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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20:01:06

이성순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성순
李聖淳 | Yi Sung-sun
파일:이성순.jpg
별명 시라소니[1]
출생 1916년 2월 29일
평안북도 신의주부 미륵동#
(現 평안북도 신의주시 오일동)
사망 1983년 1월 25일 (향년 66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군자동
(現 서울특별시 광진구 군자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전주 이씨
신체 175~177cm[2], 75kg
가족 아버지 이기정
1878 ~ 1943 (향년 65세)
이성덕
1912.1.20 ~ 1968.7.8 (향년 56세)
배우자 이진옥(1928년생), 슬하 1남 5녀
아들 이의현(1960년생)
종교 개신교 (예장통합)[3]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부터 제1공화국 시기까지 활동했던 싸움꾼. 본명보다 시라소니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2. 생애

평안북도 신의주 오일동 출신으로 부농 이기정(1878 ~ 1943)과 그의 셋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5살 위인 형 이성덕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전일본빙상선수권대회와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에 참가할 정도의 엘리트 체육인이었다. 그에 반해 이성순은 어릴 적부터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을 정도로 골목대장 노릇을 했었다. 보증을 잘못 들어 집안이 어려워지자 이성순은 1932년부터 밀무역인 '도비노리'에 뛰어든다.[4] 이 시절 이성순은 실수로 열차 밑으로 들어가 죽을 뻔 했었으나 기적적으로 열차에 올라탔고 이 때 '시라소니'라는 별명을 얻어 평생 본명보다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 때의 시라소니는 동물 스라소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도에서 '못나거나 혼자 뒤떨어지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라고 하지만[5], '호랑이도 자식이 여럿이면 시라소니를 낳는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양자가 무관한 표현이라 보기도 어렵다.[6]

그가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평양 제일의 싸움꾼 박두성을 이긴 것이며 이후 중국 전역을 떠돌며 활약했다. 신의주 칼잡이 김장손과의 싸움, 상하이에서 칼잡이 아오끼의 싸움, 베이징에서 야쿠자 두목 구로야마와의 싸움, 베이징에서 쿵푸 대가 마오와의 싸움, 만주 봉천의 호랑이 이상대와의 싸움, 상하이 독수리 장천용과의 우정, 천진에서 일본 야쿠자 카네미야 일당과 40:1의 싸움 등 여러 무용담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들이 사실상 거의 없다. 당시 만주 지역은 동아시아의 화약고 지역이자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으로 온갖 세력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동양의 서부'로 불리던 시절[7]이라 정말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면 기록이 없을 리가 없다. 이외 알려진 점은 북경에서 치에코라는 여성과 만나 살림을 차렸지만 잠시뿐이었다. 대중매체에서는 상하이에서 명성을 떨친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8] 그의 주특기는 장거리에서 뛰어드는 박치기인 공중걸이 박치기 지만 어쩌다 한번 쓰는 일격의 필살기술이며, 온몸이 무기라 할 만큼 강해 주먹이든 발차기든 단연 최고였다. 대중매체에서는 이성순이 아무런 수련을 거치지 않은 싸움의 달인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거르지 않았을 뿐더러 1934년에는 백두산에 올라가 훈련도 했었다고 한다.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에 와서 이북 출신 조폭들의 큰형님 격으로 이북 출신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서북청년단은 당시 이북 출신들인 이화룡정팔의 압록강동지회와 대동강동지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서로 조직은 분화되었지만 공동의 목표를 두면서 단합하는 성격이었다. 이 가운데 이성순이 옵저버 역할을 하면서 중재를 담당했는데 정식 직함은 압록강동지회 감찰부장.[출처] 6.25 전쟁 시기에는 서북청년단 인원으로 구성된 KLO 부대원으로 전쟁에 참가했고 3.1공수유격단의 부부대장 자격으로 한국군 최초 공수강하훈련을 교육했었다는 주장이 있다.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BD%C3%B6%F3%BC%D2%B4%CF%C0%CC%BC%BA%BC%F8%C4%A3%C7%CA.jpg
파일:external/pds109.cafe.daum.net/download.php?grpid=Uzlo&fldid=LKnS&dataid=73034&fileid=2&regdt=20081227030138&disk=15&grpcode=ssaumjil&dncnt=N&.jpg
이성순의 아들 이의현이 공개한 증거 자료.

당시 아들이 사이트에 남겼던 설명에 따르면, 사진에 적힌 글씨는 사진을 보는 이들 기준이 아닌 사진에 찍힌 병사들 기준이다. 즉, 사진에서 이성순은 우측 하단의 키 큰 사람이며 그 오른쪽이 소대장이다. 이성순의 큰 키를 알 수 있다.

