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60년대 서울특별시의 무허가 건물을 정비하기 위해 시에서 지은 아파트.2. 건립 계획
6.25 전쟁이 끝나고 나서 많은 지방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무허가 건축물도 급증하게 된다.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서울특별시장이었던 김현옥에게 무허가 건물의 정리를 지시한 것이 시민아파트 계획의 시작이었다.1960년대 중반 정리를 위해 서울시에서는 각 구청에 지시해 무허가 건물을 전수조사 하도록 했다. 그 결과 136,650동의 무허가 건물이 집계되었다. 아무리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대라고 해도 몇십만에 달하는 시민들을 건물 정리한다고 길바닥에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대책을 마련했는데, 일단 46,650동은 현지 개량을 통해 양성화 시키도록 했고, 나머지는 철거하기로 했다.
이 철거민들이 이주할 장소로 만든 두 곳 중 하나가 시민아파트. 나머지 하나는 경기도 광주(현 성남시)에 위치한 대단지였다. 참고로 이쪽도 도시계획을 엉망진창으로 했다가 광주대단지 사건이라는 초대형 사건을 터뜨렸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처음에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이, 서대문구 천연동에 아파트 19개동을 지어 철거민들을 그쪽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 하나만 있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68년 6월 18일, 최초의 시민아파트 단지인 금화시민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1968년 12월 3일 시민아파트 건립계획이 발표되었는데, 1969년부터 1971년까지 240억 원의 예산을 들여 무려 2천 동의 시민아파트를 건립한다는 대계획이었다. 첫 해인 1969년에는 48억원을 들여 400동을 짓고, 1970년에는 800동, 1971년에는 800동을 지어 2천 동을 채운다는 이야기였다. 각 세대당 전용 면적은 11평. 입주 방식은 최초 계약금만 납부하고 입주 후 최장 15년까지 입주금을 분할 납부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1969년에 400여 동의 아파트를 짓게 되었는데, 전반기에 284개동, 후반기에 116개동을 지을 계획이었다. 이때 지어진 아파트는 32개 지구 406동으로 약간 더 많이 건설되었다. 1970년에도 계획은 계속 진행되어 시민아파트 건립계획이 중단되기 직전까지 시민아파트의 개수는 총 447동이었다.[1]
3. 아파트 구조 및 생활 문화
아파트의 구조 자체가 요즘의 아파트와는 상당히 달랐다. 보통 벽체식 구조로 되어 내력벽이 하중을 지탱하는 요즘의 아파트와 달리, 기둥과 보, 슬라브로 이루어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각 방을 나누는 벽은 시멘트 블록으로 되어 있어서 방음이 거의 안 되었고 단열도 잘 안되어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더웠다. 내력벽이 아니므로 철거하고 구조 변경하기도 쉬웠기 때문에 요즘 아파트와 달리 내부 구조 변경이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2] 시민아파트 사진을 보면 각 세대의 내 외부 구조가 제각각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구조 때문이었다. 특이한 것은 요즘은 아파트에 많이 쓰지 않는 미닫이문이 꽤 쓰였다는것이다. 공간이 워낙 좁다 보니 문을 여닫을 공간마저 모자라서 미닫이 방식을 쓴 것. 거실과 현관 사이에는 주로 두 짝 간유리 미닫이문으로 구분을 해 놓았는데, 연 상태에서도 반은 가려지므로 답답하다고 대부분 떼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난방은 대부분 개별 연탄(!) 난방이었고, 세면장과 화장실은 각 층당 공동으로 쓰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3] 마치 군대 막사나 고시원, 기숙사 같은 형태로, 지금의 아파트와 비교해 보면 상상도 못 할 구조다. 원래 이 당시까지도 흔했던 초가집을 비롯한 개인 단독주택에서도 재래식 화장실이 대부분이었고, 수세식 화장실은 그리 흔치 않던 때라 화장실이 방이랑 멀리 떨어져있는 배치가 많았고, 달동네에서 화장실을 공용으로 쓰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이를 반영한 것이었다. 복도 벽은 모르타르를 바르고 페인트칠로 마감, 바닥은 모르타르+황동 메지+대리석 조각 갈아내기(도끼다시)[4] 마감이 많았고 세면실 겸 부엌 또는 화장실은 타일 마감이 많았다. 각 층을 잇는 계단도 도끼다시 마감. 중앙 계단을 두고 양 옆에 1자형으로 3~5집(층마다 8~10호)씩 집이 있고, 복도 한쪽 끝에는 비상계단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전용면적은 11평(약 36m2)으로 상당히 작은 편이다. 설계도에 따라 A, B, C형의 3가지 형태가 존재했다. 방의 구성이나 형태가 약간씩 다른 정도의 설계도였다. 거실 겸 안방 하나, 작은 방 하나, 부엌 겸 세면실 하나인 구성이 흔했는데 화장실은 집마다 있는 경우와 공동인 경우가 있었다.
