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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영화)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181818><tablebgcolor=#181818>
임권택 감독 장편 연출 작품
,(1980년 이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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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 (1993)
西便制 | Sopyonje
파일:mwzvdUS.jpg
<colbgcolor=#222><colcolor=#fff> 감독 임권택
원작 이청준
각색 김명곤
제작 이태원
기획 이태원
촬영 정일성
편집 박순덕, 박곡지
음악 김수철
미술 김유준
제작사 태흥영화(주)
출연 김명곤, 오정해, 김규철
개봉일 1993년 4월 10일
관람객수 (서울 개봉관) 1,035,741명

1. 개요2. 등장인물3. OST4. 흥행5. 평가6. 인터뷰7. 수상8. 여담

[clearfix]

1. 개요

1993년 대한민국에서 제작되어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소설가 이청준의 연작 단편소설 "남도사람"의 1부 《서편제》와 2부 《소리의 빛》이 원작이다. 김명곤, 오정해, 김규철 등이 주연하였으며 김명곤이 영화 시나리오 각색을 겸임하였다. 흥행 문단에서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이 작품은 한국 최초로 공식적 관객 숫자 100만 단위를 넘긴(서울 기준) 영화이다.

2. 등장인물

3. OST

메인음악 '천년학'

김수철이 맡은 사운드트랙도 대박을 거뒀다. 영화 대박 속에 이 앨범도 무려 70만장이 넘게 팔리는 대박을 거둬들여 국내 OST 앨범에서도 대박을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김수철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홍보용으로 몇백장만 찍고 정식 발매는 안하려고 했다고 한다. 발매 이후 영화의 성공과 함께 엄청난 주문이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한 것.(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그리고 서편제 OST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데... 서편제에 수록된 가장 유명한 곡인 '천년학' 의 작곡 비화는 영화 촬영기간인 5개월 동안 작곡 작업을 했으나 한 줄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임권택 감독이 내일 모레 음악 가지고 오라고 했고 "대금으로 연주한다" 라는 생각만 가진 상태에서 다음날 (임감독이 얘기한 전날) 녹음실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대금 연주자가 악보를 달라고 했는데 빈 악보만 가지고 있어서 내가 쓴 게 없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고 스튜디오 한켠에 있던 피아노 앞에서 25분간 써내려간 곡이 그 유명한 '천년학'이다(꿈꾸는 사람들의 바이오그래피 - 김수철 편).

또한 '소리길'은 다양한 TV 프로그램에서 BGM으로 사용되었다.
삽입곡 '소리길'

4. 흥행

1993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종로3가)에 있는 고풍 영화관이었던 '단성사[9]'에서 개봉하였으며 서울 개봉관 관객 103만명을 동원하였다.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서울 관객 100만을 넘겼다. 이후 쉬리가 나올 때까지 6년 동안 한국 영화 역대 흥행 1위 자리를 고수했다. 그 해 개봉작으로서도 클리프행어, 쥬라기 공원에 이어 흥행 3위였다.[10] 이 영화 총 관객수의 추정통계[11]는 290만 정도이다.[12] 비록 국내 한정이지만 세계적인 대박작인 클리프행어와 쥬라기 공원과 흥행 순위를 다툰 대박 작품이었다.

어지간한 블럭버스터급 외화도 서울관객 100만 명 정도면 뉴스에 나오던 시대였다. 사랑과 영혼이 서울 152만, 전국 350만 정도 관객이 보았다고 집계되었는데 당시 영화지나 신문에서는 충격이라는 반응이었고 이문세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이에 대하여 경악을 금치 못했다. 1991년 개봉작 흥행 1위였으며 초대박을 거뒀다는 늑대와 춤을이 서울관객 98만 명, 터미네이터 2조차도 서울 92만 관객을 기록했다. 게다가 당시는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 한국 영화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던 시기였고,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의 전체 점유율도 10%-20%대 정도에 머물고 있었다.[13] 그런 상황에서 아무도 흥행할 거라고 예측 안했 던 영화가 할리우드 영화와 맞먹는 국내 관객 수를 냈으니. 그리고 이 영화의 개봉으로 인해 당시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사실 서편제는 흥행에 큰 기대를 안 하고 만든 작품이었다고 한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로 태흥영화사에 큰 수익을 안겨준 임권택 감독은 오랫동안 연출을 준비해왔던 작품인 태백산맥을 드디어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땐 아직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이라 좌우익의 대립을 주제로 다룬 태백산맥을 개봉하기에는 여전히 꺼림칙한 시대분위기가 남아있었다. 그때가 1992년 경이었는데, 어차피 그 해 연말 대선에서 당선되든지간에 민간정권이 들어설 테니 조금만 기다렸다가 정권이 바뀌면 그때 태백산맥을 제작하자는 쪽으로 영화사 측과 합의를 보게 된다. 그렇게 해서 1년 정도 시간이 붕 뜨게 되었는데, 평생 영화만 100편 가까이 만들었고 1960년대에는 한 해에 서너편씩 연출하는 건 예삿일이었던 임감독이 그냥 놀고 있을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차피 노느니 간단한 거 하나 만들어 보자 하는 생각으로 흥행 신경 안 쓰고 만든 작품이 바로 서편제였다고 한다.[14] 그런데 그 결과는 초대박.[15]

