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 ~1996.12.16 (향년 57세)
1. 개요
1939년 서울 출생. 1961년 홍익대 회화과 졸업했으며. 1965년에 소년 조선일보에 '휴전선의 왕꼬마'로 데뷔하게 된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합동출판사의 강압으로 억지로 표절 만화를 그려서 벌어먹었다고 한다. 이 당시 이 출판사의 악랄한 사장인 이영래(자세한 건 합동출판사 항목 참고)에게 '남재주'라는 예명을 억지로 부여받아 활동했는데, 본인 회고에 의하면 정말이지 이영래를 살해하고 싶었을 정도로 고역[1]이었다 한다. 억지로 순정만화까지 그려야 했으니까... 무협 전문만화가 이재학 이름[2]을 안다면 순정만화를 그렸다는 사실에 황당할 듯.1970년대에도 무협 만화를 그렸지만 무협보단 시라소니 이성순 이름을 딴 히라소니 시리즈로 어느 정도 인기를 끌던 적도 있는데 바로 이 시절 히라소니 그림을 문하생이던 허영만이 맡기도 했으며 허영만이 초기에 이재학 그림체를 많이 영향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건 80년대 중반 대본소용 무협만화 '촉산객'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뒤부터다.
이후 '검신검귀'가 대박을 치면서 대본소에 무협만화 붐을 일으킨다. 검신검귀는 지금도 이재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당시 미국에 수출까지 했다. 검신검귀에 이어 후속작 '소림사대룡'까지 대박을 치며 80년대 중후반 확고부동한 지존의 자리에 오른다.[3]
다만 이 시기 이재학의 활동에 관해서는 공과가 있는데, 일단 많은 문하생과 스토리 작가를 고용해 철저히 작업을 분화한 이른바 공장제 만화를 양산했다고 까인다[4]. 하지만 위에 서술한대로 만화가로서 벌어먹기 위하여 그랬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허영만도 먹고 살기 위하여 똑같이 했을 정도였으니(본인은 지금와서 매우 후회한다고 하지만)
한편 이전까지 무협만화는 황재나 김철호, 장윤식 등이 보여준 70년대 쿵후영화를 지면으로 옮긴 듯한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이재학 특유의 다이나믹한 연출과 함께 무협소설에 해박한 작가진이 스토리를 맡으면서 기존 무협만화와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을 확립, 80년대 무협만화의 틀을 만들어냈다.
굳이 대비를 해보면, 황재류의 무협은 대체로 시대배경이 없거나, 있어도 거의 중요하지 않았으나, 이재학은 시대배경이 거의 청이고, 한족-만주족 민족갈등이라든지 서양의 신무기등이 중요하게 다뤄진다.(태평천국 직전까지 장풍쏘는 무협이 살아있었다는 입장) 뭐 그래봤자 도토리 키재기이고, 정작 변발이나 전족같은 건 그린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대표작끼리 비교해보면 그렇다는 얘기이고, 예외가 없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추공 혹은 무룡인데, 뒤로 갈수록 추공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5]. 이 캐릭터는 눈가에 커다란 점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격은 음울하고 우울하고 울적하다(...) 단 한 번도 웃지 않으며, 게다가 나쁜 짓도 안 했는데 불행이 따라다니고, 여자랑은 잘 안 풀린다(...) 80년대 루저 정서를 그대로 드러내는 캐릭터. 무협만화의 주인공이고 절륜한 무공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진짜 최강자는 따로 있다는 것이 특색.(검신검귀, 소림사 대룡 등) 사람을 벤 후에 검을 공중에서 붕붕 돌린 후 검집에 넣는다. 아마 서부극 총잡이가 총을 쏜 후 빙글 돌리는 것에서 연유한 것이겠지만, 검은 총이랑 달라서 그렇게 하다가 손이 미끄러지면 자기를 베게 된다(...)[6] 더불어 여러 시도도 많이 했는데, 무협 배경에 코믹물도 그리기도 했으며 80년대에도 여러 장르를 그리기도 했다. 왜정시대를 배경으로 온갖 일본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탈춤을 하던 주인공 말뚝이 이야기라든지 더불어 무협만화를 보고 말이 안된다라고 비웃는 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는지 바로 아편전쟁을 배경으로 무협물도 그렸다. 무협 고수들이 영국군을 처바르는 줄거리는커녕 영국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협 고수들이 그야말로 야라레메카처럼 죽어나가며 꽤나 현실적인 설정을 담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재학 천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하승남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면서 양강체제로 바뀌는가 싶더니, 차츰 후발주자 천제황에게도 밀리는 모습[7]을 보였다. 그렇게 절치부심하던 이재학은 90년대 초반 사마달과 손을 잡고, '백사풍' '흑사풍' 등 잇달아 히트작을 쏟아내며 이른바 사풍 시리즈로 다시 한번 우뚝 서게 된다. 1995년에 창간된 학산의 만화잡지 '찬스'에도 '첩혈객'을 연재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여세를 몰아 같은 해 일본에 진출, 용음봉명은 연재하던 일본 애프터눈 인기순위 3위를 차지하며 꽤 인기를 끌기도 했으나, 공교롭게도 다 완결짓지 못하고 이듬해 1996년 12월 16일 낮 12시55분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향년 57세. 이후 아내 김영자씨와 문하생들이 이어 그렸지만 결국... 흐지부지 대충 완결해야 했다.
