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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8 17:54:41

장군의 아들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181818><tablebgcolor=#181818>
임권택 감독 장편 연출 작품
,(1980년 이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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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이전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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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국산 1위 흥행 영화
1989년
서울무지개
1990년
장군의 아들
1991년
장군의 아들 2
1991년 국산 1위 흥행 영화
1990년
장군의 아들
1991년
장군의 아들 2
1992년
결혼 이야기
장군의 아들 (1990)
The General's Son
파일:장군의 아들 포스터.jpg
장군의 아들 2 (1991)
The General's Son 2
파일:장군의 아들 2 포스터.jpg
장군의 아들 3 (1992)
The General's Son 3
파일:장군의 아들 3 포스터.jpg
<colbgcolor=#22373a><colcolor=#fff><rowcolor=#fff> 1편 2편 3편
감독 임권택
원작 홍성유
《장군의 아들》
각색 윤삼육, 김용옥 이윤택 김홍준
제작 | 기획 이태원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박순덕 박순덕, 박곡지
음악 신병하
미술 도용우 김유준
출연 박상민, 신현준, 김승우[1], 이일재
장르 시대극, 액션
제작사 ㈜태흥영화사
개봉일 1990년 6월 9일 1991년 7월 20일 1992년 7월 11일
개봉관 단성사 피카디리 단성사
관람인원 678,946명 357,697명 162,600명
1. 개요2. 특징3. 주요 출연진4. 후시녹음 성우진5. 줄거리
5.1. 1편5.2. 2편5.3. 3편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유명한 주먹패였던 김두한의 이야기를 다룬 동명의 소설이 원작. 감독부터가 범상치 않은 거장 임권택.[2]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부작 시리즈로 개봉한 한국 영화사에 전설과도 같은 작품으로, 이 때까지 사랑 이야기나 드라마가 주류를 이루던 한국 영화에서 사상 처음으로 본격 시도된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할 수 있었다.[3]

개봉 당시 서울에서 집계된 것만 68만 관객으로 한국 최다 흥행기록[4]이었다. 이후 3편까지 연달아 제작, 개봉되었다. 2탄 역시 1991년 당시 한국영화 최고 흥행성적을 올렸는데, 서울에서 35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 시나리오는 홍성유가 쓴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며, 윤삼육 작가와 도올 김용옥이 같이 썼다. 상영시간은 108분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이 밑바닥 생활에서 시작하여 종로 주먹계를 평정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단, 원작과 비교할 때 각색이 매우 심했다. 특히 절대로 일본옷밖에 입지 않는 하야시가 시리즈 전편에서 일본옷 뿐만 아니라 가죽재킷, 양복을 입고 나오는 장면은 원작을 아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개그.

나름 커버하는 시간대가 넓은 시대물임에도 은근히 정확한 연표를 짜기 힘든 영화기도 한데, 시대극이면 흔히 보여주는 OO년 이런 식의 자막을 안 보여주기 때문. 그래도 다양한 힌트들로 대강의 흐름은 알 수 있는데, 특히 이중 흥미로운 것은 영화를 통한 시대 배경을 알려주기이다. 1편에서 김두한이 처음 조직에 들어올 땐 변사가 해설을 하는 무성영화를 상영하는데, 2편에서 김두한이 어느 정도 컸을 때의 극장은 유성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장군의 아들에서 극장은 1930년 전후를 절묘하게 구분해주는 구두점 역할을 한다.

장광은 2편과 3편에서 김두한 목소리를 연기했다.

2018년 9월 30일 EBS에서 화면을 리마스터하여 방영하였고, 2019년 2월 말 드디어 3부작 블루레이로 출시된다. 리뷰는 여기서 볼 수 있다.[5]

2. 특징

여러모로 한국 영화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영화이다.

