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1944년생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김현옥(1944)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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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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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 |||
서울특별시장 재임 시절 | |||
출생 | 1926년 10월 27일 | ||
경상남도 진주군 (現 경상남도 진주시) | |||
사망 | 1997년 1월 9일 (향년 70세) | ||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54번 | ||
본관 | 김해 김씨 | ||
호 | 심전(心田) | ||
재임기간 | 제12대 경상남도 부산시장 | ||
1962년 4월 21일 ~ 1962년 12월 31일 | |||
제12-13대 부산직할시장 | |||
1963년 1월 1일 ~ 1966년 3월 30일 | |||
제14대 서울특별시장 | |||
1966년 4월 1일 ~ 1970년 4월 15일 | |||
제34대 내무부장관 | |||
1971년 10월 7일 ~ 1973년 12월 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배우자 | 오정자 | |
자녀 | 3남 3녀 | ||
학력 |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육군대학교 (졸업)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 / 학사)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 석사) | ||
경력 | 제12대 경상남도 부산시장 제12~13대 부산시장 제14대 서울특별시장 제34대 내무부장관 육상경기연맹 회장 유스호스텔협회 회장 복지법인 정립회관 이사장 행정 비상임위원 한국유스호스텔협회 회장 장안중학교 교장 | ||
별명 | 불도저 시장 | ||
군사 경력 | |||
임관 |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3기)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
1947년 ~ 1962년 | |||
최종 계급 | 준장 (대한민국 육군) | ||
참전 | 6.25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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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장성 출신이자 부산시장, 서울시장,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정치인. 서울시장으로서는 김형민 초대 시장에 이어 두 번째로 젊은 나이인 40세에 취임했다.현대 서울특별시, 부산광역시 개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흔히 박정희 정부의 3대 서울시장으로 김현옥, 양택식, 구자춘을 꼽는다.[1]
좀 나이가 많이 드신 어르신들에게는 원조 불도저 시장[2], 돌격시장으로 유명하다.
2. 일생
2.1. 군인 시절
1926년 10월 27일 경상남도 진주군(현 진주시)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학교를 다녔다.8.15 광복 후인 1947년 육군사관학교 3기로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1960년 육군 제3항만사령관을 역임하였고, 1961년 5.16에 가담하였다.
이듬해인 1962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2.2. 관료 및 정치인 시절
1961년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킬 당시 대령[3]으로서 참여하였고, 박정희가 중앙을 점거할 때에 김현옥은 부산시정을 장악하였다. 그러고 나서 부산에 온 박정희에게 도시 개발 계획 등을 브리핑하고 그의 만족을 사 1962년 경상남도 부산시장에 임명되면서 관료 커리어를 시작한다.부산시장으로서는, 경상남도 부산시의 직할시 승격을 위하여 새벽 열차까지 타고 서울을 왕래하면서 중앙 부처를 설득하는 등 발품 팔아 노력하였다. 그 결과 국회에서 '부산시 정부 직할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키는 데에 성공하였고, 마침내 1963년 1월 1일 초대 직할시장이 되었다.[4] 부산시장으로서 4년간 근무한 김현옥은 이 때부터 한국 현대사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올리기 시작한다.
불도저 시장 별명을 붙여준 서울시 대규모 개발 정책은 사실 부산시에서 먼저 적용되었던 것으로,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부산시에서도 꽤나 공사를 많이 벌였었다.
1966년 윤치영의 뒤를 이어 서울특별시장에 임명되었다. 전임자 윤치영은 서울의 인구 증가에 대해 강력한 개발 억제 노선을 취하면서 심지어 "지방민들을 이사 못 오게 법령으로 막아서 인구를 억제해야 한다"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이런 발언은 박정희나 그의 정부 인사들을 불편하게 했다.[5] 윤치영은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도움을 줬지만 한편으로는 박정희나 군사정권의 정책 의지와는 맞지 않았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정일권 국무총리를 시장실로 보내서 윤 시장을 무마시켰다. 그후 윤치영은 정중히 경질되고 부산시장이던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오게 되었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현옥은 그 명성답게 취임 다음날부터 숫제 서울의 지도를 바꿔놓을 정도의 대사업을 시작한다.
이 당시 김현옥이 벌인 대공사는
- 세종대로, 명동 지하도 건설 : 북한의 포격에 대비한 방공호를 겸했다. 윤치영의 서울 성장억제책을 사실상 포기한 상황에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했고, 특히 박정희는 포병 장교 출신이라 이 부분에 대해 관심이 깊었다고 한다.
- 세운상가 사업 : 종묘앞에서부터 중구 필동까지, 일제가 태평양 전쟁 당시 공습 폭격에 의한 화재 확산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뚫어 놓은 거대한 공터가 있었다. 이를 소개공지라고 했는데 이 공터는 6.25 이후 몰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거대한 무허가 판자촌이 되어 있었다. 김현옥은 세운상가부터 진양상가까지 모더니즘적 입체 공중도시를 만들려고 계획하였다.
