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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2:22:26

여의도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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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의 공원
여의도공원
汝矣島公園 | Yeouido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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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7ee3><colcolor=#fff> 주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68
(여의도동 2)
개원일 1999년 1월 24일
면적 229,539㎡
분류 근린공원
개방 기간 연중무휴
개방 시간 항시 개방
이용료 무료
관리 서울특별시 푸른도시국
서부공원여가센터 여의도공원관리사무소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
2.1. 비행장 시절2.2. 광장 시절2.3. 공원 조성
3. 여담4.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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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여의도공원.jpg
여의도공원의 전경

여의도공원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68 (여의도동)에 위치한 시립공원이다. 여의도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이 공원과 바로 옆 여의대로를 기준으로 동여의도와 서여의도로 구분된다.

2. 역사

2.1. 비행장 시절

파일:attachment/yeouidoairport.jpg
1970년대 초에 촬영한 항공사진. 이때 당시에는 활주로가 있었다. 사진 위쪽에 뻗어가는 다리는 마포대교[1]다.

1916년 일제가 여의도에 여의도 비행장을 건설했다. 제트기가 존재하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지금처럼 비행장에 여러 부속건물이 있을 필요가 없었고, 그저 항공기가 이착륙할 널찍한 아스팔트 활주로와 필요한 가건물 몇 개만 있으면 비행장이 되던 시절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여의도공항 참고.

2.2. 광장 시절

1971년, 공군기지가 이전하게 되자 당시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여의도 개발계획'을 수립한다. 군부대 이전으로 생긴 공터를 신시가지 건설 및 당시 폭발적인 주거난 해소에 활용할 카드로 꺼내든 것. 잦은 침수 문제 때문에 결국 공군기지가 이전한 것처럼 이 침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섬이 폭파되었다. 왜냐하면 홍수를 막기 위한 제방을 쌓아야 하는데 제방의 재료가 될 토사는 이 밤섬을 폭파해서 가져오는 게 가장 간편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밤섬에도 주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이들은 섬 인근의 마포구 창전동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당시 여의도 개발계획을 주도한 사람은 김수근으로, 첫 구상 자체는 매우 입체적인 도시계획이었다. 거대한 활주로가 있던 부지도 어김없이 신시가지로 변모될 예정이었으나... 개발계획을 밀어붙일 서울시장이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로 잘려버리고, 무엇보다 이미 제방을 설치하는데 예산이 거덜 난 상황이었다. 1971년의 대한민국은 제방 건설만으로도 돈이 없어 개발계획이 좌초되던 가난한 나라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김수근의 계획을 엎어버린 사람은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였다. 손정목교수(당시 서울시 간부)에 의하면 처음에 김수근이 계획 조감도를 들고 청와대로 들어갔더니 반려되고, 그 다음에 들어가서는 광장을 넣으라고 했단다. 그래서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연상시키는 조경이 잘 된 광장을 그려갔더니 싹 밀어버리고 거대하고 광활환 비상활주로 용도의 광장을 주문했다고. 그것이 5.16 광장이라는 거대 콘크리트 공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후임 양택식 시장은 당초의 계획을 엎어버린다. 아예 민간에 택지 분양을 해버리는 전술을 들고 나온 것. 개발에 돈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예산을 충당하는 수 밖에... 이 과정에서 거대한 활주로는 5.16 광장이라는 이름의, 사실상 비상활주로로 남겨두게 된다. 침수 문제 탓에 공군기지가 이전했는데 제방공사로 그 침수 문제가 해결됐으니까. 물론 군부대로 다시 쓸 생각은 없고, 민간분양으로 확정했으니 공군부대를 원위치시키진 않았다.[2] 그래서 위의 사진에서처럼 광장 북단에는 몇몇 항공기들이 전시되기도 했고, 유사시를 위해 화장실과 샤워실, 지휘실이 있는 지하 방공호도 비밀리에 구축되기도 했다.#

다만 워낙 비밀리에 건설되었기에 그동안은 무명의 지하 배수나 배관 시설 등으로 여겨져 방치되어 있다가 2005년 5월 여의도 버스 환승센터 공사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명확한 용도는 불명이지만 1970년대 초중반 사진들에선 출입구가 확인되지 않다 1979년도 항공사진에 7~5개의 출입구가 추가되었고, 발견 당시 내부도 당시엔 최신식 좌변기와 소파 등이 들어서 있기에 1974~1979년 사이에 행사에 참석한 고위층들이 유사시 대피해 농성할 수 있게 건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담당/소관부처도 없고 관련 자료조차도 전혀 없어서 버스환승센터 공사주체인 서울특별시청 관할로 넘어가게 되었다.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 소속 전시관(SeMA 벙커)으로 탈바꿈되었다.

