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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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군부 청헌당 | 수표교 | 경희궁 흥화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 |
수표교 水標橋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중구 동호로 261 (장충동2가 197 –1번지, 산4-50, 산6-5) |
분류 |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 교통 / 교량 |
수량 / 면적 | 석비 1基, 토지 1㎡ |
지정연도 | 1973년 6월 18일 |
건축시기 | 세종 2년 (1420년) |
<colbgcolor=#ae1932> 수표교[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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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水標橋 / Supyogyo청계천에 있었던 다리. 단순한 다리가 아니라 청계천의 수량을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던 다리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 20번지와 중구 수표동 40번지 사이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인해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현재 수표교의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197-1이다.
2. 원래 수표교
2.1. 역사
태종 6년(1406)에 처음 세워졌다. 이때 청계천[3]을 파고 그 위에 다리 7개를 놓았는데 그중에 수표교가 있었다. 당시 세운 일곱 다리 중 현존하는 것은 수표교뿐이다. 처음 다리를 만들 적에는 목조 구조물이었고, 명칭은 근처에 있는 마전(馬廛)[4]에서 따와서 '마전교(馬廛橋)'라고 하였다.[5] 세종 23년(1441)에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는 기둥인 수표(水標)를 다리 서쪽에 세운 뒤부터 마전교는 '수표교(水標橋)'라고 불렸다.#목조였던 수표교가 언제 석조로 바뀌었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성종실록》 재위 24년(1493) 9월 4일자 첫 번째 기사#를 보아 1493년 9월 이전에 이미 석조 다리로 개축했음을 알 수 있다.
<colbgcolor=#ae1932> 수표교에 새긴 "무자금영개조" "정해개축" 글씨. 왼쪽 네모난 틀 안에 새긴 명문이 '정해개축' 그 오른쪽 글씨가 '무자금영개조'이다. 일제강점기의 모습.[6] |
현재 모습[7] |
<colbgcolor=#ae1932> 난간 없는 수표교 사진. 미국의 한 대학한국학연구소에서 보관 중이던 것을 근・현대 사료수집가 김영준씨가 2005년 1월 16일 KBS 《TV쇼 진품명품》에 소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
<colbgcolor=#ae1932> 일제강점기 수표교 | |
사진작가 임인식이 촬영한 1953년의 수표교. 왼쪽은 여름에 홍수난 모습[8], 오른쪽은 겨울에 썰매타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
2.2. 구조
- 길이 27.5m, 너비 7.5m, 높이 4m로 재질은 전부 화강암이다.
<colbgcolor=#ae1932> 수표교 교각과 하부 구조[10] |
<colbgcolor=#ae1932> 수표교 중앙부 교각에 새긴 경진지평(庚辰地平) 명문(하늘색 원 안) |
<colbgcolor=#ae1932> 수표교 멍에석 |
수표교 귀틀석과 청판석. 바닥에 세로로 놓인 돌이 귀틀석이고 그 사이마다 가로로 놓인 돌이 청판석이다.[11] |
<colbgcolor=#ae1932> 수표교 난간[12] |
2.3. 교통
- 지하철: 서울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 6번출구로 나와서 가는 것이 제일 빠르다. 바로 옆에 있는 장충단공원으로 들어와 2, 3분 정도 걸으면 나온다.
2.4. 여담
- 조선 시대에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백성들이 다리를 밟는 '답교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 1년 내내 다리가 건강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양의 주민들은 먼저 보신각의 종소리를 듣고 그 다음에 청계천의 다리 위를 왔다갔다 했는데, 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광통교와 수표교로 갔다고 한다. 이 답교놀이는 조선 멸망 이후 한동안 맥이 끊겼다가 1970년에 복원되었고 2009년 3월 5일에 서울시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되었다.#
- 수표교 남쪽에는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이 있었다. 여기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왕들은 1년에 몇 번씩 창덕궁에서 수표교를 건너야 했다. 숙종도 여러 번 들러 참배하였는데, 어느 날 영희전에서 창덕궁으로 돌아가던 중 수표교 근처에서 희빈 장씨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야사일 뿐이라 진지하게 믿을 만한 내용은 아니고, 그냥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정도로 넘기면 된다.
2.5. 대중매체에서
2.5.1. 〈야인시대〉
<colbgcolor=#ae1932>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14]에서 재현하였던 수표교[15] |
2부에서는 아무래도 1부보다는 등장이 많지 않다. 6.25 전쟁 때는 북한 공산군이 죄없는 양민들을 학살하는 곳으로 나왔고 전쟁 후에는 명동파와 동대문파의 자연 경계가 되어 서로 대치하는 장면으로도 나왔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114화로, 1956년 지방선거 때 민주당 서울시의원 후보 김득만(류태술 분)이 여기서 선거유세를 하다가 화랑동지회의 테러를 받는 장면이었다.
