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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国風'81[1]당시 대한뉴스 영상 |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5일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했던 대규모 예술제이자 전두환 정부의 관제 축제.
3S 정책의 일환으로, 신군부 정권의 대표적인 우민화 정책의 사례로 꼽힌다. 기획, 시행, 홍보까지 국가적으로 문화적 역량이 총동원된 전무후무한 규모로 치러져 무려 1천만 명이 관람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관제축제를 주관한다는 것은 반체제와 저항의 상징문화를 관제로 포괄해 버리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방향은 좀 다르지만 일제가 조선사편수회와 조선어연구회 등의 (준)어용단체를 허용 혹은 설립함으로써 교묘하게 분열과 혼란을 조장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하필 축제 주제가 "전국 대학생 민속 국학 큰잔치"였음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대학생들의 잔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서울시내의 초중고생들이나 전국 각지의 관공서 공무원들이 어마어마하게 서울로 동원되었다.
위 포스터에 나온 대로 고려대학교 부설 민족문화연구소가 스폰서였는데 얼마나 욕을 많이 얻어먹었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전두환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이 당연했던 당시 대학가 분위기에서 대학 이름이 이런 관제 축제에 올라가는 것부터가 학생들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2] 하지만 삼성이 세운 유력 방송사 동양방송이나 대형 경제언론사 서울경제신문조차도 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단칼에 날아갈 정도의 시절이었기 때문에 고려대학교 부설 민족문화연구소 입장에서도 국풍81에 협조 안 했다가는 존립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3]
이 행사의 조직에는 허문도의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 대학가에서는 마당극, 탈춤, 풍물 등 민족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상승해 왔으며 1980년대 초반에는 당시의 군사독재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적 지적 풍토와 결합되어 "민족민중예술"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등장했는데 시인 김지하, 작곡가 김민기, 소리꾼 임진택 등이 이들의 리더였다. 허문도는 이들을 모두 국풍81에 참가시켜서 제도권 내로 끌여들이려고 했다. 심지어 이 행사의 보이콧을 주도하던 전국연합탈춤반(연탈)의 주축 멤버들은 물론 임진택까지 청와대로 직접 불러서 회유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한다. 김지하는 술까지 사들고 원주까지 직접 찾아가서 회유했다고 한다. 물론 모두 거절했다.
2. 명칭
'국풍'이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시경에서 따 왔다는 설인데 원래 국풍(國風)이란 유교의 경전인 사서삼경 중 시경의 제1편의 제목으로서, 시경에 수록된 '지역 사회의 풍속을 담은 노래 가사'들을 대표하는 용어로 쓰이던 말이었다. 이 낯선 동양학의 전문용어가 엉뚱하게도 갑자기 군사정권의 관제 문화정책의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본래 정통성이 결여된 권력들은 스스로의 컴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역사적 권위와 전통적 이미지를 차용하길 좋아한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이는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는 셋째 가설에서 차용된 '국풍문화'라는 용어의 원래 용례이기도 하다.둘째는 신풍에서 따 왔다는 설이다. 허문도 정무비서관이 일본의 카미카제(神風) 정신을 본떠 국풍(國風)이라는 명칭을 채택했다는 설이다.[4] 허문도가 일본 특파원 출신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쪽일 가능성도 있다.
셋째는 일본의 '국풍문화'라는 용어에서 따 왔다는 설이다. 사실 일본사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국풍이라는 단어가 헤이안 시대의 용어인 국풍문화에서 그대로 따 온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데 뜻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 행사의 기획자로 볼 수 있는 허문도는 일본의 특파원이기도 하였으니 더욱 설득력이 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당나라의 '당풍'에서 벗어난 자국 고유의 문화를 '국풍'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둘째 가설인 '신풍' 설은 몽골군을 물리친 신의 바람이라는 뜻이지 자국 고유의 문화, 전통이라는 뜻과는 전혀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군사정권의 의도가 시민들의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함이란 것은 변하지 않는다.# 참고로 이 셋째 가설에서 차용한 의미도 어디까지나 첫째 가설의 의미에서 파생된 것이다.