세대당 면적이 상당히 작았던지라 대부분의 세대가 창문을 뜯어 창호를 확장해 붙박이장을 만들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이불을 보관하는 붙박이로 두어 겨울철 단열의 효과도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 환기가 문제가 되어 거의 쓰이지 않게됐다.
5층이든 8층이든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없었다. 애초에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엘레베이터는 일부 고층빌딩이나, 호텔, 백화점 정도에나 있던 고급기계였고 이사용 사다리차도 없던 시절이다.[5] 에너지 절약을 명분으로 5층 이하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를 못 놓게 하는 법도 있었고. 그 때문에 요즘 아파트와 다른 점이 있었는데, 이삿짐을 나르기 쉽게 하기 위해 대부분 중앙 계단이 피아노를 네 명이 들고 올라갈만큼 넓은 경우가 꽤 있었다는 것이다. 옥상은 대부분 개방해 놓았는데, 주민들이 고추나 쌀 같은 채소, 곡식을 말리는 장소로 많이 썼다. 장독을 갖다 놓는 것은 대부분 금지였지만 플라스틱 화분을 여러 개 갖다 놓고 상추나 토마토 같은 것을 길러 먹는 경우도 있었다. 평상을 가져다 놓고 여름 밤에 올라가 더위를 피하거나 했다.
당시 시민아파트는 요즘 아파트 단지와 달리 관리사무소의 통제가 강력하지 않았다. 아예 관리사무소가 없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얘기하자면 방범순찰이라든지 하자보수, 청소처럼 아파트 자체적으로 지원해 주는 것이 없었다. 한 건물에 모여 산다 뿐이지 각 가구는 별개로 취급되었기에 청소든 수리든 뭐든 집마다 알아서 해야 했다. 즉, 문제가 생기면 시, 지자체에서 해 줘야 했다. 다만 복도와 계단 물청소 같은 것은 따로 하면 효율이 떨어지므로 동마다 주민들이 청소하는 날을 정해 놓고 (주로 통-반장 지휘 아래) 같이 하는 경우도 꽤 많았다. 정화조 청소 같은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은 관리소에서 해 주었고. 노후화되고 공동화된 후에는 그런 미약한 지원마저 사라졌다. 안 그래도 건축 수준이 그다지 좋지 못한 시민아파트인데, 관리사무소의 통제나 관리도 미약하다보니 대다수의 시민아파트들은 같은 시기에 지어진 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한 다른 아파트들에 비하면 건물이 노후화 되는 속도가 빨랐었다.
당시 시민아파트의 분위기는 이웃끼리 얼굴도 모르고 잘 왕래하지 않는 요즘과 달리 거의 가족처럼 친하게들 지냈다. 복도식은 한 층에 8~10집이 있었는데 집이 워낙 좁고 답답하다 보니 겨울철을 빼곤 거의 문을 열어 놓고 지냈고, 지나다니면서 얼굴을 안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문이 닫혀 있는 집은 "외출중"이라고 보면 되었다.[6] 음식을 만들면 옆집으로 다 냄새가 넘어가니 서로 나눠먹기도 하였고, 아이들끼리도 초등학교는 무조건 같고, 중고등학교도 같거나 가까운 학교에 다니다 보니 친구였다. 1980~90년대 홍콩 영화에서 보는 그런 분위기를 상상하면 된다. 그 당시에도 시민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빈곤층, 소외계층이었다.[7] 결혼, 초상 같은 경조사에는 같은 층, 같은 동 사람들이 모였고, 명절에는 단지 내 공터(놀이터)에서 모여 불 피우고 모여 음식과 술을 나눠먹으며 윷놀이도 하는 등 시골 마을의 문화와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당시 시대상 이촌향도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때인지라 시민아파트 살던 사람들 대부분이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동향 사람들끼리 뭉치기도 했으며, 서울 토박이들은 주로 단독주택에 살았기 때문에 가세가 기운 게 아니면 환경이 열악한 시민아파트로 이사갈 이유가 없기도 했고.