현재까지도 이재학 프로덕션 이름으로 대본소 만화로 주로[8] 그린다. 사후에도 이름을 딴 프로덕션에서 계속 작품이 나오는 박봉성과 같은 경우다.
아직 이재학 만화를 접해본 적이 없다면, 무조건 검신검귀를 먼저 읽어볼 것. 이 만화는 1980년대 무협만화의 정점같은 것으로서 별도의 항목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재학의 많은 걸작들이 망각속에 묻혀졌지만, 이 만화만은 스포츠신문에도 재연재되고, 재출간되기도 하는 등, 확실한 대표작이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사실은 1980년대 원작(1986~1987)은 3부작 48권의 대하드라마로 1부 검신검귀, 2부 분광검법과 검신검귀, 3부 붕산의 검신검귀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 원작은 구하기 매우 어렵다. 현재 인터넷 만화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개정판으로 2부작 32권 구성(1부 16권)이다. 이재학 작가 홈페이지에도 이 개정판으로 올라와 있다. 원작이 너무 길어 엑기스만 간추렸다고 하지만, 원작의 방대한 구성을 차근차근 다시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다소 아쉬운 상황, 그러나 개정판역시 대작임에는 틀림없다.
2. 수상 경력
- 1979년 한국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 한국만화상 동상
[1] "그땐 정말 그 작자를 해치우고 싶었다니까. 일본 순정 만화 던져주고 이거 그대로 베껴오라고 하는데 만화가로서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하인처럼 다루니 말이야. 정말이지 그 작자 낯짝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한국만화의 이해라는 책자에서 이렇게 분노할 정도였다.[2] 하지만 그는 무협만화를 좋아해서 그리는 게 아니라 돈이 돼서 그린다는 지인들의 이야기도 있거니와, 심각하게 그리는 척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보여서 어디까지나 대본소 만화가답다는 평도 있다. 다만 만화가가 서점용 만화로 밥을 벌어먹기가 힘들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3] '촉산객'이 먼저 나온 다음, '검신검귀'가 나왔다. '촉산객'에서 추혼12검이 등장했는 데, '검신검귀' 초반부에 추공이 자신은 추혼12검이 최고무공이라고 믿었는 데, 분광검법과 귀원비급이라는 무공비급이 2개나 더 있다는 걸 알고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4] 다만 이러한 비판은 시대상을 반영안한 무책임한 비판이다. 나라와 시스템이 다른 상황에서 개인이 어떻게 하기 어렵다. 국내 만화작가들이 일본에서 태어나서 활동했다면 과연 공장제 만화를 찍어냈을까? 이런 시스템은 만화가 개인이 만들 수 없다. 훗날 풍족한 상황에서 남을 비판하기는 쉬운 일이다.[5] 추공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80년대 중반의 촉산객부터라는게 정설이다. 원래 주인공 이름이 무룡이었다가, 스승인 소림사 고승 혜공대사의 제자가 되면서 추공이란 법명을 하사 받는것으로 자연스레 주인공의 이름이 바뀐다는 설정으로 등장했다.[6] 일본 사무라이 영화에서도 사람을 베고 도검을 확 휘둘러 준 다음 칼집에 넣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칼날에 묻은 피와 기름 때문에 다음에 검이 칼집에서 잘 빠지지 않게 된다. 물론 그러고 끝은 아니고, 돌아와서 칼을 갈고 잘 닦기 전 임시 방편. 잘 갈고 닦은 칼은 애초에 피와 기름이 잘 묻지 않는다.[7] 일단 천제황쪽이 더 작품수가 많았고 더 과장이 심한 판타지형 만화를 그렸기 때문에 나름 리얼리티를 추구한 이재학과는 차이점이 있었다.[8] 2002년에는 스포츠 신문에 무협물을 연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