첫째, 주연과 조연 배우 대부분을 당시에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무명 배우들을 파격적으로 새로 뽑아 흥행시킨 덕에 한국 영화배우들의 세대 교체[6][7] 를 이뤄냈다. 박상민, 신현준[8], 이일재, 김승우, 김형일[9] 같은 배우들은 대부분 90년대 후반까지 영화계에서 주요 배우들로서 입지가 상당했으며, 그 이후에도 연예계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다.[10] 송채환역으로 나온 권소연은 아예 예명을 이 영화를 계기로 송채환으로 바꿨을 정도.[11] 그 중에서 하야시의 나이는 30대 초중반으로 설정되었는데, 오디션에 합격한 신현준의 나이는 당시 갓 스무살이었다. 또한 실제 일본인 배우로 착각했다는 반응도 많았지만, 명문대에 재학중인 대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충무로 영화사에서 그를 캐스팅하기위해 신상정보를 캐려고까지 했었다.[12][13][14] 이 외에도 조재현, 차인표가 이 영화의 오디션에 응시하려고 했었다고도 하며, 배우 황정민[15], 개그맨 김진수[16]도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하였다.[17] 무술감독을 맡았던 정두홍도 1탄[18]과 2탄에서[19] 잠깐 출연했다. 그리고 박상민, 신현준, 이일재는 이 영화로 국내 영화제의 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둘째, 당시 액션씬 촬영 노하우나 스턴트 배우 등에 대한 개념과 인식도 드물었는데 이후 그 분야의 교과서적인 영화로 자리잡고 해당분야 인력들에게 경험을 제공했다. 2편에서 뜨내기 총각으로 출연했던 정두홍은 지금도 대한민국 영화에서 격투, 액션씬의 제 1인자로 손꼽히고 있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당시 장군의 아들 시리즈의 무술감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두홍이 아니라 김영모였다. 1980년대 초~중반생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스트리트 파이터 가두쟁패전> 실사판에서 주인공인 류를 연기했다. 정두홍은 당시 신인이라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었고 주인공 김두한의 액션대역과 전체적인 액션연기는 김영모가 담당했다. 임권택은 주먹패를 소재로 한 영화인만큼 액션에도 큰 공을 들여야함을 잘 알고있었는데 김영모 이전의 액션감독은 홍콩 권격영화같은 딱딱한 동작의 액션이었기에 임권택은 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싶었다. 그때 김영모가 발탁이 되었는데, 김영모가 임권택과 제작진에게 자신이 벽을 옆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자 모두들 기겁을 하며 "혹시 저 사람 마약을 한거 아닙니까?"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영모는 그때까지 틀에 박히고 상투적인 액션을 벗어나 이후에도 한국영화 액션의 지표를 열었다고 평가받을만큼 화려하면서 박력넘치는 액션을 선보였다. 때문에 장군의 아들 성공에 김영모의 공은 아주 지대한 것임이 틀림없다. 제작진 중 한명은 "두꺼운 코트를 입은 상태에서도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날렵하고 화려한 동작을 선보인 그의 액션이 없었다면 장군의 아들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물론 부작용으로 집단 패싸움-> 주인공의 돌려차기나 뒤돌려차기-> 나가 떨어지는 악역들(...) 이라는 아주 전형적인 독창성 없는 패턴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최소한 장군의 아들 시절에는 그런 점도 굉장히 적었다. 액선은 지금 봐도 기가 막힌다. 철권을 눈으로 플레이하는 듯한 박진감 넘치는 합이 일품으로 발차기를 했을 때의 타격감이 멋있다투퍽! 공중콤보도 가끔 보인다. 캐릭터에 맞게 다양한 액션도 볼 수가 있는데, 김두한의 날렵한 발차기, 쌍칼의 나이프 파이팅, 하야시 패거리의 일본도, 김두한 사단의 연장질(종로꼬마의 날렵한 액션과 김무옥[20]의 유도 등등) 다양한 액션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셋째, 한국에서 쉬리 이전까지는 한국에서 사실상 유일무이한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다. 사실 이전에도 있기는 있었다. 60년대에 21세기 기준으로 50억 이상 정도의 작품들이 있었으나(예: <성웅 이순신>,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등), 문제점은 한국의 일단 만들고 보자라는 생각 때문에, 제작비 중 일부분은 스태프나 배우들의 치료비로 쓰였고, 총을 쓰는 장면에서는 공포탄 대신 실탄을 쓰는 등, 차마 말도 못할 일들이 많았다.[21] 하지만 70년대 오일쇼크 이후 많이 줄어들었고, 이후 장군의 아들이 나올 때까지는 소규모, 독립영화 등이 만들어졌다.