또한 1970년대에는 자동차가 잘 사는 사람들이나 가지던 초 고가의 자산이었기 때문에[8] 시민아파트에 따로 주차장이 없었다. 그래도 차를 가진 사람이 워낙 적어(수백 세대 아파트 단지 전체에 10대가 안 되었다.)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 자가용이 차츰차츰 보급되기 시작하자 시민아파트는 주차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대부분이 산등성이에 지은 탓에 주차를 하려면 묘기에 가까운 주차 기술을 보여주었고, 좀 넓은 데가 있으면 이중 삼중 주차를 해서 일찍 나갈 사람은 미리 와 안쪽에 차를 대면 안 되던 게 시민아파트였다.
4. 문제점
아파트 대중화의 서막을 올렸다는 의의는 있지만 건설과정에서 적은 건설비용과 부정부패 등으로 인해 날림공사가 남발되었고, 이 문제로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라는 참사가 터지며 흑역사가 되었다.아파트당 주어진 예산이 너무 적었고 시공 기간도 6개월 정도로 짧았다.[9] 거기다 대형 업체가 아닌 자금력과 기술력이 떨어지는 33개 중소업체가 맡아 건설하고 있었다. 거기다 건설업계의 고질적인 문제인 하도급 구조까지 겹치면서 예산은 더욱 적어졌다. 이 때문에 거의 모든 아파트가 부실한 상태로 지어졌다. 여기서 골조공사 이외의 내부공사는 모두 입주자에게 떠넘겼다. 이 때문에 계단 난간 등을 만들지 않아 추락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거기다 서울시도 예측을 잘못한 것이, 아파트 설계를 당시 저소득층 생활기준에 맞춰서 했는데 실제로 아파트에 들어와 살던 계층 가운데서 생각 외로 중산층들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이유인 즉슨, 입주권 자체는 싸게 책정했지만 중간에 브로커들이 개입해서 입주권의 가격을 크게 올려놓았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아도 입주비를 낼 형편이 안 돼서[10] 일명 딱지라 불리는 입주권을 부유층이나 중산층에게 내다 팔고 집세가 싼 타 지역으로 이사가는 저소득층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11] 물론 부유층들이야 아파트가 좁고 편의시설도 잘 안되어있으니 실 거주는 단독주택이나 평수가 더 넓은 다른 고급 아파트에서 거주하고, 다른 사람에게 세를 내서 돈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세 내줄 정도의 형편까지는 안 되는[12] 중산층들은 그래도 집은 집인지라 실제 입주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1㎡당 270kg으로 설계되어 있던 아파트의 하중이 900kg 이상으로 3배 이상 초과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거기다 아파트를 지은 곳은 대부분이 산중턱. 왜 저런 곳에 아파트를 지었냐는 질문에 대한 김현옥 시장의 답변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야 이 XX들아. 높은 곳에 지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냐!" (...)[13]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그 탓에 수도 시설이 빈약했다. 거기까지 수도관 압력이 닿지 않았던 것. 대부분의 시민아파트에는 집집마다 어른 한두 명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고무통을 썼었다. 수압이 낮은 낮엔 수돗물이 거의 안 나와서 그나마 졸졸졸이라도 나오는 밤에 물을 받아 놓고, 낮에 바가지로 퍼서 썼다.[14]
외관도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처음 지어졌을 때야 내외부 모두 완성한 상태로 제대로 되어 있었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는 내부 외부 모두 노후되었고, 기본 골조를 제외한 나머지는 개인이 알아서 교체, 수리 하다 보니 창문틀이나 문짝 등 인테리어가 제각각이었으며, 시간이 더 흐른 뒤에는 내부 구조는 개조를 거듭해 바뀌고 외관도 더 볼품없어졌다. 외벽 페인트를 다시 칠하지 않아 회색 콘크리트가 다 드러나거나, 각 집에 달려 있던 연통에서 녹물이 흘러 누렇게 변한 곳도 있었다. 게다가 중간에 철거되는 동이 생겨 산 중턱 넓은 부지에 홀로 남아있게 된 경우도 있어 매우 삭막해보였다.