<colbgcolor=#ae1932> 난간이 변형된 부천판타스틱스튜디오의 수표교. 57초부터 나온다. |
3. 원 위치에 가설된 임시 수표교
청계천의 교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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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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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수촌리 고분군 | 서울 청계천 유적 (광통교지, 수표교지와 오간수문지) |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
대한민국 사적 제461호 | |
서울 청계천 유적 광통교지, 수표교지와 오간수문지 서울 淸溪川 遺蹟(廣通橋地,水標橋址와 五間水門址)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 (수표교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1가 (광통교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오간수문지) |
분류 |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 교통 / 교량 |
지정연도 | 2005년 3월 25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
수량 / 면적 | 11,103㎡ |
정보 | 서울 청계천 유적 (광통교지,수표교지와 오간수문지) |
<colbgcolor=#006fb9> 임시 수표교[17] |
2005년 청계천 복원 공사 때 서울특별시에서 장충단공원에 있던 수표교를 원 위치에 옮겨 지으려 했으나 새 청계천의 길이와 맞지 않아 무산되었다.[18] 대신 본래 자리에는 수표교를 본 딴 임시 다리를 놓았다. 이름은 그대로 수표교이다.
수표교 복원에는 실패했으면서도 위치는 그대로 재현한 탓에 수표로와 연결이 안 된다. 하필 이 길이 을지로3가역 1, 2번 출구에서 종로로 올라가는 가장 빠른 길인데다 수표로 북단에는 토익학원 등이 몰려 있는 종로2가 구역이라 2호선을 타고 종로2가 구역을 방문하는 시민들에게 은근히 빡치는 불편을 안겨주고 있다. 복원에 성공했으면 몰라도, 복원에 실패하여 15년째 임시 수표교를 사용하는 실정이라 수표로 직통으로 연결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청계광장을 기준으로, 청계천의 6번째 다리이다.
3.1. 구조
<colbgcolor=#006fb9> 임시 수표교 교각과 들보[A] |
<colbgcolor=#006fb9> 임시 수표교 난간[B] |
<colbgcolor=#006fb9> 수표교 알림표지판[22] |
<colbgcolor=#006fb9> 청계천 산책로로 들어가는 수표교 계단[A] |
3.2. 교통
- 지하철: 서울 지하철 2호선 / 3호선인 을지로3가역이 가장 가깝다. 2번 출구로 나와서 대략 7분 정도 걸으면 나온다.
- 버스: 서울 버스 173번을 타고 '청계2가, 수표교' 정류장에서 내리는 게 제일 빠르다. 노원 방향 정류장보다는 신촌 방향 정류장이 더 가깝다. 이 정류장을 지나는 버스는 173번 외에는 없으며 그나마 다음으로 가까운 정류장은 '종로2가 사거리'와 '남대문세무서 · 서울백병원'이다.[24]
3.3. 대중매체에서
<colbgcolor=#006fb9> 수표교가 나오는 〈야인이즈백〉의 장면 |
4. 여담
5. 이전 복원 문제
[1] 17호 옥천암 마애좌상은 2014년 3월 11일에 보물로 승격하면서 해지되었다.[2] 사진 출처 - 서울역사편찬원.[3] 당시 이름은 개천(開川)이었다. 청계천(淸溪川)은 일제강점기에 바뀐 이름이다.[4] 소나 말, 또는 소와 말을 타거나 부리는 데 쓰는 기구를 파는 가게.[5] 현재 청계5가에 있는 마전교와는 이름만 같은, 전혀 다른 다리이다. 그 마전교도 명칭이 유래한 바는 같다.[6] 사진 출처 - 한국민족대백과사전.[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8] 자세히 보면 수표의 윗 부분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물에 잠겨 있다.[9] 남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개천이었다. 지금은 장충단공원 구역을 제외하고 전부 복개되어 도로가 되었다.[10] 사진 출처 - 한국민족대백과사전.[11] 사진 출처 - 한국민족대백과사전.[1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3] 서울 성동구 마장동 소재.[14] 야인시대 촬영 세트장이다.[15] 사진은 〈야인시대〉 12회에서 김두한과 문영철이 수표교 밑에서 싸우는 장면이다.[16] 21화에서 하야시의 집을 턴 김두한이 수표교 쪽으로 도망가자 뒤쫓던 시바루(이세창 분)가 청계천을 넘어가면 문제가 커진다며 돌아갔고, 38화에서 김두한이 회식 때 거나하게 한 잔 하고 수표교를 건너가자 김영태(박영록 분)가 염려하는 장면도 나왔다. 물론 이건 김두한의 의도적인 도발행위였지만. 이 때 개코(이동훈 분)는 몰래 지나가려다 거지들한테 들켜 한 소리 듣는다[17] 첫 번째 사진 출처 - 서울역사편찬원.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8] 광통교도 길이가 맞지 않았지만, 새 청계천보다 짧아서 인도를 넓혀 덧대는 식으로 건설이 가능했다. 그러나 수표교의 길이는 새 청계천보다 길어서 옮겨오지 못했다. 그 길이만큼 잘라서 설치한다는 건 하늘이 두쪽나도 고려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A] 사진 출처 - 카카오맵.[B]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21] B[22] 사진 출처 - 《내 손안에 서울》.[A] [24] 저 둘 중에서는 '종로2가 사거리'가 훨씬 가깝다.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8] 광통교도 길이가 맞지 않았지만, 새 청계천보다 짧아서 인도를 넓혀 덧대는 식으로 건설이 가능했다. 그러나 수표교의 길이는 새 청계천보다 길어서 옮겨오지 못했다. 그 길이만큼 잘라서 설치한다는 건 하늘이 두쪽나도 고려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A] 사진 출처 - 카카오맵.[B] 사진 출처 - 한국관광공사.[21] B[22] 사진 출처 - 《내 손안에 서울》.[A] [24] 저 둘 중에서는 '종로2가 사거리'가 훨씬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