3.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
원래 이 행사는 TBC(현 JTBC)에서 열기로 했던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가 모체였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국풍81에서 벌어진 가요제의 명칭이다. 젊은이의 가요제는 MBC 대학가요제에 대항해서 TBC가 주최하던 가요제의 명칭이었다. 그것도 원래는 1978년 해변가요제였던 것을 1979년에 제2회 젊은이의 가요제라고 이름을 바꾼 상황이었다. TBC는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를 열면서 자신들의 가요제를 여기에 포함시켜서 인지도를 상승 시킬 계획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직후 소위 언론통폐합을 실시하여 신문사가 방송사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방침을 세우자 TBC가 문을 닫고 KBS로 흡수되면서 KBS에서 주최하게 되었으며 별도의 가요제를 하지 않았던 KBS는 젊은이의 가요제라는 이름을 변경시키지 않았고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젊은이의 가요제는 폐지되었다.
이때 신군부 정권의 언론통, 쉽게 말하면 파울 요제프 괴벨스 역할이었던 허문도가 이를 정권의 선전도구 겸 엄청난 놀이판으로 만들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출신의 조선일보 기자였고 일본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메이지 유신 관련 논문도 썼고 군 출신인 허삼수, 허화평과 더불어 전두환의 최측근인 속칭 '쓰리허'의 일원이었다.
허문도의 경력에서 짐작되듯 국풍81도 일본의 사례를 참고했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반에 소위 전공투 세대 및 2차 안보투쟁을 비롯한 기타 여러 사건으로 시끌시끌할 때 1970 오사카 엑스포기 펼쳐져서 사람들의 관심을 엑스포로 돌린것에 영감을 얻은것이다.[5] 정식 엑스포는 아니지만 어쨌든 축제를 대규모로 개최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돌렸다는 점은 높게 산것이었고, 1985년 총선에서 된통당하기 이전까지 먹혔다고 판단한것도 사실이었다.
4. 목적
일각에서는 당시 전두환 정부가 1981년 5.18 민주화운동 1주년을 맞아 민중들이 반정부 투쟁에 나서는 것을 막고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정략적 행사였다고 분석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행사가 열렸던 1981년 5월은 5.18 민주화운동 1주년을 맞이한 시기였다. 당시에도 전두환 정권은 대한민국의 언론들을 통해서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보도를 일절 차단하였으며 광주사태, 광주폭동, 광주의 사회적 혼란중이라는 표현으로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해서 민중들이 반정부 봉기 등을 할 수 없도록 철저히 차단하였다.1981년은 서울 올림픽 유치가 결정되는 시기이기도 해서 전두환 정부는 이를 통해서 국풍81을 서울 올림픽 유치 성공을 위한 행사라는 것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 정부는 국풍 이외에도 서울 올림픽의 유치 운동을 통해서 민중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행사의 주요층이 바로 젊은층들이라는 점에서 보면 5.18 민주화운동 1주년을 맞아 당시 젊은층들의 동요와 저항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이 행사를 열었다는 설도 있다. 5.18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이 바로 젊은층 및 대학생들이 많았고 젊은이들의 저항이 크다는 것을 전두환 정부도 심히 파악하였기 때문에 이를 잠재우고 젊은이들에게 독재정권의 그림자를 숨기며 세뇌시키려는 목적으로 이 행사를 열었다는 게 핵심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젊은이들의 동요와 저항을 막고자 일찌감치 3S 정책을 펼친 전두환 정부였기 때문에 국풍81도 이것의 연장선상일 가능성을 높게 친다.
5. 행사
국풍81 기간 동안에는 여의도광장 전체를 무대로 민속제, 전통예술제, 젊은이가요제, 연극제, 학술제 등 대규모의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당시 얼마나 파격적인 지원이 이어졌는가 하면 행사 기간 동안 통행금지가 일시적으로 해제되었으며, 전국 198개 대학의 6천여 명의 학생과 일반인 7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참고로 야간통행금지는 국풍81로부터 약 7개월 뒤인 1982년 1월 5일 부로 완전 폐지되었다.행사에 동원된 인원은 16만 명, 여의도를 찾은 관람객은 6백만 명에 달했다. 국풍이 낳은 스타는 '파마머리 가수'로 유명한 이용(금상곡 '바람이려오', 후속곡 '잊혀진 계절')이 잘 알려져 있는데, 이용은 가요제에서 '바람이려오'로 금상을 차지하며[6] 일약 국민 가수로 부상해 이후 수 년간 조용필에 필적하는 인기를 누렸다.[7] 그러나 이용은 국풍 81에서 데뷔한 점으로 인해 당시 운동권 학생들이나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민주화 세력들에게 독재정권의 끄나풀 또는 군사정권의 나팔수라며 한동안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국풍81을 이용이 개최한 것도 아니었고 이용 자신이 특별히 정치적 행보를 보인 것도 아니었던 것을 보면 이용 입장에서는 정말로 억울할 일이다.