5. 각종 사고
부실공사로 지어진 시민아파트는 처음부터 많은 문제를 낳았다. 가장 큰 문제는 연탄가스였다. 최초의 시민아파트인 금화아파트를 비롯한 시민아파트 1차분은 1969년 겨울철에 입주가 시작되었고, 입주자들은 난방을 위해 연탄을 땠다. 그러나 부실공사로 인해 바닥이나 벽체에 금이 가면서 그 틈으로 연탄가스가 새어 들어왔고, 1969~70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는 시민아파트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심심하면 신문에 실렸다.또한 시민아파트 담벽이 무너져서 사람이 깔려 죽었다는 기사도 나오고, 경사지에 부실하게 세운 건물이 중력에 의해 뒤틀리면서 배관이 뒤틀려 화장실 오물이 아래층으로 새서 악취가 나고, 건물 일부의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가는 등의 부실공사로 인한 부작용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당시 주민들은 이런 하자에 대한 보수를 해달라고 서울시에 수십 차례 건의를 했지만 서울시는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계속 보류하는 처지였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민아파트는 계획대로 계속 짓고 있었다.
5.1.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안고 있던 시민아파트는 결국 최악의 참사를 불러일으켰다. 1970년 4월 8일, 준공된지 4개월밖에 안 된 시민아파트 한 동이 폭삭 무너져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세한 것은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문서 참고.당연히 난리가 났다. 공무원을 포함해서 관련된 사람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김현옥 시장은 사퇴했고[15], 시민아파트 건립은 흑역사가 되었다. 시민아파트의 안전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아파트 안전도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지어진 447동 중 349동에 달하는 시민아파트가 보수를 해야 한다는 충공깽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덧붙여 사고 직후 서독의 건축 전공 대학원생들이 원인 규명을 위해 사고 현장을 방문했다가 부실공사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나서는 어이없는 표정을 보이며 귀국함으로써 국가적 망신까지 당하기도 했다.
6. 철거
1977년까지 너무 날림으로 지어져서 보수할 수도 없는 시민아파트는 철거되었다. 이때 철거된 시민아파트는 무려 101동. 4분의 1에 달하는 아파트가 지어진 지 10년도 안 되어 철거된 것이었다. 이 철거비용은 시민아파트 건립 비용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게다가 철거할 때 붕괴사고가 일어날까봐 철거공사가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아 있던 시민아파트도 더 이상 보수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버리고 붕괴 위험이 제기되었다. 처음부터 날림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20년 이상 지나자 문제가 되어버렸던 것. 당시 시민아파트의 상태를 찍은 영상들을 보면 단순 진단만 하는데도 벽에 금이 가거나 벽면이 떨어져나가고, 계단손잡이도 삭을 대로 삭고, 천장에 물이 새는 등 상태가 말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는 1997년 9월 재난관리법을 제정하고, 시민아파트 정리 계획을 세워 순차적으로 정리해 나갔다. 그 결과 2005년까지 총 447동 중 443동을 철거했다.
2015년 8월 3일에는 남아 있던 금화시범아파트 3, 4동의 철거가 시작되었다. #관련뉴스.철거 첫날의 모습 금화시범아파트는 금화시민아파트 근처에 1971년 추가로 지어진 아파트로, 시민단지 안과 근처에 15개동 정도가 지어졌다. 그 후 미리 철거되고 남은 4개 동 중 1, 2동은 2001년 금화시민아파트와 같이 철거되고 3, 4동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2동 모두 2007년에 E급(
7. 남아 있는 시민아파트와 시범아파트의 개념
현재를 기준으로 시민아파트의 본고장인 서울에서 온전히 남아있는 시민아파트는 남산 밑에 있는 회현시민아파트 단 1개 동만이 온전히 남아 있다.[16] 와우아파트 붕괴 당시에는 아직 건설 단계에 있던 아파트였는데, 공사를 그냥 중지할 수는 없었기에 구조물을 크게 보강하여 완성했고, 덕분에 시민아파트 치고는 골조가 상당히 튼튼하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이 회현시민아파트는 시범아파트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데, 한창 짓고 있다가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일어나자 급하게 시범아파트 쪽 분류로 넣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회현시민아파트는 시민아파트 분류에도 들어가고, 시범아파트 분류에도 들어가는 특이한 형태가 되었다. 이 아파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파트와는 그 형태가 많이 다른 편인데, 일단 급경사에 위치했기 때문에 구름다리를 통해서 아파트 중간 층에서 도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 비교적 작은 평수의 집들이 나중에는 외부까지 확장된 베란다를 가지고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모습은 마치 구룡성채 같은 느낌이 난다. 실제로 이 아파트의 구조는 기존 시민아파트와도 차이가 있는데, 화장실이 모두 개별화장실로 들어갔다는 점이고 난방도 중앙난방식으로 되어 있다. 덕분에 처음 지어질 때는 조금 높으신 분들도 이 아파트들을 선호했다고 한다.