다만 아쉬운 건 갈수록 흥행이 팍팍 내려갔다는 점. 1990년 여름에 개봉한 1편은 개봉 흥행 2위로서 당시에 엄청난 대박흥행을 거둔 사랑과 영혼에게 압도적으로 밀렸다고 해도 90년 11월말에 개봉한 사랑과 영혼 이전에 모처럼 한국영화가 외화까지 제치고 흥행 1위를 기록한 당시 크나큰 대박 흥행이었다. 다른 경쟁작도 다이 하드 2토탈 리콜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과 맞붙어 제치고 기록한 흥행이었다. 하지만, 1991년에 개봉한 2편은 전편 반토막 흥행인 서울 35만 관객을 모았다.[22] 그래도 2편의 경우엔 그 해 한국 영화 흥행 1위였다. 다만 그 해 외화들이 무더기로 흥행에 성공한 게 많아서 많이 묻혔다. 1991년 초에 개봉한 개봉작 1위 늑대와 춤을이나 91년 여름 같은 시기에 개봉하여 흥행 2위 터미네이터 2, 3위인 나 홀로 집에 같은 영화들이 경쟁작이었으니...... 덕분에 1991년 개봉작 전체 흥행에선 9위로 겨우 10위 안에 턱걸이했다.

그리고 1992년작인 3편은 서울 16만 관객으로 개봉작 흥행 26위라는 가장 부진한 흥행을 거두며 결국 막을 내린다. 그 이유는 같은 시즌에 개봉한 최민수주연의 '결혼이야기'가 전국 52만 관객으로 개봉작 흥행 4위라는 빅 히트를 기록하던 상황에서 개봉했었기 때문이었고,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앞두고 당시 대중문화계의 관심이 덜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90년대 작품답지 않게 후시녹음으로 배우들의 육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 성우들의 목소리도 좋긴 했으나..

1편이 대박을 거두자 당연히 아류작도 나왔다. 시라소니 이성순을 모델로 한 시라소니도 서둘러 개봉했으나 서울 10만 관객으로 금세 잊혀졌다.[23]

한편, 2008년 난데없이 임권택감독이나 시리즈 판권을 가지고 있던 태흥영화와 별도로 김두한의 아들이자 영화사 파인트리엔터테인먼트의 김경민 대표가 난데없이 4편을 감독하겠다고 발표했다. 임권택 감독은 자신에게 말도 없이 만드는 것에 대하여 서운한 감정을 내비쳤고 태흥영화사는 새롭게 장군의 아들 리부트로 만들면 만들지, 왜 멋대로 4편이란 제목을 쓰냐면서 불쾌한 태도를 보였으며 김을동 의원(김경민과 어머니가 달라서 남남으로 지낸다)은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에 대하여 요즘에 4편이 나온다면 올드팬에겐 추억이 될지 몰라도 현대의 빠른 액션물적으로 젊은 관객들에게 과연 통할까라는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다. 무엇보다 차라리 나온다면 2002년 당시 야인시대가 성공을 거둘 때라면 모를까 너무 늦었다는 평도 많았다. 2010년대에도 야인시대가 성공을 거두고 있긴 하지만 액션과 전혀 다른 방향이라서 논외...

4편은 '테러리스트', '나에게 오라', '김의 전쟁' 등을 감독한 김영빈이 메가폰을 잡는다고 하더니만 2009년 나올 예정을 넘어서 현재까지도 그 어떤 제작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으며 파인트리엔터테인먼트 영화사는 일체 다른 영화 제작한 게 없다. 다음 카페에서도 2009년 날짜로 장군의 아들 4 오디션을 언급할 뿐. 여러 가지 사정으로 4편은 나오기엔 사실상 엎어졌다.

여담으로 대사의 대부분은 후시녹음으로 나오는데 이를 위해서 몇몇 배역의 대사는 배우가 아닌 다른 성우들의 것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주인공인 김두한(박상민)의 목소리부터가 다른 성우의 목소리. 이는 박상민이 직접 고백하기까지 했다.[24]