단성사 한 극장에서만 194일(또는 196일) 동안 상영한 후 같은해 11월 26일까지 서울의 9개 극장을 옮기며 231일간 연속 상영을 이어나갔다. 이 때문에 역대 영화 중 가장 오래 연속 상영한 영화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멀티플렉스도 없던 시절 반년 넘게 상영되었기 때문에[16] 깰 수 없는 기록으로 남을 듯했지만, 신카이 마코토가 연출한 날씨의 아이가 2020년 6월 17일부터 메가박스 군자점에서 200일동안 상영되면서 박스오피스 최장 연속 상영 타이틀을 내주게 되었다.

5. 평가

당시 서구 문화의 개방으로 되려 전통 문화를 낡았다며 무시하는 경향이 있던 일부 사람들의 눈길조차 돌릴 정도로 한국적인 미를 잘 살린 작품.

판소리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외면 받아왔던 대한민국의 다른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영화이다. 영화 장면마다 '진도 아리랑', '춘향가', '심청가' 등 판소리 노래들이 등장했으며 판소리에 대한 구절 대목도 등장한다. 참고로 맨 마지막 대목 송화가 심청가를 부르는 대목은 나이 든 명창의 소리가 필요했기에 성우가 더빙했고, 소리 또한 안숙선 명창이 대신했다. 하지만 나머지 판소리는 오정해가 직접 불렀다. 본래 오정해는 배우 생활을 하기 전에 김소희 명창의 제자(안숙선 명창도 김소희 명창의 제자 출신)로서 체계적으로 판소리를 배운 국악인 출신이었다. 이후에도 연기자보다는 국악인으로서의 활동이 더 많다.

6. 인터뷰

유봉이 소화를 눈멀게 한 것에 관해
정성일 : 맨 처음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장님 만든다는 설정에서 어떤 정서적인 느낌이 드셨어요?

임권택 : 굉장히 거북했지. 지나치다는 생각을 했다고. 이거는 참 지나치다...

정성일 : 유봉이 소화에게 마지막으로 마치 유언하듯이 "알고 있었지? 그러면 용서하겠느냐?" 하니까 송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때의 송화의 감정을 연출할 때 그 마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 :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받아들였고. '한()'을 시인 구상 씨는 체관(諦觀)이라고 하던데 그런 개념으로 받아들인 거요.

정성일 : 그러고 나서는 유봉이 죽는 장면을 그냥 건너뛰었습니다.

임권택 : 그럼. 그게 큰 얘기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정성일 : 그래도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세 사람 중의 하나고...

임권택 : 근데 아주 중요한 얘기가 거기서 끝났잖아요. 죽을 때 해야 되는 얘기가 미리 다 나와버렸으니까. 이를테면 이런 거요. 자기 딸년 눈멀게 하는 대목도 그냥 넘어갔지요? 그걸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서 사람의 감정을 끌어낸다면 연출자로서는 그렇게 좋은 대목이 없는데도요. 그러나 그런 걸 지나쳐가기로 결심한 거요. 왜냐하면 그런 재미를 주다가 내가 진짜 노리고 있는 소리와, 이 사람들의 삶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그 합일의 세계를 알아차리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것이기 때문이요. 오히려 나는 정말 외면하다시피 그 대목을 건너뛴 거요. 유봉의 죽음도 마찬가지요. 사람의 죽음이라는 게 누구나 죽는 건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서로 그 대답을 주고 받았을 때 그 다음은 더 이상 보여줄 필요가 없는 거요.
정성일과 임권택의 대담 中 [17]

영화 결말에 관해
정성일 : 동호하고 다시 만난 뒤에 다시 떠나는 송화의 모습에서, 사실 영화가 개봉할 당시에도 질문 드렸지만, 지금 돌이켜 보아도 여러 오해를 무릅쓰고 송화를 소녀에게 이끌려 떠나보내는 결말을 선택하실 건가요?

