 데 반대했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선수들에게 다양한 농구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겨울휴가 때면 선수들을 용산고, 휘문고 등으로 ‘단기 유학’을 보냈다. 서장훈, 문경은 등 핵심 선수들을 모두 고등학교로 보냈다. 나보다 더 훌륭한 지도법을 가진 선생님으로부터 실전 농구를 배워 오라는 의미였다. 농구를 배울 수만 있다면 어떤 상황도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내 철학이었다. 배우는 걸 부끄러워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최희암을 설명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게 ‘패턴 농구’다. 그가 패턴 농구에 빠진 계기는 인디애나대 농구감독 밥 나이트의 농구이론 서적이다. 이 책에 나오는 농구 기술을 연세대에 맞는 훈련으로 접목하면서 팀워크를 중요시하는 패턴 농구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공격하는 상황에서 패스를 주고받다가 완벽한 슛 기회를 만들어 성공률이 가장 높은 슛을 던지는 작전이다. 서장훈이라는 ‘빅맨’. 문경은 우지원 김훈의 막강 공격력, 팀을 진두지휘하는 이상민의 영리함이 최희암의 패턴 농구를 완성시켰고, 성적으로 그것을 증명했다.
“내가 대학 팀 시절 우승을 밥 먹듯 한 데에는 상민이와 장훈이가 큰 역할을 했다. 두 선수가 연세대에 오지 않았다면 그런 성적을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장훈이가 상민이를 무척 좋아했다. 상민이 따라서 연세대에 온 것도 사실이고. 상민이가 심지가 깊어 장훈이를 살뜰하게 챙겼다. 상민이는 대학 4년 동안 한 번도 속을 썩이지 않았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받아들였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마디로 팀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아이였다. 반면에 장훈이는 개성이 강한 만큼 논리적인 설명을 들이대며 접근해야 했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터라, 감독이 우격다짐으로 몰아쳐도 절대 수긍하지 않았다.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면 쉽게 받아들였다.”
이 시스템 하에서 연세대 선수들은 철저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분담하며 무시무시한 포스를 발휘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선수들은 자신에게 특화된 역할 이외에는 큰 발전을 보이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가 슛하는 기계 취급을 받던 문경은우지원. 또한 고교 시절 194cm 장신 가드로 대활약하며 당시 국대 장신화에 목매던 농구계가 기대한 유망주 김택훈파워 포워드로 전향시킨 뒤, 단순한 리바운드나 수비만 맡기면서 결국 전체적 기량을 퇴보시킨 과오도 있다.[7][8]

‘코트의 마법사’로 불리며 '아내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남자'를 컨셉으로 한 CF까지 찍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지만, 그의 성공 뒤에는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프로화 반대의 선두에 서서 농구팬들에게 비난을 받는가 하면 1998년 김수환 선수 파동으로 1년간 자격정지를 받았다.

그 후 김동우박광재, 전병석을 스카웃해서 제36회 전국대학농구연맹전 1차대회 우승[9]을 이끌었다.

2001년 김남기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총감독으로서 일선에서 퇴진했으나, 동년 12월 3일 김남수 코치가 휘문고로 떠나자 감독직으로 되돌아갔다. 2002년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現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본인이 밝힌 프로 진출 이유는
“이전에도 몇 차례 프로팀 감독 제의가 있었다. 그때마다 아내가 ‘남의 자식만 키우지 말고 우리 아이들 교육에도 신경을 써달라’고 만류하는 바람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큰아이가 2002년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프로행을 결심했다. 솔직히 말해서 돈도 작용했다. 대학 감독 월급이 프로 감독 연봉의 40%만 됐어도 학교에 남았을 것이다. 연세대 감독 시절, 남들은 내가 돈을 많이 벌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인들 경조사 때 축의금, 조의금 넉넉하게 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유명해지면 돈도 좀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프로행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강동희, 김영만 트레이드와 우지원 영입 등의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색깔 지우기 작업으로 비난을 받았다. 감독을 맡자마자 실업 기아자동차 시절부터 팀의 주축이었던 중앙대 출신들을 모두 정리하면서 사실상 팀을 공중분해시키고 그 자리를 자신의 제자들인 연세대 OB들로 채워버린 것인데 결과는 폭망이었다. 첫 해였던 2002-03 시즌에는 6위로 간신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2003-04 시즌에는 성적 부진으로 중도 사임했다. 그리고 그 시즌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는 꼴찌를 했다. 그나마 혁신적 시도를 한 게 원로 농구지도자 이우재를 KBL 최초로 코치로 모신 정도였으며, 감독-코치 관계를 나이와 학력으로 따지는 우리나라 농구 풍토에선 파격적이었다.