옛 공군기지의 활주로를 비상활주로 용도로 써먹을 목적의 오리지널 활주로 광장이었다. 여의도공원이 착공되는 97년까지 광장을 가로지르는 도로는 중앙분리대, 가로수 등 고정 시설물이 없고, 도로 주변은 건물도 꽤 떨어져 지어져 있어서 언제든지 이동식 중앙분리대 등 설치물을 치우면 활주로로 사용, 중소형 프롭 수송기와 전투기 정도는 충분히 뜨고 내릴 수 있었다. [3], 또한 평양시김일성광장에 대응되는 성격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대체로 제3세계권 후진국 정권들은 체제 선전을 위해 대규모 정치집회와 퍼레이드를 자주 개최하는데, 도심 한가운데 이런 활주로 광장이 있으면 행사 장소로 매우 유용하다. 웅장하고 엄숙한 정치집회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무솔리니. 천안문 광장에 모인 수많은 인파 앞에서 연설하는 마오쩌둥 등을 생각해보면, 광장에 모인 인파 앞에서 거룩한 존재로 연출된 모습을 드러내는 위대한 지도자의 이미지는 독재 정권의 상징과도 같다.[4]
파일:external/blog.joinsmsn.com/4a785fe288c98.jpg
1984년 5월 6일에 열린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겸 한국 천주교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 전경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서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선전을 위한 대광장으로도 활용되었는데 국군의 날 열병식[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순국외교사절 합동 영결식, 귀순용사 이웅평 대위 국민 환영대회 등 관제 집회도 여의도 광장에서 자주 개최되었다.

물론 오로지 체제 선전용으로만 쓰인 건 아니고, 이후 5공 시절서도 각종 국내, 국제 행사를 개최하는 대표적 장소로 활용됐다. 종교 행사장으로도 사용된 바 있는데 매년 부활절 연합예배가 이 광장에서 열리기도 하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강사로 나선 대규모 선교집회와 요한 바오로 2세 주관의 한국 천주교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 미사도 이 광장에서 열렸다. 또한 1981년 국풍81도 이곳에서 열렸고, 1983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 당시 가족 상봉을 위해 광장 곳곳에 피켓을 붙이던 풍경도 있었다.

또한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유세의 장으로 활용된 적도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후보 간 생방송 TV 토론회가 없어서[6] 연설과 인파만으로 인기를 가늠할 수 있었기에 여의도광장은 선거 유세의 장으로도 널리 활용되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추산 500만)을 최초로 해서 김영삼(추산 130만)#, 노태우#(추산 250만)등의 후보가 세를 결집하는 유세장이 되기도 했다. 오랜만에 있었던 야권 정치집회라 500만 집회라는 별명도 있었으나 실제로는 이 정도 규모까진 아니었을 것이다. 130만 명이란 숫자는 가득 채웠다는 추산치로 보이며,# 그 점에서 세 후보의 규모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당시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의 연설을 구경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려왔고 용팔이 사건 같은 일도 일어나고 하면서 각 진영은 승리를 자신했지만 실제 결과는 노태우가 승리해버렸다. 실제로 김대중 후보가 이른바 '4자 필승론'을 신뢰하며 별도 출마까지 한 것도 이때는 TV 토론이나 체계적 여론조사[7] 없이 오로지 여의도광장 등에 운집한 군중만으로 세를 어림잡아 판단했던 것도 한 이유였다.

민주 운동권 입장에선 1980~90년대 재야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단골 집회/시위현장도 바로 여의도 광장이었으며, 과격 시위가 난무하던 시절 복무했던 전의경 1980~90년대 군번들에겐 '전쟁터'로 명성이 자자하여 시위만 터지면 온 광장은 최루가스와 화염병, 짱돌 등으로 범벅이 되었다. 물론 6.10 항쟁의 주 무대가 되었던 서울광장에 비하면 포스가 약하기는 했다.

평소에는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마음껏 탈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단일 공간이었다. 별 볼 일 없어보이는 광활한 아스팔트 공간이 시민의 여가공간으로 사랑을 받은 것은 1980년대까지 서울시내에 널찍한 여가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내에 각종 어트랙션을 보유한 대규모 테마파크가 세워진 것은 번동 드림랜드잠실 롯데월드가 문을 연 1980년대 후반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었던 창경원이나 1973년 문을 연 서울어린이대공원이 있었지만 방문객의 범위나 공간의 성격이 다소 한정돼 있었다.