그 외에도 이 축제는 충무김밥과 춘천 막국수가 국민 음식으로 알려지는 데 공헌하기도 했다. 충무김밥은 원래 통영(구 충무시) 지역에서 먹던 간편식이었는데, 국풍 풍물마당을 통해서 서울에 전해졌고 곧 전국적인 인기 음식이 되었다. 춘천 막국수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도 이것이며, 천안 호두과자도 이 축제를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런 게 그나마 있는 순기능이라면 순기능이겠다.
장소는 여의도광장[8]으로 지금의 KBS 앞에서 여의도공원과 그 일대 녹지, 그리고 경인로 등의 주변 도로까지 전부 포함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거기에 당시에는 유사시 비상 활주로로 쓰기 위해서 광장에 아무런 시설물이 없이 끝에서 끝까지 뻥 뚫린 아스팔트 바닥이었기 때문에 광장 전체를 사용하며 사람으로 가득한 행사 규모는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세로로 길게 늘어선 것은 먹을 것을 파는 노점인데 충무김밥이니 막국수 같은 팔도 먹을 거리와 막걸리 등을 거기서 팔았는데 사람이 워낙 많은데다가 주변에 변변한 식당 같은 게 없을 때였으니 노점 음식은 순식간에 동나서 매 시간 보충하곤 했다. 군데군데 타원이나 둥그렇게 사람이 둘러싼 빈 곳은 마당놀이 등 여러 공연장과 행사 이전에도 있던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빌려 주던 곳이었고 맨 아래 가운데에 임시 야외 관람석이 있는 곳부터 오른편 끝 희게 보이는 무대까지가 메인 행사 (가요제)공연장이었다.
당시에는 가게에서 술과 담배를 판매할 적에 신분증 검사를 안 하였기 때문에 미성년자들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거나 동네 불량배들이 행사장 주변에서 서울 각 지역과 지방에서 올라온 관람객과 청소년의 주머니 푼돈을 터는 일도 일어나곤 했다.[9] 웬만한 중. 고등학교에서 반삭과 단발을 강제하고 있었을때였지만,[10] 상인들이 무시한것이다. 사진에도 보이지만 광장엔 그늘이 없었다. 초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작렬하여 열기가 무지하게 올라오는 검은색 아스팔트 바닥에 햇볕 피할 데가 전혀 없어서[11] 실제 관람이나 행사 참여 또는 구경하기엔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요즘 같으면 한다 해도 고생하기 싫다고 안 갔을 행사였는데, 철통 군사독재로 숨이 막혀 있고 놀 데가 없던 국민들은 그런 날씨나 관람하기 나쁜 환경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녀노소, 도시 지방 사람 할 것 없이 기차로, 버스 대절로 가득 몰려갔다.
5월 28일 정오에는 30만, 오후 4시에는 50만, 이날 새벽까지 100만에 가까운 관객을 기록했고 5월 29일 100만, 30일 200만에 육박하여 진행본부에서는 장내 방송을 통해 자녀를 대동해 온 관객들의 귀가를 종용하였으며 라디오 스폿방송을 통해 관람을 만류하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6월 1일 밤 10시 화려한 불꽃놀이를 끝으로 종합 관객 동원이 1천만이라는 초대박 행사였다.
국풍 81이 성공적으로 개최된것에 더해서 서울올림픽까지 당초 예상을 깨고 개최에 성공하자, 이에 삘받은 전두환 정부에서 이듬해에는 야간통행금지 철폐, KBO 리그와 K리그, 프로씨름 출범, 중고등학교 두발자유화[12]및 교복자율화 조치를 단행하였고, 이를 통틀어서 일명 3S정책이라고 칭하게 된다. 물론 그 이면에는 올림픽 개최한답시고 수십만명이 길거리로 내쫓기는 일이 있었기는 했지만 말이다.