후시녹음과 관련해서는 꽤 재미 있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박상민이 무릎팍도사에서 직접 밝힌 바로는, 박상민은 후시녹음 당일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이 더빙하는 줄 몰랐다고 한다.. 후시녹음일이 정해지고 박상민도 녹음실에 가서 대본 연습을 하는데 가만히 듣자하니 옆에 앉아 있던 성우 백순철이 김두한의 대사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던 것. 박상민이 당황해서 "아니, 선배님! 왜 선배님이 제 대사를 연습하세요?"하고 백순철에게 묻자, 백순철 역시 당황하며 "응? 자네 얘기 못 들었나?" 대답했다고(백순철은 박상민이 자신의 연기에 어떻게 목소리가 입혀지는지 보려고 왔다고 생각한듯). 그제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성우로 대체한다는 걸 알아챈 박상민은 무척이나 씁쓸해했다는 후문. 아무리 신인 배우였다지만 이건 아무 통보도 안 해 준 감독의 잘못이 크다. 아니면 연기가 뭔지 직접 느껴보라고 충격 요법을 쓴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방식은 박상민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느냔 말도 있다. 그리고 이게 듣는 사람한테나 재미있는 이야기지 박상민이나 백순철한테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

후시녹음을 두고 현장녹음이 아니니 배우의 연기를 100%느끼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아쉽다는 의견이 있긴하지만 당시 박상민, 신현준, 이일재 등 배우들이 신인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연기야 그렇다쳐도 이런 느와르 영화에서 어울리는 발성이 되지 않으면 분위기를 살릴 수 없다. 성우들은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나 실제 배우들이 연기한 것에 목소리를 넣어주는 것이지만 그 효과는 이로 말할 수 없다. 목소리로만 따진다면 일반인은 물론 수준급 배우들보다도 훨씬 뛰어난 성우들이다. 신인배우들의 연기와 유명 성우들의 후시녹음이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를 높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김두한을 사사건건 괴롭히는 조선인 형사가 등장하는데, 개봉 당시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2010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겨우 야인시대의 미와 와사부로 정도만 기억하고 있어도 "이 사람 뭔가 김두한의 사정을 알고 나름 지켜주려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근사근하고 친근하게 말한다. 거의 모범수가 만기 채우고 석방될 때 "다시는 이런데 오지 마라."며 등 두드려 주는 나이 많은 교도관처럼 정겨운 느낌마저 든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실적인 악질 고등계 형사 같은 말투를 쓰지는 않는다.는 얘기로 이 캐릭터가 딱히 김두한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는 아니며, 오히려 미와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의 행동을 충분히 보여준다. 작중 행적을 보면 영화관 기도와 싸웠다고 1년 넘게 통돌림시키고, 동료의 애인을 위한 돈을 훔치기 위해 폭행 및 절도 범죄를 저지른 김두한을 이리저리 돌아댕기며 추궁, 의심했으며 축구 선수들과의 폭력 사건으로 잡혀온 김두한의 그곳(...)을 발로 가격하기도 한다. 심지어 김두한에게 구타당하여 반병신이 되었음에도 끝까지 김두한을 잡기 위해 그 소식을 사람들에게 묻곤 한다. 말하자면 말투와 행동 사이의 갭이 쩔어준다.라고 할수 있다.

이 영화에서 무술감독을 맡은 김영모는 후에 스트리트 파이터 가두쟁패전에서 리우 역으로 출연하였고, 나중엔 합기도 도장 관장님이 되셨다고 한다. 스트리트파이터 리우의 근황 그리고 3편에서 나오는 3명의 일본 제국 육군 헌병 유단자들 역시 가두쟁패전을 열심히 봤다면 굉장히 낯익은 얼굴들이다. 첫 번째 상대는 가두쟁패전에서 빈슨(베가), 두 번째는 규리(가일, 1~4회 한정), 세 번째는 장지아프(장기에프) 역으로 나왔다. 왠지 강함의 순서는 거꾸로 된 것 같지만.

12년 후 야인시대가 방영하면서 장군의 아들이 재조명되었다.

현재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유튜브에 무료공개하여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다. 단, 모바일 지원은 막혀있어 PC로만 감상할 수 있다.

3. 주요 출연진

4. 후시녹음 성우진

영화 끝에 나오는 후기 스텝롤에도 성우진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1~3탄에서 혼용으로 나왔던 일본어 대사와 3탄의 중국어 대사는 일본인중국인 출신 감수자로부터 감수를 받아 특히 일본인 및 3탄의 중국인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대사를 사용하였다.