임권택 : 그거는 마찬가지요. 문제는 걔가 송화가 낳은 자식이냐, 아니면 동네 누군가가 안내하냐 하는 것인데, 근데 나는 그런 관심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그것은 송화의 아이여도 상관없고 동네 아이여도 상관없다고. 왜 그러냐면 이 장님을 그 눈길에, 먼 데 어디까지 보내는데 혼자 보낼 리 없다고. 주막집 주인 저한테도 잠시 머문 여자인데. 그러면 누구라도 붙였을 것이고, 혹시 자식이라면 자식인 대로 같이 가고. 요컨대 그것이 겨울이지만, 판소리가 완전히 시들어버린 세상을 가고 있지만 언젠가 저런 어린 생명력처럼 불씨로 남아서 살아낼 것이다라는 쪽으로 봐주기를 원하는 거요. 판소리의 생명력 같은 것을, 물려주어도 그거는 그 삶 속에서 발전할는지는 몰라도 그런 어린 생명을 딸려 보냄으로써 판소리가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의 씨앗처럼 보이게끔 찍어낸 거요. 애의 빨간색 코트가 인상적이지 않았어요?

정성일 : 동화와 송화, 그리고 유봉 세 사람 중에서 유독 얼굴을 안 보여주는 사람은 송화입니다. 더군다나 눈을 잃고 난 다음에는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임권택 : 우선 송화가 얼굴을 정면으로 많이 드러낼 만한 인물은 아니요. 이 이야기 구조에서 송화만 특별히 자꾸 찍어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 아이가 장님이 된 이후에는 아버지가 자기 눈을 그렇게 만든 것을 결국 알잖아요. 그렇게 시련 속에서 살아간 사람이 없지요. 그러니 늘 무표정하지요.
정성일과 임권택의 대담 中 [18]

7. 수상

8. 여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서편제를 관람하기도 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것의 예시로 자주 인용되기도 했다. 대통령선거 출마 전에 정계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단성사에서 관람했으며, 이 때 오정해를 알게 된 김대중은 오정해의 결혼식 때 주례를 맡았고, 오정해는 김대중의 장례식에서 만가를 불렀다.

한때 단성사 바깥에 걸려 있던 서편제 영화 포스터 간판 중 '송화(오정해)' 가 입었던 갈색 한복 상의 부분이 장기간 햇볕의 자외선에 노출된 탓에 색깔이 바래져서 영화관측이 이 부분을 새로 덧칠했던 에피소드도 있었다.

주인공 일행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멀리서부터 돌담길을 따라 걸어오는 롱테이크 씬이 굉장히 유명하다. 이곳은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있는 청산도. 청산도 슬로길 1코스를 돌면 지나갈 수 있는데, 1코스의 이름도 이 영화 이름을 따서 '서편제길'이라고 붙였다. 드라마 봄의 왈츠 등 몇 편의 드라마가 이 섬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영화의 남주인공 동호 역을 맡은 김규철은 1960년생으로, 누나인 송화 역을 맡은 오정해보다 11살 많고 아버지 유봉을 맡은 김명곤과는 8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판소리에서 북을 담당하는 '고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경험 많은 배우를 기용해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청년기부터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고 남동생이 아닌 오빠, 혹은 삼촌처럼 보이는 미묘한 갭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유튜브에 이 영화를 공개했다가 2017년 4K 복원을 완료해 블루레이 출시할 예정인지라 잠시 내렸는데, 다시 올라왔다. 2017년 7월 6일 블루레이가 출시되었다.

유봉 역을 맡았던 김명곤은 2021년 3월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당시 서편제에서 아역 배우로 나왔던 김송과 29년만에 만났다.#