6.25 전쟁 이후 김두한국회의원이 되어 조직을 해산한 이래 서울의 조직폭력계는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와 이정재가 이끌던 동대문파로 양분되었는데, 시라소니는 1.4 후퇴 당시에 부산에서 수많은 깡패들에게 린치를 당하던 이정재를 구해준 인연으로 명동파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이정재의 사무실에 드나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순이 돈을 뜯어가며 동대문 시장의 점포 양도 문제로 이정재와 충돌하게 된다. 처음은 굶주리고 갈 곳 없는 KLO 대원들을 위해서 돈을 2번 빌리고 점포양도를 구했고, 마지막은 50만환(5억원)에 달하는 거금을 내달라고 하며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 군인들에게 동대문 상가의 점포를 내달라' 라는 요구였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이성순은 이정재에게 수시로 돈을 뜯어갔었다. 이 때문에 동대문패의 간부인 김기홍, 조열승, 임화수 등 간부들이 이성순에게 분노하고 이정재도 자존심이 많이 상해버렸다.

그래서, 이권의 분산과 조직의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염려한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시라소니를 좁은 사무실로 유인한 뒤 몽둥이, 둔기, 손도끼 같은 흉기로 그를 잔혹하게 린치했다. 이후, 1983년 그가 사망했을 당시 <동아일보>에서 과거 린치 사건을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이정재의 이권독점에 단신으로 싸움을 걸었다가 이정재의 부하 10명 정도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하고 시장바닥에 버려졌다한다. 유지광은 본인이 쓴 회고록인 대명에서 이성순은 이정재의 사무실 앞에서 10대 건달 10명을 때려 눕힌 후, 사무실 안으로 진입하였는데 무장한 이정재 부하 20명과 싸움을 하다가 전화선에 걸려서 넘어지고 그 틈을 타서 갈고리, 낫, 도끼 등으로 난자당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유지광의 회고록 내용은 SBS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이야기에서도 인용되기도 했다. 반면 야인시대에서는 석회가루를 눈에 뿌려서 시야를 가린 뒤에 집단 폭행한 것으로 묘사된다.야인시대의 영상

이후 청계천에 망태로 싸서 버려졌는데 행인의 발견으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아무튼 이성순은 당시에 종로 5가의 반도병원[10]으로 옮겨졌고 얼마 뒤에 백병원으로 이송됐다. 이 사건 이후부터 시라소니의 인생은 내리막을 걷게 된다. 당시 부상이 너무 참혹해서 의사가 "시체인 줄 알았다" 라고 언급했을 정도고 후유증 또한 마찬가지로 심각했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이 사건으로 백병원에 입원한 그를 이정재의 부하인 이석재를 시켜 후환을 없앤다는 의도로 단독으로 병원으로 찾아가서 나머지 다리도 부러뜨렸다. 신상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시라소니는 이정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 두었으나 이를 실행하기 직전에 김두한과 이정재가 화해를 하는 바람에 그냥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이후로는 거의 폐인이 되면서 장티푸스에 걸린 적도 있고 쓰러져서 쓰레기장에서 발견된 적도 있다고 한다. 도중에 3.1 공수유격단 창단식에 부부대장으로 참가하고 신익희장면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 군사 정권이 구악 일소라는 명분 아래에 조직폭력배들을 일제히 검거할 때 이성순도 체포되었지만 영락교회 신자들의 탄원으로 풀려나왔다. 구속 중이던 이정재를 추가 기소하기 위해 당시 검찰에서 방증을 수집하는 도중 시라소니 폭행 사건의 조사를 위해 이정재와 대질 심문도 했는데[출처] 린치 사실을 부인하면서 이정재를 감쌌다고 했다. 실제로, 사건과 관한 조사가 검찰에서 실시된 기록이 있으나 이정재의 재판 당시 수많은 죄상 가운데 해당 사건과 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처벌불원에 따른 공소권없음 불기소처분으로 보인다.[출처] 결국, 인생의 허망함을 느낀 시라소니는 결국 이정재의 처형 이후부터 조직폭력배 생활을 은퇴했고 개신교에 입교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된다. 가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말년에는 완전히 신앙에 귀의하여 영락교회 장로로 지냈으며, 2칸짜리 셋방에서 가난하지만 평온하게 생을 마쳤는데 그는 죽기 직전에 아들에게 아래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실하다.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쓰러져가는 판잣집에서 빛바랜 사진첩과 손때 묻은 성경책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후 막내아들 이의현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때 뒷세계에 몸담았다가 목사가 되었다.

3. 기타

48년에 친척의 소개로 남편을 처음 만났는데, 솔직히 너무 못생겨서 안 만나려고 했어. 그러니까 하루는 우리 집안 친척들을 다 모이게 하더니 쌍권총을 딱 꺼내놓고 '결혼을 안 시켜주면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더라고. 그러니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친척들이 서둘러 결혼을 시켰지.

“아이들에겐 무뚝뚝했지만 내겐 한없이 다정했어. 심지어 맛있는 걸 사가지고 오면 아이들 몰래 나만 먹게 했지. 남편은 나 때문에 아이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니까.”