이후 MBC와 MBC ESPN에서 해설위원을 역임하다 2005년부터 최성오 감독이 떠난 동국대학교 농구부 감독직에 앉아 1년 간 지휘했다. 본인은 그 시절을 ‘회춘한 1년’이라고 회상했다. 당시 동국대학교는 분위기가 엉망이었는데, 최희암은 기강을 잡은 후 동국대학교를 종별대회 준우승으로 이끄는 등 성과를 거뒀고, 기승호·김강선·천대현 등을 프로팀에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다가 2006년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現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의 감독으로 임명돼 2008-09 시즌까지 팀을 지휘했다. 부임했을 당시 2시즌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던 전자랜드를 맡은 최 감독은 연세대학교 시절 제자였던 최병훈을 매니저로 영입하는 등 팀을 꾸렸다.

하지만 2006~2007시즌 정규리그 9위(23승31패)에 이어 2007~2008시즌에는 29승 25패를 기록하고도 KBL 사상 최초의 다승 원칙으로 7위로 밀려나며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됐다.

계약 마지막해였던 2008-09 시즌에는 '국보급 센터' 서장훈을 트레이드로 영입해 당시 팀 역대 최다 연승인 8연승을 거두며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10] 그해 우승팀이었던 전주 KCC를 상대로 5차전까지 끌고가는 등 나름 선전했기에 전자랜드팬들에게 긍정적인 면모로 남았다. 그러나 전자랜드 구단은 팀이 중위권으로 오른 만큼 새 리더십이 필요하단 판단하에 최 감독과 재계약을 포기하고 박종천 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본인 말로는 그 무렵 뒤늦게 깨달은 리더십이 전자랜드 감독으로 갔을 때 빛을 발했지만, 또 다시 성적 부진 책임을 지고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자존심 상했냐고? 전혀 그렇지 않았다. 프로에선 트레이드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내 의지대로 선수를 스카우트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간을 갖고 차분히 기다렸어야 했는데, 빨리 뭔가를 보여주려고 무리수를 뒀다. 사람은 세월을 잘 만나야 하는데, 나로선 그때 프로 감독이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월이 날 배반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 외에도 인기가 있었을 적 차범근처럼 초중고 학생들을 상대로 '최희암 농구교실'을 차려 농구 꿈나무를 가르치기도 했고, 한겨레정보통신 측도 인터랙티브 교육용 CD-ROM <슬램덩크 최희암의 농구교실>을 낸 바 있었다.

2.3. 지도자 은퇴 이후

2009년 전자랜드를 떠난 뒤 그해 11월 전자랜드의 관계사인 고려용접봉 대표이사 홍민철[11]의 권유로 스카우트되어 중국 다롄법인 사장으로 갔다가 2014년 귀국 후 고려용접봉 본사가 있는 경남 창원공장 사장으로 금의환향했고, 2016년에는 공동 대표이사까지 달았다. 쇠를 다루는 회사이다 보니 건설 현장, 조선소, 자동차 공장 등을 돌며 새로운 영업 파트너를 구축하고 있다고. 부회장으로 영전하였다고 한다.