5. 줄거리

5.1. 1편

김두한의 성장 과정을 담았다. 무사시를 물리치고 경찰을 폭행해 잡혀간 김기환을 대신해 종로파 두목이 된다.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 관계였던 김동회(이일재)는 하야시편으로 변절해 버리고, 하야시의 생일파티장에서 김두한과 김동회는 결전을 벌인다. 김두한이 김동회를 이기고 하야시 부하 수십명을 때려눕힌 후 마지막에 하야시와 눈싸움을 하고 하야시는 쫄아서 눈깔고 김두한은 하야시를 비웃으면서 부하들과 나간다 하야시는 그냥 있었다

5.2. 2편

김두한에게 패하여 분한 하야시는 김두한을 잡아들이고, 김기환을 아군으로 삼아 종로를 장악할 음모를 꾸민다. 이 과정에서 김동회는 변심한 것에 대해 후회를 느끼게 되고, 끝내 하야시의 혼마찌깡에서 물러나 술집에서 알게된 송채환[42]이라는 여인과 만주로 같이 떠나려했다. 그러나 김두한이 헌병 장교를 구타하는 바람에 헌병대에 잡혀가게 되고 김두한이를 꺼내주기위해 송채환이 헌병대장에게 몸을 바치고 떠나버린다 그리고 김동회도 김두한에게 욕하고 떠난다. 어느 날 김두한의 부하가 돈 많아 보이는 촌놈[43]에게 돈 뜯으려다가 역관광.. 더욱이 이 촌놈에게 허리가 부러지고 장기손상까지 입어버리는 바람에 막대한 치료비가 필요해지자 하야시의 이름을 악용하여 크게 한탕을 치게 되는데[44], 이 사건을 계기로 김두한과 하야시는 다시 한 번 결전을 벌이게 된다.

5.3. 3편

하야시 패거리에게 쫓기게 된 김두한은 원산행 기차에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구한다. 그 때 원산 시라이에게 쫓기고 있던 무명가수 장은실(오연수)을 구해준 인연으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김두한은 만주로 피신한다. 장은실은 종로에서 유명한 가수가 되었고, 그녀를 흠모하던 곤도 육군 헌병 중위(독고영재)의 청혼까지 받는다. 하야시에게 빼앗긴 종로를 되찾기 위해 김두한은 종로로 돌아왔고, 조선의 깡패들을 일본군으로 징집하자는 제안을 받은 하야시는 돌아온 김동회를 이용하여 김두한과 그의 부하들을 쓸어버릴 계략을 꾸민다. 종로로 돌아왔지만 자신을 두고 곤도와 결혼하는 장은실에 마음이 기울어진 김두한은 어느날 순식간에 종로가 하야시에 의해 쑥대밭이 된 상황을 겪게 되면서 각성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동회의 도움으로 무사히 상황에서 벗어났고 하야시 일당이 한가로운 아침에 김동회와 짝패를 이룬 김두한은 하야시의 저택을 습격. 하야시 패거리와 최후의 일전을 벌인다. 김동회가 부하들을 막는 사이 김두한은 하야시의 안방에 침입, 자고있던 하야시와 결전을 벌이고 중상을 입은 채로 하야시의 권총을 뺏어 하야시를 치는데 성공한다. 두 사나이는 아침 안개 속에서 서로를 부축하며 종로 거리를 걸어간다.