시범아파트는 와우 아파트 참사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만든 아파트로, 사유지에 지은 것도 있지만 국유지 땅을 빌려 지은 것도 있다. 1970년 초반 저층 위주로 건립이 시작되었고, 이촌, 중산, 한남, 회현, 창전[17], 여의도, 삼일만 남아있다.
7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선 지어진 아파트는 기존 시민아파트와 다르게 주로 중산층을 타겟으로 잡으면서 1970년 이촌동 한강맨션, 현대맨션, 반포주공1단지, 여의도 시범아파트등 중산층용의 아파트가 탄생하게 된다. 여의도의 시범아파트로 인해 아파트는 빈민이 아닌 중산층용 주거 양식이 된다. 이 시범아파트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일반적인 아파트의 원형으로, 이 "시민아파트"와는 개념부터 완전히 다르다. 아래 항목에도 있지만 시범아파트로 표시한 여의도아파트, 옥인아파트 등 몇 개 단지는 명목상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지어진 것으로, 실제로는 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했다. 2020년대 기준으로 보면 수도권 5억대 아파트 단지(개별난방, 욕실 두 개, 1가구당 주차공간 2대)와 위상이 비슷하였다.
옥인아파트는 복도식이 아니라 두 집씩 마주보는 구조로 개인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는 배치였다. 평수부터가 다르다. 11평이던 시민아파트의 두 배 가까운 18-20평이었다. 수세식 앉아쓰는 변기가 설치된 욕실, 작은 식품창고가 붙은 부엌, 방 세 개, 베란다가 붙은 거실의 구성이었다. 엘리베이터와 공용 복도가 없어서 복도, 엘리베이터 등 공용으로 빠지는 공간이 없어서 실 평수는 더 넓었다. (철거 전에는 24평형으로 거래되었다.) 제대로 된 국산 승용차가 없던 70년대 초에 네 집에 한 집 꼴로 자가용이 있었고 대부분이 시보레 벤츠 피아트 포드 푸조 등 외제차 녹다운 생산 또는 수입차였다. 전화 없는 집이 없었고[18], 피아노는 서너 집에 한 대이며 TV, 냉장고, 전축 없는 집은 없었고, 집집마다 수세식 변기와 욕조 있는 욕실에 개별 경유 보일러가 있는 등, 당시 경제 수준에 비하면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였다. 도시가스는 망 자체가 없던 때라, 취사에는 LPG 봄베를 쓰거나 석유풍로(콘로)를 사용하였다. 또한 아파트 안에 옥류동천이 흘러 경관이 좋고 연가시와 가재가 사는 1급수였던 그 물을 이용한 작은 옥외 수영장도 있어 저연령층에게는 놀이터가 되었다. 하지만 건물 노후화와 인왕산 보전 사업의 일환으로 2010년 철거 단계에 돌입하였으며, 이듬해 6월 30일 완전히 철거되어 계곡과 함께 녹지화 되었다. 다만 철거되고 남은 벽체는 기념 삼아 남겨 두었으며 북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면 2개동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카카오맵에서도 철거되기 전의 흔적을 볼 수 있다.[19][20]. 당시 방송국이던 정동, 남산과도 가까와서 연예인들도 꽤 살았다. 양희은, 양희경 자매가 10대 시절 살았고, 탤런트 서승현도 살았다. 옥인길의 옥인연립은 철거된 이후 그 자리에 지어진 것이다. 옥인길은 일부가 옥류동천을 복개한 길이며, 끝이 옥류동천 수성동계곡 앞 주차장이다.
사실 여의도 아파트의 시범과 시민아파트에 쓰인 시범이라는 뜻 자체가 다른 것이,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한국형 고층 아파트의 시범 모델이자 여의도 개발의 시범을 보인다는 이미지인 반면 시민아파트들에 쓰인 시범은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이후 서울시에서 부실시공 근절의 시범을 보인다는 뜻으로 붙인 것들이다. 당시 서울시에서는 아직 안 지은 시민아파트 계획을 모조리 파기시키고, 짓고 있었던 시민아파트들은 골조 및 구조를 대폭 강화하여 시범단지라는 이름을 붙이게 했다. 회현시민아파트나 이촌시민아파트, 금화시민아파트 최후 철거분은 이 때문에 시범단지로 다른 단지와는 분리되어 건설되었다. 이때 이촌시민아파트에서 분리된 이촌시범아파트와 중산시범아파트는 아직까지 남아 있다.
어쨌든 회현시민아파트는 독특한 분위기와 얼마 없는 시민아파트라는 이유로 언론에서 조명을 받고, 여러 영상매체에서 이 곳을 담아갔다. 영화 소름, 친절한 금자씨에도 시민아파트가 나오고, 무한도전도 시민아파트를 다녀갔다.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카메라를 들고 많이 찾아왔었다.