[1] 유봉은 당시 그 약을 '몸을 보호하는 약(藥)' 이라고 거짓말을 했다.[2] 유봉에 의해 땅에 씨암탉의 털을 묻어서 지푸라기로 가렸고 닭주인이 나타나 지푸라기를 치우고 털을 확인해보니 오리털이 아닌 유봉이 서리했던 씨암탉의 갈색털로 확인되었다.[3] 연기 외에도 이 작품에서 각색 담당도 직접 하였다.[4] 이렇게 자신에게 학대에 가까운 호통, 약을 먹여 눈을 멀게만드는 등 양부인 유봉이 수양딸 송화에게 한 행적을 보면 송화도 정말 이정도면 엄청난 대인배다.[5] 영화 평론가 정성일과의 인터뷰집인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권 308페이지에서 인용하면, 임권택 감독이 의도한 바는 이렇다. "그거를 송화가 낳은 씨냐, 아니면 동네 누구가 안내하냐 하는 것인데, 근데 나는 그런 관심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게, 그것은 송화의 애여도 상관없고, 동네 애여도 상관없다고. 왜 그러냐면 이 장님을 그 눈길에, 먼 데 어디까지 보내는데 혼자 보낼 리 없다고, 주막집 주인 저도 살 붙이고 산 년인데, 그러면 누구라도 붙였을 것이고, 혹시 씨라면 씨인 대로 같이 가고. 요컨대 그것이 겨울이지만, 판소리가 완전히 시들어버린 세상을 가고 있지만 언젠가 저런 어린 생명력처럼 불씨로 남아서 살아낼 것이다라는 쪽으로 봐주기를 원하는 거요. 판소리의 생명력 같은 것을, 물려주어도 그거는 그 삶 속에서 발전할는지는 몰라도 그런 어린 생명을 딸려 보냄으로써 판소리가 살아날 수 있는 생명의 씨앗처럼 보이게끔 찍어낸 거요. 애의 빨간색 코트가 인상적이지 않았어요?"[6] TV는 사랑을 싣고 김명곤 편을 통해 현황이 밝혀졌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국악을 계속하였고, 지금도 국악인으로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7] 나중에는 송화의 '松花' 도 마찬가지로 그려주었다. 하지만 이 당시 송화는 이미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기 때문에 그림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8] 여기서 유봉이 훌륭한 판소리 실력에도 불구하고 유랑생활을 하는지 이유가 나왔다. 유봉의 판소리 스승에게 첩이 하나 있었는데, 유봉은 그녀를 연모하는 감정을 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분노한 스승은 유봉을 파문시켰다. 훗날 스승은 죽으면서 자신이 사망한 지 5년이 지나면 유봉의 파문을 해제하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자존심이 센 유봉은 방랑의 길을 택한다.[9] 종로3가역 사거리에 위치해 있던 구 CINUS 단성사, 현재는 폐관하여 '단성골드빌딩'이라는 일반 상가가 되었음[10] 이 흐름은 이후로도 쭉 이어져 대한민국 영화는 중박 이상의 작품들을 계속 만들어내며 존재감을 어필하다가, 쉬리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할리우드 대작영화들과의 국내경쟁에서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로 발전하였다.[11] 공식통계도, 확정통계도 아닌 추정치. 왜 추정통계만 있냐면, 멀티플렉스가 도입되기 이전이라 대부분의 상영관들이 단관극장이었고. 관객 집계도 수작업으로 되었다는 데 기인한다. 그나마 서울 개봉관은 배급사에서 직접 집계했지만 지방은 집계도 하지 못했다.[12] 현재와 직접비교는 어렵지만 요즘 시대에 멀티플렉스로 개봉했다면 천만 정도는 됐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영화 총 관객수는 1980년부터 1999년까지 스크린 쿼터제로 인해, 대략 4000만에서 5000만명대 박스권에 갇혀있던 시절이었고, 2억명을 넘는 2010년대와는 영화시장이 비교도 할수없이 작았다.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관람하는 등 각종 단체/학교에서 단체관람이 많았고, 재개봉관을 제외한 개봉관 공식 집계만 했던 당시 관객수를 몇배로 해야 하는지는 각자 판단바람. 참고로 쉬리, 친구의 경우, 총 관객수는 서울관객수의 3배 정도였다.[13] 작품성뿐만 아니라 흥행 경쟁력에서 한국 영화계가 할리우드와 동등해지거나 할리우드를 능가하게 된 건 쉬리가 개봉한 뒤에야 가능했다.[14] 사실 서편제의 구상은 10여 년 전부터 하고 있었다고는 한다. 그렇지만 외모와 판소리가 동시에 가능한 여배우를 찾기가 어려워서 그냥 보류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TV에서 오정해를 발견하고는 드디어 서편제에 어울리는 배우를 찾을 수 있었다고.[15] 하지만 그 이듬해 정작 잔뜩 신경써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제작한 태백산맥의 흥행 성적은 서편제와는 정반대의 성적을 거뒀다.[16] 아래에 있는 포스터 비화도 그 때문이다. 반년 넘게 직사광선에 노출된 포스터가 멀쩡했을리가...[17]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 임권택·정성일 대담, 현실문화연구, 2003, p.299·303~304[18]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2》, 임권택·정성일 대담, 현실문화연구, 2003, p.308~309[19]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신인여우상, 촬영상, 한국영화 최다관객상.[20] 심사위원으로 온 올리버 스톤이 오정해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제에 출품작 일로 참석해 이 영화를 본 북한 영화인들이 저질이라고(...) 홀로 깠는데 정작 북한 출품작 영화들은 듣보잡 악평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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