[1] 김승우는 1탄과 3탄에 출연하고 2탄에 나오지 않는다[2] 영화 연출 시 작품성을 중시하는 감독이라는 명성은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흥행작은 거의 없었다. 태원영화사 사장이던 이태원이 "가벼운 기분으로 가벼운 영화를 한편 감독하시라"고 해서 감독을 맡았다는데, 정작 영화는 한국영화사에 이름을 남긴 대작이 되었다. 더 웃긴 건 그동안은 만들고싶은 영화를 만들었어도 죄다 망했던 임권택은 이 영화 흥행 성공 이후로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만들고픈 예술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영화가 바로 서편제이다. 당시 장군의 아들을 통해 수입을 많이 올린 이태원이 임 감독에게 다시 본인이 원하는 영화를 제작하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아무튼 서편제는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서울 100만 관객을 넘기며 장군의 아들 흥행을 넘어섰다.그리고 이후 임권택 감독이 가장 기대하던 태백산맥의 흥행은...[3] 이전에도 액션 영화가 안 나온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극저예산으로 쌈마이하게 찍어서 빠르게 소비되는 것들이 많았고 블록버스터라고 불릴만한 것은 이 작품이 최초.[4] 종전 한국영화 최대 흥행작이 1977년 장미희 주연 영화인 겨울여자로 서울 53만 관객이었다.[5] 2019년 1월 29일부터 예약을 받는다고 한다.[6] 그때나 지금이나 스타급 배우들을 돌려쓰는 현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나마 저 당시에는 진짜 주연급으로 대접할 배우층이 아주 얇았다.[7] 순수 오디션으로 선발된 '장군의 아들' 출연진을 시작으로 90년대 중반부엔 TV드라마에서 활동하던 톱 탤런트들이 대거 충무로로 진출했으며, 90년대 후반부터 연극판을 주름잡던 배우들이 충무로로 진출했다. 제작진들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인재로 물갈이가 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영화계 인사들이 자기들의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뻘짓을 서슴지 않다가 '애니깽 사태’라는, 2000년대 현재에도 한국영화계 최악의 스캔들로 기억되는 큰 사건을 저질러 대중들의 거센 비난을 받게된다.[8] 1,500여명의 지원자 중에서 하야시 역할을 지원한 유일한 배우였다.[9] 같은 성우 동기이자 함께 출연했던 민응식 성우가 홍쇼에서 말하기를, 당시 CM성우라는 한정된 역할밖에 하지 못하게 되자 연기에 대한 고민을 같이 하던 중 신문에 장군의 아들 오디션을 본다는 광고를 보고 함께 해보자고 하면서 준비했다고 하였다.[10] 그러나 신현준은 현재 배우로썬 은퇴했다.[11] 영화 배역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아예 예명으로 삼는 경우는 이외에도 많이 있다. 용쟁호투의 볼로 양이라든가, 이장호의 외인구단조상구라든가....[12] 2탄에서 하야시의 헤어스타일이 스포츠형으로 아주 짧게 나왔는데, 이유는 집안 식구들 몰래 오디션을 보고 학교 수업까지 빠지면서 영화 촬영을 하다가 우연히 TV연예프로에 촬영현장이 공개되어 이를 본 아버지가 분노해서 촬영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신현준을 보고선 가위로 머리를 밀어버렸다고 한다.[13]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해당 학교로 많은 기레기들이 몰린 바람에 연예계로 데뷔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과 교수들이 회의를 열어 퇴학시키려고까지 했다. 결국 학사경고를 먹어 1년 유급하여 공부 열심히 해서 간신히 졸업했다는 후문. 당시에도 명문대학교 학생이 연예계로 많이 데뷔했었지만 이 경우에는 '깡패영화'에 그것도 '일본인'으로 출연하는데다, 바로 이전에 단역으로 출연한 영화 '꼭지딴'에서 마약하는 인신매매범으로 나오니...학교에선 괘씸했을 듯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내 일본인 유학생들은 '일본인들 중에 저렇게 키크고 잘 생긴 사람 없다'고 하면서 잘 봐줬다는 후문.[14] 아이러니하게도 20여년 후에 출연한 각시탈이라는 드라마에서 신현준은 항일운동가 이강산역할로 출연했다(응?)[15] 1탄에서 술집 종업원으로 "저기...다른사람은 안될까요?"하는 한마디 하는 짧은 대사와 함께 잠깐 출연한다...만은 당시 연기력이 초보 수준이었던지라 목소리 연기를 너무 못해서, 편집과정에서 다른 사람 목소리를 씌웠다고 한다. 황정민 본인은 자신이 그때 연기를 막 시작하던 시기라 긴장해서 그랬다고 후에 밝혔다.