“처음엔 깡패란 것도 모르고 결혼을 했다가 나중에 알았어. 그래서 굶어 죽어도 좋으니 제발 나쁜 짓은 하지 말라고 간청했지. 그런데 나쁜 짓을 해야 돈이 생기는 거잖아. 그걸 못하니까 남편도 답답했던지 자기를 원망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하지만 그 덕분에 남편 이력서엔 평생 빨간 줄이 하나도 없어.” 기사 원문


4. 대중매체에서

4.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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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187BBC224B5E7B74544A7F.jpg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D%C3%B6%F3%BC%D2%B4%CF5.jpg

4.2. 게임

4.3. 만화

파일:협객 시라소니1.jpg

4.4. 드라마

파일:external/ncache.ilbe.com/54ff2676758e48b195fe1dca3497b123.jpg


[1] 스라소니서북 방언.[2] 이성순의 아들 이의현 목사는 아버지의 키가 175cm라고 밝힌 바 있고 이성순의 셋째딸 이선숙도 아버지의 키가 175cm라고 밝힌 바 있다. 다만 1983년 이성순 사망 당시 조선일보, 중앙일보, 선데이 서울은 그의 사망 소식과 일대기를 다룬 기사에서 그의 키를 177cm라고 소개한 바 있다. 조선일보 기사 중앙일보 기사 선데이 서울 기사[3] 영락교회집사였다. 훗날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실제 시라소니가 출석했던 영락교회에서 시라소니가 개신교에 귀의하게 되는 장면을 방송한 바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4] 도비노리(飛び乗り)란 일본어로 '뛰어서 탄다'는 뜻으로 세관원의 눈을 피해 달리는 열차가 느려지는 때에 빠르게 올라타 중간에 타고 내리는 밀수 수법을 말한다. 당시의 열차 속도가 시속 35~40km 정도로 비교적 느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지금의 운행 속도로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라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며, 그래서 적잖은 요령과 신체 능력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여담으로 이 열차 주행시 승하차는 밀수꾼뿐만 아니라 당대 미국, 일본의 철도회사 직원들도 엄연히 정식 업무 중에 하던 기술이었다. 심지어 미국에는 교범 영상도 남아있다.[5] 이는 야인시대 1부에서 장도리가 언급한 바 있다.[6] 그러므로 '못난 호랑이 새끼'라는 언급이 틀린 말은 아닌 셈.[7] 훗날 한국 영화계에서 이런 점에 착안해서 만주를 배경으로 한 서부극인 소위 만주 웨스턴이 등장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같은 해 나온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역시도 이러한 만주의 지리적 특징에서 기인한 영화이다.[8] 야인시대에서는 이화룡과 함께 스테이크를 먹으며 상하이에서 많이 먹어봤다고 말하고 감격시대는 아예 상하이가 배경이다.[출처] 대한민국 건국청년운동사(1989, 건국청년협의회), 청년운동 반세기(경향신문 1987. 02. 25).[10] 지금의 보령약국이 있는 자리다.[출처] '이석재와 이정재는 이성순이란 사람을 도끼로 때려 중상해를 입힌 사실을 발견 수사를 재개'. - 동아일보 1960. 05. 29[출처] 국가기록원 나라기록[13] 물론 목사가 된 아들도 있고 아내가 "사랑도 많이 받았고, 행복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엄할지언정 정성을 다해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라소니의 첫째 딸과 둘째 딸은 뉴질랜드 이민 1세인데 부모를 따라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다. 뉴질랜드의 한 한인교회에서 간증을 했는데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손수 내 머리를 빗겨주셨다." 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냈다.[14] 아내의 회고에 의하면 결혼 후 이성순은 되도록 싸움을 피했다고 한다. 나쁜 일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아내의 바람 때문이었다고. 그러나 아무리 이성순이 싸움을 피해도 그를 습격하는 주먹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 한 주먹패가 길을 가던 이성순과 아내에게 시비를 걸며 위협하자 이성순이 순식간에 이를 제압해버렸다고 한다. 아내의 말로는 남편이 싸우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였고 눈 깜짝할 새에 시비를 걸던 주먹패가 쓰러지는 거만 봤을 정도였다고.[15] 그중에서도 김동현은 처음에 이름을 듣고 자기보다 약할 것이라고 했으나, 그의 정체를 알고 제대로 당황했다. 물론 현대적인 훈련을 받고 매일매일 실전과 가까운 훈련을 하는 현대 격투기 선수에게 주먹패가 이기는 것은 무기를 들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16] 무려 후속작도 있다. 감독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주연이 같으므로 엄연히 후속편 확인 완료. 이 영화에서는 배우 차룡이 봉천두로 유명한 이상대 역을 하기도 했다.#[17] 이후 본인 이름으로 출간한 각시탈 시기와 그림체가 거의 같다.[18] 전작이 최영의의 일대기를 그렸던 <바람의 파이터>였던 관계로 저런 제목을 채택한 듯하다. 후에 <바람의 아들 시라소니>라는 이름으로 소설판이 출간되기도 했다.[19] 예를 들면 중국에서 벌어진 악녀 '데구치 가야'와의 이야기라든가 '모일화'와의 이야기 등이 있는데 모일화 같은 경우 <감격시대>에서는 포악한 성격의 꽃미남 마적으로 등장했지만 <바람의 아들>에서는 시라소니와 잠깐이지만 불 같은 사랑을 나누는 여협객으로 등장한다.[20] 당시 <시라소니> 자리에는 <연애결혼>이 대타로 편성됐다.[21] 당시 <시라소니> 자리에는 <전설의 고향>이 대타로 편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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