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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2:22:44

백남봉

백남봉의 주요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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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화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0년
이름 백남봉
분야 코미디언
화관문화훈장(5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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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봉
白南峰
파일:1280448065_128044804430_20100731.jpeg.jpg
본명 박두식 (朴斗植)
출생 1939년 2월 6일
사망 2010년 7월 29일
활동 1962년 ~ 2010년
종교 불교

1. 소개2. 생애3. 여담4.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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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원로 코미디언.

2. 생애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 방화마을 출신#이며 1944년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어릴 적 전쟁과 피난을 경험한 그는 한때 고아원에서 자랐다. 구두닦이와 장돌뱅이 등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서민의 정을 느낀 그는 1962년 유랑극단을 거쳐 1967년에 물랑루즈쇼단으로 희극인 활동을 시작하여 1969년동양방송 라디오 《장기자랑》이란 프로를 통해 방송에 데뷔했다.

성대모사란 특기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는데 《석양의 무법자》 휘파람 소리와 각종 동물 울음소리, 뱃고동 소리, 총소리과 말이 달리는 소리 등을 흉내내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취객·오징어구이 연기에도 능하였다. 또 선배 남보원과 함께 투맨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팔도 사투리에도 능했던 그는 원맨쇼의 달인으로도 평가받기도 했다. 그리고, 노래 실력도 좋았으며 그가 부른 대표적인 노래는 "청학동 훈장나리"가 있다.

또 영화에도 출연해 1970년에 편거영 감독의 영화 《팔도 가시나이》와 《예비군 팔도 사나이》등에도 출연하였다. 또 KBS 1TV《전국일주》, SBS 출발! 모닝와이드등에도 나왔으며 케이블TV 방송 실버TV의 TV 프로그램《백남봉 쇼》를 2009년 4월까지 진행하였다.

그의 피겨 스케이팅선수 출신의 탤런트 박윤희로, 드라마 《간 큰 남자》에도 출연하는 등 연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또 아버지와 함께 백남봉 쇼를 진행하였다.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00730002934c000c010-001.jpg
백남봉의 영정사진[1]

평소 자전거 타기를 즐겼는데 2009년, 자전거를 타던 중 사고가 나서 부상으로 생긴 늑막염 수술 도중 왼쪽 가슴에서 폐암이 확인되어 10시간의 대수술을 받고 이후 회복되는가 했지만 상태가 다시 악화되면서 2010년 7월 29일 목요일 아침 8시 40분에 폐렴 증세의 악화로 인해 72세로 사망했다. 사후 화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백남봉이 사망하자 그를 동생처럼 아끼던 선배 코미디언 구봉서가 고령의 불편한 몸을 이끌고 문상을 와서 "이 놈이 살아 생전 성질이 급하더니... 형을 놔두고 동생이 먼저 갔다. 아주 나쁜 놈이다." 라며 통곡하였다.

3. 여담

딸의 회고한 생전의 백남봉은 굉장히 엉뚱하면서 유쾌한 사람이였다고 한다. 딸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면서 명절용 식용유 세트를 준비했다거나, 사람들 많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딸 준답시고 여성용 속옷을 거리낌없이 주는 바람에 딸이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들을 1990년대 초중반 예능 프로그램에서 백남봉 부녀가 직접 재연하기도 했다.

한때 전국노래자랑의 초대가수로 나온 적이 있었다. 사실 초대가수 이전에도 2000년 신년 특집으로 등장하기도 했으며 그가 초대가수로 첫 등장한 시기는 2006년 하반기 쯤으로 추정된다.

가요무대에서 서울구경을 부른 적이 있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23화에도 언급이 되었는데 당시 노구는 차남 노홍렬한테 백남봉보고 사회를 부탁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거절해 노구는 심통이 나서 홍렬의 가게에 삽으로 인분을 퍼와 가게 앞에다 인분을 퍼부었다.웬그막판 "똥이나 처 먹어, 이 새끼들아!!!!!!!!"

4. 앨범



[1] 이렇게 웃는 영정사진인 것은 백남봉의 장례식이 희극인 장으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원래 번잡스럽지 않게 치르려고 가족들이 바라서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했던 영정 사진은 일반적인 모습의 영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