6. 여담
대학가에서도 국풍81에 대한 내부 갈등이 있었는데 특히 운동권 학생들의 반발이 심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가요제에서 <학>으로 대상을 받은 서울대학교 그룹사운드 '갤럭시'가 수상 기념으로 그해 10월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라운지 2층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향락축제 거부투쟁'을 벌이던 운동권 학생들이 포진해 "애국가부터 시작해라!"라고 소리를 친 것이다. 당시 갤럭시의 기타리스트가 생전 한 번도 치지 못한 애국가를 어설프게 치자 흥분한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 무대를 부숴 버렸다.이렇게 극대노한 운동권에서는 강제 또는 반강제로 참여한 군복무 학생들까지 변절자로 몰아붙여서 학생사회에서 제명시켰으며 심지어 전술했듯 국풍81을 통해 데뷔한 가수 이용을 가리켜 어용가수 또는 정권의 나팔수라고 강도높게 비판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나마 운동권도 나름대로 사정은 있는 것이 군부독재 치하에서 학생/노동운동은 수십년 간 양지(제도권 정치)로 나올 기회 한 번 없이 그야말로 철저하게 탄압받았기 때문에 한이 맺혔고 이런 상황에서 비운동권이거나 정치에 뜻이 없는 학생들과 가수들이 어용 축제에서 성공했으니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이들이 지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밀결사"에 준하는 조직력이 필수였다. 철통같은 규율을 가진 조직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적(군사독재)들과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으면 모조리 내치는 게 생존을 위한 방책이었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강제동원된 옛 동지들에게 사죄하고 받아주긴커녕 지속적으로 변절자, 부역자 취급을 하는 후유증도 지속되었다.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국풍81편"에 관련 인터뷰가 있다.
애시당초 국풍81 하루 전인 5월 27일에 같은 학우인 김태훈 열사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살인마 전두환 물러가라"를 세 번 외치면서 몸을 던져 목숨을 바친 교정에서 전두환이 만든 국풍81에서 대상을 받은 갤럭시가 공연한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13] 그럴 만한 핵심적인 이유는 1989년에 강신철 등이 쓴 <80년대 학생운동사>에 서술되어 있는데 이 행사가 벌어질 당시 대학가에서 '국풍' 류의 대중문화는 비판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1981년 가을 서울대학교 축제 준비 과정에서 학도호국단이 예산권을 악용해가며 본부 공개 서클들이 주축이 된 민족/민주적 대학축전의 준비를 방해했고 조용필이나 갤럭시 등의 공연, 쌍쌍파티 같이 그들 입장에서 '부패하고 나약한 비민주적 문화'를 퍼뜨리려고 했다고 기록돼 있다.[14]
당시 여의도 주변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반대 시위도 잇달았지만 결국 1982년 이후 시위가 잦아들고 1983년에 '학원자율화 조치'가 내려지며 유화국면이 조성되어 국풍도 한 해로 끝났다.
당시 허문도는 김지하나 김민기 같은 문화인사도 적극적으로 국풍81에 참여시키고자 포섭에 나섰는데 거절당했다. 자신의 모교 후배인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풍물동아리 '두레'를 데려오려고 했지만 동아리 회원들도 거부하자 군인, 공무원을 동원해서 진행시키고 풍물패 출신 졸업생과 군복무자들도 모두 데려와서 서울대학생이라고 위장시켜서 행사를 진행시켰다. 혹시 공연 중에 이 학생들이 돌발 행동을 할까봐 전경으로 둘러싼 상태였다.
무한도전에서 언급된 바로는 박명수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국풍81의 일반인 장기자랑에 나간 적이 있다고 했는데 사실인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이 항목 맨 위에도 있는 국풍81 포스터는 8년 뒤 개장한 롯데월드의 마스코트 '로티&로리'를 디자인한 정연종이 디자인했다.
당시 홍보를 위해 차량용 스티커를 배포해서 시내버스와 택시에 국풍81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던 일이 많았다.
행사 준비 과정에서 나온 쓰레기들 탓에 파리가 들끓었는데 근처에 있는 KBS 사옥 내에까지 들어와 뉴스를 진행하던 아나운서의 얼굴에 앉는 상황까지 벌어졌다.[15]
1989년까지 쓰인 국민학교 미술 교과서에 포스터 그리기라는 주제로 나온 예시 자료가 몽땅 국풍81 포스터였다.