[16] 2탄 후반부에 하야시 패거리와 싸우는 씬에서 교복을 입고 출연한다[17] 그리고 임권택 감독 본인도 2탄 초반부에 하야시의 운전기사 역할로 잠깐 출연한다.[18] 후반부 김두한 패거리와 싸우는 혼마찌패 무리들 중 한 명[19] 역시 후반부에 괴롭힘 당하다 한 방 먹여주는 촌놈으로 나온다.[20] 영화에선 김목이라고 한다.[21] 이는 TV 전쟁드라마에서도 불거진 문제인데, KBS 드라마 <전우> 1975 및 1983년판의 경우 실탄까진 아니어도 폭발씬 촬영 때 경유나 시멘트 등을 써서 배우들의 등짝에 흉터까지 남기기도 했다.[22] 2탄은 작품성에서 평이 좀 갈린다. 전편의 아성을 받춰주지 못했다는 혹평이 개봉당시에 많이 나왔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2탄이야 말로 임권택 감독의 연출력이 왜 최고인지 알려준다.'와 '김두한 단독 이야기가 아닌 반대편에 서 있는 하야시와 김동회의 이야기가 주요 줄거리이자 이들의 고뇌를 담은 영화'라는 호평이 나오고 있다. 1탄 개봉당시 박상민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조금 가리워져 있었던 신현준과 이일재가 주목받은 편차이며 이 배우들이 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3탄은 예나 지금이나 혹평인건 마찬가지고..[23] 당시 기준으로는 스코어 자체로만 봤을땐 나쁘진 않은 스코어였으나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가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24] 1탄의 경우 성우 백순철이, 2,3탄은 성우 장광이 맡았다. 장광은 후에 영화 도가니에서 성우가 아닌 진짜 배우 역할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마찬가지로 김동회 역할의 이일재도 1, 2탄까지는 MBC 공채 6기 성우 이성, 3탄에서부터는 성우 김태연으로 바뀌어 나오기도 하였다. 하야시 역할은 일본인 성우가 직접 더빙했다.[25] 수감기간 중 감방장을 비롯한 죄수들로부터 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김두한은 감방에서 팔자에도 없는 여자노릇을 하였다고 한탄한다.[26] 조직원으로서의 인정을 받는 일종의 단계[27] 당초 쌍칼이 자신의 부하로 들여오고 싶었으나 김두한 본인의 간청으로 우미관패가 되었다[28] 다만 망치의 싸움실력이 보통은 넘었다. 김두한 이전에 우미관 문지기 하나와 똘마니 하나를 박치기나 죽빵 한방에 해치울정도의 실력은 있었고, 바로 스카웃도 되었다.[29] 술자리에서 만취가 되어 잠들어 버린 김두한에게 외투를 벗어 이불삼아 덮어주었다.[30] 실은 하야시패가 손을 써 출소가 된 것으로 언급된다.[31] 배미향 배우[32] 이때 보여준 결투씬은 시리즈를 통틀어 매우 날렵한 액션을 보여준다.[33] 작중 일본인 배역은 일본어를 쓰는 것으로 나오는데, 조선인 출신이라는 것을 영화에서는 배제한 것으로 보이며 그가 한국어를 쓰는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34] 야인시대에서도 언급되지만, 경성의 자전거보관소를 운영하여 수입원을 부하들에게 분배하는 등 각종 이권 사업에 야쿠자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 표현된다.[35] 이 배우는 훗날 야인시대에서 김동진을 연기한다. 참고로 이 배우는 2019년 폐암 투병 끝에 고인이 되었다.[36] 사실 김동회는 김두한이 어린시절 만났던 친구였다는 걸 알게 되었고, 조선인이면서도 일본인들 편에 붙어 싸우는 자신의 입장 등 여러가지 복합적인 감정으로 일부러 김두한에게 져준 것이었음이 2편에서 드러난다. 하야시도 김동회에게 실망한 듯 다그친다.[37] 1990년 영화 꼭지딴에서 인부로 단역 출연하고 1992년 드라마 적색지대에도 출연.[38] 가두쟁패전에서 블랭카[39] 당시 CBS 성우였기에 민응식의 경우처럼 본인의 배역을 직접 더빙했다.[40] 우미관 사장역으로 이해룡이 맡았는데 1편에서는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는데 2편에서 성우 신성호의 목소리로 나온다 근데 이상한건 같은 편의 영화에서 다른 단역 목소리로 이해룡의 목소리가 나온다. 김두한이 묶는 여관주인은 2편에서는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3편에서는 양택조의 목소리가 나온다. 아베도 마찬가지 1,2편에서 배우 목소리가 나오지만 3편에서 KBS 출신 성우로 교체.[41] 막돼먹은 영애씨 내레이션 성우[42] 배우 송채환(본명은 권소연)이 이 영화 출연을 계기로 자신의 본래 이름 대신 이 이름을 예명으로 쓰게 된다.[43] 1편에서는 영화 후반부 김두한과 싸우는 하야시 패거리들 중 한사람으로 등장.[44] 크게 털린 회사가 하야시의 본토 오야붕인 도야마가 소유하는 회사라 이 사건으로 김두한을 잡기 위해 하야시의 친구인 사꼬야가 종로를 방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