그러나 시민아파트 모두 함부로 촬영하지 말라는 경고판이 붙어있다.
회현시민아파트는 아파트를 떠받치는 옹벽이 D급 판정을 받았고, 이 때문에 2006년에 재건축 계획이 잡혔다. 이런저런 문제로 계속 재건축이 지연되고 있지만, 계획이 확정되면 두 아파트모두 조만간 사라질 듯하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 아파트 역사의 한 단락이 없어진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 거주하는 주민들은 대체로 환영 일색이나 다수 거부하기도 한다.
리모델링한 경우도 있는데, 낡은 창전시범아파트를 리모델링하여 중앙하이츠아파트로 바뀌었다. 하지만 외관만 바뀌었지, 안전상 여전히 위험하다.
일부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청계천변에 있던 삼일시민아파트가 그것으로, 청계천 양쪽으로 1, 2층은 상가, 3~7층이 주거용 아파트인 주상복합 형식의 아파트였다. 청계천 남쪽에 있던 단지는 모두 철거되어 롯데캐슬로 재건축되었고, 북쪽에 있는 단지는 3~7층만 철거하고 1, 2층만 남겨서 상가로 사용하고 있다. 옥인아파트는 공원화하기 위해 철거할 때 벽체 일부[21]를 남겨 두었다. 현재는 카카오맵에서 옥인연립으로 찾아서, 옥인길 산쪽 뒷길에서 옥인아파트 흔적 팻말과 함께 볼 수 있다.
서울시는 미래유산의 일부로 10대 미래유산 아파트 후보를 선정했는데 그중 회현시범아파트가 후보로 선정되었으며 금화시범아파트는 공원 조성을 하겠다고 선언하였지만 표류 중이며 공터로 남아 있다.
8. 시민아파트 목록
가나다 순서대로 기술한다.8.1. 서울
대부분의 단지가 산등성이에 있었기 때문에 녹지화 된 곳은 흔적을 찾기 어려우며, 공원 조성을 한 곳도 석축 남아 있는 일부 예 이외에는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금화시민아파트(현재 일부 녹지화 및 공원조성, 천연뜨란채아파트로 재건축)
- 김포시민아파트(주차장부지로 사용중이며 5개동 중 행정구역상 3개동은 강서구에, 2개동은 양천구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 낙산시민아파트(현 낙산공원 일대. 지금의 중턱 주차장 자리가 아파트 자리중 하나였다고 한다. 지금도 지적편집도에서 이 일대를 자세히 보면 흔적이 남아있다.)
- 노고산시민아파트(공원조성)
- 노량진시민아파트(철거 후 사육신역사공원 확장 부지에 편입)
- 녹번시민아파트(녹번 JR아파트로 재건축)
- 도봉시민아파트(철거후 구청 창고부지로 사용중이었다가 평화문화진지로 변경)[22]
- 동숭시민아파트(현 주차장 및 공터로 사용. 지금도 지적편집도에서 이 일대를 자세히 보면 흔적이 남아있다.)
- 미동시민아파트(지어진지 얼마 안돼 헐린 것으로 추정)
- 보광시민아파트(현 녹지)
- 본동시민아파트(철거 후 공원조성. 1동 자리에는 본동종합사회복지관이 들어섬.)
- 북아현시민아파트(북아현동 두산아파트로 재건축)
- 사당시민아파트(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와 협동하여 지은 단지로써, 통상 '예술인 아파트'로 불렸다. 2003년 철거되어 현재는 주차장, 도로 확장부지로 일부 편입되었다. 명칭과는 달리 관악구 남현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후신이 경기도 안산의 '예술인 아파트'로 계승중이다.)
- 산천시민아파트(리버힐삼성으로 재건축)
- 삼일시민아파트(창신, 숭인지구는 주거시설 철거 및 저층부 상가 보존, 황학지구는 롯데캐슬아파트 부지에 편입)
- 서강(와우)시민아파트(현재 와우산공원. 지금도 지적편집도에서 이 일대를 자세히 보면 흔적이 남아있다.)[23]
- 수색시민아파트(1개동 현존. 주소는 서울 은평구 은평터널로2길 13.)
- 연희시민(시범)아파트(B지구만 성원아파트로 재건축, A지구와 시범지구는 공원 및 녹지로 조성되었다. 지금도 지적편집도에서 이 일대를 자세히 보면 흔적이 남아있다.)