- 강변북로 건설 : 1966년 홍수로 인해 서울시내까지 한강물이 역류하여 하수도가 다 넘쳐서 소동이 벌어지자 제방사업 및 교통난 해소를 위한 강변도로 정비사업을 실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영등포 인근 제방 안쪽에 이전까지 없던 새로운 택지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여의도 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 여의도 개발 : 여의도에 제방(윤중제)을 쌓고 밤섬을 폭파했다. 서울대교도 이때 개통되어 영등포/여의도와 도심을 직통으로 잇게 되었다.
- 고가도로 및 터널 건설 : 1960년대 후반의 서울은 이촌향도 현상으로 밀려드는 상경 인구와 전차, 버스 등이 뒤엉켜 극도로 혼잡한 상태였다. 또한 일본 도쿄의 시부야역과 평양의 건설 등에 자극받아 서울에도 고가도로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 때 국내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고가도로와 서울역고가도로를 건설하였고, 복개된 청계천 위에는 청계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 또한 남산1호터널, 남산2호터널, 삼청터널, 사직터널 등 서울 시내 주요 터널도 이 때 건설되었다. 아현, 서울역, 서소문 고가도로는 청계고가도로와 연결되어 서울을 관통할 예정이었으나 예산부족과 기술부족 등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남산터널의 원안은 1, 2호 터널이 중간에 교차하고 그 안에 약 30~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공호시설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 시민아파트 건설사업 : 196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에는 무허가 건물이 판을 치고 있었고 지번정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으며 밀려드는 인구로 주거난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민아파트 건설을 추진하였으나 건설 과정에서 비리, 부실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김현옥 시대 최대의 사고인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났고, 김현옥은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6]
그런데 건설의 화신이자 불도저 시장이란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지하철 사업은 계획만 세워놓고 실제 공사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도 공사를 많이 벌여놓다 보니 서울특별시청 재정이 파탄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재정담당자가 공무원들 월급을 못 줄 위기에 처해 국무총리실에 지급보증을 걸어놓고 시금고를 맡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직원들 월급을 주고 다시 메꿔놓고를 반복했다고 하며, 이 부채는 여의도 개발 후 양택식 시장이 여의도 땅을 팔아서 겨우 숨통을 틔워놓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10억 원을 끌어와 서울 지하철 1호선을 삽을 뜰 수 있었다는 건 덤.[7] 그래서 1970년 서울 아시안 게임이 서울에서 개최되지 못하고 방콕으로 넘어가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직접적인 원인은 김신조 사건)
당시 김현옥은 돌격이라고 커다랗게 써붙인 헬멧을 쓰고 하루종일 현장을 다니면서 직접 공사를 진두지휘해서 사람들에게 돌격시장이라고 불렸다.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가 발생하자 책임을 지고 서울시장 직을 사임하였다. 시장직 사임 후인 1971년에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노승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 해 10.2 항명 파동의 여파로 경질된 오치성의 뒤를 이어 내무부장관으로 복귀, 1973년까지 있었다. 내무부장관 시절에도 한성깔하였는데, 국토조림녹화계획안 입안 당시에 이를 준비했던 새마을담당관 고건의 보고를 받고 기분이 좋아졌던 김현옥은 정상천 차관, 기획관리실장, 지방국장, 치안국장, 행정담당관, 재정담당관 등 7~8명을 모아 생선회에 술을 먹으면서 회식을 하였다. 김현옥은 고건에게 박정희에게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안을 직접 보고하라고 지시했는데, 고건이 직속상관인 지방국장 김수학이 보고하는게 맞다고 사양했다. 김현옥이 강권하는데도 고건이 세번 사양하자 김현옥이 즉시 유리 재떨이를 집어던졌는데, 그래도 다음날 대통령 보고해야 한다고 일부러 얼굴이 아니라 경고성으로 귀를 스치게 던졌다고(...).
박정희가 피살된 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관료형 부정축재자로 몰리게 되어 중앙 정계에서는 축출된다.
2.3. 말년 및 사망
전두환이 집권한 후로는 중앙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1981년 5월 경남 양산군(현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는 장안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뒤 그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또한 1989년에 중학교 바로 옆에 장안여자고등학교(現장안제일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그러다 1995년 1회 지선에서 무소속으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였는데 169,652표로 민주자유당 문정수 후보, 민주당 노무현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8]
1997년 1월 9일에 기도폐색으로 사망했다.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에 안장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1 | 제8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14선거구 | [[민주공화당|]] | 61,201 (49.09%) | 낙선 (2위) | [9] |
1995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부산광역시장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69,652 (9.84%) | 낙선 (3위)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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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총선 (서울 14선거구) | 1회 지선 (부산광역시장) |
4. 기타
2016년 7월 1일부터 8월 21일까지 경희궁 옆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불도저시장 김현옥' 특별전을 개최했다. #여의도 개발을 위해 밤섬을 폭파했는데, 밤섬은 원래 사람들이 제법 살던 섬이어서 주민들은 모두 마포구 창전동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리하여 밤섬 주민들은 김현옥에 대한 원한이 컸으며 김현옥이 말년에 사망하자 '부군당을 부쉈으니 신의 벌을 받은 것'이라며 조롱했다. 부군당은 밤섬 주민들이 믿던 무속 신앙의 대상인 부군신, 삼불제석, 군웅신을 모신 사당으로 주민들이 이주할 때 부군당도 함께 창전동으로 이전했다.