2023년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부실 운영 논란 당시 케이팝 콘서트 진행 과정에 대한 이슈와 관련하여 국풍81의 비판점과 유사한 점이 지적되면서 다시 수면에 오르기도 했다. #[16]
7. 참고/관련 자료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2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허문도와 국풍81 (2005.4.10. MBC)
- 역사저널 그날 제409회 (2023.5.7. KBS1)
[1] 공식 포스터의 나라 국 자가 國이 아니라 国이다.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공식적으로 한자 간체자와 신자체를 제정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약자나 속자는 필기의 용이성으로 쓰였고, 특히 한자를 읽고 쓸 줄 아는 세대는 일본식 약자인 신자체도 대부분 알고 그대로 사용하곤 했다.[2] 특히 고려대학교/학생운동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군사정권 당시 고려대학교의 학생운동은 활발했다. 반독재 운동에 나선 고려대학교 학생들에게는 특히 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다.[3] 참고로 이 연구소는 민족문화연구원으로 아직도 있다. 녹지 캠퍼스의 한국학관에 있는데 캠퍼스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 고대병원에서 셔틀버스를 타거나 6호선 고려대역에서 서울 버스 성북20을 타면 접근 가능하다.[4] 출처: <6공화국 언론조작>, 김종찬, 465쪽.[5] 정작 우스운것은 오사카 엑스포가 끝난 뒤에는 자민당이 선거에서 계속 죽을 쑤는 흐름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1971년 참의원 선거, 1972년 중의원 선거, 1974년 참의원 선거, 1976년 중의원 선거때까지 잇따라 부진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죽을 쒔다해도 자민당이 과반확보에 실패했다 수준이기는 했지만, 이것도 당시 기준으로는 역대 최저치였다.[6] 대상은 노래 수준과는 상관없이 명문대-가급적 서울대-에 주기로 했다.[7] 여담으로 같은 해 81'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한 정오차는 자신의 곡 바윗돌이 "그 전 해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이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직후 금지곡으로 처리되었다.[8] 최초 명칭은 5.16광장이었지만 신군부가 집권한 후 여의도광장으로 개칭했다.[9] 대신 어른들이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청소년을 보고 버릇 고친다며 두들겨 패도 아무 문제가 없던 때이기도 했다.[10] 반삭과 단발 강제는 1982년에 두발자유화 조치로 규정이 완화되면서 풀리기는 했다. 물론 두발자유화도 완전한것은 아니라서 문교부 지침에 따라서 염색과 파마, 남학생들의 머리가 옷깃에 닿는것과 귀를 덮는것은 금지로 지정되어있었고, 스포츠형이나 귀밑 5cm로 형식상의 규제완화한 학교들이 많았다.[11] 나무 심어 놓은 데는 조금 있지만 그때는 아직 어린 나무라 그늘다운 그늘이 없었다. 현재는 공원 숲이 꽤 우거져 있다.[12] 물론 이것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염색과 파마는 금지였고, 남학생들의 머리가 옷깃에 닿지 않고 옆머리는 덮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으며, 또한 학교장 재량에 따라 길이를 규정할수있었기 때문에 학교에 따라 차이가 커서 스포츠 머리 내지 단발로 강요하거나 길이 5cm를 기준으로 삼는 학교들이 많아 일선 학교에서 학생들의 머리를 고속도로 내는것은 여전했다. 물론 그 이전에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 반삭 머리와 단발, 양갈레, 땋은머리를 강요했기 때문에 이것도 당대에는 꽤 획기적이라는 평을 듣기는 했다.[13] 원 출처: <내일신문> 1998년 5월 27일자 35면 기사 '대학가요제의 돌연변이 국풍81(김형진 기자)'.[14] 원 출처: 해당 도서 p29.[15] 게다가 이계진 당시 아나운서의 1990년 저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에 따르면 하필 그때 진행하려는 뉴스가 '파리에서 AFP 연합통신'이라고 한다.[16] 국풍 81은 군사독재정권의 우민화 정책이었으나, 행사 자체는 그 거대한 규모에 비하면 큰 사고 없이 상당히 잘 치러진 편이었다. 일부 정치권과 운동권, 피해 지역인 호남 일부 외에는 그 행사의 의도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반대하는 이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는 국가 경제력, 문화 수준, 인프라 민도 등이 2023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1980년대 초였다는 것도 감안하여야 하므로 2023 잼버리 실패와 1:1 비교는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