- 영흥시민아파트(성재 아이스캐슬 아파트로 재건축)
- 용강시범아파트(2개동만 강변그린으로 리모델링, 나머지는 철거. 다만 지적편집도에서 이 일대를 자세히 보면 철거된 나머지 동의 흔적이 남아있다.)
- 응암시민아파트(응암 신동아아파트로 재건축)[24]
- 응봉시민아파트(현 응봉산 암벽공원 부지 일대)
- 이촌시민(시범)아파트(시민아파트는 4개 동이 줄지어 있는 형태였으나 2003년경 철거되었고, 이촌2동 주민센터 부지와 공영주차장으로 활용중이다. 시범아파트는 아직 남아 있고 주변 지역과 묶여서 재건축이 진행중이다.)
- 월곡시민아파트(월곡 샹그레빌아파트로 재건축)[25]
- 옥인시범아파트(현 옥인동 수성계곡 부지. 일부가 기념으로 약간 남아있으며, 지적편집도에서도 이 일대를 자세히 보면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에는 시범아파트로 불린 적이 없고 간판에도 그냥 옥인아파트였다.)
- 전농시민아파트(전농 SK 아파트로 재건축)
- 정릉시민아파트(국민대학교 건너편, 스카이웨이(북악길)로 골프연습장 가는 길 쪽에 있었다. 90년대에 철거. 현 정릉연립 자리였다. )
- 중산시범아파트(현존)[26]
- 창신시민아파트(현재 주차장 및 공터로 사용. 지금도 지적편집도에서 이 일대를 자세히 보면 흔적이 남아있다.)
- 창천시민아파트(1976년 철거)
- 청운시민아파트(현 공원 및 녹지 조성지역 - 원래 그린벨트/군사지역 안에 지어져 있었다.)
- 청파시민아파트(2003년 철거+공원조성)
- 현저시민아파트(공원조성)
- 홍제시민아파트(현재 공원및 녹지 조성지역) [27]
- 회현시민아파트(제1시민은 철거, 제2시민아파트만 현존[28])
- 행응시민아파트(공원조성)
8.2. 부산
8.3. 광주
8.4. 목포
8.5. 안산
8.6. 여수
8.7. 전주
- 전주시민아파트(공원조성)
[1] 일시에 중지된 것은 아니고,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이후에도 몇 십 개 동은 계속 지어졌다. 대부분 이미 짓고 있던 것들로, 이들 아파트는 사고 이후에 준공 된 것들이라 골조가 튼튼했다.[2] 현대의 중국 아파트도 내부장식은 안 한 채로 분양을 한다.[3]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건축시기와 등급별로 달라서, 집마다 세면대와 화장실이 있는 단지도 있었다. 그래도 욕조가 있는 화장실+욕실은 없었다.[4] 2010년대 후반 들어 테라조라는 명칭으로 바꿔서 부르는, 조금 오래된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황동으로 된 줄이 가로세로로 있고 대리석 돌조각이 박힌 모르타르 바닥이 이거다. 2000년대 초반까지 많이 사용되다가 석재 마감이 일반화되면서 거의 사라진 방식이다.[5] 그래서 시골에서 상경한 친구를 맞이했을 때 서울물 좀 먹었다고 허세를 부렸다가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사고가 일어나는 등 웃긴 에피소드들이 있었을 정도.[6] 문을 열고 다녔지만 좀도둑은 가끔 있었어도 보는 눈이 많으니 강력 사건이나 큰 일은 드물었다.[7] 거주 시기에 따라 다르다. 80년대 중반 이전 거주민은 오히려 좀 살만한 편이었다. 진짜 극빈 소외계층은 하천변 판잣집이나 비탈길 달동네 무허가 건물에 살았기 때문. 90년대 이후 그런 집들이 다 철거되고, 기존의 좀 살만했던 시민아파트 거주민들은 상당수가 민간 건설사의 신축 아파트로 이주함과 동시에 세를 놓거나 매각하면서, 그런 철거민, 극빈층들이 노후한 시민아파트로 들어오게 된다.[8] 차도 비쌌지만 유지비가 엄청났다. 오너드라이버가 거의 없던 시절이라 대부분 운전사를 두었으며, 휘발유가 리터당 현재 화폐 가치로 5000원에 육박했다. 당시 차량은 리터당 5-6km 밖에 못 갔다. 국산 승용차가 나오기 전까지 얘기다.[9] 사실 구소련에서 흐루숍카 아파트 1채를 만들때 단 2주안에 완공했다는 일화에서 볼수있듯이 이렇게 시공기간이 짧아도 수십년씩 가는 건물을 만드는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한국은 이러한 조립식 건축기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이었다.(...)