한강공원 역시 1980년대 중반 한강종합개발사업을 하면서 조성된 것이기에 당시 서울 시내의 여가시설이 전무하다시피해 여의도광장은 휴일에 가족단위로 가볍게 놀러 다녀 올 수 있었던 여가시설로 꽤나 각광받았다. 덕분에 광장 주변에 자전거 및 롤러스케이트 대여점도 많았다. 물론 여의도공원으로 바뀐 지금도 이들 대여점들은 남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절에 서울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널찍한 광장에서 타던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달려라 하니천방지축 하니 같은 여의도광장이 현존해 있었을 때 제작된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에서도 이 당시 여의도 광장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당시 광장 한가운데에는 시대에 따라 '새역사창조'(1980년대 초중반)[8], '선진조국창조'(1980년대 중후반)[9], '세계로 미래로'(1990년대 이후~철거 전) 등 구호가 크게 써져 있었다.[10]

2.3. 공원 조성

1993년 문민정부로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투사 이력답게 도시계획을 환경친화[11] 및 군사정권 잔재 제거에 중점을 둔다. 이 와중에 여의도광장은 활주로가 그대로 재활용된 아스팔트 광장이라는 미관 문제와 체제 경쟁 집회 및 부대 사열로 활용된 군사정권의 잔재라는 문제 제기가 나왔다. 이에 따라 1994년에 수립된 21세기 서울시 개발 플랜은 뉴욕센트럴 파크, 런던의 하이드파크 같은 도심권 공원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고, 1997년 4월 10일 공원화를 위한 첫 삽이 떠올려진 이후 1998년 10월 31일부터 부분적으로 공개, 1999년 2월 서울특별시 시립공원인 여의도공원으로 완전히 개장되었다.

여의도공원으로 변경을 추진하던 시절 자전거 대여업을 하던 사람들이 반대 서명 운동을 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공원으로 바뀌고 나서도 장사 잘 하고 있다.

파일:external/pbs.twimg.com/CQMoL7LUEAAJ0D0.jpg
여의도에 있는 비밀벙커.

양택식 시장 시절 비밀리에 건설되었던 지하벙커는 2017년 새단장 공사를 마치고 미술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

2022년 서울시가 '여의도공원 미래모습 시민아이디어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공모전은 여의도가 2040서울플랜에서 국제금융·업무·MICE산업 등 중심지 기능이 강화되고, GTX-B 신설 등 대중교통 인프라, 여의도 아파트지구 정비사업 등 빠르게 도시여건이 변화함에 따라 중심공간인 여의도공원을 세계적인 문화공원으로서 탈바꿈하기 위해 시민들의 창의적이고 다양한 의견을 듣고자 기획된 것이다. 총 118개가 접수되었고 그 중 20개가 수상되었다. 이 중에서 이성현 씨의 'Yeouido Dipping Park'가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파일:2022여의도공원공모전당선작.jpg
이성현씨의 당선작.

샛강과 한강을 이어서 수변공원으로 바꾸는 안이다. 이 수상작 대로 바로 착공하는 것은 아니며, 서울시는 수상작뿐 아니라 제출된 모든 118개 아이디어의 컨셉을 검토해 여의도공원 활성화 기본계획에 녹여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3. 여담

4. 동영상

여의도공원 2020년 여름 풍경


[1] 당시 이름은 '서울대교'[2] 사실 여의도광장의 활주거리는 이전의 프롭기면 몰라도 대형기가 뜨고 내리기엔 애로사항이 심하다. 그야말로 비상용 이착륙을 위한 활주로 및 주기장 수준밖에 안 된다.[3] 그래서인지 서울특별시 항공사진 서비스에서 특정 연도에 찍은 사진들 중에 이 부분이 가려진 사진들도 있다.[4] 1934년 나치당 전당대회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나 북한의 체제 선전 영상 등에서 이런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5] 여의도광장이 공원화된 후로 국군의 날 행사가 계룡대에서 비교적 작은 규모로 치러지게 되었기 때문에 국내 밀덕후들 중에는 여의도광장의 공원화를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현역 군인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는데 쌍팔년도 특전사 출신들 중에는 여의도 강하 시에는 국회의사당 뒤편의 좁디좁은 공터를 DZ로 삼아 내려야 했기 때문에 정말 몸서리치게 싫어했다고 한다. 게다가 고공탈출 시범의 경우는 "그 날 아침 먹은 식사가 뭔지 공중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수준이었다고 한다.[6] TV 후보 토론회는 당시 미국 등 서방 선진국에서나 도입됐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 관훈토론회가 시초였으나 녹화된 폐쇄식 토론이었다. 대한민국의 전국단위 선거에서 생방송 TV 토론회가 최초로 시도된 것은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였고 대통령 선거에서 지상파 TV를 통해 생방송 토론회가 처음 진행된 것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부터다.[7] 여론조사 자체는 시행되고 있었지만 표본선정을 제대로 할수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8]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이후 유독 '새시대, 새역사, 새조국' 등의 단어가 쏟아져나왔다.[9] 전두환 정부 당시 표어였다.[10] 서울특별시 항공사진 서비스 참조.[11] 이 당시 환경친화적 도시계획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서울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를 예로 들 수 있겠다.[12] 대부분은 창경궁을 복원하면서 옮겨 심어진 것들이다. 일제는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면서 조경용으로 꽤 많은 벚나무를 심어 놓았다.[13] 이건 당시 민선1기 조순 시장의 의견이 들어간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