2015년 4월 14일자 KBS2 우리동네 예체능에서 간만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기에서 '그 전엔 연세대 감독이었는데 지금은 고려XXX 사장으로 있습니다'라며 셀프디스(?)를 했다.[12]

고려용접봉 사장인데도 여전히 농구를 잊지 못해서인지 가끔씩 창원 LG의 홈 경기를 보러 간다고 전했다.[13]

과거 감독으로 있던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가 창단 22년만에 2018-19 KBL 챔피언결정전 진출에 성공하자 영상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2020년 1월 17일 비디오머그에 출연해서 팬 서비스에 대해 인터뷰했다. 지금의 팬 서비스 문제는 선수들이 승패에 너무 집착해서 생기는 현상이며, 경기는 지더라도 팬 서비스는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선수 개인의 문제가 아닌, 스포츠계 전체가 선수들에게 팬 서비스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하고 팬들과 접촉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년 2월 15일엔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

2021년 11월 11일, 제 1회 용접의 날에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

2023년 7월 12일, FIBA 3x3 홍천챌린저 조직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3. 모습

그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악바리 근성을 보여줬는데, 해군 복무 시절에는 공부할 겸 연세대 숙소까지 찾아와 후배들에게 윗몸일으키기 1,000회, 운동장 구보 등 체력훈련을 시켰고, 실업 선수 시절엔 어떤 부상을 당해도 빨간 약만 바르고 일어섰다. 감독으로선 경기 1주 전부터 이발을 하고 매일 목욕을 하며 음주를 하지 않고, 경기 중에는 벤치에 앉기 전 기도부터 하고 경기가 안 풀리면 흥분하지 않기 위해 안경을 치켜올리기도 한다. 그 외에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 마작을 즐기기도 한다.

전성기였던 연세대 감독 시절 경기에서는 인자하고 침착한 이미지를 보여주었지만, 임기 초반 2~3년 동안 정신이 없어 흥분하며 화를 내는 일이 잦았고, 심판들에게도 신경을 쓰는 일이 많다가 배구계의 명장 이창호 전 미도파 감독에게서 "특급 코치라는 건 말이 없는 법이다"라는 말을 듣고 지도방식을 바꾼 일화가 있었다. 연습과 훈련 때만큼은 욕설과 구타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혹독하게 선수들을 몰아붙이는 스타일이었다. 연세대 체육관에 농구부 연습을 보러갔다가 최희암이 선수들을 혹독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마치 지킬과 하이드같다며 쇼크받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정도이며, 중도 포기자도 속출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 천하의 서장훈조차도 입학 직후 최희암의 폭언과 기합을 견디다 못해 농구부를 무단 이탈했을 정도였다.[14] 그래도 최 감독은 도망가는 선수들을 잡진 않았으며,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스타일이었다.

다만 경기 도중에는 나름 선수들에 대한 배려로 절대 욕설과 손찌검을 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대학농구 감독들이 경기 중에도 욕을 입에 달고 작전타임 때 선수들에게 방송카메라 앞에서도 대놓고 폭력을 행사하는 게 흔했던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라도 배려해준 게 이례적이었다고 봐야 한다.[15] 또 선수들에게는 농구 외에 학업에도 충실할 것을 강조하며 외부 강사를 모셔서 강연을 듣게 하고, 불우아동 시설도 방문하도록 했다.

선수 처우에 대한 상반된 모습들과 비슷한 모순이 팬서비스에서도 나타나는데, 본인은 팬서비스와 관련한 명언으로 자주 회자되는 사람이지만 정작 감독으로 재임했을 때는 본인에게 다가오는 팬들에게는 꽤 무례했다는 증언들도 들려온다. 물론 선수와 감독의 팬서비스를 동일선상에서 놓을 수는 없으나, 구시대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코트 밖에선 가족에게는 다정다감한 사나이로, 선수들과 회식할 때마다 가족도 대동했으며 독서와 신문 구독에도 열의를 보인다. 또 학구열도 높아 영어에도 능통했으며 1999년 미국연방체육대학원(USSA) 박사학위도 땄다.

최희암이 감독을 하기 이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방열, 박한, 김인건 등 일부를 뺀 농구팀 감독들은 운동복 차림으로 코트에 나타났는데, 이는 실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다. 하지만 최희암이 정장 차림을 즐겨 입었고, 그와 연세대 농구팀의 성공을 계기로 농구팀 감독들이 정장을 입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4. 저서

5. 수상 경력

6. 기타

6.1. 공놀이 명언

너희들이 볼펜 한 자루라도 만들어봤냐? 너희들처럼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하는 데에도 대접받는 것은 팬들이 있기 때문이다. 팬들한테 잘해야 한다.
ㅡ 1990년대 초반 절정의 인기와 기량을 구가하던 연세대 농구 스타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서장훈에게

팬 서비스의 중요성을 역설한 명언으로 다른 스포츠의 팬들도 팬 서비스가 좋지 못한 선수에게 자주 인용하는 문구이다.