[10] 이 당시에 서민금융은커녕 금융업 자체가 낙후되어있었기 때문에 사채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았다. 오죽하면 삼성이나 럭키, 한진 등 최상위권 재벌들조차도 자금 마련하는 데 사채를 동원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을 정도.[11] 당시 기사에서도 이들 시민아파트가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부유층들의 투기 대상이 되면서 일반 무주택 서민들 입장에서는 너무 비싸서 그림의 떡 이라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었다.#[12] 이때는 단독주택에서 방이 남으면 따로 세 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 당시에는 각 가정마다 자녀 네 다섯 정도는 낳던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절인지라 좁은 시민아파트에서 그 정도의 공간은 나오기 쉽지 않았기는 했다. 물론 이 당시 대도시권의 단독주택이라 해봐야 넓찍한 경우는 잘 없었고 대개 20~30평 내외에, 달동네는 10평 이하인 경우도 비일비재해서 시민아파트 정도의 넓이면 못 살 곳은 아니기는 했다.[13] 청와대에서 잘 보이는 아파트는 실제로 있었다. 청와대 북서쪽 인왕산길을 따라 자하문 고개까지 있던 청운아파트였다.[14] 옥인아파트는 예외. 아파트 단지 아래 동네 누하동에 상수도 가압 펌프장이 있었다. 그 주변 모두 혜택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파이프 말단인 옥인아파트를 위한 시설. 덕분에 당시 옥인아파트 수압은 시간대 편차 없이 시내 평지보다 더 좋았다.[15] 사퇴 형식이었지만 여러 정황을 보면 실질적으로 경질 된 게 맞는다.[16] 수색시민아파트 1동이 남아있긴 하나 외벽이 거의 폐허가 된 수준으로 상태가 좋지 않다. 다만 주민들이 거주는 하고 있다. 지방까지 포함하면 부산의 영주시민, 좌천시민 등 조금 남아있긴 하다.[17] 창전 중앙하이츠로 리모델링되었다.[18] 전화국에 신청하면 설치에 몇 년 걸리던 시절이다. 그래서 개인이 전화국에 돈을 주고 회선을 샀는데, 그런 전화는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만 원 가치가 있었으며 골프 회원권처럼 사고팔고 거래가 되었다. 대부분 그런 백색전화를 소유하거나 아파트 자체 교환실을 거친 전화를 썼다. 아파트 대표번호로 걸고 교환원이 나오면 호수를 대고 연결하는 방식. DDD도 없던 때다. 72-11**번이 당시 옥인아파트 대표 번호였다.[19] 당시 촬영 차량이 단지 내로 진입하여 촬영하였기에 구체적인 모습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20] 2009년 촬영분이다.[21] 높이 1.5미터 폭 8미터 정도이다. 당시 1동 1층의 일부로 추정된다.[22] 여담이지만 군사목적으로 1층부분 흔적이 남아있다. 사실상 아파트를 가장한 기관총좌 겸 장갑차 진지. 꽤 오랜시간동안 방치되다가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23] 붕괴사고로 유명한 바로 그 아파트이다. 그후 1991년 남은 4개동이 철거되었다.[24] 가구당 실평수 5~6평의 토끼장으로 악명이 높았다.#[25] 아파트 뒤에 바짝 붙어서 철도가 지나가던 정신나간 구조였다. #. 이 철도는 성북역에서 성동역으로 가는 경춘선 철도였고, 해당 구간이 1971년에 폐선되면서 자연히 해결되었다. 참고로 이 아파트 단지 내에 성북구와 동대문구 경계가 지나갔는데, 샹그레빌로 재건축된 현재에도 3동은 성북구, 나머지 1동은 동대문구에 있다. 이러다 보니 주민들의 불편이 있는 듯. #[26] 아파트가 위치한 토지가 시유지인데다 건설 당시 기록이 유실되어서 재건축에 크게 난항을 겪고 있는 바람에 오래 버티고 있다. 일단 시유지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재건축을 시작한다고 하는데 갈 길이 멀다.[27] 연희로32길에서 북쪽으로 포장도로가 갈라져 안산 중턱을 따라 이어지다가 홍제동 산 33-110 쯤에서 끊기는데, 이 길이 끊기는 곳 근처에 있었다.[28] 하지만 현존하는 제2시민아파트도 2023년에 철거될 예정이다.