2022년 10월 KBS 다큐인사이트 ’싸우면서 건설하자‘ 편에서 다뤄진 인물이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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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기획원장관 |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DAA520> 태완선 → 남덕우 → 신현확 | |||
국토통일원장관 | 김영선 → 김용식 → 신도성 → 유상근 → 이용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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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부장관 | 남덕우 → 김용환 → 김원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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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장관 | 유재흥 → 서종철 → 노재현 | |||
문교부장관 | 민관식 → 유기춘 → 황산덕 → 박찬현 | |||
농수산부장관 | 김보현 → 정소영 → 최각규 → 장덕진 → 이희일 | |||
상공부장관 | 이낙선 → 장예준 → 최각규 | |||
건설부장관 | 장예준 → 이낙선 → 김재규 → 신형식 → 고재일 | |||
보건사회부장관 | 이경호 → 고재필 → 신현확 → 홍성철 | |||
교통부장관 | 김신 → 최경록 → 민병권 → 황인성 | |||
체신부장관 | 신상철 → 문형태 → 장승태 → 박원근 → 이재설 | |||
문화공보부장관 | 윤주영 → 이원경 → 김성진 | |||
총무처장관 | 서일교 → 심흥선 → 심의환 | |||
과학기술처장관 | 최형섭 → 최종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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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기획원장관 | <colbgcolor=#ffffff,#1f2024><colcolor=#835B38> 김유택 → 장기영 → 박충훈 → 김학렬 → 태완선 | |||
국토통일원장관 | 신태환 → 김영선 | |||
외무부장관 | 정일권 → 이동원 → 정일권 → 최규하 → 김용식 | |||
내무부장관 | 엄민영 → 양찬우 → 엄민영 → 이호 → 박경원 → 오치성 → 김현옥 | |||
재무부장관 | 박동규 → 이정환 → 홍승희 → 서봉균 → 김정렴 → 김학렬 → 서봉균 → 황종률 → 남덕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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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치영은 강력한 서울시 개발 억제책을 썼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 시절 재임했음에도 이 후임 3대 시장 만큼의 업적을 세우지는 못하여 평가가 낮은 편이다. 게다가 이들 3대 시장은 관선임에도 4년씩 재임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파리목숨이나 다름없는 관선임에도 불구하고 이정도 재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들 시장의 역량을 믿고 박대통령이 장기간동안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2] 공교롭게도 박정희의 별명 또한 이명박의 또 다른 별명인 가카에서 파생된 원조가카다.[3] 당시 육사 5기가 대령, 육사 8기가 중령, 육사 11기가 대위였다.[4] 당시에는 정식으로 '부산직할시' 명칭은 얻지 못하고 단지 경상남도를 떼고 서울처럼 그냥 내무부 직할의 부산시였다. 승격식에서도 부산직할시라고 쓰고 당시 부산 지역 언론 등에서도 비공식적으로는 부산직할시 명칭이 통용되었기는 하였으나 공인된 것은 아니었다. 부산직할시로 정식 개칭된 것은 1981년 4월 4일로, 대구시와 인천시의 직할시 승격 3개월 전이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1963년부터 1981년까지의 이 과도기는 '(정부 직할) 부산시'로 표기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긴 하나, 현재의 부산시에서는 부산직할시 명칭이 1963년부터 오랫동안 통용되어왔음을 근거로 부산직할시 표기를 1963년부터로 소급 적용하고 있으니 이 시기의 부산직할시 표기가 꼭 틀린 것은 아니다.[5] 엉뚱하게도 박정희를 비롯한 고급 장교 출신들은 이 발언을 계기로 만약 제2차 한국전쟁이 발생할 경우 인구를 대피시킬 방법을 찾고자 했다. 서울 시민이 많아지는 걸 억제하면서도 신속하게 대피시킬 방법인데, 이때문에 남산 터널, 강남 개발, 다리 건설 등이 이뤄졌다.[6] 주거난과 도심재개발에 의한 사고는 이후로도 끊이지 않아서 결국 광주대단지사건이라는 대형 쟁의로 폭발하게 된다. 다만 이것은 후임인 양택식 시장 대의 일.[7] 양택식은 철도청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철도 관련 사업에는 자신이 있어서 여의도와 함께 가장 의욕적으로 추진한 것이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구간 사업이었다.[8] 만약 이 때 당선되었다면 경상남도 부산시장, 부산직할시장, 부산광역시장을 모두 지낸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을 것이다.[9] 현 마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