호날두 노쇼 사태 논란때도 화제가 되었다.

2019년 11월 23일에 있었던 프로농구 KCCKGC와의 홈경기에서 26점차 대패를 당했는데, 대패도 대패지만 하이파이브를 위해 손을 내밀던 어린아이 팬을 그냥 무시하고 가버리는 팬서비스 소홀 논란이 일어나자 이 말이 다시 한번 회자되었다.

2020년 1월 17일 비디오머그에 출연해서 직접 이 발언을 재연했다.영상 해당 영상에서 그는 왜 이 말이 명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선수들에게 누누히 강조하던 말이었고,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

그럼에도 최희암의 애제자이자 한국 농구의 레전드인 서장훈과 이상민은 선수 시절에는 팬 서비스가 좋지 않았다. 그에 반해 문경은과 우지원은 그래도 좋은 편에 속했다. 팬서비스에 대한 괴담이 존재하는 서장훈, 이상민과 달리 문경은과 우지원은 아무 얘기가 없었다는 것 자체가 그래도 팬 서비스가 괜찮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

7. 참고 문헌



[1] 1979~1981년까지 해군 복무[2] 시즌 도중 자진 사임[3] 머큐로크롬, 즉 빨간약을 일컫는 일본어로 선수 시절 부상을 당해도 빨간약만 바르고 다시 코트로 돌아온다고 하여 붙은 별명이다.[4] 1983년경부터 22년 간 모교인 한양대학교 농구부 코치로 일하며 김용근 및 김춘수 감독을 보좌했으며, 2020년 4월 작고.[5] 1981년 은퇴 후 건국대학교 감독, 한국대학농구연맹 이사, 한국 주니어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한국여자실업농구연맹 사무국장, 태평양 및 외환은행 여자농구단 감독 등지 역임.[6] 1952, 1953, 1955년에 각각 창단한 해군, 공군, 육군 농구단은 1984년 국군체육부대 출범과 함께 통폐합됐다.[7] 후에 김택훈은 프로에 들어오고 몇 년 뒤 다시 가드로 포지션 변경을 시도했지만 나이도 이미 30대인데다 파워 포워드로 뛴 지 오래되어 더 어정쩡하게 되어버렸다. 김택훈의 기량 퇴보는 골수 농구팬들이 최희암을 제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8] 그나마 올라운더였던 이상민의 경우는 그의 재능을 아껴 하고싶은대로 하도록 놔둔 편이었다. 당시 국보급 센터로 촉망받던 서장훈 역시 마찬가지.[9] 고려대학교,중앙대학교와 공동우승[10] 당시 전자랜드가 번번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인사이드의 안정감이 부족하다는 것이 주된 평가였다. 서장훈의 영입은 그 빈 조각을 정확히 맞춰줄 수 있는 것이었다.[11] 홍봉철 전자랜드 회장 겸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구단주와는 형제 관계다. 홍민철 회장이 홍종열 창업주의 셋째 아들인데 바로 위에 홍영철 고려제강 회장이 있고 막내가 홍봉철 회장이다.[12] 연세대를 나와서 연세대 농구부 감독을 했는데 지금은 라이벌 학교의 이름과 비슷한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약간의 드립. 물론 고려용접봉과 고려대학교는 전혀 무관한 관계다.[13] 아마 고려용접봉 회사의 소재지가 창원이어서일 듯.[14] 서장훈의 경우 연세대로 진학을 결정한 이유 중 하나가 최희암의 인자해보이는 이미지였다고 회고했을 만큼 그 충격이 더더욱 컸다고 한다. 이에 서장훈 본인 증언으로는 무단 이탈은 사실이지만 나가면서 "차라리 농사나 짓겠다."는 당시 발언은 이야기가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부풀려진 것이라고 한다.[15] 울산 모비스의 유재학 감독이 작전타임 도중에 함지훈이 말을 안 듣자 입에 테이프 붙이는 시늉을 했다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걸 감안하면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